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등산 인구가 2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산을 찾는 인구는 늘었지만 산행 시 안전의식은 그다지 높지 않다. 지난 3일 50대 중반의 현직 부장검사가 도봉산 암벽에서 하강하다 로프가 풀려 추락한 뒤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했다. 이 사고로 로프를 제대로 매주지 않은 40대 등반가가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안전이 최우선
언젠가 10월 단풍철에 동료 7명과 함께 설악산에 갔다가 일행 중 한 명이 사고를 당해 함께 간 사람들 모두 같이 고생한 적이 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 소청봉을 지나서 조금 쉬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조그만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젖은 돌에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한쪽 다리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119에 신고를 했지만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 구조헬기가 뜰 수 없다며 대피소 부근까지는 어떻게든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무 두 개를 베어 로프로 얼기설기 묶고 재킷 몇 장을 깔아 들것을 만들어 다친 사람을 눕힌 다음 네 사람이 한쪽씩 잡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배낭을 나누어 짊어졌다. 환자를 들고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는데 들것이 수평을 이루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고 통증을 호소했다. 앞에 사람들은 높이 들고 뒤에서는 낮게 내려 수평을 맞추면서 어렵게 하산했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조대원의 도움으로 응급조치를 받은 동료는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울시에서 2017년 발표한 바에 의하면 3년간 등반사고를 당해 구조한 사람 3627명 중 28.3%인 1,028명이 9월에서 11월에 구조되었다. 특히 구조된 10명 중 5명, 즉 50%는 51세~70세인 장·노년층이었다. 이는 가을철에 산을 찾는 사람들이 다른 계절보다 많고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이 든 사람들이 사고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자료이다.
발에 잘 맞은 등산화를 골라야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산행 시 발에 잘 맞는 등산화를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발이 편해야 한다. 그래야 장시간을 걷더라도 발이 아프지 않고 피로를 덜 느낀다. 그리고 어느 계절이든 산에서는 자신의 체력이나 경험만을 믿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욕심부려 산행목표를 자신의 체력이나 능력 보다 맞지 않게 먼 거리 혹은 너무 높은 곳에 가지 말아야 하고 시간을 여유 있게 가져야 한다. 무리한 산행을 줄여 사고를 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일 때는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산에는 돌부리, 나뭇가지나 등걸, 구덩이, 낭떠러지 등 사고를 유발하는 위험요소가 널려 있다. 이동 중에 지나치게 두리번거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산을 좋아하는 시니어라면 등산할 때 반드시 실천해야 할 안전수칙을 숙지해야 한다. 자신의 여건에 맞게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의 산행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시간을 누리고 삶의 활력을 찾아 심신의 건강을 지켜나가기를 권유한다.
555m 높이의 롯데월드타워 등반에 성공한 ‘암벽 여제’ 김자인 선수의 영향으로 몇 년 새 스포츠 클라이밍이 친근한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아찔한 높이의 인공 암벽을 맨손으로 정복하는 스포츠클라이밍 ‘볼더링’ 종목에 정원일(62) 동년기자와 동갑내기 친구 이상민(62) 씨가 함께 도전해봤다.
촬영 협조 V10클라이밍(서울 동대문구 장한로2길 63, 2층)
실내에서 즐기는 스포츠클라이밍
골프, 테니스, 야구 등 옛날에는 야외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스포츠를 이제는 날씨나 외부 조건 등에 영향받지 않고 실내에서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산악 등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클라이밍도 예외는 아니다. 실내 또는 실외에 인공 암벽을 설치해 이용하는 스포츠클라이밍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최근 떠오르는 스포츠로 주목받고 있다. 15m 이상 높이의 인공 암벽을 줄을 사용해 오르는 리드 클라이밍, 목표 지점까지 빠르게 올라가야 하는 스피드 클라이밍과는 다르게 볼더링은 특별한 등반 기구 없이 맨손으로 4~5m 높이의 인공 암벽을 올라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볼더링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잘 갖춰진 실내 클라이밍장이라면 누구나 쉽게 입문할 수 있다.
정원일 동년기자
‘클라이밍’ 하면 남자들이 터프하게 절벽을 올라가는 이미지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실내 클라이밍장에 와보니 젊은이도 많고 여성도 많아 놀랐다. 무엇보다 암벽 등반을 실내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민 씨
실내 스포츠가 이용금액이 비싸기 때문에 쉽게 도전할 생각을 못했는데 실내 클라이밍은 일일 이용요금이 2만 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새로운 운동을 찾는 시니어라면 실내 클라이밍에 도전해봐도 좋을 것 같다.
암벽 오르기 전 준비운동은 필수
대부분의 사람이 운동하기 전 준비운동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 시니어가 무리할 경우 근육이 손상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운동 시작 전에는 항상 몸을 풀어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손과 발로 벽에 부착된 홀드를 이용해 올라가는 근력운동이기 때문에 시작 전 충분한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송율나 V10클라이밍 강사는 “스포츠클라이밍은 전신운동인 동시에 많은 근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볼더링은 뛰어내리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무릎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스포츠 테이프를 사용해도 좋다. 스포츠 테이프는 굳은살을 방지하고 손가락을 보호해준다.
