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책이란 말은 사전적 용어로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어 주책이 없다는 말은 이러한 냉철한 판단력이 없다는 뜻이다. “노인네가 주책없이! 남 보는 앞에서 뽀뽀한다”는 말은 남의 이목도 있는데 젊은 애들 앞에서 주책을 떠는 것이며 줏대 없이 되는 대로 하는 짓이라는 뜻도 된다. 물론 아낙네들의 애교 섞인 핀잔은 내심 싫지 않다는 정겨움이 담겨 있다.
조금은 허풍스러운 면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사는 삶은 무미건조하기 십상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는 가끔 주책스런 장난기가 발동해야 한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았을 때 이웃집 중년 부부가 장난치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내가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남편이 지나가다 돌담 너머로 조그만 돌을 물통에 던져 물을 튀게 하고는 담장 밑으로 몸을 쏙! 숨기고 아내를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의 한 장면은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눈을 *한주먹 뭉쳐 할머니에게 던지며 눈싸움을 하고 할머니는 그 복수를 반드시 할 거라며 비장한 각오를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밥 잡수실 때 쌈에 소금이나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맛으로 복수를 한다. 또 익은 감자를 드시라고 먹여주며 *숫깜뗑이를 얼굴에 묻혀 복수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부부는 가끔 이렇게 주책없이 살아야 자녀들이 나가버린 빈 둥지 같은 집에서 외롭지 않게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다.
필자의 부부관계에서도 주책없음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오갈 때 아내의 엉덩이를 툭 치거나 쓰다듬어주면 밥 짓다 말고 기겁을 하며 ‘주책없다’며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부부간의 애정은 값비싼 선물을 사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작은 스킨십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가끔은 자식들 앞에서 “오늘 된장찌개가 최고의 맛”이라며 기습 뽀뽀를 감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일에는 시집와줘서 고맙고 수고했다고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등에 없고 거실을 한 바퀴 도는 것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주책없음은 조금은 갑작스럽고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어야 제맛이 난다. 예측되는 행동이 아니라 전혀 예측되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아내는 다리를 바둥거리며 내려놓으라며 난리를 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에 도는 화색을 감출 수 없다. 아직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구나 하며 감사해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시작한 신혼 초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산 비결은 이런 작은 주책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도 필자는 이 사랑의 묘약을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의 사랑의 묘약을 살짝 공개한다.
주책 사용법: 너무 과하지 않게,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기습적으로 아내가 다리를 바둥거리게 하라!
연일 무더위가 대단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시원한 비가 내려 뜨거운 대지를 식혀줘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이렇게 더운 날 필자는 수서에 있는 스마트시티 홍보관에서 첨단기술을 포함한 놀랍고 신기한 체험을 했다.
국토교통부와 LH공사는 우리나라 도시개발 역사와 스마트시티 기술에 대한 확인과 직접 체험을 통해 스마트시티 관련 기술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홍보관을 만들었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주거공간에 4차 산업혁명이 도입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먼저 LH가 만들어온 도시와 U-city, 스마트시티의 등장, 스마트시티 솔루션 사례 등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스마트시티의 정의는 도시 공간에 정보통신 융합기술과 친환경 기술을 적용하여 행정, 교통, 물류, 방범, 방재, 에너지, 환경, 물 관리, 복지 등의 도시기능을 효율화하고 도시문제를 해결해 시민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도시를 말한다.
필자가 먼저 돌아본 곳은 옥상의 신재생 에너지 현장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옥상에서 태양열, 태양광, 광덕트 시스템은 열기를 더해주었다. 태양광 발전 설비에는 고정식과 해를 따라 움직이는 추적식이 있는데 옥상 가득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얻은 에너지는 온수와 조명, 살균, 식생, 옥외조명, 냉난방에 사용되고 있었다.
스마트 리사이클링은 음식쓰레기를 그 자리에서 처리하고 부산물은 퇴비 혹은 연료로 활용하는 자원 순환량 처리 시스템들을 lot 기술로 통합 관리하는 것으로서 스마트시티에 꼭 필요한 기술로 보였다. 음식쓰레기와 목질 바이오칩을 혼합하여 발효, 소멸 처리하고 남는 최종 부산물은 훌륭한 퇴비가 된다고 한다.
