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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손주의 새봄
- 새봄이 왔다. 세 손주에게 새 학기 시작이다. 집 앞 초등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손주와 함께 새봄이 시작됐다. 며느리와 딸에게 쌍둥이 손녀·손자와 외손자의 일정표를 받아 아내와 함께 살폈다. 초등학교 3학년 진급한 쌍둥이와 2학년이 된 외손자의 일정이 휴대폰에 기록했던 지난해 수준을 훌쩍 넘었다. 컴퓨터에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주들의 일정을 정리했다. 한편의 종합 작전도가 완성됐다. 아내는 아침 일찍 가까운 아들집에 먼저 가서 아이들을 깨우고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가 끝날 때쯤 가서 손자와 아침마다 ‘어린이씨름’을 한다. 이 녀석을 잡아보면 기분을 알 수 있다. 요사이 새 학년이 되어 힘이 더 세졌다. 붙들고 부비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등을 토닥거리면 품안에 안긴다. 어릴 적 따뜻한 할아버지 품에 안겼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에게 옷을 입혀달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어리광을 부린다. 손녀는 옷 고르기, 머리 빗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옷에 까다롭던 어릴 때 습관은 많이 달라졌다. 할머니와 오순도순 옷 고르기를 제법 잘 한다. 쌍둥이 손주와 가까운 학교를 같이 간다. 세 손주의 등·하교를 보살피는 나름 이유가 있다. 먼저 복잡한 교통 환경이 마음에 걸린다. 손잡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교실 현관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과 등·하교를 같이 하면 하루 만보걷기 걱정이 없다. 아이들이 고층 아파트 엘리베이터 이용을 꺼리고 홀로 집에 있기를 싫어한다. 손녀는 기계소리에 예민하다. 학교수업 끝나서 집에 왔다가 방과 후 수업에 다시 가고 다른 공부하러 몇 차례 집을 드나든다. 날마다 그 시각이 다르다. 때맞춰 마중을 나간다. 손주를 기다리는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말벗이 되었다. 간식을 챙겨주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어느 날 하교 길에서다. 아침에 들고 갔던 우산을 학교에 놓고 왔다. “우산은?” 했더니, “부전자전이야!” 손녀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빠는 책가방도 잃었다고 하던데요!” 이미 제 아빠로부터 얘기를 들었단다. 아들이 학창시절 책가방, 우산을 통째로 놓고 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심지어 한발에는 신발을 신고 다른 발은 맨발로 집에 오는 경우도 있었다. ‘부전자전!’ 쌍둥이에게 우산 분실 정도는 다시 묻지 않기로 했다. 딸이 육아휴직이 끝나 복직을 하면서 더욱 바빠졌다. 한주에 두 번 아내와 교대로 한 차례씩 세종시에 가서 외손자를 돌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낮에 출발하여 오후에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 아이가 저녁식사 후 운동하고 집에 오면 늦은 저녁이 된다. 다음 날이 되어야 서울에 올 수 있다. 한주에 이틀씩 외손자 돌보고,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이 꼬박 쌍둥이를 보살핀다. 일주일에 나흘은 혼자서 쌍둥이와 외손자를 돌보고, 하루는 교대로 쌍둥이를 살핀다. 세종시에 오갈 때는 짬을 내는 방법을 찾는다. 자기 일정을 빠듯하게 조정하고 교통수단 이용을 잘하여야 한다. 자원봉사일이 세종에 가는 날과 겹칠 때는 간식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한다. 관악문화원 문학공부 날은 아내에게 단독 돌봄을 부탁한다. 아내의 여유시간은 없다. “그래도 공유일과 주말이 있어서 다행이다.”며 웃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들·딸 가족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할아버지·할머니 여유시간은 사라졌다. 아내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과 새봄을 같이 할 예정이다.
