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여행은 출발 이틀 전에 결정됐다. 딸 친구가 아파서 못가게 된 자리에 무임승차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없었던 탓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다. 갑작스레 준비된 이 여행은 ‘꽃보다 청춘’에서 나피디가 비행기표 한 장 달랑 주고 킥킥거리며 웃던 그 여행을 닮았다.
밤비행기를 타고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도착했다. 방비엥과 루앙프라방에 가기 위해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 호텔까지 택시를 탔다. 하룻밤을 보내고 비엔티엔에 가기 위해 여행자거리로 나섰다. 여행자거리는 한산했다. 짐을 들고 지나는 우리를 향해 툭툭이 기사가 “툭툭” 하고 속삭였다. 처음엔 그 소리가 우스웠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라오스 어디서나 툭툭이를 볼 수 있고 툭툭이 기사의 “툭툭” 소리에 “나이트 마켓, 하우 머치?”가 저절로 나와 흥정을 시작하곤 했다.
달러를 라오스 돈인 낍으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은행 문이 닫혀있었다. 생각해 보니 일요일이었다. 다행히 열려있는 환전소가 있어 환전은 어렵지 않았다. 100불을 환전하니 80만낍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손에 들어왔다. 방비엥으로 가는 버스티켓을 예약하고 간단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행사를 찾아다녔으나 문을 연 여행사를 찾지 못했다. 처음엔 어디든 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한낮의 열기와 무거운 가방 때문인지 젖은 솜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여행자거리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도움을 청해보았다. 프론트에 있는 직원이 애써보았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리를 잘 모르니 그 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툭툭이를 타고 트래블 에이젠시를 찾아볼까 하는데 툭툭이 기사와 말이 안통했다. 우리는 방비엥 가는 버스티켓 파는 여행사에 데려다 달라 하고 툭툭이 기사는 방비엥까지 자기가 가겠다는 것 같았다. 한참 말을 주고받았는데 서로 다른 말만 되풀이했다. 그 때 선한 인상의 흑인청년이 다가왔다. 툭툭이 기사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문을 연 여행사가 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툭툭이 기사는 눈 앞에서 손님 하나를 잃고 말았다. 흑인청년이 가르쳐 준 대로 걷다가 한글로 커다랗게 ‘방비엥, 루앙프라방 버스티켓’이라고 써 진 간판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보니 한국식당이었다. 거기서 1시반 티켓을 예약하고 라면과 라오스 볶음밥으로 점심까지 해결했다. 약속한 시간에 미니밴 기사가 빈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 들만 가게되나 했는데 여행자거리 골목골목을 누비며 예약된 사람들을 태웠다. 한인 식당을 통해 예약해서인지 하나같이 한국 사람들이었다. 미니밴 하나를 가득 태운 후에 출발한 차는 버스와 택시, 자전거와 오토바이, 경운기와 소들이 함께 달리는 2차선 도로를 마구마구 달렸다. 추월에 추월을 반복하는 아찔한 운전에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로 4시간을 달렸다.
구불구불 산길을 거쳐 방비엥에 도착하니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허리가 44 밖에 안돼 보이는 기사는 도착하자마자 얼른 밴 위로 올라가 어마어마한 무게의 트렁크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트렁크를 받아 든 여행객들은 바삐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나 두리번거리는 우리 곁에서 “툭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버뷰 방갈로, 하우 머치?” 라오스에서 처음 올라탄 툭툭이는 먼지를 일으키며 소박한 시골마을을 가로질러 달렸다. 툭툭이를 타고 방비엥 마을을 달리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기대되었다.
한 번 시도했다가 못 한 일은 별것 아니더라도 꼭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하찮은 욕구가 문명 발전에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방콕예술문화센터(BACC : Bangkok Art & Culture Center)’를 찾았다. 어제의 답사 덕분에 고가철도 BTS를 타고 내셔널 스타디움 역으로 태국인처럼 거침없이 갔다. BTS를 타면 마치 놀이동산에 모노레일을 타는 기분이 들어 공연히 신났다.
다시 찾은 BACC는 못 들어갔다가 들어가니 감지덕지하는 마음에 더 꼼꼼하게 보았다. 커다란 둥근 건물은 내부가 나선형으로 9층까지 돌고 돌아 거대한 톱니바퀴를 연상시켰다. 9층에서 내려다보면 층층이 다니는 사람들이 다 보이고 1층에선 천정이 9층까지 뚫려 가슴까지 시원했다. 방문객들은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했다.
