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식품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발효 식품의 종주국이라고 할 만큼 예로부터 발효 식품을 많이 먹었고, 한의학에서도 발효 약재를 많이 사용해왔다. 식품을 발효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비위가 안 좋다, 비위가 약하다’는 말에서 비위(脾胃)는 한의학 용어로 소화기관이다. 위(胃)는 음식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고, 비(脾)는 음식을 삭혀서 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삭혀서 소화된 것은 소장에서 흡수된다. 소화가 안 된다는 것은 음식을 받아들이고 삭히는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발효 식품은 삭힌 음식이기 때문에 비위가 해야 할 기능, 즉 소화를 도와준다. 또 위장이 다 삭히지 못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덩어리, 종양, 근종 같은 것도 발효 식품이 삭혀준다. 이러한 이유로 김치, 된장, 청국장 등을 항암 식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술은 사람의 침으로 발효시키기도 한다. 침 속의 아밀라아제는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한다. 결국 소화효소와 발효는 같은 개념이며, 발효는 소화를 돕는다. 단식 후 위장이 가장 약할 때 묽은 된장국이나 일본식 전통 된장국인 미소시루부터 복용한다. 비위의 소화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다.
박테리아, 곰팡이에 의해 발효가 진행되면 몸에 좋은 성분이 새로 만들어지고 몸에 흡수되기 좋도록 변한다.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도 우유보다 소화가 잘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발효 식품으로 알고 먹는 것은 전통 천연 발효 식품과는 다르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제빵 장인인 리처드 부르동(Richard Bour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연 발효는 박테리아와 이스트(yeast, 酵母)의 복합체로 이루어진다. 박테리아는 반죽 속의 탄수화물과 질긴 글루텐을 완전히 분해하고, 곡물 속의 좋은 무기물을 추출해 우리 몸이 흡수하기 좋게 만들어준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존해온 천연 발효 식품에서는 소화 문제나 건강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도입된 이스트 속성 발효는 단기간에 많은 소화 문제, 건강 문제를 야기했다. 이스트로 속성 발효시켜 만든 빵은 소화하기 힘들고 침이 나오지 않아서 콜라나 우유 같은 마실 것을 찾게 된다. 하지만 천연 발효로 잘 구워진 빵은 씹을수록 단맛이 나고 입에 침이 고인다.”
프랑스 제빵 장인인 미셸 이자르(Michel Izard)는 “천연 발효 빵은 미생물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발효 물질이 생성돼 향이 특히 깊다. 약간 시큼한 듯한 냄새도 난다. 빵 속은 희지만 약간 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했다. 그래서 천연 발효 빵을 주식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발효 식품이 발달한 나라다. 술, 식초, 청국장,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젓갈 등 다양한 발효 식품이 있다. 콩 발효 식품이 특히 발달해서 메주, 된장, 간장, 청국장이 개발되었다.
술은 뜨겁고 향이 강하다. 약 기운을 전신에 운행시켜 온갖 사기(邪氣)와 나쁘고 독한 기운을 없애 혈맥을 통하게 하고, 소화기관을 도우며, 피부를 윤기 있게 만든다. 술은 소화를 도와주기에 술 없이 먹으면 한 끼밖에 못 먹을 음식을 술과 함께 먹으면
1차, 2차, 3차, 4차까지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식초는 따뜻하고 시큼하다. 시큼한 맛이 강해서 염산, 황산처럼 뭉친 것, 종양 등을 뚫고 녹인다. 산후에 피를 많이 흘려서 생긴 빈혈을 치료하고 목 아픈 것을 치료한다. 물고기, 고기, 채소의 독도 풀어준다. 정기신혈(精·氣·神·血)을 수렴해 장수하게 한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콜라가 그렇듯 식초도 살과 오장, 뼈를 손상시킨다. 그렇다고 모든 식초의 신맛이 강한 것은 아니다. 발사믹식초, 흑초, 홍초는 강한 신맛이 아니고 오히려 끝 맛이 달며 입에 침이 고이고 한다.
청국장은 콩을 짧은 기간(며칠)에 발효시킨 음식이다. 향이 강하고 차갑다. 땀을 내어 관절을 편안하게 해주고 독에 중독된 것을 풀어준다. 청국장은 비위와 콩팥 기능을 강화하는 효능이 있다. 가슴이 뭉쳐서 답답하고 열이 나는 것을 풀어주고 변비와 설사에도 좋다. 콩을 피부에 문지르면 열을 내려준다. 우리나라의 청국장은 일본의 낫토(納豆) 같은 식품이다.
된장은 오랜 기간(몇 달 또는 몇 년)에 걸쳐 발효된 식품이다. 콩의 기본 성질은 해독력에 있다. 한약의 성분까지 해독해버리기 때문에 한약을 복용할 때는 콩 섭취를 조심하는 것이 좋다. 발효된 콩은 소화를 돕기 때문에 오장(五臟)을 안정시킨다.