- 2018-03-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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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삼월을 누리려거든
- 봄이 힘들다. 혹자는 약동이니, 새싹이니, 희망을 얘기하지만 왠지 필자는 봄이 어렵다.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 어쩐지 3월이면 기지개를 펴야만 할 것 같고, 뭔가 엄청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은 채무에 맘이 무겁다. 분명 겨울도 나름 살아냈는데 겨울잠에서 방금 깬 아딸딸한 곰 취급이 싫은 게다. 해마다 이런 투정을 했건만 여전히 봄은 오고 또 가기를 60번째란다. 해서 이번 봄은 쫌 바꾸어볼 요량이다. 실컷 기다렸다는 듯 봄맞이를 가볼까 한다. “마뜩지 않던 3월, 이제 누리는 춘삼월로!” 기억 속에 봄 햇살이 좋았던 몇몇 곳이 있다. 능동 어린이대공원 안에 아름드리나무가 늘어선 오래된 산책로, 도심 복판 선릉역 근처의 샤방한 최인아 책방,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는 후미진 골목의 Y카페가 그곳이다. 능동 어린이대공원은 설익은 젊은 날의 어설픔이 배어 있다. 당시 높은 분들의 골프장이었던 그곳의 잔디는 오르락내리락 산책로를 풍성하게 해준다. 짝지와의 악연? 시작, 어린 딸아이의 유년 추억, 불발로 끝난 짠한 연애 감정의 흐린 느낌…. 돌이켜보니 공원보다 기억이 더 그리운가보다. 불문곡직하고 누구에게나 인생의 봄날은 따시고 빛난다. 아~ 봄날이여~ 선릉역 근처 최인아 책방은 최근에 즐겨 찾는 곳이다. 교보나 반디앤루니스, 별도서관은 너무 크고 높다. 내 키를 넘는 서가는 버겁다. 날것의 지식은 부담스럽고 무겁다. 이제 지식은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편하다. 책방이 위로가 되는 것은 지식창고에서 오는 대리만족만은 아니다. 글 내용을 차치하고 사각거리며 넘어가는 종이소리, 나무 내음이 남아 있는 책 향기, 오골오골 모여 있는 글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간택을 기다리는 그곳에서 또 다른 권력의 재미를 맛본다.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어쩌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경과 나지막한 2층 공간에 나무 계단이 정겹다. 아담하고 조용한 분위기와 폭신한 의자가 딱 그만이다. 화려한 샹들리에, 입구의 샤방한 철문과 높은 천장. 한때 하우스 웨딩이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커피 한 잔 놓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좋은 거실 분위기의 공간이 편안하다. '삶이 힘들 때 권하는 책', '그리울 때 좋은 책' 책갈피로 꽂혀 있는 짧은 단상 몇 구절이 신선하다. 독특한 서가 배치가 이 서점의 개성이다. 어린이대공원이 몸의 쉼터라면 최인아 책방은 머리의 쉼터쯤이라 해두자. 빼곡한 책들 사이에서 봄날 망중한의 사치를 누린다. 초등학교 담벼락과 마주한 ‘Y카페’는 주택가에 자리한 필자만의 은밀한 아지트다. 예전에 대입 준비로 지친 고3 아이들과 기분 전환으로 즐겨 찾던 곳이다. 진한 커피와 푸짐하고 달달한 허니브레드의 생크림이 위로가 되었던 카페다. 어느 날 홀 중앙에 백색 그랜드피아노가 놓이더니 살롱으로 변해갔다. 데스크 앞에 ‘매달 3번째 금욜 저녁에는 라이브공연’이라는 작은 리플렛이 놓여 있었다. coffeezip에서 Y카페로 리모델링되었다는 주인장의 말이다. 그 후 크고 꼬망쥐처럼 들락거리면서 익숙해져갔고, 한때는 출근도장을 찍기도 했다. 한동안 뜸했지만 올봄에는 가볼 작정이다. 그사이 없어진 것은 아닐지…. 젊은 날의 빛나던 봄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중후한 2막의 봄날이 내게도 있을는지. 그날은 언제쯤일지. 이런 희망이 해를 더해서 살게 하는 봄의 힘인가보다. 봄날이여 내게 오라~
- 2018-03-1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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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자고, 소식하고, 매일 걷자
