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하게 되면 가끔 호텔 대신 아파트나 레지던스에서 묵는 것을 선호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객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세대를 초월해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등 가볍게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가까워져서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쏟아내며 심오한 인생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일정이 맞으면 하루 이틀 함께 더 여행을 하기도 하고, 계획했던 여행지를 바꿔 새로운 여정을 꾸리기도 한다.
우리 세대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삼십이 넘어서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고 무엇보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제야 큰맘 먹고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니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느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다르다. 그들의 여행은 가볍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축구 마니아였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영국 프리미어 축구 리그를 직접 관람하기 위해 영국 여행을 간다고 했다. 우리 세대처럼 영국에 가서 버킹엄 궁전을 제일 먼저 보고 주요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팀 경기장을 먼저 찾아간다.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큰돈을 지불하고,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기념품으로 산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모은다.
필자는 여행을 자기 기준에 맞춰 가볍게 설계하고 다녀오는 젊은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우리 세대는 여행지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느끼려 한다. 여행은 여행일 뿐이다. 무언가를 꼭 보고 얻어야 하는 여행이 아닌,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는 여행도 있다.
올 봄에도 열흘 정도 여행을 다녀왔다. 대부분 현지인이 운영하는 아파트에 묵지만 첫날 하루만 편안하게 여독을 풀기 위해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젊은이와 차를 마시며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학업을 잠시 멈추고 세계일주 중이었는데, 여비가 떨어져서 이곳에 몇 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행을 더 할 것이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남미로 간다고 했는데 지금쯤 그 친구는 어느 대륙에 가 있을까? 취업하기가 그렇게 힘들다는 요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갭이어를 갖는 것이다. 갭이어(Gap year)는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을 말한다. 우리 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도 해보지 못한 채 주어진 환경에서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경험을 쌓고 좀 늦더라도 자기 길을 찾으려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부러울 때도 있다. 젊었을 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던 우리 세대는 시니어가 된 지금도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줄도 모르고 그저 적당히 잘사는 중년, 노년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연식 감독의 4편의 옴니버스 식 영화이다. 2015 전주 국제영화제 출품작이다. 주연에 이영란, 전지윤, 다솜, 정준원, 소이, 스티븐 연, 신민철, 이광훈, 이유미 등이 나오는데 전부 무명 신인들이라 신선하다. 프랑스 영화처럼 두 번 이상 봐야 이해가 좀 되는 영화이다.
떠나야할 시간(A time to leave)
네 딸을 둔 어머니는 말기 암으로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그리고 네 명의 다 큰 딸들을 불러 모아 함께하는 마지막 삼 일 간의 시간을 갖는다. 젊은 딸들은 여전히 현실의 벽에 갇혀 티격태격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행복이 그렇게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며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3일째 되던 날 안락사 전문가들을 불러 딸 들 앞에서 편안히 죽는다. 이미 재산도 변호사를 시켜 분배해 놓은 상태이다. 가족이 모두 동의하고 말기 암이므로 그렇게 죽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이다.
맥주집 아가씨(A lady at the bar)
긴 머리가 치렁치렁한 아름다운 맥주 집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있다. 거기 온 남자 손님들은 저마다 찝쩍거려 본다. 어떤 남자는 애 둘 낳고 휴가철이면 가족끼리 여행이나 다니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평범한 삶이 그리 쉬운 게 아니란다. 한 지적장애인은 자신이 외모만 다르지 진지한 사람이라고 애소한다. 아가씨는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끝나면 또 학원으로 달려가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라 남자 만날 처지가 아니라며 무시한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다. 편하게 술이나 마시는 수컷들은 아름다운 아르바이트 아가씨를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너무 쌀쌀하면 손님 떨어질 일이고 받아주자니 한이 없는 일이다.
