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를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중이었다. 때마침 얼마 전 삼총사 친구와 보고 온 영화 ‘버닝’을 소개했다. ‘버닝’은 예고편도 몇 번 보았고 칸 영화제에서 수상작으로 꼽힌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큰 기대를 했던 작품이다.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 여부이다. 믿고 보는 감독이나 배우가 있다는 말이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작품으로 제71회 칸영화제에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발표 직전까지 유력 수상작이었다는데 예상과 달리 상을 받지 못해 아쉬웠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유아인은 선량한 얼굴로 역할에 따라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연기력을 가졌다. JTBC 드라마 '밀회'(2014)에서 청순하지만 은밀한 느낌으로 연상녀와의 사랑을 거침없이 연기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영화 ‘베테랑’(2015)에서는 재벌 2세가 갑질하는 비열한 연기를 무섭도록 잘 표현했다. 극 중 인물에 따라 놀라운 변신을 해온 유아인이 '버닝'에서는 또 어떤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궁금했다.
'버닝(burning)'의 뜻은 그저 ‘불탄다’라는 뜻으로만 알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열정적으로, 열렬히, 엄청나게 빠져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다. 주연으로 유아인과 신인 전종서,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스티브 연이 나온다. 스티브 연은 매끈한 외모로 미스터리한 역을 잘 연기했다.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종수(유아인)는 작가 지망생이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해미는 종수에게 여행을 떠난다며 키우던 고양이에게 밥을 주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종수가 해미의 집에 갈 때마다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만 감돈다.
해미가 돌아오는 날 낡은 트럭을 타고 공항으로 마중 나간 종수는 그녀와 함께 있는 벤(스티븐 연)을 만난다. 보기만 해도 부유함이 흐르는 그는 하는 일 없이도 방배동 저택에 살며 우아한 생활에 고급 외제차를 탄다. 종수의 구질구질한 환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해미는 종수와의 만남에 항상 벤을 동행한다. 그때마다 종수가 느꼈을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게 사는 자신에 비해 아무 일 안 하고도 여유로운 벤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더욱 힘든 건 자신이 좋아하는 해미를 보며 하품을 하는 등 시큰둥해하는 벤의 태도다. 그 후 해미가 연락이 되지 않자 종수는 벤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는 뚜렷한 결말을 드러내지 않고 모호하게 막을 내린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 그 뒷이야기를 상상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함께 영화를 본 세 사람 사이에서도 결말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했다. 진실을 알 수 없어 다소 찜찜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사회 젊은이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의 현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열린 결말은 아쉽지만, 보는 동안만큼은 참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었던 영화다.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가족들이 주고받는 ‘단톡’방에 아들애가 보낸 사진과 글이 떴다. 생후 한 달쯤이나 지났을까 싶은 새끼고양이 두 마리다.
“공사판에서 주움”
톡을 확인한 필자와 남편, 딸애가 각자의 공간에서 이모티콘이나 글을 올렸다. ‘에미가 찾을 텐데 새끼가 있던 자리에 다시 놔줘라, 까페에 올려서 입양할 곳을 알아봐라, 지금 뭘 먹고 있나, 귀는 깨끗한가, 화장실 준비는?...’
아들애는 새끼고양이를 주워 온 즉시 밥(사료)과 모래를 준비했단다. 두 마리가 함께 있으니 집을 비워도 부담이 덜 하고 서로 별 탈 없이 잘 지낸다고 했다. 내가 고양이 털 빛깔로 ‘깜냥’이와 ‘누렁이’이로 표현하자 식구들은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면 정드니까 A, B로 하잔다. 자취하며 대학에 다니는 아들애는 한창 시험기간인데 어쩌다 길냥이들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주워 온 곳이 공사장이어서 데려오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었단다.
우리는 저마다 속한 모임의 까페나 단체 카톡방에 깜냥이와 누렁이의 사연을 올렸다. 시간이 얼추 지나 한 지인한테 연락이 왔다. 검은고양이 한 마리만 키우고 싶은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려달란다. 아들애는 두 마리가 같이 입양되는 줄 알았다가 실망했다. 깜냥이가 입양되고 누렁이가 혼자 남으면 우리 ‘상냥이’와 같이 키워야겠다고 나는 내심 마음먹고 있었다.
상냥이는 작년 가을, 아들애가 집 근처에서 ‘냥줍(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는 뜻)’했다. 에미가 주변에 있을까봐 두고 봤는데, 이틀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아무래도 상냥이가 자기를 선택한 것 같다면서 키우게 되었다. 상냥이는 아들애 가운뎃자 이름과 길냥이의 냥이를 붙여 ‘상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난 겨울방학 때, 아들애가 상냥이를 집에 데리고 왔다. 마치 신생아를 맞이하는 것처럼 식구들 관심은 온통 상냥이에게 쏠렸다. 3색깔로 암놈인 상냥이는 저를 쓰다듬기라도 하면 손을 물었다. 에미한테 옮았는지 귀에는 진드기가 있었다. 엉덩이가 앙상할 정도로 영양상태도 부실했다. 두 애들이 번갈아가며 상냥이를 데리고 병원에 드나들었다. 진드기치료를 받고 영양제를 구입했다. 온라인을 뒤져 사료와 별개로 습식사료 캔과 짜먹는 닭고기맛 츄르, 건빵에 별사탕 골라먹듯 사료에 넣어주는 맛과자 등을 구매했다. 게다가 장난감은 흔들면 반짝이며 팔랑거리는 것과 불빛을 따라 뱅뱅 돌게 하는 것으로 지루함을 피하고 운동량을 생각해서 골랐다.
