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수십 년 전 결혼식 사진을 볼 때면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부부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날의 설렘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재현할 수 있다. 바로 리마인드 웨딩(Remind Wedding)이다. 요즘은 30·40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거나, 환갑·칠순잔치를 대신해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소박하게 부부 기념사진을 찍는 것부터 지인들과 함께 즐기는 소규모 웨딩 파티까지. 빛바랜 사진 속 신랑·신부를 핑크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리마인드 웨딩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아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우아한웨딩(wooawedding.com) 장지현 이사
사진 우아한웨딩, 모노페이퍼, 포마이시스, 모먼츠 마켓, 한복 짓는 복나비 제공
메인사진 오철환·권경희 부부(결혼 30주년 기념 리마인드 웨딩 촬영 사진)
리마인드 웨딩을 위한 ‘스·드·메’ 가이드
요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 사이에서는 ‘스·드·메’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웨딩 준비에 필요한 필수 요소 3가지를 뜻한다. 많은 웨딩 업체에서도 ‘스·드·메 패키지’, ‘스·드·메 할인’ 등의 상품을 내놓고 있다. 리마인드 웨딩 역시 바로 이 ‘스·드·메’가 중요하다. 웨딩 디렉터와의 미팅 전 살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스·드·메’ 팁을 살펴보자.
△ 스튜디오&스폿(Studio & Spot)
웨딩 사진만 찍을 때나 웨딩 파티를 겸하는 경우나 장소 선정은 중요하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콘셉트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 사진 촬영만 하는 부부라면 리마인드 웨딩의 의미를 살려 과거 결혼식을 올렸던 예식장이나 신혼여행을 갔던 곳, 프로포즈했던 장소 등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특별한 파티를 기획하고 있다면 골프장, 리조트, 호텔, 펜션 등과 연계해 1박 2일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
△ 웨딩드레스 또는 웨딩한복 & 턱시도
웨딩드레스는 몸매가 드러나는 슬림한 라인보다는 에이(A)라인으로 퍼지는 모양의 드레스가 부담스럽지 않다. 대부분 중·장년 여성은 어깨를 드러내는 탑 드레스는 꺼리는 편이고, 어깨선을 감싸주거나 얇은 천이 덧대어진 스타일을 선호한다. 한복스타일의 웨딩한복도 체형을 보완해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낼 수 있어 찾는 이가 늘고 있다. 턱시도는 딱딱한 느낌보다는 꼬리가 달린 연미복을 입는 것이 중후하면서도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화려한 색의 행거칩과 보타이를 매치하면 위트 있고 발랄하게 연출할 수 있다. 웨딩 파티의 경우, 자녀들도 파티 드레스를 함께 입으면 멋진 파티 스타일 컷을 찍을 수 있다.
△ 메이크업&헤어 스타일
촬영장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비추기 때문에 되도록 반짝이는 펄이나 물광 연출은 피해야 한다. 번들거려 보이지 않도록 매트하게 피부톤을 맞추고, 하얀 드레스에 맞게 밝은 핑크톤으로 메이크업하는 것이 좋다. 평소 어두운 계열의 눈 화장으로 눈매를 강조하는 편이라면, 은은한 골드와 브라운 톤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것을 권한다.
중년 여성의 경우 단발머리가 많기 때문에 굵은 웨이브를 약간 주거나 깔끔한 올림머리 스타일로 연출하는 게 잘 어울린다. 티아라와 베일 등을 곁들여 연출하면 탈모나 흰머리 등 결점을 보완할 수 있다.
6월이면 으레 옷장을 정리한다. 겨울옷과 여름옷을 바꿔 넣고 내친김에 잡동사니들도 버리느라 대청소로 접어들곤 한다.
올해도 손쉬운 서랍장부터 열어 본다. 재킷 속에 받쳐 입었던 목 긴 스웨터와 짧은 소매 스웨터가 엉켜 있다. 원래 계절이 바뀔 즈음엔 서랍 속 내용물이 엉키기 마련이다. 가끔은 계절을 거스르는 날씨 탓이다.
중년을 넘어서면 점점 어울리는 옷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배에 군살이 늘어나서 티셔츠 밖으로 살이 툭툭 튀어나와 더워 보이기 일쑤다. ‘유행은 지났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 어울리지 않아 몇 번 못 입었지만 비싸게 산 것이라’ 등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달라붙은 채로 몇 번의 계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모진 맘 먹고 대부분 포기하기로 했다.
