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계획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게 여행이다. 한동안 집안에 우환이 있어 마음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국외 가족여행을 제의했다. 한 달여 전부터 아들과 며느리는 열심히 여행지를 알아보고 예약하는 등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예쁜 손녀 손자와 함께여서 더욱 설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그러나 젊은 시절과 달리 아기들 데리고 다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아들이 어렸을 땐 한 손으로 번쩍 안고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기를 잠시 안고 있어도 힘에 부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필자에겐 국내, 국외여행을 함께하는 친구 삼총사가 있다. 필자와 달리 그 친구들은 평소 일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일본 정도는 자유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여행사의 패키지를 선호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과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유여행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가이드를 따라 하는 여행은 일단 여행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그 나라의 어디를 보아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등을 전혀 고민할 필요 없이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는데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여행한 나라의 볼 만한 곳과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어 항상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루 세 번 식사를 해결해주니 가보고 싶은 유명한 맛집을 따로 경험할 수 없어 아쉽다는 점이다.
자유여행은 어디라도 가고 싶은 대로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도 고를 수 있어 좋지만 항공권부터 숙소와 여행 장소까지 알아서 정해야 하니 번거롭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어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이번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갈 것인지 물으니까 아기들이 어려서 패키지는 무리란다. 여행지는 일본이고 여러모로 알아보니 오키나와가 비행시간도 2시간 정도로 짧고 아이들 놀기에 적합한 휴양지라 한다. 벌써 저희끼리 3박 4일의 일정도 다 짜놓아서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했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시니어들도 대부분 고만한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므로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선택할 경우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알려드리면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쓴다.
며느리는 다섯 살 손녀와 17개월 된 손자 때문에 무엇보다 숙소가 편해야 한다며 오키나와 중부쯤에 있는 바닷가의 멋진 호텔 몬테레이를 선택했다. 1박에 40만원이었다. 비행기는 아시아나로 어른 셋에 아기 둘 포함 100만원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내리면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여행 동안 이용하는 데 26만원, 반환하면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300km 정도를 다녔고 3만원어치 주유를 해서 반납했으니 쇼핑과 식사를 제외한 여행 기본 비용은 250만원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은 뷔페나 일본 가정식을 골라먹을 수 있어 점심과 저녁만 사먹으면 된다. 미리 검색해간 유명 음식점을 빼놓지 않고 다녀볼 수 있어 좋았다. 이 모든 예약을 며느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참 편리하기도 하고 스마트폰 기능을 잘 아는 며느리가 대견스럽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일본은 모두들 알다시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필자도 한 번 운전해보고 싶었지만 국제면허가 없어 아쉬웠다. 평소 운전을 잘하는 시니어라면 국제면허를 꼭 따서 오른쪽 운전으로 차를 달려보는 이색적인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10월의 막바지여서 한낮의 태양은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론 좀 춥다고 느껴지는데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어서 지금도 기온이 30도를 넘는 한여름이다. 이렇게 미리 계획한 대로 즐겁고 행복한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미국에도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같은 것으로, 소셜 넘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고, 은행구좌 및 생활 모든 곳에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가 있다.
예전에는 비자가 없어도 그나마 쉽게 발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로는 아주 어려운 과제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로 적법하게 비자를 만들었다면, 그다음으로 행하는 것이 소셜 국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번호를 받아 평생 사용을 한다. 미국 내에서는 그 넘버 하나면 다 통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물론 코리아 타운이 아닌 외곽지역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한인타운의 많은 한인들이 영어가 안되니, 겁이 나서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인들은 코리아 타운 외곽 도로인 프리 웨이로 운전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더구나 비자가 없어 많은 한인들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없으니, 무면허 자들도 가끔은 있었다. 물론 불법체류자가 대다수인 멕시코인들은 거의가 무면허자 들이었다.
필자는 어렵사리 위대한 비자를 받았으니 바로 소셜 국으로 달려갔다. 지역마다 여기저기 있었으나, 그나마 영어가 부족한 것에 위안을 삼아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소셜 국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어찌나 많은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은 늘 그렇다고 했다. 밖에서 두어 시간을 지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번호표를 빼어 들었다. 실내에도 온갖 인종들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갖가지 묘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유난히 많은 멕시코인과 흑인들, 그리고 간혹 털이 덥수룩한 무슬림 계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독한 향수 냄새를 온몸에 품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야릇한 향수 냄새는 그 또한 미국의 문화였다.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모두들 아주 천천히 일을 했다.