상냥이가 에미로부터 받아야 할 ‘사회화’가 덜 된 만큼 식구들은 세심하게 관찰하고 보살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날 상냥이 울음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알고 보니 발정이 난 것, 수술은 불가피했다. 날짜를 예약하고 수술하고 온 날, 플라스틱 깔대기가 상냥이 목에 둘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불편스럽고 털 고르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허공에 몸짓만 계속 움직이는 게 안쓰러웠다. 딸애는 헝겊으로 된 에코백을 잘라 플라스틱 깔대기를 빼고 대신 씌웠다. 목 둘레가 번거롭긴 해도 훨씬 움직임이 유연했다. 소독하고 약을 먹이고 수술한 곳의 실밥을 풀러 병원에 가는 일을 겪으면서 상냥이는 점점 상냥스럽게 변해갔다.
상냥이의 ‘야~옹’ 하는 소리는 상황에 따라 감이 다르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냉큼 현관 앞으로 나와 꼬리를 바짝 세운다. 왜 이렇게 오래 있었어,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라는 표정으로 자기 몸을 슬쩍 비빈다. 간식을 줄 거라는 건 소리로 알아채며 식탁으로 다가온다.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기대의 눈빛은 애절하다. 이제 저음으로 ‘앉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앉은 자세를 하며 기다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울달린 쥐장난감을 물고 와서 ‘호~옹’한다. 제 딴엔 전리품을 내세우는 것 같다. 때로는 냉정하게 토라져서 혼자 고독한 뒷모습을 보인다. 식구들이 얼굴을 자기 얼굴에 들이밀면 분홍젤리같은 손바닥으로 살살 토닥인다.
상냥이는 이제 10개월 정도로 사람으로 보자면 질풍노도의 18세에 해당된다. 상냥이와 함께하며 우리의 생활영역은 예전 같지 않다. 문이 열린 어느 곳이든 침범하며 책상 위는 말할 것도 없고 책꽃이, 장롱, 냉장고, 에어컨 등 물건의 꼭대기는 모두 올라간다. 털은 또 어떤가. 바닥청소는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돌돌이’를 돌리고 박스테이프나 어쩌다 돌아다니는 스티커 등으로 털을 찍어낸다.
아들애가 깜냥이와 누렁이를 데리고 출발한다고 했다. 상냥이가 새끼고양이들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척 궁금했다. 새끼고양이와 9개월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에미처럼 돌봐줄지, 아니면 시샘과 질투를 할지 걱정과 기대가 교차됐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아들애한테 연락이 왔다. 출발하기 직전, 까페에 올린 글을 보고 동아리선배가 두 마리를 같이 입양하겠다고 했단다. 다시 가족톡의 알람이 계속 울렸다. ‘오~정말다행!!, 형제끼리 헤어지는 줄, 누군지 복받을 거얌’ 이라는 글과 이모티콘이 줄줄이 떴다.
어쩌다 한 식구가 된 상냥이는 고양이로 태어났으나 점점 개의 ‘충성심’을 보이고, 때로는 ‘냥냥’ 거리면서 간식을 내놓게 유도한다. 귀차니즘의 딸애가 날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손톱을 깎아주며 눈곱과 코딱지 떼 주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게 만든다. 아프면 보험이 안 되는 진료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더 적극적인 아르바이트가 필요하다며 아들애를 움직이게 한다. 이 모든 걸 감내하고라도 우리는 날마다 ‘묘한 가족’의 매력과 함께한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 버킷리스트.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애써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도 어떻게 이뤄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주제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과 사례자의 조언을 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앞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1위를 차지한 ’재능기부‘에 대해 알아봤다.
도움말 한국재능기부협회 최세규 이사장, 오산시 노인장애과 라애신 주무관
재능기부, 그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재능기부협회 최세규 이사장은 “개인이나 기업, 단체 등이 가진 재능을 소외된 곳에 나누어주는 것을 ‘재능기부’라 할 수 있다”며 “한시적인 거창한 후원보다는 목소리 기부, 헌혈, 어르신 안마 등 소박한 나눔과 실천이라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소소한 능력만으로도 실천하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라는 것. 최 이사장은 “새롭게 특별한 재능을 만드는 것보다는 오랫동안 익힌 기술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재능을 탐색해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나눔을 향한 진정한 마음가짐”이라 강조한다.
재능 분야 탐색, 소소해도 괜찮다
‘어떤 분야에 재능기부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자기 능력을 증명하거나 전문성을 올리기 위해 자격증 취득, 학위 수여 등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 열정은 좋지만,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기에 자칫 재능기부의 시작이 차일피일 미뤄지기 일쑤다. 도움 주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더 잘하려고 무언가를 채우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부터 나누며 노하우를 다져가는 게 좋다. 최세규 이사장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재능을 나누려는 마음가짐이 첫째”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을 특정하여 찾기보다는, 사소한 것도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재능기부처 찾기, 발품을 팔자
대체로 재능기부를 결심한 이라면 어떤 재능을 나눌지에 대해 미리 정해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어디에 가서 문을 두드리느냐는 것. 재능기부협회의 경우 온라인과 전화 접수를 통해 재능기부 공급자와 수급자를 연결해준다. 그 외에도 몇몇 웹사이트나 지역 평생교육원 홈페이지 등에서 이러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웹서핑을 통해 재능기부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막상 인터넷 검색창에 ‘재능기부’라 치고 관련 키워드를 포함한 사이트에 들어가면 대부분 아르바이트 또는 프리랜서 일자리 알선 서비스가 주를 이룬다. 순수 봉사 차원의 활동을 기대한다면 이 단계에서 막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 앱 역시 마찬가지다.
