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A는 B와 1980년 1월 1일 혼인하였으나 성격차이로 불화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1995년 1월경 A는 부모님을 위해 고향 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B와 갈등이 심해져 결국 이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B가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자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해 이혼을 못하고 있었다. A는 B와의 불화 중 C를 알게 되었고, C가 위자료를 빌려 주어 B와 이혼하였다. A는 B와 이혼 후 C와 1998년 1월 혼인신고를 하여 법률상 부부가 되었다. A와 C가 혼인한 이후 B는 A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데리고 나타나는 등 A와 C의 혼인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C는 A와 B가 위장이혼한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A와 C의 다툼이 심해져 1999년 1월부터 별거하기에 이르렀다. A는 C와 별거하게 되자 C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C는 직장도 그만두고 A와 혼인생활을 하였으나, 별거하면서 생활비를 받지 못하였다.
C는 2000년 1월 2일 A를 상대로 과거의 부양료 및 혼인해소시까지의 부양료를 청구하였다. C의 청구는 용인될까.
부부 사이의 부양의 의무는 민법 제826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는 혼인관계의 본질적 의무이고 부양을 받을 사람의 생활과 부양의무자의 생활을 같은 정도로 보장하여 부부 공동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으로 1차적 부양의무이다.
위 사례의 경우 A와 C는 법률상 부부이고, A는 C에 대하여 부양의무를 부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자신의 급여를 통해 C가 자신과 같은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생활을 보장하여야 할 부양의 의무를 진다.
C가 A에게 청구한 부양료를 살펴보면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까지의 부양료(과거 부양료)와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해소 시(예를 들면 이혼할 때까지)까지의 부양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양의 의무는 혼인 시부터 부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부양의무자가 부양의무의 이행을 청구받기 이전의 부양료의 지급은 청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부양의무의 성질이나 형평의 관념에 합치된다”고 하여 과거의 부양료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부양의무의 이행청구를 요구하고 있다(참조 : 대법원 2008.06.12. 자 2005스50 결정).
위 사례에서 C가 1999년 1월 1일부터 2000년 1월 1일 사이에 부양료를 청구하는 등 부양의무 이행을 A에게 요구하지 아니하였다면 위 기간의 부양료는 받을 수 없다. 따라서 C는 2000년 1월 2일부터 혼인이 종료하게 되는 시점까지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참고로 자녀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양의무 이행의 청구가 있어야 과거의 부양료를 인정받을 수 있다.
양승동(梁勝童)
연세대 법대, 대학원졸. 사법연수원 3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현재 법무법인 지암 변호사,
양천사랑복지재단 고문변호사 겸 이사.
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놓고도 1970년대에 한국이 이처럼 민주화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회상했다. 필자도 이 특파원의 얘기에 실로 동감한다.
특히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을 떠났던 많은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는 천지개벽을 본 듯하다고 놀라워한다.
1960년대를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지낸 필자가 어쩌다 접하는 고국 소식은 보고 듣기도 민망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저개발국형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도 몇몇 국가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열차에 무질서하게 탑승하는 장면이 뉴스를 타곤 하는데, 1960년대에 필자가 대했던 고국의 뉴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19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는 식민 사상이나 식민 역사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고려자기(高麗瓷器)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사 교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 아름다운 청자색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우리 도공(陶工)들이 청자에 사용할 안료(顔料) 제조와 배합의 비밀을 자기 자식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옹졸하다.” 당시 필자는 그 교사가 말한 ‘옹졸한 우리 민족’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자괴감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62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화유산 전시회’에서 우리 고려청자에 대한 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다. 당시 전시회 관리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선생을 만났을 때였다.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고 필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저 아름다운 비취색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도공들이 그 비법을 자식들한테도 전수하지 않아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일제 식민 교육의 결과이지” 하면서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저 우아한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었던 한복의 마고자(조끼)나 바지의 색깔이 연한 비취색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청자의 쇠퇴는 조선시대 개막과 더불어 도입한 유교사상이 순백색인 백자(白瓷)와 맥을 같이한 결과라고 봐야 하네.” 필자의 우문에 대한 혜곡 선생의 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놓고도 1970년대에 한국이 이처럼 민주화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회상했다. 필자도 이 특파원의 얘기에 실로 동감한다.
