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이런 입시지옥에 태어났을까’. 수능의 달이 돌아오면 수험생들이 해봤을 법한 푸념이다. 그런데 50년 전에도 치열한 입시경쟁이 있었다. 게다가 피 말리는 수험생활의 당사자는 초등학생이었다. 11월을 맞아 입시파동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무즙파동’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 입시철을 살펴본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을 때였다. 1964년 12월 7일 서울지역 중학교 전기(前期) 입학시험에서 출제된 자연과목 문제 한 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문제를 출제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현재 교육청)는 이 문제의 정답이 ‘디아스타제’라고 발표했지만 많은 학생들은 답을 ‘무즙(무우즙)’이라고 적었다.
동물의 침이나 각종 식물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디아스타제는 무즙에도 함유된 효소다. 당시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에도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아제가 들어 있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하지만 교육위원회는 디아스타제만을 정답으로 인정했다.
뿔난 학부모들 ‘무즙 엿’ 들고 교육청으로
한 문제 차이로 당시 가장 명문중학교였던 경기중학교에 낙방한 학생이 속출했다. 무즙을 적어낸 학생들의 학부모가 거세게 항의했다. 학부모들은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찾아가 따지는 일도 있었다. 욕설의 의미로 널리 쓰이는 ‘엿 먹으라’는 표현이 이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초등학생의 시험문제 한 개로 뭐 그리 호들갑인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경기중-경기고-서울대로 대표되는 이른바 ‘엘리트코스’가 공고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명문중·고등학교에 가지 못하면 아예 학업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중학교 입시는 ‘공부의 길’과 ‘노동의 길’을 가늠하는 시험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수능 출제오류로 서울대 당락이 갈린 셈이다. 당시에는 중학입시가 사실상 출세의 첫 관문이었다.
‘보릿고개’가 실재하던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교육열만큼은 오늘날 못지않던 때였다. 당시 기사를 보면 서울시내 초등학생 62만 명 중 무려 30만 명이 과외를 받았다. 파출부 일을 하며 자식들을 가르친 억척스러운 홀어머니 이야기가 흔했고 ‘우골탑(牛骨塔)’이나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즈음이다.
탈 많던 중학교 입시, 무즙 논란 계기로 폐지
사건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서울 고등법원은 학부형 4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무즙’의 손을 들었다. 이 판결로 구제받은 39명의 학생은 5월 12일 전학 형식으로 경기중학교, 경복중학교 등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과정을 틈타 일부 부유층과 지도층 자녀가 부정입학을 하는 일이 벌어지며 다시 한 번 사회적인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지나친 교육열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사건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암기 기계’가 된다는 비판도 커졌다.
결국 3년 뒤 ‘창칼파동’으로 불리는 경기중학교 입학시험 복수정답 시비가 다시 불거지자 정부는 1968년 7월 발표한 중학교 입시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경기중, 서울중 등 이른바 ‘명문중학교’는 폐교되거나 평범한 학교로 강제 변경됐다.
하지만 중학교 입시를 없앤 효과는 크지 않았다. ‘무즙파동’을 만들었던 교육열은 고스란히 경기고 입시경쟁으로 옮겨갔다. 급기야 1974년 정부는 “일류학교의 폐풍과 과외 등 입시준비교육으로 정상적인 학교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고교평준화 정책을 시행했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폐지되자 학부모들은 대학 입시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중·고교 평준화하니 대입에 ‘올인’…연합고사부터 수능까지
대학의 학생선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정부는 이 즈음부터 대학입시 제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대학입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중요도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었다. 1968년에는 공통시험에서 일정 이상의 점수를 취득한 학생에게만 각 대학의 본고사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예비고사제’가 도입됐다.
예비고사제는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사교육문제에 비판적이었던 1980년 전두환 정부는 출범 첫 해 예비고사를 교과서 중심의 학력고사로 대체했다. “교과서에만 충실했다”는 식의 서울대 수석합격자 인터뷰 기사가 나오던 시기였다. 하지만 학력고사는 곧 학생들에게 단순암기식 교육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4년부터는 미국식 대입시험(SAT)을 참고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도입됐다. 단순 암기가 아닌 논리적 사고력과 독서를 측정한다는 취지였다. 22년간이나 유지된 수능은 역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입시제도가 됐다. 그러나 좋은 취지와 달리 ‘족집게 과외’, ‘스타 강사’ 등 사교육 양산의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변하지 않는 50년 입시지옥, 출구는 있나
그간 입시 관련 정책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욕먹는 정책’이었다. 입시제도를 바꿀 때마다 다시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갖가지 시도가 있어 왔지만 늘 형평성 시비가 뒤따랐다. 피를 말리는 입시경쟁 압박도 개선되지 못했다. 50년 전 중학교 입시를 치르던 초등학생이 지금의 고교생으로, 무즙파동을 만들었던 시험문제가 수능 문제로 대체됐을 뿐이다.