재능기부 경험자들은 나누려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일상 범위 안에서 직접 찾아 나서는 것이 효과적이라 말한다. 아파트 주민 알림판이나 교회 게시판 등에 스스로 재능기부 활동을 홍보하거나 어린이집, 노인정, 요양원, 돌봄센터 등 도움을 주고 싶은 곳에 직접 방문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처음엔 가까운 곳에서 소소하게 시작하지만, 입소문을 타거나 지인의 추천 등을 통해 활동 영역과 분야를 넓힐 수 있다.
자격증보다 중요한 건 소통 능력
2014년부터 ‘5070청춘드림팀’ 시니어 재능기부단을 운영하는 오산시 노인장애과의 라애신 주무관은 “자격증만 믿고 재능기부를 시작했다가 난관에 부딪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재능기부는 대체로 누군가에게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수업 형태로 이뤄지는데, 강의 경험이 부족한 이들의 경우 좋은 마음으로 왔다가 되레 자신감만 떨어져 돌아간다는 것. 내가 많이 아는 것과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은 것이라도 듣는 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의 강의 노하우를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 주무관은 “초보 재능기부자들은 강의 스킬로 인한 애로사항이 접수가 잦다. 그럴 땐 베테랑 재능기부자를 매치해 강의를 비법을 공유하게 한다”며 “강의 경험이 없다면 다양한 수업을 참관하고 연구해보면 도움이 된다”고 제안한다. 아울러 재능기부 수급자의 대부분이 노인, 아이, 또는 소외된 이웃이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하려는 배려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두 썰매 종목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메달 소식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체육대학교 강광배(姜光倍·45) 교수다. 그는 동계올림픽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썰매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제자를 발굴하고 육성에 힘쓴 그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썰매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썰매의 아버지’, ‘한국 썰매계의 문익점’, ‘한국 썰매의 개척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국 썰매의 시초부터 함께한 강광배 교수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썰매의 뗄 수 없는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때는 그가 대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첫 루지 국가대표 탄생
“휴무 날에 생전 처음으로 스키를 타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키에 푹 빠져버렸죠. 처음으로 확실한 꿈이 생겼어요. 국가대표가 되는 것.”
그의 스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대학부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스키장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싶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 강습 도중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절망하던 그에게 한줄기의 빛처럼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학교 게시판에 붙은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루지 강습회 안내문이었다.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루지가 뭔지도 몰라서 찾아봤는데 누워서 타는 썰매더라고요. 무릎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종목이다’ 하곤 바로 강습회에 신청서를 냈죠.”
국제루지연맹에선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파견해 한국 선수 지도를 도왔다. 말도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 해가며 루지 조종법을 익혔다. 제대로 된 장비나 훈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선발전이라곤 그냥 아스팔트 언덕길에 꼬깔콘 모양의 라바콘을 세워두고 누가 빨리 장애물을 피해 내려오나 초시계로 재는 거였어요.(웃음) 썰매에 바퀴를 달고요.”
아직 무릎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잘못될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품은 국가대표의 꿈이 훨씬 더 컸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했거든요. 오히려 몸을 더 과감하게 던졌죠.”
그 결과 3명을 뽑는 선발전에서 2등을 기록했다. 1등과 3등을 한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지를 그만뒀다. ‘루지는 비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선 서둘러 두 자리 공석을 채워야만 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선수가 강광배의 3년 후배인 이기로와 현재 봅슬레이 대표팀 감독인 이용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국 첫 루지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1996년 캐나다에서 열린 첫 전지훈련, 강광배 교수는 이날을 회상하며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랙에 하도 많이 부딪혀서 저녁만 되면 선수들끼리 서로 약 발라주느라 바빴어요.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썰매를 탈 때마다 연습복도 다 찢어졌는데 매번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찢어진 데를 테이프로 붙여가며 훈련을 했어요.”
마땅한 장비도 훈련장도 경기장도 없었지만, 루지 국가대표 3인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무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처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강광배는 출전 선수 34명 중 31위를 기록했다. 기권한 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꼴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썰매를 가장 잘 탄다는 선수들은 다 모인 거잖아요.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오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뒤 강광배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체육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첫째 ‘루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둘째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인스브루크 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달받았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까지 겹쳤다.
“루지를 배우러 갔는데 가자마자 목표가 사라져버린 거죠. 유학 가기 전에 선생님, 친구들, 가족한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렸다는 그는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던 강광배는 어느 날 스켈레톤 선수이자 인스브루크 학생인 마리오 구겐베르거를 소개받는다. 루지를 탈 수 없었던 그에게 스켈레톤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당시 트랙을 두 번 이용하는 데 들었던 비용은 약 5만 원. 스켈레톤을 타기 위해 그는 3~4시간 정도 폐지와 캔을 주웠다. 그래봐야 겨우 두 번 정도 탈 수 있었다.
“낮에는 민망하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밤에 나와서 폐지랑 캔을 주웠어요. 특히 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신문을 보거나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주 주우러 갔죠.(웃음) 덕분에 자전거 타고 한 바퀴 쭉 돌면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주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가 스켈레톤에 미쳐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이 54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켈레톤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선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 상태였다.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땐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 번의 태극마크를 다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선 의사의 확인도장과 연맹 회장의 직인이 찍힌 라이선스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스켈레톤 연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자른(?) 대한루지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 10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1999년, 우리나라도 국제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 회원국이 됐다.
“매년 국제연맹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2000년에 제가 참석했어요. 갔는데 태극기가 딱 걸려 있더라고요. 뿌듯했죠.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킨 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요.”
1998년 유학길에 올라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나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는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제가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썰매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이 아니잖아요. 그땐 제가 미쳐 있었으니까요.(웃음)”
이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강광배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출전을 끝으로 모든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썰매부를 맡으면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을 발굴하는 등 한국 썰매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노력해서 딴 메달입니다. 마치 제가 다 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이고 농사가 잘된 거죠.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잘 성장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이젠 저보단 우리나라를 빛낼 선수들과 감독, 코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썰매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썰매 바보인가보다.