한 층 내려와 지진을 대비해 짓는 건물의 설계를 살펴보았다. 일반구조와 내진구조, 제진구조, 가장 안전한 방법인 면진구조 시스템을 경험했다. 체험단 중 세 명이 각각의 구조물 체험의자에 앉아 건물의 심한 진동과 팔걸이의 물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필자는 안전한 제진구조 의자에 앉아 별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지진 대비 공법의 차이가 컸다. 우리나라 건물이 모두 지진에 안전한 제진이나 면진구조로 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많은 건물을 그렇게 짓지는 못한다고 한다. 앞으로 스마트시티에서는 이런 점이 반영되어 튼튼한 건물을 짓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국토부와 LH공사가 함께 만드는 스마트 홈을 체험하는 전시공간에 갔다. 거울 앞에 서서 버튼 작동만으로 여러 의상을 갈아입은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스마트 거울 체험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실제로 옷을 갈아입지 않았는데도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니 감탄이 될 정도로 신기했다.
리빙관에서는 동작 인식 센서와 LED 조명, CO2 센서와 전열교환 환기 시스템, 하이브리드 난방 등 최첨단 센서로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실생활에 적용되어 더 편리한 생활을 하게 해준다 하니 그 기술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층의 주거 디딤돌이 되어줄 새로운 주택인 행복주택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행복주택이란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 젊은 계층의 주거불안 해소를 위해 대중교통이 편리한 부지를 활용하여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공공 임대주택을 말한다. 실제 비용도 작은 평수의 경우 보증금 2700만원에 월세 15만원 정도이고 보증금 3400만원이면 월세 7만4000원에 6년간 살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조건이다.
살기 좋은 국토, 행복한 주거를 목표로 하는 LH공사가 사람이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많이 짓기를 바라며 신기하고 재미있는 스마트 홈 체험을 마쳤다.
100세 시대의 행복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 인생을 살아낼 새로운 설계와 순서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 유필화(63)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경영학계의 구루다.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해 , 그리고 최근작 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고전을 경영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100세 시대, 고전에서 배우는 인생 경영 지혜’를 듣고 싶은 생각에 인터뷰를 청했다.
대방동에 위치한 유 교수 서재의 섬돌엔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정겹게 놓여 있었다. 유 교수는 부인(이기향 한성대 의류학과 교수)이 아침에 인터뷰 복장 코디는 물론 간식을 손수 준비해놓고 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변함없이 싸준 부인의 도시락 내조력을 들려주는 그의 얼굴에 일순 사랑과 감사가 환하게 번졌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는데요. 교수님께선 예순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요.
“나눔과 베풂의 봉사활동이 내 삶의 비중에서 늘어났습니다. 60이 넘고부터는 경력과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두 여인의 영향 덕분입니다. 어머님도 생전에 ‘늘 베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내도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전혀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알게 되고, 접하지 않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경영 문제에만 쏟던 관심을 기업 바깥의 세계로 돌리게 돼 좀 더 크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이 키워지는 부수효과도 있더군요.”
사회봉사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느낌이나 추정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다. 코넬대학의 행복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간에는 정신이 노쇠해가는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은 더욱 건강한 정신자세를 지니게 하고, 이는 다시 건강과 삶의 만족을 증진시키는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게 연구의 골자다. 봉사는 이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이기적 행동이기도 하다.
인생 2막에선 성공보다는 행복이란 단어가 한결 실감 있게 다가온다고 다들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행복이란 마음이 편한 것, 마음의 평정과 평온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기업인을 만나보면 ‘성공하면 뭐해’ 하며 자조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남이 부러워하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울 일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게 축복이고 숨 쉴 수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마음을 갖고, 일상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건의 충족이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 행복이 존재하지요.”
매일 참선과 명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재에 명상실까지 두고 있으시지요.