입시제도를 바꾸면 아이들의 피 마르는 입시전쟁을 해소할 수 있을까? 낙관적인 시각을 가진 국민은 많지 않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성인남녀 응답자의 58.7%는 앞으로 입시경쟁이 전반적으로 심화되거나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입시경쟁이 완화될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36.3%밖에 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어느 학교를 가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사회구조가 유지되는 한 제도 변화의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학부 입학을 어디로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종 학력이 어딘지가 중요하게 평가 받을 수 있도록 대학, 기업, 정부 간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교량이 무너지는 사고는 외국에서도 종종 있었지만 성수대교는 전 세계 교량사고 역사에서 늘 주요사례로 언급된다. 국내 건설인에게는 영원히 불명예스러운 기억이다. 성수대교 사고조사위원으로도 참여했던 원로 토목공학자 김문겸 연세대 교수(대한토목학회장)에게 그날의 참사에 대해 물어 본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1994년 10월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잘못 만들어지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건축물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던 사례다. 때문에 국내 건설인과 토목공학자들에게 사명감을 되새기도록 하는 기억이기도 하다. 30여 년간 토목학계에 몸담아 온 김문겸(金文謙·61)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대한토목학회장)에게도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국민들에게 송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토목공학자로서 국민들에 송구스러운 사고”
1994년 미국에서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가슴에 뜨거운 것들이 많았다. 토목학도로서 꿈을 키웠던 모교에서 교수가 된 젊은 토목학자로서 꿈과 사명감이 넘칠 때였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혹한 건설사고를 마주하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당시 그는 40세였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어린 여학생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당시 서울특별시의 사고조사위원회에 전문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사고지점 구조물이 흉물스럽게 잘려나간 모습, 피로가 누적된 철근이 구부러진 모습 등을 조사하며 사고 당시의 참혹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며 “사고 원인을 명확히 밝혀서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회상했다.
“사고 전 날로 시간 되돌려도 막을 수 있을지 의문”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한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후에만도 캐나다의 라발 고가도로(2006년), 미국의 미네소타 교량(2008년) 등이 붕괴돼 사상자를 낸 일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세계 교량사고 가운데 가장 주요한 사례로 언급된다. 김 교수를 포함한 한국 건설인들에게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21년 전 그날의 사고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불행을 방지할 수 있을까. 김 교수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성수대교 사고는 특정한 하나의 원인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 종합적인 안전시스템과 안전의식 부재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안전관련 의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단편적인 조치가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 교수가 특히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은 성수대교 붕괴 전 언론을 통해 한강 교량의 부실한 안전상태가 보도되거나 민간의 제보가 있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가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유지관리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이 없었다. 전문가들의 점검은 교량 하부를 육안으로 살피는 정도가 한계였다”며 “종합적인 인재(人災)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제2의, 제3의 성수대교 가능성 잠재... 대책 강구할 필요”
성수대교 사고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갖가지 안전관련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만들어진 대형 건축물에서는 어이없는 부실공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사고 등을 계기로 대형 건축물 자체의 안전관리체계가 크게 개선된 결과다. 건축부터 관리단계까지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 결과다. 그만큼 안전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김 교수는 “아직 우리 주변에 크고 작은 제2의, 제3의 성수대교 사고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100미터 이하 교량은 시설물 안전관리 특별법 대상에 포함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유지보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며 “많은 시설물이 점차 노후화되고 있기 때문에 평상시보다 철저한 안전점검과 유지관리가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도 짚었다. 아울러 그는 “미국의 경우 국민을 대신해 미국토목학회가 시설물에 대한 평가를 실시하고, 이 내용이 교량의 안전등급 결정과 유지관리정책에 반영되고 있다”며 “우리도 평가시스템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문겸 대한토목학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미국UCLA 대학교에서 구조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토목학회 부회장, 한국전산구조공학회 회장 및 연세대 공과대학장, 공학원장을 역임했으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설 분야 교육·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2015년 1월부터 대한토목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흔히 구강건강, 치아건강이라고 하면 TV 속 치약 광고의 가운 입은 의사와 어금니 모형 속 충치만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구강건강이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생각보다 꽤 넓다. 특히 인상과 미소를 좌우하는 얼굴의 상당 부위를 좌우하기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거울을 찬찬히 볼 필요가 있다.
시원스런 웃음이나 미소가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다.
나의 심리상태나 기분을 상대에게 전달해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해 주기도 하고,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는 사회적 기능도 갖고 있다. 흔히 우리가 처음 만난 상대와 악수를 할 때 치아를 보이며 미소를 짓는 이유도 이 때문이고, 총기문화가 발달된 곳일수록 낯선 이와의 눈인사가 일상이 되는 것도 미소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미소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나이 등을 가늠해 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소를 통해 어떤 위치의 치아가 보이는지, 치아의 상태나 색은 어떤지에 따라 상대의 젊음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치의학 중 심미치료학, 아름다운 외모를 고려한 치료를 연구하는 분야에선 ‘스마일 라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스마일라인은 윗니들과 아랫니들이 만나는 선을 이야기하는데, 젊어 보이려면 이 곡선이 평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웃음을 잃는다는 표현은 다소 문학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실제로 웃음을 잃은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치아나 구강상태에 자신이 없다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열어 자신의 것을 활짝 내어 보이는 행위를 쉽사리 할 수 없는데, 그야말로 웃음을 잃은 셈이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신감으로 우울증 앓기도
진료 현장의 치과의사들은 외모는 숨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치료, 예방할 것을 추천한다. 흔히 말하는 안티에이징이 치아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세대치대 이장열 외래교수(스마일어게인 치과의원)는 “구강 부위의 변화를 늙는다는 것의 기준으로 여겨 우울증으로 연결되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고민만 하다가 증상을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교정 등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제 2의 인생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중년층의 교정을 생애전환기 교정으로 규정하고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이 교수는 “특히 노화가 시작되면 안면근육의 근력이 약해지면서 웃을 때 윗니 대신 아랫니가 노출됩니다. 그런데 이 앞쪽 아랫니가 세월이 지나면 어금니의 미는 힘 때문에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아 콤플렉스의 원인이 되곤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교정 장치가 보이지 않도록 치아 안쪽으로 넣는 설측교정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사회활동이 중요한 중년들의 교정이 더욱 용이해졌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중년 교정 환자들이 늘면서 진료실 안의 풍속도에도 변화가 일었다. 부산 예쁜미소바른이치과 정주혜 실장은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두 번째 새 인생을 준비하는 중년들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관심이 무척 늘었습니다. 대학 진학이나 사회 진출을 앞둔 자녀와 함께 나란히 치료를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미백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 미백은 원래의 색을 잃고 어둡게 된 치아를 다시 하얗게 만드는 치료를 말하는데, 미백이 필요한 이유는 대부분 흡연이나 식습관 때문이다.