특히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을 떠났던 많은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는 천지개벽을 본 듯하다고 놀라워한다.
1960년대를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지낸 필자가 어쩌다 접하는 고국 소식은 보고 듣기도 민망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저개발국형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도 몇몇 국가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열차에 무질서하게 탑승하는 장면이 뉴스를 타곤 하는데, 1960년대에 필자가 대했던 고국의 뉴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19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는 식민 사상이나 식민 역사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고려자기(高麗瓷器)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사 교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 아름다운 청자색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우리 도공(陶工)들이 청자에 사용할 안료(顔料) 제조와 배합의 비밀을 자기 자식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옹졸하다.” 당시 필자는 그 교사가 말한 ‘옹졸한 우리 민족’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자괴감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62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화유산 전시회’에서 우리 고려청자에 대한 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다. 당시 전시회 관리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선생을 만났을 때였다.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고 필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저 아름다운 비취색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도공들이 그 비법을 자식들한테도 전수하지 않아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일제 식민 교육의 결과이지” 하면서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저 우아한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었던 한복의 마고자(조끼)나 바지의 색깔이 연한 비취색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청자의 쇠퇴는 조선시대 개막과 더불어 도입한 유교사상이 순백색인 백자(白瓷)와 맥을 같이한 결과라고 봐야 하네.” 필자의 우문에 대한 혜곡 선생의 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드물디드문 ‘90대 철학 교수’이자 글로써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요즘 활발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 100세를 바라보며 만든 책 (덴스토리 펴냄)를 출간한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겪은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펼쳐놨다. 결코 흔치 않은 100년 동안의 시간을 경험한 노교수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자.
한 시절 젊은이들은 1960년대 등과 같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김 교수의 수필을 읽던 청년들이 어느덧 50, 60대가 됐지만 지금도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다.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 김 교수는 최근 출판가에서 가장 ‘묵직한’ 저자다. 90살을 넘어 100살에 가까워진 김 교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활발한 외부 활동으로 그 이름을 다시금 각인시키더니 와 의 두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름으로써 스스로 현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사랑과 희망이 있는 이야기가 담긴 책 를 내놨다.
90대에 다시 맞이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즐거움
“를 작년에 내놨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내놨던 와 를 개정하여 다시 출간했죠. 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처음에는 출간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 할아버지가 그 책을 꺼내 주면서 꼭 내라고 했다는 거예요.”
김 교수는 사람들이 예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감싸니 예수가 어떤 화두를 가진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찾아보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만든 책이 바로 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시대를 앞선 책이기도 했다.
“과거에 책이 나왔을 때는 호응이 없었는데, 지금 읽히기 시작하니 교회 안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호응이 있고 반응이 좋아요. 젊었을 때 써서 지금보다 문장도 좋고. 내가 봐도 훌륭해(웃음).”
김 교수는 백 살이 가까운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친필로 글을 쓴다. 타자기는 안 쓰고 스마트폰도 안 쓴다. 그는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라는 계간지에 1년에 200자 원고지 400장을 쓰는 게 있어요. 그런데 3개월 후에 쓰는 걸 반복하는 것보다는 원고를 미리 써놓는 게 좋겠다 싶어 한꺼번에 쓴 거죠. 그게 좀 무리가 됐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안 써요(웃음). 할 때 하자 싶어서 한 일인데, 그렇게 무리했던 게 나은 거 같아요.”
가족이 떠나니 집이 비고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비었다
“우리 어머니가 10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을 담담한 운명으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분은 더 오래 사는 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직계 중에 먼저 돌아가신 사람이 없는데 자신이 그보다 늦게 갈까 봐 그랬던 거예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먼저 갈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가면 되고, 네 처가 가게 되면 집이 빌 텐데 집이 비면 어떡하지?’라고 말씀하시데요. 어머니가 가시고 아내도 가고 그러니 정말 집이 빈 거예요. 외국 여행하고 돌아올 때 오고 싶지 않고 공항에 내려도 ‘빈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됐죠. 어머니와 아내가 집이었어요.”