공무원들이 손톱은 기다랗게 붙여져 있고, 몸은 비대할 대로 뚱뚱해서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급할 것이 없었다. 한국이 빨리 빨 리가 대명사라면, 미국인들은 너무 느리고 근무가 태만한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은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내심으로 기다려야만 미국의 일상적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서 너 시가 지나서야 겨우 필자의 이름이 마이크를 통해 호명이 되었다. 두껍게 무장을 한 투명 유리 사이로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곳에다 대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영어로 단답형 질문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딘가 모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상이 좋지 않은, 각양각색 인종들의 집합 소에서, 강하고 지독한 냄새의 분위기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간단한 질문과 함께,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접수증을 받았다. 소셜 번호가 담긴 카드는 약 보름 후에나 집으로 메일에 의해 온다고 했다. 온종일을 긴장감으로 기다리며 아주 힘들게 받아낸 소셜 번호 접수증, 그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있어야만 미국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식으로 운전면허증을 딸 수가 있고 비즈니스도 떳떳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길게 안도의 한숨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속도를 내며 프리웨이를 달려갔다.
낯선 땅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와 축하를 해주었다. 지루한 하루에 몸은 지쳤으나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제아무리 힘든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하나 또 얻어 가는 것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녁에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LA 코리아 타운으로 다시 나가, 조선 갈비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미국 내에 전쟁이 났다. 현대 미국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나라에 종교적 갈등까지 겹친 것이다. 그 이후 미국은 서서히 변화를 몰아오고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이다. 아침부터 돌아가는 세탁소 기계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필자는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한국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모닝커피로 정신을 가다듬을 즘에 이상한 방송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옆집으로 달려가 텔레비전을 보았다. 엄청난 사고가 나라를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TV에서 비쳐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혼 줄이 나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거대한 두 대의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해,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향해 부셔댔다. 대형 비행기가 높다란 빌딩에 마구 충돌을 했다. 순식간에 100여 층의 높은 빌딩이 화염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놀라서 거리를 마구 방황하고 있었다.
건물에는 하얀 수건을 흔들어 구조 요청을 하는 사람들, 살기 위한 희망으로 뛰어내리는 사람, 어마어마한 화염 속에서 호흡곤란으로 몸부림을 치는 모습은 참혹한 아우성이었다. 하루아침에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얼마 후 높다란 초고층 빌딩이 거대한 흙가루와 함께 삽시간에 그림처럼 무너져 내려왔다.
아마도 누군가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공격임에 틀림이 없었다. 약 3천 명의 애매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거대한 미국은 순식간에 내란의 전쟁공포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일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필자 부부는 솔직히 황당하고 뭐가 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상상을 초월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경기의 침체와 국력 쇠퇴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절망적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필자와 남편은 무엇보다 당장 가게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도 9.11사태가 몰고 온 정신적 충격은 미국인들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안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손님들은 발길이 끊겼고, 어쩌다 오는 손님들도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필자 부부도 어설프기는 했지만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뉴욕시장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공항에는 이착륙이 금지되었다. 항공기 납치범들이 무슬림 테러단체인 '알카에다'라는 반미 단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테러리스트가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비호 아래 은둔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그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결국 미국은 군사적 행동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필자의 옆집에는 이란 사람이 하는 이란 마켓이었다. 당연히 필자의 손님들중에는 이란인이 있었고 모두가 무슬림교도 들이었다.
미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으로, 이란인들은 외출을 삼가며 정부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가게 매출도 점차 줄어들었다. 더구나 미국의 친 이스라엘 중동정책에 반발과 불만으로 비롯된 것이므로 미국에 대한 또 다른 테러 시도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미국은 응징의 대가로 악의 축이라는 이름 하에 전면적 군사작전을 시도했다. 그 여파로 자동차 가스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서민경제는 점점 바닥을 쳐갔다. 국내적으로도 모든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대작전이 시작되고, 끝내 공항에서는 검문검색이 강화가 되어 전면적인 감시 체제를 돌입했다.
외국인들의 미국 입국과 이민에 대한 조치도 강력하게 행해졌다. 우선 미국으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필자의 비자 취득에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그전에 조금 느슨했던 이민정책도 더욱 까다로워져, 운전면허증도 쉽사리 얻을 수가 없었다. 졸지에 닥쳐온 이민법의 강화가 필자의 비자 해결을 어렵게 만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때보다 몇 배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사실상 전쟁은 승리로 끝이 났지만, 손해를 보는 지루한 전쟁이었다. 어쩌면 테러와의 전쟁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세계 경제력과 군사력의 절반을 호령했던, 그 옛날의 미국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다.
필자도 신분 문제를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미국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권이 몇 개나 된다. 예전에는 5년마다 새로 갱신을 해야 했다. 이제는 두툼해진 10년짜리 여권이 몇십 년은 쓸 것 같다. 미국에 입국하려면 반드시 비자가 필요했다. 더구나 그곳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분 유지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10년짜리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는 언제나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필자는 미리 받은 비자가 있어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 수가 있었고, 큰딸아이도 카이스트 학생 신분으로 무난히 비자를 받아냈다. 문제는 막 초등학교를 마친 작은 아이가 비자가 없으니 골치가 아팠다.