치아의 희고 단단한 부분인 에나멜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빨대와 같은 얇은 관들이 빽빽이 서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얇은 관 안으로 흡연으로 인한 침전물이 채워지거나, 한국 음식 특유의 색소들이 자리 잡으면서 치아의 색을 어둡게 한다고. 특히 최근에는 치아 변색의 주범으로 커피가 지목되고 있다.
칫솔질과 입 체조로 젊음 유지 가능
입 주위 안면 부위 노화는 몇 가지 증상만 체크하면 스스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치과의사가 지적하는 일반적인 노화현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침의 분비가 줄어들어 입 안이 마르기 시작한다. 침은 입 안에서 살균작용을 돕기 때문에 구강건조증이 찾아오면 잇몸에 염증이 생기기 쉽고, 충치와 구취에도 영향을 준다. 또 치조골이 낮아지면서 치아 사이가 벌어진다. 이 역시 치주염과 관계가 있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음식 찌꺼기가 쉽게 끼고, 썩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변화는 근육의 이완. 안면의 근력이 떨어지게 되면 인중이 길어지게 되면서 사람의 인상을 다르게 만들고, 웃을 때 윗니가 보이는 젊은 사람들과 달리 아랫니가 보이게 만든다. 치과의사들이 아랫니의 배열이나 색상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치아와 입 주변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문가들은 입 체조나 와타나베 칫솔질과 같은 치아세정술을 추천한다. 입 체조는 말 그대로 입 주변과 혀의 근력을 강화하기 위한 체조로, 입술과 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발음을 소리 내어 말하면서 하는 운동. 제대로 된 효과를 보려면 올바른 교육을 받고 시도하는 것이 좋다.
와타나베 칫솔질은 일본에서 고안된 이 닦는 법 중 하나인데, 그간 고안된 많은 칫솔질 방법 중에서 최근 들어 각광받기 시작한 방법으로, 대학에서도 정규 과정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처음엔 환자 스스로가 직접 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해 먼저 시술 받아보기를 권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운용(金雲龍·85)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정치인과 관료, 경제인이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거쳐 갔지만 유치 준비부터 폐막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이는 김 전 부위원장이 유일하다. 김 전 부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6·25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의미를 돌이켜본다면
지금은 저절로 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나는 서울올림픽을 광복 이후 역사에서 6·25전쟁에 비견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축 늘어져 있던 한국 국민이 ‘우리는 할 수 있다, 해 냈다’고 느끼면서 의식을 개혁하게 됐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사에 남긴 의미는 단순한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적인 의식을 개혁했다는 데 있다. 서울올림픽의 모토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세계무대에서 정말 약소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로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됐다.
서울올림픽이 최초로 기획된 것은 언제인가
얘기를 하려면 먼저 1978년 제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 씨와 함께 유치한 대회였다. 멕시코에서 선수단 숙식을 하루 10달러에 제공해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급해진 나는 하루 5달러면 된다고 ‘뻥’을 쳤고 결과적으로 대회를 잘 치르게 됐다. 사격대회 다음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약간 허황된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이 검토해보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정부가 올림픽 유치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체육심의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교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고 나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서 참석했다. 대부분 올림픽 유치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박종규 씨가 “유치에 직을 걸자”고 주장하면 김택수(전 IOC위원) 씨는 “내가 왜 그만두느냐, 당신이나 그만둬” 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뭘 해보기도 전에 10·26사태가 터졌다. 세상이 뒤집혔으니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렇게 스톱이 됐다.
다시 정부가 유치방안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직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여러모로 어려울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나라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림픽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했다. 얼마 전에 전 전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때는 IOC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돈도 참 없었다고 했다. 한국인 국제심판도 없고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이 나밖에 없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좌우지간 우리나라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나고야가 우세했는데 어떻게 역전했나
나고야는 승리를 과신했다. IOC총회를 맞는 자세나 준비는 부실했다. 나고야의 전시실에는 여성 홍보요원 두 명에 사진 몇 장이 전시돼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보여줬다. 일본은 나고야가 중심이었지만 우리는 거국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나고야가 아니라 한국과 나고야가 경쟁하는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개최지 발표 순간 “쎄울, 꼬레아” 소리에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멍해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아쉬움이 남는 순간은
2001년 총회에서 유색인종 최초로 IOC위원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쉽고, 2005년 5월 구속된 상태에서 불명예스럽게 IOC위원을 사퇴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2008년 복권이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연례보고서에서 ‘김운용씨가 한국 정치인들에 의해 2003년 실시된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의 희생양이 된 양심수’라고 기록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최근 활발히 힘을 쏟고 있는 일이 있는지
집필 활동과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온다. 현업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은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경험하고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한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면 해주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돕겠다. 이름을 빌려달라면 빌려주고 뛰어 달라면 뛴다. 한국에서 IOC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다. 아직 운동도 하고 있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필라테스도 한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열심히 쳤다. 서울 삼선교 인근에 사시던 신재덕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배웠다. 1947년 당시 레슨비가 한달에 2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일 내게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면 피아니스트가 꼭 돼보고 싶다. 연세대 재학시절 내가 피아노를 가장 잘 쳤다. 대학 1학년때는 전교 음악회에서 독주도 했다. 쇼팽의 음악을 곧잘 연주했다. ‘즉흥환상곡’을 가장 좋아했다. 쇼팽의 음악에는 연인에 대한 로맨스와 조국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6·25가 발발하면서 공부도, 음악도 그만둬야 했다. 외교관으로 주미 대사를 하면서 국제법 학자이자 피아니스트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유치를 비롯해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2부산아시안게임 등 대한민국이 주요 국제대회의 국내 유치하는 과정은 대부분 김 전 부위원장의 손을 거쳤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에서는 남북한 공동입장을 성사시켰다.