“마음의 평화를 위한 제 수행 방법은 참선과 300배입니다. 1997년부터 해왔으니, 20년 가까이 해온 셈이네요. 가끔 40~50분씩 참선하고 300번 절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깨끗해집니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잡념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명상을 하면 집중력, 몰입력이 높아져요. 건강한 긴장력이 생산된다고나 할까요. 삶을 객관적으로 제3자화, 관찰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자기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도 않고요. 참선을 하다 보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중생 중 하나로 담담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교수에게 이순(耳順)(공자가 60을 가리켜 한 말)의 나이에 문자 그대로 이순(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칭찬, 아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비난, 싫은 말에는 그리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교수님은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꼽으신 바 있지요. 인생 경영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심입니다. ‘왕년에’와 ‘내가 누군데’가 자만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장군은 은퇴 후 모임에도 군복 입고 훈장 달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의미이지요. 그래봤자 남들은 ‘그래서(so what)?’예요.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낮춰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 결코 헛산 것이 아니지요.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이에는 부족한 경륜이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유 교수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시원치 않다고 깔아뭉개는 마음이 자만심이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은 자부심”이라고 구분했다. 자만심은 남을 무시하지만 자부심은 남을 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양통이신데 동양고전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동양이 서양보다 한결 깊고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병법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고, 어떻게 이기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반면 동양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무력으로 싸우지 않고 지략으로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서양에선 지략이나 책략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두고요. 서양의 병서가 단지 전략서인 데 반해 동양의 병서를 정치사상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리더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공부력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평생 학습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독서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학습력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는 동서양의 리더가 다르지 않습니다.”
리더들의 경쟁력이 공부력이란 사실은 인생 경영 지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저서 에서 공부력을 변형자산이라 명명해 강조한다. 변형자산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튼 교수는 “돈 등 유형자산 못지않게 필요한 무형자산이 공부력”이라며 “학교 졸업, 취업, 은퇴라는 3단계 벽이 무너진 오늘날, 100년 인생의 풍요로움은 평생공부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미분의 인생관에서 적분의 인생관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생 전반기의 실력과 경력에 얹혀 후반전을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전반전에 종언을 고하고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라, 그렇게 공부력을 쌓는 것이 100세 시대의 생존비결이라는 진단과 처방이었다.
역사는 리더십의 스승이란 말을 강조하십니다. 역사적 인물 중 평생학습의 롤 모델로 누구를 꼽으시는지요.
“중국의 황제 당태종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학습은 자기경영이 바탕인데요. 당태종은 죽는 날까지도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자기경영원칙은 경청, 자기경계, 자기절제, 긴장감 지속,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 구사 등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다만 집권 말년에 고구려 원정 등 쓸데없는 전쟁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최초의 긴장감을 20년 이상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다고나 할까요.”
당태종의 자기경영 비결 중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구사가 눈에 띄는군요. 이는 오늘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서고자 하는 마음, 참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본인은 경륜이지만, 상대에겐 편견이고, 본인은 조언이지만 상대에겐 잔소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기준을 돌아봅니다. 먼저 내 의도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인가, 내 능력 자랑을 위해서인가 성찰해봅니다. 즉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능력을 드러내 잘난 척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상황이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느끼지는 않을지를 살핍니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인지를 고려해봅니다.”
그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인데 연장자라고 말을 다짜고짜 낮추며 하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겸양의 태도를 평생친구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헤르만 지몬 교수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의 경영학자다. “일국의 대통령에서부터 차 나르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존중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는 지몬 교수에게서 학문적 열정뿐 아니라 리더의 소양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술회다.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교수님의 ‘인생 경영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가족, 친구,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 친구와 잘 지내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게 필요해요. 또 나이 들수록 중요한 게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인데요. 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독서를 꼽고 싶습니다. 인생에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 혼자서 경험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기 위해선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건강이 필수이지요.”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버릇이 있다. 책 앞날개에 독서를 시작한 날짜, 독서를 마친 날짜, 책 구입 장소 등을 메모해놓는 일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책 내용은 물론 책을 읽게 된 동기, 시공간의 배경에 대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라 즐겁다고 한다. 또 세 종류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어나가는 독서 습관도 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답변의 속도는 30초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게 제 신조라고나 할까요. 안 되면 그만이지요. 무엇인가를 바라고, 해야 된다고 마음먹는 순간 괴로워요.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족쇄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인생 경영의 최고 비법은 공부력’이고 “궁극적 공부력은 마음 경영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인생 시대, 무한성장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자기성찰력이 최고의 인생 덕목이자 경쟁력이 아닐까.