남은 시간(A remaining time)
서로 사랑하는 두 젊은 남녀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점쟁이는 그들에게 연인의 시간이 100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한다. 100일 후에 둘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남은 100일을 보낼까? 남자는 둘이 100일간 후회 없는 삶을 살자며 같이 죽자고 한다. 그러나 여자는 굵고 짧게 살기 싫다며 시간을 연장하자고 한다. 결국 일 년에 이틀을 보며 50년 동안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정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나라면 다른 점쟁이에게도 가서 확인을 했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처럼(Like a French film)
4편의 옴니버스 중 제목으로 택한 테마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빈 구석이 많은 착한 남자이다. 그녀는 그때그때 감정대로 하며 산다. 그녀가 새벽 시간이라도 오라면 가고, 갔는데 졸린다며 다음에 연락하자면 무거운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다른 남자랑 만취하고는 늦은 시간에 이 남자에게 전화해서 돈 3만원을 갖고 오라기도 한다. 그 3만원을 어디에 썼는지 궁금하다. 끝내 모른다. 이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는 지성을 들이며 이 남자에게는 제 마음대로 한다. 남자는 어망에 걸린 고기처럼 편한 친구사이이다. 여자들이 보기에는 이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프랑스영화는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보고나서도 도대체 아리송했던 적이 많다.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여자시리즈 유머스토리에 있던 이야기 중에는 나이 들면 배운 여자 안 배운 여자나 다 똑같고, 얼굴 예쁜 것 안 예쁜 것 상관없고, 돈 있으나 없으나 동일하네 어쩌네 하는 내용이 있었다.
요즘 시니어들에게 비용지급을 하는 모집광고가 참 많다. 시간당 아르바이트 비용 수준의 몇 달간의 기간제,혹은 계약직이라도 지원서 파일을 열어보면 에구머니나 칸칸이 넣으려면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엄청난 활동이나 자격증이 이미 있어야 채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이미 나이도 제한하여 모집하는데 스펙이 대단하지 않으면 지원서를 제출조차 하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오랫동안 직장에만 충실했던 은퇴한 시니어 분들과 여러 교육과정을 여러 기관에서 창업과 창직을 원할 경우 특히 SPEC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SPEC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어떤 제품이나 물건의 사양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꼭 해야 하고 자신이 있는가.
돌아서라도 가고 싶은 종착역이 있다면 노력해서 나의 스펙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 새로이 기본부터 해야 하는 일 보다는 할줄 아는 것 이미 어느 정도 지나온 길을 무시하지 말고 그 위에 스펙을 더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시니어가 된 오늘날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고, 시험을 치루고 여기까지 오면서 인생 끝날 것 같은 절망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사와 마이웨이노래를 부른 프랭크시나트라의 묘비명에 적혀진 내용을 소개해 본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말을 남겼다.
“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오게 될 거라는 내용이다.
환갑만 지나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은 인생에 열정과 애정이 있다면 나이 드는 나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시니어의 자리에 선 자신을 볼 수 있어야 거기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성공적 노화를 위해서는 본인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고, 선택 된 부분에 부족한 부분만 보완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능력을 최대화해야하는게 바로 시니어의 스펙 쌓는길이다. 시니어도 스펙을 쌓아야하는 힘든시대의 한가운데 서있는 상태에서 글을 써본다.
‘라이엇 클럽(Riot Club) - 금수저의 민낯.’
젊고, 잘 생기고, 부모 잘 만나 돈 많고, 머리 좋아 세계 일류대학 옥스퍼드에 다니는 남학생들 10명이 모여 술을 마셨다. 그 분위기는 어떨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는 연극 ‘POSH'를 영화화 한 것으로 ’POSH‘는 영국에서 가장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한다. 론 세르픽 감독이 만들었고 출연에 샘 클라플린, 맥스 아이언스, 더글라스 부스, 홀리데이 그레인저가 나온다.
옥스퍼드대학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귀족 모임 ‘라이엇 클럽’이 있다. 가문, 재력, 외모 모두가 상위 1%인 로열클럽이다. 졸업하고 나가면 집안의 힘, 학력의 힘, 명석한 두뇌의 힘으로 사회에서도 앞날이 보장된 잘 나갈 사람들이다. 이 클럽에 들어가려면 일단 출신 고등학교, 집안, 등 스펙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다음은 입단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신입생 마일즈(맥스 아이언스 분)와 알리스터(샘 클라플린 분)는 입단테스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라이어트 클럽의 일원이 된다. 마일즈는 중산층 여자 친구 로렌(홀리데이 그랜인저 분)를 사귀는 평범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알리스터는 부자로 태어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어 둘은 늘 티격태격한다.