그는 태권도 세계화의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효자종목’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김 전 부위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적으로는 대통령특사 국제교류대사를 맡은 바 있으며 16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약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미국아메리칸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 석좌교수 등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89년부터는 아호인 윤곡(允谷)을 따 국내 최대 여성 스포츠 시상식인 윤곡여성체육대상을 시행해 왔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박동숙씨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약력
1931년 대구 출생(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美메리빌大 법학박사)
1961년 내각수반 비서관·국방장관 보좌관
1963년 주미대사관·주UN대표부·주영대사관 참사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대한체육회 이사
1972년 국기원 건립, 국기원 이사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창설총재
1985년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TV 분과위원장
1990년 대통령특사(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1992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1993년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1996년 외무부 국제체육교류 대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재 아메리칸스포츠대학교 명예총장, 조선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지난 몇 해 동안 노환규(盧煥奎·53) 전 의협회장을 만날 땐 의료제도와 관련해 특종이 될 만한 거침없는 발언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던졌다. 오해도 많고 굴곡도 많은 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고 싶다고 했다. 할 말은 다 하는 그이지만, 막상 본인의 속내를 꺼내 놓으려니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 근처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을 걸치고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해 말다툼 한 번 없이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이 믿기십니까? 제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요. 모든 걸 받아줬던 아내 덕분이죠.”
중학교 3학년생 노환규는 과외 그룹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원래는 친구가 좋아하던 여학생이어서 그 둘을 이어주려 했는데 결국 친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느 순간 마음에 쏙 들게 됐다. 고 1때 결혼을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장기적인 구애에 들어갔다. 노환규는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고 그 여학생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에 골인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과외를 같이 하던 중학생들이 중년의 나이가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 금실이 좋은 것은 온전히 아내의 포용력 덕분입니다. 전 젊은 시절에 모든 결정을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어요. 교만했던 시절이었죠. 자기중심적인 인간, 그게 저였다고 생각해요. 제 아내가 아니었다면 부부싸움을 해도 수백 번 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계획했던 미국 이민을 갑자기 포기했던 일, 2시간 고민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아주대병원으로 이직을 결정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일, 교수직과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일.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상의 없이 결정 후 아내에게 통보하곤 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묵묵히 응원하며 살아온 그녀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넓었다.
사망판정, 그래도 잘 자란 아들
아내의 임신소식에 깨가 쏟아지던 신혼 초기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임신 5개월째, 아내의 배가 이상하게 오른쪽만 불러 왔다. 초음파 검사 결과, 자궁이 둘로 나뉜 ‘쌍각자궁’으로 판정됐다. 당시 흉부외과 인턴에 불과했던 노환규는 겁이 났다. 쌍각자궁은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질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부인과 교수를 찾아갔지만 안정을 취하라는 말만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화장실에서 양수가 터지고 몸 밖에 탯줄이 나와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에 찾아갔지만, 결국 아이는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인턴 신분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죠. 응급수술이 지체돼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교수는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자마자 수술실을 떠났어요. 하지만 간호사가 사망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해 신생아 중환자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뇌출혈도 판정받게 됐고 담당 교수는 포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인큐베이터의 산소 공급도 중단했습니다. 부모님은 장례까지 준비하고 계셨죠.”
그러나 사망 판정을 받았던 노환규의 아들은 걱정과는 달리 잘 컸다. 단지 걸음마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을 뿐 건강하게 자랐다. 행운이었다. 아들은 이제 29세, 멋진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의사가운 입은 채 의료사고를 말하다
아들이 사망 판정을 받았던 순간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조금만 더 성실한 진료를 해줬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의료사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의사들과는 달랐다. 같은 의사라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숨기기만 한다면, 그게 의료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테고 분명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무서움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의사총연합 대표로 일하던 2011년, 의사 가운을 입고 지방 모 대학병원 앞에서 의료사고 해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감행한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항암제를 바꾸어 주사하는 바람에 사망한 아홉살 백혈병 환아 종현이 사건 때문이었다. 대한의사협회장이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은 의료사고입니다”라고.
“의료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하는 부분이죠. 100%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양심을 저버린 대학병원 교수진의 조직적인 사실 은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이 6개 대학병원에 종현이와 관련된 소견서와 의무기록을 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문제의 일부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죠. 제가 나서야만 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저를 싫어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방법이 옳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말 종현이법으로 불리는 ‘환자안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가 의료적 오류를 범했을 때 병원에 마련된 전담인력인 환자안전위원회에 ‘자율’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의무보고와 이를 어길 경우 제재하는 내용은 빠진 상태다. 의료사고를 숨기기만 했던 분위기는 개선은 됐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의료계의 ‘돈키호테’
의료계에서 노환규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선배 중심의 의료계에서, 그것도 의사회, 학회의 지지기반이 없는 인물이 2012년 5월 제37대 의사협회장이 된다. 한동안 의료계 메시아라고 칭해지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돈키호테가 됐다. 결국 그는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탄핵 당하고 만다. 106년 역사의 의사협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심경을 듣고 싶었다.
