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금발의 여인이 있었다. ‘귀여운 여인’ 줄리안 로버츠다. 시니어라면 아찔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싸이 하이 부츠 신은 채 발랄한 매력을 뽐내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스타와의 설레는 로맨스를 꿈꾸게 만들었던 ‘노팅힐’은 또 어떠한가. 두 작품의 흥행으로 줄리아 로버츠의 이름 뒤에는 ‘로코 퀸’이란 수식이 붙기 시작했지만, 이후 그녀는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영원한 귀여운 여인, 줄리안 로버츠의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적과의 동침 (Sleeping With The Enemy, 1991)
무명배우이던 줄리아 로버츠는 ‘귀여운 여인’으로 1990년 스타덤에 오르고, 맥 라이언과 함께 로코 퀸으로 부상하는 듯했지만 다음 해 전혀 다른 장르로 찾아와 관객을 놀라게 한다. 바로 ‘적과의 동침’이다. 영화는 미모의 여인 로라(줄리안 로버츠)가 결혼 후 돌변한 남편 마틴(패트릭 버긴)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언뜻 보면 행복한 부부 사이 같지만, 마틴은 극도의 의처증을 앓고 있다. 로라의 별 뜻 없는 행동에 외도를 의심하고,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뒤 곧바로 사랑을 속삭이며 자신만을 바라볼 것을 강요한다. 그렇게 가학적인 폭력에 시달린 로라는 탈출을 결심하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후 로라는 ‘사라’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살아가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영화는 장르의 본분을 잃지 않고 다시금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반전을 예고한다. 줄리안 로버츠는 이 영화에서 ‘귀여운 여인’과는 다른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각인되며 배우로서의 잠재력을 입증한다. 내용은 다소 공포스럽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의 리즈 시절 미모가 감탄을 자아낸다.
2. 에린 브로코비치 (Erin Brockovich, 2000)
‘귀여운 여인’, ‘적과의 동침’으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한 줄리안 로버츠는 약 10년 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자신감 넘치는 싱글맘 역할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녀가 연기한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은 ‘에린 브로코비치’라는 실존 인물의 실화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 업무를 하는 에린(줄리아 로버츠)이 우연한 계기로 마을에 유해 물질을 방출한 거대 기업의 실태를 파헤치고, 미국 역사상 최고의 손해배상금을 받아내는 내용을 다룬다. 평범한 싱글맘과 거대 기업의 싸움은 시작부터 승패가 예상되는 불리한 게임이다. 그러나 에린은 정의에 대한 투지와 끈기로 기업의 부조리함을 입증하고, 사회를 바꿔낸다. 왼손잡이인 줄리안 로버츠는 에린 브로코비치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며 캐릭터를 향한 아낌없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노력의 결실은 200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세계적인 할리우드 스타 자리를 공고히 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는다.
3. 원더 (Wonder, 2017)
2010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이후 눈에 띄는 흥행작이 없었던 줄리안 로버츠는 2017년 따뜻한 가족영화 ‘원더’로 호평을 받으며 건재함을 과시한다. ‘원더’는 선천성 안면기형으로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진 어기(제이콥 트렘블레이)와 그를 둘러싼 가족, 친구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10살이 되던 해, 홈스쿨링을 하며 헬멧 속에 숨어 살던 어기가 학교로 첫 발을 내디디며 시작된다. 전체적인 서사는 어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각 챕터 별로 누나 비아(이자벨라 비도빅), 친구 잭(노아 주프), 비아 친구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 등 서술자가 달라지며 주변 인물을 함께 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비아의 결핍과 잭이 어기와 친구가 된 계기 등 저마다의 사연이 밝혀지고, 이야기는 계속해서 확장된다. ‘원더’는 공동체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으로 아픔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는 인물들을 통해 사람 간 관계 맺음에 주목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차별적인 시선으로 상처 입은 어기를 향해 “너는 기적 같은 아이”라며 응원을 실어준 줄리안 로버츠의 대사가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하며 오랜 여운을 남긴다.
