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 가을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시기로 1년 중 어느 때보다 먹거리가 풍부해 맛집 여행을 떠나기 안성맞춤인 계절이다. 하지만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이번 가을도 모두의 발길을 꽁꽁 묶어놓아 ‘방콕’ 여행을 하게 만들고 있다. 풍요로운 가을을 이대로 보내기 아쉽다면, 넷플릭스로 식도락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입맛을 돋우고 군침이 돌게 만드는 요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을 준비하던 '혜원'(김태리)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온다. 매일 편의점 재고로 끼니를 때우던 혜원은 오랜만에 친구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함께 밥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며 행복을 느끼고, 다쳤던 마음을 치유해나간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게 사계절을 보낸 혜원은 어느 날 자신이 고향을 찾은 이유를 깨닫고, 다시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각박하고 치열한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고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아카시아꽃 튀김, 배추전, 크림 브륄레, 말린 곶감, 팥 케이크 등 계절별로 등장하는 제철 음식과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2. 아메리칸 셰프 (Chef, 2014)
어느 날 레스토랑 오너에게 메뉴 결정권을 뺏기고 유명 음식 평론가에게 혹평을 들은 일류 레스토랑 셰프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홧김에 SNS로 욕설을 보내버린다. 이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인터넷 스타로 떠오른 칼은 결국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푸드 트럭 장사에 나선다. 쿠바 샌드위치로 도전장을 내민 칼은 길 위에서 셰프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는 일류 셰프 칼 캐스퍼가 푸드 트럭에 도전해 아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일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 '칼 캐스퍼'의 실제 모델은 한국계 미국인 셰프 로이 최로, 그의 실제 성공담과 마케팅 노하우, 개발한 음식 등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멕시코 음식과 한국 음식을 접목한 퓨전 타코 등 남미의 향이 물씬 풍기는 요리와 신나는 라틴 음악이 식욕과 흥을 동시에 돋운다.
3. 줄리 앤 줄리아 (Julie & Julia, 2009)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한 주부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는 외교관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 명문 요리학교 '르꼬르동 블루'를 다니며 현지 요리에 도전한다. 이후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로 거듭난 줄리아는 자신의 비법이 적힌 요리책을 남긴다. 그로부터 50년 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공무원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은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며 1년간 524개의 요리법에 도전하고, 이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시대를 달리하는 두 여인이 요리를 통해 자아를 탐색해나가는 이야기로, 1950년대 프랑스 파리와 2000년대 미국 뉴욕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두 주인공의 서사를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요리인 뵈프 부르기뇽(부르고뉴산 와인을 넣은 쇠고기 찜)을 비롯해 솔 뫼니에르(버터에 구운 가자미) 등 정통 프랑스 요리들이 미각을 자극한다.
모든 것이 코로나19로 멈춰진 세상. 그러나 4월 초 예술의전당에서는 반짝이는 보석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적지 않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감탄이 배어나왔다. 코로나19를 막으려는 개개인의 긴장감 속에서도 전시품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이 느껴지던 이 자리는 바로 보석 디자이너 김정희의 개인전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어워드에 유일한 한국인 심사위원이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내 멜라니아 여사를 위한 브로치를 만들며 국내 최고의 보석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그녀를 만나 작품 세계와 삶에 대해 들어봤다.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 김정희 보석 디자이너는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 전시기간 내내 자리를 지켰다. 직접 사진 촬영과 편집까지 하며 준비한 전시회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본 그녀는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전시를 치른 소감을 묻자 감동받았다고 대답했다.
“악조건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이 와서 관심을 보여주시더군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제가 희망을 얻었어요. 두 개의 나뭇가지가 결국 한몸이 된 ‘연리지’ 작품을 보면서 상처 입은 나뭇가지가 상처 안은 나뭇가지를 밀어내지 않고 안아주고 보듬어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감상평을 해주셨어요. 저, 너무 행복했어요.”
그녀는 시간을 품은 듯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자연과 사람을 끊임없이 고찰한다. 재료도 일반적인 귀금속에 얽매이지 않고 디자인에 맞춰 자유롭게 선택한다. 18K 핑크골드 가지를 힘차게 뻗게 하니 다이아몬드와 투어멀린 그리고 해수진주로 꽃을 피워 핑크와 블루 사파이어로 물결치듯 열매를 맺게 한다. 여인의 꿈이 진주가 되어 귀걸이로 피어나게 하고, 그리움을 별로 승화해 목걸이를 걸치게 하고, 소나무의 절개를 브로치로 반짝이게 하고, 천년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오로라를 만나 링이 되게 한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예술성과 순수한 아름다움을 함께 아우르며 영혼까지 투영해야 얻을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멜라니아 여사를 위해 브로치를 만들다
이번 개인전에 나온 170여 점 중 20여 점은 개인 소장품이다. 보석의 오너들은 김정희의 전시 제안에 기꺼이 함께했다.
“저는 작품을 만들 때 스토리를 넣으려 노력해요 보석이 아름다운 건 화려함 속에 개인의 추억과 역사를 담을 수 있어서죠.”
그녀의 작품을 소장한 사람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내인 멜라니아 여사도 있다. 2017년 한미정상회담으로 트럼프 대통령 내외가 방한을 준비하던 시기에,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그녀에게 연락해 작업 의뢰를 했다. 아직 방한 관련 소식은 언론에 보도되기 전이었기에 그녀는 아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누구냐고 물었다. 주한미군 쪽에서 온 대답은 ‘말할 수 없다’였다.