정원일 동년기자
누구나 한 번쯤은 운동 후 근육통으로 고생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내 클라이밍장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점은 ‘아, 이거 제대로 몸 안 풀면 다음 날 고생하겠구나’였다. 그냥 덥석 올라갔다가는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시니어는 반드시 준비운동을 할 것을 권한다.
이상민 씨
스트레칭은 거의 몇십 년 만인 것 같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해진 몸을 보며 새삼스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시니어가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이 바로 안전과 관련한 문제다. 볼더링을 체험해본 결과 떨어져도 푹신한 매트가 아래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 말듯, 발에 닿을 듯 말듯
클라이밍장을 방문할 땐 운동복과 양말만 준비하면 된다. 암벽에 오를 때 신는 암벽화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로 제작되었으며 클라이밍장에서 빌릴 수 있다. 또 손에는 송진 가루를 묻히기도 하는데 초보자에게 필수는 아니다. 볼더링은 벽에 붙어 있는 다양한 홀드 중 같은 색깔의 홀드만을 사용해야 하는 종목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무수히 많다는 점이 매력이다. 일일 강습을 신청하면 강사가 홀드 잡는 방법부터 발 옮기는 위치까지 알려주기 때문에 처음 볼더링을 배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올라가기 전에는 쉽게 보이지만 막상 시작하면 미로처럼 보이는 클라이밍. 방심하는 순간 ‘뚝’ 떨어진다. 초급자 코스에서 충분히 요령과 체력을 기른 후 다음 난이도로 넘어갈 것을 추천한다.
정원일 동년기자
분명 밖에서 볼 땐 쉬워 보였는데 이게 참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땐 배가 나온 몸뚱어리를 원망하다가 배시시 웃음이 났다. 실제 절벽이었으면 목숨이 여러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지막 지점까지 도달했을 땐 엄청난 성취감이 들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걸 거다.
이상민 씨
암벽화를 고를 땐 평소보다 10mm 정도 작은 치수의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마치 전족을 신은 것처럼 발가락이 굽어졌는데 이는 암벽을 오를 때 발가락에 충분한 힘이 실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발가락이 조금 불편하다는 점만 빼면 일반 신발보다 미끄럽지 않고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어 암벽 등반에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V조선 프로그램 ‘강적들’에서 나와 같이 방송했던 이준석이 독립야구연맹 총재로 취임하던 날 행사장에서 가수 장혜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조만간 인터뷰합시다!” 하고 대시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며 그녀의 노래에 심취했던 한량 이봉규가 동물적으로 반응했던 것. 우물쭈물하는 장혜진을 보더니 내 옆에 있던 김성경 아나운서가 “인터뷰 해, 언니~ 나도 했어!”라고 거들어주는 바람에 운 좋게 다시 만났다.
장혜진은 인터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노래에만 빠져 있을 뿐 모르는 사람과는 말 섞기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금세 간파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량 이봉규 특유의 느물느물 전법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인터뷰는 무미건조(無味乾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공손한 자세로 노래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다행히 대화가 술술 풀렸다.
장혜진은 겉으로는 야리야리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한 자기 철학을 가진,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첫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까칠할 것 같고 깍쟁이처럼 보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허당’이면서 따뜻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중첩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장혜진을 대가수로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 다중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열창했던 곡 ‘술이야’를 들었을 때 한량 이봉규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가 매일 술에 젖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사의 마지막 소절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를 들을 때마다 1년에 360일 술을 마시는 주당 이봉규는 영락없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장혜진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술이야’를 부르면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내뿜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물었더니,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서 술에 맨날 젖어서 산다고 감정 이입했다”고 말하면서 몰입이 안 되면 노래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술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마실 줄 모르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처럼 몰입할 수는 있다는 장혜진의 설명이 알듯 모를 듯했다.
체조 선수가 가수가 된 사연
그녀의 이력이 의외로 다채로웠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다. 원래는 체조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해 선수생활을 접고, MBC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유명 가수들의 백코러스를 담당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당시 이수만이 경영하던 종로3가의 ‘SM 카페’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차 한 잔 시켜놓고 해외 유명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분석했다. 동작 하나하나, 의상, 조명, 창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느라 온종일 뮤직 카페에 있어도 즐거웠다. 본인이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해서 의상디자인까지 하면서 “어떡하면 여성 코러스로서 가장 섹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때부터 천생 가수의 기질이 나타났던 셈이다.
그 시절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강승호가 그룹 ‘소방차’의 막내 매니저로 일할 때 방송국에서 예능 PD에게 발로 차이고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장혜진은 강승호에게 “이렇게 막내 매니저로 살지 말고, 네가 제작자로 나서라. 일단 내가 너의 가수가 돼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발판 삼아 인기 있는 가수들을 많이 키워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호는 일주일 만에 아시아레코드에서 계약을 따내고 신곡을 들고 장혜진을 찾아와 녹음하자고 들이댔다. 이 앨범에 바로 1991년 장혜진을 가요계에 데뷔시킨 ‘꿈속에선 언제나’라는 타이틀곡이 들어 있다. 그녀의 조언대로 강승호는 장혜진을 1호 가수로 내세워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운영을 시작해 김종서, 박상민, 박완규, 캔 등의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강승호가 한술 더 떠 장혜진에게 결혼하자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강승호의 집념에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편 강승호는 전형적인 0형 혈액형 성격으로 다혈질이고 저돌적이다. 장혜진을 데뷔시킬 때도 그랬고 결혼을 승낙받을 때도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결혼을 망설이던 장혜진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친구처럼 이 사람과 살아봐도 괜찮겠다. 남자 뭐 별거 있어?”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 앨범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편해지기도 해서 28세 때 강승호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고 면사포를 썼다.