태국식 탱화, 비디오 아트, 초상화 그리는 곳 등과 작가들의 작업실 겸 가게 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7층에 다다랐다. 입장료가 무료인 그곳에 난데없이 책상과 지키는 여자가 보였다. 눈치껏 살펴보니 ‘여권이 있으면 무료’라고 쓰여 있었다. 아뿔싸! 여권은 잃어버리면 한국에 못 돌아갈까 봐 숙소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데. 연일 ‘또 낭패네!’ 하고 돌아서는데 자세히 보니 소지품 맡기는 것이 무료라는 뜻이다.
거기부터는 가방을 못 들고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럼 태국인들은 대체 가방을 어디 두고 들어가나 봤더니 그 옆에 로커가 있었다. 로커 대여료는 고작 330원이었다. 별거 아닌 것에 손해 보지 않으려다 더 큰 것을 놓칠 뻔했네.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그곳에는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White Elephant Art Award’라는 태국에서 꽤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지금도 마음에 남는 작품 중 하나는 이다. 원숭이의 모성애를 하도 따뜻하게 그려 관람자들은 태국 말과 글씨를 모르는 사람도 모두 공감할 정도다.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원숭이나 악어, 코끼리 등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또 특이한 것은 왕을 모델로 그린 작품도 여러 점 있었다. 그 중 은 동그란 방글이 얼굴 모양 스탬프를 수없이 찍어 명암을 주며 그린 왕의 옆모습이다. 태국 국민 중 많은 사람이 왕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올해로 만 70년째 재임해 세계 최장기 집권 국가 원수인 푸마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이 이렇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국민의 편에서 서서 민주주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는 태국 곳곳을 다니며 국민의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왕실 재산도 아낌없이 썼다. 태국 지폐에 모셔진 라마 9세는 그야말로 태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다. 크리스마스도 휴일이 아닌 태국에서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이 아버지날이고 휴일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라마 9세는 살아있는 신의 경지로 추앙받는 셈이다. 참고로 영화 ‘왕과 나’는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라마 4세의 일대기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회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다.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의 홍조 띤 기쁜 얼굴을 수많은 정사각형 러브레터를 펴고 접고 유사한 색상의 편지로 섞어가며 만든 것이다. 태국어를 안다면 그 내용도 읽을 수 있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자를 모르는 답답함에 빠졌다. 저 작가는 이토록 많은 러브레터를 붙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설렜을까? 어쩌면 대상을 기대하며 러브레터를 기다리듯 조마조마했겠다.
다른 전시관에는 전위예술인지 엽기적인 작품과 색다른 시도를 한 작품도 많았다. 미술 문외한이 신세대의 감성과 현대 미술을 어찌 다 이해하겠는가. 그래도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며 작가와 교감하는 것은 감상의 짜릿한 기쁨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예술작품을 접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며 BACC를 나섰다. 과연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문화 예술을 접하며 어떤 느낌일까? 이제야 비로소 우리 관광산업의 문제가 객관적으로 이해되었다.
우리는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수출을 해야 먹고 산다고 알고 있다. 일단 수출은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니 세계적인 품질이고 수출을 못하고 있는 상품은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내수 기반이 부족하니 수출을 해야 하는 면도 크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이 튼튼하면 굳이 수출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국 시장에서 생산하고 자국민들이 소비해줘도 충분하다면 굳이 출혈수출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 규모는 인구가 1억 명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는 5000만 명 수준이라 그 절반밖에 안 된다. 통일이 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니 그 때문에라도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인구가 1억 5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이 부럽다. 실제로 일본은 우리처럼 수출에 그토록 전념하지 않는다. 내수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국산품의 수준은 이제는 세계 수준급이다. 산업초기에는 품질에 문제가 많아 KS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산보다 외국산은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산품을 그렇게 만들었다가는 경쟁제품이 있어 팔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으면 바로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산품을 사줘야 한다. 폴크스바겐이 연비 조작으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만 오히려 판매가 늘었다는 것이다. 재고가 늘자 할인을 더 해줬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설설 기던 폴크스바겐이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 하여 정부에서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는 기사가 있었다. 연비 조작은 했지만, 내가 우선 타는 데는 별 지장 없고 할인해줄 때 사자는 실리적인 생각이 우선했다.
