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했다. 아침 시간에는 요양원 봉사에 오후에는 영화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바쁜 일정 쪼개서 만난 이 사람. 발그레한 볼에서 빛이 난다. 태어나면서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표정. 미련 없이 용서하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 누구에게도 남부끄럽지 않은 환한 미소의 주인공이 됐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이 꿈의 무대. 시니어 마술사 겸 영화인 조용서(趙鏞瑞·92) 씨를 만나 90대 소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전 11시에 복음병원에서 6월 생일인 분들의 생일잔치가 있었어요. 거기에 20명가량이 모였는데 그 앞에서 제가 마술을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는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교실에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들었어요.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할 영화 막바지 작업을 해야 해서 요즘 좀 정신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요즘 왜 바쁜지 설명하는 조용서 씨다. 배낭에는 뭣이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지 무거워 보였다. 영화 제작에 마술 공연도 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벼워질 날이 없을 듯싶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총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입선해 실력을 인정받은 시니어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손수 영상물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촬영에 대본에 내레이션도 직접 한다.
“서울노인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시니어 감독으로 네 차례 입선했습니다. ‘어르신 통역사들’이라는 작품은 작년에 대한극장에서 상영했어요.”
이번 영화 ‘긴 세월 살았다네’는 조용서 씨와 아내가 주인공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영화제 출품을 마쳤다고 전해들었다.
“작업을 해보니 러닝타임이 5분 40초더라고요. 90세 노년의 생활은 이렇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0월에 영화제가 있는데 입선이 되면 상영할 겁니다.”
조용서 씨가 만든 영상은 담담하고 담백한 게 매력이다.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신과 주위 동료가 배우이자 주인공. 이 시대 시니어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러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방송인 송해 선생이라고 했다.
“저보다 한 살 위인 송해 선생이 건강하게 전국을 누비는 모습이 참 훌륭해 보입니다. 저에게 많은 소재와 영감을 주십니다. 나이가 많아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시는 삶의 지표 같은 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나이를 먹고 머리도 하얗게 변해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잖아요. 제가 팔십이 넘어 영화를 만들게 될줄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2008년부터 영화 수업을 받고, 영화 제작을 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어서일까? 봉준호 감독 부럽지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반짝이는 관객들의 눈이 좋다
영화와 엇비슷한 시절에 입문한 것이 바로 마술이다. 현재 조용서 씨는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의 ‘꿈전파 문화공연단’ 마술팀 소속으로 매주 틈새 없이 복지관, 병원, 어린이 도서관 등을 돌며 공연을 펼친다.
“영화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침 고양시 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 교육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붓글씨나 노래교실도 있었는데 마술 수업을 보자마자 좋았어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제가 할 수 있는 마술은 200여 가지 됩니다. 손에 완벽하게 익어서 공연할 수 있는 마술은 30개 정도 되고요.”
조용서 씨의 마술 도구는 큰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많게는 200~300명 정도의 관객까지 아우를 수 있는 마술을 주로 구현한다고.
“손재주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없어요. 그래서 동작도 크고 화려해 보이는 마술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마술은 분위기에 따라서 다른데 부채 마술이랑 인형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입니다. 스펀지나 꽃을 사용하는 마술도 있고요. 특별히 잘하는 건 우산과 꽃을 이용한 마술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신기해 보이겠죠?”
애로사항이 있다면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은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는 이유는 관객들의 눈 때문이라고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요. 어린아이들이 손뼉 치는 거 보면 희망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대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봐주는 게 행복해요. 자부심도 갖게 되고 말이죠.”
92세 시니어가 하는 말이 소년 감수성 저리 가라다. 사실 조용서 씨는 꽤나 매스컴을 탄 인물이다. 장수 관련 방송 다큐멘터리와 시니어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꼭 물어볼 질문이 생겼다. 장수 비결 말이다.
“저는 90대의 모범생으로 살고 있다고 봅니다. 바쁘게 살아요. 그게 장수하는 비결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뭐하겠어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노인 일자리를 통해서 시니어나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 받는 시간들이 기쁘고 즐거워요.”
90년 인생 철학을 묻다
장수의 관문인 구십 문턱을 넘어 건강하게 살고 있는 시니어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안 해봤던 옛이야기 혹은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쉼 없이 이야기를 펼치며 한껏 들떠 있던 그의 들숨날숨이 순간 잔잔해졌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동안의 정적이 이어졌다.