권태기,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장혜진도 이봉규를 경계하는 마음이 슬쩍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 틈을 타 “결혼생활 26년이 되었으면 그동안 권태기도 많았겠다. 그리고 나이도 갱년기를 겪을 시기니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고 찔러봤다. 그녀는 담담하게 “권태기나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하고 반문한다. 내친김에 “부부싸움하면 누가 이기나?” 하고 물고 늘어졌다. “남편이 이긴다. 나는 눈물부터 나와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으로 봐서 이들 부부관계의 권력 서열이 대충 짐작됐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물었더니 “80점”이라고 답한다. 곧바로 가수생활 만족도를 물었더니 “100점이 넘는다”고 대답하면서 표정이 확 바뀐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평생 노래와 함께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장혜진의 해석, 천생 가수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봉규도 평소에 가수가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고 “다시 태어나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빤한 답변이 예상되지만 똑같은 질문을 장혜진에게 했더니 “다시 태어나면 야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록 밴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이클 볼튼이나 레드 제플린처럼 야생의 목소리를 선호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일까? 장혜진의 목소리에서도 뭔가 끈적끈적하고 야생성이 느껴진다.
1996년 이후 성대결절로 공백기를 거치면서 고음을 자제하고 중저음 위주의 창법을 쓰고 있지만 그녀가 야생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쪽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혜진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한 타고난 가수이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노력파다. 하루 종일 노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음악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버클리음대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녀는 또 자신이 고집하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가수들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는 등 가수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평소 장혜진의 음악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큼의 도전이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기에 “노래 부르면서 ‘봉춤’ 같은 것을 시도하면 어떨까?” 하고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더니 장혜진은 의외로 반기면서 “핑크가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리본으로 공연을 했는데 참 부러웠다”고 본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럴 만한 곡을 못 만나서 자신의 전공을 노래에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체조 전공자로서 단련된 신체 덕분일까. 장혜진은 암벽등반을 즐긴다. 밧줄을 타고 내려올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는다니 놀랍다.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까지 보인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철학을 엿본 한량 이봉규는 육십 평생을 돌아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장혜진과 인터뷰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에 감사해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본다. 땡큐! 장혜진!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위하여 새로 개통한 북한산우이선 경전철을 탔다. 좌로 흔들, 우로 뒤뚱거리면서 무인 경전철은 잘도 달렸다. 사람이 만든 꼬마 전철은 운전원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도선사 입구 종점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산행인파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많았다. 능선을 따라서 지원센터를 거쳐 하루재에 이르렀다. 가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산장을 지나서 떠밀리듯 천천히 올랐다. 위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바위를 오르는 본격적인 등반이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등산객이 뒤엉켜서 정체가 발생하곤 하였다. ‘우측보행’ 누군가 부르짖지만 이내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서다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정상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와 품앗이로 기념사진 한장 겨우 남겼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희부옇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인수봉이 울긋불긋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암벽등반가들이 꽃술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1983년에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에 이른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정릉·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를 비롯하여 태고사·화계사·문수사·진관사 등 많은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인수봉(810m)·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삼각산이라 불려졌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는 길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장
놀 줄 모르는 시니어들은 특별히 즐기는 취미가 없다. 기껏해야 골프 아니면 등산이다. 이것도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딱히 즐길 놀이가 없다. 이러니 놀 줄도 모른다고 신세대에게 무시당하는 것이다.
친구가 들려준 얘기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거실에서 아이들과 아내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자 노랫소리가 딱 그치며 아들 녀석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딸아이도 엄마와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가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둘이 거실에서 머쓱하게 앉아 있는데 아내가 눈을 흘기더니 부엌으로 가버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데 왜 일찍 와서 분위기를 깨냐는 눈치였다.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도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화를 하려 하면 뒷걸음질부터 친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늘 엄하고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연구기관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더니 잔소리 많은 사람,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사람, 휴일에 거실에서 TV만 보는 사람 등으로 답변을 했다. 문제는 또 있다. 아이들과 함께할 공통된 취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일찍 고민이라도 해봤으면 좋으련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남은 인생 잘 보내려면 지금부터라도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취미 한두 가지는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취미를 갖는 것이 좋을까. 취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수동적 취미와 능동적 취미다. TV 시청은 대표적인 수동적 취미다. 남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시간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도 수동적 취미에 속한다. 반면 능동적 취미는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 자의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면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이 능동적 취미다. 그렇다면 수동적 취미가 좋을까, 능동적 취미가 좋을까.
수동적 취미와 능동적 취미
학자들은 일에 몰입했다가 그 몰입에서 벗어날 때 우리 몸에 좋은 엔도르핀이 나온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 주자가 한 시간 가까이 연주해야 하는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하모니를 잘 이루어 마쳤을 때, 산악인이 암벽 등반을 마치고 무사히 평지에 두 발을 내딛었을 때, 엔도르핀이 솟는 것이다.