IMF가 터지고 남편은 이미 미국으로 출국했고, 필자 혼자 미성년자의 도도한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필자의 교수 신분으로 어렵사리 만들 수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여행을 위한 6개월 여행비자로 무작정 미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 이민을 위한 확실한 신분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행비자는 6개월간 유효하고, 한 번 더 6개월 연장이 가능했다. 문제는 그 후부터가 된다. 미국에서 살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신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운전면허는 없어도 불편하지만 살 수가 있으나, 비자가 없는 신분은 곧 서류 미비자인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여 범법자가 된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드는 이민의 나라인 만큼, 신분을 위한 비자 종류나 취득방법은 아주 다양했다.
필자는 입국하고, 제일 먼저 이민 변호사를 만났다. 신분 없이 이민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의 첫 공식 행사이다. 저마다 처지가 다르니 개개인에 따라 비자 방향도 달라진다. 여행객 신분에서 3개월 지난 후에야 비로소 E2비자를 신청하기로 했다. E2란 비즈니스(사업) 비자다. 세탁소를 하기 위해서는 빨리 필요했지만, 오자마자 너무 일찍 서두르면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
미국으로 잠시 여행을 왔다가 사업을 하고 싶어졌다는 타당성을 만들어, 합리적으로만 허락을 받기로 했다. 미국인들은 이치에 맞는 합리성을 대단히 중시한다. 반드시 입국 기간도 2개월 이상은 되어야 했다. 2~3개월이 지난 후에 마땅한 비즈니스를 물색해서 일정한 금액 투자를 하면 비로소 거주와 사업권을 얻어내는 투자 사업비자가 나온다. 투자 이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얻기 쉬운 것은 여행비자로 들어가 미국 내에서 취득하는 F1(학생) 비자가 있다. 무조건 들어가서 미국 내에서 학생비자를 만드는 것이다. 제일 빠르고 무난하게, 학교만 선정하면 비자는 쉽게 해결된다. 한인타운에는 직접 알아서 해주는 학교들도 많다. 이 또한 여러 꼼수가 있으나 사기성이 다분히 있고, 단점은 공항 출입국을 못하니 한국을 왕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꼼짝없이 공부 끝날 때까지는 미국 내에서만 있어야 하니, 숨통이 막힌다.
어쩌다 생각 없이, 한국이 그리워 무작정 나오면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같은 미국 땅이라도 여권이 필수인 공항 통과는 두렵기만 해서 타 주 여행도 아예 금기시 되어 있다. 아무리 멋진 유학 생활이라도 오도 가도 못하는 생활은 꽁꽁 묶인 열린 감옥살이 삶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달러를 적게 들이고 가장 쉽게 한다는 생각으로 당장은 국내 학생비자를 선호했다.
말이 그렇지, 비싼 학비와 출석률 관리가 보통 일이 아니다. 죽으라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은 그렇다 해도, 임시방편의 거주 목적으로 학생비자를 취득한 일반인들에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어 서류 미비자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한인타운, 즉 LA 코리아타운에는 한인 서류 미비자가 전체 한인 중에 약 50%나 된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물론 돈이 많아, 한국에서 미리 유학생 비자를 받으면 문제는 덜하다. 한국 왕래도 자유롭고 공부하는 동안 비자 유지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마다 입학 전 거액의 보증금이 필요하고 사립학교 학비가 하늘을 찌른다. 공립학교도 그 지역 주민이 아니면 약 3배 정도, 유학생은 대략 10배가 된다. 자본주의가 막강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꿈도 꿀 수가 없다.
E2(사업) 비자도 처음부터 한국에서 얻어오면 영주권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아닌 국외에서 얻는 비자는 언제고 출입국이 자유롭다. 그러나 투자 금액이 미국 내에서보다 세 배 이상은 많아야 한다. 국내에서 10만 달러(약 1억1334만 원) 이면 한국에서는 보통 35만 달러 이상이라야 한다. 더구나 어떤 사업에 어떻게 투자를 하는지 몰라 사기 맞기가 일쑤다. 한국에서 E2비자 취득이란 쉽지도 않지만, 절대 만만치가 않았다.
의심이 많은 한국인에게 선호 대상은 그나마 확실한 미국 내 사업비자였다. 조금 살아보면서 취득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래도 사기를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운이 좋으면 투자금액이 아주 작은 5만 달러에도 E2비자를 받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 왕래가 제한되고, 2년마다 갱신을 해야 하므로 연장을 위해서는 착실한 영업관리가 요구된다. 또한 조건이 있다. 2명의 영주권자 종업원을 써서 고용 창출을 하고 엄청난 세금을 지급해야만 한다. 매출 관리도 아주 까다롭다.