크게 품질에 문제가 없는 봉제 상품 등도 그렇다. 90년 대에 우리나라 인건비도 많이 오르고 3D 현상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가방 공장을 인건비가 싼 동남아시아에 차렸었다. 가방을 팔기 위해서 미국의 가방 박람회에 갔었는데 미국제 가방이 많아 당황했던 일이 있다. 미국은 인건비가 비싼 나라인데 싸게 만들어줄 테니 내게 주문을 달라고 했으나 미국산에 자부심을 갖는다며 거부하는 업체가 많았다. 가방 잘 보이는 곳에 ‘Proud of USA'라는 라벨을 당당히 달고 있었다.
수출과 내수는 제조업의 상품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 기사에 보니 해외 대신 국내 휴가로 돌리면 일자리가 5만개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매년 인천 국제공항 출국자가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 여행객의 10%만 국내로 돌려도 지역경제를 살리고 4조원의 내수 창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내 관광수입 중 거의 90%가 자국민이 쓴 돈이고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도 70%를 상회하는데 우리는 50%대라고 한다. 볼거리가 많은 외국 관광지도 가보고 싶을 것이다. 대충 보고 나면 역시 우리나라 관광이 말 잘 통하고 음식 맞고 우리 취향에 맞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다. 피서지 바가지요금 등 개선해야 할 점도 많다.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까지 여름에는 아들·딸 가족과 함께 가족여행을 갔었다. 하지만 쌍둥이 손주가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각자의 업무일정과 아이들의 방학을 다 맞출 수 없어, 여러 날 다녔던 장거리 여행은 꿈도 꾸기 어렵게 되었다.
방학 동안 여행커녕 오히려 손주들을 보살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3가족 9식구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일정을 맞추기 매우 어렵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해결책은 주말을 이용하여, 가까운 곳으로 ‘작은 여행’을 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같이 다녔던 ‘큰 여행’을 아들·딸 가족이 각각 재미있게 즐기도록 쪼개기로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해외, 장거리 여행이 아닌 작은 여행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3가족 9식구는 토요일 아침 멀지 않는 산으로 들어갔다. 이맘때가 되면 항상 교통체증으로 불편하지만, 일찍 서두르면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세 손주는 계곡에서 물놀이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수십 년 전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녔던 여름여행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부쩍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또래끼리 놀기 바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피서를 충분하게 느꼈다.
물놀이 덕분에 입이 짧은 아이들도 음식을 즐겨 먹었다. 보는 것으로 배가 불렀다. 오후 숙소에서는 한 가방씩 가득 채워 온 장난감 놀이에 정신이 없다. 세 녀석들! 방 하나를 차지하고 깔깔대면서 즐겁게 놀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던 것이 좋았다.
저녁 노래방은 아이들 차지였다. 마이크는 어른들 손에 돌아오지 않았다. 노래자랑을 시켰더니 ‘곰 세 마리’부터 교가까지 목청을 높였다. 즐거워하는 모습에 입이 귀에 붙는다. 손주들의 또래문화를 위하여도 ‘여행분가’는 잘 선택한 일이다.
경험자들은 “이 대목에서 시니어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전혀 문제가 없다. 자녀를 출가시키고 분가하였던 것처럼 ‘성장과정’인 것이다. 그들과 잘 어울리도록 노력하면 해결된다.
“아들 가족아 딸 가족아! 너희 일정이 바쁘고, 아이들의 학교생활도 충분히 이해한다. 예년처럼 큰 여행 함께 못한 것을 서운하게 생각마라. 오늘 큰 가족 작은 여행 매우 즐거웠다!”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국에 유행하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안 주면 맞아서 죽고, 돈을 다 주면 굶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듣는 순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지만, 시간이 갈수록 되돌려 생각을 해보니 대단한 풍자적 명언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무얼까?