연구 조사에 의하면, 수동적 취미는 몰입을 하는 정도가 4%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면 능동적 취미는 47%에 달한다. 능동적 취미가 수동적 취미에 비해 몰입하는 정도가 훨씬 크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기왕 취미생활을 하려면 수동적 취미보다 능동적 취미가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취미생활을 하면 이 밖에도 좋은 일이 많다. 새로운 사람과 교류하게 되고 동호회를 결성할 수도 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인간에게 소속감의 욕구가 있는데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는 소속감이 없어지며 자칫 정체성이 흔들리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호회를 만들어 참여하면 친구도 사귈 수 있고 소속감의 욕구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가족이 함께 취미를 즐기면 공통 관심사가 생겨 가족 간 대화가 풍족해진다. 관계가 개선되는 것은 물론이다.
취미의 고수들
취미를 통해 돈까지 벌수는 없을까? 있다! 필자의 과거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은 미술을 좋아해서 회사 업무가 끝나면 틈틈이 그림을 보러 다녔고, 보너스를 탈 때마다 그림을 수집했다. 그는 당시의 취미를 활용해 지금 강남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은퇴한 다른 동료들이 할 일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재직 중의 취미를 생업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악기 연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돌린을 배웠던 지인은 재직 중에도 만돌린을 취미로 즐기다가 조기퇴직을 한 후 본격 연주를 위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정규 과정을 마친 그는 귀국한 뒤 주위 사람들에게 만돌린을 가르치고 있으며 가끔 시향과 협연도 하고 있다.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선배 한 사람은 은퇴 후 북 카페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전업 작가로 변신했다. 벌써 저서가 몇 권이나 된다.
설령 수익과 연결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아름다운인생학교에서 강사료 없이 강의를 하는 분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강사들은 봉사활동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배운다고 한다.
미국 CNN과 지에서 공동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미국인 62%가 여가시간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며 보낸다고 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찾을 수 있다면 은퇴 준비의 반은 끝난 셈이다. 나머지 반은 거기에 올인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발견할 수 있을까? 먼저 종이에 원하는 바를 써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남이 원하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느라 남은 생을 허비할 수는 없다.
취미, 실패해도 괜찮아
다음의 세 가지 활동을 기준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찾아봐도 좋다. 첫째, 현재 흥미를 느끼고 있는 활동. 둘째, 과거에 하려고 했던 활동. 셋째, 앞으로 하려고 생각 중인 활동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넘겨버리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모두 기록한다. 똑같은 활동이 반복돼도 괜찮다. 리스트를 작성했다면 이 중 몇 가지를 골라 활동을 시작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좋다. 또 ‘시한부 인생을 산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할 수 있다.
새롭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먼저 목표를 정해야 한다. 인생에서 달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목표를 정하면 할 일이 보인다.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좌절도 느끼겠지만 보람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글 박원식 소설가
항구에 닻을 내린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게 아니다. 항해에 나선 배라야 배답다. 거친 파랑을 헤치고, 멀거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배는 인생을 닮았다. 모험이나 도발이 없는 삶이란 수족관처럼 진부하지 않던가.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았던 이기순(52)씨가 남편 이병철(57)씨의 손을 잡아끌어 시골로 들어간 건 모험적 항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다. 이기순씨의 시골살이는 암초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대해를 표류 중이다. 취재 섭외를 위해 통화를 할 때, 이기순씨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겸사(謙辭)였다.
“남들은 그럴싸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속사정은 그게 아니에요. 아마도 저희 부부의 현실은 실패 사례로 더 어울릴 거예요. 그냥 차나 한 잔 드시고 간다는 기분으로 오세요.”
이기순씨는 오랫동안 암벽 등반을 즐겼다. 휴일이면 쪼르르 산으로 달려가 잔나비처럼 바위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녀는 지금까지 진통제를 달고 산다. 이 불행한 사고는 용케도 시골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건강을 돋우자는 착상을 했던 거다. 그즈음 중소기업 상무이사였던 남편 이기철씨는 명퇴의 강박감에 시달리며 전전긍긍 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이 역시 도시 탈출의 배경이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가 의기투합했던 것. 까짓것, 우리 시골로 가서 새로 시작합시다! 이기순씨가 앞장서 선창을 했다. 그래그래, 그러세! 남편이 후렴을 읊으며 선선히 뒤를 받쳤다. 그게 4년 전의 일이었다지.