서랍장의 판결이 끝나면 키 큰 옷장에서 코트와 트렌치 코트, 원피스, 긴 바지, 긴 치마를 꺼내 한쪽 횃대에 뭉텅뭉텅 건다. 이번엔 크기가 큰 옷이니 좀 더 신중히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다시 찾으며 버린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 대목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찻물부터 끓인다.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신선한 우유를 부으며 커피를 만든 뒤 최대한 천천히 마시며 눈으로는 횃대에 널린 덩치 큰 옷들을 관찰한다. 그 옷이 적절한 용도인가, 내가 입은 모양새는 어떤가, 유행을 너무 타서 흔해지지 않았나, 너무 낡지는 않았는가 등을 살펴본다.
이제 변호사와 검사는 실용과 추억과 감성에 호소하는 변설을 늘어놓는다. 흰색과 진회색이 섞인 플레어 코트. 수입매장에서 언니는 검은색 슈트를 샀고 나는 이 코트를 입고 아주 기뻐했다. 나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 안에 앵두색 재킷을 입고 거래처를 많이 돌아다녔었다. 실적이 좋은 호시절을 함께 보냈던 옷이다. 지금도 그 옷을 입으면 능력 있는 여성의 표정으로 변한다. 복고풍 코트라고 아이들은 무성영화 보는 것 같다고 장난도 친다. 그래도 다시 옷장으로 넣는다.
이제 긴 치마가 나온다. 옆이 터져서 우아하고 관능적인 모양새다. 조끼와 한 벌인데 조끼는 종종 입어도 치마는 손 놓은 지 3년은 됐다. 허리가 굵어져 살 빼고 입는다며 다시 넣곤 했지만 그 살은 영영 안 빠지고 있다.
마지막은 스카프 서랍 차례다. 서랍엔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부드러운 사각 스카프가 있다.
신혼 시절 철없던 우리는 별것 아닌 거로 서로 잘 삐치고 화해하고 요구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웃을 때 마주 보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고, 돌아누워 잔다고 섭섭해 하고…. 행복과 불행이 같은 공간에서 숨 가쁘게 출렁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출장에서 나의 삐침에 대한 보상으로 이 고급스러운 스카프를 예쁘게 포장해서 들고 왔다. 난 너무 기뻐서 그의 목에 매달리며 감사를 10번도 더 했다. 그리고 귀한 자리마다 보물 목록 1호로 함께했었다.
이제 남편은 가고 없다. 그의 빈자리에서 스카프가 미소를 보낸다. 안녕!
하지만 이 스카프, 유행을 놓쳐도 한참 놓쳤다. 그래서 수 놓듯 깃든 추억을 털어내며 과감히 바구니에 던진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돌아보며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울컥한다. 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얼마나 예쁜 것인지,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인지 몰랐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옷을 정리하면서 문득 든 생각. 그것은 바로 ‘가볍게’다. 가벼운 것은 부양할 수 있다. 천사는 가벼워 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아니,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니? 나이 든 부부에게 불 지를 일이 있나? 필자가 강의를 하다가 불쑥 “나이 들수록 배우자가 둘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대다수 청중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무릎을 친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배우자 둘 중 하나는 남편 또는 아내를 뜻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뭔가를 배우자는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
다 아는 유머 한 토막. 나름 오순도순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여고 동기모임을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나는 부인에게 남편이 멋진 옷도 한 벌 사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가라는 등 신경을 썼다. “그래, 다녀오든지~”하면서 시큰둥한 통상의 남편에 비하면 엄청 배려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모임에 다녀온 아내의 표정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알아챈 남편이 “식당이 마음에 안 들더냐, 몇 명 안 왔더냐,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더냐”라고 물었더니 다 아니란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그러냐?”고 했더니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대답하더란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어서 마음대로 나다니는데 그 부인만 아직도 남편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유머일 뿐이다. 영화 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요즘 TV에서 늘어나고 있는 장수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팔순, 구순의 노부부가 아이들처럼, 신혼부부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재미있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둘이 한날한시에 먼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죽을 때까지 이마와 등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대화 상대, 밥을 함께 먹을 상대, 나들이를 함께 할 상대, 그 상대로 배우자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에서도 배우자는 필수 요건이다. 5F는 돈(Finance), 할 일(Field), 재미(Fun), 건강(Fitness), 친구(Friends)이다. 사실 젊어서는 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직장이나 사회 친구들을 주로 만나며 바쁘답시고 다닌다. 하지만 은퇴하고 나면 하나씩 둘씩 다 떨어져 나가고 남는 친구는 한 손도 다 못 채우기 십상이다. 그러다 마지막까지 함께 할 친구는 결국 가족, 즉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들이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FAMILY’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알파벳인 것도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배우자가 가장 좋은 친구라면 다른 것 다 제치고 성공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조부모가 정겹고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준다면 자녀와 손자녀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나의 제1 배우자와 친구처럼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소일거리를 찾아라
두 번째 배우자 또한 첫 번째 배우자에 못지않게 중요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이미 82세를 넘어서고 있고 지금의 40~50대는 적어도 90세를 넘어까지 살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의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우리는 은퇴한 후 ‘뭔가 할 일(Field)’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래 살면 오래 일을 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남성을 기준으로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는 53~54세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부터 정년이 60세로 의무화된다고는 하지만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설사 60세에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30~40년을 살아갈 계획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20~30년 이상을 열심히 일하다가 은퇴했으니 실업자는 아니지만 뭔가 할 일이 없다면 실업자 아닌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다.
