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육상 중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인생의 굽이굽이 한평생과 같다는 말로 이해한다. 인생에 있어서 초년, 중년, 말년이 있다면 마라톤에도 초반전 중반전을 거쳐 마지막 골인지점의 최후의 승부처가 있다. 초반이나 중반에 선두에 서지 못해도 힘을 비축하였다가 마지막 승부처에서 다른 선수를 따돌리고 먼저 들어오는 선수가 우승자다.
인생에 있어서도 노년의 삶이 행복해야 ‘세상구경 잘하고 돌아간다’라고 말할 자격이 된다.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잘살았거나 중년에 떵떵거리며 거들먹거려도 노년에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독거노인으로 지내다 세상을 하직한다면 인생을 잘 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라톤은 긴 거리지만 결국은 속도경기다. 누가 전체의 거리를 빠른 시간에 주파했느냐가 관건이다.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려면 옆 사람과 이야기 하고 주로의 꽃구경을 하다가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다.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초를 아껴야 한다. 사람도 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어느 길을 가야할지 목표 없이 방황하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지거나 어두운 길로 들어서면 노년의 종착지 부근의 삶은 당연히 비극이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100세 시대다. 혼자 만 잘 달려 60세에 일등을 하고 은퇴를 해도 후반전의 40년이 남아있다. 애시 당초부터 죽자 살자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100년의 거리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즐겁게 좌우를 살피고 남을 도와주며 달렸으면 더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에 혼자 빨리만 달려서는 외로운 인생이 된다.
마라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는 경기가 울트라 마라톤이다. 마라톤이 속도경기라면 울트라마라톤은 완주경기다. 오직 정해진 거리의 완주에 목적이 있으니 시합이나 경기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올림픽 경기에도 없다. 우리나라 울트라 마라톤 중 최장의 거리는 전라남도 해남의 땅 끝 마을에서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까지 무려 622km를 달리는 종단코스가 있고 강화도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308km를 주파해야하는 횡단코스도 있다. 하지만 하루에 끝을 볼 수 있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이 일반적이다.
속도경기가 아닌 완주경기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고 동반자다. 옆 사람이 지치거나 다리에 쥐가 나면 부축해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함께 달린다. 긴 시간 달리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도 함께 나눈다. 주로에서 함께 밥도 먹는다. 마라톤경기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휴먼 스토리가 펼쳐진다.
필자는 마라톤 경기에 100여회 출전했다. 멀리 제주도 마라톤 대회도 갔다.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세 번이나 달렸다.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의 실천 장이 바로 울트라 마라톤이다. 울트라 마라톤은 선수보호를 위해 차량통행이 뜸한 한밤에 열린다. 별이 총총한 밤에 소수의 마라토너가 배낭에 음료수와 약간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느리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
소년출세가 인생에서 경계해야할 일인 것처럼 빠른 주법은 울트라마라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달려야 한다. 빠른 속도보다는 방향이 우선이다. 방향이 맞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100세 시대에 가야 할 방향이 정해지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친척친지들과 호흡을 맞춰야 인생이 즐겁다, 서로 도와가며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이야 말로 100세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법이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숨어서 소고기 구어 먹는다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함께 해야 행복이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리차드 3세
일정 2월 6일~3월 4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출연 황정민, 정웅인, 김여진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히는 ‘리차드 3세’는 인간의 비틀린 욕망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10년 만에 연극무대로 복귀한 배우 황정민이 영국판 수양대군으로 불리는 피의 군주 ‘리차드 3세’로 변신해 주목받았다. 몰입도 있는 연기를 위해 황정민을 필두로 김여진, 정웅인, 박지연 등 주연배우를 원 캐스트로 구성한 점도 눈에 띈다.
3월의 눈
일정 2월 7일~3월 11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출연 오현경, 오영수, 손숙, 정영숙 등
손자를 위해 평생을 일구어온 삶의 터전이자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는 ‘장오’와 그의 아내 ‘이순’. 3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집을 떠난다.
