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나의 삶에서 얼마나 ‘참[眞] 나’로 살아왔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과 모자람을 애써 부여잡고 진짜 나를 뒤로하지는 않았던가.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책과나무)의 저자 신아연은 그런 이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과 고통의 경험을 말미암아 그 고유함이야 말로 내면의 자산이 되어 삶을 넉넉하게 해주리라 이야기한다.
Q. 나이 50 이후 참 자기로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노장인문단상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을 펴내시게 된 계기와 소감 부탁드립니다.
7년 전, 옷 가방 두 개를 거머쥐고 21년간 살았던 호주를 떠났습니다.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둑시근한 신림동 고시촌 방에서 어떤 날은 라면 하나,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며 주야장천 글을 썼습니다. 3년 전부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3시간 동안 글을 쓰는 ‘글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글을 모아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을 냈습니다. 삶의 질곡에서 글을 붙잡았고, 삶이 또한 글을 잡아주었습니다. 고난과 갈등을 겪은 사람일수록 50 언저리에 내 인생을 찾고 싶다는 자각이 강하게 오는 듯싶습니다. 그러한 자각과 구체적인 자기 훈련의 결실이 한 권의 책이 되었네요. 이혼 후 흐느적대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단단해진 동시에 한 꺼풀 벗는 느낌도 있습니다. 내 삶의 마스터키를 쥔 것 같고, 소명이랄까, 본래 음성이랄까, 살아갈 의미랄까 이런 것들이 좀 더 분명해진 듯합니다.
Q.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위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인간의 위대함은 운명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그대로 살아내는 데 있다고, 그것이 운명을 바꾸는 길이자 본래 자기로 사는 모습이라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껴안아 버리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약점과 실패와 좌절과 붙잡힌 발목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좋아지지도, 그렇다고 놓아지지도 않는 그 부족함과 모자람이 나를 성장시키고 타인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지금 이 자리가 순식간에 살 만한 자리로 변합니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다면’ 그대로 안고 살아가십시오. 제가 그렇게 살아보니 그럭저럭 살아집디다.
Q. 자생한방병원 사이트에 ‘영혼의 혼밥’이란 타이틀로 2018년 12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쓴 글 300편 가운데 100편을 엮은 책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글을 추리셨나요?
‘인생은 목차다’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책을 낼 때 목차를 명확히 하고 의미별로 파트를 구분하면 글 내용은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삶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뒤섞이고 모호하게 흩어져 도무지 길이 안 보이는 것 같을 때는 인생을 목차로 나눠보는 겁니다.
책에는 ‘나이 50 이후 참 자기로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이란 긴 부제가 붙어있는데, 인생 중반의 목차와 같은 거지요. 참 자기로 살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현재 처지가 녹록하지 않더라도, 그럴수록 남은 삶은 더욱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부족함 그대로 남은 생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제 경험을 통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 그러니까 50 쯤 되면 인생 성적표가 나옵니다. 제 경우 가정 경영에서 낙제점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그게 제 현실인 걸요.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밖에요. 다만 이제는 다른 목차와 여정으로 가야지요. 이번 책은 제게 후반 인생의 새로운 목차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것이기에 목차마다, 100개 제목마다 감회가 새롭고 남은 생에서 충실한 이정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Q. 이혼 후 삶의 어떤 부분에서 ‘본래 자기(참 자기)로 산다는 것’을 체감하시는지요.
25년 동안 매 맞는 아내로 살았습니다. 결혼하자마자 호주로 이민을 갔고, 좁은 교민사회에서 가정폭력을 감추는 데만 급급해 서서히 자신을 잃어갔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은 처음부터 없었을지 모르죠.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고립됐고, 남편의 폭력 수위는 점점 높아져 이러다 맞아 죽겠다 싶어 맨 몸뚱이로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후 수순처럼 절박한 가난이 찾아왔지만 이는 오히려 저의 정신을 맑혔습니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는 인식이 현실을 직시하게 했고, 그때부터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차츰차츰 일어서며 내가 나로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14/감(感)]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한다면요?
우리는 각자 고유한 존재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남 다른 재능을 발휘하거나 각별한 사회적 성취를 거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령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이 고유한 자기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통해 배울 게 있고 정신적, 영적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인생의 모든 면에서 남에게 설명할 수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그런 자신만의 삶을 산다면 남을 흉내내거나 부러워하면서 나 아닌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는 혼자 견딘 세월이 저의 고유함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7년간 아무도 안 만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곰이 웅녀가 됐듯이, 4.5평 원룸에서 책과 글만 ‘먹으며’ 견뎠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내면 자산이 되었고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고유함이 되어 가난과 고독을 넉넉하게 품고 살아가게 합니다.
Q. [46/삶의 농도를 더 짙게 하려면]에서 새해가 될 때마다 죽음 생각이 나곤 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살아있는 한 ‘죽음 그 자체’는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죽음을 자주 말합니다. 뒤집어 말한다면 삶을 그만큼 공고히 다진다는 의미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죽는 것이 무서웠어요. 뭔가를 시도할 때마다 죽으면 다 끝인데 해서 뭐하나. 피땀 흘려 해냈는데 그 다음날 죽으면 어쩌지? 이런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았으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해야 하나요? 죽음은 두려워할 일은 확실히 아니지요. 준비해야 할 일일 뿐. 최근 죽음학 연구자 최준식의 저서 ‘죽음 가이드북’을 읽었는데, 이 책은 죽음을 준비할 적절한 나이까지 가이드 합니다. 40세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하네요. 죽음을 준비하는 데도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지요. 많은 사람이 죽음 준비에 이미 늦었을 수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죽음의 준비에도 적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Q. [65/좋은 글을 쓰기 위한 딱 한 가지]에서 ‘내 글의 독자는 오직 나’라는 것을 명심하고, 죽을 때까지 정말 누구에게도 그 글을 보여주지 말라 조언하셨지요. 스스로도 그러한 글을 쓰시는지요?
이 말을 한 데에는 글이 그 사람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지요. 글은 그럴듯하게 쓰지만 실제 삶과의 괴리가 크거나 위선적인 사람도 있지요. 저도 예외가 아닐 테고요. 그 이유는 식당 음식처럼 내다 팔기 위한 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보니 조미료를 쳐서라도 억지로 맛을 내야 하는 겁니다.
반면, ‘내 글의 독자는 오직 나 뿐’이라면 ‘집밥’처럼 소박하고 꾸밈없는 진정성어린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제게 그런 시도는 호주에 사는 두 아들에게 편지 쓰기와 묘비명 쓰기가 될 것 같아요. 최근에 제 묘비문(文)을 이따금, 그러나 정기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실제 묘비에 새기고 말고와 관계없이 그 글만큼은 진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발로인 거지요. 한 생이 완전히 문을 닫는 죽음 앞에서까지 거짓된 글을 쓴다면 생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의미이니까요. 묘석의 글은 살아서는 오직 나만을 독자로 함과 동시에, 죽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는 진실한 글이 되겠지요.
Q. 호주에 사는 두 아들은 아직 어머니의 글을 읽지 못했다죠. 그동안 출간해온 책 중 한 권이 번역본으로 나와 자녀들이 볼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르고 싶나요?