“아무런 내용도 없이 의뢰하신 분이 붉은색(red)을 선호한다는 것이 전부였어요. 받는 분에 대한 정보 없이는 도저히 작업이 안 된다고 하니 며칠이 지난 후 사진을 한 장 보내왔어요.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가 찍힌 사진이더군요. ‘그녀는 붉은색을 좋아한다’라고 딱 한마디 적혀 있더군요.”
그녀의 모든 작업은 스토리텔링으로 시작되는 만큼 용도에 맞게 매듭 형태 하나하나와 실크 컬러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노리개 겸 브로치는 나비매듭을 모티프로 디자인에 착수했고 마침내 주얼리로 탄생했다. 여덟 개의 매듭으로 되어 있는 나비매듭은 장수와 부부의 화합을 상징한다. 또한 나비는 희망을 상징한다.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정상회담인 만큼 화합과 희망을 중요한 메시지로 담았다. 물론, 색은 붉은색이었다. 작품을 전달한 후 그녀는 멜라니아 여사가 굉장히 만족해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비 모양의 주얼리 장신구와 탈부착이 가능한 나비 브로치를 멜라니아 여사에게 선물로 전하면서 대한민국 주얼리 문화외교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계기도 마련했다.
세계 디자인 어워드의 유일한 한국 심사위원
김정희는 사실 국내 보석 디자인 분야의 1세대라고 해도 될 인물이다. 그녀가 처음 이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보석 디자인과 관련한 학술적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할 때도 보석 감정사는 있었지만 보석 디자이너는 없었다. 학교에서 관련된 공부를 한다 해도 장식 오브제나 목공예 정도나 배우던 시절이었다.
“일은 1993년부터 시작했죠. 방학 때 신세계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주얼리를 접했어요. 혼자 나름대로 보석에 대해 공부한 게 있어서 그걸 적용해봤죠. 당시 일당이 보통 만팔천 원이었는데 저는 삼만팔천 원을 받을 정도로 매출을 높였죠. 그게 인연이 돼서 주얼리 업체에 스카우트돼 졸업하기 전에 취업했어요.”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IMF 외환위기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출 파트를 맡아 1위로 올려놓았다. 대단한 커리어우먼이었다.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보석시장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주얼리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를 더하고 싶었어요. 국민대학교 금속공예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같은 학과를 전공한 후 보석을 위한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을 위한 보석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99년에 퇴사하면서 보석디자인연구소를 열었고 2001년에 첫 브랜드를 론칭했어요.”
2001년은 아직 30대이던 시절이었다. 생기발랄하고 의욕이 넘치던 그 시절의 작품들은 추상적으로 자연을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는 비로소 자연을 제대로 형상화해 풀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주얼리 디자인의 세계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워낙 값비싼 재료를 취급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작업을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는 철학이 있는 차별화된 보석 디자인을 추구해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아시아 3대 디자인 어워드 ‘K-DESIGN AWARD’ Winner로 선정된 그녀는 2017년,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어워드 'Italy A'Design Award'에 도전했다. 세계 180개국, 110개의 디자인 카테고리에 6만 5000점이 출품되었다. 이중에서 선택된 1780점의 입상자 작품 중 그녀는 안경·시계·주얼리 카테고리에서 은상을 받았다. 그 당시 175명 전 세계 심사위원 명단에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두 번째도 다시 도전해 은상을 받으며 세계 랭킹 4위에 레전드 디자이너라는 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먹게 됐죠. 다음 목표는 심사위원이 되어야겠다고. 제가 그 길을 개척해보겠다고 소신을 가지고 도전했어요.”
그 다짐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녀는 올해부터 ‘Italy A'Design Award’ 심사위원이 됐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이고 현재 단 한 명인 쾌거다.
작품의 영감이 된 ‘어머니’
김정희 디자이너의 인생에서는 어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의 삶 전반뿐만 아니라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영향력은 곳곳에 숨어 있다.
“어머니는 누굴 따라가기보다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죠. 제 정신적 지주였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어요. 어머니가 없었으면 영감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2남 2녀의 장녀인 그녀는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내면서 작품이 만들어지면 가장 먼저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세상에 없다.
“제 작품 ‘그리움이 향기로 피어나다’의 나무(미선나무 꽃)들은 어머니의 향기를 품고 있고 함께했던 정서가 담겨 있어요. 어머니는 2018년 2월 5일 의료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제 곁을 떠나시기 전날 목욕을 시켜드렸죠. 그때 어머니 손을 계속 잡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녀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어머니와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생명의 나무’ 연작은 어머니를 살려내고자 하는 의지로 만든 작품이다. ‘생명의 나무’의 마지막 작품 ‘하늘에 뿌리를 두다’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지만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는 인간사를 형상화했다. ‘나비 되어 날다’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49일 동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는 매일 꿈에 나왔다. “네가 계속 우니까 내가 떠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49일째 되는 날 산소에 갔는데 햇살도 따뜻하고 아지랑이도 피어올랐고 꽃도 피었더라고요, 그날 진짜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어느 날은 어머니가 늘 앉아 계시던 정원에 앉아 있는데 노랑나비가 와서 제 옆에 앉더군요. 제가 움직이니까 나비가 정원을 날아다녔어요. 저는 나비를 따라다녔죠. 그러다 나비가 사라졌어요. 그러고 나선 꿈에 안 나오시더라고요. 제 ‘나비’ 작품들은 그때 영감을 받고 만들어졌죠.”
장롱 속 잠자는 주얼리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보석 대물림. 그녀가 그 보석들을 새롭게 리폼해 재창조한 ‘Reborn’ 작품들은 시간을 거스르는 특별한 예술품으로 빛나고 있다.