드디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문인 만찬회 장면은 교외의 한 레스토랑에서 벌어진다. 모두 턱시도 정장을 맞춰 입고 제법 격식을 차렸다. 처음에 술 마시고 국가를 합창하고 다른 손님들이 불평할 정도의 소란함 정도는 학생들이니까 양해한다 치자. 술이 과했으니 토하는 것까지도 봐줄만 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단골손님들이 학생들 때문에 너무 소란하고 서빙이 늦어지자 그냥 나갔다. 주인이 학생들에게 단골손님이 화를 내며 돈도 안내고 나갔다고 하자 돈으로 해결하겠다며 돈을 건넨다. 100파운드 정도인데 150파운드를 주며 자기네 판은 3,500파운드짜리라며 거들먹거린다. 주인이 그냥 나간 사람들 대신 학생들에게 돈을 받았다고 하자 딸이 돈 받은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얘기한다.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누군가 콜걸을 불렀다. 단순히 저 한 명 섹스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라 테이블 밑에 들어가 10명을 만족시키라는 모욕적인 주문을 한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한다. 콜걸이 거절하고 나가자 체면을 구겼다며 화를 낸다. 그 와중에 마일즈의 여자 친구 로렌이 나타난다. 마일즈가 빨리 와달라고 문자를 보내서 왔다는 것이다. 로렌이 중산층 여자라고 못 마땅해 하던 알리스터가 마일즈의 핸드폰으로 몰래 문자를 보낸 것이다. 로렌의 외모와 출신을 조롱하기도 하고 잘난 자기네들을 만나러 왔으니 돈을 내라고도 한다. 일이 이상하게 진행 될 것 같자 로렌은 되돌아 가려 하지만, 알리스터가 콜걸에게 주문했던 일을 해주면 전 학년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바로 송금하겠다고 제안한다. 아르바이트로는 매 학기 학비내기도 어려운데 워낙 큰돈이기에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남자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로렌이 알아서 선택하라고 대답한다. 마일즈의 순간적인 말 실수에 실망하고 로렌은 나가버린다.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모두 술이 만취하자 난동은 점점 극에 달한다. 돈 없는 서민들을 비난하고 자기네들은 타고난 귀족들임을 뽐낸다. 레스토랑의 모든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순다. 레스토랑 주인이 들어 와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돈으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니냐며 오히려 난동은 더 심해지면서 주인에게 마구 집단폭력을 행사한다. 주인이 쓰러지자 구급차를 불렀는데 구타라고 하자 경찰이 같이 출동했다.
10명이 구치소에 들어가 조사를 받는데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함구하기로 한다. 학생의 신분이자 부모들의 영향력 덕분에 일단 구치소에서 나왔지만 증거가 보완 되는대로 다시 소환할 것이며 학교에서도 퇴학 처분이 내려질 것을 걱정한다. 책임 소재로 보면 회장이 모든 책임을 지거나 폭력을 먼저 주도한 자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퇴학처분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내린 묘안은 한 명이 뒤집어쓰고 나머지 9명이 평생 미래를 지원해주자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있는 자들의 만행에 분노가 일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큰 문제로 보였다. 잘못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문제에서 서로 발뺌하는 비겁한 행태에 인간적으로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금수저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회는 역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도덕과 인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영화이다. 금수저들에게 인성이 부족하면 돈은 흉기일 뿐이다
서울 개포동에서 치킨 집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서 자랐고 나이도 같으니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필자는 1999년 말에 퇴직했고 그때부터 16년간 퇴직자의 길을 걸은 셈이다. 그러나 이 친구는 그 당시 마지막 직장을 퇴직하고 6년을 집에서 놀았다. 내 한 몸 간수하면 그만인 필자와 처지가 다른 것은 처자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치킨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댔다. 필자도 노는 처지라 놀지 말고 돈을 벌라고 할 처지가 못 되었으나 보기 안쓰러웠었다. 그러다가 치킨 집을 인수하고 부부가 운영하게 된 것이다.