올해로 8주년을 맞이한 ‘3월의 눈’은 한국 연극의 산증인인 오현경과 손숙, 오영수와 정영숙이 팀을 이루어 무대에 오른다.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한순간 사라지는 3월의 눈과 같은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일정 2월 9~25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올림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동계올림픽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개막한다.
2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25일까지 17일간 설상 7종목, 빙상 5종목, 슬라이딩 3종목 총 15종목 102경기를 놓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개·폐막식을 비롯한 모든 경기 장면은 TV 중계로 볼 수 있다.
지구: 놀라운 하루
개봉 2월 15일 장르 다큐멘터리, 가족 감독 리처드 데일, 리신 판, 피터 웨버
영국 방송사 BBC가 제작한 초대형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24시간 동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닥터 지바고
일정 2월 27일~5월 7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출연 류정한, 박은태, 조정은, 전미도 등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노래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6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는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간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 역으로 배우 류정한, 박은태가, 그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인 ‘라라’ 역으로 배우 조정은, 전미도가 출연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개봉 2월 28일 장르 판타지, 드라마 감독 히로키 류이치 출연 야마다 료스케, 무라카미 니지로, 칸이치로 등
30여 년 동안 비어 있던 가게에 숨어든 좀도둑 3인조. 32년 전에 쓰인 편지에 장난삼아 보낸 답장이 과거와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일본 인기 추리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키 157cm의 작은 체구, ‘작은 거인’ 심권호(沈權虎·45)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 선수권에서 총 9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으며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그랜드슬램을 48kg, 54kg 두 체급에서 모두 달성했다. 2014년엔 국제레슬링연맹이 선정하는 위대한 선수로 뽑히며 아시아 지역 그레코로만형 선수 중에선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5년 프라하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쥔 심권호. 그는 일찌감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파블로프와 연장 접전 끝에 4대 0으로 승리하면서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조각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는 100번째 메달이자 애틀랜타올림픽의 첫 금메달이었다. 심권호를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끝으로 그가 속한 48kg급이 폐지된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순간에 최경량급이 54kg이 되었다. 기존의 48kg급 선수 대부분은 이때 은퇴했다. 체중을 불려 변경된 체급에 맞춘 선수들은 평소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권호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48kg에서는 독식을 했지만 그가 54kg으로 옮겼을 때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주위에서 다들 못할 거라고 했어요.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네가 되겠어? 48kg에서는 무적이었지만 54kg에서는 어렵지 않겠냐? 은퇴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근데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번 금메달 따본 경험도 있겠다, 나 자신을 믿고 한계에 도전한 거죠.”
변경된 체급에 적응하기까지는 딱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1998년 예블레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시작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9년 타슈켄트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두 체급 그랜드슬램, 새로운 역사를 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로 선발된 심권호는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란 기록을 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위태로운 순간들도 중간중간 있었지만, 역전승과 테크니컬 폴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 결승에서 당시 54kg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라자로 리바스 선수를 만났다.
“아, 까불더라고요.(웃음)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쿠바 코치석은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고 있더라고요. 저희 쪽은 조용히 있었죠. 신체 조건이나 탄력을 딱 봤을 때 차이가 너무 났었으니까요.”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패시브를 얻은 심권호는 리바스를 좌우로 뒤집으며 8점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수비 상황에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략으로 철통 방어를 하며 점수를 지켜냈다.
“원래는 납작하게 배를 바닥에 붙여서 수비하거든요. 리바스 선수가 절 뒤집는 건 쉬웠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손이 들어올 수 없게 겨드랑이를 닫아버린 거죠. 여기서 겨드랑이가 벌어지면 난 죽는다 생각하고 방어했죠. 나중엔 손이 안 들어간다고 막 심판한테 성질을 부리더라고요.(웃음) 그럼 뭐해요. 반칙이 아닌데.”
지금은 룰이 바뀌어 더 이상 경기 중에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당시 심권호는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끝까지 버텨내며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메달이에요.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메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딴 메달이라 특별하죠.”
북한 강용균 선수와의 특별한 인연
“시드니올림픽 결승전에 올라가기 전에 북한의 강용균 선수는 리바스 선수, 저는 강용균 선수의 상대가 될 선수랑 경기했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류를 했어요. ‘얘는 이런 걸 조심해라, 저런걸 조심해라’ 하면서요. 그리고 같이 단상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켰죠. 저는 금메달, 용균이는 동메달.”