죽치고 앉아서 TV나 보는 게 돈 안쓰고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활기차고 의미있는 소일거리를 찾을 수는 없을까? 소일거리는 말 그대로 ‘소소한 할 일거리’로 꼭 상당한 소득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의미를 찾으면 그게 곧 좋은 소일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이 ‘뭔가를 배우자’이다. 나이를 들어 배운다는 것은 학창시절에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배우는 일이라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것만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정도의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하지 않는가.
배우고, 익히고… 새출발을
취미활동도 배워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댄스와 악기 등과 같이 서로 맞대야 가능한 배움은 처음부터 친구들을 사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요즘엔 온라인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온라인으로만 주고받던 정보와 모임이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댈 경우 사람 사는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6만 곳이 넘는 노인 여가복지시설과 노인대학 등이 늘어나면서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까운 곳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오죽하면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좀 더 체계적인 배움을 원한다면 방송통신대학이나 사이버대학에 정식으로 등록할 수도 있다. 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대학 학점인정과정에 등록한 60세 이상 학생 수가 2만3000여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방송통신대학에만 60세 이상 학생이 3000명을 넘고 있다. 1972년 방송통신대학 개교 이후 240만 명의 입학생 중 최고령자는 2013년 2학기 일문과 3학년에 편입한 정한택씨로 당시 92세였다. 방송통신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35만원 안팎으로 큰 부담이 없는데다 도서관 등 시설이 좋아 이를 이용하는 어르신 학생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중국어과와 일본어과를 찍고 프랑스어과에 다니고 있다. 졸업기념으로 부부가 중국과 일본 여행을 했으니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란다. 학점을 따고 졸업을 하는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기념으로 해외여행까지 한다니 ‘행복한 노후를 위한 5F’를 완벽하게 갖춘 멋진 인생이 아닌가.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가수 서유석의 노래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봤다’의 가사로 끝을 맺자.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뭐라 해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 말도 배우고 중국 말도 배우고 아랍 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너~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출발이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김 현 (전 KBS 방송연구실장ㆍ여행연출가)
우리 부부가 함께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게 된 것은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27년 동안 아내와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1년에 2회~5회씩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여행한 나라만 해도 165개국에 달한다. 이 덕분에 우리 부부에게는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1호’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오늘날까지 큰 탈 없이 부부여행가로 활동한 데는 무엇보다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생전의 부모님은 언제나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두 아들 역시 부모의 배낭여행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가족들의 이러한 이해와 양보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참으로 운 좋게도 서로 좋은 배필을 만나 어언 47년을 해로하였고, 그중 절반에 이르는 세월을 ‘부부 배낭여행가 1호’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으니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인생의 반려자인 동시에 여행의 동반자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유독 배낭여행을 고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배낭여행이야말로 ‘복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배낭여행 경비는 패키지 상품의 3분의 2 정도면 충분하다. 게다가 모든 일정과 방문지 등을 여행연출가가 되어 직접 설계해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화가 늘어나 금실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낭여행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로만 여기고, 나이가 들면 편안하고 우아한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부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런 묘미에 이끌려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7년이 넘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하는 것은 ‘개안(開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며 기회 닿는 대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말들을 한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 우리와 다른 문화를 접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여행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가꾸는 것임과 동시에, 타인의 인생을 엿보면서 식견을 넓히는 창구이자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여행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어려운 때 무슨 여행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진정성이란 그런 단순한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여행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 게 기억난다.