시골 살림을 결단하며 꿈꾸고 그린 게 많았을 게다. 우선은 볕이 잘 드는 남향 터를 잡아야 할 테고, 폼 나게 수려한 전원주택을 지어야 하고, 철따라 꽃이 피어 요요하게 속삭일 정원을 꾸며야 하며, 달빛과 별빛이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밤에 부부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만한 정자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생활이라는 게 흔히 돈이라는 요물의 농간에 휘둘리게 마련인데, 이들 부부도 자금이 넉넉하질 않아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소득을 흐벅지게 올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그 결과로 시작한 게 오이농사였다. 이들이 사는 천안시 병천면은 오이의 최대 주산지. 재배 기술도, 유통 루트도 탄탄한 지역이다. 부부는 2000평에 달하는 농지에 오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시골생활의 시동을 걸었다. 농토는 임대를 했다. 그 위에 설치된 시설 하우스는 매입을 했다. 거창한 시발이었다. ‘가브리엘 농장’이라는 팻말도 새겨 걸었다. 하지만 업무에 바쁜 행운의 여신은 그들에게 사소한 윙크조차 보내주질 않았다. 첫해는 물론 둘째 해, 셋째 해까지 내리 실패를 보고 말았다. 이기순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농사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안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매년 결과는 참담했어요. 기술력 부족으로 생산량이 저조해 낭패를 보기도 했고, 풍작일 경우에도 가격폭락으로 적자가 크게 났어요. 칼자루를 쥔 중도매인들의 횡포에 당하기도 했고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까먹었고, 빚이 늘어 파산지경에 몰렸어요. 그래도 쌀독에 쌀은 떨어지진 않았어요(웃음). 예산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친정엄마가 쌀을 보내주셔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게 원예농업이죠. 미리 사전 교육을 받진 않았나요? 남의 농장에서 일단 실력을 길렀다거나….”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다시피 했어요. 일단 일을 저지르자, 뭐 잘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저런! 환상적인 귀농이었던 거예요?”
“다분히 그런 면이 있었죠.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분들에게 요즘 제가 강조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낭만적인 생각으로 시골에 들어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산이 좋다고 무작정 산골로 가고, 바다가 좋다고 해변으로 귀촌하는 식의 출발은 극히 위험해서죠. 사실 저희 부부가 단순한 환상으로 귀농을 할 만큼의 바보들은 아니에요. 충분치는 않았을망정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게 농촌 현실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변수와 악재들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차라리 초기에 발을 빼는 게 현명했을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기에 포기 같은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내년엔 좋아지겠지, 차차 타산을 맞출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더욱 공을 들이고 땀을 쏟았어요. 농사에 어느 정도 물정이 트이면서 우환 중에도 희망이 솟구치곤 했죠. 내 손길을 통해 건강하게 잘 커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경이로움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어요. 폭염에 시들시들 말라가는 오이를 볼 때는, 마치 어린 자식이 병상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런 경험조차 농사에 애착을 갖게 하는 긍정적 체험이었어요. 정작 후회는 다른 문제에서 왔어요. 마을 원주민들과 어울리는 일이 참 힘들었거든요. 이른바 텃세라는 것 말예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한동안 이방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을 원주민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일이 농사보다 더 어려워
전통적으로 유목사회와 달리 농경사회 구성원들은 내 땅, 내 영토에 대한 질긴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다. 공동체 의식도 발달했다. 외지인들이 끼어드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여기에서 ‘텃세’ 문제가 야기되지만, 토박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전원생활자들의 무신경하고 비사교적인 위세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무례를 범하지만 않으면 텃세에 걸려들 일이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기순씨 내외가 겪은 텃세는 워낙 자심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 인심이 예전과 다르다는 항간의 논평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확인한 모양이다. 삶이라는 생존의 들판치고 어딘들 전장(戰場) 아닌 곳이 있을까. 코피 터지는 경쟁의 난리 블루스, 그게 세태이지 않던가. 이기순씨는 시골의 텃세라는 걸, 허공에 미만한 공기처럼, 세상살이에 당연히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기본 조건으로 치부하기로 한 것 같다.
“차라리 마을을 떠날까, 그런 궁리를 할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에 부대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원주민들과 저희의 정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서로 살갑게 어울려 지내는 게 힘들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흙이나 작물들은 텃세를 부리는 법이 없죠?”
“저나 남편이나 농사라는 건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흙이 지닌 생명력과 식물들의 정직한 성장에 곧바로 매료됐어요. 아아, 흙 냄새, 작물들의 숨결은 또 얼마나 좋은지…. 해마다 농사에 연패를 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땅을 상대로 한 농사라는 게 신성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상해요. 당신은 지난해 천안시가 선정한 우수농민이지만 사실은 곤경에 처했다는 거!”
“농촌의 현실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흔해요. 수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가들이 매스컴에 등장하지만, 매출과 실소득은 크게 다르죠. 저희도 연간 매출이 1억쯤 되지만 갖가지 투자비용을 제하면 오히려 적자가 나더라고요. 적자가 해마다 거듭되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아야 하고,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어이하나?”
“혹독한 공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좌절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어느덧 단련이 되고 나름의 내공도 생긴 거 같아요. 이젠 비로소 길이 보여요. 저비용 고효율 농업으로 가야 하는데, 대안이 보이고 있어요. 일단은 작물을 다양화할 예정이에요.”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이기순씨 내외는 오이 하우스 안에서 산다. 7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한다. 이 옹색한 정경을 목도한 친정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차지만, 그녀는 이마저도 오히려 복되지 아니한가, 하는 투로 담담하다. 애당초 근사한 집을 짓기 위해 대지 150평을 장만해두었으나 빚잔치 통에 순간에 날아갔다. 그 바람에 컨테이너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는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냉큼 받아들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했다. 싱긋 웃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시라.
“‘난 말이야, 2000평 정원에 7평짜리 원룸에 살아. 이 정도면 나쁜 건 아니지 않니?’ 제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그래요. 남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허세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컨테이너에 산다고 해서 기죽을 게 뭐람. 괜찮아, 괜찮다구! 그렇게 제가 저에게 들려주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요. 지금의 형편에서 방바닥에 등 붙이고 부부가 함께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도 큰 다행 아니겠어요?”