“그저 하루하루 마음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복이고요. 아프지 않게 우리 부부가 더 오래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한숨 돌리더니 옛일이 파란만장했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의 제1차 경제 부흥을 일으켰던 세대에 속합니다. 서독 간호사, 광부들 아시죠? 그 시절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있었잖아요. 제 삶도 주인공과 비슷해요. 베트남전쟁 때도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도 항만하역 근로자로 긴 시간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이제 몇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백전백패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다시 일어나서 오늘이 있는 거 같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 즐겁게 행복하게사는 것이 지금 제 인생 최대의 바람입니다.”
이후에도 나긋하게 살아온 얘기를 하는 얼굴에 잔잔한 평화가 보였다. 본인 스스로를 연예인이라고 했던 초반의 긴장감이 없어서 더욱더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도 그 미소 잊지 말고 마술가로 영화감독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도심에 크고 작은 책방에 이어 헌책방이 생겨나더니 이번엔 책박물관도 생겼다고 해서 찾아가봤다. 지난 4월 23일 서울시 송파구 송파대로37길77에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책 박물관.
상설전시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서공간도 함께 마련했다. 지하 1층에 수장고와 오픈 스튜디오, 지상 1층에는 어린이를 위한 북 키움과 키즈 스튜디오, 어울림 홀이 있고 지상 2층에는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미디어 라이브러리, 야외정원 등이 있다.
상설전시장은 책과 문화독서라는 주제 아래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향유로 조선시대의 독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조선 시대의 독서 문화와 독서광, 장서 등이 소개되어 선현들이 보여주는 독서문화를 통하여 책 읽는 즐거움을 느껴보게 된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붓으로 옮겨 적은 책을 팔고 사는 업이 성행했다고 하니 그 모습들이 미소를 짓게 한다.
제2부는 소통으로 1910년부터 최근까지 100여년의 독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의 공간으로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연대별로 베스트셀러나 잡지가 전시되어 있어 그 공간에 서면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받는다.
제3부는 창조의 공간으로 책이 나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테마로 엮었다. 작가의 방을 통하여 책이 저술되는 시작의 공간과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돌아보는 공간. 작가의 방, 출판기획, 편집자의 방, 북 디자이너의 방을 살펴보고 체험하는 장이 있다. 작가의 방에서 들려오는 타자기 소리와 노트에 펜 긁히는 소리가 마치 현장에서 책이 탄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된다.
그리고 북 키움은 미래세대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다. 어린이들이 책과 함께 놀며 더 큰 세상의 꿈을 키운다는 기치 아래 구성된 체험 전시 공간이다. 꿈이 자라나는 체험공간인 동화마을, 꿈이 샘솟는 독서공간인 지혜의 샘, 꿈을 만드는 창작 공간인 동화마을 아뜰리에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특별한 날이나 찾아가는 박물관이 아니라 수시로 찾아가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조상들의 독서문화와 미래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친숙한 공간이다.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아니고 필요한 책을 언제든지 뽑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다.
이용 및 교통 안내
- 관람 시간은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요금은 무료.
- 지하철 8호선 송파역 4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9호선 석촌역 5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는 3322, 3417.
- 주변에 석촌시장이 있어 가족과 함께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마늘·파·부추·달래·흥거 등 오신채를 넣지 않고 만든 요리를 ‘사찰음식’이라 한다. 자칫 맛이 덜하거나 심심할 것이라 오해하지만, 다양한 레시피와 플레이팅을 접목하면 얼마든지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특별한 메뉴에 건강 밸런스까지 생각한 제철 사찰음식 한 상을 소개한다.
레시피 및 도움말 디알앤코 R&D총괄 장대근 셰프(조계종 한국사찰음식전문교육기관 이수)
장소 협찬 키프레시(홍대점) 그릇 협찬 덴비 코리아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으로 가족 모임이 잦은 5월. 따뜻한 날씨에 온 가족 소풍을 계획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소풍 하면 도시락, 도시락 하면 김밥이 떠오른다. 일반적인 김밥이 아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면 배추로 싼 닭가슴살 초회 말이는 어떨까? 칼로리 부담도 없고 차갑게 먹을 수 있어 봄소풍 도시락으로 제격이다. 도시락 인기 아이템 중 하나인 닭강정을 닭 대신 석이버섯과 가지를 이용해 만들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제철을 맞은 두릅과 배추를 새콤달콤하게 절인 우거지 두릅 김치를 곁들이면 좋다.