필자도 현금 15만 달러를 여기저기 힘겹게 마련해, 세탁소를 인수했다. E2비자를 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멋모르고 와서, 세탁소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은 엄청 복잡했고, 비자를 얻기 위한 절차도 산 넘어 산이었다. 하루하루가 불안함으로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더구나 내 나라 한국을 왔다 갔다 못 하고 꼼짝없이 미국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필자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어느 날, 한국을 왕래할 방법이 있다는 희소식이 날라왔다. 서둘러 한국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코리아타운으로 달려나갔다. 편법으로 행하는 ‘제3국 비자’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제목이었지만, 미국도 다 살기 마련이었다. 그 낯선 땅에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돈만 있으면 방법을 찾아 교묘하게 해결할 길이 또 있었다.
비자와 신분의 세상, 지쳐만 가던 필자에게도 그때부터 서서히 꿈과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차는 발이나 다름없다. 차가 없으면 누구나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민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운전 면허증을 따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를 구입해야 하는데 그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 천지가 어리둥절하고, 가난한 이민살림에 비싼 새 차를 산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서야 겨우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미국면허증을 따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필기 시험은 그렇다 해도, 실기시험의 시내주행은 지금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운전 라이센스를 어렵사리 얻어내고 드디어 필자 소유의 중고차 한대를 구입했다. 남편이 타던 싸구려 중고차는 온 가족이 타기에 작고 좁기도 했지만 틈만 있으면 골치를 썩였다.
남편과 함께 하루 종일 쏘다니며 미국인 자동차 매매상뿐만 아니라 멕시칸, 한국인 자동차 판매상을 돌아다녔다. 결국은 한국인에게 하얀 색 밴 한대를 구입했다. 낯선 땅에서 소유한 첫 재산이었다. 남편은 신이 나서 몇 번씩이나 차를 닦아 대더니 기념으로 바람을 쐬자며 온 가족을 출동시켰다. 아이들은 세탁소 근처에 있는 ‘인 앤 아웃’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 햄버거는 한국사람들 그리고 대체로 미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이따금씩 먹고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모든 재료가 냉동 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 ‘인 앤 아웃’은 백인이 아니면 종업원으로 채용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은 하늘을 치솟아 몇 십분 씩 줄 서는 것은 보통의 일이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남편은 싼타모니카 언덕을 지나 대단한 미국의 거부들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동네로 구불구불 구경을 시켜줬다. 그 유명한 해변도로 1번 후리웨이를 타고 멀리까지 약 두어 시간은 돌아 다닌 것 같았다. 어느 작은 해변 골목길로 들어설 때쯤에 차가 덜컹 덜컹하더니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얗게 당황해 안절부절 야단이 났다.
덩달아 아이들도 불안해 했다. 차에서 내려서 왔다 갔다 하더니 문제가 생겼다며, 시동이 걸리지 않아 더 이상 갈수가 없다고 했다. 필자도 갑자기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멍청히 서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졸지에 발없는 미아가 된 것이다. 필자는 어딘가 연락을 해야 했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다.
얼마 후에 세리프(경찰차)가 왔다. 자초지종을 묻더니 라이센스(운전면허증)와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차는 우선 길가의 한편으로 안전하게 옮겨놓아야 한다며 도와주기를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힘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하더니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쌀쌀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 들었다. 바닷가 옆이라 더 바람이 불어왔다.
옷을 벗어 아이들을 감싸 안고 대책을 연구했다. 차를 그 자리에 일단 그대로 놔두고 내일 다시 와서 처리하기로 했다. 남편은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다행히도 세탁소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며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가족들은 터덜터덜, 대략 한 시간 넘게 밤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멀리 필자의 세탁소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환희였다. 밤11시, 차가 없으니 집으로 갈수가 없다. 그렇다고 교회사람들을 불러 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도착 후, 밤늦게 다시 캄캄한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일단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한국라면이 있었다. 세탁소 안에서 냄새를 풍기며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 먹었다. 구수한 라면 맛이 기가 막혔고, 가족들은 기분이 좀 풀린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세탁소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야만 했다. 필자는 궁리 끝에 우선 걸레를 만들어, 가족이 잠잘 공간만큼의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맨 밑에는 푹신한 담요를 몇 장 깔았고 그 위에 깨끗하게 빨아놓은 손님들 이불 몇 개를 두둑하게 깔아놓았다. 손님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또 깨끗이 다시 빨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찾아가지 않았던 옷들과 수건을 꺼내어 돌돌 말아 베게도 만들었다. 아주 부잣집 몇 천불 짜리 고급 거위 털 이불도 꺼내어 덮기로 했다. 네 식구가 두 다리 쭉 뻗고 자기에는 아주 훌륭한 잠자리가 만들어 졌다.