“왜 아니겠어요? 참새는 옷 한 벌 입은 게 없이 나뭇가지 한 줌을 움켜쥐고 엄동의 밤을 무사히 지내죠. 최소한의 의식주만으로도 기꺼이 견딘다는 건 일종의 절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에 살 땐 제가 돈을 펑펑 썼어요. 해외여행이며 쇼핑이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해봤어요. 그래서 지금의 어려운 형편에 정신까지 약해지진 않아요. 남편 역시 강인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끄떡없어요. 돈 때문에 허둥지둥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안쓰럽지만, 우리 부지런히 뛰어 멋지게 농장을 살려내자고 등 두들겨 격려하죠. 남편은 원래 영어와 일본어를 잘하는데요, 요즘도 잠들기 전에 꼭 외국어 공부를 해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우리 농장에 견학 올 것을 대비해서죠.”
“산에서 당한 사고로 온몸을 다쳤다 했죠? 지금은 매우 건강해보여요. 그건 귀농 덕분일까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걸음새조차 나사 풀린 바퀴처럼 휘청거렸어요. 그러다가 농사일에 매달리는 사이 건강이 크게 좋아졌죠. 농사를 노동이 아니라 운동으로 여긴 덕분이겠죠. 정신은 더욱 건강하게 깨어난 것 같아요. 경제 면에서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감성이나 정서는 더 밝고 풍부하게 성숙하는 기분? 그런 걸 느껴요. 하우스 안의 작물들, 바깥으로 펼쳐지는 자연 풍경이 자주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저의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답니다. 요즘도 좋은 글을 찾아 읽거나, 뭔가 느낌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장을 꺼내 글을 써요. 주로 시골생활에 관한 단상이지만, 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죠. 이 역시 귀농이 준 행복이라 여겨요. 이쯤이면 괜찮게 사는 거 아녜요(웃음)?”
“사람이 농사를 통해 작물을 기르지만, 동시에 농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흔히들 돈에 사로잡혀 살지만, 남에게 돈 빌리지 않을 정도만 되면 잘사는 것일 테고,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텐데, 저는 농사에 만족해요. 흙에 뜨거운 애정을 느껴요. 비록 아직은 고전하고 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있겠어요?”
가시밭길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꽃길이 있나? 파도를 타넘지 않고서 바다를 건널 수 있던가? 이기순이라는 이름의 선박은 암초를 만나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잠정적인 조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수십 년에 걸친 오랜 회사 생활. 규율과 답답함으로 채워진 오랜 시간을 보낸 끝에 마침내 은퇴한 남자는 그동안 품었던 꿈과 모험을 즐기기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한다.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꿈과 모험과 도전의 이야기가 예술작품의 소재로 끊임없이 사용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그토록 열망하지만 막상 실현시킨 사람들은 그만큼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문광수(文光洙·72)씨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68세의 나이에 바이크 면허를 땄다. 그가 향한 곳은 유라시아. 일흔이 넘어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이크 면허는 많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배우다가 다리를 다쳐서 집에서 난리가 났고 일 년을 쉬어야 했죠. 몸이 나았을 때 아내 몰래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양반이 별 약속도 없는 거 같은데 아침 일찍 어딘가로 가니까 아내가 수상하게 여겼어요. 그것도 한 번에 합격했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자꾸 떨어지니까(웃음).”
새한정보 대표이사로 은퇴한 후 문광수씨가 바이크 면허를 딴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바이크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서였다.
바이크 면허를 따기 위한 좌충우돌
“꿈은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갖는 거니까. 면허 합격이 되자마자 바이크를 몰래 중고로 하나 샀어요. 집에는 가져가기가 뭐하니까 바이크 가게에 일 년간 보관하면서 연습할 때 썼죠. 그러고 보니 면허 취득부터 계산하면 바이크를 제대로 타는 데 한 삼 년 걸렸네요.”
마침내 바이크를 집으로 가져 오게 됐을 때 아내에게 들키는 게 두려웠다. 할 수 없이 옆 동에 세워놓고 경비에게 막걸리를 사주면서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바이크를 집 근처에 갖다놓으니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들켰어요. 매일 사라졌다가 한 시간 있다가 들어오곤 하니까 아내가 의심한 거죠. 참 여자의 육감은 대단해.”
어느 날 바이크 덮개가 벗겨져 있었다. 누가 바이크를 건드렸나 해서 경비실 CCTV 영상을 확인해보니 그의 아내가 바이크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 덮개를 탁 하고 벗겨내는 게 보였다. 별 수 없었다.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계획, 예약, 기약 없는 유라시아 횡단의 시작
문씨는 얼마 전 바이크로 유라시아 횡단을 마쳤다. 장장 3개월에 걸친 여행이었고, EBS에서 촬영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10월 17일 프로그램에서 4일간 방영 예정이라고 했다).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예정이었는데, 처음 가보는 길이라서 계획이란 건 있을 수 없었고, 얼마만큼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뭔가를 예약할 수도 없었고, 직접 가봐야 모든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가 어떠한 계획도 없이 오로지 바이크에 의지해 유라시아를 횡단하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운 것은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바이크 자체가 자유니까, 아주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아무 계획 없이, 예약 없이, 기약 없이 홀로 유럽으로 떠나자는 거였죠.”