간장은 된장을 담글 때 만들어지는 장이다. 소금이 들어가서 매우 짜다. 벌레에 물렸을 때 간장을 피부에 바르면 해독이 된다. 해독력이 있는 콩이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다. 변비가 있을 때 간장으로 관장을 하면 도움이 된다.
김치는 종류가 무척 많아서 그 효능을 한 가지로 말하기 힘들다. 에는 “배추를 시큼하게 발효시키면 위장의 담연(痰延)을 토하게 할 수 있고 비위를 보하며, 술이나 국수의 독을 풀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소화를 잘되게 해서 몸에 독소가 쌓이는 것을 막아준다는 의미다. 천연 발효를 시킨 김치는 유산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끝 맛이 달아 침을 잘 나오게 해줘 소화를 도와준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
건강한 시니어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 또는 활동력을 활용하여 봉사활동에 나서기를 사회에서 부추긴다. 은퇴 후 허전함을 채워주고 자긍심도 올려주는데 수익성 일이 아니라면 공부와 봉사활동이 한 몫을 한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은 신체 움직임을 통해 본인의 건강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3조다 그러나 봉사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여서는 안 된다.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올려주셨다.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장에 간식으로 먹으라고 주최 측에서 넉넉히 빵과 우유, 차 등을 준비하였다. 체면상 나중에 먹으려 한 사람들 몇 분은 없어서 먹지 못했다. 중간에 몇 분들이 더 가져다 가방에 넣어버린 것이다. 더러는 친구 몫이라고 가져가 자기 가방에 챙긴다. 다음날 주최 측에서 친구 몫 챙기지 말고 자기 것만 가져가라는 주의가 주어졌다. 그래도 모자람은 여전했다. 결국은 일일이 빵 하나, 우유 하나씩을 나누어주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교육장이 되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욕심을 양심의 무게로 억눌러야 한다. 이곳저곳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면 욕심이 양심을 이기는 분들을 아주 많이 본다. 이런 분들은 봉사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봉사활동으로 남에게 빵과 우유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분이 남이 안보다고 자기 것처럼 자기 가방에 먼저 챙긴다면 그에게 보내던 찬사와 박수가 허망해 진다.
봉사활동시간에 자주 늦는 사람, 입으로는 일을 잘 할 것 같이 말하면서도 막상 현장에서는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가 먹을 때는 귀신처럼 나타나는 사람. 동장이나 기관장이 올 때는 앞에 나서서 설레발치다가도 봉사자끼리만 남으면 노골적으로 단체에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봉사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봉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못 마땅하다. 필자가 봉사활동을 하는 치매센터의 예를 들면 치매 환자의 특성이나 대처 방법을 모르고 어영부영 시간 때우기로 일관하는 봉사자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봉사활동 몇 년을 해도 쓰레기나 줍고 청소나 하는 단순 노동자 수준에서 맴돈다. 봉사 시간에 걸맞게 고급 봉사자가 되도록 자기 발전을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책도 보면서 공부를 하여 그 방면에서는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봉사활동은 결코 시간 때우기 식의 심심풀이용 땅콩이 아니다. 우선은 봉사 활동할 마음자세 즉 심성이 아름다운 사람이 해야 한다. 다음으로 내가 봉사활동 할 대상이 정해지면 겸허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봉사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여서는 안 된다.
아들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느리가 급성 맹장염이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아이 셋을 당장 맡길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는 아들네는 요즘 보기 드물게 아이가 셋이다. 맨 위의 손녀가 7세이고 그 밑에 4세 손자와 2세 손녀가 있다. 하나같이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급한 김에 수원에 살고 있는 딸한테 전화를 했다. 딸은 전업주부이기는 하지만 돌이 갓 지난 아들이 하나 있다. 움직이려니 기저귀, 우유병 등 짐이 한 짐이고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다.
아이들의 할머니인 필자의 아내는 몇 달 전 새로 얻은 직장에 나가고 있는데 몇 사람이 서로 팀을 짜서 일을 하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불똥은 필자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필자도 직장에 나가야 해서 손주들을 돌보려면 휴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아들은 필자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지 믿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아내가 회사 눈총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전철로 이동을 하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집도 또래의 아이 셋을 둔 가정이란다, 동병상련이라고 사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 같다. 며칠 뒤 그 집 아이 셋과 우리 손주 셋이 함께 생활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꼭 어린이집 같은 분위기라서 안도감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들이 휴가를 내고 아내 간호도 하고 틈틈이 집에 와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을 해야 한다. 아들이 집을 비우고 병원에 가는 시간에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틈새관리를 해줄 것이다. 맹장염 수술법이 발전해 예전처럼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3일은 걸릴 텐데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승낙해주신 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도시의 현대인들은 거미줄처럼 꽉 짜인 스케줄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도와줄 일가친척이 멀리 떨어져 살면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예전에 없던 산후조리원이 생겨나고 간병인, 요양보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전에는 이런 일들을 모두 가족들이 해줬다.