김정희 디자이너는 ‘Reborn’ 작품 의뢰를 받으면 의뢰자의 삶의 철학, 나이, 생활 패턴, 물려받은 동기, 왜 의뢰를 하게 됐는지 등등 희로애락의 모든 걸 듣고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주얼리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위로와 행복, 감동을 줄 수 있는 생활 속의 예술품이 되어야 한다는 게 저의 디자인 철학입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삶의 깊이가 묻어나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작업할 때는 오로지 그 생각만 해요. 영감을 받아야 하니까요.”
장롱 속에서 잠들어 있던 귀한 패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한 사람만을 위한, 세상에 하나뿐인 주얼리’로 재탄생시키는 일. 혼을 담은 그녀의 손끝으로 빚어낸 주얼리들은 자손들에게 마음의 보물로 간직할 가보로 물려줄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다. 보석 자체의 화려함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디자인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창조해내려는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보석 디자인은 디자인이 주연이며 보석은 디자인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이 다른 보석 디자인과 그녀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보석이 시선을 압도하는 디자인보다는 디자인이 더 돋보이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을 만들 때 그 사람을 담아야 한다는 기준을 지키려면, 그 작업시간이 보통 걸리는 일이 아닐 터. 그러나 그녀는 일만 하며 사는 삶이지만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작품을 떠나보낼 때는 와인을 한 잔 한다. 허전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가장 작품을 많이 만들었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이었어요.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어머니의 그리움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 꽃으로 피어나는 작품을 만들었죠.”
보석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조형예술 세계
그러나 주변의 연락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스케치만 해놓고 작품을 못 만든 게 많아요. 특히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봉황이죠.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가 열린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생활에 밀착한 조형 예술로서의 보석 디자인이다.
“생활 속 예술로서 감동과 위로, 소통할 수 있는 보석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이미 보석 디자인은 작은 조형예술이에요. 그렇다면 큰 조형예술로도 가능하겠죠. 그래서 완전한 조형예술의 한 분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제 삶이 멈추지 않는 한 항상 꿈을 꾸며 도전할 거예요.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하는 삶은 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녀에게 보석은 희망, 지속되는 꿈이다. 그래서 보석을 볼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빠져든다고 말한다. 그녀가 보석을 통해 만들 더 넓고 다양한 예술세계를 기대해본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김남일 씨(66·가명)는 최근 손자 돌봄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난 5월 2일 양재역에서 만난 김 씨는 “은퇴 후 할빠 역할을 한 지난 3년간의 세월은, 은퇴가 아닌 또 다른 노동의 세월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맞벌이 아들의 5살, 2살 손자들을 아내와 같이 돌보러 다녔다. 처음에 아내는 “애들 집에서의 식사와 간식 마련, 청소 등 어려운 일들은 내가 할 테니 당신은 그저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몇 시간 놀아주기만 하면 된다”라고 유혹했다. 그런데 그는 ‘애들과 놀아준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지 몰랐다. 과거 육아 경험이 있던 아내와는 달랐다. “사실 근무시간보다 강도에서 여자들과 차이가 많이 나요. 한 명을 안아주면 또 한 녀석이 울며 보채요. 몇 차례 반복하면 힘이 쏙 빠져요. 달래는 요령도 없고 업는 기술도 부족하니... ” 라고 그는 말했다.
시간 잘 가는 게임이나 TV 시청은 며느리에게 금지 당했으니, 애들과 놀아주는 할빠들의 콘텐츠는 단순할 수밖에 없다. 공놀이, 총싸움, 레슬링 등은 모두 육체적인 활동을 수반한다. 한 시간이면 탈진이 된다. “할빠들을 위한 교육 강좌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거기서 남자들끼리 서로 머쓱하게 마주칠 장면을 상상하니 엄두가 나질 않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현실과 직결되는 돌봄비도 문제였는데, 며느리가 김 씨의 아내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애들의 간식비 등, 장 보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어 구체적인 액수를 밝힐 수 없다는 아내는, 그것을 자신들의 생활비로 사용한다며 그동안 단 한 푼도 김 씨에게 지불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지쳐 가던 김 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외국 여행 다녀온 사람을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자가 격리를 강력히 시행하면서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으나, 손자 돌봄 거부 시의 후환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김 씨는 나은 편이다. 서울 구로동의 양주석 씨(64·가명)는 아예 병을 얻은 경우다. 양 씨는 유방암 수술을 한 아내와 함께 세 살배기 외손녀를 돌봐주러 다닌다. 건강이 나쁜 아내를 대신하다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양 씨의 몫이다. “손녀도 나한테 안기는 게 편하니 나만 찾고, 눈치가 빤하니 모든 사항을 저에게만 요구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다가 교직에 있는 딸의 야근이 잦아지면서 양 씨의 허리에 탈이 났다. 아내와 손녀를 동시에 돌보다 생긴 병이었다. 그래도 그간 마음은 편했었는데, 딸이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갈등까지 생겼다. “종일 딸과 같이 있다 보니까, 혼자 애를 볼 때와는 다르게 평가와 감시를 받는 기분이 들었고 또 실제로 잔소리도 많이 들었죠. 나중에는 유일한 낙인 담배까지 끊으라고 요구당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불면증까지 생겼다. 그런데도 앞서의 김 씨와 마찬가지로 보상이 없었다. 역시 딸이 아내에게 돌봄 비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간 아내에게 항의도 해보고 협상도 해봤지만 실패했다. 사업가였던 그는, 생활비를 주는 데에만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실 따로 통장 입금을 해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한 달에 한두 번 아내 몰래 봉투를 찔러 줬으면 해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육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황혼 육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할빠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체면 때문에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식들 집으로 향하고 있다. 앞의 예에서 보듯이, 은퇴 후의 남자들이 겪는 가정 내에서의 권력 변화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태업이나 파업도 생각해 보았지만 직장폐쇄로 ‘집 나가면 개고생’ 이기에 그러지도 못한단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일부 악덕 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할빠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가를 바라고 손자들을 돌보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저 공정하길 바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고착된다면, 전국 할빠 연맹이 결성되어 공동 근로의 대가를 혼자 착취해 가는 부인들을 국세청에 소득세 탈루 혐의로 신고할 수 있다. 이것은 황혼이혼->독거노인->복지예산 증가로 국가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또한 부인들에게만 돈을 지급하는 자식들에게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를 둘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돌봄 비용 지급 경로를 다변화해야 한다. 즉 아들과 사위도 관심을 가지고 할빠들에게 봉투를 얹어 드려야 한다. 지금 할빠는 미래의 그들 모습이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그래도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선량한 할빠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적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래야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전국 할빠 연맹의 출범을 방지할 수 있다.