아침 새벽 5시 자명종 소리가 곤한 잠을 깨운다. 어젯밤 12시, 잠자리에 들던 큰딸아이가 꼭 깨워줘야 한다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올여름휴가 여행은 독일,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필자가 사용 후 적립된 비행기 마일리지를 최대한 자기가 이용하여 성수기 가격으로 간다고 한다. 가족 합산 마일리지는 언제나 간단한 질문 하나로 단번에 그저 딸의 몫이 되고 만다. 부모는 자식이 덤으로 얻은 것을 쓰겠다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다. 큰딸은 매년 휴가 때가 되면 해외여행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라며 전 세계를 누비며 여유를 만끽했다.
며칠 전, 큰딸이 여행가방을 사고 싶다며 필자의 생각을 물었다. 그것도 하얀색으로 사겠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여러 종류의 가방 세트가 있어 당연히 반대를 했다. 그러나 결국 딸은 일을 저질렀다. 어느 날 홈쇼핑에서 택배가 왔다. 다름 아닌 가방이었고 황당했지만 받아두었다. 필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큰 딸에게 조심스럽게 ‘왜 또 샀느냐’고 했다. 더구나 하얀색을 샀으니 때가 타서 어찌 감당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딸은 미안했는지 색깔을 바꾸겠다고 하더니, 생각 해봐서 반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필자는 돌려보내기 만을 눈치만 보며 기다렸다. 딸은 결국 그 하얀 가방 안에 짐을 하나 가득 챙겨놓았고 필자는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5년 세월, 이날까지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배웅과 마중은 당연한 가족행사였다. 출국할 때도 입국할 때도 언제나 부모는 당연하게 기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큰 맘먹고 이제부터는 안되겠다 싶어 공항 리무진을 이용하라고 설득을 했다. 정거장이 집 앞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고, 딸아이는 어쩐 일 인지 쉽게 수긍을 했다. 큰딸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엄마의 충고가 합리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필자도 웬일인가는 싶었지만 잘 된 일이라 생각하며 동네 리무진 정거장 앞까지만 배웅을 하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쳤지만 어쩌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흘렀다. 정해진 아침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딸은 늦을 것 같다며 안달을 했다. 그때, 남편이 옆으로 살짝 오더니 공항까지 데려다 주자고 했고, 필자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자식들도 자기들이 돈을 벌면서부터 자기 돈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고 마음대로 자기 돈을 써댔다. 부모가 쓰는 부모 돈은 당연한 것이고 자기들 돈은 엄청 아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필자도 올해부터는 생각을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냉정하게 안 된다고 했다. 남편은 필자의 한마디에 아무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자도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부모가 늘 하던 일들을 중단하려니 어딘가 모르게 편치가 않았다. 그때 남편이 다시 들어왔다. ‘그냥 보내? 안 데려다 줄 꺼야?’ 다시 한번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필자도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여보 돈 내라고 해요. 치사하지만 기름값 3만 원, 2만 원 왕복 통행료까지 5만 원만 내라고 해요.’ 그러면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큰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묘한 웃음을 보내더니 싫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그냥 리무진을 타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필자는 그러라고 했고 오히려 잘 됐다고 위안을 했다. 공항까지는 왕복 3시간, 그것도 토요일 아침이고 또 이래저래 6~7만 원이 훌쩍 들어간다. 자식들은 자기들 돈은 아깝고 부모 돈은 언제나 공짜라는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죽기 살기로 키우건만, 자식들은 성공해서 돈 좀 벌기 시작하니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끔찍하게 약속하던 효도라는 말도 옛말이 된지 오래인듯했다. 그저 부모는 언제까지나 베풀어 주기만 해도 되고 자식들은 이따금씩 하는 명품 선물이 대단한 것으로만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최고로 키워 놓으니 가끔씩은 부모 마음을 후벼 파 놓기도 한다. 그리고도 자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부모는 마음 아프고 속상해 죽을 것 같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만 같았다.