“불명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막을 수도 있었던 임시 대의원총회였습니다. 누구에게도 탄핵을 저지하기 위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제가 탄핵됨으로 해서 협회의 대의원제도를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회원들이 뽑지 않은 250명의 대의원이 힘을 행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전략적으로 잘못된 부분(탄핵 후 소송을 통한 제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처럼 특이한 케이스가 나타나서 판을 흔들어야 협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목적이었던 대의원제도가 일부 바뀌었다. 올해 최초로 대의원들이 직선제를 통해서 선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협을 떠났어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그 뜻
그의 발언은 세다. 쉬쉬하지 말고 아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문의 평균 연봉은 9200만원인데, 세후로 따지면 600만원이 안 된다. 국민들은 의사 연봉이 3000만원이길 바라지만, 3000만원 받는 의사에게서 심장수술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솔직한 발언을 쏟아내 호불호가 갈리는 그는 그래도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할 말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아내와 든든한 아들이 버팀목이 돼 주고 있고, 부모님도 여전히 건강하신 상태고, 종합적인 행복지수가 높아서일 수도 있어요. 전 웃지 않으면 화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남들이 모른 척할 때,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제 삶의 임무겠죠.(웃음)”
기자가 알아본 바로는 노환규 전 의협회장은 정치권에서 수차례 러브콜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혹시 정치권으로 들어갈 의향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봤다. 답변은 간단했다. “가슴 뛰는 일, 따듯한 일을 하고 싶은데 정치는 그렇지 않잖아요.”
한 중년 남성의 상경은 슬펐다. 40년 가까이 한곳만 바라보며 달려온 인생이다. 가난했지만 불꽃같은 열정과 투혼이 있어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 꽃은 많은 사람에 꿈과 희망과 용기를 줬다. 중년 남성의 얼굴 곳곳에 깊게 파인 주름은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 속 온갖 사연을 담은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2000년 10월, 제2의 인생을 위해 서울행을 선택한 그는 한국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金奉淵·63)이다. 그의 야구인생은 그렇게 씁쓸한 마침표를 찍었다.
1963년의 어느 날이다. 소년 김봉연(당시 10세)은 두 살 터울 형 김봉구에 의해 야구부 훈련 장면을 지켜보게 됐다. 형 김봉구는 김봉연보다 먼저 야구를 시작했다. 그땐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훈련이 끝나고 형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형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창문 밖에서 교실 안을 훔쳐보니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졌다. 형이 야구부원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야구부원이 되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구나.” 어린 김봉연에게 자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봉연의 야구 입문은 그렇게 자장면의 유혹으로 시작됐다.
어린 김봉연은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운동이었지만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면 담장을 넘어갔다. 하지만 김봉연의 진짜 야구인생은 군상상고에 진학하면서다.
1968년 야구부를 창단한 군산상고는 김봉연에게 야구 유니폼을 입혀 ‘역전의 명수’를 만들어갔다.
군산상고 3학년이던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는 9회까지 1-4로 끌려가다 5-4로 역전 우승하며 한국 야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을 남겼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 용사’는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현기봉, 송상복 등이다. 이 우승은 김봉연의 야구인생 전환기가 됐다.
서른한 살 김봉연, 프로야구 무대 밟다
이후 김봉연의 야구인생엔 걸림돌이 없었다.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란 수식어를 안겼다면 연세대 재학 시절엔 본격적인 홈런포를 가동했다. 대학 4년 동안 홈런왕을 놓치지 않을 만큼 그의 방망이는 위력을 발휘했다.
홈런만이 아니다. 아마추어 시절엔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에는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세대 졸업 후에는 한국화장품에서 3연타석 홈런을 세 차례나 기록했고, 대통령배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는 등 한국 최고의 거포로 군림했다.
그리고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은 또 다시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김봉연은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서른에 가까웠다. 뒤늦은 모험보다 어릴 적 꿈이던 교사가 옳은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봉연은 장고 끝에 일생일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까짓 거 한 번 부딪혀보자.”
김봉연은 프로야구 원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초대 홈런왕에 올랐다. 그의 홈런포는 이듬해인 1983년에도 불을 뿜으며 해태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올스타전 브레이크에서 가족과 함께 전남 여수에 다녀오던 김봉연은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만 200바늘(총 314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동승자가 사망할 만큼 생명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입원 한 달 만에 다시 일어나 후기 리그 우승 팀 MBC 청룡과의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불을 뿜은 그의 방망이는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한국시리즈 성적 1홈런 포함 19타수 9안타(0.474) 8타점을 기록한 김봉연은 해태에 첫 우승을 안기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바로 그 우승이 해태(KIA) 10회 우승의 시발점이다.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부상 후유증과 체력적 한계, 그리고 상대 투수들의 견제로 슬럼프 늪에 빠졌다. 4번 타자의 부진은 해태의 침체로 이어졌고, 1984년 롯데, 1985년 삼성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86년 2년 만에 재기에 성공, 생애 두 번째 홈런왕(21홈런)에 오르며 해태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제패를 이끌었다. 그것이 김봉연 야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정년퇴직까지 2년…제3의 인생은 다시 광주에서
김봉연은 1988년 은퇴까지 630경기에 출전해 2145타수 596안타(0278) 110홈런 334타점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국 야구의 영웅이자 호남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의 은퇴는 씁쓸한 마침표였다.