2018년 초연 당시 전 좌석 매진 신화를 기록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3년 만에 정동극장에 귀환한다. 초연을 함께한 뮤지컬 배우 정영주는 이번 공연에서 출연과 함께 프로듀서를 맡아 무대 안팎을 동시에 책임진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녀의 연기 인생에 첫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자, 프로듀서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그녀에게 뜻깊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에 참여한 소감은 어떨까. 배우와 프로듀서를 넘나들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베르나르다 알바’는 어떤 작품인가?
남편을 잃고 집안의 권력자가 된 베르나르다 알바가 자신의 다섯 딸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딸들의 참아왔던 본능과 욕망이 움트고 표출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죠. 알바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딸들에게 어떤 비수가 되는지 모르는 채 앞만 보고 달려가요. 처절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캐릭터죠.
Q. 여배우들만 출연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늘 듣는 질문인데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작품에 여배우 열 명이 모인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휴머니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특히나 한국 공연계는 장르 편식이 심한 경향이 있죠. 그래서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작품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닐까 해요.
Q. 작품 속 플라멩코의 역할은?
스페인의 정열적인 전통 안무인 플라멩코는 감각적이면서도 영리하게 인물들의 내면을 극대화화하는 역할을 해요. 안무의 한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 같죠. 마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살고 있는 여자들 같다고나 할까요. 단순히 몸짓, 춤 등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예요.
Q. 프로듀서 데뷔인데 소감이 어떤가?
초연을 하고,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될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작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보니 용기 내주는 회사가 많지 않았죠. 운 좋게도 제가 소속된 ‘브이컴퍼니’의 황주혜·최대성 대표는 이 공연에 대한 제 열정을 알아주었어요. 대단한 설득을 하지 않았는데도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맡겨주었죠. 엄청난 책임감을 안고 있는 상황이지만, 즐기면서 버티고 있어요.
Q. 배우로서 무대에 설 때와 다른 점은?
같은 공연을 다시 올리는 무게감은 배우로서 여러 번 경험해봤지만, 프로듀서로서 참여할 때는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프로듀서는 무대뿐 아니라 무대 바깥까지 모든 것을 살피고 분석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거든요.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해내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Q. 작품 외에 관심 있는 서사가 있다면?
극작과를 전공해서 습작이 좀 있어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연기를 하는 4명의 여배우 이야기, 불후의 명작에 등장하는 치열한 5명의 전사들 이야기, 만화 속에 나오는 성공하지 못한 마녀들이 조찬회동에서 벌이는 이야기 등 아이디어가 꽉 차 있죠. 어설프고 완성도도 떨어지지만, 열심히 고쳐보면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하나씩 자랑해볼까 해요.
Q.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무대를 놓지 않는 것이요. 배우로서든 프로듀서의 위치이든, 왠지 무대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하. 너무 거창하죠? 그냥 예술 노동가로 장수하고 싶어요. 한 239살쯤까지?(웃음) 제 무대로 많은 분이 위로받고 용기도 얻는다면 한없이 감사할 것 같아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일정 1월 22일~3월 14일 장소 정동극장
연출 연태흠 출연 정영주, 이소정, 강애심, 황석정 등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최다 노미네이트, 두 번의 여우주연상과 한 번의 여우조연상 수상. 이 놀라운 기록을 보유한 자는 누구일까? 바로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이다. 1977년 영화 ‘줄리아’로 데뷔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60여 작품에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성별과 연령의 한계를 뛰어넘고 오직 연기력만으로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그야말로 ‘철의 여인’ 같은 배우다.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스크린 속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사회부 기자를 꿈꾸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최고의 패션 잡지 '런웨이'에 입사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와 함께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의 비서로 일했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편집장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았으며, 제64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앤 해서웨이 또한 20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초년생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며 메릴 스트립과 나이 차를 뛰어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2.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1979)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지친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와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를 두고 떠났다 1년 만에 돌아와 양육권 소송을 거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의 해체를 소재로 한 고전 영화로, 이혼 가정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당시 데뷔한지 약 3년이 넘은 신인배우였던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격인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할리우드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혼 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더불어 메릴 스트립의 젊은 시절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3. 시크릿 세탁소 (The Laundromat, 2019)
유람선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앨런'(메릴 스트립)이 터무니없는 보험료에 수상함을 느끼고 보험 회사로 향하며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다. 2016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세 회피 자료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영화의 원제인 '세탁소' 또한 옷이 아닌 돈 세탁을 의미한다. 불법적인 자금 세탁을 고발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됐으며, 배우들은 작품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이동해가며 내레이터와 연기자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한다. 주인공을 맡은 메릴 스트립 또한 영화 후반부에는 극중 역할에서 벗어나 영향력 있는 배우이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탈세를 지적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웰다잉을 위해 실버타운에 입주한 7명의 꽃중년이 펼치는 치어리딩 도전기를 그린 영화 ‘치어리딩 클럽’이 오늘 개봉한다.