배추 닭가슴살 초회 말이 깨끗이 씻은 배추잎사귀(5장)를 끓는 물에 1분 데친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짜서 준비해둔다. 파프리카(빨강, 노랑 각 1/3개)를 씻어 0.5cm 넓이로 길게 썰어준다. 밑동을 제거한 팽이버섯(50g)을 흐르는 물에 헹군다. 닭가슴살(100g)을 끓는 물에 6~8분 정도 삶은 후 한입 크기로 길게 찢는다. 김발을 이용해 물기를 짠 배추잎사귀 위에 닭가슴살(30g), 팽이버섯(10g), 파프리카(10g)를 올린 뒤 돌돌 말아 김밥처럼 썰어 플레이팅한다. 기호에 따라 원하는 재료를 바꾸거나 배추잎사귀 대신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해도 좋다.
땅콩버터칠리소스 땅콩버터 2큰술, 레몬청 2½큰술, 스위트칠리소스 3큰술을 넣고 잘 섞어 만든다. 배추 닭가슴살 초회를 찍어 먹는 소스로 곁들인다.
석이버섯 가지 강정 석이버섯(10g)을 찬물에 불린 뒤 물기를 짠다. 가지(1개)를 씻어 4cm 길이로 썬다. 표고버섯(1개)은 1.5cm×1.5cm 크기로 잘라둔다. 전분가루(1컵)와 물(1½컵)을 섞어 반죽을 만든 후 2시간 뒤 위에 뜬 물을 따라버린다. 준비한 전분 반죽을 가지에 묻혀 튀김옷을 입힌다. 이때 얼음물로 반죽하면 더 바삭해진다. 170℃로 예열한 기름에 튀김옷을 입힌 가지, 석이버섯, 표고버섯을 넣고 30초 정도 튀겨낸다. 튀김에 데리야끼소스를 버무려 완성한다.
우거지 두릅 김치 두릅(1묶음)과 아스파라거스(1묶음), 배추(1포기)를 흐르는 물에 씻은 뒤 굵은 소금을 뿌려 20분 정도 절인다. 투명한 공병에 레몬청(150㎖)과 매실액(150㎖)을 넣고 섞는다. 기호에 따라 청의 양을 조절한다. 절인 채소의 물기를 꼭 짠 뒤 청이 담긴 공병에 넣어 보관한다.
꽃가루가 날리고 위험 수준을 초과하는 고농도의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날들이다. 햇볕도 강
해지고 있다. 이럴 때 우리 몸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 바로 눈이다. 몸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눈은 매우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나이가 들면 시력이 점점 나빠진다. 대체로 40대 중반부터 가까이 있는 물체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이 떨어지는데 이를 노안이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이런 증세를 경험했고 그 뒤로 시력이 점점 떨어져 이젠 안경 없이는 일상이 불편할 정도다. 안과 검진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늘 해왔지만 어쩐지 두렵기도 해서 쉽게 나서질 못하다가 용기를 냈다.
서울 강남역 부근에 위치한 비앤빛 강남밝은세상안과를 찾던 날은 봄바람이 몹시 불었다. 나는 눈이 좋은 편이어서 지금까지 안과를 가본 적이 거의 없다. 나이가 들어 찾게 되니 어색하기도 하고 살짝 겁도 났다. “어쩌자고 여길 왔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 입구로 들어서니 현대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치 카페에 온 듯 소파에 앉아 잡지와 신문을 보거나 차를 마셨다. 카페 분위기가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보호자도 볼 수 있는 수술 현황
안전한 시술, 세심한 케어를 위해 15단계의 60가지 정밀검사가 이루어진다 하니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외 1대 1 상담, DNA 유전자 검사, 수술 전 토탈아이케어, 수술 후 건조케어 등 의료시설과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신뢰가 갔다. 그러고 보니, 스마일라식·라섹, 엑스트라 라식·라섹, 옵티라식·라섹 등 수술에 있어 의료진의 숙련도가 높은 병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최첨단의 검사 장비들을 둘러보니조금씩 기대감도 생겼다. 검안실은 개방형이라 궁금하면 언제든 들여다볼 수도 있다. 누구든지 병원 내부 답사가 가능하게끔 시스템을 구축해둔 것이다. 특히 보호자도 수술 현황을 볼 수 있고 수술 후에는 진료센터에서 집중 케어를 받을 수 있다.
