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이번 리우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운동경기에서 키가 작은 선수들은 고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태권도에서 가까스로 금메달을 딴 김소희 선수도 상대방이 다리를 반 쯤 접어서 견제하자 들어가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보다 아래쪽에 있다 보니 수비하기 급급해서 점수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고 주의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하마터면 연장에 들어가 금메달을 놓칠 뻔 했다.
사실 필자도 태권도, 유도, 복싱을 배울 때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다. 똑 같이 동시에 팔 다리를 뻗어도 나보다 팔 다리가 긴 상대방의 팔다리가 먼저 내 몸에 닿는다. 특히 타격을 가하는 운동은 팔다리의 길이가 중요하다.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펜싱이 그랬다. 팔다리가 짧은 대신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발도 빠르다면 당할 재간이 없다.
타격을 가하지 않는 유도도 그렇다. 유도를 할 때에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야 하는데 엎어치기 기술을 구사하려면 상대방의 체중이 일단 넘어 와야 그 에너지를 앞쪽으로 쏠리게 하여 업어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가 큰 선수라면 필자가 업어치기를 하려고 상대방을 끌어당겨도 긴 다리가 버티고 있어 상체가 넘어 오지 않는다.
당구를 칠 때도 수구의 위치가 멀리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팔이 닿지 않아 불안한 자세에서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은 허리만 간단히 구부려도 되니 자세가 불안하지 않다.
키가 크면 내려다보기 때문에 잘 보인다. 농구에서 바스켓이 위로 보이면 일단 공을 위로 보내서 중력으로 떨어지는 것을 노려야 하지만 키가 커서 바스켓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대로 꽂으면 된다. 배구에서 공격을 할 때에도 키가 크면 상대방 진영이 다 보인다. 스파이크를 하면 내리꽂는 위력이 더 대단해서 수비하기 어렵다.
공을 멀리 보내는 구기 경기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역시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야구에서 키가 큰 투수가 내리 꽂는 공이 더 위력적이다. 골프에서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키가 큰 사람은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치가 커서 임팩트 또한 크게 작용한다.
이외에도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한 것은 수없이 많다. 우리 선수들이 키 뿐 아니라 체구까지 큰 서양 선수들과 싸울 때 불리한 조건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핸드볼 경기를 보다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의 체구도 많이 좋아졌다. 키도 커지고 체구도 커졌다. 배드민턴이나 유도 경기를 봐도 확연하다.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 선수들보다 오히려 키가 더 큰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큰 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격투기에서는 오히려 큰 키로 엉거주춤 있다가 주의 경고를 받아 경기에서 지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다. 탁구나 배드민턴도 빠청하게 서 있다가 수비 전환이 늦어 점수를 잃는 일도 많았다. 상대방은 키가 작아 큰 키의 우리 선수들을 부러워하는데 전혀 큰 키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는 얘기이다.
올림픽 유도 경기를 볼 때마다 답답하게 느끼는 것이 쇼맨십 부족이다. 이번 리우 올림픽도 마찬가지이고 그전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도 선수들은 세계 선수권대회 등 다른 대회에서 세계 1위 내지는 상위권 순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올림픽에서는 줄줄이 고배를 마시는 것이다.
해설을 맡은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다른 나라 선수들은 세계 상위급인 우리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수없이 보면서 연구했는데 우리는 하위권 선수들 연구가 미흡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분석하기로는 유도 경기 대회가 남자 5분, 여자 4분의 타임 제한 경기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분명히 우리 선수들이 기술은 우위인데도 어설프게 경기를 운영하다가 ‘지도’ 하나로 시간이 다 흘러 그대로 패배하는 일이 너무 많다.
우리 선수가 이긴 시합은 대부분 통쾌한 한 판 승이다. 그러나 우리 선수가 진 시합은 대부분 ‘지도’ 경고 따위의 어이없는 패배인 경우가 많다. ‘지도’ 경고가 아니더라도 ‘유효’나 ‘효과’를 뒤집을만한 효과적인 공격은 못하고 결정적인 한 방만 노리다가 타임 아웃이 되어 그대로 지는 경우도 많다. 한판으로 졌다면 할 말은 없다.