를 보면 김 교수의 절친한 친구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 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김태길 교수는 2009년, 안병욱 교수는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는 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며 “집 식구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거 같은데 친구가 떠나니 세상이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께서 떠나고 5년쯤 지나고 나니 친구들이 가기 시작하는데 둘이 비슷한 때 가더라고. 세상이 비는 거 같았어요. 남들은 잘 몰라요, 나는 그걸 왜 느끼느냐 하면 친구다운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었죠. 독일의 괴테가 임종할 때 의식이 흐려져서 환상 비슷한 걸 보게 되는데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는 걸 보더니 저거 쉴러의 편지인데 날아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고 해요, 야스퍼스는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한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고.”
그는 자신도 ‘이젠 인생 마감을 어떻게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한다’며 “죽음을 생각하지만 두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감사한 거죠. 내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내가 있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산 사람도 있었고, 내가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저한텐 남는 것이지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
나이 들어서 행복을 맛본다는 건 쉽지 않다. 김 교수는 나이 들어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원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거든요. 그가 윤리학을 가장 처음 쓴 사람인데 윤리학에서 하는 말이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인격이 행복을 만들어서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행복을 내게 주고 행복이란 그렇게 나눠서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을 만드는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죠. 윤리학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을 내놓은 셈이에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이 들면서 행복도 커지는 거죠. 나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게 인생인 겁니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그 인격이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인격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본다고 설명했다.
“인격이란 나에게 있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 대해선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실과 사랑이에요. 성실한 사람은 항상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자기를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진실이 있고, 성실보다 더 귀한 인격은 자신에게 있어선 없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철학자가 된다
김 교수의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가장 성실하게 산 사람을 공자로 봤다고 한다. 공자는 성실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공자가 한계로 느낀 걸 종교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는 성실에 경건이 더해진 철학을 만들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성실만 갖고 있으면 종교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수에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면 달그림자가 안 뜹니다. 그런데 조용해지면 달그림자, 별 그림자를 볼 수 있죠. 경건하다는 건 이성이 작용을 멈췄을 때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호수가 조용해졌을 때 별 그림자가 뜨는 것 같은 상태죠. 그때 종교가 오게 됩니다.”
김 교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이렇게 보면 좋을 거예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제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나 보고 4년 동안 대학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현상을 잘 알죠. 인상은 남아 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 알지만 이상하죠? 난 대학 다닐 때 강의 들었던 것, 읽었던 책을 다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강의 듣는 것, 책을 읽는 것 다 문제의식이 그릇이 되어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러니 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졸업하면 평범해집니다. 반면 일류 대학이 아니더라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김 교수의 아우라는 긍정적이다. 불안한 요인이 섞여 있지 않다. 아흔을 넘어 백세로 가는 이에게 그러한 긍정의 힘은 놀랍고 희귀한 사례다. 그에게도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게 있을까?
“93세 때 밤에 자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을 정리하면 뭐가 될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잤어요. 메모는 세 문장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철학자로서의 나는 진리를 추구했고 사회적으로는 겨레들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우리 시대는 일제강점기, 공산 치하를 겪어야 했으니. 못해서 아쉽겠다는 건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좀 더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가끔씩 인터뷰를 하면 기자들이 ‘젊었을 때 낭만이 있었느냐, 연애는 했느냐, 연애 결혼했느냐 중매 결혼했느냐 같은 걸 묻는데 속으론 ‘그건 왜 물어봐. 관심 밖이야’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김 교수는 자신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우리를 위해 마음 써줬는데 고마운 사람이다.’
“를 쓰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거 같아서 홀가분해요. 아쉽냐고요? 그런 건 생각 안 나요. 이 책 한 권만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또 쓸 거니까.”
지혜가 묻어나오는 그의 저서에는 ‘성실’을 표현해내는 인격이 반짝인다. 그래서 김 교수의 책은 그리울 수밖에 없다.
>> 김형석 교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운동기를 거쳤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성장했으며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로, 인촌 김성수 선생은 멘토로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20년간 투병 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 연희동 주택에서 10여 년째 홀로 살고 있다. 4녀 2남의 자녀들에게도 “나를 위해 마음 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며 고독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고, 책을 읽고, 강연을 하는 삶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한글 가온길을 해설하는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가 있다.
