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가지에서 생긴 일] 바다에서 죽을 뻔 했던 사연
- 여름휴가철이 돌아오면 대개는 낭만적인 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건 하나가 툭 하고 마음에서 일어난다. 지금부터 43년 전 일이나 필자 ‘기억의 창고’에서는 조금도 스러지지 않은 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느라 학교생활은 늘 따분했다. 대학 캠퍼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사회는 우리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빈번하게 이어지는 데모와 휴교는 더욱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마음을 모아 여름방학에 경포대로 가기로 했다. 말이 나온 후부터 이미 마음은 바다로 가 있었다. 당시 필자가 탄 기차는 정말 느렸다. 그래도 동해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바다 앞에 서는 순간 가슴이 확 펴지는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대천에는 두어 번 갔지만 바닷물 색깔부터 달랐다. 한참을 눈으로 감상하다가 환상적 물색깔이 보내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물로 들어갔다. 세 명의 친구가 모두 수영할 줄 몰랐기에 유끼(물 위에 뜨는 돗자리 같은 것)을 띄우고 그 위에 올라앉아 한껏 기분 좋게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유끼가 뒤집어졌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다. 셋은 각자 영문도 모른 채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러나 아무리 발을 흔들어 봐도 발에 걸리는 것은 까마득한 물뿐이었다. 계속 허우적대며 실오기라도 잡으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이제는 기운도 빠지고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순간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유끼였다. 버둥대며 간신히 그 위에 올라앉은 순간 다른 친구 한 명이 이미 그 위에 누워 눈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곧 이어 다른 친구도 올라왔다. 지쳐서 말할 힘도 없었다. 알고 보니 장난을 쳤던 사람이 필자 일행이 모두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걸 보고 겁이 났던 모양이다. 유끼를 필자 일행이 허둥대는 곳으로 밀어놓고 모두 올라온 후 백사장 가까이 끌어다 놓고는 어디론가 도망갔다. 같이 갔던 일행 중 다른 두 명은 설악산으로 가려던 계획이어서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백사장에서 바다를 보며 얘기하는 것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친구들도 처음에는 우리가 장난하는 줄만 알았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다 여겨 바다 가까이로 왔는데 그제서야 사태를 알게 됐다. 그날 셋은 병이 나서 밤새 고생하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다. 피서.. 바다.. 가슴 부풀게 하는 이 단어가 한순간에 지옥 같은 기억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장난질에 죽음을 생각하는 데까지 갔었다.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고, 항의 한 번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마음에 쌓인 두려운 기억만 남았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연못에 있던 개구리가 죽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사건이었다.
- 2016-05-31 17:35
-
- [추천 도서] <댄싱 위드 파파>의 아빠 이규선X딸 이슬기가 이야기하는 꿈같은 여행 이야기
-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아빠)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아빠, 배낭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했는데, 옆에서 들은 아내가 “인도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같이 갔다 오지”라고 해서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딸의 보호자로 다녀오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딸) 방학 마다 홀로 장기 여행을 다녔다. 인도로 여행지가 선정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고, 은퇴 후의 아빠가 조금은 심심해 보여서 아빠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점 (아빠) 멋모르고 따라나선 여행이라 특별히 준비단계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인도는 여행초보가 감당하기에는 처음 며칠간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또한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는 등 잔소리로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섧기도 했다. 그때만큼 한국에 있는 아내가 보고픈 적은 없었다. 처음엔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복수(?)를 단단히 하리라 하고 그냥 참았는데 나중에는 방어 차원에서 가끔 대들기도 했다. (딸) 배낭여행을 처음 떠나는 아빠를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 비행기표 구입 30분, 배낭 꾸리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책 한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냈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을 싸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믿을 사람은 그 넓은 곳에 아빠와 나뿐이었다.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느라 자연스럽게 동지애로 똘똘 뭉쳐졌다.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싸우면서 친해졌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서 발견한 점 (아빠) 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본 딸의 모습은 거의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저런 강단도 있었네, 나의 유전자에 저런 면도 있다니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훌쩍 커 버린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딸)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규선’은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멋진 남자이자, 내가 아끼는 한 사람이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아빠) 인도다. 처음은 늘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가된다. 그땐 너무 몰랐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간다면,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피하지 않고 정말 즐기고 싶다. 