필자도 성장기에 유도를 꽤 오래 배운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승급 심사를 볼 때, 시간제한이 없었다. 기술을 걸어 절반이면 절반이 한 번 더 나오거나 한판승이 되어야 경기가 끝나는 식이었다. 시간제한이 없었다. 지금처럼 서로 상대방의 도복을 거머쥐는데 힘을 빼지도 않았다. 일단 둘이 붙잡을 것 다 붙잡고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한국 선수들의 경기 방식을 보면 너무 뻣뻣하다. 흔히 “몸이 안 풀렸다”고 얘기하는데 경기의 흐름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은 결정적인 기술이 아니면 유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다가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고 ‘지도‘ 경고를 받는다. 그대로 시간이 다 흐르게 되면 ’지도‘ 경고 하나 때문에 지는 것이다. 키가 큰 선수가 뻣뻣하게 서 있으면 더 엉성해 보인다. 키가 작은 선수는 쉼 없이 상대방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려 기술도 걸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되치기의 위험성은 있다. 큰 기술을 걸었다가 안 되더라도 연결동작을 구사해야 하는데 대범하게 손을 놓는 장면도 있었다. 큰 기술을 걸려고 했던 것이므로 안 통하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우리 선수와 대적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은 큰 기술 없이 부지런히 공격 해온다. 시간을 끌기 위한 ‘위장 공격’이라 하여 경고도 받지만, 반면에 우리 선수는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 하여 ‘지도’ 경고를 받기 때문에 실보다 득이 크다. 우리는 잔기술은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잔기술 보다 업어치기 같은 한 판 승을 노린다. 이런 큰 기술은 상대방의 도복을 제대로 잡아야 가능한데 상대방이 잡도록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물론 야구 경기의 홈런처럼 한 방에 전세를 뒤집으면 통쾌하기는 하다. 그러나 큰 기술은 그리 쉽게 통하지 않는다.
우리 유도 대표 팀의 훈련 방식도 시간제한을 엄격히 두고 시간 활용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체력 훈련에 더 해서 알아서 기술 훈련만 열심히 하다 보면 시간제한 방식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남자 5분, 여자 4분이라는 경기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시간 활용도 작전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중동축구가 ‘침대 축구’라 하여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는 조금만 부딪쳐도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으면서 시간을 버는 작전을 말한다. 우리 선수들은 알면서도 그런 짓을 안 한다. 종목은 다르지만, 우리 스포츠맨십에서는 그렇게 경기하면 치사한 것으로 친다. 그러나 시간제한이 있는 경기에서는 적절히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필요하다. 온두라스 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압도적인 공격력을 갖추고도 역습 한 방에 무너지고 고의적인 시간 지연 작전에 말려 그대로 패퇴했다. 안해도 될 불필요한 행동들로 인해서 온두라스 선수들이 '침대 축구'로 시간을 끌 빌미를 주었다. 올림픽정신에 어긋난다는 등 불평해봐야 승부는 이미 끝났다.
올림픽을 위하여 4년간 흘린 땀방울을 생각하면 두뇌플레이도 필요하다. 두뇌 플레이가 쇼맨십이다. 그동안 고생하고 노력한 것을 제대로 보상 받으려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경기를 풀어 나가야 한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우리 선수들은 너무 점잖다. 듬직하지만, 우직하다. 쇼맨십도 작전이다.
