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돌봄’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임에 빼놓을 수 없는 화제다. 돌봐주지 않아야 한다는 측과 그래도 어찌 안 봐줄 수 있느냐로 의견이 갈린다. 그 논쟁은 차치하고, 봐줄 거면 제대로 돌봐야 함은 당연지사다. 아이의 인성이 자리 잡아가는 시기에 돌봐주는 역할은 더없이 중요한데 어떤 점에 중점을 둬야 할까.
우리의 경험을 되돌려 보면 그 답이 나올 듯하다. 누구랄 것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을 맞아 외갓집을 가면 사립문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환하게 웃으며 꼭 껴안아 주었다. 늘 내 편이었다. 꼬깃꼬깃 주머니에 감춰둔 지폐를 꺼내 용돈으로 쥐여줬다. 나이 들어 그런 위치에 서니 더욱 그리워지고 그런 추억이 있어서 행복하다. 손주 돌봄,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 최우선 아닐까.
아들 내외가 맞벌이를 해서 초등학교 2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 둘을 봐준다. 강의나 방송 활동 등으로 그 일은 주로 안사람 몫이다. 짬이 날 때 함께 한다. 힘이 좀 들어도 되도록 환하게 웃어주려고 한다.
일흔 살의 나이에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추억에 행복해 하는 나처럼 손주들도 훗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환한 모습의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주기. 손주 돌봄의 우선 순위로 꼽아본다.
따사로운 봄날, 일본에서 활짝 피는 건 벚꽃만이 아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한창일 무렵, 1년에 단 70일 동안만 열리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이곳은 일본을 수차례 다녀본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꼭꼭 숨겨진 비경 중의 비경이다. 거대한 대자연을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없거나 장시간의 비행이 부담스럽다면 자연과 전통, 휴식과 탐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로 떠나보자. 여행은 어느 시기에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양지차이지만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꽃들이 피어나는 4~5월에 기적의 설벽을 만날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한 여행지다. 한적한 로컬 기차여행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도 있으니 이만큼 다 갖춘 곳도 드물 듯하다.
가까운 일본에서 만나는 동양의 알프스
메이지 시대, 영국인들이 일본에서 산행을 하다 그 풍경이 유럽의 알프스와 닮아 ‘일본의 알프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도야마와 나가노를 잇는 90km의 산악관광도로다. 굳이 이 길에 ‘루트(route)’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전체 구간이 트롤리버스, 케이블카, 로프웨이, 도보로 이동하며 즐길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힘들이지 않고도 다테야마(立山) 산의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시니어들을 위한 여행지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장엄한 산세와 협곡은 물론 도롯코 열차여행과 온천까지 즐길 수 있는 이곳은 닿는 순간 유럽의 알프스 못지않은 풍경이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왜 지금껏 몰랐을까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일본의 3대 영산으로 불리는 다테야마
나고야 북쪽에 위치한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도야마 공항과 가까운 다테야마 역 또는 나고야 공항과 가까운 오기사와 역을 선택할 수 있다. 소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야마 여행을 추천한다. 도야마 역에서 지테스 본선이라는 지방열차를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다테야마 역에 도착한다.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와 구로베 협곡을 보려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하루를 움직여야 한다. 정상에서 보는 다테야마 산도 아름답지만 눈 계곡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과정도 더없이 경이롭다. 우나즈키 온천마을에서 따사로운 봄을 한껏 즐기다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번갈아 타고 산 정상에 오르니 봄이 한창인데도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고, 설산을 깎아 길을 낸 최고 22m에 이르는 기적의 눈 계곡이 나타난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해발고도 1500m에 위치한 구로베 댐은 일본 최고 높이에 위치한 댐으로 연간 무려 10억 kW의 발전량을 내는 수력발전소를 갖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로질러 걸어가며 바라보는 호수의 물빛은 캐나다의 레이크루이스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다.
5월에 만나는 무로도 설벽
기차와 케이블카, 고원버스를 번갈아 타고 무려 3시간여 만에 무로도(室堂) 설벽 앞에 섰다. 해발 3000m 고지에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의 상징인 무로도 설벽 사이를 걸어서 지나노라니 자연도 위대하지만 자연보다 더 경이로운 존재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모세의 기적은 바다뿐 아니라 산에도 있었다.