“가장 힘든 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어요.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봤으니 미련도 여한도 없습니다.”
서둔야학교 학생 중 몇 명은 주로 인근에 있는 ‘푸른지대’로 일당을 받고 일을 다녔다. 푸른지대는 그 당시 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는 서둔벌이 온통 선남선녀의 물결이었다.
농대 후문에서 도보로 3분 이내 거리의 유원지로 개발이 잘된 푸른지대는 갖가지 수목이 우거졌는데 커다란 백합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빨갛게 핀 해당화, 아침 이슬을 머금고 보랏빛 또는 흰색으로 청초하게 빛나던 아이리스,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 목련이 있었고, 주목, 눈향나무 등의 관목들도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푸른지대 주인집은 많은 화초가 우거진 곳에 들어앉아 있어서 언제 봐도 녹색 지붕의 빨간 벽돌 집은 ‘꿈의 집’이었다. 왼쪽의 커다란 2층 건물은 식당으로 썼고 오른쪽에는 딸기 판매점이 있었다. 그중 철골조로 둥근 아치를 만들어 그 위에 등나무를 얹었는데 보랏빛 등나무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련했다.또 정원 중앙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로도 수국, 해당화, 장미 등이 피어 있었고 집 앞에는 함박꽃의 자줏빛 웃음이 흐드러지곤 했다.
아침 8시쯤에 일을 나가면 우선 딸기를 담는 채반부터 물에다 불려서 솔로 닦아 헹군 후 건조시켜야 했다. 5월의 태양은 눈부셨고 초록빛 타원형의 잎사귀 밑에는 빨갛게 익은 딸기가 수줍게 숨어 있었다. 이제 막 하얀 꽃이 핀 것도 있었고 대개는 중심이 되는 가지에 아직 익지 않은 올망졸망 크고 작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익은 것은 딸기 한 그루에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였고 어느 것은 아예 익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이슬이 딸기 잎에 맺혀 있다가 딸기를 따려고 잎사귀를 젖히면 딸기 밑에 깔아둔 볏짚 위로 이슬 진주가 '또르르’ 굴러내리곤 했다. 또 어느 때는 조그맣고 귀여운 청개구리가 잎에 앉아 가슴을 ‘팔딱팔딱’거리다가는 ‘펄쩍’뛰어서 달아나기도 했다.
딸기를 딸 때는 다른 것을 건드려 고개를 부러뜨리면 안 되었다. 아주 조심해서 익은 것만 따되 줄기를 너무 길게도 그렇다고 짧게도 자르면 안 되어, 엄지와 검지로 꼭지를 잡고 먹기 좋게 꼭지 줄기가 1㎝ 정도만 달리게 손톱으로 잘라냈다. 그래서 딸기를 따다 보면 어느새 손톱에는 초록빛 풀물이 잔뜩 들어 있곤 했다.
미국 남부의 목화 따는 아가씨들을 감독하던 감독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전체적으로 깡마르고 얼굴이 까만 최 씨 아저씨가 우리를 감독했는데 그분은 늘 장화를 신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필자는 그분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조금 큰 소리만 내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딸기를 딸 때는 앉아서 따면 안 되고 꼭 엎드려서 따야 했다.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늘 반대로 말했다. “좋은 것은 먹고 나쁜 것만 골라 담아라.” 한참 일하다 보면 아침 이슬에 신발이랑 양말이 다 젖어버리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따끔따끔한 5월의 태양에 팔이 까맣게 타다 못해 허물이 벗겨졌다.
딸기는 한 채반에 2㎏ 정도씩 담았다. 채반이 다 차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받쳐 들고 딸기 파는 매장으로 일렬로 행진해갔다. 딸기를 씻을 때는 큰 그릇에 물을 충분히 부은 후 딸기를 가만히 쏟아 붓고 두 손바닥으로 몸체를 살짝 눌러 물에 잠겼다 올라오게 한 다음 건져서 다시 한 번 맑은 물에 헹궈 깨끗하게 건조된 채반에 담았다. 밭에서 금방 따온 것이기에 그 따글따글한 감촉을 씻으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에 따라 좋은 음악을 선별해 들려주는 DJ 일은 농대생들이 교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생상스의 ‘백조’ 타이스의 ‘명상곡’등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소품이 흐르는가 하면 ‘홍하의 골짜기’, ‘여름날의 세레나데’, ‘체인징 파트너’등 부드럽고 달콤한 팝송들이 한낮의 태양 아래 조용히 울려퍼졌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는 그 꿈을 꾸듯이 아름다운 선율이 일시에 나른한 환상의 나라로 인도하곤 했는데 어찌나 필자를 사로잡았던지 지금도 그 흐느적거리는 음의 선율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또한 지금 나오는 곡이 누구의 무슨 곡인지 생각하며 반복해서 들으니 자연스럽게 음악 공부도 되었다.
‘딜라일라’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팝송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주인집 아줌마가 노래 중에 ‘딜라일라’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DJ 보는 농대생들이 "아마 그것밖에는 아는 게 없겠지" 하면서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아줌마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비록 집이 가난해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망정 '지적으론 우리가 우월해' 하며 과시하는 것 같았다.
매점에서는 두 명의 이대생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살집이 넉넉한 여학생이 하는 얘기가 “자고로 미운 여자란 없는 법이란다. 마른 여자는 골격미인이고 살찐 여자는 육체미인, 아는 것이 많은 여자는 지성미요, 좀 모자란 듯한 여자는 백치미인이란다” 했다.
필자는 딸기 따는 일은 초기에 잠깐 했고 이내 매점에서 일을 보았다. 매점에서 일을 보던 우리들은 점심을 특별히 푸른지대 주인집에서 먹었는데 우리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식탁이 풍성했고 간혹 처음 보는 음식들도 눈이 띄었다.