BBC ‘100인의 여성’에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실버 치어리딩 클럽 ‘폼즈’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이안 키튼을 중심으로, 연기 경력만 총 300년에 달하는 할리우드 대표 여성 배우가 총출동했다.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는 실버 타운에 입주한 중년 여성들이 모여 치어리딩 대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담겼다. 젊은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치어리딩 퍼포먼스를 연습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시니어들의 고충마저도 유쾌하게 그린다.
실제 치어리딩을 해본 적 없던 중년 배우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영화 속 메시지를 몸소 전했다.
중견 배우들의 연기력과 작품성은 물론, 실화의 감동까지 담아 수많은 중장년에게 응원과 희망을 선사할 예정이다.
‘호박 고구마’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이름, 나문희.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배우 나문희는 모두가 인정하는 자타공인 국민배우다.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이름을 알린 나문희는 60년간 영화 22편, 드라마 91편에 참여하며 살아온 세월의 절반 이상을 연기 활동으로 보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 ‘오!문희’에 출연해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를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트콤에서의 유쾌한 모습부터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오랜 세월 관객을 웃고 울린 나문희.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시니어를 대표하는 배우 나문희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하모니 (Harmony, 2009)
임신 중 교도소에 수감된 '정혜'(김윤진)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교정 시설에서 출산한 경우 생후 18개월이 지나면 입양을 보내야 한다는 법에 따라 품에 안은 아이와 이별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아이와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정혜는 합창단 결성을 떠올리고, 정혜의 제안으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수용자가 한데 모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개봉 당시 극장가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영화 ‘하모니’는 여성 수용자들이 합창을 통해 하나가 돼 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영화에서 나문희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 ‘문옥’역을 완벽하게 연기해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특히 전직 음대 교수였던 문옥의 지휘 아래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오합지졸 합창단이 화음을 맞춰가는 순간은 작품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2. 수상한 그녀 (Miss Granny, 2014)
아들 자랑이 유일한 낙인 ‘오말순’(나문희)은 어느 날 가족들이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상념에 빠진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밤길을 거닐던 말순은 우연히 발견한 ‘청춘사진관’에 들어가 영정사진을 찍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순은 창밖에 비친 낯선 얼굴에 경악한다. ‘할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앳된 얼굴로 변해버린 것. 스무 살의 모습으로 돌아간 말순은 당황하기도 잠시, 돌아온 청춘을 제대로 누려보기로 한다.
영화 ‘수상한 그녀’는 나문희와 심은경의 2인 1역 캐스팅으로 개봉 당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나문희는 70대 말순을, 심은경은 20대로 돌아간 말순을 연기하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특히 심은경은 ‘욕쟁이 할매’를 연상케 하는 구수하고 찰진 사투리를 구사해 나문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완벽한 싱크로율을 선보인다.
3. 아이 캔 스피크 (I Can Speak, 2017)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옥분'(나문희)은 온 동네를 휘저으며 8000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은 '프로민원러'이자 뒤늦게 영어 공부에 푹 빠진 늦깎이 학생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청에 간 옥분은 새로 전근 온 '민재'(이제훈)를 만나는데, 다른 직원과 달리 까다롭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재는 옥분의 민원을 연신 거절한다. 하지만 이에 질 리 없는 옥분은 민재를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어느 날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의 모습을 본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색다른 민원(?)을 제기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영어를 배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2007년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고 김군자 할머니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올라 증언한 것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나문희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 등 3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국민배우로서의 저력을 입증했다.