물론 그때도 딸이 옆에 있다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슬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딸) 아빠와 함께 한 처음 여행지, 인도다. 아빠와 늘 이야기 한다. 다음에 가면 카메라 하나만 메고 가보자고. 바닥에 깔린 똥도 신나게 즈려 밟아보자고. 여행 후 서로에게 생긴 변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빠) 여행을 갔다 온 후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젠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었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이 무엇을 하던 “자신의 의지대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보다 확실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딸)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딸/아빠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분신인 자식과의 여행은 부모를 행복한 추억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다. 가능하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곳으로 떠나자. 우리에겐 인도의 열차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산장이 그런 곳이었다. 부녀가 함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빠) 첫 번째 책은 딸아이의 생일에 맞춰서 냈는데, 두 번째는 나의 생일이 있는 올해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슬기의 “아빠 여행 같이 갈래?”라는 말이 떨어지면 “내 새끼에게 여행이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고 단박 눈치채고 “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딸) 6월에는 엄마와 배낭여행을 떠난다. 가능하다면 그다음 여행은 엄마·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고 싶다. >>>>>>>>>>>>>>>>>>>>>>>>>>>>>>>> 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퇴직 후,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딸 바보’.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는 ‘추억 부자’.
- 2016-05-23 09:07
-
- [생활건강] 궁금하네! 거리의 한복.
- 한복은 참 아름답다. 가지런히 역삼각형으로 내려오는 새하얀 동정 깃에 고운 빛의 저고리와 치마가 이루는 조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 드레스에 비할 바 없이 멋지다. 예쁜 색상과 날렵한 선도 멋지지만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감춰지는 치마의 풍성함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 입으면 행동하기에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 상용하는 옷이 되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으로 명절 때나 찾아 입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리에서 한복 입은 아가씨가 눈에 띄인다. 특히 서울 삼청동부터 광화문까지 거리엔 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많이 보인다. 삼청동, 광화문뿐 아니라 인사동 근처에서도 한복 차림의 젊은 여성을 자주 볼 수 있다. 일본 지자체가 관광지에서 일부러 기모노(着物)를 입고 다니게 해 그곳의 명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한국의 한복 아가씨도 특별히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한복을 선보이려고 서울시가 진행하는 행사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정 지자체가 입혔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한복 차림엔 큰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 한복 아가씨가 단정하게 머리도 땋고 댕기도 들였으나 그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머리는 산발한 듯 풀어헤치고 치마의 뒷부분은 여미지 않은 채 벌어져 속에 입은 청바지가 훤히 나타났다. 이렇게 입을 거면 입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자는 당연히 이 일을 벌인 곳이 서울시라고 여기고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보았던 보기 싫은 모습에 대해 주의해 달라고 건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산콜센터에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부 소속 어느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곳에 문의해 봐도 거리의 한복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한다. 그러면 거리에서 보이는 수많은 한복 아가씨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던 중 인사동에 갈 일이 생겨 창덕궁 앞 정류장에 내렸는데 마침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눈에 보였다. 앞쪽에 즐겁게 깔깔대는 예쁜 한복 아가씨 세 명에 다가가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하며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한복 입고 다니는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자기들은 강원도에 사는 대학생인데 서울에 놀러 와 한복 체험을 하는 중이라 한다. 안국역 근처에 한복 대여해 주는 집이 있어 돈을 내고 한복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고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재미있다고 웃는다.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한복을 빌려 입고 하루를 즐기는 당당하고 멋진 젊은 여성들이었다. 기왕 빌려 입고 즐길 것이면 단정하게 입고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복을 입은 것도 고맙고, 이상하게 입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지적질 대신 칭찬만 해줬다. 아울러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 세 명의 예쁜 대학생이 즐거운 한복 체험을 했기를 바란다. 흔쾌히 포즈도 취해 준 학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오늘의 나들이를 마쳤다. [경봉궁 부근서 한복대여점 삼삼오오 운영하는 정병훈 대표 일문일답] -젊은이들이 한복 입기에 열광하기 시작한 시기는. “3~4년 전부터다. 한복을 입고 에펠탑을 비롯한 유명한 여행지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는 것이 인기를 끈 것이다.” -대여 비용만 30만원은 넘는데 한복을 왜 굳이 가지고 가는 걸까. “일종의 놀이다. 재미있으니까 돈을 기꺼이 낸다.” -외국인 여행객과 한국 학생 중 어느 쪽이 더 큰 고객인가. “못 믿겠지만 한국 학생이다.”