시니어 세대를 비롯한 전 국민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미스터트롯’ 임영웅과 영탁이 꿈을 향해 달려온 시간을 공개한다.
오늘(27일) 방송되는 JTBC ‘77억의 사랑’에서는 트로트 열풍을 이끌고 있는 임영웅과 영탁의 인생 이야기를 소개한다.
최근 진행된 ‘77억의 사랑’의 녹화에서 임영웅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구마 장사, 편의점, 가구 공장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낸 과거를 회상했다. 특히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절 함께 일하던 이모님들과 트로트를 부르며 즐겁게 일했던 추억을 풀어놓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영탁도 가이드 녹음,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부르며 택배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평소 택배를 받을 때 택배 기사님께 항상 감사의 문자를 보낸다는 영탁. 그는 최근 택배 기사님으로부터 ‘영탁 씨! 파이팅’이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트로트로 주목받기 전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도 꿈을 향해 끝없이 달려온 임영웅과 영탁의 이야기는 27일 방송되는 ‘77억의 사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스터트롯’ 4인방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됐다. 지난 1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에는 TV조선 예능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활약한 임영웅, 영탁, 이찬원, 장민호가 게스트로 출연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날 방송에서는 임영웅과 장민호의 폭로전이 벌어져 큰 웃음을 자아냈다. 먼저 임영웅은 ‘미스터트롯’ 출연 당시 장민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동료 가수들의 ‘미스터트롯’ 출연 소식이 들리는 와중에도 장민호는 ‘무조건 안 나간다’고 했다고.
하지만 장민호는 “진짜 많이 고민했다”며 “얘들이 나간다고 하더라.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얘들이 송가인처럼 잘 되는 꼴을 못 볼 것 같았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MC 김국진은 “그런데 결국 이들이 송가인처럼 잘됐다”고 말하자, 장민호는 “제가 그 밑에 바짝 붙어 있다. 격차가 많이 났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방송에서는 ‘미스터트롯’으로 단숨에 유명해진 미스터트롯 4인방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도 공개됐다.
임영웅은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고 있고, 배우 김영옥까지 임영웅 어머니 가게를 찾아와 ‘찐팬’ 인증사진을 올렸다고 전해 놀라움을 더했다. 또 임영웅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고구마 장사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전했다. 무대 순서가 비일비재하게 밀리거나, 관객 1~2명 앞에서 공연하는 등 무명 시절의 일화도 공개했다.
영탁은 ‘미스터트롯’ 참가자들의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행복바이러스를 전파하고 다녔다고 전했다. 이날 쌍꺼풀 수술 고백과 더불어 ‘스타킹’, ‘히든싱어’ 등 다양한 방송 출연 경험으로 다져진 예능감을 뽐내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찬원은 트로트 신동으로 다양한 오디션과 노래 대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밝혔다. 이찬원은 홍진영의 남동생 가수를 찾는 오디션 ‘홍디션’에 참가했지만 빠르게 탈락했다고 밝혔다. 이어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전국 노래자랑’에 4차례 나가 수상한 비법을 소개했다.
맏형인 장민호 역시 최근 인기를 실감한다며 “방송 후 2주 만에 완전 다른 인생이 됐다. 마트를 갔는데 뒤를 봤더니 어머님들이 카트를 끌고 88열차처럼 따라오시더라”고 말했다.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지금까진 핸드폰 요금 내기도 빠듯한 삶이었다. 꿈을 위해 달려가다 보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젠 결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임영웅과 영탁은 어려운 시절 장민호가 용돈을 주거나 의상을 물려주는 등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며 자신들 역시 이찬원에게 도움을 갚는다고 말해 끈끈한 우정을 드러냈다.