겨울의 절정이다. 게다가 미세먼지의 공습이 재난 수준이다. 온화한 기온의 남프랑스에서 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탈하듯 단 일주일 정도의 여행이어도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편안한 휴식이 될 일주일은 엄동설한을 잊게 해줄 것이다.
하루 한 군데에서 느릿하게 놀기
남프랑스의 항만도시 니스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연중 평균기온이 15℃이고 대부분 온난한 날씨여서 겨울을 나기엔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한 시간 내외의 거리에는 모나코, 칸, 생폴 드 방스, 에즈 빌리지도 있다.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역이어서 국경을 넘어가 볼 수도 있다. 지중해의 햇살이 쏟아지는 니스에 숙소를 정하고 날마다 놀이하듯 여유롭게 여행의 맛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니스의 코발트블루에 빠져들다
여름 피서지나 휴양지로 니스만큼 각광받는 곳이 있을까. 따사로운 니스의 해변은 아름다운 지중해를 품고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인다. 피서객이 어마어마하게 넘쳐나는 여름철엔 호텔비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여름 피서객이 빠져나간 가을과 겨울엔 할인 가격으로 호텔에 묵을 수 있다. 특히 이때 꼼꼼히 찾아보면 지중해의 일출과 일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을 구할 수도 있다.
내가 니스에 갔을 때는 가을이었는데도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풍경이 일상의 모습처럼 자연스러웠다. 해변의 동글동글한 몽돌 위를 맨발로 거닐면 지압을 받는 듯 시원하다. 4~5km에 걸쳐 곡선으로 멋지게 이어진 해변에서 바라보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는 시원한 색감만으로도 휴식을 준다.
군데군데 이어지는 계단을 통하면 구시가지로 들어가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이나 교회를 지나 영국인의 산책길이라 불리는 길을 걷는다. 탁 트인 광장에 앉아 천천히 도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또한 샤갈이나 마티스 박물관을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도 행복하다. 꽃시장, 채소시장, 벼룩시장을 지나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라 광활한 니스의 해안선을 굽어보는 시간은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
노천카페에서 수많은 사람이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지중해 샐러드와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는 것도 당연한 즐거움이다.
동화 속 중세마을 생폴 드 방스
16세기 중세도시 생폴 드 방스는 여행자에게 안식을 주는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다. 한적한 골목을 느릿하게 걸으며 세상과는 아랑곳없는 듯한 풍경 속에 빠져든다. 마네, 브라크, 마티스 등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 특히 샤갈이 사랑한 마을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에 소박한 샤갈의 묘가 있다. 여행길에서 이만큼 평온한 마을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생폴 드 방스는 니스의 버스터미널,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400번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영화제의 도시 칸의 종려나무 해변길
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영화제의 도시로 떠올려지는 곳이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 영화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탔던 도시다. 칸 영화제는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5월에 가면 영화제로 축제 분위기다. 햇살 쏟아지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눈부신 요트를 눈앞에 두고 커피 한 잔 마셔보는 여유를 가져본다. 종려나무들이 즐비한 해변을 걸으며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또한 즐겁다. 니스 역에서 기차로 40분 거리다.
하루에 둘러볼 수 있는 모나코와 에즈 빌리지
여배우에서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먼저 떠오르는 모나코는 니스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누구라도 한 번쯤 들러보는 몬테카를로 카지노 앞에는 언제나 여행객들로 붐빈다. 해안가로 나오면 카지노를 즐기러 온 도박꾼들의 화려한 요트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궁전과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를 지나 해양박물관을 구경해도 좋다. 시간이 충분해 모나코 빌리지의 골목까지 걸어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지중해의 선인장 마을
지중해 절벽 위에 13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 마을이 있다. 수백 가지의 선인장들이 마을 정상에 가꾸어져 있다. 이 마을에 오르면 가슴을 뻥 뚫리게 해주는 아름다운 지중해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니체는 이곳을 거닐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지중해의 아름다움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게 최고였다. 에즈 빌리지와 모나코는 가까이 있다. 두 곳을 하루에 다녀올 수도 있다.