이때 처음으로 야채샐러드를 맛보았는데 그 싱그러운 맛이 기가 막혔기에 기억을 되살려 나중에 집에서 해먹었는데 이상하게도 물만 많고 도무지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까지 ‘마요네즈’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필자가 야채를 준비해놓고는 우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그 당시 필자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흰 색깔이 나는 액체는 우유뿐이었으므로.
필자는 어쩌다 며칠에 한 번씩 점심을 먹고는 거의 걸렀다. 밥을 얻어먹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기에 주인집 아줌마가 먹으라고 몇 번씩 채근을 해도 먹지 않았다. 그때마다 하얀 얼굴, 작은 눈의 아줌마는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니?"
대개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골라낸 찌꺼기 딸기로 배를 채웠다. 다른 사람들은 딸기에 연유를 부어서 먹기도 했다. 대부분은 설탕을 찍어서 먹었지만 필자는 설탕을 찍지 않고, 딸기도 잘 익은 것은 맛이 싱거운 듯해서 덜 익어서 파란 부분이 많은 딸기를 즐겨 먹었다. 그때 딸기 맛의 감별법을 익혀두어서 지금도 어떤 딸기가 맛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당시의 딸기 품종은 주로 ‘대학 1호’와 ‘아모아’였다. 딸기를 사러 매점에 찾아온 손님들은 필자의 피부에 감탄하곤 했다.
"딸기를 많이 먹어서 피부가 고운가보네."
"어쩌면! 이런 시골에 피부가 백옥 같은 아가씨가 있네!"
딸기는 씻어서 채반에 담고 지름이 10㎝쯤 되는 하얀 플라스틱 접시에는 흰 설탕을 적당히 담아서 손님들이 원하는 자리에 배달했다. 갖가지 수목과 화초 사이에 벤치가 놓여 있어 손님들은 거기서 먹었고 때로는 잔디밭에 앉아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젊은 남녀 아베크족들이었고,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예쁜 옷들을 입고 와서는 고운 자태를 뽐내었다.
필자는 그들과 처지를 비교해보며 과연 어른이 되면 딸기를 따는 신분에서 딸기를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신분이 될 수 있을까 하면서 회의에 빠지곤 했다. 여자 손님들의 밝고 화사한 모습이 부러워서 한참 동안 쳐다보기도 했지만 곧 일에 빠져 잊어버렸다.
하루는 한 남자 손님이 손을 씻겠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부어주었다. 그러자 “당케이”라고 말해 우리가 까르르 웃었더니 “아, 독일 말로 고맙다는 뜻이야” 하고 당황해하며 설명했다. 아마도 그 손님은 우리가 땡큐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웃는 줄로 오해했던 것 같다.
푸른지대는 딸기 외에도 수익사업으로 밍크와 앙고라토끼를 키웠는데 앙고라는 눈만 빼꼼 내놓고 온몸이 털북숭이었다. 밍크는 사람도 마음대로 못 먹는 양미리라는 생선을 먹고 살았다.
푸른지대는 어려웠던 시절 우리에게 이모저모로 도움을 많이 준 곳이다. 일자리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어 필자는 열네 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어린 소나무의 묘목을 캐서 나르기도 했고, 햇볕이 따가운 딸기밭에서 일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는 하루 품삯이 20원이었는데 푸른지대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계약을 맺어 푸른지대의 일당표를 가져가면 가게에서 현금처럼 취급해주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니 가게에서는 면발이 가느다란 국수의 양을 20원짜리로 만들어놓았고 주민들은 대개 이 국수와 일당표를 맞바꿈했다. 우리는 그것을 끓여먹으며 일을 다녔다.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많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 형제를 귀여워하여 햇볕이 없고 시원한 매점에서 일을 보게 해주었고, 점심도 제공해줬다. 또 서둔야학교 선생님들이 도움을 청하니 전선을 제공해줘 학교에 전기가 들어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번창일로에 있던 푸른지대가 딸기술인 ‘파라다이스’를 개발했다가 판로가 신통찮은 바람에 일시에 부도가 나버렸다. 당시 아저씨와 아줌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필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두 분이었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사람들에게 욕심이 없다면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욕심이라는 풍선은 적당 양의 바람만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으면 터져버린다. 문제는 그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미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소확행(小確幸)’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조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2018년 우리 사회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꼽았다. 이미 회자되고 있던 ’작은 사치‘와도 비슷한 용어이다. 포미족(FOR ME)의 부상과도 연관이 있다. 빵집에서 가장 비싼 빵을 사 봐야 큰돈은 아니다. 500원 짜리 편의점 커피도 있지만, 점심 한 끼보다 비싼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것도 ’작은 사치‘이다. 집값이 천문학적으로 비싸 생애에 아파트 하나 살 형편이 안 될지도 모른다. 그 대신 자동차는 멋진 것으로 사는 것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아파트 값에 비하면 ’작은 사치이다.
소확행의 전제는 긍정적이어야 하고 작은 일이지만, 흡족하고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들이 보는 관점과 달라도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큰 목표를 이루면 좋겠지만, 큰 목표는 성공 확률이 높다. 그럴 바에는 성공 확률이 높은 작은 목표가 좋은 것이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달관세대’라 하여 출세에 관심이 없다.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되면 사생활을 희생해야 하고, 책임이 많아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을 도맡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식 직원도 마다하고 자유로운 아르바이트를 오히려 선호하는 풍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 소확행을 즐기는 것이다.