개포동은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었다. 브랜드도 잘 알려져 있고 맛도 있어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점포 내에는 4인용 작은 테이블이 2개 있을 뿐이고 대부분 배달 주문이다. 그간 다른 치킨 브랜드들이 7개나 새로 생겼지만, 여전히 이집은 매출이 꾸준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큰 이벤트가 있으면 매출이 급증하며 중계시간에 맞춰 밤을 새우기도 했다.
다른 치킨 브랜드와 맛의 차이를 물었다. “닭고기는 어떻게 조리하든 원래 다 맛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 닭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맛이 있다. 필자가 가면 맛있는 윙을 주로 골라 주니 더 맛있게 느껴졌다.
더운 여름 날, 기름에 닭을 튀기느라고 땀 흘리며 고생하는 부부의 모습을 볼 때 좀 미안했다. 나는 도와준다고 손님으로 가서 여유롭게 먹고 앉았고 그들 부부는 닭고기 튀기느라고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인 필자에게는 돈을 많이 받지도 않았다. 생맥주 무한 리필에 닭고기도 무한 리필이다. 바쁘니까 생맥주는 아예 필자가 따라 먹는다. 처음에는 안 받으려 하다가 일인당 1만원을 받았다. 그래서 갈 때마다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갔다.
밤 12시쯤 일이 끝나는데 필자가 그 시간까지 있어주면 같이 술 한 잔 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하루 종일 고생한 부인을 집까지 태워다 줘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운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안 마신다고 해도 다음 날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필자 때문에 수면 부족이 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게 뭐냐고 물으니까, 더운 날 뜨거운 기름 앞에서 조리하는 것도 힘들지만, 배달도 힘들다고 했다. 스쿠터로 배달하는데 그간 교통사고로 몇 번이나 사고가 났었다. 본인이 배달하는 것도 힘들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을 쓸 때 툭하면 지각하거나 안 나오기도 하고 그만두는 일이 속을 썩였다고 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그럼에도 돈이 손에 쥐어지는 재미에 힘 드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학비가 필요했다.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친구들이 모임장소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쉬어가면서 하라고 권고하자 가장 한가한 매주 월요일은 휴무일로 정했었는데 경쟁이 심해지자 2주에 한 번 쉬거나 아예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벼락 선언을 했다. 올해까지만 하고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돈도 벌만큼 벌었고, 아이들도 더 이상 뒷바라지가 필요 없을 만큼 다 컸다는 것이다. 그간 부인 고생 시킨 것도 미안하고 환갑잔치도 못해줬다는 것이다. 몸도 여기 저기 아파서 더 이상 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개포동이 재건축으로 사람들이 차츰 빠져 나가서 장사가 덜 될 거라는 생각에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가까운 양평에 전원주택 한 채 사서 텃밭이나 일구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큰 농사를 지으면 힘드니까 저절로 열리는 과수 정도를 재배하다가 따먹으면 되는 정도로 쉽게 살겠다고 했다.
이제 필자 나이가 정말 은퇴할 나이라는 게 실감 난다. 인생 100세라지만, 앞으로 건강나이만 따지면 정말 많이 남지도 않았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면 좋을지 차분하게 주변을 돌아 볼 때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 ‘심야 식당’을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라면 '앙: 단팥 인생 이야기'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소설가, DJ, 시인, 밴드 보컬리스트라는 다양한 재주를 가진 두리안 스케가와의 소설을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가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1943년생으로 영화에서도 78세로 나오는 고령의 여인 키키 키린이 도쿠에 역으로 나오고, 중년의 단팥빵 점장 센타로 역으로 나가세 마사토시, 단팥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여중생 와카나 역으로 우치다 카라가 나온다.