한국으로 돌아온 2013년 이후 총 5권의 책을 냈는데, 그때마다 책머리에 “나의 두 아들 진원과 규원을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며 이 책을 냅니다. To my lovely sons, Jinwon & Kyuwon”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제 글을 읽지를 못해요. 아주 어릴 때 이민을 가서 한글 독해력이 부족해서지요. 그런데 그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만약 아이들이 제 글을 읽었다면 글 속 엄마와 자신들이 아는 엄마가 달라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제 책이 영문으로 출판될 수 있다면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가 되었으면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독도를 까맣게 덮을 만큼 그 수가 많았으나 일본 강점기 때 멸종된 독도 강치 이야기로, 무자비한 도륙과 처참했던 대학살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어린 강치 한 쌍이 천신만고 끝에 호주 연안에서 구조되고, 일생을 동물원에서 보낸 후 아들 강치를 고향 독도로 돌려보낸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한국의 식민지 역사를 이해하고, 해외 동포들의 애환을 강치를 통해 비유적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자신들의 처지와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Q. 책에서 ‘노자’ ‘장자’, ‘공자’ 등 성현들의 말씀을 통해 마음을 다독이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새기는 문장이 있다면요?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를 들고 싶네요. 노자 도덕경 56장 첫 구절입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나이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한다는데 현실은 그 반대지요. 저는 특히 글을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니 말과 글로 노상 업을 짓고 있습니다. 무심코 휘두른 혀로 영혼의 각을 뜬 적도 있었을 테고, 독을 묻힌 글 끝으로 누군가의 심장을 찌른 적도 있었을 겁니다. 존재의 참 모습과 실재는 언어적 표현 너머에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요. 쉴 새 없이 나불대며 다 아는 것처럼 굴수록 실상과 진상에서는 점점 멀어집니다. 오히려 입을 다무는 순간 바른 이해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Q. 아울러 독서를 통해 인생의 면역력을 올리고 계십니다. 헌데 독서 근육이 없어 책 읽기가 힘들다는 분도 계십니다. 이들에게 독서에 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독서 근육’이란 말이 재미있네요. ‘마음 근육’이란 말도 있더군요. 마음에 근육이 있으면 인생에 면역력이 생깁니다. 마음의 근육은 독서 근육에서 키워질 것 같고요. 지난 7년 간 무지막지하게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로 인해 마음의 공허함과 의존심이 시나브로 메워졌고 여간해선 상처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자긍심도 생겼고, 분별없이 남의 말에 휩쓸리지 않게 되었고, 비로소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독서는 한 마디로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줍니다.
진짜 나는 책이 안 읽힌다, 도저히 못 읽겠다면, 하루에 한두 쪽씩만 읽어보면 어떨까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천권 책도 한 쪽씩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그 첫 책으로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을 권합니다. 농담이지만 이유는 있어요. 이 책은 한 제목 당 두 쪽으로 구성돼 있거든요. 부담 없이 금방 한 권을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줄 겁니다.
Q. ‘백세시대 글쓰기 모임’을 하고 계십니다. 모임은 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글쓰기는 ‘마음 기경’과 같습니다. 오래 방치해서 딱딱하게 굳고 척박해진 땅이나, 거꾸로 무리한 경작으로 기운이 고갈된 땅에 파종해 봤자 될성부른 싹이 올라오기 어렵지요. 백세시대의 글쓰기는 전반 인생을 살면서 굳고 지치고 피폐해진 마음을 기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이끄는 글 모임은 정직한 내면 돌아보기, 담담히 인생 회고하기 등으로 마음을 닦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을 우선으로 합니다. 글을 도구로 마음을 기경하는 방식이지요.
지난 반평생은 외부의 것으로 살아왔지만, 남은 반평생은 자신의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롯이 자신의 덕과 정신력으로 인생 백세를 채워야 하는데, 제 생각엔 글쓰기가 가장 파워풀하다고 봅니다. 생애 대부분을 고난에 치여 왔고 앞으로도 빈곤과 고독 가운데 살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면 인생 후반전은 글쓰기를 권합니다.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노후가 펼쳐질 것입니다.
Q. 말씀처럼 글쓰기를 통해 삶을 성찰하려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들에겐 어떤 이야기를 권하고 싶나요?
요즘 사람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해요. 무슨 차이일까요. SNS에 쓰는 글과 내가 본래 쓰고 싶은 글이 다르다는 의미 아닐까요? 자랑, 맛집, 여행기, 남의 이야기 등이 넘치지만 이는 자기 성찰이나 삶의 정리와는 거리가 멀지요. 이런 글로는 자기를 만나지 못합니다. 보여주기 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니, 보여주되 벌거벗은 자신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빤스’ 정도는 걸쳐도 되지만 갑옷으로 무장해서는 안 됩니다. 글을 쓴다는 건 용기를 요하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용기가 나의 내면에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Q. 연기를 배운다고 하셨지요. 이렇듯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책은 거울이지요. 타인의 관점, 객관적 시각, 보편적 사유 등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지요. 나라는 개별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드러날 기회입니다. 반면 글쓰기는 내시경이랄까요?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내는 작업입니다. 글이 정직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나의 ‘마음의 내장’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치유하는 겁니다.
연기를 배운 후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를 감추고서는 연기가 되질 않아요. 흔히 연기란 다른 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다른 사람이 곧 자신이더란 말이죠. 결국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자아가 뒤섞이면서 ‘우리’로 태어나는 것이 연기의 세계라고 할 수 있지요. 앞으로 무엇을 새로 배우고 경험한다면 이렇듯 인간으로서 성숙할 계기가 되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Q. 앞으로 어떤 글로 독자와 만나고 싶으신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성과 감성이 주 역할을 하지요. 현대는 둘 중 정서지능, 감성지능을 우위에 두고 있고요. 글도 정보나 지식적인 것보다 마음에 울림이 있는 글을 더 좋아하지요. 이처럼 지성보다 감성이라면, 감성보다는 무엇일까요? 네, 영성이지요. 앞으로 제 글의 방향은 영성지능에 공명을 일으키는 쪽이 됐으면 합니다. 영성이 개발되면 ‘참 나’를 만날 수 있고, 자의식이 아닌, 참 나가 다른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라는 의식을 깨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 신아연 소설가·칼럼니스트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를 나왔다. 21년 동안 호주에서 살다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자생한방병원에 ‘에세이 동의보감’과 ‘천생글쟁이 신아연의 둘레길 노자’를 연재하며 생명과 마음치유에 관한 소설과 칼럼을 쓰고 있다. 노장인문단상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 치유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 인문 에세이 '내 안에 개있다'를 비롯,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등을 펴냈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책방도 사업입니다. 지속 가능성이 없다면 문 닫아야죠.”
어? 이 사람 ‘찐’이다. 소위 공트럴파크(공릉동+센트럴파크), 옛 경춘선 철길 따라 조성된 노원구 시민공원 한쪽 2층에 위치한 동네 책방 ‘책인감’. 이곳에 위치해 있던 책방 ‘51페이지’를 인수해 간판을 바꿔 단 지 2년 9개월 됐다.
이제 막 전업 3년 차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기업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동네 책방 운영자, 1인 출판사 사장 및 출판 기획자, 저자, 강연자, 콘텐츠 기획자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세포분열 중이다.
이철재 대표는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 18년 동안 안정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조금씩 직책이 높아지고 중간관리자가 되면서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단다. 합리적이지 않은 상사의 지시, 몇 차례 설득과 설명을 해도 돌아오는 건 “까라면 까”라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싫었다. 부하 직원에게 자신 역시 똑같이 불합리한 지시를 내리고 업무 성과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됐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무작정 그만둘 수는 없어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동네 책방 쪽을 알아보게 됐단다.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기존 사업체 인수가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51페이지’와 계약을 하면서 미련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딱히 책을 열렬하게 좋아했던 건 아니었단다. 자전거 타고 전국을 누비며 여행을 하다가 동네에 자그맣게 자리한 동네 책방들을 만나게 됐고 콘텐츠로서 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나와 새로운 인생의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지만 ‘바깥은 전쟁터’라는, 드라마 ‘미생’의 대사를 실감하고 있다. 그래도 대기업 출신이 운영하는 동네 책방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주인장 ‘이철재’를 궁굼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답은 없지만 계속 도전하는 이유
현재 이철재 대표는 꾸준히 책 관련 콘텐츠 기획을 하며 외연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동네 책방 운영만이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인 출판사 ‘책인감’을 통해 ‘이철재’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고 책을 출간하고 싶은 이들과 협업으로 세 권의 책을 더 세상에 선보였다.
