지난 5월 마지막 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료들과 제주 여행을 했다. 미션이 있는 워크숍 형식의 여행이었다. 첫째 날 조별 미션을 수행하고 둘째 날은 다시 조를 바꿔 자유여행을 했다. 자유여행은 각자 가고 싶은 곳을 확인해 동선이 비슷한 두어 군데를 묶기로 했다. 조 팀원 중 한 사람이 비자림에 한 번도 안 가봤다며 꼭 넣어달라고 한다. 비자림이야 자주 가도 좋은 곳이니 안 될 이유가 없다.
제주 관광지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장소가 바로 비자림이다.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 보호하고 44만8165㎡의 면적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빼곡하게 자라는 비자림은 사려니숲길과 함께 제주의 걷고 싶은 길로 손꼽힌다.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높이 7m 이상의 비자나무들이 군집해 있다.
재질이 좋은 비자나무는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비자열매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또한 비자림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피로회복을 도와 인체의 리듬을 되찾게 해주는 자연 건강 휴양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비자림 주변으로 월랑봉,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있어 가벼운 등산이나 운동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동료들과 찾은 비자림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사람이 많다. 키 큰 나무들이 사방을 가린 초록의 숲을 걸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을까 잠시 유혹을 느꼈다. 여기저기 추억을 가두려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댄다. 처음 왔다는 조 팀원도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두 해 전 여름, 친구와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한여름 비자림에서 만났던 청춘들이 생각났다.
스물 초반 여학생으로 보이는 그녀들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얀 챙 모자에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역시 비슷하게 생긴 모자에 디자인만 다른 똑같은 색 원피스를 입은 또 다른 그녀가 서로 포즈를 잡고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우리는 만났다. 사실 만났다기보다 초록의 숲에서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들이 너무 화사해서 친구와 내가 걸음을 멈췄다. 사진을 찍어 확인하면서 깔깔대는 그녀들이 눈부셔 멈추고 바라본 것이다.
"사진 찍어줄까요?"
그녀들이 셀카봉을 들고 이리저리 포즈를 잡을 때 내가 물었다. 그들은 "감사합니다" 하면서 또다시 깔깔 웃었다.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웃을 나이지' 우리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녀들과 헤어져 비자림을 걷고 주차장으로 막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흰 원피스는 편한 반바지로, 챙 모자는 야구모자로 바뀌어 있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아니었으면 몰라볼 뻔했다. 그녀들은 비자림에서 기억에 남을 사진을 찍으려고 소품을 미리 챙겨온 거라고 했다. '그랬구나.' 조금 전 초록 숲을 배경으로 서 있던 그들이 꿈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도 나중에 원피스 챙겨 사진 찍으러 오자"
친구가 하는 말에 "그전에 살을 빼야 하지 않을까?" 했더니 그녀는 "어우 야~"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날 우리는 한여름 태양 아래 다시는 갈 수 없는 청춘을 애잔해하며 낄낄거렸다. 우리 앞에서 깔깔거리던 그녀들의 청춘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흰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그들의 젊음을 훔치고 싶었던 것 같다.
흰 원피스가 펄럭이던 곳에서 동료들과 사진을 찍었다. 초록을 품고 높이 솟은 비자나무를 배경으로 어색한 포즈를 지으며. 생각난 김에 친구에게 전화해볼까?
"희정아, 흰 원피스 입고 비자림 가자"
● Exhibition
◇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일정 7월 26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서예가 담당하는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모색하기 위한 전시다. 전통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서’(書)가 근대 이후 현대성을 띤 서예로 다양하게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해방 후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한국 근현대 서예가 1세대 12인의 작품을 비롯해 2000년대 이후 나타난 현대 서예와 디자인 서예 등 다양한 서예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1부 ‘서예를 그리다 그림을 쓰다’ 등 총 4개 주제로 구성해 서예, 전각, 회화, 조각, 미디어아트 등 작품 300여 점, 자료 70여 점을 선보인다.
◇ 백년을 거닐다: 백영수 1922~2018
일정 8월 9일까지 장소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일평생 창작에 몰두하며 독자적인 작품관을 구축해온 백영수 작가의 작품을 만날 기회다. 더불어 작가의 아틀리에를 재현한 공간 및 아카이브 섹션을 구현해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그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부 ‘백영수의 삶을 거닐다’에서는 실제 사용했던 그림 도구와 생전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작가의 삶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2부 ‘백영수의 작품을 거닐다’에서는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 105점을 연대기별로 전시해 작가의 화풍이 정립되는 과정을 확인한다.
◇ My Dear 피노키오展
일정 6월 26일~10월 4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100년 넘게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피노키오’를 소재로 20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대규모 복합 전시다.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회화, 영상, 대형 조형물, 그림책, 팝아트 등 170여 점의 다양한 시각예술 복합 콘텐츠를 한자리에 모았다. 피노키오의 원작자 카를로 콜로디의 희귀 빈티지 도서와 산문 및 오브젝트도 함께 공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예술로 표현하는 ‘에르베 튈레의 사운드 워크숍: OH!’를 비롯해 ‘My Dear 피노키오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 대지의 연금술
일정 8월 30일까지 장소 엄미술관
인류세라는 거대한 전환 앞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과 자연이 건강하게 상호 융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거시적 물음을 던진다. 아울러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양자의 관계를 밝고 이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살펴본다. 이는 인간과 자연은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이며, 서로에게 배우며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성찰에서 비롯됐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아트 디렉터인 제이콥 쿠즈크 스틴슨의 상상력과 기술이 더해진 독창적인 작품들을 통해 생태계를 향한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 Stage
◇ 모차르트!
일정 6월 11일~8월 9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아드리안 오스몬드 출연 김준수, 박강현 등
청년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차르트의 비극적인 삶의 여정을 그린다. 2010년 초연 무대를 꾸민 서숙진 디자이너가 다시 합류해 모차르트의 내면과 천재성을 더욱 극명하게 표현해낸다. 무대, 의상, 소품 등 미학적 요소들 역시 초연 버전을 기반으로 업그레이드해 더욱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 에스메 콰르텟 데뷔 리사이틀
일정 6월 9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출연 에스메 콰르텟(배원희, 하유나, 김지원, 허예은)
런던 위그모어 홀 공연을 비롯해 영국 전 지역 15회에 걸친 대장정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에스메 콰르텟의 국내 첫 공식 리사이틀이 열린다. 이번 공연에서는 진은숙의 현악사중주곡 파라메타스트링, 슈만 현악사중주 1번 등을 선보인다.