70년대 말 전자오락 게임이 한창 유행이었다. 필자는 그 당시 ‘갤럭시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기록 중이었다. 위에서는 포탄이 쉴 새 없이 점점 더 많이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밑에서는 방어물 뒤에 숨어 레버와 버튼을 이용하여 위쪽 적을 공격하여 파괴하는 게임이었다. 순발력과 빠른 손놀림이 동시에 필요한 게임이었다. 서울역에서 갈월동으로 가는 도로변은 전자오락 게임방이 줄지어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가면 그날의 하이 스코어가 8만점대정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기계마다 20만점에 근접하는 기록을 만들어 냈다. 필자 뒤에는 그것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날도 한창 신기록을 수립 중인데 동료가 그만하자며 뒤에서 갑자기 필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순식간에 게임이 종료되었다. 필자가 불같이 화를 내자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동료는 필자가 하이 스코어를 낸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남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하면 되지, 그렇게 몰입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문했다. 그때 마땅한 어휘가 없어 필자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게 필자에게는 소확행이었다.
일 년 내내 전국에서 댄스스포츠 대회가 열린다. 권위 있는 큰 대회도 있고, 고만고만한 실력의 선수들만 참가하는 댄스 대회도 있다.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겠지만, 예선을 통과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작은 지방 대회는 우승도 할 수 있고 적어도 등수 안에는 들어 트로피도 탄다. 혹자는 그런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무시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 목표가 크지 않으니 소확행이다.
작년에 마라톤에 입문했다. 10km에 도전했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풀코스도 아닌데 감히 마라톤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풀코스를 뛰는 사람도 처음엔 10km부터 뛰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풀코스에 도전하기 위해서 10km로 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10km 코스면 흡족하기 때문이다. 소확행이다.
우주 만물은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문화센터 노래 교실에 다닌 지 20년이 되었다. 갑자기 노래 강사가 그만 둔다고 했다. 이젠 좀 쉬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노래 강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강된다는 것이었다. 새 학기 등록을 하려다가 접수처에서 접수를 거부하는 바람에 대 혼란에 빠졌다. 정들었던 강사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것도 슬픈 일인데, 20년이나 같이 얼굴 보던 회원들이 헤어지는 것도 큰 충격이었다.
문화 센터 사무실에 몰려가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 그러나 담당 강사는 이미 사표가 수리 되었고 후임 강사를 물색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든 때에 후임자가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따졌다. 최소 수강인원 5명인데 우리는 20년 동안 같이 해 온 고정 인원이 20명이다. 신입회원이 나머지 10명을 채워 30명 정원인 교실인데 폐강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따졌다. 그러나 백화점 운영 지침 상 강사의 요건이 엄격해서 후임자 선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 노래 교실은 저녁 시간이라 대부분 낮 시간에 운영되는 노래 교실 강사들은 저녁 시간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또 대부분 주부들을 대상으로 트로트 위주로 율동이 가미되는 낮 시간 노래 강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발라드 위주로 조용한 노래를 즐기는 수강생들에게 맞는 강사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백화점 강사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고도 했다. 간염 등 전염성 질병을 가진 사람, 성 범죄 전력이 있는 사람 등은 건강검사와 신원 조회로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 관문으로 만족할만한 수준의 강사 경력과 강의 실습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사람을 구하려면 남은 며칠 동안으로는 불가능하고 최소한 한 달 이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 회원이 ‘제행무상 (諸行無常)’이라며 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 받아들이자고 했다. 20년이나 노래 교실에 다녔으니 그만 둘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노래교실을 계속 다니는 것도 좋지만, 다른 배울 것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들은 강사가 바뀌는 것은 이해하겠으나 폐강은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온 신의 한 수가 새 강사를 정할 때까지 기존 강사가 아르바이트 방식으로 계속 해준다는 것이었다. 사표가 수리 되었으니 정식 강사가 아니고 대신 나오는 대강사로 나오는 것이다.
일단 지난 20년 동안 이 노래교실을 거쳐 갔던 회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강사 송별회를 해주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에 그만 둔 회원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연락은 되고 있었다.
강사가 바뀌면 제행무상을 받아들이고 노래교실을 그만두는 회원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새 강사를 일단 보고 나서 계속 수강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다. 홍익희 교수의 인생은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의 파노라마였다.
첫째 반전,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는 32년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생활을 한 뼛속까지 코트라(KOTRA)맨이다. 중남미, 뉴욕, 유럽 각지에서 해외근무를 했지만 정작 중동 근무를 한 적은 없다. 둘째 역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정작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 후 58세에 본격 글쓰기를 시작한 게 전부다. 셋째 결전, 코트라 무역관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연착륙한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꽃길이다. 정작 본인은 “내 인생의 8할은 열등감과 실패로 가시밭길이었다”고 술회하는 것 아닌가. 노력, 노오력을 넘은 사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전복시켜왔다는 고백이다. 자, 그의 인생 2막의 반전, 역전, 결전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로 꼽히시는데요. 코트라 재직 중 정작 중동 지역이나 관련 문화권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십니다. 인생 2막에서 유대인이란 주제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32년간의 코트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서비스산업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했던 유대인 이야기에 당의정을 입히면 공감대를 넓히는 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32년간 수출전선에서 근무지가 늘어날수록 유대인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금융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게 배경이 되었지요.”
그가 맨 처음 유대인들의 힘을 느낀 것은 1983년에 파견된 콜롬비아의 보고타 무역관에서다. 유대인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유대인 군수품 에이전트와 같이 입찰에 응찰하는 것을 비롯, 금융도시 뉴욕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실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다. 세계 각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3분의 2는 미국 자본이고 그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더란 것. 한 줌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유대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근무지 곳곳에서 경험한 유대인의 힘의 근원을 천착, ‘유대인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대인 전문가란 브랜드를 구축, 작가-교수로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다.