- 2016-04-29 18:18
-
- 2016년 한류스타 ‘나’라고 전해라!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 2016-02-18 10:05
-
- [우리 세대 이야기] 1961년生, 방황하던 청춘, 문학서 길 찾고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2-12 08:43
-
- [BML 칼럼] 선물은 받아서 남에게 주는 것이다
- 정필례 선생님은 예뻤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던 정 선생님은 학교 행사 때면 도맡아 풍금을 치곤 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1958년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의 첫 담임교사였습니다. 약간 탁한 듯한 목소리,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왔지만 남들보다 크고 둥근 얼굴, 운동장에서 풍금을 치러 나갈 때 조금은 멋쩍어하던 표정, 바람에 하늘거리던 개나리색 원피스가 생각납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고교 생물교사였던 아버지가 당신의 저서 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지만 한 학년 동안 아이를 가르쳐준 데 대한 사은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뭔가 더 있었는데 내 기억에는 그 이상한 책만 남아 있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신문지로 싼 물건을 주셨습니다. 소중하게 집에 들고 가다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호호 손을 불어가며 풀어보니 연필 지우개 공책 등 학용품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정필례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간 직후 담임이 되신 우문자 선생님과 정 선생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학생 인수인계를 한 셈인데, 정 선생님은 “애가 수가 좁아”라고 말했고, 우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계단 밑에 서 있던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정 선생님의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가 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괜히 아무에게도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궁금해 하다가 어떻게 해선지 수줍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13년 3월에 쓴 제 글을 축약한 것입니다. 선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억 속의 창고를 뒤지니 이 일이 맨 먼저 떠오릅니다. 정필례 선생님, 지금 어디 계시나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면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인데 살아 계신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이용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전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도 있지만 아마도 기억 속의 선생님을 온전히 그대로 보전하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나 선물까지 받으면 일생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정필례 선생님은 이름도 참 소박하고 수수합니다. 필례 길녀 탄실이 언년이...이런 우리나라 고유한 이름을 생각하게 하는 정겨운 이름입니다. 정 선생님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때의 악몽과 대비됩니다. 그때 만난 담임교사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유독 저를 못 살게 괴롭혔습니다. 남들 앞에서 일부러 본보기로 혼내고, 걸핏하면 아버지의 초등학교 때와 나를 비교하곤 해서 학교에 가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뒤 무슨 선물을 받았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서울에 가 있는 고종사촌 누나로부터 받은 크리스마스카드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었나? 반짝반짝 은가루가 빛나고 사슴이 끄는 썰매와 산타할아버지 그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동화책이고 꿈의 나라였습니다. 그 뒤 자라면서 많은 연하장을 받았지만 그때의 감동과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서예 선생님으로부터 환갑 기념으로 대형 벼루를 선물 받은 일이 있습니다. 몸소 디자인한 벼루에 뛰어난 전각 솜씨로 ‘硯田無荒 筆耕有年(연전무황 필경유년)’, 벼루밭에 흉년이 없고 붓농사가 늘 풍년이기를 바란다는 글을 새겨주어 저를 감동케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게 뭔가? 한자를 풀이하면 膳은 반찬을 말하는 것이니 본뜻은 ‘잘 갖추어진 요리’라고 합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문 시대에 잘 갖추어진 요리는 최상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설이지만 이 명절에 사람들이 보내는 선물에는 역시 먹을거리가 가장 많습니다. 함께 먹고 어울려 나누어 먹는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사회를 따뜻하고 훈훈하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물이 사람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고(잠언 18:16), 폭넓게 친구를 사귀게 하며(잠언 19:6), 맹렬한 분노도 멈추게 한다고 돼 있습니다(잠언 21:14). 