니스 여행은 천천히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며 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해변에는 햇살을 즐기거나 힘차게 달리기를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추운 겨울에 쏟아지는 태양처럼 환한 그들의 삶을 느껴보자. 역사 속의 또 다른 세상을 걸어보면서 고단한 일상을 잊는 시간도 괜찮다. 사계절 온난한 남프랑스 니스에서 추위를 떨쳐보는 일주일은 짧아도 알차다.
어느새 벚꽃이 홀랑 져버렸다. 우리 동네가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환경도 그저 그런 변두리 서민들이 사는 곳이지만, 유일한 자랑이 가로수가 온통 벚꽃으로 되어 있어서 봄날이면 그 화사한 자태로 그 어느 부잣집 동네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때깔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년 벚꽃이 만발한 열흘에서 보름은 그 기쁨을 만끽하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일주일도 안 돼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갑작스러운 이상고온으로 계절을 착각한 벚나무들이 평소보다 4~5일 빠르게 꽃을 피워낼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벚꽃이 피자마자 때맞춰 몰아친 추위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1년을 기다려 겨우 세상에 머리를 내민 여린 꽃들은 그 흔한 벌도 나비도 영접해 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때 이르게 스러져갔다. 그들의 쓸쓸한 낙화와 함께 동네 주민들의 마음도 봄을 잃은 설움에 잠겨버렸다.
우리 인생의 봄도 마냥 따뜻하지는 않다.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해 어린 시절부터 비바람을 맞는 불우한 삶도 있으며 혹은 일찍 핀 벚꽃처럼 스스로 되바라져 자신의 운명을 주체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는 이처럼 인생의 봄날을 맞은 한 소녀의 예민한 좌충우돌 성장기다. 그러나 벚꽃이 예기치 않게 일찍 사그라져도 내년을 기약하듯 이 소녀도 치열하지만 아름답게 성장한다.
이 영화의 주된 동력은 사춘기 소녀와 엄마 간의 갈등이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사는 평범한 가정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의 환경을 부정하고 뉴욕을 꿈꾼다. 그래서 누추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레이디 버드로 작명한다. 물론 새장을 탈출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녀는 세상과 불화하고 그 모든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푼다. 엄마(로리 멧칼프)와의 싸움은 오히려 그녀의 은밀한 에너지원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전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익숙지 않게 빚어내는 힘은 감독의 능력이다. 이 영화가 대화 중심으로 진행됨에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맛깔 나는 대사와 치고 빠지는 장면의 리듬감이 뛰어난 때문이다. 결국, 좋은 영화의 조건은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고전적인 예술성에 있다. 독립영화만 하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감독 그레타 거윅의 능력이 놀랍다.
환경에 대한 불만을 엄마에 대한 반항으로 채워가던 크리스틴은 주변 친구들의 삶도 그리 화려하지 않음을 보며 차츰 자신과 화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날아오르듯 고향을 떠나면서 ‘레이디 버드’가 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본래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레이디 버드를 주문처럼 되뇌던 그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것이다.
다시 고향 새크라멘토를 찾은 그녀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귀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의지였음을 느끼고 드디어 가족에게도 화해의 손을 내민다. 감독은 엄마가 홀로 운전하며 새크라멘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신을, 성인이 된 크리스틴이 거의 똑같이 반복하는 모습을 통해 둘은 나무와 바닥에 떨어진 꽃의 관계가 아니라 한 뿌리임을 환기한다.
성장통을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지만, 이 영화는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여성 특유의 따스한 시선으로 갈등과 아픔을 감싸면서 소중한 것들을 일깨우는 솜씨가 초짜 감독을 골든글로브(작품상, 여우주연상)로 인도했다.
우리 모두 지나왔던 그 시간을 회상하며 이미 그 시절에서 한참 멀어진 딸과 영화 감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찬바람이 불고 얼마 남지 않은 벚꽃 잎이 시나브로 흩어진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키스할 때는 코를 어디에 둬야 하죠? 코를 어디에 둘까 늘 생각했어요."