‘유필화’란 이름 석 자의 문패가 달린 파란 대문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집 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는 ‘나의 묘비명’이라는 시에서 ‘인간 유필화’를 이렇게 관조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주 수행을 얘기했고 꾸준히 좌선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행동이 안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늘 절감했다. 그는 물욕과 애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만심도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년 이후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일이 적어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흐뭇해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숱한 약점,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였다. 그의 이름은 유필화였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보내주셨습니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누님. 이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이젠 누니~임 하고 소리 높여 불러도 대답 없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님 앞에 서라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처럼 한없이 작아질 것입니다.
누님 결혼식 날, 축시를 읽어주기로 약속해놓고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축시를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나세요? 내가 막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누님은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날 내가 왜 늦은 줄 아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님이 미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 여동생의 S 언니가 되면서입니다(그 시절엔 S 언니 동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동생의 언니이니 당연히 나한테는 누님이 된 것입니다. 누님과 내 나이 차이는 딱 한 살입니다. 누님이 생겼으니 공연히 즐겁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동생을 통해 말로만 듣던 누님을 만난 것은 훨씬 나중 일입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님과 친척이었는데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으로 인해 누님을 얻고 누님으로 인해 조카를 하나 얻은 셈입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세워 누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갔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선 다음에 만나면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 말들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외가 근처에 있던 직지사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님 꿈을 생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글쎄요.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었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님이 나한테 해주셨습니다. 그 황홀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보니 허망하게도 꿈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꿈이 아쉬워 그 꿈을 꾸었을 때의 환경에 맞춰 여러 번 잠을 자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님은 영문과를, 나는 의예과를 다니던 시절이라 만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참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습니다. 누님을 만나고 나면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꿈같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내가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님은 결혼을 한다며 내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당일 낭송하기 위해 축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도 그려 시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눈물이 떨어져 번져버렸습니다. 축시를 쓰면서 왜 눈물이 났을까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쾌히 그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사랑한 누나를 다른 사람이 채갔기 때문입니다. 누나를 채간 사람에 대한 분함과 그 사람을 따라간 누님에 대한 서운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나이답지 않게 참 바보 같았네요). 예식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충분히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우물쭈물하다 시간이 늦어버렸습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그랬습니다”라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기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분노와 서운함을 직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하면 그 뿌리는 깁니다.
내가 대학시험에 낙방해 직지사에서 한 학기 동안 칩거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님입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누님을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냥 보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까지 하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누님과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항상 얼굴을 붉혔습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얼굴을 붉혔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나를 통제하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지만 그땐 정말 바보스러웠습니다. 그 기준은 누님하고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는 자문이었습니다. 죄의식이었습니다. 참 바보스러웠지요. 누님은 내 혈연적 누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얽매였습니다. 누님하고의 결혼이라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슴앓이만 하다 내려왔습니다. 이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꼭 환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 수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갓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나는 누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첫아들이 개혼할 때 누님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다 불현듯 누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예식장에서 누님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잡은 손을 한참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누님 손을 처음 잡아봤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젠 누님을 채간 분에 대한 분노도 누님에 대한 서운함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바보스러웠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누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인편에 누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옛날 생각이 밀려오면서 누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드렸지요.
“누님 나 대구 갈 일이 있는데 누님 집에 들려도 돼요?”
“오지 마.”
내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님은 아파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체중이 35kg밖에 안 나간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전화 자주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전화를 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로 봉사를 떠났습니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누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네팔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는데도 누님은 받질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곤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 걸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 후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두려워도 참고 전화를 걸어볼걸. 자책하고 또 자책했습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런 바보입니다.
“오늘 당신 딸은 더없이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였다오”
‘2017년 5월 28일 오후 5시 더 라움 4층’
전달 중순쯤 날아온 카톡 메시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겹친다.
벌써 일년! 세상사가 무상하다지만 생사의 갈림길은 언제여도 쉽지 않다. 성여사는 20년 지기 필자의 지인이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학부모로 아파트 이웃에서 시작 된 인연이 결혼식을 알리는 사이로 이어 온거다.
작년 이맘쯤! 필자 여식의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신참 부부에게 축하와 당부를 전하며, 축하해 준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받은 부고 소식에 순간 감전되었다.