이런 선물에는 나름대로 일정한 조건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에는 조건이 없다고 말하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선물이나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선물에도 조건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신의 분신인 자식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고, 스승에게는 자신을 뛰어넘을 제자 자체가 가장 큰 선물이어서 그런 걸까요? 사랑은 내리사랑만이 더 진하고 선물도 내리사랑만이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스승도 선물을 받기는 합니다. 동양에서는 처음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속수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를 묶은 것으로,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입니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이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고,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한 자에게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어렵게 대학에 다니다가 몇 백 달러인지 아주 적은 돈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 가 고학을 한 끝에 지휘자로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준 장학금이나 대학 알선, 아르바이트 자리 주선 등 모두가 잊을 수 없는 선의이며 감동적인 선물이었답니다. 그래서 고마운 분들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했을 때 “Pass it on”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에게서 받은 것을 나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로 갚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패스 온’을 실천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패스 온’을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패스 온’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마친 학생들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고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바로 ‘패스 온’의 선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생각하면 반성부터 하게 됩니다. 자식들에게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해본 적이 없고 가끔 책이나 사주었는데, 언제부턴지 책 선물이란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한 일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설 명절이 가깝고 학생들의 한 학년이 끝나가는 졸업과 종업의 시기입니다. 선물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점검해볼 시기이기도 합니다. 오고가는 선물 속에서 주고받는 정과 마음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16-02-05 13:44
-
- [브만 사] “은퇴 후 추락한 기분… 다시 일하며 감사할 줄 알게 됐죠”
- 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 2015-11-12 07:40
-
- [MOVIE interview] 판타지 호러 영화 ‘손님’ 김광태 감독
- 탄탄한 연기력과 강렬한 개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두 배우, 류승룡과 이성민을 한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됐다. 김광태 감독의 판타지 호러 영화 ‘손님’은 마을의 권력자 ‘촌장’ 역을 맡은 이성민과 마을에 찾아온 ‘손님’ 역의 류승룡 사이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통해 예사롭지 않은 긴장감을 선보인다. 단순한 대립이 아닌 공존과 배척, 신뢰와 배신을 입체적으로 오가는 두 배우의 불꽃 튀는 액션과 연기는 작품의 공포와 재미를 배가시킬 예정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MOVIE interview>>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손님’이라는 단어를 ‘두려움’이라는 뉘앙스로 전환시켜 영화로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시나리오를 구상할 즈음, 사회적으로 ‘고용’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습니다. 비정규직, 인턴제도, 청소년 아르바이트 등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동화·전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약속’과 ‘고용’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릇에 담아 앞으로 더 심각해질 이 문제를 관객에게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제목인 ‘손님’은 중의적인 의미로 이방인, 타자, 약자, 소수자들을 의미하는데 ‘고용’과 ‘약속’의 피해자들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숨겨진 의미는 영화에서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얻어갈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국 사회는 ‘집단’을 유독 강조, 강요한다고 느꼈습니다. 