◇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주시경선생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동지들하고 뜻을 같이하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한글이 바르게 보급되는 것을 목적으로, 1908년에 ‘국문연구회’를 설립한 것인데 그 후, 1911년에는 ‘조선 언문회’로, 1921년에는 ‘조선어 연구회’로,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그 이름이 바뀌어 오다가 1949년에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글학회가 지금의 새문안로 3길에 자리 잡기까지에는 사연이 있다. 1908년, 창립한 한글학회는 여기저기로 10여 차례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많은 자료와 서적 등을 가지고 이사를 다니느라 고생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선생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돈과 집을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모금운동을 벌여 1977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길에 한글회관을 마련하여, 한글학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 주시경선생과 그의 집터
한글 가온길에는 주시경선생의 집터가 있는데, 선생의 살림살이가 항상 궁핍해서, 조그만 집은 5남매와 책들로 비좁아, 발 들여 놓을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독지가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후 주시경선생의 집은 ‘한글발전연구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평생, 한글 연구에 몸 바쳐 오던 선생은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지금은 '용비어천가'란 이름의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도렴2동 녹지공원 ‘주시경 마당’에는 한글 발전에 초석이 된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동상, 그리고 부조가 조형물로 설치되어있다.
◇ 헐버트선생
헐버트선생은 201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미국인으로,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주장하며 세계에 한글을 알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한글로 된 라는 책을 만들었다. '조선 글자가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하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양화진 절두산에 있는 그의 묘지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 김슬옹 박사
한글 가온길과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도공무원의 꿈을 안고 철도 대학교에 다니던 사람이다.
어느 날, 외솔 최현배선생의 영향을 받아 그분의 뜻을 이어 받고자 철도공무원의 꿈을 접고. 최현배선생이 강의를 맡고 있던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 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한글 사랑과 바른 한글사용의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현재 ‘한글학회 연구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그가 대학시절, 당시에 널리 사용하던 ‘서클’이란 모임이름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메뉴판’이라는 이름도 ‘차림표’라는 이름으로 바꾸는데 앞장서서, 지금은 그런 한글이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슬옹’이란 그의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그는 ‘슬’기롭고 ‘옹’골찬 마음으로 한글을 사랑하는 옹달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김슬옹’으로 개명하였다.
김슬옹박사의 한글사랑이 온 국민에게 널리 퍼져서, 국민 모두가 한글을 사랑하는 ‘김슬옹박사’와 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봉덕사종(奉德寺鐘)’보다는 ‘에밀레종’이란 이름이 우리한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범종에 스며 있는 설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우리나라 사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범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업 때면 과목의 본질보다는 국사 시간에나 걸맞은 것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던 국어 선생님 덕분이다. 하루는 선생님이 에밀레종을 타종할 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세계 으뜸이라고 강조하면서 오래전 경주를 방문한 스웨덴 국왕도 “지금껏 들어 본 범종 소리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감탄했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왠지 그때 들은 그 얘기가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주해: 스웨덴 왕세자는 1926년 10월 10일 경주를 방문해 성덕대왕신종의 타종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유학 시절, 독일 언론에 구스타브(Gustav VI Adolf, 1882~1973) 스웨덴 국왕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독일을 방문한 스웨덴 국왕에 대해 크게 보도하면서 독일 언론은 국왕이 고고학(考古學)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유럽 고대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 찍은 그의 모습을 함께 실었다. 그때 필자는 유럽에서는 고고학이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성장한 특별한 학문적 배경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 국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에밀레종 소리를 듣고 극찬한 분인가?’
물론 국왕이 고고학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음색(音色)이나 음향(音響)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에서 경주를 방문한 국왕이 감탄한 것은 손님으로서 인사치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귀국 후, 필자는 경주국립박물관 야외에 따로 설치한 종각에 걸려 있는 범종을 보는 순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찬찬히 범종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왜 스웨덴 국왕은…….’ 범종은 일반 사찰에 있는 범종과 달리 지면(地面)에 가깝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범종 바로 밑바닥이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그걸 보면서, 타종을 하면 종신 내부에서 발생한 음파(音波)가 회오리를 치면서 밖으로 나오고, 그렇게 나온 음파가 옴폭 파인 바닥에서 다시 반향(反響)을 일으켜 특별한 음률(音律)로 이어질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우리나라의 종두(鐘頭) 부위가 중국이나 일본 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육중한 종신을 천장에 매달기 위해서는 용(龍)을 장식한 고리(걸개)가 필요한데, 국내 범종에는 거의 예외 없이 걸개 바로 옆에 음통(音筒)이 있다.