병고에 투병 중이던 지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결혼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시킬까 했다. 아니 신혼 여행 다녀와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자신을 탓하였다. 삼오제 후에도 한동안 충격이였다. 자기 탓이라며 격하게 슬퍼하는 지인의 둘째 딸아이 고백에도 위로의 말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낸 지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좋은 사윗감을 찾아봐달라는 것이였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 년이 흐르고 지인의 큰딸아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단아하게 꾸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급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친구가 그립다. 어디선가 분명 보고 있으리라 믿지만 아쉽고 아쉽다. 많이 좋아라 했을텐데...
5월의 신부답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드레스, 신혼집, 가전제품, 만만치 않은 혼례준비를 혼자하느라 애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리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신부의 옆모습에서 제법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화촉점화를 생략했다는 신부아버지의 멘트에 또 한번 빈자리를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본다.
아침고요 수목원, 남이섬, 수많은 맛집들.....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무탈무고하게 잘 자라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성여사! 장모됨을 축하해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고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고나면 하루의 시작이 상쾌해 진다.
밖으로 나와 작은 공원에서 아침 운동을 시작하면 나의 소소한 행복도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맑은 하늘, 시원한 아침공기, 주변의 장미꽃 단지, 푸른 녹음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맞아준다. 순간 나는 천국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소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나에게 내린 큰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에 종류가 있을 수 없겠지만 나는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 결혼해서 아내를 맞는 것은 큰 행복을 맞는 것이고, 아이들을 맞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고,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시키는 즐거움 또한 어마어마한 행복이니 어찌 행복의 종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어제 둘째 아들이 태어나 결혼해서 처음으로 임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행복함을 느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약 3억에 가까운 보증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계약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대뜸 저질으라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과감하게 잡아야 하니 포기하지 말고 추진하라고 했다. 비록 많이 가진 것은 없지만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고 싶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들을 돕지 않는다면 누구를 돕겠는가?
아내가 아침에 따뜻한 밥을 지어 식탁을 즐겁게 해준다. 이 또한 즐겁고 행복하지 않는가?
중국 전국시대 철인 맹자는 진심 편에서 군자삼락이라 했지만 나는 이런 소소한 행복의 즐거움을 보태 군자사락이라 말하고 싶다.
군자유삼락은 아래와 같다.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양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
나에게는 신이 내린 직업이 있다. 그래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일거리가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출근하여 내가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일찍 퇴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 내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니 전문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직업 같다. 오랫동안 해외 계약업무를 하다 보니 국제계약분야에서 상당한 노우하우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계약, 협상, 클레임처리 분야 등에서 기업가들을 위해 힘이 되어 주고 난관에 처해 있을 때 해결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런 도움이 필요한 많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생활이니 나 또한 즐거운 것 같다. 이웃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를 통한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가끔 실감한다.
비록 변호사처럼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봉사하는 계약관리사의 일이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소소한 행복인 것 같다.
행복은 어떻게 얻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전 나의 장남 결혼식에서 혼주로서 신혼부부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 해준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WHERES’에 있다. 열심히 일(Works) 하면서 건강(Health)하고, 경제( Economy)적 문제없이 살면서 좋은 관계 (Relation)을 유지하며 항상 학습 (Study) 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행복의 세계에서 산다고 할 수 있다고 했었다.
아내는 집을 7일씩 비운 적이 거의 없다.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와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와중에도 필자의 네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뿐인가? 명절 때는 처가가 멀리 있는데다 시집간 동생들이 시차를 두고 인사를 와서 친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가 처갓집이 멀수록 좋다고 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우리 부부는 젊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인생 2막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아내는 무려 15일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동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아내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공허했다. 아내는 혼자 있을 필자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떠나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은 쓸쓸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필자를 기다리는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마치 아내가 멀리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1개월 이상 해외 장기출장도 했고, 1년 이상 파견근무도 했는데 그때 아내와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시니어의 삶을 사는 지금은 아내가 없는 보름간의 시간이 너무 공허하고 힘들었다.
아내가 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 훗날 우리 내외 중 한 명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빈 공간이 그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는 이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고생한 세월에 대해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그만큼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동유럽 여행 중에 보내주는 문자와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필자도 과거에 회사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다녀온 북한의 겨울 개골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건강해서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직장 다닐 때 퇴직하면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자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동네 친구들과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후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내가 여행 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행복했다.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이행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서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와 함께 간다고 빠진 적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 여행은 꼭 함께 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요즘 아내는 과거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지난 2개월간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하더니 요즘은 다리가 아파 계속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쉽게 낫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행 약속은 건강이 허락할 때 빨리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는 간곡한 화살기도를 하고 있다. 아내가 하루빨리 회복해 옛날처럼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서유럽 여행 약속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돈으로 어떤 물건을 사면 ‘물질재(財)’가 되고 경험을 사면 ‘경험재(財)’가 된다고 한다. 세금이나 공과금처럼 강제로 내야 하는 돈도 있지만, 사고 싶은 물건을 샀을 때나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쓰는 재미가 확실히 있다.