책이 작가로서 인생 2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군요. 뼛속까지 무역맨인 분이 전문작가로 전업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투자에 크게 실패했어요. 경제적 손실이 컸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 후 모 중견기업의 경영자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틀어졌어요. 알고 보니 의례적 인사말을 착각,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어요. 정말 깜깜절벽에 출구가 보이지 않더군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고 미래의 대책마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도피처였다고나 할까요. 온종일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글만 치열하게 썼습니다. 이때 탄생한 게 50여 권의 전자책들입니다.”
비록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전자책이지만 거의 이틀에 책 한 권 분량을 쓴 꼴이었다. 퇴직 후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갔더니 자그마치 10권 분량이었다. 이때 쓴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한 권으로 축약해서 출판한 게 2013년 초에 발간된 ‘유대인 이야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던 전자책 원고들이 지금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전문가도 투자에 실패하는군요. 퇴직 후 투자 실패였으면 더 타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더라면 강의와 저술을 하는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겠지요.(웃음) 외형적 성공은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배부르고 등 따시면 하기 힘들거든요. 절박하고 절실해야 글이 써져요.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실패와 열등감이에요.”
홍 교수님의 이력에서 인생의 8할이 실패와 열등감이란 이야기는 의외입니다.
“열등감이 과도한 인정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았어요. 지그재그 인생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지각인생이고 뒤처진 삶이었어요. 대학 시절,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건축공학을 접고 대학과 전공을 바꿔 재입학한 것도 그렇지요. 외무고시 공부 죽어라 매달려 거의 붙었나 했더니 시위 경력으로 막판에 징집당해 군대를 갔다 오느라 동기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요. 코트라 다니면서도 또 사업 한답시고, 가구사업 벌였다가 부도났어요. 당시 채무자에게 전화로 재촉받은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전화를 늘 진동으로 해놓는답니다. 그런데 퇴직 무렵에 또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렸으니….”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당시엔 역경이고 힘들었던 일들이 나중엔 경력이고, 혜택으로 작용하는 일이 많더란 것이다. 상사의 신문칼럼 대필을 하느라 애면글면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해외의 경제상황 보고서 격무로 연일 야근을 하면서 몸무게가 10kg 이상 줄 정도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 집필의 원천 자료가 되고, 사업 실패가 경영자들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가깝게는 책 출판이 예정 시기보다 지체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기(待機)하는 동안 자료를 보충하며 ‘대기(大器)’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홍 교수가 되새기는 말이 ‘현재에 충실해라’다. “과거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평하고 고민하느니 현재에 몰입한다.” 그가 인생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얻은 교훈이다.
말씀 들으니 참 곡절도 많으셨는데 잘 넘기셨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3초도 안 돼 그는 즉답했다). 제가 청소년기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어머니께 갖다 드릴 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만인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사랑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운이 좋지요. 늘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집사람도 내가 사업 부도내고 힘들었을 때 만났어요. ‘학벌도, 얼굴도, 돈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구제해줄까’ 하는 모성본능을 발동시켰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돌아보면 돈으로 인한 고난이 제일 약하더군요. 생활수준을 낮추거나 참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건강, 사랑을 잃으면 회복 불능입니다.”
그는 인생엔 ‘동심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려서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애어른’으로 중심을 잡다 보니 지금 오히려 ‘철부지 어른애’로 허당기를 발동한다는 것.
남보다 훨씬 세게 좌충우돌하셨군요. 그러면서도 늘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 헤어나오셨습니다.
“내가 뭐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빠져 잘 헤어나오질 못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입니다.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빠지는 것,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독인데요. 식음을 전폐하고 2박 3일 바둑을 둔 적도 있습니다. 인생 반전은 결국 결단력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결심을 무섭게 하고 바람직한 것에 몰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그는 ‘인생의 3대 결단’으로 “첫째는 어려운 가정형편인데도 3년 반이나 다닌 대학을 그만두고 재입학 결정을 내린 것, 둘째는 중년기에 바둑을 끊고 그 시간을 독서 등 건설적으로 사용한 것, 셋째는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힘들었던 시기에 글쓰기에 올인했던 것”을 꼽았다.
아드님만 셋이시지요. SNS를 보면 아드님이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을 위해 양갈비 요리도 하는 등 살갑더군요.
“(얼굴이 환해지며)요즘 세대는 우리와 근본부터 달라요. 나는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얘네는 즐겁게 누리고자 하니까요. 공학을 전공했는데 모 방송 주최 랩 오디션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요. 내가 애들에게 오히려 배웁니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영락없는 아들 바보가 됐다. 아들과 와인 관련 공동칼럼을 쓴 적이 있었단다. 소비자가 앱을 통해 와인 품질을 즉각 분석, 판단할 수 있게 한 와인평가 앱이 출현, 전문가 위주의 와인평가 2.0시대에서 소비자 중심의 와인평가 3.0시대로 넘어간다는 트렌드 기사였다. 기성세대인 홍 교수는 이 기사를 쓰는 데 그쳤지만 신세대 아들은 와인 검색 비비노 앱 창업자인 하이니 자카리아슨(Heine Zachariassen)에게 기사를 번역, 복사해 이메일로 보내 교신까지 하더란다. 그는 현재 아들과 ‘실리콘밸리 이야기’와 ‘유대 금융자본과 비트코인 세력 간의 세계대전’ 두 권을 공동집필하고 있다.
유대인 하면 교육열이 떠오릅니다. 자제분들께 적용한 유대인 교육이 있으십니까.
“웬걸요. 애들 어릴 때 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손주들한테는 유아 때부터 적용해보고 싶어요. 특히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은 꼭 해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고, 밥상에서 인생의 산 교훈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는 것이죠.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교육열이 높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혼자 잘나길 원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한국인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달란트 vs 베스트, 학업 vs 인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부의 목적을 역량강화, 즉 성공력에 둔다. 반면에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개발에 둔다.