도시인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을 겪다 보니 친한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들보다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닥치기도 한다. 가까운 이웃을 가까이 알아두는 것은 마치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우리 반 학생들은 매우 오래 사신 분들이다. 평균 연령이 72세 정도이니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학생들이다. 이분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열심히 듣는 과목은 영어다. 왜냐하면, 필자가 그분들께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목표는 입시나 공시가 아니다. 오로지 ‘배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진도도 없고 시험도 없다.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멋진 세계여행을 설계하고 계신다. 그래서 강의 내용도 여행에 써먹을 만한 표현들을 많이 다룬다.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그분들의 빛나는 눈동자는 상상여행 중임을 증명한다.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낡은 피부는 홍조를 띠고 어조는 들뜬다. 마치 고목에 새싹이 돋듯 교실 안은 생기로 가득 찬다.
아, 상상! 그렇다.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다람쥐가 한여름 더위도 잊고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 모아 보관해둔 곳을 겨울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듯 우리도 상상이라는 풍요한 창고의 존재를 잊고 현실에 찌들어 산다.
상상의 즐거움을 일깨운 공로로 상상여행을 안내한 가이드에 대한 감사의 팁이 심심치 않게 답지한다. 연희 할머니는 채소 담당이다. 마당에서 키운 고소한 상추를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갖다 주신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야 한다. 정순 할머니는 장류 담당이다. 가끔 된장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오신다. 손수 담그신 귀한 된장은 그야말로 ‘금된장’이다. 그 맛이 놀랍게 맛있어 식구들이 그 할머니 된장만 기다린다. 유난히 조용하고 태가 고운 소원 할머니는 마늘 담당이다. 가끔 마늘을 갈아 한 통씩 가져다주신다.
그러고 보니 모두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이다. 옛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반장 주도하에 학생들이 돌아가며 아침마다 교탁에 놓았던 커피 우유, 오렌지 주스 따위들에 비하면 얼마나 정감이 넘치고 영양가 풍부한가! 역시 연륜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청일점 남학생은 명문대 출신이다. 사실 대졸 출신이 들을 만한 강의는 아닌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몸이 불편하면서도 보행기에 의지해 매번 열심히 출석하신다. 가벼운 영어회화나 가르치는 복지관 강의에 이분들이 이토록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배우면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일까? 어쩌면 배움이란 인간 생명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이 들면서 낡아가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진다. 모험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육중한 메타세쿼이아가 세월이라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듯이 오랜 시간 쌓여온 삶의 무게가 도전의 의지를 누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반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생기를 마주하고 있으면 상상이라는 작은 모험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볼 수 있다.
몇 달 전부터 소원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 못 사실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이다. 할머니께서는 그동안 새로움에 대한 열정과 상상여행 속에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확신한다. 마늘을 찧을 때마다 소원 할머니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일본에서 건강한 노인들이 대대로 많이 살아 장수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다양한 건강보조식품의 개발 등에 힘입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이들 장수촌의 특징 또한 ‘백세인생’의 중요한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다. 건강한 노후야말로 ‘백세인생’을 즐길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의료기술과 건강보조식품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백세인생’의 힌트를 일본의 대표적인 장수촌에서 찾아보자.
지난 2010년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전국 평균수명에 따르면, 남성은 나가노현 마쓰카와촌(長野県 松川村)이 82.2세, 여성은 오키나와현 기타나카구스쿠촌(沖縄県 北中城村)이 89세로 집계됐다. 톱 30을 살펴보면 남성은 나가노현이 40% 넘게 차지했고, 여성은 오키나와현이 20%를 웃돌았다. 특히 나가노현은 2013년 발표에서도 남녀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남성은 나가노현, 여성은 오키나와현
장수 요인에 대해서는 고령자의 높은 취업률, 지역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신토불이 식생활, 전국 2위의 온천 숫자, 주민과 밀착된 지역의료 등이 언급됐지만, 안티에이징 연구의 1인자인 시라사와 다쿠지(白澤卓二) 교수가 나가노현 북부의 산골인 다카야마촌(高山村)을 집중 조사한 결과가 흥미롭다.