일본의 옛 정취 가득한 ‘도야마 근교’
도야마 근교에는 구로베 협곡 외에도 한적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일본 전통가옥을 감상하며 조용한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이와세 마을은 고즈넉한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하게 되는 곳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 바다를 오가던 배들이 머무르던 이 항구 마을은 과거에는 큰 번영을 누렸던 곳으로 여전히 옛 정취가 물씬하다. 강가를 등지고 점포들이 가득 들어서 있던 곳엔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풍경을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도야마 항구 전망대와 운하 사이의 골목골목을 느리게 걷다 보면 진짜 일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해안열차 타고 가는 천연 온천마을 ‘히미’
구로베 협곡도 봤고 근교 마을도 다녀왔으니 마지막 날엔 달팽이처럼 느린 로컬 기차를 타고 바닷가 마을 히미(氷見)에 가보기로 했다. 시내를 벗어나니 나지막한 집들과 드넓은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과 초록 빛깔 논의 조화, 모내기 철의 물이 꽉 찬 논에 비친 다테야마 설산의 풍경에 시력마저 좋아지는 듯하다. 히미에 도착하자마자 바닷가로 달려갔다. 산도 좋지만 내겐 역시 바다였다. 햇살 가득한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때리기에 빠져본다. 꼼꼼한 손길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햇살 아래에서 뛰어노는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하다. 슬슬 시장기가 와서 어시장 히미반야가이로 갔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수산물과 우동, 소고기 등 히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맛본후 천천히 걸어 마을 끝자락에 있다는 천연온천장으로 갔다. 족욕만 하는 곳도 있고 동네 목욕탕 같은 온천도 있다.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던 사람인 양 온천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 엉킨 실타래 같았던 몸과 마음이 풀리면서 나른함이 몰려왔다. 다시 도야마로 돌아가는 길. 히미의 바다 너머로 우뚝 솟은 다테야마 설봉은 한적함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교육·지도사’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평생교육진흥원, 대한검정회, 이희수 한국재취업코칭협회 대표
은퇴 후 전문 지도사나 강사 활동을 희망하는 시니어가 많다. 회사에 취직해 매일 출퇴근하는 것보다 시간 대비 수익이 좋은 편이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보람과 즐거움도 느끼기 때문이다. ‘OO지도사’, ‘OO교(육)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PART1. 국가전문자격
교육·지도사 국가전문자격은 자격을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곳이 많아 학교 등 공공기관에서의 활동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보통 1·2·3급으로 나뉘는데, 전공과목 이수 및 실습 경력이 필수로 요구돼 학습량도 많고, 취득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대체로 1급을 목표로 했을 때, 최소 3년 이상(관련 전공 학사 이상 수료자의 경우), 길게는 5~10년 정도 예상해야 한다. 하위 급수인 2~3급을 노리더라도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면 대학 진학이나 학점은행제를 통해 과목 이수부터 해야 해 학비며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된다. 이희수 한국재취업코칭협회 대표는 “교육·지도사 국가전문자격의 경우 취득 시점을 고려했을 때 너무 나이가 많다면 고심해야 한다. 취미나 자기계발로 도전할 만한 자격증이 아닌, 일자리를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다”고 조언하며 “자격증을 땄더라도 강의 경험이 쌓여야 어느 정도 수익이 생긴다. 초반에는 무료나 소액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공기관이 아닌 소규모 센터나 재능기부 등을 목표로 한다면 비교적 손쉽게 취득 가능한 민간자격증을 통해 빠르게 경력을 쌓는 것이 낫다”고 알려줬다.
2017년 취득자 현황을 살펴보면 ‘평생교육사’의 경우 50대 이상 취득자가 전체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며, 타 국가전문 자격증에 비해 취득자 수와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그만큼 중장년의 관심 대비 취득률 면에서도 우호적인 것으로 보인다.
PART2. 공가공인 민간자격
약 100개에 달하는(2019년 2월 기준) 국가공인 민간자격 중 시니어의 관심이 높은 교육·지도자 자격증으로는 ‘한자·한문전문지도사’, ‘실천예절지도사’, ‘종이접기 마스터’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교육·지도자 분야 국가공인 민간자격에 비해 취득률이 높은 한자·한문전문지도사의 경우,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50대 이상 취득자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대한검정회 자격시험 담당자는 “유년 시절 한자·한문을 어느 정도 학습한 세대이기 때문에 기본 지식이 밑받침되어 자격을 취득하는 데 유리하다”며 “아동지도사와 훈장 자격 역시 국가공인 민각자격으로 시니어의 관심이 높다”고 설명했다.
범국민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 관계자는 “실천예절지도사는 취득이 쉽지 않지만, 역사와 전통에 관한 내용이라 중장년의 관심이 높다”며 “시니어 취득자들은 어린이집, 유치원, 지역 관광소 등에서의 활동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종이접기협회 관계자는 “연령 제한은 없지만 마스터 과정은 난이도가 높고 숙련자라야 가능하다. 어르신들의 경우 손 떨림이나 노안으로 도안을 보고 접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며 “시니어에겐 협회 내 민간자격인 ‘시니어종이접기조형지도사’ 등을 추천드린다”고 조언했다.