◇ 브로드웨이 42번가
일정 6월 20일~8월 23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어린이날이 다가올수록 손주를 위한 선물 고민도 슬슬 시작된다. 평소 장난감은 자주 사줬을 테니, 이번엔 손주 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줄 리빙 아이템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사진 각 사 제공
이탈리아 디자이너 클라우디오 베리니의 유럽 감성을 담은 2층 침대. 침대 하부는 놀이, 학습, 수납 등의 공간으로 연출 가능하다. 모서리 포밍 범퍼 마감과 곡선 디자인으로 안전성을 더했다. 일룸 허비 벙크베드 세트, 87만9000원.
손주를 위한 디자인을 콘셉트로 제작된 키즈 테이블. 상판 일러스트 등을 활용해 창의력을 키워주는 놀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일룸 따볼리네또 키즈 테이블, 39만9000원.
필요에 따라 캐노피형 또는 벙커형으로 쓸 수 있어 유용하다. 속까지 깨끗한 100% 원목을 사용했고, 친환경 수성도장으로 마감했다.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손주에게 제격인 미니 주방. 싱크대 뒷면에 부착된 칠판에 메뉴 등을 적어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꾸며 놀 수도 있다. 이케아 스피시그, 6만9900원.
모든 부품을 어린이에게 맞춰 조절해, 아이가 직접 물건을 꺼내고 집어넣을 수 있다. 작은 손으로도 쉽게 잡게끔 손잡이 대신 구멍을 뚫어 디자인했다. 이케아 스투바 프리티스 12만 원.
공간 확장이 자유로운 엔드리스 시스템의 수납형 책장. 하부에 이동식 수납함이 장착돼 장난감과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일룸 팅클팝 4단 수납형 책장, 16만9000원.
유아의 성장을 고려한 3D 곡선형 설계로 아이가 의자에 바르게 앉는 습관을 잡아준다. 무게 중심이 머리 쪽인 유아 체형을 고려한 디자인으로 안정감을 더했다. 일룸, 폴라 아코 9만9000원.
상단에 후드가 있는 판초 스타일의 부드러운 코튼 타월. 물놀이나 샤워 후 입혀두면 체온을 유지해주면서 남아 있는 물기도 잡아준다. H&M HOME, 후드 타월 2만9900원.
(가격은 각 사 홈페이지 판매 정가 기준)
파주 출판도시의 중심 도로인 은석교 사거리와 응칠교를 지나다 보면 왼쪽으로 눈길을 끄는 웅장한 건축물이 있다. 회색빛의 ‘북카페 플럼라인’은 전면을 유리로 꾸민 외형만으로도 멋스럽다. 건물 왼쪽 300평 규모의 대형 정원에는 하루가 다르게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공간은 민임석 대표가 6년 전 마로니에북스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민 대표의 남편이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곳 출판도시를 산책하면서 힐링을 했다. 그때 이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1층과 2층이 천장까지 통으로 시원스레 트인 공간을 본 순간 멋진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외부의 건축재부터 내부의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80평 정도의 1층과 2층은 민 대표가 카페와 문화 공간으로 운영 중이고, 3층과 4층은 출판사와 디자인 회사에 로줬다. 테이블은 1층과 2층, 야외 파라솔까지 합쳐 다양한 형태로 10여 개 정도가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높은 층고의 깔끔한 실내와 2층으로 올라가는 너른 나무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는 아들의 작품으로 만든 자그마한 책이 디스플레이되 있고, 벽면에도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민 대표는 앞으로 이곳을 더 갤러리처럼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카페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경관은 무척 빼어나다. 저 멀리 심학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골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심학산을 계절별로 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고 말한다. 기자가 찾은 날도 카페 앞에 있는 갈대 샛강에서 커다란 흰색 재두루미 한 쌍이 날아오르며 진풍경을 선사했다.
북카페라는 이름에 걸맞게 2층에는 사진, 예술, 인문학책과 원서들, 기독교 서적을 갖췄다. 1천 권 정도의 책이 비치돼 있는데, 그 앞쪽에 진열된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Annie Leibovitz)의 묵직한 초대형 사진 작품집이 눈길을 끈다. 아늑한 이 공간에서는 소규모 인원이 토론회나 북 콘서트, 강연하기에 좋다. 여기에서 드라마 촬영도 많이 했다고 한다.
“1층은 유리창과 나무 바닥이 소리를 적당하게 울려서 하우스 콘서트를 하기에 제격이에요. 매년 입양 부모들과 미혼모 가정을 초청해 위로 공연도 했어요. 프로가 아니라도 지인들끼리 어우러져서 즐길 수 있는 작은 음악회나 연주회도 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어요.”
민 대표는 틈만 나면 정원을 가꾼다. 요즘 같은 날에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땅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화려한 꽃들은 없지만 자그마한 화초들과 자작나무, 마로니에, 바늘꽃, 덜꿩나무 등이 곳곳에 심겨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보면서 힐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것들을 심었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기에 쏟은 정성을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정원 한쪽에는 눈에 띄는 대형 조형물이 있다. 보스, 복서, 건달 등 독특한 캐릭터를 표현해 금보성아트센터로부터 ‘2019 올해의 창작상’을 수상한 김원근 조각가의 ‘손님’이라는 작품이다. 마치 조폭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성이 꽃 남방을 입고 한 손에 꽃다발을 들었고, 바로 옆에는 정장을 갖춰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다. 작가가 어렸을 때 삼촌이 외숙모와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왔을 때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전한다. 다소 이질적인 느낌의 이 조각상 때문에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바로 뒤편으로는 직사각형의 설계가 독특한 한길사 건물이 있다.
주 메뉴인 커피는 누가 내려도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도록 초고가의 커피 머신을 사용한다. 민 대표가 레몬 청을 직접 만들어 선보인 레몬 에이드도 상큼하다. 커피와 자스민, 루이보스, 히비스커스 등 다양한 음료가 있다. 거리 자체가 한산한 편이어서 언제라도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우리가 추구하는 핵심은 힐링이에요. 손님들이 편안하고 만족을 느끼는 곳이죠. 지금도 동네 사랑방처럼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요. 음악을 좋아하는 손님들은 피아노나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분위기가 아주 좋아요.”