전생에 무슨 업보로 인연을 맺었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한없이 주어도 차지 않는 것이고, 자식들은 화가 나면 대책 없이 뿜어내기만 한다. 속상해서 울 때면 엄마 아빠가 뭐 해준 게 있냐며 부모 가슴을 있는 대로 후벼 파 슬프게 만든다. 자식들이 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나 알게 될 것인가 싶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영원한 미련으로 남아 쓸쓸해진다. 한국에 와서 들려온 웃지 못할 이상한 이야기가 실감이 나는 듯해서 필자도 어느 날부터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더위 속에 리무진을 태우기 위해 10여 분을 길거리에 서 있었다. 보내고 돌아오는 내내 필자 부부는 잘한 짓인가 싶어 영 찜찜했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잘 도착했다는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부모라는 자리는 왜 이리도 무겁고 힘든 것일 까. 다 큰 자식을 여행 보내면서도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필자 부부는 자식들 짝사랑에서 냉정하게 해방되고, 부부의 앞날이나 생각하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자식과 정 떼기를 하는 불안한 첫걸음 날이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에어비앤비가 내세우는 여행 방법이다. 친구, 가족이 아닌 현지 주민과 하루 정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외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강원도 영월의 한 에어비앤비를 찾아가 숙박했다. 혼자 떠난 여행. 역시 그곳에는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 웃음 가득했던 시간이 벌써 그리울 따름이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달려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 오후 2시쯤 도착했다. 때마침 빨간색 ‘붕붕이’를 타고 마중 나온 이번 달 에어비앤비 호스트 장미자(張美子·51)씨.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다짜고짜 “약속이 있으니 같이 좀 가자”하기에 무작정 따라갔다.
친절한 미자씨와 술 빚기
장미자씨를 따라간 곳은 영월청정소재산업진흥원(이하 청정원). 작년부터 이곳에서 술 빚는 동호회 ‘자주동샘’을 조직해 영월을 대표하는 술을 빚고 있다고. 현재는 시음 행사를 열어 선을 보이거나 영월의 벼룩시장에서 소소하게 판매하는 정도지만 정식 법인을 세워 술을 판매할 계획이다. 청정원에 도착해서 할 일은 아침에 빚어놓은 맵쌀죽과 누룩을 버무려 밑술을 만드는 것. 다른 회원들이 시간보다 조금 늦은 탓에 일손을 도울 겸 두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에는 죽 반죽이 뻑뻑하지만 계속 손바닥으로 누르고 치대다 보면 걸쭉한 막걸리처럼 변한다. 치댈수록 달고 맛있는 술이 나온다고 해 열심히 거들었다.
영월 귀농 라이프, 1박2일로는 부족해요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숙소인 2층에 휙 던져놓고 장미자씨 일을 도왔다. 물론 쉬어도 상관은 없다. 에어비앤비의 정신대로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허락만 된다면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 호주와 제주에서 농장생활 했던 경험을 살려 장미자씨와 함께 마당에 난 잡초들을 뽑기로 했다. 힘들면 뽕나무 밭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사실 올해 오디 농사는 접었다는 정미자씨. 지난 3월 뜻밖의 한파로 전라도에서 가지고 온 뽕나무가 냉해를 참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래도 따 먹을 정도는 되기에 이웃 친한 분들이 와서 따가기도 한다.
머루랑 다래랑 따 먹고 살아요
장미자·안종호(安鍾浩·53) 부부는 인천에 살다 강원 영월읍 흥월리로 8년 전 귀농 했다. 작년 4월부터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됐다. 손님 숙소로 이용하는 곳은 2층 공간 전체. 집을 지을 때 2층에 작은 부엌이 있으면 편할 거 같아 장만해 넣었고, 훗날 장성한 아이들이 살게 되면 편할까 싶어 밖으로 나가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이 모든 것을 손재주 좋은 남편 안종호씨가 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한 아들, 대학에 입학한 딸이 외지에 나가는 바람에 공간이 텅 비어 버렸다.
“에어비앤비를 열어 놓고 난 뒤 설마 이렇게 먼 곳까지 사람이 들어오겠어? 했는데 문을 연 지 한 달 됐을 때 첫손님을 맞았어요.”
주말이면 매번 꽉 차는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손님들이 찾아온다.