영화관처럼 어두운 공간이 있어 들어가 보니 시신경과 망막을 검사하는 곳이었다. 별도로 마련된, 어린이들을 위한 드림렌즈는 키즈카페처럼 밝고 동화 같은 분위기였다.
치료를 시작할 때 충분한 상담 후 결정할 수 있도록 상담실도 여유 있게 준비되어 있는 등 환자를 최대한 배려한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예약시간에 맞춰 시작된 진료는 안내에 따라 진행됐다(동행한 두 분의 동년기자와 함께). 나는 일단 기본검사만 하기로 했다. 시력검사, 망막검사, 그리고 눈 안쪽을 검사했다. 눈에 바람을 쏘는 안압검사를 통해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데 필요한 눈 속의 압력을 측정한 후 검은 포를 머리 위에 쓰고 선과 색깔을 보며 눈동자 검사도 했다. 백내장 진단도 했다.
안내에 따라서 하면 되는 시스템이어서 검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검사 결과를 듣는 시간. 의사는 내 눈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관리 방법까지 알려줬다. 나를 포함해 함께 검사를 받은 동년기자들 모두 약간의 백내장 증세가 있어 앞으로 정기적인 검안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 외엔 다행히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의 시력 손상이나 시력 저하를 막기 위해 1년에 한 번씩은 검안을 꼭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요즘 사람들은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신체의 일부처럼 가까이하며 살고 있다. 눈 질환의 원인이 되는 청색광에 하루 종일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눈 관련 질병이 발생하는 나이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안과적 문제는 더 이상 노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신체기관 중 가장 빨리 늙는 부위는 눈이라고 한다. 40대 중반부터 노안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노안은 질병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노쇠 현상이다. 안과 질환은 초기에 자각 증세가 없어서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화와 함께 찾아오는 눈 질환에 조심해야 하는 시니어는 안과와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듯 눈도 정기적으로 정밀검사를 해서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한다. 시력은 한 번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건강할 때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 무엇보다 건강한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 건강은 필수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1925년 간행된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이지요. 봄가을 없이 돋는 달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풀·나무를 하나하나 알아가기 전에는 그토록 많은 꽃이 산과 들에서 피고 지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특히 야생 난초의 존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난초는 으레 ‘잘 빠진’ 화분에 담겨 집 안이나 사무실 등 실내에서 감상하는 원예종이라고 생각해온 탓이지요.
그런데 서울, 경기, 강원 등 겨울이면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곳에서도 봄이 되면 감자난초, 은대난초, 나도제비란 등이 돋아나 희거나 노랗거나 붉은 꽃을 저마다 피워낸다는 사실을 알고는 1차로 크게 놀랐습니다. 이어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은 1순위 야생화로 꼽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복주머니란, 보춘화 등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친숙한 이름의 난초들과 으름난초, 흑난초, 무엽란처럼 다소 생소한 이름의 난초 등 무려 90여 종의 야생 난초가 이 땅에서 저절로 자란다는 걸 알고는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자주색, 즉 ‘짙은 남색을 띠는 붉은 색’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자(紫)와 난초 난(蘭)의 의미가 더해진 자란(紫蘭).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의 야생 난초는 이에 더해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하고 진한 홍자색 꽃 색으로 인해 열대 지역이나, 고온의 온실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난초일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자란이 우리 땅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야생 난초라는 걸 알고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나아가 한 야생화 애호가가 썼듯 “발에 밟힌다고 할 정도로 흔하게 자생”하는 걸 보는 순간 더 큰 기쁨과 놀라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2018년 5월 5일 차마 건너기를 주저했던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珍島)의 남쪽 바닷가에 도착해 갯바위를 밟았습니다. 그새 무성해진 산기슭을 살피니 군데군데 불쑥불쑥 돋아난 홍자색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록의 숲에 홍자색 꽃이 피니 눈에 확 뜨입니다. 자란이란 단순명료한 이름의 연유를 알 것 같습니다. 자생 난의 화려한 개화 현장을 확인한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조금 뒤 더 놀라운 장면을 만났습니다. 수백 촉의 자란이 바다와 섬이 한눈에 보이는 해안 평지에 한데 뭉쳐서 홍자색 꽃잎을 일제히 벌리고 선 장관을 본 것이지요. ‘어린이날 교통 체증’을 무릅쓰고 서울에서부터 500km 가까이 달려온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Where is it?