한편 2일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1일 방송된 ‘라디오스타’ 시청률은 1부 9.3%(이하 전국 기준), 2부 10.6%를 기록했다. 2016년 10월 16일 방송된 강수지, 김완선, 박수홍, 김수용 출연편이 기록한 10.4% 이후 4년 만에 나온 두 자릿수 시청률이다.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넘어져 부서져도 눈 덮인 산을 그리워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가며 설상 경사로를 질주했다. 수줍은 미소로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는 시간이 갈수록 반전에 반전을 더했다.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다! 겨울 놀이에 인생을 던진 두 남자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처음 만났다. 도봉산에 있는 한국등산학교에서. 전영래(55)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세훈(51세) 씨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얼굴을 자주 보면서 살게 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체격도 비슷하고 뭔가 풍기는 느낌도 다르지 않다. 한국등산학교 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정작 본업은 따로 있다. 임세훈 씨는 음향 엔지니어, 전영래 씨는 건설업자다. 겨울 놀이에 빠져 산다는 이 두 남자의 시작은 모두 산(山)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한 임세훈 씨
“아버지가 군인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장교 부인들과 어울리셨는데 절에 자주 갔습니다. 저도 따라다녔어요. 대부분 절은 산에 있잖아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습니다. 기웃거리면서 ‘저게 뭐하는 것이냐’며 사람들에게 자꾸 물어보니까 알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암벽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선배들이 산에 간다면서 스키를 메고 가더라고요. 겨울 산행을 하려면 스키를 배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프스스키장에 가서 처음으로 스키를 접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적설량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중학교 때만 해도 산에 가면 보통 허리까지 눈이 왔어요. 눈을 그냥 등산화로 헤치고 밟아가며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그걸 ‘러셀’이라고 하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뭔가 편안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어요. 눈이 많이 내리는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러셀로 오르면 4~6시간 걸려 올라가는 산을 스키로는 2시간이나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어요. 시간도 단축되고 체력 소모도 없어요. 그때부터 산악스키에 빠져든 거죠.”
스키를 계속 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있었다. 눈 쌓인 겨울 산을 보는 게 좋았다.
“아무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에요.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죠. 그 경치를 보고 싶어서 자꾸 올라갔습니다. 등산과 스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유럽 스키의 벽을 깨고 겨울을 찾아다니다
임세훈 씨는 스키를 좋아하는 것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빙벽에도 오른다.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특전사로 차출됐다. 군에서 패러글라이딩 팀에 있었고 스키도 좀 타봤다. 7년 넘게 부사관으로 있다가 1991년 3월에 전역했다.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역시나 스키장이었다. 스키장 패트롤(안전요원)로 들어가 일도 하고 원 없이 스키 슬로프를 질주했다.
“스키 시즌이 끝날 무렵 스키 강사와 패트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어요. 지금도 종종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데 강사와 패트롤 중 누가 더 스키를 잘 타냐는 거였어요. 그때 마침 자리에 한국스키협회 이사장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너희 시합해봐.’”
매력적인 경품도 걸렸다. 10명에게 스위스 스키장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다. 스키장이 폐장할 때쯤 슬로프를 정리하고 스키대회처럼 기문을 설치하고 각각 10명씩 20명이 맞붙었다. 협회 이사장이 연수를 보내주기로 약속한 10명에는 강사 4명과 패트롤 6명. 그중에는 임세훈 씨도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체르마트 스키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도 스키 좀 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연수 첫날 체르마트 스키장의 A급 패트롤과 최정상 슬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 2급에서 같이 스키를 타고 내려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중 가장 늦게 내려온 사람과 20분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저희 실력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슬로프 경사도가 낮아졌어요. 강사도 패트롤 A급에서 C급으로 내려갔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아예 슬로프 근처에도 못 가고 평지에서 자세만 배웠습니다.”
8일간의 연수를 마친 뒤 임세훈 씨는 함께 갔던 협회 이사장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도 1000프랑(유로 가입 전 프랑스 화폐 단위)이 안 됐다. 한국에서 송금받을 방법도 알아냈다. 스위스 스키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요. 형편없더라고요. 제 실력이요. 한국스키협회 추천을 받아서 일단 스위스 국립스키학교에 등록했어요.”
입교 허락이 떨어지기는 했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돈도 없고 영어도 안 되니 학교 측에서 걱정했다.
“한국어로 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사전을 스위스 현지에서 샀습니다. 스스로 교재를 번역해서라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어차피 내용의 80%는 전문용어이니까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강사들이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해주고 브랜드 협찬도 연결해주셨어요. 2년 공부하고 스위스에서 스키 레벨3을 땄습니다. 개인 강습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학업을 마친 후 스키 전문 브랜드의 데몬스트레이터(최고 스키 지도자) 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키도 열심히 탔고, 동양인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월급 받으면서 세계의 유명 스키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겨울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스키도 타고 제가 하던 음향 일도 했습니다. 겨울만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스키의 재미에 빠져 살았다. 브랜드 홍보차 유럽의 한 스키장에서 모굴스키를 타다가 앞서 타던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고 피하려다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미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존심 때문에 싫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스키와 등산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재작년에는 남극에도 다녀왔습니다. 스키는 노는 날 탔죠.(웃음)”
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본토인 테라노바 만에 두 번째 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를 건설했다. 임세훈 씨는 이곳에서 연구하는 박사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으로 파견된 것. 크레바스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주고 블리자드가 부는 극한 상황을 해결하는 등 더 원활하게 연구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돌아왔다.
“사실상 백수입니다. 그래도 군에서 연금도 나오고요. 남극 안전요원으로 활동도 했고, 동호회 형식의 스키 교실, 등산학교 등에서 강연도 합니다. 봉사에 가깝지만 교통비 정도는 주십니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스키와 등산은 생활이자 직업입니다.”