카운터 뒤편으로 고풍스럽게 진열된 원서와 빈티지 소품들은 외국의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중학교에서 윤리 교사로 재직했던 민 대표가 대학 시절에 사용했다는 타자기도 정감이 있다. 상호에 쓰인 ‘플럼라인(Plumb line)’은 ‘다림줄’이라고도 하는데, 공사를 할 때 수직과 수평을 잡기 위해서 사용하는 일종의 기준선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자이다 보니 종교적인 의미가 조금 담겨있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165
구좌읍 세화리 바닷가를 걷는데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엔 기이했다. 물고기가 그런 소리를 낼 리는 없고. 바닷가에 새만 있으니 새소리려니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해녀의 숨비소리임을 알게 됐다. ‘호오이’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잠수하는 여자(潛女) 해녀
제주 해녀(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는 1~2분간 숨을 참으며 수심 10m까지 잠수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등의 해산물을 딴다. 숨 쉴 때는 물 위로 떠올라 재빨리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때 ‘호오이’ 숨비소리가 난다. 해녀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물질을 한다. 산소마스크도 없이 말이다. 해녀가 잠수에 특화된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반복된 물질과 훈련을 통한 결과다.
제주 해녀의 물질 기술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눈치껏 배우고, 훗날 딸에게 가르치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해녀는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해녀가 대장 해녀이며, 해녀 공동체를 이끈다.
오랜 기간 물질을 한 상군해녀는 채취 기술이 뛰어나고, 바닷속 해산물 서식처와 조류와 바람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해녀들이 물질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일기예보보다 상군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할 정도라고 한다. 제주 해녀의 이런 독창적인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녀가 다니던 숨비소리길
해녀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밭일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녀들이 물질하러, 밭일하러, 부지런히 누비던 길을 스토리로 엮은 것이 ‘숨비소리길’이다. 제주올레처럼 바닷가도 지나고, 마을 골목길도 지나고, 밭도 지난다. 이 길을 걸으며 고된 해녀의 삶을 짐작해보고, 봄기운 무르익은 들판과 비췻빛 바다를 만끽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쉬워 아껴 걸었더니 한나절이 훌쩍 지났다.
숨비소리길의 출발점인 해녀박물관은 제주 여행 필수 코스다. 제주 해녀의 역사·생활풍습·세시풍속·무속신앙·해녀 공동체 등의 자료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사까지 정리돼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바다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3층 전망대에 오르자 비현실적인 빛을 뽐내는 세화 바다와 세화리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뜰에 있는 해녀상 뒤쪽으로 가, 숨비소리길 첫 이정표를 찾았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세워져 있어, 세상없는 길치이지만 걷는 내내 두렵지 않았다. 해녀박물관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세화 축구장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자리한 ‘삼신당 여씨할망당’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돌집 안에 여씨할망신위를 모셔두었다. 제주에서는 할망당, 해신당을 흔히 볼 수 있다. 할망당을 뒤로하고 면수동마을회관 앞을 지날 무렵, 아름드리 팽나무, 네 그루에 눈길이 갔다. 왠지 인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제주 사람들은 팽나무를 ‘폭낭’이라고 부른다. 여름 태풍과 겨울 찬바람에도 견디는 폭낭은 마을 쉼터 역할을 한다.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밭담’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하도리 별방진에 이르는 약 2km 구간에는 무, 당근, 보리 등을 심어놓은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잔잔한 바다처럼 보였다. 세로선보다 가로선이 많은 풍경에 맘이 평화로워졌다. 파스텔 빛 바다도, 진초록 보리밭도, 노란 유채밭도, 검은 현무암 밭담도 모두 나지막이 가로누워 있다. 이 구간이 ‘밭담길’이다.
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돌을 쌓아 밭 경계로 삼았는데, 이를 밭담이라고 한다. 밭담을 쌓은 뒤로 토지 분쟁이 사라지고, 가축이 농작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줄었으며, 농경지 면적이 늘어 제주 농업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담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밭담은 제주도의 전통문화 산물로 평가받아, 국가중요농업유산과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세화리에서 하도리로 이어지는 이 밭담길은 바다를 오가며 생계를 꾸몄던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평상시에는 밭일이나 집안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 알고 보면 고된 물질도 부업일 뿐이었다.
별방진 품에 안긴 하도리
밭담길을 지나 하도리 골목길을 지나면 별방진이 나온다. 별방진은 마을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에서 이름을 땄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타원형이다. 별방진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별방진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하도리 마을이,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하도리 포구가 마주보고 있다. 별방진 안에 초록, 빨강, 파랑 지붕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 속 그림 같다. 하도리 마을이 유난히 평온해 보이는 건 태풍도 왜적도 다 막아줄 것 같은 별방진이 있어서가 아닐까.
별방진 이후로는 줄곧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제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에 그물처럼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원담과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던 불턱들을 차례로 만났다. 제주 해안에는 마을마다 서너 개의 불턱이 있다. 구좌읍에 해녀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어, 숨비소리길 구간에서만 서동 불턱, 보시코지 불턱, 모진다리 불턱, 생이덕 불턱 등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고, 1985년 전후로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면서 불턱의 역할은 줄었다.
비췻빛 바다가 매력적인 세화리
세화리 바닷가에 이르자 해녀와 어부들이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갯것할망당’이 눈에 띄었다. 제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해신당에서 용왕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음력 1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약 두 달 동안 34개 어촌계에서 해녀굿을 봉행한다. 해녀굿 중 바람신인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영등굿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
갯것할망당 옆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를 가둬놓은 ‘도구리통’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용천수 둘레에 네모난 담을 쌓고, 식수를 뜨거나 빨래를 하던 곳이다. 수도 시설이 잘돼 있는 지금도 물통에서 채소를 씻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도구리통을 지나면 곧 해녀박물관이다. 이미 둘러봤으므로 세화해변까지 이어 걸었다. 제주도에서 물빛 좋기로 소문난 곳이 협재, 금릉, 함덕, 우도 등인데, 요즘은 세화를 추가해 손꼽는다. 세화 바다는 협재나 함덕처럼 번화하지도 않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감성 카페와 책방, 소품 가게들이 고요히 자리한 사랑스러운 곳이다.