신혼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 등 살림도구를 하나하나 장만하는 재미가 있었다. 중동 건설현장에 나가 있을 때도 귀국할 때면 전기다리미, 믹서 등 요리 기구를 사와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큰돈이 들어가는 가전제품, 마지막으로는 평수 넓은 아파트로 차츰 옮겨가면서 물질재를 소유하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 물질재가 시들해진다. ‘경제의 평준화’가 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좀 늦게 가질 뿐이지 결국은 모두 가진 자의 대열에 서게 되니 물질재에 대한 차별화는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 물질재가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지금도 새 옷을 구입하거나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사서 집에 왔을 때 물질재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물질재의 특징은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버리기 전에는 그 자리에 그냥 있다는 점이 흐뭇하다. 물론 너무 많은 물질재를 갖다 보면 정리정돈에 애를 먹는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자니 아깝고 안 버리면 짐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돈의 쓰임새가 물질재보다는 경험재 쪽으로 변하는 것 같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고, 여행을 다녀오고, 발레나 음악회를 감상하는 것이다. 경험재는 물질재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머릿속, 가슴속에 특별한 경험을 축적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껴 쓴다’는 개념은 물질재와 연관이 깊다. 사고 싶은 데 돈을 아끼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재는 대체로 단가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경험재를 구입할 때 본인이 입 다물고 있으면 구입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음악회에 가면 무대를 촬영하고, 여행지에 간 사진을 올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이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을 포함한 모든 물질재를 말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경험재들뿐이다. 그래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행복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여행지 못지않게 중요한 경험재가 바로 사람이다. 물론 돈과 관계는 없지만, 그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바로 경험재인 것이다. 그 사람들과의 정은 그대로 가슴속에 남아 저세상 갈 때 가지고 간다. 그래서 결혼식 같은 경사에는 못 가더라도 장례식 같은 애사에는 빠지지 말고 꼭 가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딸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만 관상쟁이로부터 사주팔자에 아들만 셋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딸 갖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남의 집 딸들만 봐도 사랑스러웠다. 딸 갖기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둘이 너무 활발한 삶을 살았던 탓도 있다. 결혼 전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자식 양육도 옛날 같지 않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들이 성장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차남은 울산에서, 육군 학사장교 출신인 장남은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 뒤 혼자 가족이 살던 집을 지키고 있던 둘째가 마침 혼기가 찬 여자 친구가 있어 먼저 결혼을 허락했고, 현재 아들을 놓고 잘 살고 있다. 울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튼 둘째 내외는 집 사기 힘든 시대에 어쩜 복이 많은 아이들인 것도 같다.
작은 며느리는 손자가 커가는 사진을 수시로 카톡으로 올리거나 한 주가 멀다 하고 화상통화를 해서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준다. 필자의 아버님은 효자였다. 그 핏줄이 이어졌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자들이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의 효심을 그대로 빼닮아 참 고맙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 물론 가끔 필자의 투박한 말투를 닮은 둘째가 눈에 벗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은 며느리는 결혼 전 필자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될 우리 둘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집안일이나 무슨 일을 할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할 정도로 아주 일을 잘하는 며느리다.