심권호에게 강용균 선수는 조금 특별하다. 1997년 체급 조정 당시 48kg 체급에서 두 명의 선수만 선수생활을 이어갔는데 그 두 명이 바로 심권호와 강용균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강용균 선수를 48kg 시절부터 수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친한 형, 동생이 되었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옷을 줬어요. 제가 처음 용균이를 만났을 때 입던 옷을 그때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시드니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용균이를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용돈도 달러로 챙겨주고. 달러는 좋아하면서 미국인은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웃음) 나중에 나이 들어서 기회가 되면 제자들이랑 한번 만나자 이런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부산아시안게임을 이후로 강용균 선수는 지도자의 길로, 심권호 선수는 은퇴하면서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어언 16년이 지났다.
“용균이가 후배들한테 제 얘기를 종종 하나봐요. 국제대회에 가면 난데없이 처음 보는 북한 선수들이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다음엔 감독으로 나온 용균이를 보고 싶네요. 언젠간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웃음)”
세계 최고 레슬링 선수가 되기까지
“열아홉에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서른아홉에 나왔어요.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거의 기계였어요, 기계. 톱니바퀴.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자야 하네? 자고. 20년 동안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요. 심지어 선수촌 밥이 2주 간격으로 비슷하게 나오거든요? 나중엔 식단도 꿰뚫어봤다니깐요.(웃음)”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치아는 마모되고 귀는 터진 혈액이 그대로 굳어 만두 모양으로 변하지만, 선수들은 이를 열심히 훈련해서 생긴 훈장으로 생각한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또 그 당시 심했던 체벌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남모르게 눈물도 훔쳤고 그럴 때마다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가고 그랬어요. 멀쩡한 친척 여럿 죽였죠.(웃음) 평범한 학생들은 방학이나 명절에 다 집에 갈 수 있잖아요. 근데 운동선수들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체육관에서 로프 타고 바벨 드는 걸로도 모자라 360도로 돌리고 있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고 서러웠죠. 태릉선수촌 나올 땐 거기 보면서 오줌도 안 싼다고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악조건(?) 속에서도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레슬러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털 많은 놈, 냄새나는 놈, 오일 바르고 나오는 놈. 아 정말 짜증나요. 특이 오일을 매일 바르는 터키 선수 같은 경우엔 땀이 나면 땀 자체가 미끌거리거든요. 레슬링 특징상 잡고 돌려야 하는데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손이 쏙 빠지니깐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또 털 많은 선수랑 몸을 밀착시키고 경기를 하다 보면 민감한 부위가 찔리기도 하고… 입에도 들어가고 그래요.(웃음) 그리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은 저 멀리서부터 나기 시작하는데 그럼 3분 안에 끝내야겠다 생각하죠.”
몸도 상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온갖 고생 다 했지만 한 번도 레슬러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다.
“당신은 그럼 레슬링 천재입니까?”
“천재요?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그냥 레슬링을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놀다 보니까 어느 한순간 푹 빠져서 계속 놀았던 거예요.”
2018년 새해 아침이 밝아왔다. 며칠 전부터 신년 첫해의 일출을 보러 어디로 갈까 고심을 했다. 작년에는 첫 날 해맞이를 고향의 백운산 정상으로 올랐는데, 불행하게도 구름이 많이 끼어 떠오르는 해를 볼 수는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일출의 장관은 바다에서 불쑥 솟구치는 역동적인 해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여러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올 해는 그냥 송파구 집근처에 있는 올림픽공원에서 가족과 함께 해맞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송파구 해맞이 행사는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망월 봉에서 해마다 열린다.
망월봉은 ‘달맞이 봉’이라는 뜻의 언덕으로, 조선 초기 문인 서거정(徐居正)의 시구(詩句)에도 등장하듯 당시의 선비들이 달맞이를 위해 자주 찾던 곳이다.