8월 5일 막을 올리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축구 대표팀 명단이 지난 6월 27일 발표됐다. 손흥민(토트넘) 등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23세 이하 선수 15명과 와일드카드인 24세 이상 선수 3명 등 18명의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이번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 수비수로 누가 뽑히느냐’는 것이었다. 유력한 후보였던 홍정호는 소속 클럽인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가 차출을 거부해 탈락했고 중국 리그 광저우 푸리에서 뛰고 있는 장현수가 뽑혔다. 신태용 감독의 와일드카드 구상은 2+1(수비수 2+공격수 1)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2(장현수+손흥민 석현준)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열린 올림픽에 축구종목이 있었다면 수비수 김호와 김정남은 나이 제한과 와일드카드 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표 선수로 발탁됐을 것이다. 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수비수 네 명이 일(一)자로 늘어서는 포 백을 쓰고 있는 요즘과 달리 1960~70년대에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자리를 잡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1967년 9월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69년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등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김호는 한국 축구의 수비 버팀목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7cm의 김호가 스토퍼로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170cm의 비교적 작은 키인 김정남이 스위퍼로 나서 상대 공격을 쓸어냈다. 김호-김정남 콤비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 축구가 누리고 있는 월드컵 4강 등 명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호의 이력서는 그의 오랜 축구 인생에 견줘 보면 간략하다. 학력은 더욱 그렇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물론 동래고는 축구 명문이다. 김호곤(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박성화(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최용수(중국 장쑤 쑤닝 감독) 등 우수 선수들이 김호의 뒤를 이었다. 김호의 학력을 내세운 이유는 그가 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축구계에 이러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학연과 지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학벌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OO시에서는 OO고를 나오지 않으면 전자 제품 대리점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 OO협회는 OO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호는 은퇴한 뒤 국가 대표팀이든 단일팀이든 어느 팀을 맡아도 학연 지연 등과 관련한 뒷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그랬다. 김호는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제일모직은 뿌리를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의 명문 구단인 수원 삼성의 할아버지쯤 된다. 삼성그룹 계열이다. 이 무렵 실업 축구는 군 축구의 대표격이던 방첩대가 해체되면서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등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실업 정상권 팀에 들어갔으니 김호는 요즘으로 치면 특급 고졸 신인이었다.
김호는 은퇴한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호는 지도자로서도 이력서가 간략하다. 동래고와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 등 지휘한 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팀에서 최소 3년 이상 지휘봉을 잡았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는 얘기다.
김호의 고향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우수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호도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린이 김호가 더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다. 두룡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축구로 60년 축구 인생을 살게 됐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 틈에 끼어 통영시 초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6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했고 김호가 통영중학교에 진학한 뒤 후배들이 3년 연속 우승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그 우승기가 여전히 모교에 있다고 한다. 통영은 우수한 축구 선수가 많이 나온 고장이니 초등학교부 3연속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유소년들이 그랬듯이 김호도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김호는 10대 초반에 들었던 라디오 중계방송 내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무렵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축구를 잘했다.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자유중국에 2-3으로 졌다. 그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김호가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은 경기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이었다. 1950년대 자유중국에도 밀리던 한국 축구는 뒷날 김호가 국가 대표로 뛰게 됐을 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을 8-0으로 이기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김호는 통영중학교~동래고를 거치면서 축구 선수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뛰어난 수비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호도 학창 시절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신세대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레프트 인사이드 등으로 뛰면서 동래고 시절에는 그 무렵 전국 최강인 서울 동북고를 2-0으로 꺾기도 했다.
김호는 1965년 처음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때, 이제는 50년 지기가 된 김정남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남이 레프트백과 하프백을 오갔고 김호는 라이트백이었다. 그때 국가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는 둘의 선배인 김정석이 있었다. 둘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에 나란히 입단하면서 김용식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에 의해 중앙 수비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김호-김정남 콤비의 출발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
일본 엄마들은 정말로 사람을 만나면 항상 웃는 얼굴에 상냥한 마음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거기에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표정들이다. 어떤 말이 흘러나올까 몹시 궁금해지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물론 가식적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에게 본인들이 우호적임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보인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의 일본 얘기들은 내가 살았던 1982년부터 ‘88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릴 때까지의 실 경험들에 준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느꼈던 얘기들이다. 정말 언제 만나도 자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각자 미묘하게 다른 표정의 미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해 주는 엄마들이다.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언제나 그 얼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목소리 톤을 가다듬어서 얘기를 시작한다. 그런 것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재미있다.
