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대(眼帶)를 한 조선시대 인물 낙서 장만(洛西 張晩, 1566~1629)의 초상화(사진 1)를 보는 순간, 생생한 현대사의 한 장면이 영상처럼 겹쳐졌다. 바로 검은 안대를 한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Moshe Dayan, 1915~1981)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그림 속 인물이 실명(失明) 상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지금까지 네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눈가리개’인 안대를 한 초상화는 단 한 작품이다.
장만은 조선시대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때 문신으로서보다는 무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국토의 북녘 지역에서 나라를 지켰다. 특히 병자호란 때 북방 수비에 큰 공을 세웠다. 1624년(인조 2년)에는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해 공신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만은 왼쪽 눈에 큰 부상을 입고 실명하고 말았다. 그 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공신상(功臣像)이라는 초상화를 하사받게 되었는데, 바로 이 공신상에서 검은색 안대가 훈장처럼 크게 눈에 띈다.
1956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중동 지역에 전운(戰雲)이 휘몰아쳤다. 각각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1956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대통령이 그동안 영국, 프랑스, 미국이 주도하던 수에즈 운하의 관리 경영권을 박탈해 국유화하자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시나이 반도를 넘어 수에즈 운하의 서편 제방(Bank)까지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또한 공군력을 앞세워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7년 이번엔 아랍 연합과 이스라엘 간에 이른바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른바 ‘번개전쟁(Blitz Krieg)’이라는 작전으로 자국 국토보다 두 배나 넓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시를 포함한 웨스트뱅크(West Bank) 지역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 고원(Golan Heights)을 점령했다. 6박 7일간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끝난 전쟁이었다(주: 훗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웨스트뱅크와 골란 고원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 남아 있다).
이 두 번의 전쟁에서 1956년에는 총사령관으로, 1967년에는 국방장관으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모셰 다얀이다. 나중에 외무장관직(1977~1979)에 오르기도 한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세계 정치·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모셰 다얀은 1941년, 그러니까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이웃 아랍국들과 벌어진 크고 작은 무력 분쟁 때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이름과 더불어 검은색 안대가 마치 ‘훈장’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사진 2).
검은색 안대를 한 조선시대 인물의 초상화를 보며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셰 다얀이라는 전쟁 영웅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검은색 안대 없는 모셰 다얀과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인 낙서 장만을 생각하며 ‘아이콘’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서 다양한 피부 증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후기의 걸출한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戇憲 徐邁修, 1731~1818)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심한 여드름 자국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뒤 그동안 수많은 여드름 환자를 진료해온 필자가 보기에도 서매수 초상화에 묘사된 여드름 자국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서매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천연두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얽은 자국’이 코, 입 그리고 턱 주위에 퍼져 있었다. 요컨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얽은 자국’이 모여 있었고, 이마와 양 볼에는 상대적으로 증상 밀도가 낮았다. 이는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皮脂腺)이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사체인 선비가 청소년 시절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뇌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드름 때문에 겪는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라 고개를 갸웃하며 받았다. 그런데 첫마디가 “저는 ○○○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말을 이어왔다. “얼마 전 여드름을 치료해주신 ○○○의 아비입니다.” 그제야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학생인 그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필자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이런 상태가 되도록….’ 그 정도로 여드름 병변이 심각했던 것이다. 대학생인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방치한 부모의 무관심을 속으로 탓했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의 상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여드름이 치유되자 우울해 보였던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로서도 너무나 기쁜 일이라 자연스레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자의 부친은 필자에게 “요즘 아들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젊은 학생이 그동안 느꼈을 마음고생이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그 무렵 인천에 사는 한 여학생이 심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문득 필자가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하찮은 뾰루지 하나가 이마나 볼에 생겨도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는 그런 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 환자의 부친과 통화를 하면서 새삼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겼다.