이 대표의 저서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은 서점 주인만을 대상으로 펴낸 책이 아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1인 가게 운영자들이 꼭 알아야 할 A부터 Z까지의 노하우를 담았다. 경영학도답게 1년간 동네 책방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시장분석을 통해 스스로를 컨설팅하고 전국의 동네 책방까지 컨설팅해준다.
이 책이 동네 책방에서 판매되고 지역 서점조합의 주문도 받게 되면서 종종 서점조합이나 도서관에서 열리는 행사 강연자로 초대되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동네 책방 업계에 ‘이철재’라는 세 글자를 알리게 된 셈이다.
그런데 책 출간 방식이 기존 출판사 문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책을 먼저 판매한 뒤 출간을 진행한다. 지난해 3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통해 펀딩에 나섰고 220명으로부터 531만3800원의 후원을 받았다. 그 뒤 ‘1인 가게 운영의 모든 것’이 출간됐다.
이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펴낸 두 번째 책은 ‘제주 힐링 여행 가이드’. 대한민국 자전거길 국토 완주 그랜드 슬럼을 달성할 만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볐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은 제주 토박이와 관광객으로 이분화돼 있는 제주의 숨은 여행지와 맛집 등을 중간자적 입장에서 소개한 안내서다. 역시 텀블벅 펀딩으로 79명으로부터 164만 원의 후원을 받아 출간됐다.
‘책인감’ 이름으로 펴낸 세 권의 책은 모두 책방 고객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 출간됐다. 서울시민정원사회가 펴낸 ‘서울시민정원사가 들려주는 가드닝 이야기’, 시와 꽃 동인들이 펴낸 시집 ‘꽃씨한톨’, 간호사 김미정 씨가 펴낸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다’ 등이다. 책방에서 독서모임을 갖거나 자주 방문하는 고객들이 토로한 출판의 어려움을 듣고 시작된 프로젝트들이다.
“동네 책방은 왜 대박을 기대하면 안 되죠?”
이렇듯 이철재 대표는 동네 책방을 기반으로 문화 콘텐츠 기획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두번째 외연 확장은 마을공동체 및 서울시, 공공기관의 다양한 지원사업 도전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는 뚝딱 만들어내던 기획서 작성 능력을 바탕으로 공공기관의 다양한 수행 사업을 실행 중이다. 특히 마을공동체 사업 등은 책방 공간을 활용한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그림을 배우거나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장소이자 ‘책인감’을 널리 알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동네 책방의 단골 이벤트라 할 독서모임도 눈길을 끈다. 과학책 읽는 모임인 ‘과학강좌’와 ‘여행강좌’, 그리고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이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금요와인’ 등이 있다. 과학에 관심이 많고 여행과 와인을 좋아하는 주인장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Mini interview '책인감' 이철재 대표
현재 텀블벅 프로젝트 3탄을 준비중이다. 책방 운영하랴… 공공 지원사업 신청하랴… 부족한 시간 가운데에서도 세번째 책 집필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철재 대표가 회사 생활할 때 ‘엑셀의 신’으로 불렸던 본인의 꼼꼼한 엑셀 활용법을 복기하면서 직장 생활의 애환을 담을 예정이다. 엑셀의 무한한 활용을 꼼꼼하게 전수할 실용서에 회사 생활의 애환을 함께 담는 실용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집필 시간이 너무 부족해 월요일 하루였던 책방 휴무를 화요일까지 이틀로 늘렸을 정도다. 이전 텀블벅 프로젝트보다 훨씬 대중적인 분야라 모금액이 더 많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다. 올해 안에 출간하는 것이 목표란다.
남들이 안 하는 것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철재 대표는 아래와 같이 답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정답은 없지만 이런 시도를 계속하는 건, 그래야 발전하니까요.”
‘책인감’ 서울 노원구 동일로 182길 63-1, 2층
나라말이 사라진 날 (정재환 저·생각정원)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정재환이 조선어학회의 투쟁사를 살펴본다. 일제 치하 말과 글을 빼앗긴 민족의 상황과 이에 맞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조명한다.
내 손 안의 작은 미술관 (김인철 저·양문)
19세기 인상주의를 연 화가 25인의 명화를 한 권으로 감상한다. 도슨트의 해설을 듣는 것처럼 그림 소개뿐 아니라 화가의 삶과 교우 관계 등 생생한 일화까지 함께 제공한다.
건강수명 100세 (김혜성 저·파라사이언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된 '내 안의 우주' 시리즈의 저자 김혜성 박사의 신간. 건강수명이 줄어드는 원인을 파헤치고, 그에 대한 대처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노르망디의 연 (로맹 가리 저·마음산책)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로맹 가리의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연'이라는 상징물로 표현한 작품이다.
딱 일 년만 청소하겠습니다 (최성연 저·위즈덤하우스)
50대 고학력자 여성이 ‘고졸’로 이력서를 고쳐 쓰고 1년간 미화원으로 일한 이야기를 담는다. 미화 일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 비합리적인 청소 노동자의 현실 등을 진솔하게 전한다.
오늘부터 차박캠핑 (홍유진 저·시공사)
차박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북. 차박 관련 용어부터 차종, 예산, 장비 등 기초적인 정보와 차박 성지 및 주변 여행지까지 안내한다. 부록으로 ‘차박캠핑족’의 생생한 인터뷰도 실려 있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떠도는 여행만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생활의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로움. 모처럼 내숭이 없는 마음으로 풍경과 풍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의 관대함. 도취할 수밖에 없는 우연한 이벤트들과의 만남. 다채로운 비일상적 낭만의 향유와 감성 충전이 가능한 게 여행이다. 그러기에 흔히들 지친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여행을 즐긴다. ‘스리랑카주의자’ 고선정(48)은 좀 다르다. 그는 여행으로 삶을 통째 뒤집었다. 종전의 관습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으니 반전이자 반역(?)이다.
신간들을 살펴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 특이한 제목을 단 여행서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라는 책.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좋아하기를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임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스리랑카에 관한 한 고수임을 알리고, 풀만 먹기로 작정한 채식주의자처럼 스리랑카를 메뉴로 섭취해 삶과 정신을 살찌우겠다는 의도를 덩달아 밝힌 셈이다. 평소 제목에서 갖는 호감만으로 책을 충동 구매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이 점에서도 이 책의 네이밍은 꽤 근사하다. 부실한 내용을 담은 채 오직 호객을 위한 기술적 작명에 그쳤을 경우엔 노련한 독자들의 한숨을 자아내겠지만 ‘조금 특별한 여행기’임을 자처하는 이 책의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다.
저자 고선정은 3년여 간 스리랑카를 집중적으로 드나들며 체험한 명소와 유적, 그리고 사람들에 관한 추억을 기반으로 책을 써나갔다. 자료와 정보의 수집에도 공을 들인 기색이 완연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엔 스리랑카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환경 등등에 관한 인문적 정보들이 빼곡하다. 재미있는 건 여행 중에 만난 스리랑카 사람들이 보여준 정겹고 미더운 모습을 담은 에피소드들. 이는 건조한 문체와 평면적 묘사로 일관해 다소 밋밋한 맛을 풍기는 이 책에 고소하게 뿌려진 양념에 속한다. 스리랑카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겐 요긴한 가이드북이 될 테다. 매체의 서평 담당자들이 딱히 이 책을 지목했다는 흔적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저자의 인생이 확 변했기 때문이다.
“책을 내고서 드디어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뒤 나는 25년간 수능학원 강사로 살아왔다.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휴일이나 명절에도 쉬지 못한 채 정말 바쁘게 살았다. 벗어나야지, 달아나야지 하면서도 얽매인 세월이었다. 항상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며 기관차처럼 달려온 날들이었거든. 책 출간을 계기로 이 지루한 단순반복에서 탈출, 인생 2막을 새로 시작하게 됐다.”