우선 만나면 무엇인가 상대방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말을 순간 포착하거나 아예 외출하면서 준비를 해 오는 거 같다. 순간적으로 건네는 말들은 ‘오 이 머플러 정말 멋져요. 김상이 아니라면 이런 감각을 표현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는 등의 차림에 대해 진심어린 말을 해 주는 것들이다. 준비해 오는 멘트로 생각되어 지는 것은 ‘저번에 만났을 때...’ 로 시작되는 나는 기억에서 지워진 걸 멋지게 기억나게 해 주는 인사말이다. 암튼 상대방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기분 좋은 말을 시험지를 받고 정답을 척 내 놓는 자신만만한 아이처럼 해 주는 기술들을 연마해서 장인의 수준이 되어 있다고 느꼈다. 들은 말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다가 그만 선수는 언제나 뺏기고 말았다. 별 것도 아닌 단어들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해 가며 칭찬에 속하는 말들을 잘하는 도사 급들인 것이다. ‘아라, 오늘 날씨에 완전 잘 어울리는 블라우스! 김상의 패션 감각은 우아합니다!!’ 또 뺏겼구나, 왜 그런 거지? 하며 생각을 해 보지만 그렇게 잽쌀 수가 없다는 답만... 어느 환경에서도 순간 포착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데,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좋음을 정말 가치 있게 사용할 줄 안다고나 할까? 그런 게 습관이 안 되어 있으면 가능 할까?가 답인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오면서 연습을 엄청 많이 했을 테니까요. 칭찬 받는 것을 어느 누구나 좋아하지만 우리는 약간은 남에게 입 발린 말은 잘 못하겠다는 국민성이 있는 거 같거든요. 내 맘에 안 들면 거북해서 목구멍 까지는 나왔어도 입 밖으로 말로 되어 나오는 데는 아주 힘이 들고 어려운 갖가지 생각들과 망설임과 부끄러움, 자존심... 등등... 그네들은 말을 안 하면 나를 상대방이 어떻게 알겠느냐며! 내 마음이 그런 게 아닌데도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데, 왜 똑똑하게 나를 어필시키는데 시간을 버리느냐며 그러면 안 된다고 합니다.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고 나를 표현하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일에 자존심을 앞세우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주 작은 눈썰미를 발휘해서 상대방에게 좋은 감정을 심어주는 인사를 하면서 만나면 그 하루가 아주 유쾌해지고 즐거워진다고. 그러다 보면 서로 깊은 우정도 쌓아갈 수 있다면서 습관을 잘 들여가며 살아야 한다고 말 해 줍니다. 다 옳은 말인데도 어려서부터 살아 온 습관에 배어 있어서 인지 어렵긴 합니다. 노력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제 우리 엄마들도 밝은 인사를 잘 나누고는 있다고 보입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유익하고도 위트가 섞인 칭찬들을 생각날 적마다 마음 갈피에 잘 새겨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나 틀에 박힌 말을 인사와 함께 듣게 되는 건 너무나도 성의 없이 들리기도 하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아 듣는 순간 감동도 없으니까요. 상대방의 마음을 스쳐갈 수 있는 기쁨과 황홀감이 그 순간을 최고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인사말을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봅시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장마는 사라지고 연일 태양이 작열한다. 열대야로 잠을 재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뒤척일 수 있어 그런대로 길고 더운 여름밤을 버텨낼 수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거실 구석에 하나 서 있고 안방 벽에 하나 걸려있지만 몇 년 째 가동한 적이 없다. 전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여름엔 땀을 흘려야 된다는 논리로 가동을 못하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워낙 필자의 고집이 강경하므로 다들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 모두 어이없어 한다.