-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하는 대답이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한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빨리 늙고, 병들기 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수면은 부족하고, 칼로리만 높고 영양이 부족한 식사를 하면서,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나쁜 습관을 갖고 살아간다. 이런 습관을 버려야 젊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 잠이 보약 누구나 수면 타이밍이 따로 있다. 그래서 수면시간을 놓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한다. 잠잘 시간을 놓치면 잠이 안 와 밤새 뒤척여야 한다. 필자도 잠잘 시간을 가끔 놓칠 때가 있는데, 잠이 부족하면 하루 종일 눈이 게슴츠레하고 졸린 느낌이 들면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기억력도 흐려지고, 피곤해 만사가 귀찮아진다. 이런 상태가 되면 활력이 떨어져 순간적으로 늙는다. 식사는 당뇨 환자처럼 “건강한 식사를 하려면, 일반인도 당뇨 환자처럼 식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기, 생선, 채소, 과일, 유제품을 골고루 알맞게 먹어야 하고, 소식을 해야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고기, 생선 종류는 전혀 안 먹으려 한다. 지나치게 거부하면 영양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어 오히려 건강이 나빠지고 빨리 늙는다. 필자의 경우, 식구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혼자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데, 상 차리기가 귀찮아서 맘에 드는 반찬 한두 가지만 꺼내놓고 먹는다. 이럴 때는 아무래도 밥을 더 많이 먹게 된다. 전에는 사람들이 필자를 5~6년 정도 더 젊게 봐주곤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나이보다 더 많이 보는 경우도 있다. 나쁜 식습관 때문에 겉늙어버렸다는 증거다. 매일 30분 걷기 나이가 들수록 움직이기가 귀찮다. 그런데 ‘매일 30분 걷기’를 해야 건강하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걷기만 잘해도 웬만한 병은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사람들은 왜 안 할까? 그냥 걷기만 해도 되는 것을! 필자도 움직이기를 매우 싫어한다. 걷기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당뇨 환자의 대열에 낀 것이다. 담당 의사가 ‘소식과 운동’ 처방을 내려줬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혼자 다니기는 싫다. 그렇다고 시간 맞춰 같이 다닐 만한 사람도 없다. 생각다 못해 ‘둘레길 걷기 커뮤니티’에 들기로 했다. 혼자 걷는 것은 귀찮거나 지루하고 싫증나면 그만두기 쉽지만, 단체가 함께 움직이면 한 번이라도 더 참석하게 되고, 더 많이 걸을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처음 몇 번은 힘들어서 그만 다닐까 하는 유혹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커뮤니티 안에서 걷는 시간이 편하고 즐겁다. 시니어는 조금만 높은 산이나 계단을 오르내리면, 무릎에 무리가 가서 오히려 건강에 안 좋다고 한다. 걷기의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까, 평지나 경사도가 낮은 길이 걷기에 적당하다. 남산이나 석촌호수, 서울대공원이나 어린이대공원, 올림픽공원 같은 공원이 걷기에 좋고, 궁궐 나들이도 좋다. 그리고 멀리 가지 않아도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둘레길을 정해놓고 매일 30분씩 걷는 것도 건강하게 젊음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건강에 안 좋은 습관은 모두 털어버리고, 젊고 활기차게 살았으면 좋겠다.