또 우리는 경쟁에서 승리, 최고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유대인은 단결력에 둔다. 어려서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협동력을 체화해 유대인끼리 서로 형제처럼 돕는다. 상대의 단점을 보며 시기, 경쟁하기보다는 강점을 보며 협력한다. 이들에게 협상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동능력이다. ‘남을 비난하는 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들은 사람까지 ‘공공의 적’으로 금기시한다. 또 실력보다 매력, 즉 인성과 협동심을 우선시한다.
인생 2막을 앞둔 분들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하늘은 일단 들이대는 사람을 좋아한다”입니다. 당장의 일자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할 일거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들이대고 저지르고, 그다음엔 밀어붙여라. ‘하늘은 열정에 반해 마법을 일으키게 한다.’ 힘들 때 내가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후, 홍 교수가 자작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 시를 읽으며 ‘절대 절대 절대’란 말에 목울대가 울컥해졌다. 지금 2막의 새 신발끈을 묶고 있을 당신, 거센 풍랑에 맞부딪히더라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제목은 ‘거센 풍랑을 만나거든’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박차고 일어나 맞서라.
일생에 한 번은 독해져라.
처절하리만큼 치열하게 맞붙어라.
길고 긴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절대. 절대. 절대.
그 거대한 고난을 이겨내면 은혜는
슬며시 다가온다.
고난에 좌절하면 은혜 역시 고개 돌린다.
은혜는 항상 고난을 앞세우고 다가온다.
거저 오는 법이 없다. 얄미운 은혜다.
필자는 58년생 개띠다.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미팅이었다. 미팅하러 대학에 들어간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시절 대학 1~2학년생들에게 미팅은 대단한 로망이었다. 내성적이어서 미팅을 기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미팅을 수십 번이나 한 친구도 있었다.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때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성과 교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미팅타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맘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성 사귀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두세 달마다 여친을 바꾸는 선수(?)들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미팅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이성 교제 경험이 없어 서툴었기 때문이다. 또 데이트를 하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그 시절엔 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다. 집이 가난해서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미팅은 주로 학과 대표가 여대 학과 대표들과 연락을 해서 이루어졌고, 발이 넓은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들을 통해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미팅 인원은 세 커플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한두 커플이 오붓하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미팅 자리에 나오면 먼저 “00학과 0학년 000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뒤 각자 소지품을 꺼내어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물건을 선택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주선자가 눈치껏 파트너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남학생들끼리는 미리 점찍어둔 여학생을 서로 고백해 은근히 자기가 원하는 파트너에 다른 학생이 관심 갖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파트너가 된 여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서 커피만 마시고 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여학생이 마음에 들면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햄버그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 돈가스 등을 먹으며 늦게까지 데이트를 했다.
필자는 두 번의 미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대학 1학년 때 했던 미팅이었다. 늦은 가을날, 학과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우편함에 단정한 글씨로 쓴 엽서가 얼핏 보였다. 필자에게 온 엽서였다. ‘누가 보냈지?’ 하며 엽서를 꺼내서 보니 하단에 주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주희가 누구지?’ 했다. 그러다 2주 전쯤 미팅에서 만난 한 여학생 얼굴이 떠올랐다.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마침 시험기간 중이어서 그 여학생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엽서엔 단정하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빼곡했다. 그간의 일상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이었다. 그녀의 감성적인 표현들이 필자 가슴에 와 닿았다.
글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녀는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글 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대학신문을 보내주면서 “엽서 보내줘서 고마워, 연락 못해서 미안해”라고 간단히 메모를 썼다. 그리고 1주일쯤 뒤 그녀에게서 또 엽서가 왔다. 이번에도 글이 빼곡했다. 엽서 하단에는 “깊어져 가는 가을 자꾸만 생각 키워지는 이에게 보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필자는 그녀가 엽서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저녁도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쩌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그녀가 생각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접고 먼저 엽서를 보냈을 텐데 말이다.
기억이 나는 또 하나의 미팅은 대학교 2학년 초겨울 무렵에 있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같은 학과 여학생들과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K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고 가는 방향이 같아 버스를 함께 탔다. 빈자리가 없어 손잡이만 잡고 나란히 서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필자에게 그녀가 넘어졌다. 필자는 얼떨결에 한 팔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팔로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필자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광화문의 한 커피숍으로 갔다. 그 시절은 커피숍에도 DJ가 있어 노래를 신청하면 틀어주곤 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그녀도 음악을 신청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필자가 좋아하던 노래여서 깜짝 놀랐다. 그 노래에 대해서는 얘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녀가 우연히 그 노래를 신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커피숍을 나온 뒤에는 세종로를 함께 걸었고, 쌀쌀한 날씨인데도 추운 줄도 몰랐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사이인데도 오래 만나온 사람처럼 편안했고 잘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필자는 지나가다 리어카에서 파는 햇귤을 두 개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상큼하고 싱싱한 귤 냄새가 좋았다. 그녀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2시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좀 걸었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약간 출출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필자는 옛 한국일보사 옆에 있는, 기자들이 자주 다니는 식당으로 가서 냄비우동을 시켰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냄비우동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좋아하는 그녀랑 같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밤 10시가 지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필자가 버스를 타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녀는 집 근처에 이르자 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첫눈 펑펑 내리는 날, 우리가 갔던 광화문 ‘그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필자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첫눈이 펑펑 내렸고 필자는 그녀가 말했던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혹시 그녀가 그새 맘이 변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첫 만남 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눈 대화와 진한 커피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녀는 필자에게 따뜻한 겨울장갑을 선물로 줬다. 눈 내리던 경복궁 옆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서울대 사대에 다녔던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필자는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