앞서 언급한 초상화의 주인공도 젊은 시절 심한 여드름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여드름을 ‘청춘의 꽃’이라고 했던가. 이 그럴듯한 말에 숨겨진 심리학적 해석을 차치해도, 그동안 여드름 때문에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잔영이 기록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날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인생은 끝나는 때라고 흔히 말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전성기가 60부터라는 관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인생은 40부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값있고 보람 있게 살기 원한다면 60부터라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60은 100세 시대를 바라볼 때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60이 되면 인간적 성장과 성숙의 완숙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고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갖추는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자기평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정신 및 인간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지식과 사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성 전반에 걸친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노력과 사회 기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것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76세 때의 일이다. 한 후배 교수가 회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그 친구 철도 안 들었는데 회갑부터 된다”라며 웃었다. 자기도 그랬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때였다. 내 나이를 물은 90대 초반의 선배 교수가 “좋은 나이로구먼…” 하며 부러워하던 얘기를 지금도 기억에 떠올리곤 한다. 60에서 75세쯤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사고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75세쯤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성장의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 있는가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85 내지 87세까지는 연장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편이다. 40대라고 해도 공부와 일을 포기한 사람은 녹슨 기계와 같아서 사회적 기여를 못한다. 그러나 70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젊고 활기찬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 연장될 수 있는가. 내 주변 친구들은 85세까지는 사회가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하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깝고 존경스러운 친구들 중 김수환 추기경, 김태길 교수, 안병욱 선생 모두가 그랬다. 90 가까이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100세 시대의 후반기는 50대부터 시작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며 동료들과 사회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대답을 얻어가는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을 때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후회스러운 반성을 해보는 때가 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내가 50쯤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반드시 찾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하지 못한 잘못이다.
20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5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대부분 보람과 성공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인생의 전반기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사람은 후반기에 가서도 그 빈자리를 메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50대에는 80대 후반기까지의 장래를 계획하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관의 가장 큰 과제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치관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면 80대가 채워질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자신 있게 인생의 마라톤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나는 80대가 되면서 이제는 쉬고 싶고 쉬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 휴식의 1년은 일하고 공부하는 1년보다도 더 지치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해서 지금까지 17, 18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계속해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거나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90 고개를 넘긴 후에는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객관적인 권고를 할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피력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다. 내 주변의 90대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90대가 되면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뜻하는 대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연히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부부 중의 한쪽은 떠나간다. 자녀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다. 여성들은 90대가 되어도 모성애의 대가라고 할까, 갈 곳이 있으나 남성들은 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나이가 되면 친구들도 떠나간다. 그때 찾아드는 남성적 고독과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금 나에게 하는 가장 적절한 문안인사가 있다면 “사시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말이다. 90대 후반은 더욱 그렇다. 그러한 부담을 극복할 수 있어야 90대에도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도 아직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숨기지 않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짐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생. 안병욱 교수(숭실대), 김태길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현재도 활발한 저술 및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석학이다. 특히 100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확정된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새해를 맞으며 부쩍 드는 의문이다. 하도 어수선한 지난 연말을 헤쳐 나오다 보니 세상을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 뉴질랜드 사는 친구가 교포들 사이에 유행하던 말이라며 ‘뉴질랜드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던 말이 문득 생각난다.
젊은 시절 우리는 대부분 미래를 예측하며 살았다. 적당히 대학을 졸업해도 누구나 어디든 취직이 되었으며 열심히 저축하고 살면 집 한 채 정도는 장만했다. 경제는 계속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고 주머니는 언제나 두둑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녀들의 세상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비슷한 과정으로 내몰기 위해 열심히 학원 보내며 대학입시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세상이 우리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주위에 하나둘 망하는 회사가 생기기 시작했고 수입은 점점 줄어든다. 자녀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했건만, 도무지 취업이 안 된다. 빨리 시집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잘 살기를 바랐건만, 껌 딱지처럼 집에 붙어 있다. 우리가 꿈꾸었던 미래가 온통 뒤죽박죽이다.