“스포츠신문을 통해 ‘김봉연 은퇴’란 제목의 기사를 봤다. 세상에 나도 모르는 은퇴가 어디 있나.” 구단의 일방적인 은퇴 결정은 아직도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코치생활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2000년 김응용 감독이 삼성 사령탑을 맡으면서 후배 김성한이 후임 감독으로 정해진 것이다. 결국 김봉연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야구판을 떠났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김봉연은 지금 충북 음성의 극동대학교에서 사회체육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릴 적 교사 꿈을 교수가 되어 이룬 셈이다.
“야구를 그만둔 지 벌써 15년이나 됐다. 이제 정년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정년퇴직하더라도 강의는 계속하고 싶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그는 야구판을 떠나서도 신명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내 야구 인생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로 감독을 못했다는 점이다. 일흔이 되기 전에 꼭 KIA 감독을 맡고 싶다.” 바로 그것이 해태를 떠나 지낸 15년 세월도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해태는 가난했지만 모든 선수들이 책임감이 강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해태와 KIA의 차이점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KIA엔 그게 없다. 그래서 더 KIA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그렇게 제3의 인생을 설계했다.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역전 드라마의 마침표가 김봉연의 잊힌 야구 열정에 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는데 법률적으로 사람의 사망은 상속의 문제를 남긴다.
우리 민법 제1005조에서 ‘상속인은 상속 개시된 때부터 피상속인의 재산에 관한 포괄적 권리의무를 승계한다’고 규정하여 상속이 재산상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람의 사망으로 상속이 개시되며 사망한 사람을 피상속인이라고 한다. 사람만이 피상속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피상속인의 사망 시에 피상속인의 재산을 승계하는 사람을 상속인이라 한다. 상속인이 되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의 사망 시에 생존해야 하거나 태아로 존재하고 있어야 하므로 피상속인보다 먼저 사망한 사람은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 상속이 개시된 때라 함은 사람이 사망한 때를 말하며, 상속의 대상이 되는 상속재산은 피상속인이 사망 당시에 가지고 있던 적극재산 및 소극재산(예를 들어 채무)이 포함된다.
우리 민법은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즉 상속인을 한정하고 있다. 즉 민법 제1000조 제1항에서는 1.피상속인의 직계비속(자녀·손자·손녀 등), 2.직계존속(부모, 조부모 등), 3.피상속인의 형제자매, 4.피상속인의 4촌 이내 방계혈족(삼촌, 고모, 외삼촌, 이모, 고종사촌, 이종사촌)으로, 제1003조에서 배우자를 그 상속인으로 하고 있다. 자녀의 경우 혼인 중의 자와 혼인 외의 자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동등하게 상속분이 인정된다. 배우자는 혼인신고를 한 법률상의 배우자를 말하며 사실혼 배우자의 경우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배우자는 그 직계비속과 동순위(1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이 없는 경우 피상속인의 직계존속과 공동상속인이 되며, 피상속인의 직계비속도, 직계존속도 없는 경우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
배우자의 경우에는 다른 상속인과 달리 혼인의 무효, 취소로 인하여 여러 상황이 발생한다. 법률상의 배우자라 하더라도 사망한 배우자와 혼인이 무효로 되는 경우에는 상속권을 잃게 되지만, 부부 일방의 사망 후에 혼인이 취소된 경우에는 혼인취소의 효력이 소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상속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이다(대판 1996. 12. 23. 95다48308). 부부 일방이 이혼소송을 제기한 후 소송계속 중에 사망한 경우에는 소송은 종료되어 다른 일방의 배우자는 상속권을 갖는다. 사실상 이혼 중에 당사자 일방이 사망한 경우에도 판례는 다른 일방이 배우자로서 상속권이 있다고 본다(대판 1969. 7. 8. 69다427).
중혼의 경우, 예를 들어 ‘갑’이 ‘을’과 협의이혼한 후 ‘병’과 재혼하였는데, 나중에 ‘갑’과 ‘을’ 사이에 (협의)이혼 취소판결이 이루어져 ‘갑’과 ‘병’ 사이의 혼인이 중혼이 된 상태에서 ‘갑’이 사망한 경우 ‘을’과 ‘병’이 모두 배우자로서 상속권을 갖는 것으로 본다. ‘갑’과 ‘병’의 혼인이 취소되어도 소급효가 없으므로 ‘병’ 역시 배우자로서 상속권이 있다고 보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상속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정되며, 상속인이 없는 상태에서 특별연고자는 가정법원에 상속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의 분여를 청구할 수 있다(민법 제1057조의 2). 특별연고자의 분여청구가 없거나 분여하고 남은 재산이 있을 때에는 그 재산은 국가에 귀속하게 된다(민법 제1058조).
양승동(梁勝童)
연세대 법대, 대학원졸. 사법연수원 3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현재 법무법인 지암 변호사, 양천사랑복지재단 고문변호사 겸 이사.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년은 기념비적인 해다. 감격과 환호 속에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칠순을 맞기까지 우리는 고난과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다. 한국의 70년은 외국의 17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기와 맞먹을지 모른다. 이 길고 험난했던 세월 동안 한국 사회와 문화는 어떻게 달라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엇이 시대의 화두였나. 앞으로 8월호까지 부문별로 나누어 7회 특집을 마련한다. 그 첫 순서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분석하는 세대론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에 대해 자연 생각해보게 된다. 광복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빼앗긴 주권의 회복이자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이행'
하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격동의 현대사였다. 미군정이 시작되고,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은 격화됐다. 냉전의 그늘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선포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참으로 험난한 나라 세우기 과정이었다.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국가를 성취했으되 통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진 셈이었다.