빵 반죽을 납작하게 만들고 두 개의 빵 사이에 단팥(일본어로 ‘앙’)을 끼운 일본식 화과자 도라야끼를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 이야기이다. 아르바이트 광고를 붙인 것을 보고 고령의 도쿠에가 일하게 해달라고 조른다. 힘든 일이라 노인에게는 무리라며 두 번이나 거절했으나 시급을 절반만 받아도 좋으니 일이나 하게 해달라며 애원한다. 이 노인이 세 번째 찾아 왔을 때도 역시 거절했는데 단팥빵의 겉 재료는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단팥소가 제 맛이 아니라며 평을 해준다. 그리고는 조그만 봉투를 놓고 가는데 열어 보니 단팥소가 든 반찬통이었다. 그 맛을 본 센타로는 예사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다음에 이 할머니가 찾아 왔을 때 바로 일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동안 쓰던 단팥은 시판하는 것으로 그냥 사다 쓴 것이었다. 할머니는 단팥을 만드는 요령을 가르치면서 단팥 한 알마다 비와 태양을 맞으며 사연이 담겨 있다는 철학을 가르쳐 준다. 단팥의 맛은 결국 정성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가게는 대박이 난다. 문을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단팥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
그런데 이 단팥빵의 사장이 할머니가 나병으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며 내보내라고 한다. 그러나 정이 들어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오히려 주방뿐 아니라 서빙까지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가게의 단골들은 주로 여중생들이다. 한창 때라 잘 먹을 때이며 달작지근한 단팥빵을 좋아한다. 끼니를 때우려고 드나들던 여중생 와카나가 할머니의 굽은 손가락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는다. 어릴 때 병에 걸려서 그렇다고 답을 해주고 나니 그때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와카나는 어머니 한 사람에게만 할머니 얘기를 했을 뿐인데 소문이란 그렇게 빨리 퍼져 나간다. 도쿠에 할머니는 그 길로 일을 그만두었다.
어느 날 와카나가 집에서 기르던 카나리아를 새장 째 들고 왔다. 아파트에서는 애완동물을 못 기르게 되어 있는데 옆집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집에서 키울 수 없어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길로 와카나는 센타로에게 할머니 사는 집에 가보자고 한다. 버스로 몇 정거장 가야 하는데 과연 할머니는 한센병 격리시설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한센병 환자는 격리해서 수용하고 있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소독을 할 정도로 혐오 대상이었다. 1996년에야 그런 제약이 풀렸다고 한다.
그 시설에서 도쿠에 할머니의 친구를 소개받는다. 생과자의 달인이다. 단팥죽을 대접받는데 역시 보통 맛이 아니라 노하우를 물어본다. 센타로는 원래 단맛을 싫어해서 단팥 종류를 안 좋아했었는데 소금을 가미한 것이 노하우라고 가르쳐 준다. 와카나는 카나리아를 새장 째 맡기고 간다.
센타로는 젊은 시절 술집을 경영했었는데 술에 취한 고객과 다투는 과정에서 큰 상해를 입혔다. 그 때문에 징역을 살고 합의금으로 목돈을 구하다 보니 이 작은 단팥빵의 점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다 못 갚았기 때문에 늘 얼굴이 우수에 차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 단팥의 단 맛에 발길이 끌려갔다가 센타로의 우수에 찬 눈빛을 보고 동정이 가더라는 얘기이다.
사장은 조카가 다른데서 잘 적응을 못한다며 센타로에게 조수로 가르치며 데리고 있으라고 한다. 생김새부터 성실하게 생기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 가 조카에게 점장 자리도 내줘야 할 판이다.
센타로와 와카노가 다시 할머니의 시설에 찾아 갔을 때 도쿠에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센타로와 와카노에게 편지와 녹음을 남겼다. 부디 자신만의 노하우로 단팥빵을 만들어 명인이 되라고 했다. 와카노에게는 맡긴 카나리아를 바로 풀어줬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한센씨 병으로 갇혀 지낸 것이 한이 되어 바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묘는 따로 하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벚꽃을 생각하고 벚나무를 심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 센타로는 웃음을 되찾으며 단팥빵을 판다. 독립한 것이다.
2015년 말 한국직업사전에 직업으로 등재 된 총 직업 수는 1만1440개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 직업의 수는 얼마나 될까? 미국은 30,000개, 일본은 25,000개가 넘는다.