아하, 세상이 바뀌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자녀들 잘 키워놓으면 적당히 기대 살리라던 희망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젠 저성장 사회가 되었으니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경제학자들의 뒷북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때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말에도 웃으며 내심 우리의 성장을 대견해 했지만, 어느덧 ‘재미도 없는 지옥’으로 바뀌고 말았다.
삶이 뒤죽박죽된 것도 문제지만, 열심히 살면 미래에 행복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마저 산산이 조각난 것이 더 심각하다. 말하자면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현재의 어려움을 견뎠는데 미래의 행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는 젊은 세대에 더 심각하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이미 덜 벌고 덜 쓰고 덜 일 해도 행복하다는 도인 같은 ‘사토리(달관) 세대가 등장했다지 않는가.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그의 책 에서 2017년 트렌드로 ‘YOLO’를 꼽았다. 'YOLO'는 요즘 유행하는 구호로 'You only live once(한 번뿐인 인생)'의 머리글자다. 그는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 시대에 불안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건 필연적인 결과”라며 “욜로족은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모하더라도 도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란다.
트렌드라고 해서 꼭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내심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연세대 서은국 교수도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빈도’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타당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힐 순 없다.
에서 앤이 말한다. “세상이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네요.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세상이 펼쳐지네요.” 미래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자. 새해 벽두에 오바마처럼 말해 보자면, ‘
병원 진료실을 찾는 환자나 그 가족이 전해주는 사연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희귀한 피부 질환을 앓는 환자를 만나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임상 진료 분야와 달리 피부 질환의 특성상 다른 사람 눈에 쉽게 노출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안면에 나타난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고(故)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이 편찬한 귀중한 화보 (탐구당, 1972)을 살펴보다가 유복명(柳復明, 1685~1760)의 초상화를 만났다. 얼굴색이 좀 어둡게 그려져 있기에 휴대용 단안확대경으로 피사체의 안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여 있었다(그림). 즉 초상화 주인공의 코에서는 여드름 자국이 보였고, 안면은 다모증(多毛症, hypertrichosis)이라는 희귀 피부 질환을 앓고 있음이 확인됐다.
남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다모증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수염이나 눈썹 등에 유난히 많은 털은 고민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미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androgen)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위에서 체모(體毛)가 두드러지게 많이 난다면 상황은 다르다. 온몸 또는 얼굴이 털로 뒤덮인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 해외 가십으로 소개된 ‘원숭이 인간’이 그 한 예다.
초상화 주인공인 유복명의 경우 안면 다모증이 보이지만, 다행히 털의 밀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눈 밑 부위까지 난 안면 전체 체모의 올이 머리털처럼 굵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의 손등에도 굵은 털이 났으리라 짐작된다. 피사체인 주인공이 유·청소년기에 ‘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하니 필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초상화를 보면서 한 환자가 떠올랐다. 임상에서 눈썹이 없어 진료실을 찾는 무모증(無毛症, atrichosis) 환자를 만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지만, 다모증 환자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다. 어느 날 여성 한 분이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필자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차분히 앉는 여성의 얼굴 표정을 보며 왜 눈길을 피하며 이야기하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참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여성에게 나타나는 다모증의 일종인 조모증(粗毛症, hirsutism)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환자는 중학교 선생이었는데, 입 주변과 윗입술 그리고 턱 부위가 옅은 잔털로 덮여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검게 보였다. 국소 다모증이었다. 사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임상적으로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임상적 원인 분석을 떠나 미용 차원의 교정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피부 치료용 레이저광 치료 기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다양한 레이저 치료 기기가 개발되어 많은 환자가 큰 도움을 받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제모(除毛)용 레이저 기기는 가장 뛰어난 임상 효과를 보인다. 필자는 1980년대에 진료실을 찾아왔던 그 여선생도 레이저 치료를 받고 밝은 얼굴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유복명 귀인에게 막연하게나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15년간 학창 시절을 보낸 뒤였다. 이제 제대하면 학창 시절이 1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후회됐다. 그래서 남은 1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후회 없는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자고 다짐했다.