신장 투석하면서 해외로 스키 타러 다닌 전영래 씨
“매년 스키장 시즌권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샀어요. 구입하고 나면 누구랑 갈까 생각해요.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요.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가야 하니까 함께 스키 탈 친구들 목록을 정리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키 시즌 내내 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중학교 때 산악인이던 삼촌을 따라서 이 산 저 산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다. 암벽등반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고등학교 때 산악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차서 결국 교복을 입고 성인들 틈 사이에서 산행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산에서 학교에 다녔어요. 성북동 살았는데 우이동에 선배가 하는 산장이 있었어요. 책가방 거기다 가져다 놓고 등반하고 자고 아침에 학교 가고 또 등반하고. 그러다 산악스키에 빠지게 됐어요. 형들이랑 있으면 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눈이 많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스키를 탄다고요. 그리고 스키를 타야 산을 오르내리는 게 쉽고 빠르다고 했어요. 1985년도에 스키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제대로 타려면 스키도 타야 했어요.”
지금처럼 스키장이 많을 때가 아니라 선배들이 차를 몰고 스키장에 갈 때 따라갔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선배들 밥 챙기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그런데 정작 산악스키의 매력 포인트는 알고 있어도 산악스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라 정보도 풍부하지 않았다. 혹여 누군가 외국에 나가서 배워오면 그게 정확한 정보라고 믿을 때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조금씩 알게 된 정도였다.
스키장 가려고 사표 낸 건설사 직원
“직장생활할 때는 퇴근과 동시에 스키장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회사가 방배동 쪽이어서 용인 양지에 있는 스키장을 이용했죠. 다리 근육 강화를 위해 4~5년 동안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쇼트트랙을 했어요. 이상화 선수를 배출한 은석초등학교의 빙상부원이었습니다. 성북동에서 목동, 방배동으로 출근했다가 양지로 이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 피로를 느껴 사표 던지고 나왔습니다.(웃음)”
1997년 직장을 그만둔 그는 회사의 대표가 되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서 등반하고 스키장가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정말 원 없이 갔다. 4일, 5일 정도는 스키장에서 혼자 지낸 적도 있다.
“아침에 스케이트장, 저녁에 스키장. 몇 년 하다 보니까 슬로프를 타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산악스키처럼 좀 색다르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2003년에 강원도지사배 강원 산악스키대회가 열렸어요. 그때 출전했습니다. 산악스키대회 장면을 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참가하려니 많이 떨렸습니다. 산악용 스키가 원래는 따로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엄홍길 선배에게 빌렸습니다. 스키장의 곤돌라가 돌기 전인 새벽 5시쯤에 대회를 시작해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끝냈어요.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보더군요.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신나게 살던 전영래 씨의 인생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05년 고산에 다녀온 뒤로 신장이 망가졌다. 7년 동안을 자가 투석해야 했다. 성격상 집에서 쉴 수 없었던 전영래 씨는 투석에 필요한 장비와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악착같이 스키를 탔다.
“제가 좀 외향적이에요.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몸이 안 좋아도 삿포로나 나가노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꽤 무거운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각자 짐에 나누어 넣고 다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투석하고 열심히 스키 타고, 돌아와서 남들 한잔씩 할 때, 자기 전에도 투석하고 그랬어요.”
스키 타고 등반하는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현실을 잊고 싶어서.
신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유럽의 스키장을 다닌다고 했다.
“2012년에 투석기를 꽂고 운전까지 해가면서 새벽에 스키장에 가고 있는데 일산 백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저와 조직이 일치하는 뇌사자가 있으니 수술받으려면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후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아내가 옆에서 듣고는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더라고요. 바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갔죠. 투석할 때는 어디든 3시간 이내로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환자니까 장시간 비행도 쉽지 않죠. 신장 이식하고 6개월 후에 바로 프랑스의 샤모니몽블랑으로 날아갔습니다.”
매년 못 가면 한 번, 기본 두 번은 해외 스키장으로 나간다. 산 다니고 스키 타는 사람들의 건배사에 ‘백두산’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100세까지 두 발로 산에 가자.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민폐 끼치지 않을 때까지 스키도 타고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겨울 스포츠 즐기는 Tip
1 시즌권은 8월부터 준비한다. 홈페이지를 꾸준히 확인하기 싫으면 애플리케이션 알람 신청을 해놓으면 된다.
2 부상 없이 스키를 안전하게 오래 타고 싶으면 다운힐(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기술)은 최소한 정식 자격을 갖춘 곳에서 강습을 받아야 한다.
3 레벨에 맞는 강사에게 강습받기를 권한다.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지식을 가르치는 데몬스트레이터에게 교육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들은 스키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키스쿨에서 최소한 3회 이상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4 시니어에게 산악스키를 권한다. 산릉선을 스키를 신고 돌면서 경치도 보고 운동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스키를 타고 올라갔다가, 스키로 내려오기 어려우면 짊어지고 내려와도 된다. 산악스키용 부츠는 등산화와 비슷해 신고 내려올 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임도 따라서 산행하듯이 스키를 신고 걸으면 된다. 크게 힘들지 않다.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블리자드 쌓인 눈이 강풍에 휘날려 일어나는 눈보라.
•러셀 등산에서 선두가 깊은 눈을 헤치고 나아가며 길을 뚫는 방법.
2013년 이근후(李根厚·85) 이화여대 의과대 명예교수가 펴낸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4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당시 책의 서두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했던 이 교수. 그러나 최근 저서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서는 시력이 나빠져 컴퓨터를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상실감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냈다.
이근후 교수는 오래전부터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상기했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어떤 고통의 상황에도 그것을 견뎌낼 만한 즐거움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었다.
“컴퓨터로 해오던 일이 너무나 많았는데, 시력이 떨어져 이제는 못하게 됐어요. 청탁받은 원고들도 있던 터라 난감했죠. 할 수 없이 대학생 손주들에게 내가 구술한 것을 타이핑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르바이트로 시급도 챙겨줬고요. 손주들은 용돈벌이이든, 할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어서든 나름의 이유로 오겠지만, 그 핑계 삼아 아이들과 대화하니 좋습니다. 시력의 상실은 고통스럽지만, 그 슬픔을 손주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즐겁게 달래고 있어요.”