그럼 왜 이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2배 이상 직업의 수가 많을까? 가장 큰 이유는 서비스업 발달로 직업이 많아졌다. 미국에서는 애완동물 전문 변호사, 말 치과의사, 음식 조각가등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이 많다. 예를 들면 애완동물 전문 변호사는 애완동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법률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변호사이다.
대한민국의 일자리와 직업에 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 크다. 특히 전 분야에 걸쳐 고용율이 중요한 지표가 됐고, ‘학교, 기초자치단체, 정부’가 발 벗고 뛰지만 고용율은 제자리 걸음이다. 그 만큼 일자리는 옛날과 달리 고도의 전략과 선행적 산업구조에 따른 직업의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청년실업률은 20년 만에 가장 높아졌다. 직업을 가지려고 해도 만만치 않은 경제양극화가 취업 동기에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첫 직장을 갖는 청년들은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초임 차이가 2~3배에 이르는 임금격차인데 자신의 능력이 2배, 3배 낮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첫 직장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현 정부는 국제적인 통용 기준에 따른 능력중심사회를 위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구축하고 스펙, 학벌보다 직무능력(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지 여부)과 기초직업능력을 중시하는 현장 중심의 인적자원관리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 실제로 투잡, 쓰리잡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자.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2015년 11월 남녀 직장인을 대상으로 ‘직장인 아르바이트 현황’에 대해 조사한 결과 29.8%가 본업 외에 아르바이트(투잡)를 하고 있다. 한편, 투잡을 하고 있지 않은 직장인 중에도 70.6%가 여건이 된다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투잡이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투잡 쓰리잡은 선진국에서는 낯선 일이 아니고 우리도 그런 사회가 도래됐다.
그래서 스페셜리스트 보다는 한 가지 기반위에 다양한 지식과 정보, 네트워크가 필요하게 되었다. 미래에는 현명한 제너럴리스트가 요구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무림의 고수들이 많기 때문에 얇고 넓게 공부하는 시대다.
‘데이비드 마호니, 리처드 레스텍’의 ‘은퇴 없는 삶을 위한 전략’에서 “밀려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장성이 있는 자신만의 기술을 다양화하고 개별화 할 방법을 지금부터 연구하기 시작하는 길이다.”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도, 신경과 의사도 어디에나 넘쳐난다. 그래서 그는 두과의 혼합영역인 신경정신과 모두 수련을 받았다.
직업을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말고 두세 가지를 생각해 둬야 하고, 뒤에 지핀 불위에 주전자를 2,3개 얹어놓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NHK방송문화연구 미디어연구부를 책임지고 있는 하라 유미코(原由美子, 1962년생)의 까무잡잡하고 야무진 얼굴에서 관리직의 연륜과 함께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주위에서 엄격한 상사, 철저한 커리어우먼이라고 부를 만큼 한 마디로 일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일벌레’로 해외 출장도 잦았다. 주로 미국과 유럽 등을 많이 다녔지만, 정년을 앞두고 10년 정도는 한국, 중국, 몽골 등 아시아 지역으로 출장을 많이 갔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양국 방송에 대한 공동 연구, TV 방송 제작 심포지엄 등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 경주, 제주도 등 각지를 돌았다. 미디어연구부의 업무 때문에 한국의 일본 연구자들과 동아시아, 일본 드라마 등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다가 쉰 살 무렵 부장을 맡아 현장을 다니는 일보다는 자료 수집과 분석, 조사 등 주로 의자에 앉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가끔 서서 일할 때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하는 등 하반신 근육이 많이 약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크게 깨달았다. “사실 20년쯤 전에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으로 가벼운 안면 마비 증세가 생겼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 더 나이를 먹을 텐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일이 더 많아질 걸 생각하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죠.”
파도와 호흡하는 서핑에 빠져
그래서 58세 때 도전한 것이 서핑이다. 처음에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 노를 젓는 타입의 서핑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신의 다리 힘만으로 파도를 타고 방향을 바꾸는 본격적인 보드를 즐기고 있다.