“바로 어제 왔던 손님은 어디 온천을 예약해 놓고도 저희 집이 좋다고 퇴실 시간이 훨씬 지나 오후 1시가 돼서야 떠나셨어요.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꿀맛 나는 식사시간
저녁에는 낮에 열심히 일한 농사꾼을 위해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넣고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 주셨다. 다음 날 아침에는 직접 잡은 다슬기로 된장국을 끓여 주신 장미자씨. 안 먹어 봤으면 후회했을 맛에 눈이 트일 정도였다. 아침을 먹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각종 과일과 채소, 산나물이 지천이었다. 손님들도 적당히 먹을 정도만 담아가고 과일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아들 한다고. 삼시세끼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다더니 절대 굶을 일 없는 곳이 바로 장미자·안종호 부부의 집이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안녕 친절한 미자씨!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이민 가방을 챙겼다. 큰딸이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보다. 아이는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동생과 아빠 곁인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카이스트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필자의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 드디어 왔다 갔다 이산가족 생활 3년 만에 한국의 모든 생활들을 말끔히 정리했다. 물론 큰딸은 여전히 한국에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쳐야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비행기 조그만 창문 아래로 두둥실 떠 있는 구름들이 어디론가 희망의 솜사탕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의 부푼 마음도 그 구름을 타고 조금씩 설레 이기 시작했다. 이제 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막연한 환상이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몸에 와 닿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와 남편은 미리 나와서 흥분된 모습으로 진한 포옹을 해주었다. 불과 6개월 만의 만남이었지만 작은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환희의 미소가 안정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식구가 늘었으니 살 집부터 구했다. 같은 동네 씨미벨리에 거금 1250달러 월세인 투 베드 룸을 얻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의 카펫이 깔린 아담한 아파트에 미국적 정서가 배어있는 화이어 플레이스(벽난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시차 적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분위기 넘치고 아늑한 집으로 꾸며나갔다. 베란다 밖으로는 평화롭고 예쁜 동네가 나무도 제법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영화 속의 전원도시 같았다.
새 식구가 된 큰딸과 필자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흥분과 함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스프링클러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때에 맞춰 조용히 잔디밭 위로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먹은 파란 잔디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 생동하는 생명의 꽃향기로 필자를 환영해 주는듯했다.
오후쯤 되어 큰딸과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언제나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작은 아이를 기다렸었다. 그 이유는 빈집에 아이 혼자 들어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우선 챙겨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제법 용감하게 남편을 픽업하기 위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이 행복을 마구 실어다 주는 듯했다. 그때는 방문객도 임시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쁜 감동도 지나치면 탈이라고 이게 웬일인가 일이 터졌다. 갑자기 머리 뒤로 삐웅삐웅 대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쫓아 오고 있었다.
아뿔싸! 정신이 몽롱해지고 앞이 캄캄해졌다.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스쳐가며 하얗게 몸이 오그라졌다. 미국은 한번 걸렸다 하면 몇 백 달러는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길가로 차를 정지 시켰다. 키가 커다랗고 번쩍번쩍 장식을 단 우람하고 건장한 백인 경찰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필자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큰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겁에 질려 꼼짝없이 운전석 차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앉아 두들기는 유리 창문을 밑으로 내렸다.
경관은 운전면허증을 요구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손이 어찌나 벌벌 떨리는지 큰딸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꼼짝 말라는 것 외에는 한국과 똑같았다. 경관은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스톱 사인에 무조건 정차하지 않아 위법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특히 동네 길가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스톱 사인이 군데군데 있어서 속도를 높이 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영어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무어라 답변을 해야했기에.더듬거리는 영어로 답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WHAT? WHAT?”하더니 무슨 말인지 영 알아듣지를 못하고 티켓을 끊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울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더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아이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고 배를 움켜잡았고, 미국에 처음 와서 지리도 잘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경관이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가며 특유의 제스처를 쓰면서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그때다 싶어 필자도 합세를 해서 도와 달라고 온몸으로 사정을 했다. 여행객이라 돈도 없다며 불쌍한 척 애원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경관은 여전히 갸우뚱거리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아주 부드럽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그러느냐면서 그만 진정하라고 다독거렸다. 경관은 단순히 필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애써서 친절을 베풀어 이것저것 설명과 함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가난한 첫 이민 살림에 몇 백 달러가 순간에 눈앞에서 날아갈 뻔했다.
그뿐이랴 보험료 할증과 더불어 교통위반 교육까지 미국은 장난이 아니었다. 필자와 큰딸은 잠시 큰 숨을 고른 후에 박장 대소를 하며 손뼉을 쳐댔다. 어찌나 큰딸이 연기를 잘했던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대단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시동을 걸고 두리번 거려 스톱 사인을 주시하면서 조심조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려 있는 차창 문을 타고 맑고 깨끗한 5월의 타국 땅 바람이 머리를 신나게 날려주었다. 무시무시한 미국 경찰관과 대면한 한판 승부였고, 어쩌면 비겁한 수단이었지만 무섭고 떨려왔던 한 건을 요행하게도 잘 해결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낯 선 땅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세찬 소나기였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10번 프리웨이(고속도로)에는 'LA의 파란 하늘'이 새롭게 시작하는 삶위로 푸른 희망을 쏟아붓고 있었다.