- 2018-03-0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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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설날, 서른 번째 설날연휴
- 올해 설날은 2월 16일 금요일로 주말을 포함해 나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추석 황금연휴처럼 쉬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력설에 이러한 연휴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89년,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설날’로 개명하며 동시에 이틀의 연휴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한편 당시 3일 동안 쉴 수 있었던 신정연휴가 2일로 단축되며 설날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점차 늘어났고, 연휴를 여유롭게 즐기러 고궁과 테마파크 등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설날 귀성 열차표 대란 1994년 설날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 당시만 해도 설날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면 수개월 전부터 추운 날씨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해 철도청은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예매제도 개선책으로 컴퓨터 추첨 방식 도입을 추진하는 등 귀성 열차표 예매 묘안을 찾기 위해 대규모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에 시찰 나온 서울시장 1986년 설날(당시 민속절) 당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풍경. 새벽부터 귀성객으로 붐빈 터미널에 염보현 서울시장이 방문해 시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해 교통부는 귀성인파 총 200만 명 중 고속버스를 이용한 승객을 45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한복 입고 고궁나들이 1989년 첫 설날연휴가 시행되던 해, 일찍 세배를 마치고 귀경한 시민들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과 덕수궁 등 고궁나들이를 즐겼다. 또 가볍게 극장가, 어린이대공원, 대학로 등을 찾거나 스키장, 온천 등에서 여유를 보내는 이도 많았다. 당시 포근한 날씨와 긴 연휴 덕분에 거리에는 색동옷 차림의 아이들과 한복을 입은 어른들이 여느 해보다 많았다. 흥겨운 민속놀이 1990년대 초 설날을 맞아 가족이 함께 한복을 입고 널뛰기를 즐기는 모습. 당시 설날연휴 동안 서울 시내 고궁에서는 풍물과 남사당놀이 등 민속예술과 널뛰기, 투호,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1988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테마파크 서울랜드와 1989년 개장한 롯데월드 등에서 열리는 놀이마당과 풍물패 공연 등을 보러 가는 것도 인기였다.
- 2018-02-0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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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띠 남편과 사는 아내가 말하다, ‘58’의 일그러진 영웅들
-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 2018-01-2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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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의 야외 스케이트장
- 올해도 여의도공원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열렸다. 아들이 직장 바로 앞 여의도공원에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다며 가보자 해서 손녀를 데리고 갔었다. 어린 손녀는 처음 타는 스케이트가 신기한지 자꾸 넘어지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즐거워하는 손녀를 보는 필자 마음도 흐뭇하고 좋았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낭만적이고 멋지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서울시 곳곳에 겨울을 맞이한 시민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스케이트장 또는 눈썰매를 탈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창경궁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도심 한복판인 공원 광장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누구의 발상인지 참신하다. 어릴 때 외국 영화에서 아치형 다리 밑에서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털목도리를 두르고 남자들은 양복 정장을 하고 우아하게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을 보았던 게 생각난다. 너무나 로맨틱하고 참 아름다운 장면이라 감탄을 했는데 이제 우리도 도심 복판에서 얼음을 지치는 낭만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스케이트는 한 번 배우면 한동안 타지 않아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탔다. 대전에 살 때였는데 목척교 아래 넓은 대전천에 겨울이면 둥근 링크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이 스케이트를 탔다. 교육열이 높아 필자에게 무엇이든 가르쳐주셨던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날렵한 날이 있는 롱스케이트를 들고 처음 개천으로 내려갔던 때가 생각난다. 필자가 웬만큼 익힐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대전극장 골목의 일본 음식점에서 따끈한 우동을 사주셨던 것도 기억난다. 정말 그리운 시절이다. 처음 몇 번만 엄마가 따라오셨고 필자가 스케이트를 좀 타게 되었을 때부터는 혼자서 타러 다녔다. 