시라사와 교수는 장수의 비결로 식사, 운동, 보람 등 3가지를 꼽으면서, 다카야마촌의 고령자들은 그 지역의 야채와 과일, 면역력을 높이는 된장 등 발효식품을 중심으로 한 옛날 식생활을 계속 지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전형적인 산골이라 마을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65세 이상의 고령자 대부분이 건강하게 일하고 있어 일이 삶에 대한 보람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이밖에도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야마다(山田) 온천을 비롯해 다카야마촌에는 온천이 여덟 군데나 있어 온천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온천욕을 하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칼로리 소비를 촉진해 신진대사의 기능이 활발해진다. 온천 성분에 따라 효능이 달라지지만, 야마다 온천의 유황천은 모세혈관을 넓혀 혈압을 낮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온천은 몸뿐만 아니라 기분도 편안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스트레스와 함께 늘어나는 아밀라아제와 같은 물질을 크게 감소시킨다는 결과도 보고됐다.
오키나와 장수마을, 오기미촌
오키나와에서 자주 쓰는 ‘하라하치부(腹八分)’라는 말이 있다. 즉 식사를 할 때 전체 포만감(飽滿感) 중 80% 정도 만족할 때까지만 먹고 배가 부르기 전에 수저를 놓는다는 의미다. 칼로리 섭취를 제한하는 식습관을 가진 오키나와 주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기미촌의 노인들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문화·전통 예능이다. 나무들이 우거져 푸른 숲을 이루고 찬연한 빛을 쏟아내는 태양, 맑은 공기와 맑은 물 등 천혜의 자연 속에서 지내는 유유자적한 삶을 꼽을 수 있다. 서두르지도, 무리하지도 않으면서 느긋하게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낙원의 시간’이야말로 자랑할 만한 장수 비결이다.
둘째, 오기미촌 사람은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식생활과 비교할 때 육류를 많이 섭취하고, 녹황색 채소의 섭취량이 3배가량 많으며, 두부와 같은 콩류 섭취도 1.5배 많고, 과일 종류도 많이 섭취한다. 또 주목할 만한 점은 소금 섭취량이다. 일본 후생성이 권장하는 1인 1일 소금 섭취량은 10g인데 오기미촌은 그 목표 이하인 9g밖에 안 되는 지역으로 보고됐다.
셋째, 활발한 사회활동이다. 오키나와의 온난한 기후는 1년 내내 야외활동을 가능하도록 해주는데, 현재 오기미촌의 총인구는 약 3500명이지만, 이 중 90세가 넘는 장수 노인은 80명이나 된다. 이 마을의 노인들은 ‘살아 숨 쉬는 한 현역’이라는 의식이 강해 고령자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밭일을 하거나 마을의 전통 산업인 파초포의 실을 뽑는 등 노동을 하며 마을 행사, 봉사활동과 같은 사회활동도 열심히 한다.
넷째, ‘상부상조(유이마루, ゆいまる)’의 정신이 뿌리 깊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유이마루’란 간단하게 말하면 마을 사람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며 서로 돕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사탕수수 수확, 모내기 등의 농사일뿐만 아니라, 집 신축이나 무덤 공사, 마을 공공사업과 같은 봉사활동 등을 포함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품앗이 정신과도 통한다.
다섯째, 게이트볼과 노래방을 즐긴다. 마을 곳곳에 마련된 게이트볼 경기장에는 날씨만 좋으면 많은 사람이 모여 해질녘까지 지치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또한 노래방에서도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 사람이 많다. 고독하게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장수촌의 몰락, 타산지석으로
야마나시현(山梨県) 유주리하라촌(棡原村)은 1968년 도호쿠대학 교수와 의사 등 전문가들에 의해 ‘일본 제일의 장수촌’이라고 불린 뒤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평지가 적고 경사진 산비탈을 이용한 밭일을 주로 했고 식생활은 고기와 생선, 보리와 잡곡, 마, 콩, 야채 등을 주식으로 했다. 노인들은 80세, 90세가 넘어도 원기왕성하게 밭에 나가 일을 했는데, 장내 세균을 조사한 결과 비피더스균은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웰치균은 적어 아주 건강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허리와 다리가 건강한 덕분에 심폐기능도 활발한 상태를 유지, 심장병과 뇌졸중 등 생활 습관병 환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암으로 죽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제일의 장수촌 마을은 점점 그 명성을 잃어갔다. 1953년 널찍한 도로가 개통되면서 이 도로를 통해 풍부한 물자들이 마을로 들어왔는데 당연히 그 물자 중에는 고기와 생선 등의 식재료들도 있었고, 전통적인 거친 식사는 서구형 식생활로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80~90대 노인들은 전통적인 먹거리로 식생활을 이어갔지만, 그 자식들인 50~60대들은 거친 밥상보다는 부드러운 밥상을 선호했고 우유, 빵, 햄, 요구르트, 컵라면, 과자 등 서구형 식생활에 익숙해져갔다. 그 결과 젊은 세대들은 점차 비만, 고혈압, 당뇨병 등 생활습관병에 걸렸으며,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자식들도 많아졌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의 장례를 치루는 기현상 속에 장수촌의 존재감도 사망선고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stick to it≫이란 책은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이 쓴 책이다. 애경그룹은 작은 비누회사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항공, 화학, 유통 등으로 발전했다. ‘stick to it’의 뜻은 ‘분발하다’, ‘힘 내!, 포기하지 마!‘라는 뜻이다.