여 주인공 마리아는 사랑하는 연인 로버트에게 이렇게 묻는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였다. 이 한마디로 잉그리드 버그만은 단번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또 이 장면은 최고의 키스신이 되었다. 마초이면서 멋진 남자 헤밍웨이가 한 일이었다.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들어 겪은 일들을 글로 썼다. 전쟁 중 아름답고 청순한 그녀는 파시스트에게 험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영혼은 망가지지 않았다.
'기가 막혀! 정말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거야?'
필자는 그녀에게 폭 빠져버렸다. 여자인 필자도 이럴진대 남자들은 어떠할까? 주인공 역을 맡은 잉그리드는 그 시절 가장 인기 있었던 미녀 스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로 1960~1970년대에 온 지구촌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아니 그녀는 단지 대스타라고 하기에는 표현이 많이 부족했다. 175cm의 키에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여신이었다.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승승장구하며 대스타로 입지를 다져가던 중 세인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터진다. 치과 의사인 남편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명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동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불후의 명작인 그의 작품 '무방비 도시'를 본 그녀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한다. '세상에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가슴속에 그런 용광로가 숨어 있었다니!' 두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영화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백야', '블루 벨벳'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이며 특히 오랜 세월 랑콤 화장품 대표 모델로 활동했다. 그녀는 여신인 어머니와 지적이고 잘생긴 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자를 골고루 받고 태어났다. 그녀는 잉그리드가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이다. 잉그리드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녀를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많은 영화를 통해 청순하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 정숙하고 아름다운 잉그리드의 불륜 소식에 세상 사람들은 경악했고 극도의 배신감으로 그녀를 비난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7년간을 할리우드에 입성할 수 없었다. 로베르토와의 사랑도 8년 만에 금이 가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
지금도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뿐인 영원한 내 사랑 피터!"라며 치과의사 남편 피터에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던 잉그리드가 로베르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딸은 훗날 묻는다.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남자인 아빠와 엄마는 왜 헤어졌을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그녀를 대스타로 만든 것일까? 그녀는 끝까지 당당했다. "나는 배우다. 내 연기를 비평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 사생활은 비난하지 말라“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스캔들만 알았을 때는 그녀의 열정에 열광했었는데 최근에 남편 피터가 아주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된 뒤로는 그녀에게 실망했다. 로셀리니 말고도 다른 두 명의 남자를 더 만나 사랑하게 된 그녀를 두고 필자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건 열정이 아니라 난잡한 거거든!"
딸의 평가에 선뜻 그녀를 두둔하지 못했다. 필자의 젊은 날을 지배하고 매혹시켰던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을 이해하는 한계였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 )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는 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화와 공간: 홍콩’이라는 주제로 홍콩 영화 수작들을 상영했다. 상영작 중 두 편이 허안화 작품이었다.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허안화(쉬안화, 許鞍華)의 작품들은, 일상을 통해 인생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여백과 깊이를 안겨준다.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서민의 삶을 그려내는 감독 중 허안화만큼 진실한 감독도 드물다. 허안화 작품 세 편을 차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여인 사십(女人, 四十)
주연: 소방방, 교굉
1999년에 국내에서 개봉된 허안화 감독의 (1997) 리뷰에서, 국내의 한 영화 평론가는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여성 감독 중의 일인”이라고 언급했다. 허안화의 작품은 수준 차가 심하고, 은 비슷한 주제의 걸작 멜로 (1996)을 이미 봐버린 우리의 눈높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범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주부 중심으로 그린 , 매염방의 연기로 길이 기억될 (2002)을 보면, 과대평가된 감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허안화 감독의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관객들의 가슴을 찡하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이런 면까지 빠뜨리지 않고 보는구나.”
“대사 한마디 않고 저런 감정을 표현해 내다니.”