학원 강사에서 여행 작가로 변신한 셈이구나.
“요즘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글쓰기는 오랜 꿈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꾸깃꾸깃해진 꿈이었다. 그 낡아가는 꿈을 스리랑카 여행을 계기로 복원할 수 있었지. 이제부터라도 좋은 글,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고 있다. 돈이 안 되는 일일지라도 열정을 불태워보겠다는 생각이다.”
심각한 글쓰기는 방울방울 피를 뿜는 고행에 가깝다. 학원 강사보다 지겨울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실로 힘든 일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스리랑카 이야기를 쓰며 많이 울었다. 어떻게 글을 끌어내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그지없이 막막하더군. 그러나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원래 좀 강한 캐릭터다. 몹시 힘든 상황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근성은 좀 있거든. ‘뭐 해보는 거지, 뭐든 하다하다 안 되더라도 죽기보다 더 하겠어?’ 이게 나의 방식이다. 어려운 일에 질겁하기보다 일단 세차게 부닥치고 보는 성향이라는 거.(웃음)”
시련을 기어이 이겨내는 타입?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기에? 당신은 25년간 강사 생활을 계속했다. 안심으로 안주한 날들이지 않았을까?
“사실 유난히 힘든 일을 겪지는 않았다. 게다가 완벽주의자라서 매사 엄청 노력했으며 덕분에 잘나가는 강사로 살았다. 경제적 기반도 다졌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들며 나를 돌아보자 허탈하더군. 긴긴 세월, 집과 학원만을 오가며 나를 너무도 조이고 누르며 살았다는 걸 깨닫고서였다.”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이 있겠나? 애환이 없는 인생이 가능하겠느냐는 얘기다.
“나는 일종의 패배감마저 느껴야 했다.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한 결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인간, 미성숙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심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경직된 삶이었지. 인간관계도 좁았고, 친구를 만나더라도 대화조차 풀려나가질 않더라고. 유치한 인생이었다.”
결국 빡빡하게 조여둔 나사를 여행으로 풀었나?
“마흔이 다 돼 처음 나선 해외여행으로 해방감이라는 걸 맛봤다. 여행이 나를 풀어놓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이후 남미나 유럽 등 2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이 와중에서 강사 생활을 청산했다.”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해준 나라
첫 번째 해외 여행길에서 고선정은 ‘눈물을 콸콸 흘렸다’고 한다. 낯선 거리를 아무런 목적 없이 쏘다니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북받쳐서. 그가 감옥과도 같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얼토당토 없는 쇼를 하며 살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지나온 날들이 족쇄에 갇힌 허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에 당황하고, 아울러 여행의 기쁨에 전율했던 모양이다.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자문하며 여행이라는 신세계에다 자신을 방목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화와도 같은 삶과 시간에 마침내 구체적 맥락이 잡혀나가는 계기였을지도. 이후 그는 자유로운 인간 유형의 한 가지 존재 방식인 여행자의 자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세상의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게 스리랑카였다.
“여행길의 비행기에서 우연히 본 잡지 속 스리랑카 풍경 사진 한 장. 그게 나를 스리랑카로 달려가게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끌림이었지만 치명적인 매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리랑카의 그 어떤 매력에?
“첫 여행에서 여덟 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묘하게도 도시마다 색깔이 다르더라. 바다 경관도 실로 절경이었다. 10회 이상의 여행으로 아예 살다시피 하며 체험한 스리랑카는 ‘아름다운 물의 나라’였다. 이마저 불충분한 설명에 불과하다. 뭐라 딱 집어 예찬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모든 게 좋았다.”
풍경은 물론 분위기까지 당신의 성향과 잘 맞았다?
“그렇다. 내면으로 스리랑카가 흘러들어 나의 모든 것을 흔들어놓았다. 여행을 통해 물처럼 흐르고 싶다는 것, 공기처럼 가볍게 떠돌고 싶다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목적이었는데 스리랑카는 적격이었다. 나의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하는 여행지였으니까.”
스리랑카는 인도 남동부에 있는 작은 섬나라. 개발도상국이지만 사망률과 문맹률은 낮으며 명차 실론티의 산지이기도. 자연 풍광이 빼어나 ‘인도양의 진주’라 부른다. 세계적인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2019년 세계 최고의 여행지’로 스리랑카를 선정, 논란을 야기했다. ‘론리 플래닉’은 고대로부터 상속된 불교와 힌두교 유적들,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 등을 근거로 스리랑카 여행을 권장했지만 종교분쟁이 지속되고 있어서였다. 2019년 4월엔 수도 콜롬보에서 테러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위험 상황에 아랑곳없이 고선정은 스리랑카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막상 가보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위험지구는 영리하게 미리 피해야 하고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중한 인간이다. 어릴 적 별명이 ‘애늙은이’였다.(웃음)”
‘론리 플래닛’의 스리랑카 예찬에 영국 외무부는 우려를 표했더군. 관광지에서 성희롱이 난무하는 나라라며.
“나도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스리랑카식 택시) 기사에게 불편한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달리는 툭툭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그러나 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불편한 상황을 용납하거나 당할 나도 아니다.”
인간의 바람기와 장난기는 모든 곳에 공기처럼 감돌지도. 이게 여행자의 피로감을 가중하기도 한다.
“여행이 오직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단독 여행자에게 외롭고 두려운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불시에 찾아들지 않던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현명하게 움직여야 하겠지. ‘여행하다 비명횡사는 하지 말자!’ 이건 나의 수칙이다. 항상 서툰 방심이나 일탈을 극구 삼가며 여정을 추진했다.”
약간의 일탈과 모험은 여행의 풍미를 돋우지 않나? 서머싯 몸은 ‘경찰이 보지 않을 때 슬쩍 딴짓을 하는 데에 인생의 재미가 있다’고 했다. 규율에 속박돼 살지 말자는 얘기였다.
“성격상 일탈은 나와 멀다. 나를 속박한 건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기가 너무도 힘들었거든.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달라졌다. 비로소 꽤나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했던 거다. 그러니 스리랑카를 좋아할 수밖에.”
어떤 에너지를 받았기에?
“선량한 사람들, 가난하지만 밝고 따뜻한 사람들! 내가 만난 스리랑카인들이 그렇게 대부분 순박하고 친절했다. 그런 그들의 선의가 나를 풀어놓게 한 에너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지?
“돈을 중심에 두고 아웅다웅하는 자본주의에 덜 물든 덕분인 것 같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 상대적 불행감이나 박탈감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들은 여행자를 가족처럼 진심으로 대했다. 가령, 하루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귀환하는 저녁이면 미리 집 앞까지 나와 기다려주는 주인집 식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그런 식이었다. 내가 스리랑카에 심취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했다
스리랑카 여행 중에 사람들은 고선정에게 곧잘 묻곤 했단다. “아니, 당신은 왜 항상 웃는가?”라고. 고선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늘 웃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심하고 차가운 세상의 이면을 스리랑카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학원 강사로 열심히 뛰었던 한국에선 맛보지 못한 깊은 만족감을 이국에서 비로소 만끽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쪼그라들었던 자아가 돌연한 탄력을 받아 확장되었나? 그는 자신과의 불화 구조를 깨고 정체성을 찾았고 열린 감관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여행 서사에 불과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고선정의 행보는 한층 역동적이다. 한 권의 여행기로 스리랑카에 꽃을 바친 그는 자신을 위해서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예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게 아닌가. 이미 스리랑카에 터를 사들여 살아갈 집을 짓기 시작했다.