수많은 종친회(혈연), 동창회(학연)와 향우회(지연) 같은 모임들은 구분과 구별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앞만 보고 가야 한다’만을 생각하며 뛰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테두리 밖의 타인을 배척하지는 않았는지, 개발과 발전 그것이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주인공을 맡은 두 중년배우 류승룡과 이성민의 활약이 영화에는 어떤 시너지로 표출됐나요? 류승룡씨는 익살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떠돌이 악사, 이성민씨는 마을의 권력자지만 그 역할에 피로감을 느끼는 촌장 역할입니다. 류승룡씨는 ‘난타’ 경험이 있어 음악적 감각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래서 3곡의 주요 피리 연주를 대역 없이 직접 소화했습니다. 이성민씨는 처음 하는 악역임에도 지켜보는 스태프들까지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무시무시하면서 멋진 악당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관객들은 부드러움과 딱딱함, 따뜻함과 차가움의 충돌을 몸으로 느낄 것이며, ‘극단과 극단을 오가는’ 두 배우의 최고 연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에게 영화 ‘손님’의 관전 포인트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류승룡, 이성민, 천우희, 이준 등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이 가장 클 것이라고, 감독 이전에 관객으로서 장담합니다. 그리고 시·청각적으로 중년 관객들의 기억 속에도 있을, 그 시대가 잘 재현된 배경에 낯선 판타지와 아름다운 음악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5-07-07 14:33
-
- [취준생, 네 맘 안다] 3. 달라진 취업 트렌드와 자식에게 주는 조언
- 경영학을 전공한 지방대생의 한탄이 이어진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2년 넘게 100번이 넘는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면접을 본 것은 5번 이하였고, 최종 면접에서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요즘 기업들이 인문계 학과를 선호하지 않으며 지방대생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한다. 50명을 뽑는 대기업 경쟁률이 400 : 1이라고 한다. 생각을 바꾸라고 했다. 400 : 1이 아닌 1만9950명의 탈락과 50명의 합격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업의 채용 프로세스는 크게 4단계로 이루어진다. 서류전형, 인·적성 검사, 면접, 신체검사이다. 서류전형은 원하는 기업에 주어진 기일 안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한다. 많은 기업들이 스펙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입사지원서를 통해 지원자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고, 무슨 경험을 했으며, 자신의 기업의 인재상이나 핵심가치에 부합되는가를 확인한다. 인·적성 검사는 지원과 동시에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그러나 S그룹처럼 자신들이 개발한 검사지를 통해 별도 일시를 정해 인·적성 검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통상, 서류전형과 인·적성 검사를 통해 최종합격자의 5배수 정도를 면접대상자로 선정한다. 앞 기업의 경우, 2만 명이 지원하여 1만9950명이 이 과정에서 떨어진다. 면접은 1:1면접, PT면접, 집단토론, 최종 임원진 면접으로 이루어지고, 합격자에 한해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이를 통과한 사람이 최종합격하게 된다. 50명 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성장 시대인 1980년대와 저성장 시대인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1950~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 말과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비율은 결코 40%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은 90% 수준이다. 1970~1980년대는 성장 시대였다. 지금은 저성장 시대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자신이 입사하고 싶은 회사를 골라 가던 행복했던 시절은 지났다. 기업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시대이다. 요즘 채용 트렌드를 보면 크게 6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이다. 스펙을 안 본다고 하지만, SKY, 포항공대, KAIST출신은 여러 회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의 학생들도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고 있으며, 지방대생은 100번 넘게 떨어졌다는 하소연을 한다. 둘째, 이공계 특정학과 편중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화학, 기계, 전기, 전자, 건축 등 일부 이공계 학과는 독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1970~1980년대에는 인문계가 더 높거나 50 : 50의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80~90 : 20~10 수준에 있다. 인문계가 선호하는 지원 부서까지도 이공계가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계 비경영과의 경우, 고민의 정도는 심해진다. 셋째, 인턴제도의 확대이다. 회사가 면접을 통해 입사 지원자를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을 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인성이 안 좋은 직원이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크다 보니,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입사 여부를 판단하는 인턴제도를 선호한다. 