새 정부가 내각에 여성을 대거 등용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왜 여성이 등용되어야 하는지 이 책을 읽어 보면 도움이 된다. 장 회장은 흔히 얘기하는 금수저도 아니다. 집이 가난하여 대학에도 가기 어려웠으나 극적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무사히 졸업하고 이제는 도움을 줬던 미국 대학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장영신 회장은 1936년생으로 1970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애경그룹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전에 경영자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대학시절에도 화학을 전공했으므로 경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집에서 아이나 키우며 살림하던 여자였다. 장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설 무렵에는 여성 경영인이 드물 때였다. 철저히 남성 위주의 기득권 세력이 우리나라 경영을 좌지우지할 때였다. 심지어 애경 그룹 내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여자가 경영 일선에 나선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장회장은 개척자 적인 정신으로 여성 경영인의 길을 걸었다. 단순직을 하는 여사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룹을 통솔하는 그룹 회장의 길을 걸었다. 회사 일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보니 몰래 회계학원에 다니면서 회사 일을 배우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는 남자들과 경쟁하고 밖으로는 남자 우위의 사회에서 남자 대 여자로서 싸우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서 성공했다.
가장 힘든 일이 접대 문화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접대는 술을 따라 다니므로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 위주이다 보니 술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여성 회장이기에 여성다운 발상으로 애경을 성장시키기도 했다. 저자극성 우유비누를 출시한 일이라든지, 화장을 지우는 클렌징으로 화장품 업계에 뛰어 든 일 등은 여성 회장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장회장은 같은 여성들에게도 여러 가지 충고를 했다. 대체로 여성들은 쉬운 일만 하려고 한다든지, 그러다가 승진 때가 되면 차별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일, 책임감 없이 직무에 임하는 자세 등에 대해 고쳐야 할 점으로 지적했다. 혼자 일하려거나 짜증을 부리는 행위 등 남자 사원 다루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좋은 충고를 했다.
요즘은 맞벌이가 당연한 일이고 여성도 남성과 똑 같이 경쟁한다. 결혼 전 입사했다가 적당히 쉬운 일만 하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하던 시절이 아니다. 다시 복직해서 고위직을 향해 퇴직 때까지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남자에게 지지 말아야 한다. ‘남자처럼 생각하고 여자처럼 일하라’는 말이 와 닿는다. 외국어 하나는 확실히 해두라는 말도 중요하다. 석유파동 때 침몰해가던 회사를 영어 덕분에 정공법으로 미국 회사에 찾아 가 활로를 찾은 일은 영어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페리에, 씨그램, 트레비. 이름만 들었을 땐 ‘이게 어떤 음료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들은 모두 탄산수 브랜드. 탄산수는 당분, 색소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지만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올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줄 탄산수 활용 음료를 소개한다.
깔라만시 스파클링 모히토
재료 깔라만시, 애플민트, 탄산수
비타민C가 풍부해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불리는 깔라만시. 강한 신맛이 특징이다.
1. 애플민트 적당량을 으깬다.
2. 깔라만시 반쪽을 잘라 즙을 내주고
설탕(1큰술)과 함께 섞는다.
3. 유리컵에 위의 재료를 넣고 탄산수를 부어 얼음과 함께 잘 저어준다.
Tip 깔라만시가 너무 실 경우 오렌지 또는 라임으로 대체할 수 있다.
스파클링 과일 펀치
재료 수박, 딸기, 사과, 오렌지, 파인애플 등 과일, 우유, 탄산수
여러 가지 과일을 같이 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1. 과일을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2. 과일과 함께 우유 2, 탄산수 1의 비율로 섞는다.
Tip 냉동실에 살짝 얼리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저알콜 맥주
재료 맥주, 레몬, 탄산수
맥주는 먹고 싶은데 취하면 안 된다! 탄산수로 탄산은 살리고 알코올 도수는 낮출 수 있다.
1. 도수를 낮추고 싶은 만큼 탄산수를 넣고 맥주와 잘 섞는다.
2. 레몬 슬라이스를 넣어 레몬 향을 더해준다.
Tip 맥주는 그냥 맥주가 맛있는 법. 정말 맥주가 마시고 싶다면 우선 일을 빨리 끝내고 마시도록 하자.
홍초 스파클링
재료 홍초(청정원), 탄산수
식초를 부드럽게 먹을 수 있도록 과실로 만든 홍초는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올여름 홍초 스파클링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해보자.