어제 부모님 댁에 들어서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층 연립주택에 사시는데 앞뒤 동 간격이 좁고 저층이라 집안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긴 했지만 엄청 더웠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두 분이 더위로 고생하시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더니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드시고 나서 근처 중랑천 변 그늘로 가신다고 했다. 그곳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오전시간을 보내신 후 오후에는 복지관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저녁까지 지내시다가 들어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피서를 하고 계셨다. 그것은 ‘무료 전철피서’ 아주 긴 노선을 택해서 하루 종일 시원한 전철 여행을 하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 혼자 하는 여행은 다음과 같다.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랑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수원에 도착하면 인천 행으로 갈아타고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소래포구 시장 구경을 하고 인근 다리 밑 그늘에서 쉬고 도시락을 드신다. 다리 밑에는 의자를 많이 설치 해 두어서 편하고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가실 때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온양까지 가신다고 했다. 온양 온천에는 전국에서 모여 든 노인들이 점령했다고 한다. 온천 후 점심 드시고 시장 구경도 하시고 느긋하게 전철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하루 여행으로는 제격이고 가고 오는 동안 시원한 전철에서 피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가끔 복지관 친구 두 분과 전철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일산에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일단 종로3가에서 모인다. 오전 열시쯤 만나서 서울 역으로 이동한다. 서울 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인천 계양까지 가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원인재 역에서 오이도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다가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시장에서 우럭 두 마리를 구입해서 식당에 가져가면 매운탕을 끓여준다. 막걸리 한 병 놓고 식사하신 후 시장 구경하고 노선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1인당 회비는 이만 원인데 몇 천원이 남는다고 한다.
전철피서의 하이라이트는 춘천 행 열차를 타는 것. 춘천 역에 내리면 인근에 닭갈비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에는 닭갈비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고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유명한 박사동네, 소양강 처녀동상, 소양호를 두루 구경한다. 구경 후에는 춘천 역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서비스가 공짜란다. 단, 일행이 여섯 명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그래서 춘천에 가실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간다고 하셨다.
65세 이상에게 제공되는 전철 무료서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교통비 부담 없이 시원한 피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인들의 정신과 육체건강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브라질 리우올림픽 한국 선수단 법률 담당 변호사로 제프리 존스 전문 변호사를 선수단 공식임원으로 대동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대단히 잘한 조치라고 본다.
올림픽 같은 큰 국제 스포츠 행사는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애매하거나 억울한 판정 또는 오심도 잦다. 얼핏 돌아봐도 지난 올림픽 중 펜싱 선수가 1초 판정에 진 일, 핸드볼 경기에서 역시 경기 종료 시간 지연 때문에 억울하게 진 일, 쇼트 트랙 경기에서 상대방이 허리우드 액션을 해서 억울하게 가해자가 되어 실격된 일 등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선수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억울해 했었다.
4년간 피와 땀을 흘리며 준비해온 기량을 오심으로 억울한 판정을 받는다는 것은 선수 당사자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는다. 체력이 한창 때이므로 대부분의 선수들은 다음 기회를 다시 얻기 어렵다. 진작 그렇게 했어야 했다. 억울한 판정을 받을 때마다 우리 코치들이 격렬하게 항의해 봤지만, 목소리가 크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늘 피해자였고 판정을 뒤집지도 못했다.
이런 것은 보이지 않는 국가 경쟁력 및 스포츠 외교력의 영향도 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효과적이고 논리적인 항의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우리 코치들은 흥분해서 격렬한 항의를 하지만 그럴수록 오심은 자기 방어적이 된다.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항의 제기도 시한이 있어서 현장에서 바로 해야 효과가 크다. 나중에 뒷북쳐 봐야 한번 내린 판정을 뒤집은 예도 없다. 앞으로는 고정적으로 전문 변호사를 대동한다는 원칙을 세워서 유지해야 한다.
한국 팀에는 전문 변호사가 늘 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선수단에 쏟은 지원금 규모나 선수단 총원 규모로 볼 때에도 전문 변호사 대동은 당연한 조치이다.
건설회사 재직 시절 중동에서 근무할 때 영국인 직원들을 몇 명 고용한 적이 있다. 원래는 외국 발주 원청사와 한국 회사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것이었는데 여러 나라의 여러 회사들이 공동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분쟁도 잦다보니 일거리가 늘어나서 더 뽑은 것이다. 정작 이들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 뿐 아니라 각종 클레임 등 처리에서 더 빛을 보았다. 매일 아침 영문으로 작성된 공문이 수북하게 쌓이니 다 읽어보기도 힘겨웠다. 그냥 있으면 동의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되니 부당한 것에는 반드시 답을 해야 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흥분부터 하지만 그들은 논리 정연하게 대처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와는 대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다음으로는,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므로 존재 가치가 있었다. 백인에게는 백인이 백인 방식으로 맞서게 해야 효과가 크다는 것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