전라남도 무안, 신안, 진도, 해남, 완도, 고흥, 그리고 제주도가 자생지다. 남쪽 바닷가와 제주에서 자란다는 것은 자란이 열대식물까지는 아니지만 추위에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남쪽에서 자라다 보니, 다른 야생 난초들에 비해 키도 크고 꽃도 큰 편이다. 50cm 안팎의 꽃대를 포함해 키가 60cm 정도까지 자란다. 길이 20~30cm, 너비 2~5cm의 길쭉한 타원형 잎이 5~6장이나 나와 줄기를 감싸며 위로 뻗는다. 5~6월 잎 사이에서 나와 50cm까지 자라는 꽃대 끝에 3cm 크기의 홍자색 꽃이 6~7개까지 달린다. 남서해안 10여 곳 미만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자생하지만, 개체 수는 지천이어서 진도나 해남 등 자생지 야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소설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이 땅에 한 송이 꽃을 피우겠노라 다짐하며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에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는 알았다. 그 ‘화’가 ‘꽃’이 아니었음을. 낙담을 뒤로 하고 과감히 미지의 시공간으로 몸을 내던졌다. 실수라고 생각했던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할 틈 없는 과업이 됐다. 인생 최악의 오작동 사건을 통해 진정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냈다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李庭模·56) 관장. 이 세상 모든 실패와 좌절, 오해로 꼬여 삶이 불편하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천진함과 유쾌함이 가져다준 놀라운 긍정 에너지 효과를 경험할 것이다.
이정모 관장만큼 꾸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과학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쇼맨십에 언변도 좋아 매스컴에서 반기는 인물. 정통 과학 TV 프로그램이었던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KBS)는 물론이고, 이 시대 명사들만 초빙하는 ‘차이나는 클라스’(JTBC)와 ‘어쩌다 어른’(tvN) 등에 출연해 과학을 포기했던 시청자들까지 TV 앞에 끌어들였다.
눈높이에 맞춰 과학을 쉽게 알려주는 능력자
“글 쓰고 책도 출간하니 강연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글로만 과학을 설명할 필요가 없구나 했죠. 의외로 강의료도 꽤 괜찮고요. 방송에 나가 보니 영향력이 더 크더군요. 책이 제일 깊은 얘기를 하고 강연은 약간 깊이가 낮아지고, 방송은 더 낮고 표피적이지만 영향력은 엄청나죠. 보는 사람도 많고요. 처음에는 방송 출연을 경원시했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이 관장의 매력은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사박물관장에 이어 과학관 관장이라는데 낙천적이고 푸근한 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 알려진 명사라지만 아이이건 어른이건 반갑게 인사하고 만나는 ‘털보 관장님’. 과학의 범주에 있는 모든 것은 물어보는 순간 인터넷 지식 검색 수준으로 친절히 설파한다. 그는 언제부터 아는 것이 있으면 설명하고 말해주고 이해시키며 살아온 것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인생의 과정 속에서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과학자’가 아닌 ‘과학 거간꾼’의 길을 걷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교육과정을 끝까지 못 마친 경우가 많았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니까 신기해서 매번 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물어보셨어요. 어머니가 다림질하고 있으면 옆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배운 것들을 얘기해드렸어요. 너무 좋아하셨죠. 그렇게 1년간을 했더니 어머니가 양복 한 벌을 사주시며 ‘너, 야학 선생 해!’라고 하셨어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산하기관이었던 연동청소년학교에서 야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관장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과학과 수학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야학 선생을 하면서 교직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저희 학과의 경우 교직 이수가 가능했지만 상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 이룰 수 없었죠. 그런데 정작 교직 이수한 그 친구들 중에 선생님이 된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가르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못해요. 애정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보여줄까, 뭘 알려줄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애정을 가질 수 없어도 자꾸 소통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동안 사람들 만나고, 강연하고, 책 쓰고 방송 출연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물론 제게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요.(웃음)”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능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과학인” 같다고 말하니 “아주 잘 봤다”고 말했다.