나라 세우기에 부여된 두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세계시간 속에서 뒤처졌던 만큼 그것은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로 진행되었다. 추격산업화는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전략으로 나타났다. ‘선(先)성장 후(後)분배’ 논리야말로 추격산업화의 요체였다. 성장은 가파르게 이뤄지고 경제적 삶은 빠르게 향상됐다. 하지만 추격산업화의 정당성은 그 과정 안에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유신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부정함으로써 군사권위주의의 등장을 가져왔다.
추격산업화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여전히 논란을 안고 있다. 대중의 다수는 향수를 갖고 있는 반면, 지식사회에서는 거부 경향이 두드러진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의 본질 가운데 하나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중들이 현재의 곤궁(困窮)으로 인해 과거를 그리워해 왔다면, 지식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발전을 지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추격민주화는 추격산업화 안에서 배태됐다. 군부권위주의는 민주화를 일시적으로 지체시켰지만 역사는 이미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추격민주화를 주도한 주체는 사회운동이었다. 분출하는 사회운동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요구하고 또 만들어냄으로써 서구민주주의를 단숨에 추격하고자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본격화된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대내적인 민주화와 대외적인 자주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추격민주화에도 그늘은 존재했다. 정치민주화는 이뤄졌지만 ‘거리의 민주주의’가 ‘제도의 민주주의’로 쉽게 전화되지 못했다. 경제민주화와 사회민주화 역시 미완의 과제였다. 지역주의가 강화되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돼 온 것은 민주화 과정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민주화 과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추격산업화의 조건에서 민주화를 성취하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추격민주화에 이어 새롭게 등장한 게 정보사회였다. 정보기술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정보사회는 경제·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정보기술과 연관된 산업은 경제의 중추를 이뤘고, 새롭게 등장한 온라인 공론장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한 중심을 형성했다. 그리고 정보사회의 도래가 가져온 가상문화는 일상생활은 물론 문화 생산 및 소비양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세계화의 충격과 한 쌍을 이루는 정보사회의 도래는 양면적인 특성을 보여 왔다.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개인적·사회적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왔다. 특히 스마트폰의 대중적 보급은 정주(定住)사회를 넘어서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유목사회의 도래를 현실화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보사회는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 정보 불평등, 인권 침해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을 낳아 오기도 했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갈등
광복 70년의 이러한 ‘압축적 발전’에 대응하는 개념이 세대다. 세대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대략 3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한다.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후자의 의미를 특히 주목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말한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 정보시대에 각기 대응하는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정보화세대’가 존재한다.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50대 중반 이상이 산업화세대라면,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까지는 민주화세대이며, 10대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정보화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 세대 가운데 뚜렷한 대비를 보인 것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다. 산업화세대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끈 1960~70년대 산업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보여왔다면, 민주화세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시민운동·노동운동을 통해 진행된 민주화에 드높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추격산업화와 추격민주화가 비서구사회의 모범적인 사례였던 만큼 이러한 자부심들은 그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려 했던 산업화세대와 말의 자유 및 인권의 증진을 모색하려 했던 민주화세대 사이의 가치의 긴장 및 충돌은 우리 사회 변동의 또 다른 특징을 이뤄왔다. 우리 사회 세대갈등의 주축을 이뤄온 ‘6070세대 대 3040세대’ 간의 갈등은 ‘산업화세대 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세대 간의 갈등이 가장 예각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은 정치다. 우리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대통령선거의 경우 언제부턴가 세대갈등은 지역갈등과 함께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예를 들어,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민주화세대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었으며, 2013년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산업화세대의 지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세대는 5060세대와 3040세대의 사이에 놓인 50대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이들인데,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특징을 아울러 갖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현재 50대는 베이비붐 세대이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지했던 이들이다. 이들 다수는 2002년 대선에서 진보적인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졌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보수적인 박근혜 후보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50대는 ‘이중적 불안’ 속에 놓여 있다. 하나가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 말한 직장으로부터의 ‘퇴출의 공포’라면, 다른 하나는 고령화에 따른 ‘노후생활의 공포’다. 이러한 불안의 일상화는 50대 다수로 하여금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정치적 구도보다는 어느 세력이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는가의 정책적 구도를 중시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50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이 세대가 갖는 역할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생애를 돌아볼 때 50대는 6070세대와 3040세대 사이의 ‘낀 세대’이지만, 동시에 두 세대를 이을 수 있는 ‘가교 세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가교 세대로서의 특징은 이 세대로 하여금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간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정보화 ‘트라우마세대’에 주목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를 이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진행돼 왔다. 정보화세대라 명명할 수 있는 이 세대가 갖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이념보다는 탈이념을 선호하고, 이성 못지않게 욕망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정보혁명에 익숙한 세대다.
다른 하나는 1997년 외환위기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음으로써 물질적 가치와 탈물질적(post-materialist) 가치가 혼재하는 세대라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건 거시적으로 보면 물질적 가치에서 탈물질적 가치로의 변동이 이뤄져 왔고, 우리 사회의 경우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세대’는 탈물질적 가치의 기수라 할만 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탈물질적 가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좌절됐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 양극화가 강화되고, 특히 청년실업이 본격화되면서 정보화세대는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영향 받은 물질적 가치와 정보사회의 도래로부터 영향 받은 탈물질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정보화세대는, 이 시대를 규정짓는 ‘정보화’라는 말과는 달리, 개인적 생애에서 그렇게 행복한 세대는 아니다. 이들을 나는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 트라우마세대란 초·중·고교 시절에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의 실직 또는 부도를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가중된 청년실업에 다시 대면해 있는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을 트라우마세대라고 명명한 이유는 외환위기로 인한 개인적 경험의 기억이 이후 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정보화세대인 트라우마세대에게는 민주화세대의 양대 축을 이뤄온 386세대, 신세대와 비교할 때 특히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386세대의 상징이 민주화와 학생운동에, 신세대의 상징이 ‘네 멋대로 하라’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있었다면, 트라우마세대의 상징은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과 청년실업에서 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세대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서 이제 정보시대와 세계화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증거한다.