이 교수는 삶의 즐거움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앞만 보고 살아왔다’고 토로하는 중장년 세대의 경우 ‘즐기는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매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이 교수는 ‘야금야금 실천하기’를 권했다.
“우리 중장년 세대는 삶의 의미를 직업을 통해 찾아왔기 때문에 은퇴와 함께 큰 혼돈과 상실을 경험하게 되죠. 이때 덜 휘청거리려면 다채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 좋아요. ‘이 나이에 뭘 하나’ 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도 여든이 넘어 시작한 취미가 꽤 있어요. 뭐든 좋아하는 만큼만 즐기겠다고 마음먹으면 부담이 없죠. 취미를 찾고도 실천이 없으면 초조하고 머리만 복잡해지잖아요. 여유로운 마음으로 야금야금 실천해보세요. 가랑비에 옷 젖듯 점차 즐거운 일들이 눈에 띌 겁니다.”
노여움과 원한에서 벗어난 자유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펴낸 후 이 교수는 줄곧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살았느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언제 즐겁게 살았다고 했나,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지”라고 답했단다. 비슷한 편견(?) 중 하나는 그를 ‘무한 긍정의 아이콘’으로 바라보는 것. 이 교수는 “누구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게 마련”이라며 “다만 화가 나는 상황이라도 크게 노여워 않고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이중적인 게, 나이 든 거 몰라주면 서럽고, 노인 대접받기는 싫고 그래요.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나이 들수록 ‘노여움’이 생기게 되죠. 가능한 한 즐거운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화내고 후회하며 사느라 인생의 격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잖아요. 노여움에 갇혀 있는 상황은 자신을 애먹이는 일이에요.”
이 교수는 ‘노여움’과 더불어 나이 들수록 털어내야 할 감정 중 하나로 ‘원한’을 꼽았다. 흔히 원한은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해결되리라 여기지만, 그는 진정한 용서란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이뤄진다고 말했다.
“남을 용서하는 건 반푼어치 용서입니다. 한 지인이 자신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많았는데, 다 용서했다고 말하더군요. 학창 시절 어머니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자신에게 소홀했다는 게 이유였죠. 저는 그건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했어요. 어머니에 대한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머니를 미워하는 맺힘이 내 마음에 있었다는 그 자체까지 용서하고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었죠. 온전한 용서는 곧 자유를 줍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돼야 비로소 편안한 노후를 살아갈 수 있고요.”
마지막 밥 한술처럼, 맛나게 살기
이 교수는 노여움, 원한 등 부정적인 감정을 슬기롭게 승화하는 방법은 ‘유머’라 일컬었다. ‘어차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 소개된 그의 ‘팔순 기념일’ 일화에서도 그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80년 세월을 살아왔는데 생일 하루만 챙기기엔 아깝더라고요. 사람들 불러놓고 비싼 밥 먹으면서 형식에 얽매이는 잔치는 더욱 의미 없다고 느꼈고요. 팔순 핑계로 1년 내내 소중한 사람들을 따로 만나 함께 추억하고 감사를 나누고 싶었죠. 그렇다고 ‘팔순이니까 만나자’ 하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헤어질 즈음 ‘사실 오늘이 내 팔순이야’라고 얘기했어요. 그 해가 내 팔순인 건 맞으니, 거짓은 아니잖아요.(웃음) 살면서 돌, 결혼, 환갑, 칠순… 그렇게 따져보니 나를 위한 잔치가 얼마 없네요. 몇 안 되는 기념일까지 지루하게 보내지는 마세요. 찾아서 누리려 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늘 일상의 즐거움을 찾는 그가 계획하는 다음 기념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 교수는 아직 뚜렷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상상 중인 일이 있다고 귀띔했다.
“아는 선배 교수가 출판기념회에서 ‘와주셔서 고맙다. 내가 여러분에게 살아생전에 받는 문상으로 이해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죽으면 나는 모르는 거잖아요. 해외 TV 프로그램 중에 주변 사람에게 가짜로 자신의 부고를 알리고, 장례식을 몰래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런저런 반응을 보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에서 착안한 건데, 아직 말은 못했지만, 친한 선배에게 서로 조문을 써서 한 번씩 읽어주자고 하려고요. 죽은 사람은 들을 수 없으니 그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살아 있을 때 잘하자 이거예요.”
그는 끝으로 “여생이 짧다고 느낄수록 현재의 소소한 재미를 마음껏 누리길” 당부했다.
“힘들었던 일도 ‘지나보니 즐거웠어’라고 느끼곤 하죠. 그러나 그건 젊을 때 이야기예요. 나이 들수록 ‘지나보니’가 어려워요. 그래서 그날그날 재미를 찾아야 합니다. 죽음은 당연히 두렵죠. 그러니 그 불안을 이겨낼 정도의 즐거움이 있어야 해요. 젊어서는 쌀 한 가마니 가득한 듯한 인생을 살았는데 그 쌀을 아무 생각 없이 퍼먹다가 이제 바닥이 보이니까 ‘아차’ 싶은 거죠. 우리가 마지막 밥 한 숟가락 조금씩 아껴서 맛있게 먹을 궁리 하는 것처럼, 남은 인생도 맛나게 잘 나눠 먹는 재미를 찾아보세요.”