“눈뜬 아침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스리랑카다. 나를 꿈꾸게 하고, 열정을 심어준 나라. 거기에서 군더더기는 다 내려놓고 즐겁게 살고 싶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건축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올 연말엔 스리랑카로 날아가 공사를 진척시킬 참이다.”
지구 저편으로 이주. 이는 그가 요번 생에 행한 가장 참신한 결단에 속하려나.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나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겠다는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산다 한들 삶의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행복으로 도배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할까. 어디서건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 하지 않던가. 여기에 대한 고선정의 생각은 이렇다.
“밝고 투명하게!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그렇다. 물론 스리랑카에 산다고 1급수처럼 해맑게 살 순 없겠지. 그저 2급수 정도만 돼도 좋겠다. 이마저 열정이 아니고선 얻기 어려운 차원일 거 같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에 고선정이 자주 동원한 단어가 ‘꿈’, ‘열정’, 그리고 ‘도전’이었다. 실천을 결여하면 허영에 불과할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에겐 필생의 지표일지도.
하늘길이 닫혔다. 매년 당연하게 떠났던 해외여행은 잠정 중단되어 여행 일상에 제동이 걸렸다. 방구석 세계 탐방을 몸풀기로 시작했다. ‘부루마블’ 보드게임에서 아무리 많은 도시에 호텔을 사도 없어지지 않는 현장감을 채우고 싶었다. 안전상 멀리 떠날 수 없어 선택한 여행지는 ‘서울’. 이 도시에 뿌리내린 다른 나라를 찾아 나섰다. 거미줄 망처럼 펼쳐진 지하철을 이용해, 술 빚는 여행작가가 추천하는 서울 속 세계 음식점을 탐방해보자.
사직동 그 가게
아는 작가 동생이 이곳에서 일한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원활동가이며 ‘지기’라 불린다. 사직동 그 가게는 록빠(티베트 난민구호 단체, 티베트어로 ‘돕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출발했다. 이 공간은 지기들의 재능기부와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사직동 그 가게. 구어체 느낌의 상호다. 사직공원을 돌아 들어오면 약간 외따로 떨어진 가게가 보인다. 오른편은 티베트 관련 물품을 판매하는 소품 가게이며, 왼쪽 붉은 벽돌 문으로 들어오면 카페와 식당이 보인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그 흔적들을 찾는 재미도 있다. 이 가게는 인도 짜이, 라씨 그리고 커리를 판매한다. 커리를 주문하는 손님들은 주로 새우커리와 치킨커리를 선호한다. 두부커리, 시금치커리 같은 비건 메뉴도 있다. 인도 전통의 맛을 최대한 재현할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아늑해 아지트에 머문 기분이 든다.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9길 18
지하철역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454m
영업시간 매일 12:00~20:00 (Last order 19:30)
이스탄불그릴
공덕역 인근 노후한 건물들이 헐리고 새로운 마천루가 세워졌다. 자영 업장들이 서서히 건물 1층을 채웠다. 이스탄불그릴(Istanbul grilll)은 터줏대감 가게 중 하나다. 터키 사장님이 직접 구워주는 터키식 양갈비 그릴이 주요 메뉴다. 이스탄불그릴 사장님은 한국어에 능통하다. 벽면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사장님의 캡처 사진이 붙어 있다. 보통 두 명이 오면, 가장 무난한 메뉴가 이스탄불그릴(2인분)이다. 터키 빵+오늘의 수프+메인메뉴(그릴)로 취향에 맞게 6가지 종류로 세팅돼 있다. 식후에는 터키식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백범로 152
지하철역 5·6호선, 공항철도, 경의중앙선 공덕역 1번 출구에서 312m
영업시간 매일 11:00~15:00, 17:00~22:00, 주말 11:00~22:00 (명절 휴무)
레스쁘아 뒤 이부
지갑을 잃어버렸다. 함께 있던 친구는 내 행적을 물으며 역학조사에 들어갔다. 도로 옆 우거진 쥐똥나무 속을 뒤지더니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다. 그 답례는 레스쁘아 뒤 이부(L'Espoir du Hibou)에서 이뤄졌다. 레스쁘아 뒤 이부는 청담동 속 작은 프랑스를 연상케 한다. 임기학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12년 차 프랑스 정통 레스토랑이다. 그는 뉴욕 미슐랭 레스토랑인 다니엘(Daniel)에서 근무한 이후 이곳에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미슐랭 2020 가이드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높은 인지도만큼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면 볕 좋은 오후, 테라스에 앉아 유유자적 프렌치 요리와 와인을 즐기기에 탁월한 공간이 나타난다. 5만 원에 제공되는 런치 메뉴는 애피타이저부터 본 요리까지 순서대로 맛볼 수 있다. 하우스 스페셜 메뉴인 ‘오리 다리 콩피’는 이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다. 콩피는 염장한 오리를 기름에 넣어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삶은 뒤 굽는 프랑스 정통 조리 방식이다. 그밖에 킹크랩과 엔다이브샐러드, 양파수프, 광어파스타, 에스카르고(달팽이요리)를 추천한다.
주소 서울시 강남구 선릉로152길 33
지하철역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4번 출구에서 456m
영업시간 매일 12:00~15:00, 18:00~22:00 (명절 휴무)
파르투내
색이 바랜 만국기가 펄럭인다. 여기는 동대문과 맞닿은 광희동. 만국기 아래 터를 잡은 몽골인들. 몽골타운 옆에는 중앙아시아 거리가 있다. 러시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기점으로 접경 지역에 있는 나라의 동포들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상점을 형성했다. 여기는 ‘서울의 실크로드’다. 그 중심에는 파르투내(Restaurant Fortune)가 있다. ‘Fortune’는 러시아어로 ‘파르투내’이고, 영어로는 ‘포춘’이라 명명한다. 우즈베키스탄 남편과 러시아 아내가 9년째 운영 중이며, 건물 1층은 케이크 등을 판매하는 카페, 2층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본격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이다. 얼마 전, 맞은편에 식품 마트를 새로 오픈해 총 3개의 업장을 보유하고 있다. 현지인과 우리나라 손님 모두에게 인지도가 높다. 메뉴 책은 두껍고 무거워서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수프, 샤슬릭, 차가 기본 조합이다. 샤슬릭은 양, 닭, 소고기를 구운 러시아식 꼬치 요리인데, 평소 우리가 흔히 아는 꼬치보다 3배 정도 크다. 우즈베키스탄식 누들수프인 라그만은 기름진 우육면과 비슷한 식감이다. 감자샐러드 속에 당근과 비트 그리고 청어가 들어 있는 독특한 청어샐러드도 있다. 러시아 맥주 발티카와의 페어링이 무난하나, 러시아산 보드카에 도전해보자. 후식으로는 꿀 케이크인 메도빅과 러시아 차를 권해본다.
주소 서울 중구 마른내로 154
지하철역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6번 출구에서 121m
영업시간 매일 10:00~23:00, 일요일 09:00~22:00 (첫째, 셋째 주 월요일 휴무)
페트라
페트라(PETRA)는 서울 지부 중동 음식 순례지 중 0순위로 꼽힌다. 한국에서 중동 요리를 처음으로 선보인 음식점이기 때문이다. 레스토랑 대표 야서 가나옘은 순수 요르단 출신이다. 폭넓은 중동 음식 중 동지중해 부근의 레반트(Levant) 지역 음식을 선보인다. 특히 대부분의 재료를 요르단에서 공수해온다. 음식점 내부 문양만 봐도 이슬람 사원 속 어딘가에 온 듯하다. 페트라는 할랄 의식을 치른 고기로만 요리하는 할랄 레스토랑이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별도의 메뉴도 있다. 병아리콩을 삶아 각종 채소와 섞어 동그랗게 튀긴 팔라펠이 대표 메뉴이며 홈머스, 타볼리샐러드, 캅사, 쿠스쿠스 등 요르단 가정식을 맛볼 수 있다.