“저는 실험실보다 도서관을 더 좋아했습니다. 한 개의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을 연구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요. 저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용어는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전부터 제가 써온 말입니다. 과학은 전문가 영역이니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바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우리말로 ‘과학 거간꾼’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네요. 제 바람대로 과학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실패는 당연한 것! 칭찬과 격려를
이 관장이 몸담고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설계에서부터 세밀한 것들까지 펼치고 구현했다. 무엇보다 서울시립과학관의 벽면 어디에도 과학지식 등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손으로 모래를 모으고 펼쳐 등고선의 위치 변화를 알아보고, 걸어보고, 뛰어보고, 펌프질에 자전거까지 타보면서 스스로 의미와 답을 찾도록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특별히 손주들 교육에 관심이 많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를 위한 얘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이곳은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질문을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과학관 방문객들 중 절반 이상의 친구들은 보고만 가고 절반 안 되는 친구들은 마음속에 질문을 안고 나가죠. 과학관은 과학자의 삶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이 실험이 왜 안 되지?’ 하면서 실패를 양식으로 삼아야 하죠. 과학자들도 매번 실패해요. 어쩌다 한 번 성공하는 것이죠. 실패를 해봐야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성공만 하다가 실패하는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없어요. 실패 앞에서 대처 방법을 모르면 안절부절못하면서 거짓말을 하게 돼요. 아이들에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유쾌한 관장님 고액기부자 대열 합류
재밌고 그저 신나는 명강사 관장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작년 말 통 큰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고야 말았다.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해 써달라며 푸르메재단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고 고액기부자 클럽 ‘더미라클스’ 회원이 됐다.
“포토월 앞에서 사진 찍자기에 응했는데 보도가 될 줄 몰랐습니다. 푸르메재단을 설립한 백경학 상임이사가 동네 가까이 살기도 하고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동창이에요. 전 재산 들여서 재단을 만들었는데 병원을 짓는 등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기여를 좀 하고 싶었어요. 일단 책이 좀 많이 팔렸어요. 공무원은 공무원 월급으로 살면 되잖아요. 제가 무슨 대단한 일 한 거 아니에요. 저나 제 자식들은 너무나 멀쩡하잖아요. 발달장애아들의 부모는 잘못이 없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세금으로 해결이 되면 좋으련만 안 될 때는 조금씩만 모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 월정액으로 시작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1000만 원이 내고 싶었단다. 그 뒤로도 돈이 생겨 500만 원을 또 기부했다.
“처음에는 1억 원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1억 원을 낸 사람들의 클럽이 있다더군요. 그분들께 강연을 해드린 적이 있는데 다들 좋으셨습니다. 저도 그 클럽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글도 열심히 쓰고, 특히 강연하러 갈 때 뿌듯해요. 얼마를 또 기부할 수 있겠구나 하고요!(웃음)”
1년 뒤면 관장 임기가 끝난다. 그는 어떤 자리이든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늘 다 잘됐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교육방송에서 제 이름 달고 과학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여균동 영화감독 작품에 출연해 배우로도 데뷔했어요. 배우의 꿈도 마음에 있고 말이죠.(웃음) 관장직을 마무리하면 또 뭔가를 하게 되겠죠.”
은퇴를 막막함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새삼 용기가 난다. 앞으로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이정모 관장의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나라 외식 창업 중 커피집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도 우후죽순 카페가 여럿 생겼다. 국립공원 등산로 밑에도 이전에는 없었는데 어느 날 카페 두 곳이 문을 열었다. 그래도 등산하는 사람들의 약속장소로 유용하니 생길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동네마다 들어서는 커피숍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커피 마시러 그렇게 많이 드나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주말에 집에 놀러온 예쁜 손녀가 제 어미에게 커피숍을 가자고 졸랐다. 아직 어린아이가 커피숍이라니?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커피숍이 뭐하는 곳인지는 알아?" 했더니 거기 가면 커피숍 이모가 초콜릿도 주고 사탕도 준다며 웃는다.
아들네가 이사 가기 전 동네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들여보내놓고 엄마들끼리 카페에서 브런치도 하며 즐겁게 지냈다는데 하원 후에도 아이들과 엄마들이 카페에 들르는 일이 많아서 손녀에게 커피숍이 마치 키즈카페처럼 인식된 모양이다.