바로 여기에 아름다운 음파의 비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중국과 일본의 종두에는 한결같이 음통이 없기 때문이다. 범종이 내는 음질을 위해 오래전인 7~8세기 통일신라 때 음통을 창안한 우리 선조들의 각별한 창의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신 중간 부위의 직경보다 아랫부분의 하구(下口)가 좁은 것은 몸통 안에서 일어난 음파를 오래 간직하기 위한 구조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우리 범종의 이런 특색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의 차이를 놓치지 않았던 스웨덴 국왕의 뛰어난 감음력(感音力)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조선인들 중 두 번째 해외 나들이를 한 사람은 1888년 미국에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朴定陽, 1841~1905.11) 일행이다. 사절단의 ‘일원’이며 가이드로 수행한 인물이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한국어 이름 안련(安連)이다. 알렌은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개항조약을 맺은 후 1884년 조선에 온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이다.
조선-미국 개항조약에 선교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6조에 ‘조선 개항장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해당 지역에서 건물 또는 토지를 임차하거나 주택 또는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8조에는 ‘언어, 문학, 법률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토지나 주택을 사서 교회 등 문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Foote)는 기독교 박해가 자행된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알렌을 ‘미국 공사관에 속한 무급 의사’로 임명한다.
알렌은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후인 이해 12월 갑신정변에서 개화파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다. 한밤중에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업혀 와서 치료받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극적으로 묘사되는데 이건 픽션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운명적 만남 덕분에 그는 명성황후와 황실의 신임을 듬뿍 받는다. 명성황후는 알렌이 조제한 약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알렌이 감기약을 알약으로 주었다면 그 후 다른 의사가 조제한 가루약은 같은 성분이라도 먹지 않고 알약으로 바꾸어 오라고 할 정도로 알렌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미국인’ 알렌이 구한말 ‘소용돌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것은 숙명처럼 보인다. 그는 1887년 조선정부의 참찬관(參贊官, 오늘날의 서기관) 자격으로 박정양의 미국행을 주선하고 수행하며 1890년에는 미국 외교관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사서 알렌을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1897년 9월에는 공사관 최고위 직인 공사로 승격된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 미국이 한국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하고 본국 정부의 친일-반러시아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테드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국무부와 마찰을 빚어 1905년 3월 해임된다. 연세대는 의료 선교사로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알렌관(Allen Hall)’을 만들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반된다. 조선의 의학 발전과 독립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호의적 평가와, 미국인들을 위해 이권을 얻는 데 급급한 이기적 인물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는 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그의 전기가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1962~1970년 위스콘신 대학 총장을 지낸 역사학자 프레드 해링턴(Fred Harrington)이 쓴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옮기면 이다. 그는 처음엔 선교사로 일했고, 그 다음 조선 왕실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인들의 이권 획득을 도왔으며, 마지막엔 미국 공사로서 일본인들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광린 교수가 로 번역했다.)
그의 전기에서는 조선에 대한 애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종 등 황실과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호감으로 인하여 그를 친한적(親韓的) 인사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믿은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아 이 지역 외교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게 도덕성뿐이었다.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도나 능력이 없었다는 게 정확한 평가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알렌에게 수차례 묻는다. 알렌은 이에 서슴없이 “미국인들에게 광산 이권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아시아에서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평북 운산)은 이렇게 해서 미국회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금광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강제로 이를 매입할 때 미국 외교문서는 ‘운산금광의 매매와 양도는 미국의 선구자적 금광 사업가들이 동양의 미개발된 땅에서 44년간 이익을 남긴 흥미로운 사업을 종결짓는 것’이라는 감동적이며 애수에 찬 논평을 남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나 영국은 고종이 금광만이 아니라 철도, 전차, 전기 등 각종 이권을 ‘팔면서’ 높은 배당금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고종의 비자금은 주로 이를 통해 조성된 것이다.