바이크 여행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스캠프는 있어야 했으므로 세이브칠드런에 있는 친구에게만 베이스캠프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고등학교 모임에서 그 얘기를 터뜨려버렸다.
“처음에는 저 혼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나도 따라가면 안 되나’ 하면서 두 명의 동창이 적극 관심을 보였어요. 바이크 탈 줄 아냐고 물어봤지요. 탈 줄 모르면 못 간다 했죠. 그랬더니 당장 배우겠다더군요. 그 친구들은 2개월 만에 면허를 땄어요.”
여행 중에 닥쳤던 위기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바이크 여행. 당연히 아무 사건 없이 진행될 리 없었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친구 한 명이 어깨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를 비행기로 귀국시키고 남은 두 사람만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바이크가 고장이 났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문씨가 운영하는 블로그 이웃이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성분이었는데, 슬로베니아에 살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이분 남편이 슬로베니아 현지인이었는데 엔지니어였죠. 그분이 도와주셔서 바이크를 다시 탈 수 있게 됐어요.”
언어의 문제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나라 말을 잘하면 좋겠죠. 안 그래도 걱정을 했는데, 여행을 시작하기 전 호주에서 한 부부를 만났어요. 그들도 바이크를 모는 부부였죠. 영어를 잘해서 부럽다고 했더니 ‘너는 한국말을 잘하지 않냐, 러시아에 가면 너나나나 말 안 통한다, 보디랭귀지가 최고다, 언어는 하다 보면 느는 거니 일단 가봐라’ 하면서 용기를 주더군요. 많은 위안이 됐습니다. 여행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은 한계가 있어요. 결국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어디서 왔니? 어디로 가니? 가족은 어떻게 되니?’ 그 정도예요. 질문들이 비슷비슷하니까 나중에는 제가 먼저 묻게 됐어요(웃음).”
바이크 여행은 자유와 낭만이다
문씨는 자신이 숨기는 게 없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 인간적인 매력을 덜 느끼게 만든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여행지와 같은 낯선 장소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특별한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 보통의 여행과 바이크 여행의 차이를 물어봤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안방 여행이라고 봐요. 그에 비하면 바이크 여행은 아웃도어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놓는다는 점에서 자연친화적이고, 그야말로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입니다. 제가 원래 체질이 좀 야생이어서 제 성향에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는 바이크 여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저하지도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신념은 ‘무작정 출발해라’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다 똑같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이크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저는 바이크 전문가는 아니지만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면서 매스컴이 올바른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이크만큼 훌륭한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여행이 없어요. 유럽에서는 바이크 뒤에 부인을 태우고 다닙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골길을 바이크를 타고 천천히 감상하는 일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바이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요. 낭만과 자유의 상징으로서 바이크의 좋은 점들을 알려줬으면 해요.”
이제 파미르 고원을 달려보고 싶다
문씨의 기질은 역시 야생이 맞는 것 같다. 바이크뿐만 아니라 암벽등반에서도 화려한 흔적을 남겼다.
“저는 삼성에서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늘 가슴에 차 있었어요. 일곱 시까지 정확히 출근해야 하고 넥타이를 맨 정장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의 기본이죠. 그런 생활을 30년 가까이 했으니 얼마나 자유가 그리웠겠습니까. 은퇴 후 예순의 나이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대학 때 잠깐 해봤던 암벽등반이 생각나서 입문하게 됐죠. 암벽 전문가인 박준규 클라이머를 찾아가서 사사받았어요. 5년간 굉장히 열심히 했죠.”
설악산에는 암벽등반가를 위한 대표적인 바위가 두 개 있다. 바로 인수봉과 적벽이다. 그중 적벽에서 등반할 수 있는 루트 중 하나는 문광수씨가 개척한 길이다. 이름은 777. 2007년 7월 7일에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준규씨를 통해 국내 정상급 클라이머로 인정받은 그는 65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의 전문 등산학교 익스트림라이더의 교장으로 초빙됐다. 바이크로 유라시아를 횡단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을 전적이다.
“요즘은 중앙아시아가 매력적이에요. 특히 지구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가고 싶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키스탄, 중국, 파키스탄이 맞닿는 곳이고 과거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죠. 신라시대 때 혜초 스님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게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친구와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
“보통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대로 잘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을 하고 보니 그리 잘살아온 것 같지 않더군요.”
문씨는 한국 최고의 대기업에서 임원 자리에까지 오른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가해주는 인생이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풍경들을 경험하면서부터다. 오직 하나의 틀에만 맞춘 삶을 살다가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그의 생각은 많이 달라진 듯했다.
“여행하면서 나름대로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돼요. 밤에는 철저히 혼자잖아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반성도 하게 되고… 제가 너무 건방진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에 그토록 정신없이 뛸 때, 친구의 손목도 잡고 함께 뛰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남은 여생은 정말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야 철이 드나 싶어요.”
상고대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변한 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것을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었다는 의미에서 ′수상′ 또는 ′나무서리′라고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잠시 만났던 상고대의 장관을 감상하면서 올 여름 무더위를 이겨보자.