여성 감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장면들이 많이 발견된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은 허안화의 이 같은 매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치매 노인을 둔 가정의 어려움, 부모와 자식, 자식을 거두며 직장생활까지 해야 하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애환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 그 허무까지 보여준 깊이 있는 작품이 이라면, 은 고령화 사회, 중년을 맞은 직장 여성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디테일하게 다룬 영화다.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거머쥔 의 수상 내역이 백 마디 칭찬보다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작품․감독․연기․ 촬영 등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필자는 특히 각본을 칭찬하고 싶다. 자상한 시어머니와 생활력 강한 큰며느리, 엄격한 시아버지와 그에게 쩔쩔매는 가족들,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 나 몰라라 하는 동서와 시누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소시민 남편, 여자 친구에게 채였다고 찔찔대는 아들. 마흔 살 생일을 맞은 며느리, 아내,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짐을 묘사하기 위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과 대사, 세세한 삶의 장면들에 감독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이처럼 디테일한 묘사는 직접 체험 또는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들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사실 소재는 너무 진부하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이렇게 평범한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게 옳은 것일까 생각하게 할 정도다. 차라리 TV 드라마가 소화해내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느 가정에서나 겪을 수 있는 진부한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어떤 색과 모양을 빚어내고 통찰력을 이끌어내는가는 대본을 쓰는 사람이나 감독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맏며느리를 도덕군자 같은 여인으로 묘사하길 즐기는 전근대적이며, 비현실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이 에는 없다.
자상한 시어머니에게는 마음을 열고, 못살게 구는 시아버지에게는 마지못해 공경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착하긴 하지만 가사 분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이나 아들에게는 투정도 부린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40대 가정주부가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를 잘 돌보는 것은 단지 맏며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 인간애, 연민 등에서 우러나는 보다 근본적인 행동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허안화 영화의 힘이다.
허안화의 다른 영화들을 평가절하한다 해도 과 두 편은 홍콩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40회 생일을 맞은 손 여사(소방방 蕭芳芳)에게 철없는 아들은 마른 거위를 사다 주고, 남편(나가영 羅家英)은 부모님도 오시니 재료를 아끼지 말고 요리하라고 주문한다. 큰며느리인 손 여사를 마땅찮게 여겨온 시아버지(교굉 喬宏)는 식구들이 식탁에 앉기도 전에 혼자 맛난 음식을 다 골라먹은 후 아내를 재촉해 휭 가버린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마누라가 일어나 밥할 생각도 안한다”며 큰며느리를 찾아온다. 큰며느리는 자상했던 시어머니의 죽음으로 망연자실해한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시아버지는 아들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그토록 미워했던 큰며느리만은 알아보고 의지한다.
화장지를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의 업무부 주임인 손 여사는 가사노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주변머리 없는 남편, 철없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어린아이처럼 변한 덩치 큰 시아버지를 모시느라 고군분투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며 실랑이를 하는 첫 장면에서 손 여사의 생활력과 성격을 알아챌 수 있다. “아직도 고르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는 생선 장수. 살아 있는 생선이라 더 비싸게 받는 거라는 말에 몰래 생선을 때려죽인 후 죽은 생선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깍쟁이 주부. 다음에 먹을 요량으로 생선 가운데 토막을 냉장고에 보관해두려는 아내를 보고 남편은 전부 다 요리하라며 잔소리를 한다. 시어머니는 새우 요리를 해와 주방에서 큰며느리에게 먹이고, 선물도 잊지 않고 건네준다. 유별난 성격의 아들과 살며 직장생활에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는 큰며느리가 기특해서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시아버지는 식탁에 떡 버티고 앉아 배가 고프다며 젓가락을 두드리고,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줘야 한다며 위엄을 부린다.
초반의 몇 장면만으로도 가족의 성격, 큰며느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이후로도 계속 나온다. 손 여사 남편이 동생 부부를 만나 시아버지 모시는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동생 부부와 조카들은 스테이크를 시켜먹고 손 여사 남편은 볶음밥을 시킨다. 먹성 좋은 조카들이 볶음밥도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자 두 조카에게 기꺼이 밥을 나누어주는 손 여사 남편. 잘사는 동생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밥값을 형님에게 떠넘기고 일어난다. 가정부를 두고 사는 동서는 두 말썽꾸러기 아들 뒷바라지와 강아지 돌보기, 영화 관람, 파티 때문에 시아버지를 모실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운전면허시험장 감독관인 손 여사 남편은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직장 동료들과 술집에 둘러앉아 자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인 이야기, 부모와 장모 모시는 어려움을 토로하며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면 젊은 손님들은 "도대체 몇 년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냐"고 야유를 퍼붓는다. 손 여사 남편은 자기 세대의 처지와 시대 변화를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받아들인다.