올 해는 풍물공연, 희망횃불 길놀이, 모듬북연주, 희망의 노래, 소망의종 타종, 복바구니 터트리기, 해맞이 축가, 부대행사등 다양한 행사로 볼거리도 많고 추억에 남는 해맞이 행사라는 홍보가 있었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아직은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로 나섰다. 집에서 행사장까지는 걸어서 50여분 정도 걸린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운동 삼아 집에서부터 걸어가기로 했다.
어둠을 헤치고 아내와 함께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등에서는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서 손에 손을 잡고 가족끼리 행사장으로 가는 모습이 여간 정겨워보이지 않았다.
특히 잠이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젊은 아빠들과 올해가 무술년(戊戌年) 황금 개띠해라 그런지 누런색의 예쁜 푸들강아지를 데리고 걸어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몽촌토성 입구에 접어드니 어느새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인산인해…….곳곳마다 떠오르는 첫 해맞이를 하려고 너도나도 앞자리로 이동하는 통에 몸은 덩달아 사람들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천막을 치고 봉사자들이 미리 나와 따뜻한 생강차를 준비해 추위를 무릅쓰고 해맞이 행사에 참가하신 분들에게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생강향이 달달하게 풍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들으니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마음까지 훈훈하게 녹여주었다.
행사 진행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새해를 축하하는 모듬북 연주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쏘아올리는 불꽃 축포의 화려한 섬광이 밝아오는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뭐니 뭐니 해도 올해의 화두는 건강인 듯 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했으니 건강이 단연 최고의 소망으로 자리 잡은 듯 하다.
2017년에는 필자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다. 어느 날 불쑥, 시니어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필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왔다. 회사에서 근무 중에 갑자기 급성 뇌경색이 찾아와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울감이 엄습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쯤에는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기상청에서는 서울지역에서 일출시간을 7시 47분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일출이 시작된 시간은 8시가 막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꼬끼오 하는 힘찬 닭 울음소리와 함께 봉우리 위로 손톱 같은 해가 불거지더니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울려 퍼졌다. 나도 붉게 떠오르는 무술년(戊戌年) 첫 해를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우선은 병마를 극복하고 이 시간에 해맞이를 할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감사했다.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낸 대가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해맞이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한편으로는 가족들의 건강이었다.
이제는 미국에서 터 잡아 살고 있는 딸네 가족과 아들이 금년 한 해도 변함없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행사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떡국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걸릴 듯하여 “포기할까?” 생각중에 내 차례가 돌아와 낼름 떡국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오늘 행사중에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떡국맛이었다. 시린손 호호 불어가면서 한 숟가락씩 넘기는 떡국의 맛이 어찌 그리도 좋을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떡국을 먹었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떡국을 나누어 주던 봉사자들에게 무한 감사했다. 이렇게 멋진 일출을 보고 새해 소망도 빌었으니 첫 단추는 잘 채워진 듯하다. 금년에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하게 세상속으로 뛰어들어보자! 그리고 뚜벅뚜벅 나의 길을 걸어가 보련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이번 겨울 들어 롱 코트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일종의 유행이다. 백화점 한정 수량 판매로 밤을 새며 난리를 피웠던 평창 롱 패딩이 유행의 불씨가 된 것 같다. 평소 잘 보이지도 않던 흰색 롱 코트가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 롱 패딩이라고 하는데 사실 평창 롱 코트는 구즈 다운이 들어 있어 패딩 코트가 아니다. 패딩이란 인조 솜을 말한다. 보온력이 다운만큼 높지 않아 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 그런데 내용물에 관계없이 패딩 코트라고 하는데 내용물에 따라 패딩 코트 또는 구즈다운 롱 코트라고 해야 맞다. 