제대하자마자 복학했을 때는 이미 취업한 학생들이 많아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4학년 1학기는 장학금을 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필자가 학기 중간에 취업이 되었다. 당연히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창 시절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다. 공부에 관심이 생겨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이미 학창 시절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때 연세대 야간대학원 학생모집 광고를 봤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 때, 아직 학구열이 남아 있을 때 도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가면 시간이 맞았다.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다행히 합격통지를 받았다. 최종 55명이 합격했다.
야간대학원은 주간대학원보다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한다. 5학기제다. 4학기를 마치고 나면 졸업논문 자격시험이라는 것도 있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논문을 쓸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5학기는 전적으로 논문을 작성하는 학기가 된다. 그런데 이 자격시험에서 탈락자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합격자는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시험도 어렵지만, 다들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라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근무 지역이나 근무 조건이 달라져 공부에 매진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생겼다. 낮 시간에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니 시간만 가고 마음만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퇴근 후 공부를 한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하루가 그렇게 짧은지 그때 알았다.
안 되겠다 싶어 동기생들과 공부하는 방법을 협의했다. 겨울방학 동안 모여서 같이 공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필자도 미래에 도움이 될 학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필자는 인접 학과인 무역학과를 졸업하면서 경영학과 경제학 근처에서 얼씬거려봤으니 학과목들은 다시 공부하는 셈이라 쉬웠다. 그러나 다른 동기생들은 이공계 등 전혀 다른 전공과목 출신들이라 필자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침 한 사람이 공기업인 이화동 디자인포장센터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인데 퇴근시간 후에는 사람이 없으니 거기 모여 공부하자는 제의를 했다. 회의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책상도 있어 공부하기에는 좋은 공간이었다. 퇴근하면 각자 와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때 모인 사람이 일곱 명이었다.
그런데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보니 집에 가기가 어려웠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그 시간에 맞춰 집에 가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 동네에 아예 하숙집을 얻기로 했다. 골목 안 허름한 집이었는데 반찬이 너무 부실했다. 할 수 없이 돈을 더 주고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씩 더 얹어달라고 했다. 차라리 라면을 끓여달라고도 했다.
방학이 끝나가자 하숙집 가는 시간도 점점 더 늦어졌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숙집에 가더라도 잠깐 눈만 붙이고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잠자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 하루 3시간으로 줄더니 마지막에는 2시간으로 줄었다. 그래도 다 같이 격려해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일찍부터 이렇게 공부했다면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에 진학했을 거라며 다들 뒤늦게 아쉬워했다. 다행히 공부는 재미있었다. 마지막 달에는 아예 하숙집에 안 가고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하루 2시간만 자며 공부를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일곱 명은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공부해 전원 논문 자격시험을 통과했다. 55명이 입학해서 논문까지 패스해 영광스러운 석사학위와 졸업장을 받아 쥔 사람은 우리 일곱 명뿐이었다. 그 멤버는 1979년에 일제히 결혼을 했다. 이후에도 부부동반 모임으로 만나고 있으며 1980년부터 지금까지 36년 동안 만남이 이어져 오고 있다. 모임 이름은 석사학위 통과를 기념해 칠석회(七碩會)라고 지었다.
“다시, 다시, 다시!”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야. 해남아, 해남아. 연주하다가 틀리잖아? 그럼 다시 해야지 고쳐져. 그냥 지나가면 안 돼!”