대전천 야외 스케이트장에는 스케이트 날을 갈아주는 아저씨도 있었고 간식으로 어묵이나 코코아를 파는 간이매점도 있어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다가 사 먹었던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신나게 울려 퍼지던 음악소리도 여전히 귀에 들리는 듯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바로 건너편에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어 틈틈이 친구들과 가서 놀았다. 그 당시 서울에 하나밖에 없는 스케이트장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빨간색이나 흰색의 피겨스케이트를 탔지만 나는 검은색 롱스케이트만 탔다. 스피드를 즐기기엔 롱스케이트가 제격이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스케이트를 탈 일이 없었다. 다른 재미있는 일이 그것 말고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때 학부모 스케이트 대회가 열렸다. 아주 오랜 시간 스케이트를 타보지 않아 걱정했는데 의외로 실력이 줄지 않아 등수 안에 들었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때 스케이트나 수영은 한 번 배우면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TV 속에서 빙글빙글 링을 따라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어릴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필자도 당장 타러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마음뿐이다. 이제는 혹시라도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는 나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아직은 깊은 겨울이다. 좀 씁쓸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
- 2018-01-0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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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판!’ 모임의 핑크빛 스토리
- 1983년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면서 공휴일이었다. 그날 필자가 다니던 직장 내 처녀·총각들은 근교 유원지로 야유회를 갔다. 이름하여 ‘총처회’. 준비한 몇 가지 프로그램으로 게임을 즐기고, 예약해서 맞춰놓은 점심도 둘러앉아 맛나게 먹었다. ‘총처회’ 발기인이면서 주동자 격인 필자는 그들보다 한두 살 위이다 보니 모든 행사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 58년생 개띠 남녀 동갑내기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개판’이라는 소모임을 만들어 따로 어울렸다. 직장 건물 3층엔 기술직 남자 직원들이 근무했다. 2층엔 사무직 여자 직원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구내식당이 없어 점심때가 되면 삼삼오오 시내 음식점을 드나들었다. 점심시간 5분 전에 단골 중식집에 짜장면을 시켜놓고, 땡 하면 달려가 후륵후륵 비벼 먹고 남은 50분은 당구를 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어울리던 당구 멤버들이 두 살 아래인 58년 개띠 아우뻘 되는 동료들이었다. 퇴근하면 또 닭갈비 골목으로 몰려갔다. 닭갈비 맛이야 거기서 거기인지라 얼굴 예쁜 여 사장님이 운영하는 집에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이틀이 멀다 하고 닭갈비를 불판에 구웠다. 그 시절 닭갈비는 뼈가 있는 상태로 불판 위에서 볶아 살을 발라 먹었다. 지금이야 뼈 없이 살만 있는 닭갈비를 즐기지만 말이다. 매월 25일 월급날이 되면 중식집과 닭갈비집 주인은 외상장부를 들고 와 수금을 해가곤 했다. 지금처럼 월급이 통장으로 바로 입금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총처회는 봄가을로 1년에 두 번씩 모임을 가졌고, 직장 내 등산모임도 제법 활발했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개띠들만의 ‘개판’ 모임이 점점 끈끈해져갔다. 직장 건물 1층엔 조그만 구멍가게가 있었다. 연세가 칠십 가까이 되시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뒤편에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그 자리는 언제나 ‘개판’들의 아지트였다. 아침을 못 먹고 나온 처녀·총각들이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고, 오후 시간 출출할 땐 빵이나 과자를 먹으며 잠깐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눈이 맞는 커플이 생겼고 은연중에 자신이 점찍어놓은 상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중 두 쌍의 연애가 무르익어갔다. 남자 직원들이야 타지에서 온 직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자 직원들은 그 지역에서 채용한 사람들이라서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다. 그들만의 소모임인 ‘개판’이라는 별칭이 그리 예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 ‘개판’의 따끈따끈한 소문을 반겨주고 축하해주는 분위기였다. 기술직 부서의 임 부장님과 사무직 부서의 김 부장님의 귀에 이들의 연애담이 전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 시간이 지나 정식 결혼 얘기가 오가니까 두 부장님도 재미난 얘깃거리 소재가 되었다. 직원들이 두 부장 사이를 ‘사돈’으로 호칭한 것이다. 회식자리나 체육행사 등 야외 모임 때 ‘개판’ 멤버들이 가까이 있으면 두 부장님은 직원 이름 대신 “사위야, 우리 며느리야” 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다. 30여 년 전 청춘 남녀들이었던 ‘개판 부부’들은 지금도 가끔 만난다. 서로의 애경사에 몰려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맛집, 식도락 여행도 같이한다. 2018년 무술년 새해는 개띠들이 환갑이 되는 해다. 이젠 머리에 무서리도 제법 내려앉았고 이마도 훤히 빛나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 봉양과 자식들 교육에 힘들고, 바쁘고, 정신없기만 했던 ‘베이비부머’들이다. 앞으로 이들이 큰 걱정 없이 자식, 손주들과 무탈하게 살아가길 기원한다.