“여행은 두 개의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는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엮는 앨범이 될 것이고, 또 하나는 여행자의 가슴과 머릿속에 간직해 오는 앨범이 될 것이다.”
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들도 한다. 그렇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이 적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대화라고 해봐야 아이들 걱정과 사회의 갖가지 사건 사고에 대한 스쳐 지나는 얘기 등이 전부일 테니까.
그런데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진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물과 풍물을 대하게 되니 대화할 내용이 많아지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배우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듣는 것보다, 부부가 함께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저절로 정겨운 분위기 속에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신혼과 같은 달콤한 느낌에 젖어들게 되니, 더 이상 부부여행의 장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가장 좋은 점은 여행을 통해 견문도 넓힐 수 있다는 점인데, 부부가 함께 견문을 넓히게 되므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야와 이해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늘 좋을 수야 있겠는가. 부부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아내는 남편을 위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여행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점이다. 부부가 기껏 비싼 돈 들이고 귀한 시간 내서 온 여행인데,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먹거리나 볼거리에서부터 자신보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툴 일도 많이 줄어들고, 어떤 면에서는 부부애가 더 돈독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망설이는 부부에게 우리 부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행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간다고만 하지 말고, 꼭 한번 도전해 보라.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여행이야말로 인생을 즐기며 우리네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활력소가 돼 줄 것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서로를 위해 투자하면서 낭만 속에서 몸과 마음을 살찌우다 보면 당연히 부부의 사랑도 자라게 될 것이다.”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때는 꿈이 있었지/가슴에 묻어 왔던 꿈이/사랑은 영원하다고/철없이 믿어 왔던 날들/하지만 그 꿈은 잠시/한순간 사라져 버렸네” ( 삽입곡 ‘I dreamed a dream’)
아내 윤이남(尹二男·70)씨가 첫 소절을 부르자 남편 권영국(權寧國·75)씨가 부드러운 화음을 넣는다. 그들이 부른 노래처럼 부부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가수를 꿈꾸었던 소년과 간호사를 꿈꾸었던 소녀, 잠시 사라진 듯했던 그들의 꿈은 ‘뮤지컬 배우’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수를 꿈꾸었던 권씨와는 다르게 음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윤씨. 그녀가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신혼 시절, 어느 날 가야금을 사들고 온 남편은 “당신 가야금 연주하면 정말 아름답겠다. 어머니 환갑 때 연주하면 좋겠다”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가야금은커녕 악기는 배워볼 생각도 없던 아내는 그 말을 웃어넘겼고, 가야금은 집 한편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윤씨는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년간 연습한 끝에 시어머니의 환갑잔치 날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해냈다.
남편이 그랬듯 아내는 “당신, 내 가야금 연주에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시작해 색소폰, 플루트, 하모니카 등 악기뿐만 아니라 스포츠댄스, 합창, 사물놀이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해오던 그들은 2007년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당시 예순을 넘긴 부부였지만 ‘아무리 고되어도 인생의 두 번째 문은 열린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008년, 노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의 오디션에 부부가 동시에 합격하게 된다. 20명 남짓 뽑는 오디션에 14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한 덕에 그들은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들의 꿈을 펼친 뮤지컬 (2008)의 공연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다. 1967년 12월,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그곳에서 결혼식을 했고, 결혼 40주년이 되던 해에 그곳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룬 이후에도 그들의 일상은 분주하다. 연기활동 외에도 함께 구연동화 자격증을 따서 봉사활동도 다니고, 노인 상담, 인문학 강의, 악기 연주 재능기부도 하는 등 다정히 손을 잡고 행복한 제2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고 노래를 부르느라 새벽을 훌쩍 넘길 때가 많다고 한다. 잦은 대화는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다. 그런 추억을 모아 2014년에는 이라는 부부 자서전도 만들었다. 이후 각자의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은 늘 그렇듯 함께 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담아가고 있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남편) 학창시절부터 노래의 즐거움을 알았고, 무대를 동경해왔죠. 음악은 취미로만 여겼을 뿐, 직업이 되기는 어려웠어요. 직장생활하고 연년생인 삼남매를 정신없이 키우느라 ‘꿈’은 정말 꿈도 못 꾸고 살았죠.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남편) 50세가 되던 해, 무엇이든 아내와 같이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충무아트홀 연극 교실’이라는 문구를 발견했죠. 아직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 길로 아내와 연극 교실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꿈의 무대에 도전하게 됐어요.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아내) 어릴 땐 나이팅게일처럼 간호사가 꿈이었어요. 늘 ‘멘소래담’ 같은 연고를 들고 다니며 다친 아이들에게 발라주곤 했죠. 결혼을 하고 꿈이라는 것은 딱히 없이 지냈는데, 남편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잠재된 재능을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꿈과 목표가 생겼죠. 중년 이후의 꿈은 남편이 찾아준 것과 마찬가지예요.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아내) 뮤지컬 배우는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노래, 연기, 춤,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요. 대사 암기가 난관 중 하나였어요. ‘연습만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언제 어디서든 남편과 대사를 맞추고 안무를 익혔죠.
