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좌읍 세화리 바닷가를 걷는데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엔 기이했다. 물고기가 그런 소리를 낼 리는 없고. 바닷가에 새만 있으니 새소리려니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해녀의 숨비소리임을 알게 됐다. ‘호오이’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잠수하는 여자(潛女) 해녀
제주 해녀(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는 1~2분간 숨을 참으며 수심 10m까지 잠수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등의 해산물을 딴다. 숨 쉴 때는 물 위로 떠올라 재빨리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때 ‘호오이’ 숨비소리가 난다. 해녀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물질을 한다. 산소마스크도 없이 말이다. 해녀가 잠수에 특화된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반복된 물질과 훈련을 통한 결과다.
제주 해녀의 물질 기술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눈치껏 배우고, 훗날 딸에게 가르치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해녀는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해녀가 대장 해녀이며, 해녀 공동체를 이끈다.
오랜 기간 물질을 한 상군해녀는 채취 기술이 뛰어나고, 바닷속 해산물 서식처와 조류와 바람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해녀들이 물질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일기예보보다 상군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할 정도라고 한다. 제주 해녀의 이런 독창적인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녀가 다니던 숨비소리길
해녀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밭일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녀들이 물질하러, 밭일하러, 부지런히 누비던 길을 스토리로 엮은 것이 ‘숨비소리길’이다. 제주올레처럼 바닷가도 지나고, 마을 골목길도 지나고, 밭도 지난다. 이 길을 걸으며 고된 해녀의 삶을 짐작해보고, 봄기운 무르익은 들판과 비췻빛 바다를 만끽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쉬워 아껴 걸었더니 한나절이 훌쩍 지났다.
숨비소리길의 출발점인 해녀박물관은 제주 여행 필수 코스다. 제주 해녀의 역사·생활풍습·세시풍속·무속신앙·해녀 공동체 등의 자료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사까지 정리돼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바다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3층 전망대에 오르자 비현실적인 빛을 뽐내는 세화 바다와 세화리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뜰에 있는 해녀상 뒤쪽으로 가, 숨비소리길 첫 이정표를 찾았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세워져 있어, 세상없는 길치이지만 걷는 내내 두렵지 않았다. 해녀박물관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세화 축구장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자리한 ‘삼신당 여씨할망당’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돌집 안에 여씨할망신위를 모셔두었다. 제주에서는 할망당, 해신당을 흔히 볼 수 있다. 할망당을 뒤로하고 면수동마을회관 앞을 지날 무렵, 아름드리 팽나무, 네 그루에 눈길이 갔다. 왠지 인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제주 사람들은 팽나무를 ‘폭낭’이라고 부른다. 여름 태풍과 겨울 찬바람에도 견디는 폭낭은 마을 쉼터 역할을 한다.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밭담’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하도리 별방진에 이르는 약 2km 구간에는 무, 당근, 보리 등을 심어놓은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잔잔한 바다처럼 보였다. 세로선보다 가로선이 많은 풍경에 맘이 평화로워졌다. 파스텔 빛 바다도, 진초록 보리밭도, 노란 유채밭도, 검은 현무암 밭담도 모두 나지막이 가로누워 있다. 이 구간이 ‘밭담길’이다.
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돌을 쌓아 밭 경계로 삼았는데, 이를 밭담이라고 한다. 밭담을 쌓은 뒤로 토지 분쟁이 사라지고, 가축이 농작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줄었으며, 농경지 면적이 늘어 제주 농업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담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밭담은 제주도의 전통문화 산물로 평가받아, 국가중요농업유산과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세화리에서 하도리로 이어지는 이 밭담길은 바다를 오가며 생계를 꾸몄던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평상시에는 밭일이나 집안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 알고 보면 고된 물질도 부업일 뿐이었다.
별방진 품에 안긴 하도리
밭담길을 지나 하도리 골목길을 지나면 별방진이 나온다. 별방진은 마을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에서 이름을 땄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타원형이다. 별방진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별방진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하도리 마을이,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하도리 포구가 마주보고 있다. 별방진 안에 초록, 빨강, 파랑 지붕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 속 그림 같다. 하도리 마을이 유난히 평온해 보이는 건 태풍도 왜적도 다 막아줄 것 같은 별방진이 있어서가 아닐까.
별방진 이후로는 줄곧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제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에 그물처럼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원담과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던 불턱들을 차례로 만났다. 제주 해안에는 마을마다 서너 개의 불턱이 있다. 구좌읍에 해녀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어, 숨비소리길 구간에서만 서동 불턱, 보시코지 불턱, 모진다리 불턱, 생이덕 불턱 등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고, 1985년 전후로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면서 불턱의 역할은 줄었다.
비췻빛 바다가 매력적인 세화리
세화리 바닷가에 이르자 해녀와 어부들이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갯것할망당’이 눈에 띄었다. 제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해신당에서 용왕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음력 1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약 두 달 동안 34개 어촌계에서 해녀굿을 봉행한다. 해녀굿 중 바람신인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영등굿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
갯것할망당 옆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를 가둬놓은 ‘도구리통’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용천수 둘레에 네모난 담을 쌓고, 식수를 뜨거나 빨래를 하던 곳이다. 수도 시설이 잘돼 있는 지금도 물통에서 채소를 씻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도구리통을 지나면 곧 해녀박물관이다. 이미 둘러봤으므로 세화해변까지 이어 걸었다. 제주도에서 물빛 좋기로 소문난 곳이 협재, 금릉, 함덕, 우도 등인데, 요즘은 세화를 추가해 손꼽는다. 세화 바다는 협재나 함덕처럼 번화하지도 않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감성 카페와 책방, 소품 가게들이 고요히 자리한 사랑스러운 곳이다.
◇ 주변 명소 & 맛집 ◇
세화민속오일장
세화해변 끄트머리에 자리한 세화민속오일장은 날짜 끝자리에 ‘0’ 또는 ‘5’가 붙는 날 장이 선다. 규모는 작지만 채소, 곡식, 수산물, 젓갈, 생활용품, 간식거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다 판다. 낭만적인 뷰는 덤이다. 시장 안에서도 세화 바다가 보인다. 이곳 장터는 1930년대 초 하도리·종달리·세화리·연평리·시흥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장 앞에서 플리마켓 벨롱장이 열린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500-44
카페록록
하도리 바닷가에는 전망 좋은 카페가 늘어서 있다. 이 중 카페록록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시원한 바다와 돌담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내 곳곳에 둔 초록 식물이 온실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인기 포인트. 푸딩처럼 말캉한 에그타르트가 별미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서문길 41 / 10:30~18:30 /카페라테 6000원
연미정
세화리에는 전복돌솥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두 곳 있다. 연미정과 명진전복이 그 주인공. 명진전복은 TV에 출연한 덕에 늘 대기 줄이 길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명진전복을, 가성비를 따진다면 연미정을 선택해볼 것. 전복돌솥밥을 주문하면 1인분이라도 작은 고등어 한 마리와 약간의 활어회가 따라 나온다. 반찬 맛은 평범한데, 전복 내장까지 넣어 지은 돌솥밥이 쫀득하고 구수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평항로 14 /09:00~21:30 매월 첫째, 셋째주 수요일 휴무 /전복돌솥밥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