그는 보고서에서 조선을 부정,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곧 망할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란 이제 옛말이다. 조선은 이제 아침이 지나 춥고 음울한 고요의 땅(the Land of the Cold Grey Calm of the Morning After)이 되어가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自治]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과거와 같이 지배자(overlord, 중국)를 가져야 한다’, ‘고종은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악기를 타는 네로와 같이 궁녀들과 유희나 즐기고 있다’, ‘정부가 바뀌면 천연자원과 잠재성을 가진 국민을 가진 이 나라에 약간의 희망을 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 승리한 나라가 조선을 삼키고,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면서 탐욕스럽고도 비인간적인 관리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간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든 한국은 그 승자에게 먹힐 것이다’. 이것은 알렌 개인의 평가라기보다는 당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일반적인 인식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서양 열강들이 일본의 강제합병에 찬성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의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의사 출신 알렌은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목욕을 하지 않으며 우물물을 소독 없이 식수로 사용하여 선교사들이 이질 등 질병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건 알렌의 편견이라 할 것이다. 기후에 관계없이 매일 목욕을 하는 게 위생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기후가 습하여 목욕을 자주 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조선인은 우물물을 먹어도 이질에 걸리지 않는데 선교사들만 걸린 것은 풍토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를 지닌 인물이 조선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간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 토요일 오후.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서울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한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라 부르기엔 앳된 얼굴을 한 그들의 가운에서 ‘소금회’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20년 넘게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찾는다는 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 중심으로 꾸려진 ‘소금회 대학생 의료 봉사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한다는 소금회 학생들이 흘린 건강한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86년 결성한 소금회는 국가유공자 의대생 자녀들이 부모세대와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의료 봉사단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일반 의료계 전공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학 연합 동아리로 발전했으며, 해외 의료 봉사도 나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봉사단은 크게 진료반(의과대학 학생), 치과반(치과대학과·치위생학과 학생), 간호반(간호대학 학생), 약국반(약학대학 학생)으로 나뉜다. 의과대학은 서울대·연세대·한양대·중앙대·순천향대 학생들이고, 약학대학은 이화여대·숙명여대, 간호대학은 가톨릭대, 치과대학은 연세대, 치위생과는 영동대(永同大) 학생들이다. 재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이기 때문에 평균 연령은 24세 정도로, 대부분 대학교 2학년 때부터 2년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소금회 창단 초기에는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무의촌(無醫村)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했다. 동작종합사회복지관에선 20년 넘게 격주 토요일마다 어르신들의 말벗과 상담, 방문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2003년 당시 소금회 회원들은 태풍 ‘매미’로 인해 전염병이 우려되었던 충북 영동군 상촌면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매년 여름이면 상촌면을 찾아 진료 봉사를 한다.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 국립묘지를 찾은 국가유공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무료 건강 검진과 응급 처치 등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희생을 통해 배운 베풂의 미덕
매년 그들이 하계 진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 상촌면은 병·의원이 한 곳도 없는 의료 취약지이다. 소금회 회원들은 3박 4일 동안 여름날 한낮 태양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다. 지난해부터 소금회를 이끄는 이상원(李相沅·23·한양대학교 의학과 4학년) 회장은 “아직 학생들이기 때문에 병을 완벽히 치료하거나 아픈 것을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겠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조언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정말 기쁩니다”라며 어린 학생들의 작은 손길이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에 일조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많은 소금회 회원이 3박 4일간의 봉사활동을 의미 있게 여긴다.
“우리가 이렇게 뜻깊은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국가유공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부모세대는 우리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이후 한국전쟁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치며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든 고마운 분들이죠. 그들은 자녀 세대가 잘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건실하게 잘 자라고, 남을 위해 베푸는 자세로 국가와 사회 발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위하는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하는 길
공부하고 학과 수업 따라가기 바쁜 의대생에게 주말과 여름방학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달콤한 휴식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사 활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결심을 했더라도 쉬는 날이 되면 침대를 벗어나기 어렵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기 힘든 것이 현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이 회장이다.
“봉사는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하며 그만큼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해요. 자기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힘들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부모님은 항상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치셨어요. 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베푼다는 것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베푼다는 것’이 참 막연했는데, 소금회를 통해 좋은 친구들과 체계적인 방법으로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 있게 된 것 역시 감사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소금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개 부럽다는 반응을 보여요. 봉사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봉사하는 단체와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만큼 의미를 갖고 열심히 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이 회장은 봉사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으로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일단 결심을 했다면, 어떤 단체에서 들어가서 무슨 활동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게 좋아요. 제가 아직 누군가에게 조언할 처지는 아니지만, 또래의 친구들에게 한번 해보면 봉사의 참맛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할 수 있어요. 물론 자신도 챙기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봉사란 그렇게 많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오랫동안
봉사 현장에 나간 소금회 회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고맙다”는 인사다.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이 한마디가 봉사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한 달로 치면 총 7~8시간,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 큰 고마움 선사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짧은 시간이더라도, 내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뿌듯해요.”