주소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40길 33
지하철역 6호선 녹사평역 1번 출구에서 181m
영업시간 매일 11:00~22:00
울프하운드
펍(Pub)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준말로 ‘공공장소’란 뜻이며, 맥주의 동력으로 이야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펍이 유래한 영국뿐만 아니라 그 옆 나라 아일랜드에도 아이리시 펍이 성행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만 해도 1000개에 가까운 펍이 존재한다. 아일랜드 문호인 제임스 조이스가 “펍을 피해 더블린을 걷는다는 건 마치 퍼즐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다. 서울에 현지 아이리시 펍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 있다. 바로 울프하운드(The Wolfhound) 펍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외국인(특히 영어권 국가) 손님 비율이 높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중요한 아일랜드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이면 대형 모니터 앞에 모여 맥주를 들고 응원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아일랜드 대표 맥주인 기네스와 크림 에일 맥주 킬케니를 생맥주로 주문할 수 있다. 시그니처 메뉴는 달콤하면서 매콤한 치킨윙과 피시앤칩스다.
주소 서울 용산구 보광로59길 10
지하철역 6호선 이태원역 4번 출구에서 95m
영업시간 매일 16:00~02:00
하노이102
성수동 주택가에 붉은 벽돌로 된 2층 주택 앞에서 머뭇거렸다.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흰색 바탕 족자에 세피아 톤으로 그려진, 베트남 여성으로 추정되는 그림만이 이 건물의 힌트였다(현재는 이 그림 아래 한글로 상호가 새겨짐).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특유의 베트남 쌀국수 향이 코끝을 자극하면서 의문이 해소됐다. 하노이102(Hanoi102)는 근처에 위치한 ‘할머니의 레시피’를 운영하는 대표가 베트남을 콘셉트로 오픈한 레스토랑이다. 대표는 약 7년 동안 하노이에서 생활하면서 하노이 가정식을 섭렵했다. 가구, 테이블 등 작은 소품까지 베트남에서 공수해와 레스토랑을 꾸몄다고 한다.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나라다. 그래서일까. 레스토랑 내부는 프랑스 느낌이 물씬 난다. 같이 온 친구들과 소품의 디테일을 감상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 레스토랑의 대표 메뉴는 쌀국수, 철판 분짜, 쌈에 싸 먹을 수 있는 튀긴 만두 넴 등이 있다. 느끼함 없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맛이 떨어졌다. 식후에도 인증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을 정도로 내부 디자인에 감탄했다.
주소 서울 성동구 서울숲6길 18
지하철역 2호선 뚝섬역 8번 출구에서 356m
영업시간 매일 11:30~22:00, 18:00~22:00 (Last order 15:00, 21:00, 화요일 휴무)
대한민국을 재발견하는 재미와 별개로 간절한 것이 바로 ‘먼 이국’으로의 여행이지만 지금은 해외로 나가는 발길이 묶여버린 상황. 언제까지 코로나19가 잦아들기만을 넋 놓고 기다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홀로,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저비용 고효율로 즐길 수 있는, 이름하여 ‘한국에서 즐기는 외국 여행’ 가이드. 인생은 짧고 갈 곳은 많다. 한국에서 만나는 독일, 스위스, 사막, 지중해, 중국, 스페인 산티아고, 아프리카 등 지금 당장 가슴이 끌리는 그곳으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해외여행)을 떠나보자!
한국에도 사막이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 사구 지대로서 해안 사구가 지닌 환경적, 생태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해양수산부에 의해 생태계 보존 지역으로 지정됐다. 오랜 세월 바람에 의해 날려온 해안의 모래가 쌓여 만들어졌으며 길이 약 3.4㎞, 폭 약 200m에서 최대 1.3㎞ 규모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사구 표면은 대부분 사초로 덮여 있으나 육지 쪽에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해안 가까이 해당화도 자라 사구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두리 해안 사구는 현재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생태계 보존 지역이니 자연을 아끼는 각별한 마음도 가져가야 한다.
위치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유럽풍 숲속 정원을 거닐다
제이드 가든
숲속 정원 ‘제이드 가든’(Jade Garden).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의 공간 만병초원을 비롯해 어릴 적 즐겨 읽고 보던 동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지은 유럽풍 마을, 젊은이들의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가 좋은 이탈리아 웨딩가든, 그리고 수생식물원, 고산식물원, 꽃물결원, 피크닉가든, 은행나무미로원, 키친가든, 재배온실 등을 천천히 거닐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자.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등의 휴게 공간도 마련돼 있고 가든 가꾸기 프로그램도 상시 진행한다. 하절기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500원, 경로우대 7000원. 굴봉산역-제이드 가든 왕복 셔틀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위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 햇골길 80
독일 교포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독일마을
1960년대 독일의 광산과 병원에서 일해온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한국에 돌아와 살 수 있도록 마련한 생활 터전이다. 독일에서 반백 년 가까이 살았던 교포들이 실제로 살고 있어 독일 정취와 문화를 느끼고 경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2001년, 남해군이 사업비 30여 억 원을 들여 40여 동의 건축물 택지를 교포들에게 분양했다. 그 후 이 주택들은 교포들의 주거지 또는 휴양지로 쓰이는 동시에 일반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운영되고 있다. 독일 전통 소시지와 맥주 맛보기, 독일마을 추억 만들기, 전통의상 입어보기, 파독 전시관 관람하기 등이 대표 체험 프로그램이다. 상주하는 독일 교포들이 해설사 역할도 한다.
위치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1074-2
오감 만족 스위스
에델바이스 스위스 테마파크
아름다운 숲과 마을, 스위스풍 건축물과 공원을 통해 스위스의 자연과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커피, 치즈, 초콜릿, 와인 등 스위스를 대표하는 다양한 주제별 박물관을 포함해 스위스 테마관, 동물농장, 양떼목장, 사랑의 연못, 에델바이스 광장, 갤러리, 포토존 등 전시 시설과 전원 시설을 다채롭게 누릴 수 있다. 어둑해지면 인터라켄 마을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날 수 있다. 주말 기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료는 성인 9000원, 경로우대 7000원.
위치 경기 가평군 설악면 다락재로 226-57
포천 숲속에서 느끼는 아프리카의 숨결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카라반펜션캠핑장
태천만 관장이 수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 30여 개국을 다니며 150여 부족에게 수집한 유물과 민예품 560여 점, 석목 조각 330점, 미술품 30점 등을 통해 아프리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인식, 토속 춤, 혼례 및 장례 등 제례의식과 왕족, 족장, 전쟁과 사냥 등과 관련한 유물 및 악기, 각종 생활용품도 감상할 수 있다. 최근에는 카라반펜션캠핑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도심을 벗어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까지 즐길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에서 저녁 6시까지 운영하며 요금은 성인 1만2000원, 경로우대 1만 원.