◇ 주변 명소 & 맛집 ◇
세화민속오일장
세화해변 끄트머리에 자리한 세화민속오일장은 날짜 끝자리에 ‘0’ 또는 ‘5’가 붙는 날 장이 선다. 규모는 작지만 채소, 곡식, 수산물, 젓갈, 생활용품, 간식거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다 판다. 낭만적인 뷰는 덤이다. 시장 안에서도 세화 바다가 보인다. 이곳 장터는 1930년대 초 하도리·종달리·세화리·연평리·시흥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장 앞에서 플리마켓 벨롱장이 열린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500-44
카페록록
하도리 바닷가에는 전망 좋은 카페가 늘어서 있다. 이 중 카페록록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시원한 바다와 돌담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내 곳곳에 둔 초록 식물이 온실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인기 포인트. 푸딩처럼 말캉한 에그타르트가 별미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서문길 41 / 10:30~18:30 /카페라테 6000원
연미정
세화리에는 전복돌솥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두 곳 있다. 연미정과 명진전복이 그 주인공. 명진전복은 TV에 출연한 덕에 늘 대기 줄이 길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명진전복을, 가성비를 따진다면 연미정을 선택해볼 것. 전복돌솥밥을 주문하면 1인분이라도 작은 고등어 한 마리와 약간의 활어회가 따라 나온다. 반찬 맛은 평범한데, 전복 내장까지 넣어 지은 돌솥밥이 쫀득하고 구수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평항로 14 /09:00~21:30 매월 첫째, 셋째주 수요일 휴무 /전복돌솥밥 1만5000원
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 안팎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사계의 문양을 저마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는 정원수들의 동향. 야트막한 뒷산 위에 얹힌 하늘의 표정. 보란 듯이 있는 볼 것들이 많다. 충남 당진시 순성면에 있는 아미미술관이다.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남편 박기호(65, 회화)가 관장으로, 아내 구현숙(58, 설치미술)이 큐레이터로 손발을 맞춘다. 애초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단다. 지난 1995년, 그저 작업 하나만 마음껏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폐교를 빌려(나중엔 아예 사들였다) 둥지를 틀었다. 폐교의 환경은 이상적이었다. 공간은 헐겁도록 널찍하고, 어지러운 잡사는 침범 못할 시골 산자락이니 창작을 능사로 삼을 만한 환경이지 않은가.
이후 부부는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미술만 작업은 아니었다. 퇴락한 교사를 단장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원형을 살려둔 채, 가필처럼 조심스레 부분적인 보수만을 한 건, 학교 건물에 서린 유서(由緖)를 존중해서였다.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을, 시간 속에서 쌓여 이제는 숨결로만 남은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그 애틋한 가치들을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폐교
외부 조경에도 정성을 쏟았다. 바지런히 수백 종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꾼 건 식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폐교 공간에 미감을 부여하려는 뜻도 컸다. 교장 관사로 쓰였던 한옥의 보일러 시설을 뜯어내고 구들장을 들이는 작업도 부부가 손수 해치웠다. 먼 데서 주워온 돌들로 쌓은 담장엔 한 드럼 이상의 땀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단장에 몸이 닳도록 힘을 쓰고 시간을 썼다.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모롱이도 부부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보낸 15년. 어느덧 알아주는 눈들이 많아지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드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신역(身役)을 마다않고 공간을 꾸민 건 오직 부부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유공간으로 개방할 경우엔 더 가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역량 있는 청년작가들을 밀어줘야겠다는 포부도 옹골찼다.
그렇게 아미미술관이 태동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당진과 충남 지역을 넘어 전국적 명소로 부상했다. 부침이 없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한 결과로. 근래 5년여 사이에 다녀간 유료 관람객 누적 인원은 자그마치 30여 만 명. 지역 미술관이, 그것도 시골의 폐교 미술관이 거둔 성과가 놀랍다. 자본력을 펀치로 약자를 링에 눕히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미술관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재력으로 무장한 전문화랑,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공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대형 미술관이 결국은 독주한다. 화가 부부가 맨몸을 우직하게 던져 가꾼 아미미술관이 그 틈새에서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이 무슨 야무진 진격인가.
청춘들에겐 ‘취향 저격 핫플’
아미미술관이 지닌 힘과 매력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은 산기슭 자연 속에 자리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부부가 공들여 가꾼 정원마저 아름다워 한결 순수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도시의 화려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연미. 그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자연 속에서 얻는 담백한 쾌감보다 개운한 게 다시 있던가.
원형을 해치지 않은 지성적인 개량으로 근대 건축의 고태(古態)를 고스란히 유지한 교사, 즉 전시관의 멋과 맛은 아마도 이 미술관이 보유한 최대 자산이다. 쓸모를 잃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이 인간의 혜안을 만나 부활, 다시금 쓸모를 되찾은 특유의 사례에 속할 건물이지 아니한가. 이 명물에 우련히 뒤엉긴 건 시간이다. 죽어라 내빼기만 하는 게 시간이지만(시간은 허무주의자?), 여기에선 아쉬워 차마 다 훌쩍 떠나지 못했나. 잔영으로 남은 시간의 형적인가, 무늬인가. 노랑 병아리처럼 동동거리며 복도 마루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룽거린다. 그립고 애잔하다, 아, 옛날이여!
우수 절반, 향수 절반으로 짜인 그리움이 가슴을 친다. 학동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의식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옛날의 교실에 왔거들랑, 그대여 맘껏 추억에 잠기라! 교실이 두런거리는 소리의 뜻이 그렇다. 중장년 관람객의 거의 대부분은 어쩌면 추억을 움켜쥐기 위해 아미미술관을 찾아올 게다. 젊은 관람객에겐 근사한 빈티지 컬렉션처럼 느껴질지도. 근대와 모던이 결합된 이채를 오래 남기기 위해 그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자랑할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만나 아미! 그러고선 다시 오기도 한다.
화가 부부에 따르면, 아미미술관이 단박에 부상한 건 순전히 젊은 디지털 유목민들 덕분이다. 그들은 미술관의 거의 모든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건물의 내·외벽은 물론, 외부 정원 공간의 다양한 사물들에, 하다못해 나뭇가지에조차 모빌이나 조각 소품, 에스키스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해둔 효과가 그렇게 크다. 어디건 포토 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청춘 군상들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올렸고, 이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단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홍보대사들이 대거 출현한 셈이다. 고즈넉한 운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좀 과한 데커레이션으로 느껴질 테다. 청춘들에겐 ‘취향저격 핫플’로 많이 알려졌지만.