과거에는 특별한 일이 없이 인턴 제도를 운영했다면, 요즘은 도전과제를 부여하고 다각적 측면에서 함께 할 사람인가를 평가한다. 넷째, 면접의 강화이다. 1980년대에는 일반적인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직무보다는 회사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입사지원자 입장에서는 그 회사와 하고 싶은 직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입사한 사람들은 PC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인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의 지식으로 면접에 임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동아리를 만들어 개인면접, PT면접, 집단토론에 임하는 예상 질문을 만들어 완벽하게 외운다. 어느 지원자는 예상 문제 100개를 선정하여 답안을 작성하고 외우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모의 면접도 수차례 실시했고, 같은 회사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등의 많은 노력들을 한다. 면접을 하다 보면, ‘내가 면접관이 아니고 지원자였다면, 나는 100%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즘 지원자는 면접에 대한 엄청난 준비를 하고 온다. 다섯째, 경력사원 채용의 확대이다.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하여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저성장이고 치열한 경쟁 하에서 백지 상태인 신입사원을 채용하여 2~3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입장이다. 여섯째, 직무 중심의 채용으로 심화되고 있다. 1970~1980년대에 대학에서 배운 전공의 깊이는 법대 출신이 법전을 빨리 찾는 수준으로, 회사에 와서 대부분 새롭게 업무를 배웠다. 회사가 필요로 하면 그곳에 배치 받아 일했다. 지금은 직무 중심의 채용이 늘고 있다. 이 직무를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과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 기준이 아니면 지원 자체가 안 되게 하는 곳도 있다. 산학협동 등을 통해 특정학과 출신들을 ‘선확보’ 개념으로 뽑는 곳도 있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정 수준의 사전 지식을 대학에서 습득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입사했다 할지라도 신입사원 입문과정, 수습기간이라는 혹독하고 타이트한 심사기간을 설정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사원은 걸러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선택한 요즘 젊은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들ㆍ딸들에게 무엇을 조언할 것인가? 취업이 어렵다. 그렇지만 취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많은 기업들이 취업공고를 하고 신입사원들을 채용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너의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자녀들에게 3가지 조언을 해주길 바란다. 첫째, 먼저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확실하게 선정해 놓으라고 조언해야 한다. 3박 4일의 중국 여행을 위해 한 달을 준비하면서, 인생 3분의 1 이상의 영향을 미치는 기업과 직무의 선택을 임박해서 결정한다. 심한 경우에는, 아무 회사나 지원한다. 회사 홈페이지 보고, 저장해 놓은 입사지원서를 수정해 전송하고는 떨어졌다고 힘들어 한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사전에 정했다면, 3~4학년 때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그 회사에서 하고, 그 회사를 방문해 충분한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야 한다. 둘째, 절박하고 악착같아야 한다. 자녀들이 노력한다는 것은 알지만, 절박하게 노력하는가, 악착같이 준비하는가를 물어 봐라. 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매일 15시간 이상 연습을 하며, “내가 이 정도가 됐다고 생각할 때, 내 예술 인생은 끝이다.”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한 지원자는 클리어 파일에 그 회사의 자료를 100매 이상 준비해 완벽하게 외웠다고 한다. 1주일에 한 번 이상 그 회사와 원하는 직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내가 지원한 회사가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회사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조언해야 한다. 셋째, 실패를 통해 인생을 배우며 긍정적 사고를 습관화하라는 조언이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슬프고 아쉽고 힘들겠지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을 길고 멀리 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줘라.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시켜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 2015-06-02 09:45
-
- [특집_1955년生 블루스②]진수희 前 장관이 말하는 1955년생의 힘
- 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strongman55@etoday.co.kr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 2015-01-05 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