PART3. 민간자격
민간자격은 ‘민간자격정보서비스’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할 수 있는데, 유사한 이름의 자격증이 무수히 많다. 그중 교육·지도사 관련 분야에서 최근 시니어뿐만 아니라 전 연령대에게 주목받는 것이 바로 ‘방과후(돌봄)교사/지도사’다. 현 정부가 국정과제로 ‘온종일 돌봄 체계’를 확정하고 돌봄교실 확대를 추진한 영향이 컸다. 방과후교사 자격은 온라인 강의를 통해 교육을 받으면 돼 비교적 취득이 용이하다.
업계 관련자들은 “중장년의 경우 ‘선생님’으로 활동한다는 데 만족도가 높다. 자격증 취득은 몇 개월 안 걸리지만, 오히려 교육 커리큘럼 작성에서 시간이 걸린다”면서 “학교나 문화원 등의 경우 해마다 가을을 전후로 다음 학기 교육 일정과 강사를 정한다. 봄~여름 자격증 취득 후, 가을~겨울 서류 심사와 면접 등을 거쳐 이듬해부터 활동이 가능한 셈”이라며 실제 활동까지는 적어도 1년은 잡고 계획할 것을 권했다. 아울러 “방과후교사 자격증 자체가 필수이거나 핵심 스펙이 아니다”라며 “전문 분야를 정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이 방과후교실에서 활동하고자 할 때 일정 부분 도움을 받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즉 토탈공예, 창의활동, 독서지도 등 세분화된 자격증이 추가로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국민 엄마’ 김혜자를 비롯해 정영숙, 장미자, 정진각, 전무송 등 대한민국 대표 시니어 배우의 활약이 돋보이는 월화극 ‘눈이 부시게’가 종영 3회를 앞두고 전국 기준 7.7%의 높은 시청률(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을 기록했다. 11일 방영된 9회에서 사채 빚에 시달리던 김희원이 샤넬 할머니의 보험금 수혜자인 이준하를 폭행하고 위기에 빠뜨리는 장면이 공개돼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좋은 형으로만 알았던 김희원의 본색과 함께 ‘효자홍보관’의 실체 또한 드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특히 드라마 초반부터 중요한 무대였던 효자홍보관은 지금까지 있었던 시니어 대상 사기 피해를 떠오르게 했다. 극 중 효자홍보관은 종이접기도 하고 노래와 율동을 하는 ‘노치원(노인들의 유치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건강식품을 비싸게 파는가 하면, 생명보험에 가입하게 한 뒤 중간에 돈을 가로채는 등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것.
이런 사건은 드라마 밖 현실에서 시니어들 대상으로 자주 발생한다. 의료상품 사기뿐만 아니라 금융사기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사)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회장 윤덕홍)가 금융사기 피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피해 사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만들어 교육을 대신 하기도 한다. 금융사기 예방 교육연극 '네놈 목소리'의 첫 장면이 바로 홍보관. 주름을 없앤다는 '다리미 크림'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구입했다가 사기당하는 시니어의 모습이 그려진다. 홍보관이 극 중에서 전반적인 금융사기 피해 현장으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시니어들이 사기피해를 입는 곳이기에 작품 속에 녹여냈다. 작년 3월 금융위원회의 비영리법인으로 인가받은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는 작년 한 해 약 7000여 명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금융사기 피해 교육을 해왔다. 오영환 사무총장은 “올해는 이보다 더 많은 시니어들에게 교육을 이어나갈 예정”이라면서 “금융사기 예방교육 2만5000명, 디지털 금융교육 6000명, 은퇴자산 관리와 생애설계 교육 2500명 등 약 3만 명을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위해 서울 마포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이 생겼다. 근처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은 환경재생 사업을 통해 월드컵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 공원은 2002년 5월 1일 개장했다.
이곳과 가까운 성산동 거주 주민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원 개장을 기념할 수 있는 운동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무렵 인라인스케이트가 붐을 이루던 때라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개장일 새벽,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혼자 공원으로 나갔다. 초보자였으므로 누가 넘어지는 모습을 볼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공원과 가까워 매일같이 새벽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 모 일간지의 인라인스케이트 관련 기사와 인터넷에 소개된 교본을 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H대학교 인라인스케이트 동아리에 참여해 젊은이들과 함께 한강변 남단 코스도 라운딩했다. ‘인라인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힘든 일도 있었다. 2004년 초 운동을 하러 나가다가 월드컵경기장과 평화공원 사이 횡단보도 건널목 대로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우측 다리를 크게 다쳐 1년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을 제외하곤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걸 쉬어본 적이 없다. 스피드나 슬라롬(속도를 겨루는 경기)을 즐겨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오래 한 종류의 운동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경계가 느슨해지곤 한다. 운동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특히 인라인스케이트는 보호 장비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가끔 멋 부리느라 보호 장비 없이 타다가 대형 사고를 겪는 사람들을 본다.