아이들은 마치 캠핑을 온 것 같다며, 아늑하게 꾸며진 잠자리 위에 벌러 덩 눕더니 두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가며 좋다고 했다. 남편도 웬만한 텐트보다 좋다며 따뜻한 커피한잔을 타 먹자고 했다. 나름대로 낭만이 흘렀다. 온 가족은 중고차와 씨름한 덕분으로 피로가 몰려와 어느새 골아 떨어졌다. 결국 가난이 가져다 준 중고차 경험은 전혀 색다른 캠핑세계를 맛보게 해주었다. 비록 힘겨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또 생각하기 나름이었고 받아들이는 자의 긍정적 위안이었다.
차디찬 세탁소 콘크리트 바닥에서의 하룻밤은 이민자가족에게 커다란 추억거리를 안겨주었다. 언제 또 필자 가족이 그러한 잠자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했다. 아이들도 생전처음으로 맞이한 낯선 경험에 불만 없이 잘 잤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먹기 위해 맥도날드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깔깔대는 웃음이 가득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지난날의 고된 이민생활은 결국 필자 삶의 커다란 재산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이민 가방을 챙겼다. 큰딸이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보다. 아이는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동생과 아빠 곁인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카이스트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필자의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 드디어 왔다 갔다 이산가족 생활 3년 만에 한국의 모든 생활들을 말끔히 정리했다. 물론 큰딸은 여전히 한국에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쳐야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비행기 조그만 창문 아래로 두둥실 떠 있는 구름들이 어디론가 희망의 솜사탕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의 부푼 마음도 그 구름을 타고 조금씩 설레 이기 시작했다. 이제 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막연한 환상이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몸에 와 닿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와 남편은 미리 나와서 흥분된 모습으로 진한 포옹을 해주었다. 불과 6개월 만의 만남이었지만 작은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환희의 미소가 안정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식구가 늘었으니 살 집부터 구했다. 같은 동네 씨미벨리에 거금 1250달러 월세인 투 베드 룸을 얻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의 카펫이 깔린 아담한 아파트에 미국적 정서가 배어있는 화이어 플레이스(벽난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시차 적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분위기 넘치고 아늑한 집으로 꾸며나갔다. 베란다 밖으로는 평화롭고 예쁜 동네가 나무도 제법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영화 속의 전원도시 같았다.
새 식구가 된 큰딸과 필자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흥분과 함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스프링클러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때에 맞춰 조용히 잔디밭 위로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먹은 파란 잔디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 생동하는 생명의 꽃향기로 필자를 환영해 주는듯했다.
오후쯤 되어 큰딸과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언제나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작은 아이를 기다렸었다. 그 이유는 빈집에 아이 혼자 들어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우선 챙겨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제법 용감하게 남편을 픽업하기 위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이 행복을 마구 실어다 주는 듯했다. 그때는 방문객도 임시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쁜 감동도 지나치면 탈이라고 이게 웬일인가 일이 터졌다. 갑자기 머리 뒤로 삐웅삐웅 대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쫓아 오고 있었다.
아뿔싸! 정신이 몽롱해지고 앞이 캄캄해졌다.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스쳐가며 하얗게 몸이 오그라졌다. 미국은 한번 걸렸다 하면 몇 백 달러는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길가로 차를 정지 시켰다. 키가 커다랗고 번쩍번쩍 장식을 단 우람하고 건장한 백인 경찰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필자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큰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겁에 질려 꼼짝없이 운전석 차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앉아 두들기는 유리 창문을 밑으로 내렸다.
경관은 운전면허증을 요구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손이 어찌나 벌벌 떨리는지 큰딸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꼼짝 말라는 것 외에는 한국과 똑같았다. 경관은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스톱 사인에 무조건 정차하지 않아 위법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특히 동네 길가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스톱 사인이 군데군데 있어서 속도를 높이 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영어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무어라 답변을 해야했기에.더듬거리는 영어로 답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WHAT? WHAT?”하더니 무슨 말인지 영 알아듣지를 못하고 티켓을 끊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울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더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아이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고 배를 움켜잡았고, 미국에 처음 와서 지리도 잘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경관이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가며 특유의 제스처를 쓰면서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그때다 싶어 필자도 합세를 해서 도와 달라고 온몸으로 사정을 했다. 여행객이라 돈도 없다며 불쌍한 척 애원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경관은 여전히 갸우뚱거리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아주 부드럽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그러느냐면서 그만 진정하라고 다독거렸다. 경관은 단순히 필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애써서 친절을 베풀어 이것저것 설명과 함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가난한 첫 이민 살림에 몇 백 달러가 순간에 눈앞에서 날아갈 뻔했다.