학예회(?)를 일주일 앞둔 아현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연습실은 시끌벅적했다. 기타와 바이올린, 하모니카 소리와 노래 소리, 키득키득 웃는 소리, 와글와글 수다 떠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이들 행동과 말투 그리고 동심 깃든 눈빛은 여전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흰머리와 노안(老眼)과 술잔이다. 어린 시절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함께하던 친구들이 40년 넘어 다시 끈끈하게 뭉쳤다. 이름하야 야매(?)기타교습소. 세월이 많이도 지났다. 그래도 여전한 마음으로 남아 있는 건 친구들뿐이다. 그들이 사는 모습, 유치해 보이는가? 아니다. 신선하다!
아현초등학교 43회 졸업생, 야매기타교습소 문 열다
우연한 기회였다. 정기적으로 만나던 동창모임에서 기타를 배워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마침 김영석씨가 대학 시절 연세대 클래식기타 동아리 오르페우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기타리스트였다. 친구들이 그의 재능을 좀 나눠 갖자며 의견을 모았다.
김영석 작년 1월에 시작했어요. 모일 때마다 친구들 몇 명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럼 재능기부를 할까? 그럼 해볼까? 그래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잘 운영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정말 “그럼 해볼게”였죠. “세 명만 모이고 장소만 있으면 해볼게” 했더니 우연히 세 명이 모였고 장소도 마련된 거예요. 친구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지!” 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런 놀이를 재미있어하더라고요. 예전에 누구나 한 번쯤은 기타를 조금씩은 연주해봤겠지만 그걸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죠. 한 번도 안 쳐본 친구도 있어요. 막연하게 “나도 기타 한번 쳐보고 싶다” 하고 생각한 친구예요. 그 친구는 여기서 처음 기타를 배웠습니다. “야! 내가 가르쳐줄게” 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전문 기타리스트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 모임 이름이 야매기타교습소 ‘야기소’가 된 겁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기타 연습을 했다. 모임이 재밌다고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나날이 인원이 늘어났다.
김영석 매달 모여서 연습을 하다가 우리도 발표회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어요. 무대 좀 서봐야 실력이 늘잖아요. 그래서 작년 10월에 해봤는데 모두들 너무 좋아했어요. 전부 다 녹화해서 유튜브에도 올렸어요.
작년 10월에 이어 5월과 11월에도 ‘야기소’ 파티를 열었다. 이들은 연주 발표회 날을 ‘ 파티’라고 부른다. 친구들과 만나 기타를 연주하고 먹고 노는 분위기에 발표회보다는 파티라는 말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미국에서 유권이가 돌아왔다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17년을 살던 친구 원유권이 귀국했다. 작년에 올렸던 유튜브 영상을 봤단다.
원유권 유튜브를 보고 이 파티에 너무 참여하고 싶었어요. 노래하는 것을 보고 듀엣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사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요. 그런데 노래 잘하고 연주 잘하는 친구 세 명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동창 중에서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정우섭과 함께 듀엣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주는 당연히 ‘야기소’의 기타 선생인 김영석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김영석 “그래? 그럼 무슨 노랠 부를 거야?” 했더니 ‘내 영혼 바람되어’를 할 거래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신지은을 꼬셨어요. 물어보니까 지은이도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저와 유권이, 우섭이 지은이가 한 팀이 됐습니다.
사실 원유권씨는 몸이 좀 불편하다. 미국에 간 지 3년 만에 쓰러져서 10년은 말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원유권 그런데 갑자기 동창들 노는 걸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나도 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나가봐야겠다 했죠.
11월 12일, 동인천 한 카페에서 가진 ‘야기소’의 세 번째 파티에서 원유권씨는 소원대로 친구들과 노래를 불렀다. 멀리 타국에서 오랜 시간 외로웠을 원유권씨에게는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우리는 음을 즐기는 동창모임입니다
다양한 기억을 가진 친구들이 모인 곳 ‘야기소’. 이곳에서는 반드시 즐기고 행복해야 한다. 왜냐고? 음악을 하려고 만났기 때문이다.