1. 홍초 1, 탄산수 5의 비율로 섞어준다.
Tip 홍초는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블루베리, 복분자, 석류 등 다양한 맛이 있다.
스파클링 매실 주스
재료 매실액, 탄산수
매실은 식사 후에 먹으면 소화를 돕는다. 청량감을 더해주는 탄산수와 함께 먹으면 일석이조!
1. 매실액(2큰술)을 얼음과 함께 유리잔에 넣는다.
2. 탄산수를 적당량 넣어 시원해질 때까지 잘 저어준다.
Tip 과실 원액이 없다면 마트에서 파는 에이드 가루를 사용한다.
“아시시에 살고 싶어요. 거긴 천국 같아요. 아시시나 토디 근처에 새집을 장만할까 합니다.” 영국의 글램 록 가수의 대명사인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자신이 지상에서 본 천국은 아시시”라고 말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도시를 찾았을 때의 첫 느낌은 분명코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
아시시(Assisi)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시에나(Sienna) 숙소에서 만난 남미계 미국인 신디아(38세)와 동행한다. 그녀는 3개월간 혼자 여행 중이다. 시에나에서 아시시까지는 매우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버스,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는 아시시 간이역(1866년 개통)에 내린다. 메인 타운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타운. 스바지오 산 언덕 위에 오롯이 모여 있는 아시시를 보고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리, 너무 아름답다. 시에나보다 나은걸.” 표정이 풍부한 신디아는 아시시의 첫 느낌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로 버스가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정류장에서 성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숙소가 서로 다른 신디아와는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 북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켈트어로 ‘산봉우리’라는 뜻)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1000년경, 움브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했고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됐다.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오래된 가옥, 울퉁불퉁한 골목길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성 프란치스코 출생지, 코무네 광장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난 신디아와 함께 도심을 걷는다. 클라라 성당을 비껴 키에사 누오바 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1615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생기기 두 해 전(1613년), 프란치스코의 생가는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이걸 본 스페인인 ‘비카’는 자국의 펠리페 3세(1578~1621) 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교회를 지었다.
성당 앞쪽에는 성인의 부모님 동상이 있고 성당 안쪽에는 성인이 갇히게 된 감옥이 있다. 성인은 이곳에 갇혀 신의 부름에 답하고 고행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온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코무네 광장이다. 로마의 흔적들이 남은 곳으로 사자상 분수대가 눈길을 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고 그 옆에 포로 로마노 박물관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박물관에서는 부서진 로마의 유적과 함께 폼페이에서 본 똑같은 스타일의 벽화를 봤다. 199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리라.
‘빈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남쪽 끝에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있다. 수도복 입은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거리를 누빈다. 수도사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유럽 전역에서 ‘아시시’ 하면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부유한 직물 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두 번째 군 입대 후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스스로 ‘빈자의 성자’ 삶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최소한의 먹거리를 직접 구하며 청빈한 초막생활, 영성적 삶을 시작한다. 무수한 일을 해냈고 여러 번의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까지 얻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의 작은 오두막에서 84세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에서는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눈길을 끌었고,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해온 대성당 수도원이 특별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앞 정원 쪽으로 올라오면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페루지아 전쟁터에 나갔던 23세의 청년 프란치스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날을 표현해낸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은 해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성 클라라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해걸음을 벗 삼아 신디아와 저녁을 먹는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신디아. 그녀가 “수도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길래, 난 일언지하에 “싫어. 평생 싱글로 사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말했더니, 한국어로 숫총각은 뭐라 말하느냐고 묻는다. ‘동정남’이라고 말해줬더니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흉내를 낸다. “그러면 너넨 뭐라고 말하니?”라고 물었더니 남녀 상관없이 ‘버진(virgin)’이란다. 그녀는 아시시에서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른 아침, 로마로 가서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 그녀를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해준다.
길을 거슬러 처음 만났던 산타 키아라 성당(1257~1265년에 건축) 앞에 선다. 멋진 건축물이다. 이 성당엔 성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클라라(Clara, 1193~1253)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는 꼭 가보고 싶다는 신디아의 뒤를 따른다. 가는 길목에 루피노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과 종탑 앞 아치형 건물 사이에 클라라 생가가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제자가 됐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 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60세)에 죽음을 맞았다. 클라라의 삶을 되새기면서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서서평(1880~1934) 미국 출신 여성 선교사가 떠올라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아시시 ‘뷰포인트’ 로카 마조레 요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는 아시시의 북동쪽,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골목과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신디아는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해” 하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발코니에 걸린 꽃 화분을 보며 감탄을 연발한다. 성곽 일부에만 서치 조명이 아름다운 요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디아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다음 날, 일찍 요새에 올라 박물관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아시시 마을과 움브리아 전원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은 평원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에 넋을 놓는다. 더 작은 요새인 미노레 성채의 남은 흔적도 찾아낸다. 성곽 안에는 유명 인물의 연보와 중세의 물건들, 음악회, 연극이 열렸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시시를 떠나 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찾아가 포르치운콜라 예배당을 본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한 여행객일 뿐인데도, 이 도시는 발길을 부여잡는다. “아직 넌 볼 것도 할 것도 많아”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Travel Data
현지 교통 정보 로마에서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테르미니 역에서 하루 네 번(토요일 3회) 직행 열차가 운행된다. 약 2시간이 소요되며 환승을 하면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또 로마 티부르티나 역 광장에도 버스(7시, 10시 30분)가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1회(8시 15분) 운행된다.