그뿐이랴 보험료 할증과 더불어 교통위반 교육까지 미국은 장난이 아니었다. 필자와 큰딸은 잠시 큰 숨을 고른 후에 박장 대소를 하며 손뼉을 쳐댔다. 어찌나 큰딸이 연기를 잘했던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대단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시동을 걸고 두리번 거려 스톱 사인을 주시하면서 조심조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려 있는 차창 문을 타고 맑고 깨끗한 5월의 타국 땅 바람이 머리를 신나게 날려주었다. 무시무시한 미국 경찰관과 대면한 한판 승부였고, 어쩌면 비겁한 수단이었지만 무섭고 떨려왔던 한 건을 요행하게도 잘 해결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낯 선 땅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세찬 소나기였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10번 프리웨이(고속도로)에는 'LA의 파란 하늘'이 새롭게 시작하는 삶위로 푸른 희망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날도 광화문 시내로 가기 위해 성북동 뒷길을 통해 삼청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길은 솔직히 초보운전자나 초행길인 사람에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코스이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오르내리는 길도 많으며 급커브 길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렇지만 이 길을 수십 년째 다니고 있는 나에겐 참으로 편리하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는 친숙한 길이다. 이 길의 장점은 신호등이 없어 논스톱으로 운전할 수 있고 매우 익숙해서 빠른 속도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보니 앞쪽의 차 두 대가 길이 훤하게 뚫렸는데도 완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앞에 앞의 차에는 초보 운전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눈앞에 훤히 보이는 길인데 좀 심하게 조심스러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어휴, 저런 초보운전”이란 말이 나왔다. 추월하면 되겠지만 좁은 골목길이고 구불거리는 오르막 내리막이 계속돼 맘대로 되지 않았다. 차도 흐름을 타야 하는데 너무 느리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그 꼴로 성북동 뒷길에서부터 삼청터널 지나 경복궁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필자 머리를 때리는 생각 하나. 제 속도 오든, 느림보 속도로 오든 내려오는 시간은 5분도 차이가 나지 않는 거 아닌가? 별 차이도 안 나는 걸 초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고 화냈던 걸 생각하니 참으로 필자 자신이 부끄러웠다.
필자도 초보 시절이 분명 있었고 운전하면서 실수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운전면허를 차도 없던 1978년에 따 놓았다. 장롱면허로 잠자던 면허증은 결혼 후 남편의 중후한 까만색 승용차를 만나면서 빛을 발했다.
운전 연습을 시켜주면서 부부싸움이 가장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맘씨 좋은 남편도 연수시켜주며 화를 냈다. 너무나 운전하고 싶었던 필자는 그런 걸 감수했으나 결국 남편 아닌 전문가에게 개인레슨을 받았다.
한번은 동네 골목에서 큰길로 통하는 도로로 나가는데 차들이 많아 잔뜩 긴장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조심조심 느리게 가고 있었는데 조수석의 남편이 “앞으로 빼!”라고 소리쳤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오른쪽 유리창 너머로 어떤 아저씨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남편이 앞으로 빼라니 그 말대로 앞쪽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이번엔 멈추라고 소리친다.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간 남편이 한 아저씨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한쪽 발을 쭉 내밀고 서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 아저씨의 발등을 지그시 밟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 운전으로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큰 일 날 뻔 했다.
아니 근데 그 아저씨는 왜 발을 그렇게 뻗고 있다가 남의 차바퀴에 깔렸을까? 나도 내려 보니 아저씨 슬리퍼 발등 위로 바퀴 자국이 찍혔다. 차바퀴에 깔렸으니 뼈라도 부서졌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는 무슨 운전을 그따위로 하냐는 말씀만 하고는 웃으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괜찮다고 해서 약국에서 파스와 연고를 사드리고 연락처를 드렸다. 추후에 이상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오는 내내 어찌나 남편의 눈치를 보았던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만 하다.
그런저런 사고가 몇 번 생기자 필자는 안전운전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초보 시절에 그런 사고도 겪었으면서 그날 앞을 좀 가로막았다고 투덜댔으니 정말 올챙이 적 생각 못 했다. 항상 과거를 돌아보고 남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갖자고 다짐했다.