- 2018-01-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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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잡혀간 사람들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 2017-12-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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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신 신고 달렸던 개띠들에게 축배를
-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
- 2017-12-2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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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인생, 드론과 함께 하늘에 맡겨볼까?
- 택시운전사를 선망하던 시대가 있었다. 차량의 증가를 운전자가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증은 우월함의 상징이었다. 미래에도 그런 시대가 올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바로 최근 유행하는 드론 얘기다. 이제 드론은 사람을 나르고, 농기계로 쓰고, 짐을 배달하고, 군사용으로도 쓰인다. 현재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드론을 보면 자동차 문화가 시작되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동차도 처음 나왔을 땐 지금의 용도를 상상하지 못했다. 드론도 그렇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성장은 시니어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까. 드론을 정확히 정의하면 무선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를 뜻한다. 드론 하면 떠올리게 되는,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린 형태의 비행체 외에 정찰이나 지상목표물 공격 등 다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군용 무인비행기도 드론에 속한다. 우리가 드론이라고 생각하는 비행체는 항공안전법상 무인비행장치에 속하는 무인멀티콥터다.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려 멀티콥터라고 부르는데 장비에 따라 대개 4~6개의 프로펠러가 작동한다. 드론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는 역시 기술 발전 때문이다. 과거 드론 형태의 원격조정 비행체는 제 몸 하나 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늘로 날아올라도 조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 헬리콥터는 동호인 사이에서도 난이도가 최고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조종이 어렵다. 그러다 약 5년 전부터 드론이 일반인에게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카메라를 거뜬히 싣고 날아올랐고, 방송용 헬리콥터에 사람이 타고 촬영한 것보다 떨림 없는 안정된 화면을 제공했다. 적재할 수 있는 무게도 늘고, 조종이 쉬워지면서 드론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방제 조종사 성수기에 연소득 올려 대표적인 드론 관련 직종은 역시 영상이나 사진 촬영 분야와 연관이 있다. 이미 드론을 활용한 항공촬영 업체가 여러 곳 성업 중이다. 일반 방송촬영뿐만 아니라 기업 홍보용 영상, 지도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또 다른 유망 직종 분야는 농업. 그중에서도 드론을 활용한 농약 살포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농업용 드론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드론 조종사의 평균 연봉이 약 1억원에 이른다는 발표도 있었다. 상용 드론 시장의 세계 최강국으로 불리는 중국은 넓은 농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은 농촌의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드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방제용 드론의 도입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5년부터 농약살포용 드론을 ‘무인항공방제기’로 분류해 정부융자지원 대상 농기계로 등록시키고 있다. 아직은 중국산 업체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지만 국산 업체들도 하나둘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선 드론을 이용한 수요가 늘면서 “3개월 일하면 1년 쉬어도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능숙한 드론 조종사는 월 소득이 300만~5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농약 살포시기가 정해져 있고, 아직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일부 지자체에선 공동구매 형식으로 지역 농민을 대신해 드론 방제업체와 일괄 계약하기도 한다. 산업용 드론은 12kg이 넘으면 자격증 소지자만 운용이 가능하다. 농가에서 정부 융자를 통해 드론을 구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운용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는 등 쉽지 않다. 농약 살포에 드론 활용이 선호되는 데에는 시간 절약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농민 5~6명이 하루 종일 살포해야 하는 면적을 드론은 한 시간이면 방제한다. 