아시시 박물관 카드 로카 마조레 외에 두 군데의 박물관을 더 볼 수 있는 ‘아시시 티켓’이 있다.
맛집 정보
타운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고 매일매일 색다른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다. 빵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애피타이저 브루스케타가 깔끔하다. 호텔 추천 레스토랑은 할인이 가능하다. 길거리 음식인 파니니 등도 맛있다.
숙박 정보 아시시에는 호텔, B&B, 게스트하우스가 부지기수로 많다. 개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또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델 질리오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다.
어탭터 정보 다른 지역과 달리 3핀 어탭터가 꼭 필요하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타운 숍에서 구입 가능하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아시시 시내만 보게 된다면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천천히 순례지(Eremo della Carceri, San Damiano) 등을 찾아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또 아시시 주변의 페루지아(Perugia), 아멜리아(Amelia), 나미(Nami), 토디(Todi), 오르비에토(Orvieto), 구알도타디노(Gualdo Tadino), 구비오(Gubbio),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시에나를 거쳐 토스카나까지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탈리아는 한 달 여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에 빨간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처음 생겼을 땐 산뜻한 빨강으로 깨끗했는데 요즘은 바로 옆에 생긴 쓰레기통 때문인지 좀 어둡고 지저분해 보여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편지를 넣는 사람이 드무니 더욱 쓸쓸해 보이는 우체통이다.
어떤 사람은 쓰레기를 넣기도 하고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어 안의 편지에 얼룩을 남기기도 하는 몰상식한 일도 벌어진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편지는 언제나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아련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고 보낼 곳을 적어 우체통에 넣을 때는 가슴이 떨린다.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문자를 사용하게 된 후부터 손편지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지만, 예전엔 필자도 이 우체통에 종종 편지를 넣어보았다.
애절한 연애편지는 아니어도 대전에 계신 외삼촌께 안부편지를 보낸다거나 모처럼 친한 친구에게 장난처럼, 그리고 잘 되지는 않았지만, 작년 어떤 단체에 이력서를 보낼 때 이용했다.
우표가 잘 붙었는지 확인하고 몇 번씩 쓰다듬으며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체통 속에 편지를 밀어 넣을 때의 기분은 두근두근 설렘이다.
젊었을 때의 편지는 달콤한 러브레터가 주를 이룬다.
어른이 되어 받은 첫 편지는 대학 새내기가 된 어느 날 생애 처음으로 단체 미팅을 한 필자 파트너로부터 받은 것이다.
유능한 우리 과대표 덕에 대학생이 되자마자 첫 미팅을 할 수 있었다.
신촌의 어떤 큰 다방 2층에서 테이블을 길게 연결하고 우유에 커피를 진하게 탄 밀크커피 한잔과 함께 연대 수학과 학생들과 30여 명이 단체로 만났다.
파트너는 필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학교로 편지나 엽서를 보내왔다.
단체미팅이어서 우리 과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교내 우편함에서 “편지 왔다.”하며 친구들이 필자의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편지를 받으니 친구들이 좋겠다며 부러워했을 때 좀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편지는 그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도 했던 소통의 수단이었다.
전달해야 할 편지가 너무 적으니 무용지물이라 우체통을 없애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도 있었지만 아직은 버스정류장에 건재한 우리 동네 빨간 우체통이 고맙기만 하다.
요즘 전국 곳곳에 느린 우체국이 생겼다는 소식이다.
느린 우체국은 빠름을 중요시하는 현대에 기다림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에서 추억을 기념할 장소에 설치한 우체통이라 한다.
우체통이 위치한 곳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엽서나 직접 가져온 우편물에 사연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6개월이나 1년 뒤 적어놓은 주소로 배달된다는데 우정사업국에서 운영하는 정식우체통은 아니지만, 그 기능이 독특해 사람들이 벌써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한다.
전국 곳곳의 지자체에서 느린 우체통을 운영하는 이유는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남겨 다시 찾아오게 하자는 취지가 있다.