2500년 전 공자의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유는 뭘까? “그거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으니까 그렇지.” 오종남(吳鍾南·63)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세상에서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을 권한다. 왜냐, 기원전에 살았던 공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인생이 고달픈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이 책이 언제 그의 손에 들렸는지는 모른다. 그건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최근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그의 마음에 드는 책이다. 논어, 맹자, 대학 등 다양한 고전을 읽어봤지만 이토록 쉽고 명쾌하게 고전을 요약해놓은 책은 없었다.
“책의 저자가 나보다 한 10년쯤은 젊은 사람인데, ‘이야, 참 멋있는 책을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도 여러 번 읽고 주변에도 많이 선물해줬죠. 제가 IMF 상임이사 시절에 IMF 총재가 제주에서 열리는 연차총회에 가는 길에 잠시 서울을 들른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을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산을 모시고 올라갔죠. 서울의 역사와 한강의 기적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니까요. 이 책도 그런 책이에요. 논어, 맹자, 손자병법, 도덕경, 중용, 대학이 한 권에, 그것도 쉽게 읽어볼 수 있게 돼 있잖아요. 고전을 읽어본 사람이든 아니든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이죠.”
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成器), 인불학 부지도(人不學 不知道)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길을 모른다’는 뜻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오 고문은 이 말을 곱씹어 본다.
“대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요. 사람들이 지식이 많은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죠. 배운다[學]는 것도 지식을 학습하라는 게 아녜요. 지식은 요즘 스마트폰에 다 있잖아요. 그렇다고 운전면허 따듯 기술을 배우라는 뜻도 아니죠.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道)]을 깨치라는 거예요. 사람이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몰라요. 나는 그런 의미로 ‘인불학 부지도’를 해석하고 있어요.”
성공하는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는 중년이 되고 나서 성공이라는 게 참 간단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령 장사를 하더라도 손님이 다시 찾아와야 성공하는 것이고, 잡지를 보고도 다음 달에 또 보고 싶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아주 간단해요. 예를 들어,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이 오는 친구를 A라 하고, 내가 필요할 때 전화를 걸어 수다 떨고 싶은 친구를 B라 합시다. 본인 입장에서 어떤 친구가 더 좋겠어요? 당연히 B겠죠.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B가 되는 거죠. 자기가 B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거예요.”
그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적자생존(赤字生存)’이다. 적자를 보는 게 성공하는 사람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타임 스팬(time span), 즉 기간을 얼마로 보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친구들은 주로 더치페이를 하죠. 만약 친구와 밥을 먹는데 오늘 내가 밥을 샀어요. 당장 오늘은 마이너스겠죠. 그럼 그 다음번에 그 친구가 ‘저번에는 네가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마’라고 할 거 아녜요. 그게 인간의 염치라는 거니까요. 그러면 다시 플러스가 돼서 결국 0이 되겠죠. 돈은 똑같이 들겠지만 더치페이를 할 때는 없던 정이라는 것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오늘 적자라 해서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나 멀리 내다보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래도 염치없는 인간을 만나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면 안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럴 때는 그냥 손해 보는 거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긍정적 사고라고 착각해요. 되긴 뭐가 되겠어요.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 뭐가 안 되더라도 ‘그래 그런 거지 뭐’ 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가짐, 그게 긍정적인 거예요. 그러니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그거에 집착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유니세프 사무총장 오종남의 2년 급여 ‘1원’
2013년 2월부터 2015년 3월까지 2년 여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직을 수행한 그가 받은 총 급여는 단돈 1원이다. 그는 보람으로 일구어낸 1원을 급여통장이 아닌 1원이 박혀 있는 기념패로 대신 받았다.
“내 본업은 김앤장 고문이에요. 그 외의 일들도 많이 겸하고 있지만 본업 외에는 원칙적으로 다 봉사라고 생각해요. 근데 규정상 유니세프 사무총장은 보수를 받게 돼 있다지 뭐예요? 나는 받고 싶지 않았는데 꼭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럼 나 1원만 줘라’ 그런 거죠.”
연봉 1억원을 받는 사람은 수없이 많겠지만, 그처럼 연봉 1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까? 1원을 받고도 이토록 행복한 사람은 또 있을까? 그는 급여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보람되고 행복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커다란 드럼통에 옥수수 전분 같은 것을 잔뜩 넣고 죽처럼 끓여 먹곤 했거든요.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때 그 죽이며, 공책, 연필 등이 다 유니세프에서 온 것이더라고요. 그 죽을 먹고 자란 내가 사무총장이 돼서 아프리카나 라오스에 있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돕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돕는다는 것은 말이죠, 도움을 받는 사람 이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행복해야 해요. 다들 그런 감정을 느끼며 행복을 나누고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2011년 4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10가지 방법’ 중 하나로 ‘공유경제(Sharing economy)’를 선정했다. 무엇인가 사고 싶은데 자주 사용하지 않을 때 누가 빌려주면 좋겠지만 비싼 물건은 친한 사이라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물건을 빌려주는 대여 산업들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대여를 넘어 함께 나눠 쓰는 ‘공유경제’라는 개념도 나오고 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갖고 있지 않지만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이때는 카셰어링을 이용해보자!