기획전시전이 열렸다. 부부는 어떤 작가를 선정하느냐에 따라 미술관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중을 다해 매번 참여 작가를 엄선한다. 아내가 큐레이터이지만 또 한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첨단 트렌드의 작품을 하는 유망한 젊은 작가를 주로 고른다. 현재 진행되는 4인전의 타이틀은 ‘Selfie시대의 자화상展’이다. 셀피족(스스로 자신의 사진을 찍길 즐기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작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김태헌의 가벼운 소품 한 점이 재미있다. 꽃 속에 들어간 행복한 사내를 그려놓고, ‘나는 거짓말쟁이 화가’라 화폭 안에 써넣었다. “알고 보면, 나 나쁜 놈이야! 근데 넌?” 작가는 그리 묻고 있다. “나? 나라고 별수 있음?” 관람객은 그리 답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보신책이라 여기는 내 안의 위선, 가식, 내로남불! 작가는 그걸 까발리고, 관람자는 뭔가 켕기면서 ‘나’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속된, 너무도 속된 외부로만 편재된 눈을, 두뇌를, 욕망을 내부로 돌린다. 잠시 잠깐이나마. 미술관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을 환기시킨다.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살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너무 가르치려 드는 그림은 따분하지만.
아미미술관장 박기호
바닷가 소금창고, 통째 예술로 바꾸겠다
지난 1983년, 박기호 관장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계기가 돼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아내 구현숙 역시 영국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파리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과 동시에 귀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여기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다. 당진은 박 관장의 고향이다.
널찍하고 천장 높고. 그는 그런 작업 공간을 찾다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공간을 얻었으니 작업에의 몰두가 깊었을 게다. 폐교를 다듬는 데에도 비지땀을 쏟았다. 4600평 부지 안에서 폐허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교사와 부속건물, 그리고 운동장. 이 모든 걸 쓸 만하게 바꿔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청소를 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단다. 방독면을 쓰고 천장을 털어냈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트럭으로 열 대 분량이었다. 쥐들의 낙원이기도 했다. 교실 한 칸에 꾸민 침실의 커튼을 타고 부산히 오르내리는 쥐들로 잠을 설친 밤도 많았다. 쥐보다 더 바삐 움직인 건 박 관장이었다. 다듬고 고치고 칠하느라고. 그러니까 청소부이자 수리공, 목수이자 페인트공으로도 살았던 셈이다. 어디서 이런 뚝심과 요령이 나왔을까.
“파리로 유학을 갈 때 1원 한 장 지닌 게 없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고암 이응로 화백께서 쓰던 작업실을 한동안 얻어 쓰는 행운이 있었지만, 숙식 문제부터 늘 곤란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리고, 알바 삼아 집 고치는 업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때 공사판에서 익힌 기술을 폐교 수리에 활용했다.”
“당신은 화가다. 폐교 단장에, 그리고 미술관 운영에 힘을 너무 소모하는 건 아닌가? 그림밖엔 난 몰라! 화가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는데.”
“캔버스 안의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긴 세월 동안 실로 많은 작업을 해왔다. 공간 곳곳을 디자인하고, 손수 가구를 만들고, 돌담을 쌓고, 심혈을 기울여 조경을 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인테리어라 규정할지 모르지만, 최상의 디자인이 가미된 작품으로 보길 바란다. 관점을 넓히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상에 이미 예술이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던 마르셀 뒤샹. 그는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도 예술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예술이라 했다. 박 관장이 뒤샹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관점을 확장하고 틀을 깨는 거. 그게 자유로운 삶이자 예술이라는 얘기이겠지. 그는 요즘 오브제로 사들인 해변 마을의 소금창고를 통째 작품화하기 위해 구상 중이다. 폐어선 한 척도 같은 용도로 이미 접수해뒀다.
매일 아침 눈뜨고 잠드는 공간. 집이다. 집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시니어들에게 딱 맞는 인테리어 포인트를 찾아봤다.
사진 각 사 제공
최근 인테리어 업체들과 전문가 집단이 2020년을 대표할 인테리어 트렌드를 내놓았다. 각자 추구하는 방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된 의견이 있다. 보이지 않았던 공간의 재발견과 돌, 식물 등 자연에서 해답을 찾은 인테리어. 지금까지는 미니멀리즘, 즉 ‘비움’에 비중을 뒀다면 앞으로는 창의적이고 과감하고 실험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맥시멀리즘’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자연에서 찾은 트렌드 컬러
글로벌 트렌드 조사기관인 ‘WGSN’은 올해 트렌드 컬러로 ‘네오민트’를 선정했다. WGSN의 발표는 색상 선정을 넘어 사회 기류도 함께 반영했다. 최근에는 이 컬러에 해당하는 다양한 상품이 주목받고 있다. 자연에서 찾은 색상인 ‘그린’(녹색)과 연결 지어 식물이나 자연에서 유래한 소품, 친환경 인테리어에 안전성까지 담은 제품들이다.
LG하우시스는 시트 바닥재인 ‘은행목’과 ‘뉴청맥’에 최근 트렌드를 반영했다. 실내 낙상사고를 줄여주는 안티슬립 기능을 넣어 안정성도 챙겼다. 지난해 5월 출시된 ‘엑스컴포트’는 바닥재 속에 고탄성 2중 쿠션층을 적용했다. 푹신한 상부층과 탄성력이 높은 단단한 하부층이 보행 시 충격을 줄여주고 발이 푹 꺼지지 않도록 해준다.
동화자연마루의 ‘나투스진’은 찍힘과 긁힘, 수분 침투, 열에 의한 변형 때문에 발생한 소비자 불만을 해소한 바닥재다. 포름알데히드 성분이 첨가되지 않은 신소재 나프(NAF)를 적용했다. 또한 국내산 소나무 100%를 원재료로 생산한 친환경 소재 E0 등급의 ‘동화에코보드’를 사용해 피부자극을 최소화했다. 안정적인 보행과 건강을 생각한 이들 제품은 시니어 세대에게 유용한 인테리어 제품이다.