평창 구즈 다운 롱 코트를 15만원대에 팔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성비가 높아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물론 평창 동계 올림픽 홍보에 일조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필자가 대표이사로 해외 유명 스포츠 브랜드 사업을 전개할 때 롱 패딩 코트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입고 있던 롱 패딩인데 그 당시 롱 패딩은 국내에 거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카탈로그에 실린 퍼거슨 감독의 롱 코트를 보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긴 했다. 같이 갔던 회장은 이 롱패딩이 한국에 수입되어 들어오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 것이라며 흥분했다. 그 브랜드가 아직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라서 필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1000개를 했다. 그것도 신규 런칭 품목으로 도박이었다. 그런데 돈을 대는 회장은 주문을 늘려 3000장으로 했다. 들여오기만 하면 없어서 못 팔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롱 패딩 코트의 원가는 출발지 가격으로 1만 5000원대였다. 거기에 운임, 관세, 기타 유통비용을 계산하니 9만 원 대가 나왔다. 회장은 가격이 싸다고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싸야 잘 팔린다며 판매가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자신 없다며 올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필자가 해외 출장을 다녀 오니 12만원으로 가격을 올려 놓고 팔고 있었다. 여전히 판매는 부진했다. 필자가 한 번 더 출장을 다녀 오니 가격이 18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필자가 없는 사이에 회장이 지시하여 가격을 올린 것이다. 잘 팔렸다면 좋았겠지만, 판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매 부진의 이유를 가격이 너무 높아서라고 설명했더니 그러면 가격을 다시 내려서 팔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월에 접어 들어 겨울 상품이 팔릴 시기가 지났다. IMF 금융위기를 겪고 재고 상품을 원가 처분할 때 이 롱 패딩 코트를 1만 5000원으로 가격을 매겨 놓았으나 역시 판매가 부진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유행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롱 코트가 잘 팔리는 이유를 분석해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신장이 상당히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년전 롱 패딩을 내놓았을 때는 키도 안 큰 사람이 롱 코트를 입으면 더 작아 보였기 때문에 안 팔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신장에 관한 한 콤플렉스가 없다. 웬만한 서양 외국인보다 작지 않다. 그 당시는 높은 굽의 구두가 유행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인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뒷 굽 없는 플랫 슈즈가 유행이었다.
롱 패딩 코트는 사실 입으면 불편하다. 다리 쪽이 두툼해서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린다. 전철 안에서 자리에 앉을 때 벗지 못하므로 깔고 앉아야 한다. 흰색 롱 코트는 깔고 앉으면서 때가 탈 수 있다. 롱 코트에 달려 있는 모자도 불편하다. 모자가 필요한 경우는 아주 추운 날 얼굴을 감싸는 경우인데 그런 정도의 추위는 많지 않다. 모자 앞 쪽에 털이 달린 경우는 더 불편하다. 모양은 좋을지 몰라도 사실 보온 효과는 별 차이 없다. 입고 있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 위주이다. 양 옆이 잘 안 보이므로 길을 건너거나 할 때 위험하기도 하다. 롱 코트의 용도는 추위에 많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나 맞는다. 주차장 요원, 지하철 봉사요원, 스키장 요원 등 한자리에 고정적으로 외근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입는 옷이다. 그런 옷을 유행이라고 너도나도 입고 다닌다. 패션 면에서 볼 때에도 그리 모양이 좋은 편은 아니다. 바디라인이 다 감춰진다. 무릎 아래까지 오니 아무래도 다른 옷보다 보온 효과가 좋겠지만, 발목은 유행이라고 맨 살로 내놓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발목이 노출되면 더 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행이니까 입는 것 같다. 중고등학생들까지 롱 코트가 유행이니 부모들 주머니 사정이 더 팍팍할 것 같다.
2017년 12월 22일 경강선 KTX가 개통된다.
이 열차로 기존에 서너 시간 걸리던 서울에서 강릉까지 두 시간이 채 안 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22일 경강선 개통에 앞서 미리 시승을 할 기회가 있었다.
며칠 전 내린 흰 눈으로 온 세상이 은빛인 설원을 기차를 타고 달려본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매우 설레고 기대되었다.
정책기자단 26명 기자님들과 같이 떠나게 된 이번 팸투어는 정말 기쁜 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이번 팸투어의 취지는 이제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시간에 안락하고 쾌적한 열차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갈 수 있으니 굳이 숙소를 그곳에 정하지 않아도 평창올림픽을 하루에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올림픽 열리는 곳의 숙박업체에서 폭리를 취하려 해 제재해서 정상으로 돌렸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강릉까지 이렇게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다면 관람하고 싶은 경기를 숙박하지 않고도 하루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오전 10시 50분까지 모이라고 했지만,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일찍 서울역에 도착했다.