최근 뉴스에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됐다. 우리나라 유학생이 그랜드캐니언으로 여행을 갔다가 실족해 병원에 실려 갔는데 병원비가 10억 원이나 나오고 국내에 오려면 2억 원의 비용이 더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여행사는 가이드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미루고 있다는데 해결이 어떻게 날지 결과가 매우 궁금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안내에 잘 따라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나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라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심각했었다. 그때 40여 년간 만나온 동창 7명은 홍콩으로 단체여행을 떠났다. 다들 경험했겠지만 여자 7명이 마음 맞춰 여행을 떠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어찌어찌 날짜를 맞춰 출국을 하게 됐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가이드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운 없게도 아르바이트 날라리(?) 가이드를 만났다. 물론 가이드 입장에서는 다양한 여행객들을 인솔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그랬겠지만, 너무 자주 경고를 하면서 겁을 줬다. “홍콩에서는 여러분이 하는 영어로는 통하지 않는다. 길을 잃으면 찾아올 수 없다. 그러니 절대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했다.
어쨌든 홍콩에서의 관광은 시작되었고, 여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은 신이 났다. 그리고 여행 셋째 날, 우리는 옵션 여행을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자유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영어로 택시도 타고 침사추이 다운타운에서 아울렛 구경도 하고 망고 주스와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예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건은 마지막 날 공항에서 벌어졌다. 가이드는 “비행기 타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유명한 홍콩 공항 쇼핑을 하고 안녕히 돌아가시라”면서 “혹시 시간이 좀 늦어도 승객이 한 명이라도 타지 않으면 이륙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홍콩 공항은 정말 크고 넓다. 우리는 각자 선물도 사고 쇼핑도 하러 다니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비행기 타는 시간에 맞춰 탑승구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초콜릿과 과자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친구들과 헤어졌지만 비행기 시간을 자주 체크하며 약속시간에 맞춰 지하 전동차를 타고 탑승구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탑승 시간이 촉박한데도 친구 3명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시간 10분 전쯤 되니 승무원이 어서 비행기에 오르라며 재촉했다. 우리는 일행 3명이 아직 안 왔으니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당장 탑승하지 않으면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그냥 떠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우리끼리 먼저 타야 하는 게 옳은 건지, 탑승을 포기하고 기다리는 게 나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탑승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남겨진 친구들한테는 배신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그 친구들 걱정도 돼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비행기를 못 탄 친구들은 대한항공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그제야 우리는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저가 항공사 비행기로 왔는데 대한항공 비행기 온다니 더 잘됐다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 친구들은 비행기 값을 더 지급했을 텐데 말을 안 해준다. 쇼핑 때문에 비행기 탑승 시간을 놓쳤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면서. 어쨌든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여행은 무사히 마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시간은 잘 지켜야 한다는 교훈은 얻었다. 한 사람이라도 오지 않으면 비행기가 떠나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가이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우리가 잘못한 걸까. 지금도 우리는 모임에서 가끔 그날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기는 이미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이제 새로운 문화에 발맞추어 의미가 퇴색한 ‘경로석’보다 차라리 ‘스마트폰 안 보는 자리’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곤 한다.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에만 열중하자 지하철 창문 위쪽의 광고란이 텅 비어 버렸다. 그러자 틈새를 노린 새로운 광고 수법이 등장했다.
한 아줌마가 재빠른 솜씨로 출입문 옆에 광고지를 붙이고 지나간다. 제목은 ‘떼인 돈 받아줍니다!’ 밑에는 ‘밀린 이자까지’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좀 있으니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 바람같이 지나가며 그 옆에 또 다른 광고지를 붙인다. 이번 제목은 ‘월수익 300 보장! 하루 6시간 나이 불문’이란다. 이른바 ‘광고지 돌리기’에서 진화한 새로운 일자리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서너 개의 광고지가 지저분하게 붙게 되었다.
그런데 10분이나 지났을까. 유니폼 비슷한 걸 착용한 아줌마가 나타나 무자비하게 광고지를 뜯더니 횡 하고 사라진다. 아마도 지하철에 고용된 비정규직 미화원일 것이다. 그 광경 속에서 잠시 ‘밥벌이’로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광고지를 붙이는 일도 사소하지만, 나름대로 일이고 그것을 떼어내는 비정규직도 버젓한 일이다. 두 개의 절실한 일자리가 충돌하여 순간 일의 의미가 ‘무’로 환원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현재 온 나라가 일자리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바늘구멍이 되었다. 최근 정부가 일자리 부족을 메우려고 길거리 쓰레기 줍기 같은 단기 일자리라도 만드는 것을 보며 자업자득이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둘째 치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의 개념이나 형태가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IT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초연결사회’가 되어가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다. 일의 형태도 이미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끼리의 일자리 경쟁은 의미가 없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현실에서 시간의 제약은 무의미하고, 휴양지에서 노트북만 있으면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공간은 무제한이다. 그러니 같은 시간, 한 공간에서 근무하는 정규직은 사실 20세기 산업사회의 유물인 셈이다.
아마도 더 큰 문제는 AI라는 괴물의 출현일 것이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얼마나 더 소멸할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말끔한 정장으로 안락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정규직이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어쩌면 AI가 모든 일을 주도하고 인간은 부스러기 같은 일자리에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수백 년 전 영국에서 양털 깎는 기계에 반항하던 노동자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수천 년 전 그리스에서 시시포스가 준 교훈처럼 인간은 본디 무의미한 일을 형벌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무의미해도 연명을 위해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가 시행하는 쓰레기 줍기 아르바이트가 가치 있으려면 사전에 쓰레기 버리는 아르바이트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