30대 초반 중공업 부문 회사의 플랜트 화공설비 부문 해외영업 팀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대 초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과 제철은 겨우 기초를 마련하였고 자동차도 현대 포니를 시작으로 국산 소형차가 출고되어 인기리에 주문받던 시기였다. 회사에서는 새로이 중화학 분야의 플랜트를 일괄수주 방식이나 주요설비의 부문별 주문방식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에게는 플랜트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거의 없어 국제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회사 경영진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유명 엔지니어링 회사와 접촉하여, 우선 우리 회사의 생산제조 기술과 경쟁력, 그리고 상세 설계 능력 등을 홍보하여 그들 하청 형태로 납품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기본 설계와 엔지니어링에 경험이 많은 그들의 협조 하에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으로 국제 입찰에 참여하여 그들의 기술도 습득하고 동시에 공사에도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하였다. 필자와 화공설비설계부장, 그리고 뉴욕주립대학교 공대 학장을 역임한 미국인 고문(어드바이저)으로 기본추진킴이 구성되었고 필요에 따라 현지 지사장과 본사 임원진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우선 일본지역으로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등 10여 개의 유명 엔지니어링 업체와 약 보름 정도의 일정으로사전에 회의 일정을 마련하여 개별적으로 방문하였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상대 회사의 참석자가 상당한 나이와 직급의 고위급 인사들이었으나 무척 긍정적이어서 우리의 거의 다 받아들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특히 회의 후에는 출입문까지 배웅하며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에게 끝까지 몇 번이고 응대 인사를 하여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2차 미팅은 미국과 캐나다 지역으로 면적도 넓고 회사도 많아 약 한 달 반 정도의 일정을 갖고 회사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회의 일정은 현지 지사의 도움으로 주로 필자가 결정하였는데 두 번 세 번 방문하기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아 한 번으로 정했는데 일정이 빠듯하니 중반 이후부터는 상당한 피곤함을 느꼈다. 출장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멸치, 김, 고추장과 라면 등을 준비해 갔는데 호텔 방을 함께 사용했던 설계부장과 커피용 더운물을 요청하여 가끔 몰래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지냈다. 가져갔던 음식물도 떨어지고 넉넉하게 준비했던 양말과 내의도 부족하여 저녁 늦게 돌아와서 빨아서 말려 입기도 하였다.
주로 주 중에 회사들과 회의하고 주말에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도록 일정을 만들었기 때문에 쇼핑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겨우 휴일에 시간이 있어서 내의를 사러 미국 디트로이트인지 피츠버그인지에 있는 현지 백화점에 가서 내의를 몇 장인가 사고 50달러 짜리 현금을 냈더니 점원이 위조지폐인지 확인을 하러 계산대로 가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별로 큰 액수도 아닌데 그곳에서는 주로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금 50달러는 큰돈이라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카드를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해외 출장을 갈 때는 매번 미화 100달러 짜리 여행자 수표나 현금, 그리고 방문국가의 현지 화폐를 준비해 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휴스턴과 뉴욕에서는 현지 주재원의 안내로 라이브 쇼를 구경했는데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성행위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무척 놀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밖에 댈러스 등 텍사스 지역은 같은 영어지만 끊지를 않고 계속이어서 응얼응얼 발음하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대도시에는 대부분 한국음식점이 있어서 가끔 한식을 즐길 수 있었으며 한국과 비교하여 값도 비싸지 않으면서 맛도 좋은 집이 많았다. 특히 미국 동부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의 회사들과 회의 후 식사 때에 바다가재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초대받은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렇게 크고 맛있는 바다가재 요리는 그후 별로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으로 돌아와 방문했던 회사들과의 회의 시 상담했던 사항들에 대한 후속 조치들을 약 한 달 여에 걸쳐 처리한 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지역 엔지니어링 업체 방문 계획을 세웠다.