모임 장소에 가니 이제는 아주 오랜 친구처럼 친숙해진 기자님들과 여러 관계자분들이 벌써 모여서 반가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11시 반 출발인 열차를 타려는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필자도 좋아하는 멋진 음악그룹으로 ‘외톨이야’를 부른 ‘씨앤블루’의 정용화 씨가 우리랑 같이 줄을 선 것이다.
연예인이어선지 그의 모습에서 빛이 나는 듯했고 친절하게 포즈를 취해 필자 일행과 사진도 찍었다.
평창 홍보대사인 용화 씨는 참 빛나는 잘생긴 청년으로 오늘 경강선 시승식을 같이 떠나게 되어 즐거웠다.
그런데 더 놀란 일은 오늘 시승식을 대통령님과 같이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우리 정책기자단과도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꿈같은 일로 대통령님의 옆 옆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가깝게 대통령 옆에 서서 악수도 하다니 가슴이 뛰고 문재인 대통령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길이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경강선에 오른 기자들은 모두 기분 좋은 분위기로 축제인 듯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리를 잡은 후 점심으로 ‘강원 나물밥도시락’이 제공되었다. 이 도시락은 평창올림픽을 통해 강원 음식문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기회로 삼으려 개발한 영양밥으로 강원도에서 개발한 품종인 오륜쌀과 오륜감자, 특허기술로 만든 참취, 곰취, 곤드레, 어수리와 표고버섯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지만 개선되어야 할 점은 음식이 좀 따뜻하게 제공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뉴스를 보니 대통령도 우리와 같은 도시락을 드셨다고 했다.
창밖의 경치는 지난밤 쏟아진 함박눈으로 온통 은색의 세계였다.
편안한 좌석에 앉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감상하니 어쩐지 시인이라도 된 듯 무언가 시상이 마구 떠오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논스톱으로 달린 경강선은 정말 두 시간을 넘기지 않고 강릉역에 도착했다.
강릉역은 이제 평창올림픽 손님을 맞아 각 경기장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우리 기자단은 안목항의 커피 거리로 갔다.
작년 겨울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 그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집의 예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커피집이라는 산토리노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산토리노 카페 3층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제 경강선 열차로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올 수 있으니 평창 올림픽도 많이 관람하고 또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맛있는 커피도 즐기며 행복한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어 보자.
이어령(李御寧·83) 전 문화부장관은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분이다. 이 시대의 멘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억장치, 외장하드다. 어제 만났더라도 오늘 다시 만나면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그사이 언제 이런 걸 새로 길어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늘 말이 차고 넘친다. 스스로 ‘아직도 비어 있는 두레박’, ‘여전히 늘 목이 마른 두레박’이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새로운 ‘샘’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그를 만나 AI(인공지능)와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과 시니어 세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10월 중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의 대면 대화와 그 뒤의 이메일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관심사인 건강문제부터 질문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종전 그대로 활기차게 말했지만 4년 전 병을 만나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투병이나 치병(治病)이 아니라 병과 함께하는 친병(親病)을 말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신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글을 못 쓰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은 글로 쓸 수 있으니 불행까지도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병은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나면 서양에서는 구술을 많이 하지만 우리말은 논리적 바탕이 약해 말한 걸 풀어놓으면 주술(主述)관계가 안 맞고 비논리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술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는 컴퓨터를 일곱 대나 가지고 있는데 병이 나니 그게 다 소용이 없더군요. 우선 키보드를 치기 힘들고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전자펜으로 필기를 해 텍스트 파일로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조사(助詞)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인데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병이 나자 글도 못 쓰고 구술도 못 하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아무것도 못 쓰니까 병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글을 쓰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나처럼 병으로 시달리지 마시고.”
병의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크군요.