첫째는 결혼 결심을 늦게 해서 둘째보다는 좀 늦게 결혼을 했다. 아직도 신혼의 꿈을 즐기고 있는 큰아들이 몇 주 전에 우리를 초대해 퓨전음식을 대접했는데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레시피를 보고 했다는데도 마치 프로가 만들어낸 요리를 먹는 듯 맛있었다. 특히 정성을 들여 만든 하트 모양의 전은 너무 예뻐서 먹기가 망설여 질 정도였다. 두부와 함께만든 고기 요리 또한 일품이었다. 맛과 모양이 함께 뛰어나니 어느 유명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아 며느리에게 금일봉을 주면서 칭찬을 해줬다. 음식솜씨가 남다른 큰며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큰며느리의 100세 시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서울 사는 큰며느리는 제사와 명절 때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 시어머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좋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필자 아내가 늘 혼자 고생하면서 준비를 했는데 며느리가 손을 보태니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째 며느리도 차례에 참석할 때는 손위 형님을 깍듯이 대하며 우애 있게 잘 지내는 것 같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큰아들 부부가 좋아한다는 간장게장을 담아주기 위해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가 봄에 가장 맛이 좋다는 암꽃게를 샀다. 아내는 처음 만들어본다는 꽃게 간장게장을 정성들여 만들어 아들들에게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들은 맛이 환상적인 게장이라며 감사인사를 했고 그날 아내는 내내 행복해했다. 요리솜씨가 좋은 필자의 아내는 둘째 아들 내외가 명절에 올라올 때마다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잔뜩 챙겨준다. 둘째는 명절 귀갓길에 짐꾼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 며느리들은 박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닌 평범한 며느리들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며느리들이다. 두 아들 내외 모두 화목하고 서로 위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웃에 사는 어느 집 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남편과 신혼 때부터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육탄전을 벌이며 대판 싸워 이혼 직전 상태까지 갔단다. 아내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그 집 시어머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우리 집 며느리들은 남편을 위하고 동서간의 우애도 좋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년 새해 며느리들에게 주는 절값은 금년의 배로 올려줘야 할 것 같다.
늘 함께하려고 남편과 혼인서약을 했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는 줄 알고 살았던 적이 있다. 신혼 무렵엔 남편이 출장만 가도 허전했고 하루만 지나도 보고 싶었다. 요즘처럼 봄꽃이 눈부실 때는 같이 봐야 하는데, 집안 모임에 같이 가야 하는데 하며 남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한 점 비행기가 날아갈 때면 그가 보고 싶어져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했으니 내게도 분명 풋풋한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한가할 틈 없도록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일상들이 이어지고, 인간은 도전하듯 주어진 시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 날들 속에서 아이를 키워내고 일상에 치이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안달도 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인 줄도 잘 알기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필자는 남편이 출장이라도 가면 혼자 해결해야 하는 소소한 일상들이 힘들고 불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편의 출장이 은근히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필자 옆에 있어야 세상이 돌아갔는데 이제는 달라진 것이다. 출장 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예뻐 보인다는 말에도 공감이 갔다.
그래도 출장을 떠나는 남편이 내게 주는 것이 자유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주부에게 진정한 자유란, 정신적 홀가분함과 함께 가사노동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풀려날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이 떠난 후에도 자녀교육이 남아 있고 노동도 여전히 이어진다. 그럼에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남편의 자리는 큰 만큼 부담스럽기도 했고 인내심도 필요했다. 인내심이 필요 없는 인간관계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평생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인내심보다 더한 마음을 내야 하리라.
남편의 부재가 확인되는 순간 쾌재를 지르며 샐러드 한 접시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다. 친구를 만나 고궁도 거닐고 무뎌진 감성으로 밤늦도록 음악을 들으며 가슴 떨리는 시간도 가져본다.
그러나 필자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은 한없이 늘어져 있어보는 것이다.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온전히 혼자 있어보는 것. 다용도의 삶을 살아온 내 자신에게 심심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
요즘도 난 심심함을 꿈꾼다. 이런 심리를 남편에게도 반영해본다. 출장을 떠나는 그의 마음에도 자유라는 생각이 스며 있을 것이다. 또는 필자와 아이들이 며칠 집을 비울 경우 남편도 혼자 있는 시간을 반길 것이다. 텅 빈 집에서 혼자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며 “아, 좋은 시간…” 할 것이다. TV 리모컨을 들고 야구 채널과 골프 채널을 돌려가며 보다가 출출해지면 달그락거리며 혼자 라면도 끓여 먹을 것이다.
부부란 몇 번쯤 서로 이런 시간을 꿈꾸다가 결국에는 상대를 그리워하는 존재가 아닐까. 손짓이나 눈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읽히는 사이. 함께 쌓아온 시간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관계의 행복을 깨닫는 기회도 된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
어린 왕자가 말했듯이, 한 사람의 부재가 전하는 건 그 사람이 내게 큰 의미였음을 알게 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