유럽 지역 업체는 스냄프로게티 등 이탈리아 회사부터 상담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직항노선이 없어 홍콩, 싱가포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로마공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기본 팀원인 3명이 함께했는데 당시 로마에는 우리 회사의 지사가 없어 공항에서 우리가 방문할 회사의 주소를 공항 안내카운터의 직원에게 알려주고 방문할 회사 근처의 호텔로 어떻게 가면 좋을지 조언을 부탁했다. 그 직원이 운전기사를 한 명 소개하면서 도움을 받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운전기사는 친절하고 싹싹하며 영어는 잘 못 하지만 무척 명랑하고 낙천적이였다. 운전하면서도 연신 휘파람으로 노래하곤 했다. 그는 약 1시간 반 정도 달려서 원형경기장 옆의 호텔로 친절하게 인도해 주었으며 내일 아침 다시 그가 와서 우리를 회사로 안내하기로 약속하였다. 택시 요금이 상당히 많이 나왔으나 주행거리가 많아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다.
호텔이 약 150년 전에 지어져서 거의 문화 유적지 같은 그런 형태였으며 엘리베이터는 없고 도르래 같은 리프트의 쇠사슬을 손으로 잡아당겨서 위아래 층을 오르내리는 형태였다. 방을 배정받은 후에 제일 먼저 약속한 엔니지니어링 회사에 전화하여 다음 날 회담 시간 등을 다시 확인하였다. 우리 호텔 이름과 주소를 물어서 알려주니 자기 회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단다. 약간 황당하였으나 다음 날 아침에 운전기사와 약속한 사항이 있어서 그대로 이용한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조금 후에 욕실에서 샤워하려고 하니 온수가 나오지 않아 호텔카운터로 전화를 하니 샤워를 한다면 자기들에게 미리 전화하면 온수를 가져다준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많은 나라 많은 호텔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행인 점은 호텔 식당에 직접 갓 구운 빵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 식사 시 맛 좋은 빵과 신선한 치즈와 우유, 채소 등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웃기는 일은 다음 날 운전기사가 우리를 회사로 데려다 주는 데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우리가 공항에서 회사 주소를 주면서 그 주소 근방의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따지자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척하면서 능청을 떨어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그 회사가 자기들이 자주 거래하는 택시를 불러주어서 타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요금이 타고 갈 때와 비교하여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웃고 친절하게 하면서 여러 가지로 바가지를 씌운 것 이였다. 로마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주말에 거리를 산책하는 데 젊은 아가씨들이 일광욕을 위해서인지 상체를 완전히 벗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 안 보는 척하며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먼저 파리에서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본사의 설계담당 상무가 한 분 합류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분이 도착하자마자 사고가 발생했다. 호텔 안내대에서 입실 등록을 하는 매우 짧은 순간 서류가방을 훔쳐가 버려서 여권과 돈 등을 모두 잃어버렸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파리였다. 후에 대사관에서 서류 재발급 받고 주변에서 돈 빌리고 해서 겨우 출장을 마칠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기는 일은 우리 일행이 네 사람인데 한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전기사 옆에는 보통 커다란 개를 태우고 다니며 뒷좌석에만 손님을 태우는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의 미국인 일행이 영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자기는 영어 잘못 한다고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대꾸하며 상대를 잘 안 해주는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 백화점 등에서 쇼핑할 때는 어떻게든지 영어를 잘하는 젊은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다. 이때 내가 아내를 위해서 멋진 가죽 치마와 점퍼를 사다 주었는데 옷은 사다 줄 때마다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나중에는 포기하고 돈을 갖다 주니 좋아해서 그때부터 아내가 돈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필자가 독일어 전공이라는 점이 빛을 발했다. 밤에 호프집 등 음식점 갈 때 꼭 필자와 동행을 하려고 해서 약간 우쭐댈 수가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많았는데 보행자가 있으면 차들이 반드시 정차해서 보행자가 완전히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운행하여 당시 우리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엔지니어링 회사 방문 상담 이후 점차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술과 경험이 축적되어 약 10여 년 후부터는 조선이나 단순 구조물 생산보다 일괄도급 형태의 공사 수주가 더 많아졌다. 물론 최근에는 경쟁적으로 저가 공사 수주를 많이 하여 대부분의 중공업 업체들이 부실 위험에 처해 있어 무척 안타깝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