“사람들은 병이 나면 피해요. 피병(避病)이야. 병은 자랑하라지만 실제로는 직장인이건 정치인이건 밝히면 손해니까 속이고 피하지요. 그런데 지병(持病)이라는 말이 있잖아? 휴대전화처럼 병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옛날 선비들의 글을 보면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이렇게 읊거나 답장에 꼭 병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늙고 병든 몸이라는 걸 내세워 정치적 수난을 피하고 정쟁의 위험으로부터 피했어요. 병을 자기 재산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병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당쟁 사화(士禍)가 많았던 시절, 병이 오히려 목숨을 지켜준 일이 많았지요(웃음). 근데 병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내가 건강했더라면 하고 땅을 쳐도 시원찮아. 그런데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거지요.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에 이길 수 없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작품으로 쓰신 게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많이 썼지요. 그런데 다 메모 정도이고 알파고 때문에 쓴 시 하나가 생각나는 군요.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이어령의 근작 시’ 참고)
이사장님은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보시대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거지요?
“은퇴 후 스마트폰을 없앴으면 신문사 전화를 안 받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알파고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봇물 터지듯이 라디오 TV에 나가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은퇴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지만 정보시대에는 은퇴가 불가능합니다.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지요. 그래서 TV, 인터넷, 휴대전화 일체를 일정 기간 플러그 오프하는 것을 정보단식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그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물으면 제대로 읽고 대답할 줄 아는 아이가 반도 안 된다고 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빼앗고 1주일 동안 캠프생활을 하게 한 뒤 같은 테스트를 하면 훨씬 능숙하게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요.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눈 결과죠. 사람의 안면을 보지 않고 화면을 보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찬명(自撰銘) 같은 글을 써놓으신 게 있는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스스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해오셨는데, 요즘 어떤 우물을 찾고 있습니까?
“지금 파고 있는 우물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판 우물은 주로 글로, 펜으로 판 것입니다. 문학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많은 땅에서 우물을 파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야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문학평론가나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무꾼처럼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 전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였지요. 꼬부랑 할머니가 한 고개도 미처 넘기 전에 잠이 들었지요.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길을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듭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팔십이 지난 이제야 그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인인 우리를 낳아주신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힘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바로 보릿고개를 넘고, 나운규와 같이 일제 압박시대에 아리랑고개를 넘고, 전쟁과 가난과 모든 수난의 고개를 넘어온 영웅이었던 것이죠.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현빈(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했듯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지팡이는 미사일이나 원폭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힘이었던 겁니다. 마녀의 요술지팡이도 아니고 신선의 지팡이도, 개화기 때 개화장(開化杖)이라고 했던 서양의 단장도 아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몽둥이가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는 거군요. 신문에도 연재하고 방송에서도 들려줬던 그 글을 마무리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즌1밖에 쓰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를 전부 정리하면 12권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정리 중이지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우물 파기는 알파고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일본, 중국 제쳐놓고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서울 광화문에 와서 전 세계에 AI 시대를 선포했겠습니까. 바둑을 두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알파고는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혁명을 일으키고 자율자동차가 되어 세계 모든 도시의 길을 달리게 될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병실의 환자들 머리맡에,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 전쟁과 테러의 현장이나 폭력의 골목 속에서 알파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되느냐, 또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인류를 도와주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냐 그것이 한국인 손에 달렸다는 거죠.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는 곤봉이 아니기 때문이죠.”
왜 하필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을 떠날 때의 내 마지막 강의가 바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의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리포트까지 받았어요. 그 글은 ABC(Atom, Bio, Chemical) 기술(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화생방 기술이죠)이 21세기에는 GNR(Genome, Nano, Robotics)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인공지능, IT(정보기술)가 이 기술들과 결합되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미국 기업인은 그러한 시대를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 부르면서 2045년이면 천지개벽해서 인간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커즈와일이 바로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AI 분야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문제이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히 바둑권 문화인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을 위한 한국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AI와 4차 산업혁명 등은 아주 중요한 화두이지만 시니어 세대는 낯설고 어려워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생각 혁명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 있었어요.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하는 식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이어 기업에서 물자를 만들 때 컴퓨터를 썼어요.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되고, 기업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을 이루었던 거지요. 그런데 IT를 금융과 연결해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판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와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검색에 매달리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해야겠군요. 시니어 세대일수록 백세건강, 수명연장을 위한 인공지능의 기여에 관심이 높습니다.