이렇게 커피집이 많이 생겼는데 그중 시장통에 새로 생긴 커피숍 한 곳이 내 눈길을 끌었다. 외국어로 만든 멋진 상호가 대부분인데 이 커피숍의 간판은 ‘옥다방’이었다. 좀 촌스럽기도 하고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는 ‘옥다방’ 간판에는 귀여운 아가씨 얼굴 사진도 붙어 있었다. 흘깃 들여다보니 다방 종업원과 닮은 듯도 하다.
비슷비슷한 커피숍들이 많아서 그런지 정감이 묻어나는 이곳이 특별하게 보였다. 한번 들어가 다방 커피 한잔 마셔보고 싶었는데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요즘 체인점으로 유명한 '빽다방'이 들어섰다. 커피 값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다는 소문이어서 시장 다녀오는 길에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 사 들고 오는 게 유행처럼 되었다.
우리는 다방 세대다. 그때도 지금의 수많은 카페처럼 한 집 걸러 다방이 있었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쪽으로 카운터가 있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마담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마담들은 예복처럼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마담의 미모나 수완에 따라 매상이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마담들은 대부분 인물이 좋았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로 주요섭의 ‘아네모네 마담’이 있다. 아네모네 다방에 인기가 많은 마담이 있었다. 어느 날 잘생긴 대학생 손님이 들어와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늘 괴로운 표정으로 같은 곡을 부탁했는데 가끔 마담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마담은 자기에게 관심 있는 줄 알고 예쁜 귀고리도 달고 신경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 손님이 발작하듯 울부짖으며 뛰쳐나가는 일이 생겼다. 잠시 후 그의 친구가 들어와 죄송하다면서 친구가 교수님 부인을 사랑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면서 카운터 뒤 모나리자 그림이 교수 부인을 닮아 너무 좋아했다고 말한다. 마담은 잘생긴 학생이 자기를 본 것이 아니고 카운터 뒤편의 모나리자 그림을 바라본 것을 알고는 무안해서 귀고리를 뺀다.
나도 젊은 날 착각깨나 해봐서 마담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잘생겼던 신성일이 대학생 역, 엄앵란이 마담 역을 맡았다. 어린 손녀가 커피숍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 생각났다. 그 시절 다방에 얽힌 추억들이 문득 정겹다.
매년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생일에 맞춰 손주들에게 줄 선물을 고른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새 학기에 3학년이 되는 외손자의 생일이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선물을 사러 외손자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한테 받고 싶은 선물 있어?”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장난감 가게로 가요!”
침착한 성품의 이 녀석은 평소에도 선물을 허투루 고르지 않았다. 생각하는 태도가 사뭇 진지하다. 해마다 수십 개의 모형 자동차, 변신 로봇, 팽이 등 유행 따라 선물이 쌓여갔고 세월이 지나면 쓰레기로 변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물의 종류를 좀 바꾸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장난감은 어려서부터 많이 가지고 놀았지? 이제 선물을 다른 걸로 바꾸면 어떨까?”라고 말하며 외손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장난감에는 어른들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임도 많이 있어요!” 하는 게 아닌가. 어린이 세계를 잘 모르는 외할아버지의 속을 꿰뚫는 한마디였다.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었다. 서점을 지나 장난감 가게에 이르렀다. 아이는 장난감을 고르느라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한참 후 ‘야구게임’ 상자를 집어 들었다.
지난해부터 외손자는 방과 후 수업에서 야구를 선택해 또래들과 야구놀이를 즐기고 있다. 요즘은 야구게임 룰 익히느라 바쁘다. 낮이 짧은 겨울철이라 밖에서 오래 야구를 할 수 없는 걸 아쉬워하더니 실내에서 친구들과 야구게임을 할 수 있는 장난감을 고른 뒤 입이 귀에 붙었다. 그러고는 “다음에는 외사촌 누나와 형처럼 다른 선물을 고를게요!” 하며 너스레를 떤다.
외손자보다 5개월 먼저 태어난 쌍둥이 손녀와 손자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이 아이들에게는 주로 책을 선물한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질문을 쏟아낸다. 4학년에 진급하는 아이들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면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설명한다. 혹시 정답을 말하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며 신기한 표정이 된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의 특징이다.