반대머리에다 안경을 쓴, 마르고 작은 체구의 손 여사 남편은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당당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일흔 살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한다. 손 여사는 “아버님은 저렇게 체격이 좋은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고 나무라며 파스를 발라준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중년 부부의 아름다운 한때를 정감 있게 표현한 장면이다.
손 여사 남편은 가끔 가장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 한다. 아내가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하자 “내게 시집 온 게 최대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맞받아친다. 그러나 “그건 다 옛날이야기”라는 아내에게 더 이상 한마디도 못하는 남편. 그는 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소동이 그치질 않자 “차라리 내가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심하고 착한 이 시대의 중년 가장, 남편, 아버지를 대표한다.
손 여사는 남편에 비해 사회적 욕구와 책임감이 강하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돌보라고 하자 “회사 다니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라며 거절한다. 수십 년간 회사의 모든 업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신속하게 처리해온 손 여사는, 젊고 예쁜 여직원이 들어와 전산화를 구축하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린다. 그러나 컴퓨터 고장으로 회사 업무가 마비되었을 때 수많은 거래처와 주문량을 완벽하게 처리해온 솜씨를 발휘해 다시 사장의 신임을 얻는다. 바이어의 식성까지 기억해두었다가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예약해 회사 경비를 줄일 만큼 애정과 완벽성을 갖춘 프로 직업인이다.
손 여사는 택시 기사가 요구대로 운전하지 않자, 교통불편처리센터에 전화를 걸어 고발하려 한다. 작은 불의도 참아 넘기지 않는 손 여사의 시민 의식. 물건 값을 깎는 깍쟁이이긴 하지만 그 선은 어디까지나 자잘한 생활의 눈속임을 넘지 않는 정도다.
손 여사는 재치 있고 영민한 여성이다. 공군 장교였던 시아버지가 전쟁 시절을 떠올리며 낙하산 타기, 포로 족치기와 같은 전쟁놀이를 할 때 그녀는 시아버지와 똑같은 전쟁놀이로 시아버지를 안전하게 돌본다. 남편이나 아들은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지혜다.
할아버지의 치매로 인한 부모님의 고생을 바라보는 대학생 아들의 심정, 즉 젊은이들의 시선도 감독은 지나치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요? 오래 살지 마세요. 모두 힘들잖아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들의 통찰은 여자 친구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며 징징대는 사랑 투정에 묻힌다. 대학생 아들에게 늙음은 아직 눈앞의 일이 아닌 것이다.
반면 손 여사 부부에게 노년은 머잖아 닥칠 일이다. “당신이 추하게 오래 살면 내가 먼저 죽어버릴 거야”라고 남편이 말하자, 손 여사는 “당신이 추해지면 내가 죽여줄게요”라고 말한다. 노년의 두려움은 손 여사의 이모 부부를 통해서도 반복된다.
양로원에서 이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이모부는 이모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경질만 부린다. 이모는 위암에 걸려 먼저 죽게 되자 남편과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타이른다. “당신이 날 데려가야 하는데. 이제는 성질부리시면 안돼요.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나는 당신 부인 노릇 안 해요. 다시 부부가 되어야 한다면 그때는 당신이 부인 노릇 해요.” 이 짧은 장면은 우리 어머니 세대의 긴 인고의 세월을 대신 보여준다.
가혹하게 따지고 들면,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그려진 손 여사와 이모는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우선으로 내세우는 손 여사의 동서와 시누이가 현대 여성에겐 더 와 닿는다. 그러나 신뢰와 연민이 결여된 이기주의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옳지 않다. 손 여사와 시어머니의 관계처럼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살펴줌으로써 그리운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그리고 바람직한 모습 아닐까.
시시콜콜 장면을 설명하듯 이야기해봤다. 볼 마음이 없어진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설명만으로는 감독의 영상을 따라잡지 못한다. 옮기지 못한 장면이 더 많다. 특히 이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그래도 살 만한 세상’임은 직접 영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Summer Snow’처럼, 무더운 여름날에 내리는 눈꽃을 맞아보는 기쁨을 만끽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