경기 남양주군에 있는 군립공원 천마산(812m)에는 상고대가 엄청 크게 자랐다. 전날 녹아내리다가 밤에는 고드름으로 변하여 솜사탕처럼 매달려 있다.
수많은 등산객의 발길로 반질거리던 북한산 백운대(836m)가 두툼한 솜이불을 덮었다. 백운산장까지 눈이 녹아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상고대다. 평소 줄을 서서 오르내리던 등산로는 사람의 발길이 멈추었다. 겨우 등산객 한분 만나서 사진 한 장 남기고 하산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뒤돌아보니 정상을 감쌌던 서리 이불은 온데간데없었다.
건너편 인수봉(811m)은 지나가는 짙은 안개 위에 솟았다가 가라앉는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멋있는 유람선을 타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환상에 젖어보았다. “기다리자. 복스럽게 내린 눈이 내년의 풍년을 부른다는데!”
봄, 여름, 가을 암벽 등반가들이 북적거렸던 인수봉!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광경에 경외감이 들었다.
경기 연천군에 있는 고대산(832m)은 북 쪽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를 관망하고 있다. 경원선 신탄리역까지 기차여행이 재미있는 곳이다. 뜨끈한 커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오르자 온산에 있던 상고대가 이불이 걷히듯 잠깐 사이에 사라져가는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눈이 많이 내렸던 몇 년 전 겨울에 이 친구들을 만났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상고대! 올 여름 더위를 이겨낼 마음의 선물이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아직 ‘우리 것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은 물론 심지어 자연자원까지도 있는 그대로 내세우지 못하고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여 비교하거나 대비해 소개하곤 했지요. 이때 쓰이던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XXX’입니다. 우리 고유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냥 산솜다리라고 하면 될 것을 ‘한국의 에델바이스’라고 부르다 보니 지금까지도 아예 진짜 ‘에델바이스’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우리의 식물국명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하나, 1960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 이름의 하나가 바로 에델바이스였으니,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유 식물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한국의 에델바이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요즘도 청소년 축구 선수인 이승우에 대해 ‘한국의 메시’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한국의 XXX’가 열등감이나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가볍게 넘겨봅니다.
물론 ‘한국의 에델바이스’는 식물명의 차원을 넘어, 산솜다리의 생존 자체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했습니다. 수없이 듣고 불렀던 ‘눈처럼 빛나는, 마음속의 꽃’, 바로 그 에델바이스를 말려서 만들었다는 말에 1970년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온 중고생들이 너나없이 에델바이스 압화 액자에 아끼고 아꼈던 용돈을 기꺼이 상납했으니 얼마나 많은 산솜다리가 그 당시 사라졌을지 짐작이 됩니다. 지금은 소공원이 된 설악동의 여관과 가게마다 산솜다리로 만든 기념품이 즐비했었으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설악산의 웬만한 능선과 봉우리에서 산솜다리를 무더기로 채취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생지가 매우 협소하며, 개체 수도 극소수이다”라는 설명이 현재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식물정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실정입니다.
암튼 경위야 어찌되었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에델바이스와 우리나라의 산솜다리는 식물분류학상 같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 솜다리속의 식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학명(속명+종소명)이 에델바이스는 레온토포디움 알피눔(Leontopodium alpinum), 산솜다리는 레온토포디움 레이오레피스(Leontopodium leiolepis)로 마지막 종소명에서 달라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유사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의 식물입니다.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닐기리 산을 에돌아 내려서는 고원 길은 천상 화원이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나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산악인의 꽃. 에델바이스는 이곳에선 너무 흔합니다. 아예 꽃밭을 이룰 정도이니까요.” 몇 해 전 유명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앞서 한·일 간 신문에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오씨 역시 에델바이스와 산솜다리를 같은 식물로 착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에델바이스가 꽃밭을 이룰 정도로 핀다는 말이 오래 기억됩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 고산지대에 전 세계 산악인들의 꽃 에델바이스가 눈처럼 환하게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네팔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Where is it?
현재 국내에 자생하는 솜다리속 식물은 대략 4종. 솜다리와 산솜다리, 한라솜다리, 왜솜다리(사진)가 그 주인공들로, 꽃잎처럼 보이는 5~10장의 포엽이 흰 솜털을 뒤집어쓴 듯 보이는 데서 ‘솜다리’란 공통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포엽의 형태와 크기 등의 차이에서 머리 이름이 갈리는데, 식물학적 특성보다 자생지의 차이가 구별 요소로 훨씬 알기 쉽다. 즉 솜다리는 금강산을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 등 지금의 북한 지역이, 산솜다리는 강원도 설악산이, 한라솜다리는 한라산이, 그리고 왜솜다리는 강원도 고성, 양양, 평창과 충북 단양, 경북 봉화 등이 주 자생지다. 이 중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산솜다리는 우리나라 모든 산악인의 마음의 고향 설악산 해발 1000m 이상 산등성이 바위 절벽 곳곳에 두루 분포한다. 물론 많은 설악산 등반 코스 중 공룡능선과 서북능선 등의 높고 험준한 암벽에 가장 많이 자생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권금성은 물론,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흘림골 코스에서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바위 절벽에 피어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장수대탐방소 ~ 대승령 ~ 안산 능선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