실내나 집 안에 정원을 꾸미는 이른바 ‘홈가드닝’도 눈길을 끈다. 남는 공간을 작은 화분으로 장식하는 게 인테리어 포인트. 롯데주류는 발코니에 정원을 꾸미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 행사의 하나로, ‘서울숲 재즈페스티벌 2019’에서 반려나무 입양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다. 또 롯데마트도 ‘초보자도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수경재배 식물’을 판매 중이다.
조경 전문업체인 조경나라 관계자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소나무, 율마, 에메랄드그린 등과 함께 야생화를 심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맥시멀리즘 인테리어 대세
크고 작은 인테리어 소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집 안을 가구나 조명, 인테리어 소품으로 꾸미는 ‘홈퍼니싱족’도 늘었다.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까사미아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을 위해 프리미엄 내추럴 스타일링을 제안했다. 내추럴 스타일은 자연 소재의 질감과 색감을 최대한 살려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한 공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까사미아의 ‘라메종’ 컬렉션은 자연에서 온 소재와 절제된 장식, 간결한 실루엣을 자랑한다. 원목 계열의 고급 하드 우드, 천연 소가죽, 포근한 컬러의 패브릭 등을 소재로 사용하고, 핸드메이드 공법으로 품격을 더했다. 또 ‘토페인’ 소파는 프리미엄 가구의 인기에 힘입어 3~4인 소파가 ‘ㄱ’자, ‘ㄷ’자 등으로 재탄생했다. 천연 아닐린 가죽을 100% 수작업으로 가공해 부드러운 감촉과 자연스러운 색감을 살린 프리미엄 소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테리어 소품 중 하나인 벽난로는 위험성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안전성과 디자인을 겸비한 벽난로가 출시돼 인기를 끌고 있다. 덴마크에 본사를 둔 왐 벽난로는 투박한 형태에서 벗어나 세련된 디자인으로 진화해 집 안 인테리어를 위한 멋진 도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자동연소 조절장치를 내장해 안전성을 높이고 장작 소모는 40% 줄였다.
집 안 분위기를 바꿔주는 조명도 운치를 더해주고 개성 있는 인테리어를 연출한다. 최근에는 물방울무늬의 샹들리에보다 펜던트 형이나 직선 위주의 깔끔한 스타일의 조명기구가 인기 있다. 미국의 조명 디자인 브랜드 애퍼래터스 스튜디오의 제품은 차별성 있는 디자인에 디테일하고 고급스러운 마감으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오래 묵혀둔 반닫이도 올해 인테리어 시장에서 유행할 대표 앤티크 가구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과 그 시간만큼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데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박경숙 동연갤러리 관장은 “가치가 남다른 만큼 제대로 된 이해가 있는 사람들만 앤티크 가구를 소화할 수 있다”면서 “적게는 100만 원에서 억대를 호가하는 고가의 제품도 있으니 차근차근 공부한 뒤 접근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웰컴 투 시그나기(Sighnaghi)!”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은 객실이 아닌 테라스였다.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녹음 속 밝은 산호 빛 마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엽서 같았다.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의자에 앉으니 주인아저씨가 수박과 와인을 가지고 왔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와인을 한 잔 따른 후 건배 제의를 했다. 트빌리시 동쪽의 카헤티(Kakheti) 주에 있는 ‘시그나기’. 인구가 3000명 정도 되는 이 작은 마을에서 본 첫 광경이다.
조지안의 크베브리 와인 사랑
조지아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와인을 마시느라 신이 부르는 자리에도 늦었다는 우화를 말하면서 신도 포기한 와인 사랑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조지아를 지배할 때 조지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포도나무를 자르는 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조지아인들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인 와인은 ‘성스러운 액체’로 불릴 정도로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도원에서도 와인을 만들었고, 아직도 몇몇 곳에서는 와인을 판매한다. 그레미(Gremi) 수도원에서 담근 레드 와인을 마셔보니 선입견 때문인지 일반 와인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향이 마음의 무늬를 더 나긋나긋하게 해주었다.
조지아 와인은 56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포도 품종에서 생산된다. 3km마다 기후가 달라서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지역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떤 와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면 ‘치난달리’(Tsinandali), ‘사페라비’(Saperavi),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라벨이 붙은 와인을 선택했다. 가격에 비해 맛은 일품이었다.
조지아 와인의 주 생산지는 카헤티(Kakheti) 주. 조지아 와인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코카서스 산맥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분지에 알라자니(Alazani)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다 보니 포도나무를 비롯해 과일나무들이 잘 자란다. 카헤티 주의 중심 도시 시그나기와 텔라비(Telavi)도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지점 두물머리처럼 조지아에도 쿠라 강과 아라그비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도시가 있다. 조지아 초기 왕조인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므츠헤타’(Mtskheta)다. 지금은 수도가 트빌리시이지만 아직도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스베티치호벨리(Svetitskhoveli) 성당이 이곳에 있어 조지아 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다. 이 마을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즈바리(Jvari) 수도원 앞 언덕에 앉아 바라본 므츠헤타는 그리움이 안개처럼 차분하게 깔려 있는 도시였다.
“조지아 와인은 이렇게 마시는 거야”
오래된 역사만큼 와인을 마시는 조지아만의 전통문화가 있다. 술자리에는 반드시 덕담과 건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타마다’(Tamada)라고 부른다. 타마다가 ‘가우마조스’(cheers)를 외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긴 덕담을 한다. 건배 제의 내용은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신께 감사하고, 다음 잔에서는 평화를 기원하며, 그다음 잔에서는 성 조지를 위해, 그다음 잔에서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 이렇게 이어지다 보면 ‘옛날에 헤어졌던 애인을 위해’ 건배 제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술자리에서 나온 건배 내용에 대해 질투를 하면 안 된다. 보통 기쁜 날은 26잔, 슬픈 날은 18잔의 와인을 마시며 술자리와 건배가 이어진다.