위치 경기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967
산토리니의 호젓한 골목을 걷고 싶다면
지중해마을
푸른 지붕에 파스텔 톤 골목들이 알록달록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지중해에 접한 그리스의 섬과 프랑스 남부의 건축 양식을 빌렸다. 지중해마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원래는 너른 포도밭이었는데 주변 땅이 개발하면서 탈바꿈의 시기를 거쳤다. 3층짜리 60여 동 건물에는 레스토랑, 와인바, 베이커리, 카페, 기념품 숍, 식당,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주민들의 거주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야간에는 골목 위로 은하수 조명이 매달려 마을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또 마을 공원 곳곳에는 벤치가 있어 이국적인 건물을 바라보며 호젓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
위치 충남 아산시 탕정면 탕정면로8번길 55-7
사진 출처 충남 홈페이지
한국적 정취와 어우러진 작은 산티아고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
신안군 다도해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목포나 무안에서 배를 타고 30분에서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노둣길이 대기점도, 기점도, 소악도, 진섬을 마치 하나의 섬처럼 이어준다. ‘기점·소악도 순례자의 길’은 하나로 이어진 이 섬들을 걷는 12㎞ 트레일이다. 길을 이어 걷는 중간에 예수의 제자 12사도의 이름을 딴 열두 개의 예배당을 쉼터처럼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섬에는 마을 사무국에서 운영하는 식당과 게스트하우스가 한 곳 있으며 섬 누리집에는 교통편과 노둣길 물때 등 여행에 필요한 정보가 잘 정리되어 있어 처음 가는 사람도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
위치 전남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 안전 여행을 위한 기본 준비물
-마스크(여분 포함)
-손 소독제
-개인 물통 및 위생용품 등
# 대중교통 이동 시
-매표 시 온라인 예매 또는 현장 자동 발매기 이용
-가급적 타인과 떨어진 좌석 예약
-손소독제 사용 후 탑승하고 반드시 마스크 착용
# 실내 관광지 방문 시
-다른 관광객과 두 팔 간격 건강거리 유지
-저층 이동 시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으로
-에스컬레이터 이용 전후 손 소독제 사용
# 실외 관광지 방문 시
-액티비티 시설 이용 전후 손 소독제 사용
-헬멧 등 안전장비 착용 시에도 마스크 착용
-공용 물품 및 대여 물품 사용 자제
# 음식점 및 카페 이용 시(1)
-점심, 저녁 등 혼잡 시간대 피하기
-야외 테이블이 있을 경우 야외 이용
-집게, 가위, 수저통 사용 후 손 소독
# 음식점 및 카페 이용 시(2)
-실내 손님이 많으면 테이크아웃 이용
-다른 이용객과 인접한 테이블 이용 자제
-계산 시 영수증은 가급적 폐기 요청
# 쇼핑몰 및 전통시장 이용 시
-되도록 상품 만지지 말고 눈으로 확인
-혼잡하고 사람이 몰리는 공간 이용 자제
-계산 시 가급적 전자 결제방식 선택
# 호텔 등 숙박시설 이용 시
-객실 내부 수시로 환기하기
-시설 내 식당보다 룸서비스 이용
-수건, 가운 등 다회용품 사용 자제
예년과 다르게 코로나19로 움츠러든 여름 분위기. 그렇다고 멍하니 집에만 있을 순 없다. 답답하고 북적이는 도심을 벗어나 탁 트인 자연으로 트레킹을 떠나보자. 때가 때인 만큼 몇 가지 주의 사항만 지킨다면 더욱 즐겁고 건강한 여행이 될 것이다.
도움말 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임재영 교수 참고 한국관광공사 여행 경로별 안전 여행 가이드
[STEP1] 트레킹 여행 前
산책이나 등산하는 이들을 보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밀폐된 공간이 아니기에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레킹을 할 때도 마스크를 안 써도 될까? 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임재영 교수는 “충분한 거리 두기가 가능한 곳이라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괜찮다”며 “그러나 탐방객이 많거나 교행하는 등 밀접 접촉의 위험이 있을 때는 비말 전파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가급적 마스크를 착용하시길 권한다”고 말했다.
ㆍ개인 준비물 일정에 맞춰 트레킹 장비나 개인 물품을 챙기되 ‘마스크’(여분 포함), ‘손 소독제’, ‘개인 물통 및 식기’(숙박 시 수건)도 꼭 포함한다. 가족끼리 트레킹을 가도 물통이나 식기는 따로 준비하는 게 좋다.
ㆍ교통수단 이용 개인 차량 이용을 권한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경우, 당일 대면으로 매표를 하는 것보다는 온라인 예매 또는 현장 자동발매기를 이용한다. 좌석 여유가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둔 자리를 예약한다.
ㆍ여행 동선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 등에서 여행지의 폐쇄 여부를 확인해 동선을 짠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확진 환자 이동 경로도 참고한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 → [오늘의 여행 Issue]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행정보 변동사항]에 관광지 및 축제, 행사 등의 정보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됨
[STEP2] 트레킹 여행 中
트레킹 중에도 마스크를 상시 착용하고, 타인과 마주칠 때는 두 팔 간격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에티켓을 잘 지켜도 트레킹을 할 때는 통증이나 부상 등의 다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임 교수는 “관절염 등 무릎 통증이 있는 시니어는 경사가 높은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 트레킹은 삼가야 한다”며 “걷기 전 스트레칭과 워밍업 등 준비운동을 충분히 해야 골절 방지, 쥐가 나는 등의 증상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ㆍ음식점 점심, 저녁 혼잡 시간대는 피하고 소독, 환기 등 위생 수칙을 잘 지키는 식당을 찾는다. 가능하다면 야외테이블을 이용하고 다른 테이블과 인접한 자리는 피한다. 집게, 가위, 수저통을 만진 뒤에는 손 소독을 하고, 가급적 준비해간 개인 식기를 쓴다. 모바일 페이 등 비대면 전자결제 방식을 택하고, 계산 시 영수증은 폐기 요청한다.
ㆍ숙박시설 위생 상태와 안전 상황 등을 점검하고 온라인 등 비대면 방식으로 예약한다. 엘리베이터, 손잡이, 리모컨 등을 만진 후에는 손 소독을 하고 객실 내 수건, 가운 등 여러 사람이 썼던 용품은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다. 음식은 호텔, 리조트 등 시설 내 식당보다는 룸서비스를 이용한다. 객실은 수시로 환기하고 사우나, 수영장 등 공용시설 출입을 삼간다.
ㆍ공용시설 공용화장실 등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간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사용 전후에는 반드시 손 소독을 하고, 사용하는 시설의 층이 높지 않다면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하는 게 좋다. 전통시장이나 상점을 방문할 경우 물건을 만지는 행위는 자제하고 눈으로만 살펴본 뒤 구입한다. 액티비티 체험 시 헬멧 등 안전 장비를 착용해도 마스크는 필수다.
[STEP3] 트레킹 여행 後
발열 및 호흡기 증상 등이 나타나면 트레킹을 중단하고 즉시 귀가한다. 여행 후 코로나19 확진자 동선을 살펴보고 혹여 우려스럽다면 자가격리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여행 중 입었던 옷과 물품 등도 곧바로 세척, 소독한다. 당분간 약속을 자제하고, 집 안에서 가족과의 접촉도 최소화한다. 3~4일 정도 지나 별다른 증상이 없다면 일상으로 복귀하고, 의심 증상이 심해지면 관할 보건소를 찾는다.
노년 건강을 위해 읽어볼 만한 도서 by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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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장수과학자 박상철 서울대학교 교수가 2001년부터 전국을 돌며 만난 우리나라 백세인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장수의 비결은 특별한 것이 아닌, 가족 간의 사랑과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100세 건강 영양 가이드 (분당서울대학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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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내몸 사용설명서 (마이클 로이젠 외 공저)
9년 연속 미국 최고 명의로 선정된 의사들의 안내로 몸속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노화하는지 알 수 있다. 의학계가 주목하는 간과 췌장 분야는 물론, 젊음과 건강을 위한 운동 챕터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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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고령화가 비슷하게 진행되는 점에 착안해 6년간 취재해온 일본 고령화 트렌드와 정부, 기업의 대응을 정리했다. 노화를 혐오하고 부정하기보다는 늙음과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시기로서의 노년을 이야기한다.
땅끝마을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득하게 먼 느낌이다. 그래서 한 번 다녀오고 나면 언제쯤에나 또다시 가보나 늘 그래 왔던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무덥던 여름날 어린 아들 손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한 권 들려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남도 땅을 누비며 다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감흥을 다시 얻기는 어렵겠지만 땅끝마을 해남은 언제나 기대를 품게 하는 곳이다.