지난 30년 동안 묵묵히 어려운 이웃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소금회. 국가유공자 자녀를 중심으로 생겨난 봉사단체인 만큼 매년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에서 뜻깊은 봉사를 한다.
“올해 현충일에는 혈압, 혈당을 측정하고 간단한 건강 상담을 할 예정이에요. 보훈처 직원과 미리 만나 봉사할 내용을 보고하고, 현충원 내에 부스를 지정받아요. 소금회 회원들은 6월 6일 오전에 장비를 설치하고, 현충원 행사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합니다.”
또 다른 활동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이 회장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그동안 걸어온 소금회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고, 회원들의 변함없는 마음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선배들이 활동해온 것 외에 추가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우리가 보는 어르신들, 주민들이 앞으로도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 그리고 미래의 회원이 될 학생들도 소금회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부모세대의 헌신 덕분에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보람과 경험을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어떤 의사들은 좋은 의료기관의 조건으로 ‘의사가 두 명 이상 근무하는 병원’을 꼽는다. 의료기술은 수시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서로 상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족이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다면 어떨까?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가업으로 선택한 곳이 있다면. 그런 가족을 찾아 만난 이가 치과의사인 유영규(劉永奎·77), 유준상(劉準相·41) 부자(父子)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이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있는 서울럭스 치과의원. 이곳에서 만난 아들 유준상 원장이 이야기하는 가업 탄생의 비밀은 다소 의외였다.
“물론 아버지가 권하기도 하셨지만, 스스로 치과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의료선교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의사로서 봉사활동이나 선교활동을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보람이 되고요.”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입학한 곳이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이다. 그곳에 아버지 유영규 이사장이 교수로 있었으니, 아무래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 이사장은 연세대 치대에서 학장과 병원장을 모두 지냈고, 대한치과교정학회 회장도 역임한 교정학계의 거목 중 한 명이다.
“사실 좀 불편한 점도 있긴 했죠. 하지만 동기들이 배려해 준 덕분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부자(父子)지간도 모자라 사제(師弟)지간이라니. 각별한 점이 정말 없었을까? 이에 대해 유영규 이사장은 특별한 것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지내니 마음이 편안한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교정과 교수였고, 아들은 보철 전공을 했으니 학문적으로도 거리가 먼 상태였으니까요. 그래도 아침에 함께 하니 출근길이 외롭지 않아 좋았습니다.(웃음)”
아버지를 따라 같은 전공을 선택할 법도 한데, 치의학 안에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다고 했다.
“의료선교나 봉사활동을 하는 과정에 교정과 출신 아버지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많으셨다고 해요. 교정과는 일반진료와 거리가 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선교활동을 위해 자리를 쉽게 비우려면 개원을 선택하는 것이 나아 보였고, 개원을 위해서라도 일반 진료에서 가장 비중이 큰 보철을 전공하는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유 이사장이 연세대 치대에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아들 유준상 원장은 개원가에서 경험을 쌓았고 지난해 함께 치과를 열게 됐다. 이번엔 사제지간이 동료로 바뀐 것이다. 유 이사장은 함께 진료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호간의 존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전문분야가 다르고,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해 온 사이이기 때문에 아들이나 제자가 아닌 동료로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에서 오래 머물렀던 저에 비해 아들은 개원가에서 경험을 쌓았으니 되레 저보다 나은 부분도 많고요. 때문에 경영의 대부분은 맡겨놓고 제가 의지하고 있습니다. 노후에 아들과 같은 직장에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입니다.”
아들인 유준상 원장은 아버지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했다.
“치과계에서 존경받는 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려울 때,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 상의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은 치과를 운영하는 데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앞으로 유씨 가문의 가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부자 모두 그렇다고 입을 모았다. 단 똑같은 단서를 달았다. 유 원장의 쌍둥이 자매 중 하나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부자 모두 치과의사를 추천하고픈 직업이라고 했다.
유 이사장은 “손주들이 만약 치과의사가 된다면 환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불편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치과의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 말고 특별한 바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