당신의 꿈은 무슨 색?
(남편) 어떤 꿈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죠. 젊어서 꾸던 진취적인 꿈, 중년에 꾸던 삶의 돌파구 같던 꿈 등. 지금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꿈도 있고 서글픈 꿈도 있고 그래요. 지금은 무엇보다 건강한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빛을 띤 색이라 하고 싶어요.
(아내) 저는 아직도 무지갯빛 꿈을 꿔요. 모든 일이 재밌고, 신나고, 행복하고, 그만큼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색깔의 삶을 살고 있죠.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남편) 커튼콜.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 그 광경은 잊지 못해요.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꿈을 이뤘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부부도 많이 없지만, 우리처럼 노년에 뮤지컬 배우가 된 부부는 거의 없잖아요.
(아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노년의 삶이 준 선물이죠. 그동안 아이들 키우고 어르신 모시느라 제 삶이 없었잖아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제 삶을 사는 시간도 많아졌죠.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연애라는 기나긴 여정을 뚫고 마침내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할 때 어떻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경우가 많다. 또 대다수의 커플이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에 가장 다툼이 잦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결혼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신한은행 WM사업부 김희경 팀장에게 들어봤다.
1. 커플매칭 이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부유층 고객은 자녀뿐 아니라 부모의 기대치도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다 맞추어야 합니다. 때문에 미팅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죠. 하지만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는 양가 부모의 동의 하에 교제가 진행되기 때문에 편하게 사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보통은 만난 지 3개월 즈음 상대방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6개월이 되면 상견례가 이루어집니다. 대부분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까지 1년 정도 걸리는 셈이죠. 이렇게 커플 매칭을 통해 성사된 결혼이 올해 11월까지 총 34건입니다.
2. 결혼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날을 잡고 혼수가 진행되는 과정에 파혼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파혼 케이스는, 여성은 프리랜서였고 남성은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는데 만난 지 6개월 만에 날을 잡아 예물도 오가던 상황이었어요. 여성 측에서 남성에게 중형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했는데, 남성 측에서는 이왕이면 외제차면 좋겠다고 해서 틀어지기 시작했죠.
그 후에도 사소한 부분에서 마찰이 있더니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쪽의 욕심이 과할 때 파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만큼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우선돼야 할 것 같습니다.
3. 성혼커플의 공통된 사항은?
- 다양한 소개팅 경험으로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알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성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차고 차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야 이성에 대한 눈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눈높이가 조절돼야 결혼할 확률이 높으니 소개팅도 많이 하고, 나이에 걸맞은 연애를 꼭 해보라고 권합니다.
- 누구나 선호하는 스펙의 소유자. 희망상대 조건은 단순하다
좋은 학벌과 직업, 빼어난 외모, 어린 나이 등 누구나 선호하는 조건을 지닌 사람은 소개팅 기회도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원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경우는 그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개팅이란 누군가 나를 위해 대가 없이 애를 써 주는 것이니만큼, 상대를 추천해 주면 불만을 갖기보다는 일단 만나보기를 권합니다. 그래야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요. 조건 때문에 만남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보다 만나서 싫으면 ‘NO’를 외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죠.
- 성혼커플 90%가 남성이 첫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한 커플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요즘 젊은이들은 대화가 통하고 코드가 맞는 사람을 많이 찾는데 첫 만남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라면 최소 3번은 만나본 후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 집이나 직장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유리하다
아무래도 둘 중 하나는 가까워야 자주 만날 수 있고, 자주 만나야 정이 드니까, 거리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 성혼커플 평균 연령. 남성은 32~34세, 여성은 28~29세
남녀 모두 적령기를 넘기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워집니다. 여성은 자신을 만나 줄 상대가 부족해서 만남의 기회가 줄어들고, 남성은 만남의 기회는 많아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제일 많은 적령기에 짝을 찾아야 하는데, 남성은 30세쯤부터 시작해서 35세 전에, 여성은 28세 전후 시작해서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4. 꼼꼼 결혼 준비 150일 가이드
D-150 상견례, 결혼 날짜 택일
상견례 날짜는 2~3주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으며, 결혼 날짜는 신부 측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D-100 결혼식장 예약, 예물과 예단 상의 및 신혼 여행지 결정
결혼식장은 양가 중간 지점으로 하고, 예단은 현금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단을 받은 후 신랑 측에서는 봉채비를 보냅니다.