“건강을 위해 스포츠클럽에서 요가와 스트레칭, 체조 등을 해 왔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도 했는데 사실 말이 파도타기일 뿐 스탠딩 서핑은 노를 젓기 때문에 파도가 좀 있으면 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죠.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어떤 파도든 그 속에서 파도와 호흡하는 본격 서핑으로 바꿨답니다.”
하라 유미코는 줄곧 살던 도쿄(東京)의 집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서프 포인트이자 수많은 서퍼와 서핑 동호회가 즐겨 찾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치가사키(茅ヶ崎)시에 별장까지 마련할 정도로 서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다.
“예순 살때 정년 퇴직을 하고 현재는 계약사원으로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 근무 중인데, 도쿄의 집은 화, 수, 목 근무 때 사용하고 치가사키의 집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이용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어요.”
서핑을 위해 바닷가 입지를 충분히 살린 세컨드 하우스는 그야말로 그녀의 제2 인생이 꽃을 피우는 곳, 의외로 서핑을 시작하는 중장년들이 많아 서핑 이외에도 그들과의 교류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은 복근을 사용하고 노를 젓는 근력을 키우지만 본격 서핑의 전신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며, 무엇보다 파도를 타면서 자연과 한몸이 됐다는 쾌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짜릿해 정말 배우길 잘했다고 덧붙였다.
모전여전, 다시 찾은 건강 만끽
하라 유미코에게는 어머니(1931년생)와 여동생(1959년생)이 있다.
어머니는 일흔 살 때 지금까지 꾸려오던 양품점을 접자 급격하게 체력이 쇠약해지고 각종 노인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원인도 모른 채 살이 쭉쭉 빠져 체중이 35㎏밖에 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미코의 극진한 간호와 꾸준한 치료 덕분에 현재는 체중을 55㎏까지 회복했으며, 건강도 되찾아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치가사키에서 누리고 있는 제2의 삶에 맞춰 어머니를 노인요양원으로 옮겼으며, 매주 주말 시설을 찾아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건강이 회복된 어머니는 평일에는 노인시설에만 있지 않고, 치가사키에 있는 대학의 공개 강좌를 듣거나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까지 배우고 있어 지난 10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유미코는 혀를 내둘렀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마도 모전여전일지 싶다. 미술을 전공한 여동생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현지 일본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친구와 함께 리옹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화가에서 요리사로 변신해 자신이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찾아주는 손님들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 벌써 16년이 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듯이 이렇게 세 모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삶을 놓치지 않고 알뜰하게 만끽하고 있다고 하겠다.
62세 홍일점 바다에 서다
서핑 동호회의 회원은 대개 50대 초반의 중년들이 많은데, 인생의 선배 하라 유미코는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유일한 고령의 여자라는 점에서 홍일점. 평일의 바닷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문 반면, 의외로 중장년층 서퍼들이 꽤 많다고 한다. 골프처럼 필드에 나갈 때마다 돈이 드는 운동과 달리 서핑은 바다와 파도, 그리고 바람을 느끼고 이용하는 공짜 운동이라는 점도 매력이다. 서핑은 매년 3~4월 봄에 시작해 11월 말까지가 시즌으로, 파도를 타지 않을 때에는 유연성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체조 등으로 몸을 만들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바닷가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크린 캠페인에 참가하는 바다 사랑도 실천 중이다. 이어 유미코는 파도의 속성을 알고, 파도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호흡할 수 있게 되면 먼저 일본 바다를 두루 섭렵한 뒤 세계 곳곳의 유명한 서프 포인트를 찾아가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파도를 직접 맛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허벅지는 제2의 심장
끝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건강을 잃었다가 어렵게 되찾은 경험이 있기에 유미코는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좀 더 빨리 했으면 생각하지만, 절대로 늦은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안 할 뿐이죠. 생각이 있다면 행동에 옮길 것, 이걸 명심했으면 해요. 파도타기를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산다는 가르침을 배웠는데, 일할 때 몰랐던 근육과 신경 등 여러 문제도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이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해소되고 몸도 부드러워지고 훨씬 가벼워졌어요.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특히, 제2의 심장이라는 허벅지를 지금부터라도 단련해 두면 제2의 인생이 든든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