게다가 사람이 뿌리는 방식은 농약이 비처럼 떨어져 농작물의 윗면만 도포가 되지만, 드론으로 방제할 경우 강한 바람으로 와류가 발생해 농약이 앞뒷면에 골고루 묻는다. 면적당 농약 사용량도 줄일 수 있어 토양 관리에도 유리하다. 국내에서 대표적 드론 개발 기업으로 알려진 바이로봇의 홍세화 이사는 “방제용 드론은 아직 모든 조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방제 지역의 위치나 면적을 사전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농약이 살포되고, 살포된 양까지 빅데이터로 기록해서 농작물의 생육까지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로봇에선 완구용 드론 생산뿐만 아니라 어린이 대상의 드론 코딩 교육도 하고 있는데, 드론의 위치, 고도, 동선, 비행시간 등을 프로그래밍해서 드론 동작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코딩 방식이 산업용 드론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방제 등 드론을 응용한 각종 작업이 간편해진다. 이 밖에도 드론은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러 분야에 쓰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드론 조종자를 미래 유망 직업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은 5년 내 부상할 새로운 직업으로 선정했을 정도. 군이나 경찰, 소방 등 공공기관에서 드론 운용 전문가 수요는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된다. 수색이나 정찰, 구조 작업에 드론이 쓰이고 원자력 발전소 같은 주요 건축물 점검이나 교통 상황 분석 등에도 활용된다. 자격증 취득 비용은 300만원 선 기본적으로 완구나 경량 드론은 비행 가능 지역이라면 누구든 날릴 수 있다. 그러나 12kg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드론은 초경량 비행장치 비행자격증명 중 무인회전익비행장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14세 이상의 운전면허나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수준의 신체검사증명이 있는 사람이면 지원할 수 있다. 또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이 지정한 기관에서 20시간 이상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파일럿의 숙련도를 인증받은 비행시간으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시간을 쌓기 위한 비행은 교관 입회 하에 휴일과 날씨가 안 좋은 날을 제외한 날 중 낮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획득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시니어가 자격증 취득에 유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격증 취득은 학과시험을 본 후 항공이론 구술과 실제 비행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격 취득을 위한 지정 교육기관은 항공교육훈련포털(www.kaa.atims.kr)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조종자격 취득 희망자는 포털을 통해 국내 모든 전문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이나 교육기관에서 이수한 교육이력 및 증빙자료, 자격증명 취득 방법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해 자격을 획득한 인원은 지난 2월까지 총 1536명. 그간 전문교육기관이 부족해 배출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각종 규제혁신, 조종교관 요건완화,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을 통해 전문교육기관이 확대돼 지난해 교육수용 가능인원 994명에서 두 배가량인 17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수강생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는 기관마다 다르지만 국가자격증 과정은 약 300만원 내외다. 시니어 취미로도 안성맞춤 전문가들은 드론이 시니어에게 알맞은 분야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직업이 아닌 취미로 즐길 수도 있고, 또 맘만 먹으면 충분히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국드론교육협회 이재윤 대구시협회장은 “시니어들이 드론을 배우고 나면 집중력도 늘고 손주나 다른 가족에게 아직 늙지 않았음을 자랑하는 계기로도 삼는다”며 “드론 조종이 산책이나 운동을 유도하고, 치매예방 등 교육 외적인 효과도 있어 노인대학 등에서 학과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드론은 잘 알려진 촬영이나 방제뿐만 아니라 드론의 유지 보수, 강사 등 다양한 직업 창출 효과가 기대되고 있으며, 조종교관자격 취득이나 숙련도를 확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부산인적자원개발원과 함께 시니어드론기술창업스쿨을 운영했던 동의대학교 임환섭 교수도 “모집과정에서부터 시니어가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였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며 “드론과 관련한 창업에 성공한 분과 수료생들의 취업 소식을 접했는데, 보람과 함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또 방제업계 관계자들은 만약 귀촌을 고려하고 있다면 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귀촌의 성공은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드론 방제 기술이 있다면, 연고가 없거나 마을발전기금을 내놓지 않아도 환영받는 존재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 2017-12-11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