D-80 ‘스드메’ 결정하기
‘스드메’란 웨딩사진(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로 예식과 관련된 본격적인 사항을 정리합니다.
D-60 청첩장 주문, 한복 맞추기
청첩장은 한 달 전에 발송합니다.
D-50 주례와 사회 부탁하기, 신혼여행 준비하기
주례는 신랑 신부가 함께 아는 지인이나 어른에게, 사회자는 보통 신랑의 친구에게 부탁합니다.
D-30 예단과 함 보내기. 혼수 구입
예단에는 편지와 은수저, 반상기, 이불과 같은 현물 또는 현금(신권) 중 선호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신랑은 예단을 받은 후 신부 측에 함을 보냅니다. 함에는 예물과 혼서지, 한복, 예복 등을 넣습니다.
D-10 폐백음식 준비(2주 전에 주문),
각종 우편물 주소 변경, 드레스 가봉
D-5 주례와 사회자 연락(예식 시간 30분 전 도착 안내), 예약 사항 점검
신랑 신부를 도와 줄 도우미, 본식 사진 및 영상 촬영, 부케 및 코르사주, 연주, 축가, 메이크업 등 당일 필요한 사항을 점검합니다.
D-1 예식 당일 최종 점검
드레스, 부케, 한복, 차량, 폐백음식 등 최종 점검. 당일 신혼여행을 떠날 경우 짐과 여권을 준비하고, 컨디션 유지를 위해 휴식을 취합니다.
커플매칭 서비스가 결혼까지 관여한다?
커플매칭 서비스는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주된 업무로, 주선자의 말 한마디가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교제가 시작되면 잘 만나고 있는지 중간에 알아보면서 성혼 날짜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자녀 혼사를 위해 어떠한 부분도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에 걸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모티브로 제작한 뮤지컬 .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시대를 대표하는 가요들을 리메이크해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6·25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가는 돌산댁 역은 배우 나문희가, 전쟁포로로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양백천 역은 배우 박인환이 연기한다. 뮤지컬의 연출이자 서울시 뮤지컬단을 이끌고 있는 김덕남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Interview>>
이번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콘텐츠로 서울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뮤지컬산업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홍수 속에 일부 연령층의 뮤지컬 마니아가 선호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소위 그들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 뮤지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작품을 개발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이 빚어낸 질곡의 삶을 조명한 우리의 이야기 을 공연함으로써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겪었던 중·장년 세대들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니어뮤지컬 시장의 활로를 개척해 보고자 합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는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의 마라톤 방송으로 진행됐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세계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시청자의 88.8%가 방송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는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저도 물론 그중의 한 명이었어요.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더 찾길 간절히 기도하며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신혼 때 헤어져 3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부부가 재회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이 그렇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토록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감동의 시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중·장년 배우들이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연극무대입니다. 이번 작품은 뮤지컬인데요. 젊은 배우들이 장악하는 다른 뮤지컬과 비교해 이 작품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중년 세대뿐 아니라 젊은 층을 아울러 모든 세대가 잠시 즐기고 끝나 버리는 화려한 재미보다는 오래 마음속에 남을 만한 깊이 있는 감동을 원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중·장년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까지 공감이 갈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고민하다 나문희·박인환씨를 생각했어요. 대본 자체가 희곡을 리메이크하는 작품이라 연극성이 강합니다. 대극장에서 노래보다 대사가 많은 작품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노래보다 연기가 우선시된 캐스팅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웃겨주고 감동을 선사하는 두 배우의 명품연기가 이번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 처럼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나요?
시니어뮤지컬인 만큼 중·장년 세대가 많이 관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연을 관람하며 아프고 어리숙했던 과거를 잠시 돌아다보고, 다시 앞을 내다보면 의미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부터 조부모 세대까지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이산이라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가족의 끈끈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김덕남 연출
세계 25개 도시 공연, 미국 4개 도시 공연. 주요작 , , 등
△ 뮤지컬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일정: 10월 30일~11월 15일 연출 김덕남
출연: 나문희, 박인환, 곽은태, 왕은숙, 권명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