◇드라이브 가고 싶은데…남편이 차를 먼저 가져갔다면
차가 한 대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 하나, 드라이브를 포기한다. 방법 둘, 렌트 회사에서 자동차를 빌린다. 방법 셋, 차 공유서비스(카셰어링)를 이용한다. 첫 번째 방법은 현실적이지만 슬프다. 두 번째 방법은 렌트하는 곳까지 찾아가거나 반납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잠깐만 사용하려고 하는데 24시간을 빌려야 한다. 당연히 비용이 올라간다. 세 번째 방법은 잠깐 드라이브만 하기에 가장 적당한다.
세 번째 방법이 바로 차량 공유서비스인 카셰어링이다. 검색해보면 집 근처에 주차된 차가 있고 최소 30분도 빌릴 수 있다. 가격도 사용한 시간만큼만 내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하다. 중요한 것은 차를 소유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되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줄어든다. 카셰어링은 자주 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요긴하다. 갖고 있으면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가 아마 자동차가 아닐까 싶다. 출퇴근용이 아니라면 한 달에 몇 번 운행하지 않는데도 보험료나 주차료가 꼬박꼬박 나간다. 가끔은 보물단지처럼 주차된 차를 보면 차가 주인인지, 내가 주인인지 헷갈린다. 자칫하면 짐이 되기도 하는 자동차를 카셰어링을 이용하면 소유하지 않아도 되고, 집에 차가 있어도 다른 지역에 열차를 타고 여행 갔을 때 그 지역에 있는 차를 공유해서 이용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내 집 근처 혹은 열차역에 세워진 차를 이용한다
차량공유서비스를 하는 국내 업체는 ‘그린카’, ‘쏘카’ 크게 두 곳이 있다. 서비스와 가격은 비슷하며 일단은 차가 주차된 곳이 가까워야 하기에 내 집 주변에 주차된 차가 많은 업체를 이용하는 게 좋다. ‘차를 빌려 쓴다’라고 하면 궁금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차는 어디 있지?’, ‘예약은 어떻게 하지?’, ‘열쇠는 어디서 받지?’ 등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카셰어링은 우리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 하나로 위치 확인부터 예약까지 한 번에 가능하다.
스마트폰으로 내 주변에 차가 있는지 검색을 하면 빌릴 수 있는 차량 숫자와 주차된 위치가 나온다.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을 예약할 수 있으며 예약된 차는 내 스마트폰의 스마트 키를 이용해 열고 잠근다. 요금과 주유비는 미리 입력한 카드로 자동 결제된다. 무작정 열차를 타고 여행을 가서 열차역에서 카셰어링 앱을 확인해보자. 근처에 바로 쓸 수 있는 차가 세워져 있을 것이다. 이젠 내가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있어야 한다.
▽ 카셰어링으로 드라이브 가기
Ⅰ. 카셰어링 앱을 스마트폰에 다운로드 받는다. 앱을 다운받는 플레이스토어나 앱스토어에서 ‘쏘카’나 '그린카' 또는 '카셰어링'을 검색하고 설치한다.
Ⅱ.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회원가입을 한다.
1. 회원가입을 눌러 이름과 기본 정보를 작성한다.
2. 운전에 필요한 운전면허증 정보를 작성한다.
3. 차량 비용과 주유비를 결제할 신용카드 정보를 작성한다.
Ⅲ. 사용할 차를 예약한다.
1. 대여일과 시간, 반납일과 시간을 정한다.
2. 차를 빌리고 싶은 지역과 차량을 선택한다. (‘내 주변 쏘카 찾기’를 누르면 내가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차를 찾을 수 있다.)
3. ‘예약하기’를 누르면 차가 예약된다.
Ⅳ. 이용한다.
1. 스마트폰으로 차가 주차된 곳을 확인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2. ‘쏘카’ 앱에 있는 스마트키에서 ‘열림’ 버튼을 누르면 차문이 열린다.
3. 이제부터는 차를 이용할 수 있다.(차 열쇠는 핸들 옆에 고리로 연결돼 있다.)
4. 이동 중 기름이 모자랄 경우 차에 비치된 주유전용 신용카드로 기름을 넣는다.
Ⅴ. 반납한다.
1. 처음 차가 있었던 곳에 그대로 차를 갖다놓는다.
2. 스마트폰에 있는 스마트키로 문을 잠그면 반납 완료.
3. 내 카드에서 이용료와 주유비가 자동으로 결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