“알파고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AI 시대의 의학은 치료 위주에서 병을 미리 가려내주고 발병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방의학, 미리 수술해주는 선제의료, 나아가 개인별 건강을 설계해주는 맞춤의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참 많지만 좋은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입니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습니다. AI가 하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늘 즐겁게 일을 해오셨는데, 그런 자세야말로 은퇴 세대, 시니어 세대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다 좋아서 한 거지요.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장관이라고 해서 했습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먹고 놀면 안 됩니다. 놀면서 먹어야 합니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겁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어령의 근작 시
차멀미가 나면 내리시게.
그게 자동차라면 길 이름 묻지 말고
그게 기차라면 역 이름 알 것 없이
얼른 내리시게나.
그런데 그게 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게 비행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래도 눈 딱 감고 뛰어내리시게나.
바다 속이면 발광어(發光魚)가 되고
하늘이라면 별똥별이 되겠지.
그러나 묻지 마시게.
그게 TV, 인터넷, 정보멀미라면 어쩌시겠나.
옛날 사람들은 ‘사람’멀미가 나면
산림 속으로 숨었지만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으니
황진이의 시조 한 수라도 읊어보시게.
‘나도 몰라 하노라’
일전에 평창 동계올림픽 기념 패딩 구매 파동이 일어났다. 일명 ‘평창 롱패딩’으로 불리기도 하는 물건인데 이를 사기 위해 전날부터 길바닥에서 자는 소동까지 벌어진 것이다. 물론 한정판이고 일종의 기념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고 싶은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도시에 롱패딩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평창 롱패딩이 새로운 유행을 선도한 셈이다.
우리는 유독 유행에 민감하고 명품에 약하다. 하긴 어느 나라나 시기별로 유행하는 패션이 있는데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 남의 눈치를 보는 수준까지 되었다. 자신의 입성에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남의 눈을 의식해 어느 정도 맞춰 입어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주말 가까운 근교 산 입구에 가면 거의 제복 수준으로 등산복을 차려입고 줄을 서 있다.
비단 입는 것만이 아니다. 많은 이가 주도적인 소비보다는 남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 대표적인 것이 ‘후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요즘은 식당 하나를 찾아도 일단 그 집에 대한 후기를 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해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보다 후기가 좋은 식당을 찾게 된다는 게 문제다. 그렇게 낚이고 낭패를 경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가 소문에 민감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산악이 많은 지형의 나라에서 정착성이 강한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살다 보니 다른 지역과 교류가 적은 환경이 고립성을 강화하고 그 결과 공동체 안의 정보가 삶의 중요한 무기와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적 유전인자가 최근의 IT 기술 발달에 힘입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런 우리의 성향을 증폭시키는 데 엄청나게 기여한다. 소위 ‘인증샷’은 남들과 같아지려는 눈물겨운 몸짓이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소외되고 잊힐까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패거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슷한 성향끼리 한데 모여 안도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부류를 왕따시키고 나아가서 그들을 비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패거리 정치도 따지고 보면 개성이나 주관 없이 한데 모인 부류끼리 진영을 형성하고 진실과 관계없이 무조건 한 목소리를 내는 나약한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선진 민주주의가 남들 눈치 안 보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갈수록 전체주의로 퇴행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남들 눈치 보는 문화의 이면에 남에게 강요하기가 있다. 이는 동전의 양면으로 소위 ‘정’이란 말로 포장된 우격다짐이다. 상대가 좋아하는지는 관계없이 내가 좋으면 강요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하는 TV 프로그램에 보면 수산시장 아주머니가 막무가내로 좋은 것이라며 여행객의 입에 산 낙지를 쑤셔 넣는다. 이런 문화적인 심리적 폭력은 '남도 나와 같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끈끈한 정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이라고 대부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정’이 우리 사회 선진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깊은 밤 스마트폰 단톡방에 왜 가족 행사 사진을 올리나요? “전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지금 아는 사람도 정리 중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