둘째, 세대 내 양극화도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세대라 하면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조되지만, 정보화세대의 경우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공존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물질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이 동질성이라면,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은 이 세대를 승자 그룹과 패자 그룹으로 분화시키는 양극화를 낳아 오면서 세대 내 이질성을 강화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대 내 분화 및 양극화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창한 영어, 경영 컨설턴트, 상층 문화 등이 승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라면, 어눌한 영어, 비정규직 노동자, B급 문화 등은 패자 그룹의 아이콘들이다. 앞선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와 달리 세대 내 동질성과 이질성이 뚜렷한 정보화세대는 탈이념적 성격이 두드러져 다른 세대와의 정치적 긴장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해와 공감의 세대공존을 향하여
어느 나라든 세대 간의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 까닭은 세대에 따라 가치와 이익이 다르고, 또 일정한 연령 차이에 따른 사고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세대긴장과 세대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어느 사회이건 매우 중요한 사회·문화적 과제다. 그렇다면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층갈등이나 지역갈등과 비교해서 세대갈등이 갖는 특징은 그 갈등의 양상이 예각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비록 서로 다른 세대라 하더라도 모두 가족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의 충돌이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연령에 따른 가치의 차이가 가져오는 긴장과 충돌은 매우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며, 이는 결국 세대간 소통을 가로막아 세대단절을 강화시켜왔다.
세대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세대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가 존재하는 법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 민주화가 제공한 인권의 신장,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자유로운 세계시민 등은 모두 소중한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을 다원적 관점에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로 세대갈등 해소와 세대공존의 출발점을 이룬다.
어떤 세대든 그늘이 존재한다, 특히 정보화세대는 앞선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청년실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세대다. 서로 다른 세대가 경험한 시대와 그들이 놓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면 세대간 소통은 활발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박사, 미국 UCLA 방문연구원 역임.
현재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
주요 저서 : , 등
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strongman55@etoday.co.kr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스마트폰 메신저와 SNS를 통해 고백을 하고, 이모티콘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요즘세대. 헤어짐 역시 메신저로 이별을 통보하고, SNS 게시물을 지워나가며 연애의 종지부를 찍는다. 30~40년 전,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쓴 연애편지로 고백을 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시와 노래를 지어 애정을 표현하던 그 시절 대학생들에 비하면 요즘 연애는 동기, 과정, 결과라는 시간이 매우 짧게만 느껴진다.
현대기술이 가져다준 이른바 LTE급 연애보다는 조금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기다림이 주는 그 애틋한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1975년,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가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홍익대생 413명을 골라 실시한 ‘한국남녀대학생 데이트 실태’ 연구 조사를 통해 그리운1970년대 대학생들의 데이트 세계를 추억해 본다.
데이트 유형
데이트 유형을 살펴보면 남녀 모두 저학년 때는 학과 모임이나 단체미팅 등을 통한 ‘그룹 데이트’를 하거나 데이트 상대가 일정하지 않은 ‘랜덤 데이트’를 즐겼다. 졸업반에 가까울수록 일정한 상대와 연인관계로 접어드는 ‘스테디 데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학생들은 평균 한 사람이 그룹·랜덤·스테디 데이트 중 두 가지를 겸하는 ‘더블 데이트’를 했고, 여학생들은 이보다는 적은 수(1.5종류)의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 패턴
당시 대학생들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35%) 만나 3~4시간 데이트를 즐기고(55%), 500원 이내의 데이트 비용을 지출하며(33%), 데이트 비용의 경우 대부분 남자가 부담(70%)했다. 각자 데이트 비용을 내는 형태의 ‘더치페이 커플’도 4% 가량 있었다. 데이트 비용을 공동 부담하는 남자를 가리켜 ‘18금’이라 하였고, 여자에게 데이트 자금을 부담시키는 남자를 ‘14금’, 전적으로 부담하는 남자를 ‘24금’, 심하게 여자를 따라다니며 돈을 물 쓰듯 하는 남학생을 ‘핸드백’이라 불렀다.
데이트 장소
여대생 열에 아홉(91.2%)이 연인과의 만남의 장소로 ‘다방’을 찾았다. 요즘 연인들이 카페에서 만남이 잦은 것처럼 70년대 연인들에게도 ‘다방’이 주된 데이트 장소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 약속시간에 늦는 애인을 기다리며 탁자위에 성냥을 가지고 성을 쌓아 가며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야외로는 덕수궁 돌담길이나, 창경원 길, 남산 계단 길 등을 거닐기도 했고, 교외선을 타거나 시외버스로 일영이나 송추 등으로 나가 데이트를 즐겼다. 소양강 댐 인근 청평사로 가는 배가 생겼을 당시에는 ‘배가 끊켰다’는 핑계로 하룻밤을 지내고 오는 연인들도 많았다고.
데이트 진도
1975년 한 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거의 재학기간 중 이성간에 데이트를 즐기며 대부분이 3~4회 데이트를 하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개방성을 보이고 있다’고 나와 있다. 데이트 3~4회에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것이 ‘개방적이다’라고 표현한 것을 요즘 세대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연인들은 추운 겨울날 데이트를 즐기면서도 각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남남처럼 떨어져 거니는가 하면, 스킨십을 할 때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행동했다. 지금처럼 공공장소에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커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