이 땅의 끄트머리 해남엔 바다를 내다보며 세상을 품은 듯이 장엄하게 우뚝 선 달마산(達摩山)이 있다. 그 장대한 산세에 천년고찰 미황사(美黃寺)를 있게 했다. 신라 경덕왕 8년에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온 돌배가 닿은 곳이 이곳 갈두항이다. 이때 경전과 불상을 싣고 앞서가던 소가 누운 곳에 절집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절 입구부터 위로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걸어서 닿은 미황사는 산에 스며있는 절이라는 인상을 준다. 산이 감싸 안은 안온함이 느껴진다. 산을 다듬어서 평지에 지어진 모습이 아니다. 높낮이가 다른 산에 그대로 맞추어 각각 앉혀졌다. 건물마다 비탈길이나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높낮이가 있다. 그래서 아래서 올려다보는 절의 처마나 기둥,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 내는 풍경소리가 남다르다.
비탈진 길을 따라 달마선원 뜰에 올라서 비로소 적요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간, 눈앞에 바다를 펼쳐 놓았고 남도의 들녘에 바람을 담아두었다. 그리고 저 멀리 매일 달라지는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일출은 낙산사, 일몰은 해남 미황사를 꼽았다고 한다.
이번 여행길에는 늘 하고 싶었던 템플스테이 일정이 있다. 비록 하루 머무는 짧은 프로그램이지만 깊은 산사에서 보냈던 그 시간은 깊은 힐링이었다. 방 배정과 함께 사찰 안내와 예절, 예불, 저녁 공양 후 참여했던 남도 문화체험은 해남 여행을 실감시킨다. 구수한 남도 소리를 바로 눈앞에서 들으며 함께 추임새도 넣어보는 시간, 비로소 우리 문화에 다가가 보았던 산사의 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하면서 내 머릿속이 정돈되고 살짝 기분 좋은 긴장감에 뿌듯하다.
꾸밈없이 정갈한 텅 빈 방에서 지낸 하룻밤. 새벽녘 정적을 울리는 목탁 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여니 어둠이 가득한 절 마당으로 가만히 오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린다. 조용히 일어나 내다본 산속의 사찰도 세수한 듯 신선하고 상쾌하다.
아침 공양 후 달마 선원의 찻방에서 금강 스님과 함께한 다도 시간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스님의 눈빛이 엄격한 듯 따뜻하다. 스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차를 두 손에 감싼다. “스님, 은은한 향이....이게 무슨 차인가요?”빙그레 웃으시며 스님이 말씀하신다. “차 이름은‘미황사 차’입니다.”이 무슨 바보 같은 물음이었는지.‘미황사 차’를 마시며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들려주신다.
“매일매일 살아있는 숲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산길을 걸은 후 기운이 충만해지길 바라요. 그리고 이 길이 천 년이 지나도 반가운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두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중장비나 기계가 아닌 호미와 삽, 괭이와 지게를 이용한 순수 인력으로 있는 그대로의 길을 내었다. 해마다 쌓이는 낙엽이 스며들고 그 길을 걷는 발아래 편안함이 있도록 자연 속의 흙과 돌을 그대로 고집했다. 길 가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걷는 도중에 큼직한 돌들이 쏟아져 내린듯한 너덜길을 몇 번쯤 만난다.
미황사를 둘러싼 뒤편의 달마산에 달마고도(達磨古道) 길이 차분히 열려 있다. 총 17.74km의 4개 코스다. 그중에 한 코스를 걷기로 했다.
달마 고도는 각 4코스가 있다. 총 17.74km / 약 6시간 30분 거리. 제1코스 2.7km 미황사~큰 바람재, / 제2코스 4.37km 큰 바람재~노지랑골,/ 제3코스 5.63km 노지랑 골~몰고리재, / 제4코스 5.03km 몰고리재~인길~미황사
땅끝마을에 명품 둘레길 달마고도(達磨古道). 그 길을 세 시간여 걸었다. 땅끝에서 산길을 걷고 돌길을 걸으며 속세의 고단함도 함께 한다. 태고의 매력 속에서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는다. 힐링 트래킹이다. 걸으며 사색과 명상을 하며 미약하게나마 성찰의 시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일지.
달마산의 숲에 난 조붓한 길은 적당히 걷기 좋았고 숲을 이룬 나무 사이로 햇살이 눈 부시다. 이렇게 걷는 행복을 만끽한다. 심신이 정돈되는 느낌이다. 평소에 운동하지 않는 편이다 보니 때로 숨차서 헉헉거리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다. 걸을수록 그 길을 걸어나갈 힘이 생겨난다. 언제라도 찾아와 걸어보고 싶은 길이 또 하나 생겼다.
생각만으로 막연히 멀다 했다. 이젠 언제라도 한반도 끄트머리 땅끝마을 해남으로 훌쩍 떠나볼 만하다. 그곳엔 붉은 동백이 피고 지고 있었고 애끓는 남도 창이 고단한 마음을 달래준다. 푸근한 인심과 맛있는 밥상엔 인정이 넘치던 곳, 지금 거기엔 싱그럽게 일렁이던 청보리가 누렇게 패고 있겠다.
*해남 미황사 가는 길 - 자동차로 약 6시간 정도 // *대중교통: 강남고속버스터미널(호남선)출발-해남터미널-미황사행 버스 // * 미황사. 달마고도(達磨古道)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해남군은 신종 코로나19 확산으로 나 홀로 여행자를 위한 한적하고 안전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6월 27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 미황사 일주문 앞에서 트레킹 가이드와 함께 출발한다.)
△ 주변에 더 가 볼 곳 & 맛집
*해남 청보리밭 - 두 눈이 시원하다. 황산 연호 보리밭은 바라만 보아도 싱그럽다. 구릉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린 완만한 지형이 자연스럽다. 고두심 주연의 영화 '엄마'의 한 장면이 이 청보리밭에서 연출되어 화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쯤 보리가 패어 누런 황금 물결이겠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482-2
*해남 공룡박물관 - 세계 최초로 익룡, 공룡, 새 발자국이 동일 지층에서 발견된 지역이 바로 해남이다. 그 앞으로 펼쳐진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은 마냥 평화롭다. 전남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 길 234
*대흥사-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있는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흥사(大興寺)는 땅끝마을 해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천불전 남쪽의 동국 선원은 1978년 문재인 대통령이 머물며 사법 시험공부를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소박한 방에서 누군가의 큰 꿈을 이루어가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입구에 있는 100년 전통의 한옥 구조인 '유선관 여관'과 그 뜰의 누렁이가 유명하다. 이제 그 누렁이는 간데없고 근래엔 TV 예능 알쓸신잡의 잡학박사들이 이곳에서 토론을 하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76
*녹우당(綠雨堂)-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의 무대 비자림 숲.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든든히 지키고 있다. 바람이 불 때 정말 녹우(綠雨) 소리가 날까 귀 기울여 보라.
*땅끝마을- 한반도 육지의 남쪽 끝 43.5km 지점에 있는‘땅끝마을’. 마을 입구에 땅끝 표지석이 서 있다. 156m 갈두산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모노레일 이용 가능)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보리향기 - 음식점도 자그마하고 가족 느낌의 보리밥 정식. 고소하고 찰진 차조밥과 '자줏빛의 작은 새우'라는 뜻의 '자하젓'이 맛깔스럽다. 막걸리 한 잔이 잘 어울리는 남도의 밥상.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158-1 보리향기
*원조장수통닭 - 닭 한 마리로 다양하게 먹는 닭 코스 요리가 있다. 해남군 해남읍 고산로 295
*미황사(美黃寺)에서 하룻밤 템플스테이 하면서 먹은 특별했던 ‘공양’. 단 한 가지도 나무랄 것 없이 모두 맛있다. 채식의 사찰요리여서 먹은 후 속도 편하다. 그리고 미황사 금강스님이 만들어주신 '미황사 차 한 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으뜸의 맛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