또 한 가지,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술을 그만 마시고 싶으면 타마다에게 말해 벌주를 받으면 된다. 이때 사용하는 잔이 ‘깐지’(Kantsi)다. 염소나 소의 뿔로 만든 전통 와인 잔으로 조지아 어느 곳에 가도 기념품 판매점에서 볼 수 있다. 이 잔은 뿔로 만든 잔이라 세워지지 않는다. 벌주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원샷을 해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도시 ‘시그나기’
달콤한 포도 향이 바람에 실려 퍼지는 작은 도시 시그나기에 신의 물방울만 있는 건 아니다. 18세기에 지은 요새, 돌 성벽, 주황빛 마을은 해발 790m 높이의 자연과 함께 시그나기를 동화 같은 마을로 만들었다. 아무 목적 없이 마을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다. 이 마을에서는 누구라도 천사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에서는 365일, 24시간 내내 결혼식과 혼인신고가 가능하다고 한다. 흔히들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고 말한다. 마음 예쁜 사람들이 사는 그림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나기에는 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곳 출신인 조지아의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의 사랑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가난했던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림과 집을 팔아 장미를 사서 그녀가 사는 집 앞을 꽃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났고, 그에게는 그녀를 그린 그림만 남게 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 세상에 알려졌고, 1980년대 러시아 가수가 ‘Million Alykh Roz’라는 제목의 노래로 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나라에서 가수 심수봉이 ‘백만 송이 장미’로 번안해 부른 곡이다.
시그나기에서 가까운 곳에 카헤티 주의 주도인 텔라비가 있다. 텔라비는 작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조지아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튜세티 국립공원’(Tusheti National Park)으로 가는 전초 기지 역할도 한다.
감동의 폴리포니 공연
도로 양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포도밭을 보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조지아의 아름다운 연녹색 매력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길가에 서 있는 와이너리 안내 간판은 여행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카헤티 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오래된 마을 크바렐리(Kvareli)의 ‘카레바’(Khareba) 와이너리로 갔다.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었다. 조지아를 종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규모와 콘텐츠를 잘 갖추고 있었다.
휴식공간으로 보이는 건물 앞 정원은 크베브리 황토 항아리를 비롯해 각종 소품과 조형물이 꾸며져 있었다. 건물 안은 와인 저장고, 시음 및 판매시설, 와인 관련 도구 전시실, 와인 제조 설명 프로그램 진행장, 기념품 판매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와인 체험을 하고 나오니 로비에서 5명의 남성이 환상적인 다성 창법의 폴리포니 공연을 했다.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조지아의 노래는 현대 음악보다 훨씬 관념적이다”라고 극찬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매혹적인 보컬의 다성 창법이 들려주는 하모니가 장엄하게 가슴을 울렸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영혼의 울림 같았다. 환상적인 조지아 와인만큼이나 황홀한 폴리포니의 벅찬 감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그나기에서 가볼 만한 곳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 조지아 왕비의 병을 치료하면서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생을 마감한 수도원이다. 수도원 밑 돌담길을 따라 내려가면 ‘니노의 샘’이 나온다. 지금도 치유 효험을 믿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시그나기 성곽 길(Sighnaghi Wall)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아치형 돌문을 지나면 성곽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아침과 저녁 시간에 성곽 길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환상적이다.
로라시빌 도로(Lolashvili St.) 시그나기 마을 정상부터 산을 타고 구불구불 내려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카헤티 지방의 광활한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
알아두면 좋은 Tip
텔라비에서 트빌리시 혹은 므츠헤타로 갈 경우, 혹은 반대의 경우 ‘38번’ 도로인 ‘곰보리 패스’(Gombori Pass)를 이용하길 권한다. 해발 2000m의 산을 넘으며 한없이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야생화에 푹 빠질 수 있다.
음식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방랑 셰프 임지호님의 자연주의 요리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서 많이 보고 듣고 하던 터였다. 영화 시사회 초대를 받고 무조건 가기로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뒤숭숭해도 잠깐 숨통 트여보자 싶었다. 지뢰를 피하듯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조심조심 동대문 메가박스까지 다녀온 것이 두 주 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밥정이든 요리 이야기든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저 영화 속 음식들을 들여다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꺼내본다.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었다. 밥정이라는 말도 정겨웠고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은 집에서 밥 한 끼 준비하기가 귀찮을 지경이 됐지만' 한때는 요리의 즐거움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으니까.
밥정은 방랑 식객으로 잘 알려진 임지호 셰프의 이야기다.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요리 철학을 담기 위해 박혜령 감독이 10년에 걸쳐 만들어낸 82분짜리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된 수작이기도 하다.
방랑 셰프 임지호 선생의 자연주의 요리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떠돌다가 지리산 마을에서 만난 김순규 할머니, 세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밥정으로 표현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게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임지호님은 말한다. 들판에 풀 한 포기나 바닷가에 떠다니는 해초만 보아도 맛있는 밥상 차릴 생각에 손길 닿는 대로 채취해서 담는다. 자연의 재료로 두툼하고 거친 손이 만들어 낸다. 흙냄새 바다 냄새나는 음식에 담긴 정이 감동의 맛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 속에 변화하는 사계절의 풍광을 보는 맛도 남다르다.
시골길을 따라 걷거나 깊은 산골 마을이나 바닷가를 따라 방랑하는 셰프.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치는 들판에서 식재료를 얻는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물, 이끼, 잡초, 바다풀로 마을 어른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다. 솔방울과 나뭇가지가 멋진 소품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임지호 셰프는 강조한다.
그는 어느 날 안동댐 주변을 지나가는데 이 길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엄마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생모가 김씨라는 것밖에 모르고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이 길을 갈 때면 눈물이 난다는 말에 그분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2009년 지리산으로 식재료를 구하러 떠났다가 산골 마을의 텃밭에서 나물을 뜯던 김순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밥을 지어드리거나 과자와 사탕을 전해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7~8년 지내오다가 어느 날 김순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세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된 마음을 표현하는 108가지의 자연친화적인 음식을 3일 동안 장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할 수밖에 없다.
밥과 사랑과 그리움은 닮았다. 거기엔 누군가와 이어지는 따스함과 은근한 속정이 함께 한다. 결국엔 그것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데 혹시 이것을 밥정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잔뜩 겉멋 부린 요란한 영화들 속에서 냇물에서 세수만 한 듯한 순하고 담백한 영화,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다만 허기짐을 채워주는 따뜻함이 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있는 듯 평화롭다.