김영석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은 ‘학’ 아니면 ‘술’로 이름이 끝나죠. 그런데 음악은 ‘樂’, 즐길 ‘락’ 자로 끝나요. ‘음을 즐기는 것’이 음악의 정의인 셈이죠. 즐거워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음악입니다. 우리가 즐거우면 계속할 것이고 즐거움이 없으면 그만두자, 깨자. 전제가 그것이거든요.
이들의 연습시간은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했다. 연습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더 즐겁기 위해서라고 김영석씨는 말한다.
김영석 우리가 프로 연주자가 될 것도 아니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갈 것도 아니잖아요. 사실 실력도 안 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올 파티 날의 드레스코드를 정하느라 정신없는 ‘야기소’ 회원들. 고민 끝에 빨간색으로 정했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열정적인 파티가 영원하길 기대하며….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라이프@은 독자들과 함께 꾸미고자 합니다. 따뜻하고 특별한 사연이 있는 모임에 가 찾아가겠습니다. bravo@etoday.co.kr
조선시대 초상화의 뿌리가 명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뿌리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우뚝 선 장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 바로 초상화다.
명나라 왕조 376년(1368~1644), 청나라 왕조 275년(1636~1911) 도합 51년을 거치면서 초상화 제작과 관련한 중국의 화풍(畵風)도 많이 바뀌었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규모가 너무나 광대해 문화적 통일성을 간직하고 유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시대와 왕조에 따라 각기 다른 화풍이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화가가 너무 작고 사소한 것에 급급하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畵者謹毛而失貌]’라는 생각이다. 이는 당시 초상화 제작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국 초상화의 뛰어난 필력(筆力)과 무관하게 시대와 왕조에 따른 화풍은 결과적으로 ‘질의 들쑥날쑥한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우리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지켜온 무변(無變)의 원칙과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피사체의 부(富)나 권력의 고하와 무관하게 많은 경우 조정에서 신하에게 내린 하사품의 성격을 띠었다. 더불어 조정의 도화서(圖畵署) 출신 화인(畵人)의 손품이 묻어 있어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함과 동시에 ‘균일성’도 간직할 수 있었다.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최한 ‘조선공신(朝鮮功臣)’ 전을 둘러본 적이 있다. 왕을 헌신적으로 섬긴 공을 인정해 조정에서 신하에게 하사한 초상화를 모은 전시회였다. 작품 중 조선시대 후기 숙종(肅宗)과 영조(英祖)시대를 산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의 분무공신상(奮武功臣像)을 보며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필자가 오명항의 초상화를 처음 본 것은 1980년대 초다. ‘초상화’ 하면 피사체의 모습이 화려하지 않아도 우아한 것을 기대하는 ‘관습’에 젖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오명항의 초상화는 안면이 온통 천연두(天然痘, 媽媽)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肝) 질환 증상과 비슷한 흑달(黑疸)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사진 1).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1950년대만 해도 거리에서 천연두를 앓은 흔적의 얼굴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 필자로서는 흔히 일컫던 ‘곰보 자국’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명항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천연두 자국이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얼굴까지 아주 검게 그린 초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만성 간경화증(肝硬化症)에서는 먼저 황달(黃疸)이 나타나고, 말기가 되면 흑달로 이어진다. 초상화에서 오명항의 사인이 무엇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오명항의 다른 초상화(사진 2), 즉 ‘분무공신상’을 보면서 필자는 또다시 놀랐다. 두 개의 초상화를 제작한 연도는 똑같이 오명항이 사망한 해인 1728년이었다. 그런데 ‘분무공신상’에 나타난 안면 피부 색깔에는 ‘황달기’가 여실히 보이지만 ‘흑달’까지는 진행이 안 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다른 초상화에서는 안면을 검게 그린 점이 두드러졌다. 요컨대 ‘분무공신상’ 제작 이후 간경화증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얘기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임상 증상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리 초상화의 ‘별난 특징’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 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 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 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 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