여행지에서 그때의 감정을 담아 자신에게 쓸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누구에게라도 부칠 수 있으니 진솔하게 쓴 편지를 1년 후 받아 볼 수 있다는 건 의미가 깊을 것이다.
빠른 것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태에 오늘 쓰고 1년 후 받아보는 느린 우체통의 존재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고 소중한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느림보 우체통에 파이팅을 보낸다.
필자는 지금도 명동을 좋아한다. 젊었을 때 필자의 메카는 명동이었다. 명동은 대학 시절 학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는 종로와 광화문이 좋아서 많이 쏘다녔다. 6명의 친구가 모여 만든 클럽 ‘디지 걸’이라는 모임도 있었다. ‘dizzy’는 어지럽다, 아찔하다는 뜻인데 깜찍한 친구들이 ‘우리는 아찔하게 멋진 애들’이라는 의미로 의견을 모아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긴 해도 즐거웠던 시절이다.
광화문에는 학생들에게 유명한 제과점이 있었다. 2층 벽이 낙서와 사인으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던 제과점이었다. 우리도 그 벽 한쪽에 6명의 이름과 ‘디지 걸’이라는 사인을 해놓았다. 그 6명의 ‘디지 걸’은 다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고 보고 싶다.
나는 음악 듣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규모가 큰 다방들이 많았는데 신청곡을 적어 DJ 박스에 넣으면 그 음악을 틀어주곤 했다. 그럴 때 나지막하고 약간 느끼한 목소리의 DJ가 “어디에서 오신 누구의 신청곡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우리들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지금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금란다방도 즐겨 찾았던 곳이다. 종로통의 쎄시봉, 디세네, 르네상스, 종로에서 무교동 쪽에 있던 DJ 이종환의 쉘부르도 자주 갔다. 명동으로 가는 길 골목에 있는 로방도 운치 있었다. 지금도 명동에 들어서면 분위기 있던 ‘목신의 오후’에서의 차 한 잔이 그립다.
명동 예술극장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 예술극장이 금융 건물로 바뀌는 바람에 허전하고 아쉬웠는데 다행히 얼마 전 예술극장으로 다시 돌아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명동 제일의 번화가인 명동 사거리 코너에는 잊지 못할 추억의 청자다방이 있었다. 예술극장 건너편에 있던 이 다방은 규모가 엄청 커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 넓은 공간에 마련된 좌석들이 보였고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역시 넓은 공간이 있었다. 필자는 친구들과 주로 이곳에서 만났는데 늘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청자다방이 생기기 전 이곳은 ‘시라노’라는 미니백화점이었다. 3, 4층의 건물에서 중저가의 물건을 팔던 이 백화점은 당시에도 유명했던 음악가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씨의 어머니가 경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청자다방은 명동 안쪽의 심지다방과 더불어 큰 다방의 대명사였다. 한껏 겉멋이 들어 있던 우리 친구들은 사보이호텔 골목 안쪽에 있는 ‘화이어 버드’라는 곳에서 커피 값보다 두 배는 비싼 ‘슬로우 진’, ‘스쿠르 드라이버’, ‘카카오’ 등 달콤한 음료들을 사 마시고 다녔다. 어지간히 폼생폼사 잘난 척을 하고 다닌 것 같다.
명동 또 다른 골목의 2층에 있던 ‘이사벨라’라는 다방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가팔랐던 ‘엔젤’도 지금은 모두 없어져 그리운 곳이다. 미도파백화점 옆 건물에 있던 ‘포시즌’도 생각난다. 그곳에 가수 정미조씨가 나와 ‘개여울’과 팝송을 라이브로 감미롭게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정미조씨를 보고 예쁘다고 해서 한판 싸움을 벌였던 남자 친구도 생각난다.
음악은 모든 장르를 좋아했다. ‘딥 퍼플’, ‘산타나’, ‘소니 앤 쉐어’ 등의 노래를 즐겼고 ‘스모크 온 더 워터’ 같은 곡은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이런 팝송이나 샹송, 칸초네 외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클래식을 들으러 음악 감상실에서 엄청 많은 시간을 보냈다. 클래식 감상실은 종로의 르네상스가 유명했다. 내가 자주 갔던 곳은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있던 ‘필하모니’라는 클래식 전용 음악 감상실이었다. 다른 다방과 달리 대화를 할 수 없고 조용히 음악 감상만 해야 했다. 음료수를 들고 감상실 안으로 들어가면 극장처럼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고 무대 쪽엔 음악명이 쓰인 보면대가 놓여 있었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이곳에 몰려와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있곤 했다. 필자도 조용히 앉아 우유나 콜라를 마시며 잘 알지도 못하지만 열심히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요즘도 한 달에 몇 번씩은 그냥 명동에 나간다. 여전히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거리의 풍경도 바뀌고 추억의 장소도 없어졌지만 명동에 대한 필자의 그리움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