빨리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 지치지 말고 서로 마음 모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봄볕 좋은 날 속정 깊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마음 놓고 밥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자녀의 독립 이후부터 시니어의 주거환경에는 변화가 생긴다. 아이들과 살던 집에서 부부 둘이 지내기도 하지만, 사별이나 졸혼 등으로 혼자 살거나, 자녀 세대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노후에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주거공간, 어떻게 계획하는 것이 좋을까?
도움말 서지은 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니콜라스 욘슨 이케아 코리아 커머셜 매니저,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사진 제공 이케아 코리아
◇ 1인 ‘편리와 안전’ vs 다세대 ‘융합과 프라이버시’
[1인 가구] 1인 가구의 경우 인테리어는 자기 마음껏 꾸미면 되지만,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것은 편리성과 안전성이다. 한적한 외곽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는데, 사실상 편리하고 안전한 곳은 도심이다. 대형 병원이나 각종 편의시설이 가까워 위기 대응이 빠르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생겨나는 노인 대상 아파트의 경우 도심에 짓는 사례가 많아졌다. 또, 다양한 편의 시스템이 접목된 고가의 소형 아파트나 오피스텔, 원룸 등도 주목받는데, 그 활용도가 관건이다. 실제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많아도 사용법을 몰라 무용지물로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Tip+ 편리하고 안전한 ‘스마트홈 기기’ 활용하기
혼자 살다 보면 만일의 사고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 없다. 긴급 상황 시 ‘원 터치’(one touch)로 가족 또는 지인에게 긴급 메시지를 전송해주는 SOS 버튼이나 사람의 움직임을 파악해 사이렌이 울리는 동작감지센서 등 스마트홈 기기를 적극 활용해보면 어떨까? 대표적으로는 LG U+ ‘스마트홈 패키지’, SK 브로드밴드 ‘지키미 SOS 버튼’, KT ‘기가 IoT홈’ 등이 있고, 월 1만~2만 원대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괜찮다면 스마트 홈CCTV 등을 설치해 가족과 공유하며 안전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다세대 가구] 다세대 가구는 하드웨어적(건축물의 구조나 구성 등) 측면과 소프트웨어적(거주자 사이의 규칙 등) 측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가족끼리 충분히 논의해 교집합을 찾고 이를 우선순위로 주거지를 찾는다. 이때 개인 공간보다는 공용 공간(거실, 주방, 욕실)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다. 가령 주방을 자주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방 위치를 정하거나, 여분의 주방이 필요한지 등을 고려한다. 아울러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한 공용 공간 사용 규칙을 만들고 공과금 문제와 가사 역할 분담에 대해서도 미리 상의한다.
Tip+ 다세대 가구 욕실 딸린 안방, 누가 쓰는 게 좋을까?
다세대의 경우 종종 안방 욕실을 누가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의견 차이를 보이곤 한다. 거동이 불편하지 않다면, 가급적 부모 세대와 손주들이 함께 공용 욕실을, 자녀 세대가 안방 욕실을 사용하길 권한다. 활동량이 적은 시니어가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 공용 공간 이용이 줄어 자칫 집 안에서 소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아이와 노인은 안전성 측면에서 안전하게 설계된 욕실을 함께 이용하는 게 좋다. 이때 미끄럼 방지 타일이나 손잡이 등을 설치하면 도움이 된다.
◇ 자녀 출가 후 주인 없는 방 vs 모두가 함께 쓰는 공유 공간
[1인 가구] 자녀가 독립하며 쓰임새를 잃어버린 방은 자칫 주거생활의 활력을 떨어뜨리거나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집의 규모를 줄여 원룸이나 스튜디오형 오피스텔을 찾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주거 형태이기에 생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딱히 이사 계획이 없다면, 남은 방을 취미를 살리거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해줄 공간으로 꾸며보는 것도 방법이다.
Tip+ 나만의 홈 컬렉션(갤러리)
남는 공간을 갤러리처럼 활용하면 다채로운 주거공간이 된다. 컬렉션을 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색상별로 아이템을 모으거나, 공간을 한 종류의 장식품으로만 진열하는 것이다. 비슷한 소품은 개별 진열보다 모아놨을 때 더 큰 미적 효과를 발휘한다. 투명한 선반이나 유리도어 수납장 등을 사용하면, 물건을 한층 더 돋보이게 연출할 수 있다.
Tip+ 홈 트레이닝 피트니스 룸
요즘처럼 바이러스나 미세먼지 등으로 바깥 활동을 자제하면 기초대사량과 근육량이 줄어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여유 공간에 홈 피트니스룸을 만들면 어떨까? 자칫 운동기구들로 바닥이 어질러지거나 공간이 좁아질 수 있는데, 이때 벽면 선반을 설치하면 효율적이다. 선반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스피커 등을 올려놓고 헬스 동영상을 보며 동작을 따라 할 수 있다. 브래킷 사이 거리를 좁게 설치해 요가매트를 수납하거나, 후크를 달아 훌라후프, 밴드 등을 걸어도 좋다.
[다세대 가구] 함께 쓰는 공유 공간으로 ‘거실’을 꼽을 수 있지만, 대부분 텔레비전을 볼 때만 모여 앉아 있을 뿐 특별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함께 살면서 교류가 부족하면 집 안 분위기가 무겁고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최근에는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고 대신 책장을 두어 북카페처럼 공간을 꾸미는 등 가족 간 융합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테리어를 시도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Tip+ 가족 전용 홈 시네마
탁 트인 공간이 있다면 가족을 위한 전용 극장으로 꾸며볼 수 있다. 가정용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실내 한쪽 벽면이나, 옥상·마당에 행거와 흰 천 등을 이용해 스크린을 만들어본다. 편안한 의자와 분위기 있는 조명, 텍스타일까지 준비한다면 더욱 아늑한 공간이 된다. 영화관처럼 상영시간표를 만들거나 팝콘 등을 즐기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Tip+ 휴대기기 충전 스테이션
식구가 많으면 각자의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등 휴대기기 충전기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간혹 제품에 맞는 충전기를 찾지 못해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방마다 수납공간을 들쑤시다 보면 쓰임새가 모호한 전선이나 어댑터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집 안은 어수선해지고 이름 모를 물건은 쌓여간다. 거실이나 공유 공간 한 편에 각종 충전기기를 모아놓으면 이러한 불편을 줄일 수 있다. 때때로 가족이 모여 쓸모없는 충전기나 전선 등을 정리하는 시간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