손주들에게 주는 특별히 좋은 선물은 없다. 책이든, 놀이기구이든, 장난감이든 아이들이 받고 즐기면 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장 정도와 취향을 잘 살펴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되 아니다 싶으면 부드럽게 잘 설명해서 다른 생각도 해보도록 유도해야 한다. 어른이 생각한 대로 일방적으로 결정하면 선물의 효과는 사라진다. 아이들에게 선물이란 훗날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마음의 양식이 되어야 하므로.
꿀맛은 아무리 풍족하게 표현해도 뭔가 부족해 보인다. 꿀을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어주고 “옜다! 이게 꿀맛이다” 해야 그 맛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늙음도 마찬가지다 늙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늙어본 사람만이 늙음을 말할 수 있다. ‘마흔과 일흔이 함께 쓰는 인생노트’라는 책을 낸 저자는 어머니의 노년을 지켜보면서 노인 관련 책을 썼다. 저자가 60대였을 때 90대 어머니는 “넌 늙은이를 몰라도 참 모른다. 하긴 늙는 게 뭔지 알지 못하니!”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70대가 되어 어머니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면서 늙음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책을 냈다는 걸 자인했다. 살아보지 않는 한 노년의 훗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때까지 가봐야 안다. 100세를 바라보는 김형석 교수는 “100세를 살아보니 이러저러하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준다. 이런 말을 해주는 분이 있어 고맙다.
아버지를 모시던 형님이 60대 때 80대의 아버지를 모시고 용인 민속촌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가 옛날을 회상할 수 있도록 풍경들을 많이 보여주려고 “아버지 빨리 걸으세요” 하고 채근했다고 한다. 형님은 세월이 더 지난 뒤에야 그때 아버지가 빨리 안 걸은 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못 걸었다는 걸 알게 됐단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고 고백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육십이나 먹은 놈이 그것도 모르고 재촉만 했으니…” 하고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다리가 아팠지만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내준 아들이 고마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며 허리를 억지로 꼿꼿이 세웠을 것이다. 빨리 걷지 못하는 아버지를 답답해하는 아들에게 “이놈아! 다리가 아파서 그렇다”라고 불호령이라도 내리셨다면 형님의 후회는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들 며느리가 정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 기쁘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먹고 싶은 걸 사다 달라고 하면 아들은 달랑 며느리 몫만 사온다. 시어머니 몫이 없어 섭섭하기도 하지만 어른 체면에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가 그렇다. 가끔은 속으로 삭이려니 천불도 난다. 아들은 어머니가 사 달라는 요구를 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늙은이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꼭 말을 해야 알아듣는 젊은것들이 미울 때가 있다.
도서관에 가보면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지만 노인을 위한 자리는 없다. 노인 관련 책도 귀하다. 젊은 사서가 책을 구매하니 노인이 읽을 만한 책을 들일 리가 없다. 노인에게 유익한 책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니 출판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백번 양보해도 ‘노인을 위한 정책’은 불만이다. 젊은이의 눈높이로 노인을 보는 ‘젊은이를 위한 노인의 처분’만 있다.
몸이 늙으면 치아도 빠지고 변비도 생기고 고혈압, 당뇨 위험에도 노출된다. 소화력도 떨어지고 비뇨기 계통에도 이상이 생긴다. 시력, 청력도 약해지고 기억력도 둔해진다. 우울한 날이 많고 치매에 걸릴까봐 불안에 떨기도 한다. 오래 살아서 생기는 병이라고 단정하면서 아파도 참고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동년배 노인을 보면 답답하다. 현대 의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웬만한 노인병은 다 고칠 수 있고 진통제가 통증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 그러니 아플 때는 아프다 하고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치료하며 살아야 한다. 늙음을 한탄만 하며 억지로 참지 말자.
아이가 아프면 한밤중에도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부모가 아프면 당연한 걸로 여기며 그것도 못 참느냐며 눈살을 찌푸린다. 젊은것들이 헤아려주겠지 하는 마음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떨어지는 홍시를 기다리는 것처럼 헛되다. 내 몸은 내가 지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고칠 때까지 고쳐보자. 늙었다는 것은 젊음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의미이고 얼굴의 주름살은 그 시간들의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