고수가 되려면 실력과 함께 겸손함을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 수련까지 할 수 있다. 초보자들이 도움을 원할 때 나는 인간적 차원에서 남녀노소 관계없이 성심성의껏 지도를 해준다. 그럴 때 큰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
지난해 말부터 6세 손주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있다.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있다. 새해엔 손주 녀석이 자력으로 제대로 탈 수 있도록 더 세심한 지도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손주 녀석의 실력이 향상되면 손주의 유치원 친구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싶다. 그래서 그 녀석들이 자라 손주와 헤어져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통해 맺은 우정이 오래 유지되길 기대해본다.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새해 바라는 게 있다. 옛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시간을 함께 보낸 동호인들을 SNS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들과 다시 소통할 수 있다면 시니어답게 천천히, 그러나 멋있게 나를 보여주고 싶다.
어머니와 회초리
“지워, 다시 써”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잘못이 고쳐지지 않자 등짝에 회초리가 날아든다. 아무리 새 공책이라도 같은 곳을 3~4회 지우기를 반복하면 찢어지기 마련이다. 눈물이 공책에 떨어지니 지울 수도 없었다. 타고난 미운 글씨체는 회초리도 못 고쳤다. 미운 글씨체는 나를 쫓아다니며 망신을 줬다.
평생을 살면서 어머니에게 세 번 편지를 썼다. 첫 번째 편지는 초등학교 국어시간. 작성한 편지를 편지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인 뒤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편지가 진짜로 집으로 올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배달이 되었다.
첫 번째 쓴 편지가 문제였다. 글씨체가 너무 좋지 않으니 집에서 부모님이 연습 좀 시키라는 선생님의 작은 메모지가 동봉되어온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특별 훈련을 받느라 무척 고생했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 포대장의 지시로 쓴 편지와 이번에 눈 위에 쓴 편지가 전부다.
눈은 그리움이다
“얘야, 이북은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많이 와. 한 길도 넘게 오면 치우지도 못해.”
“그럼 화장실은 어떻게 가?”
“화장실하고 안채 사이에 새끼줄을 매서 많이 쌓이기 전에 줄을 돌려. 그러면 굴이 생기지.”
“와! 멋있겠다. 그 굴에서 한번 놀아봤으면 좋겠다. 지붕에서 뛰어내려도 푹신해서 안 아프겠네. 엄마, 우리 언제 이북 가요?”
눈 굴을 상상하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남북통일 돼야지. 할머니께서 너희 보시면 무척 반가워하실 텐데.”
눈이 오면 어머니는 늘 우리를 앉혀놓고 떠나온 고향 이북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흰 눈 덮인 고향 땅을 몹시도 그리워하셨지만 “나는 이제 어렵다. 통일되면 내 대신 너희들이나 가봐라” 하시며 이산가족 상봉장에 못 가는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오월의 어느 꽃피던 봄날, 어머니는 새색시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면사포 달린 새 옷 입으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흰 잉크로 전한 소식
간밤에 눈이 내렸다. 하얀 편지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머니 제가 편지를 안 쓰니 편지지를 보내셨군요. 어머니가 잘 보실 수 있도록 잘 가시던 장독대 위에 써놨어요. 글씨 밉다고 야단치지 마세요. 어머니 이젠 손이 떨려서 글씨를 예쁘게 못 써요. 파킨슨병이 왔어요. 그렇지만 염려 마세요. 컴퓨터가 있으니까요. 연필로 쓰는 것보다 글쓰기가 훨씬 편해요.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께 손편지를 쓰네요.”
편지를 써놓고 어머니가 읽으셨을까, 안 읽으셨을까 궁금해서 장독대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 봤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내 편지를 읽으신 것 같다. 편지가 군데군데 눈물에 젖어 있었다. 밤새 읽으시면서 우셨을까. 어머니 눈물은 밤새 얼어 고드름이 되었고 지금 녹아서 또다시 편지지를 적신다.
“어머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가 없어서 ‘엄마, 사랑해!’라고만 썼어요. 얼마 안 있으면 나도 엄마 곁으로 갈 것 같아. 그날이 언제인지 몰라도 살다 보면 오겠지. 이다음에 만나면 못 다 쓴 이야기 말로 다 할게. 편지는 그대로 놔둘게. 오늘 밤에도 와서 또 읽어. 녹아서 없어지기 전에 많이 읽어.”
편지지를 녹일까봐 한낮의 햇볕이 원망스러웠다.
“엄마, 제가 유치원 다닐 때 가르쳐주신 노래 불러볼 테니 들어보세요.”
나는 장독대 옆에서 노래를 불렀다.
고무신 신고
아장 아장
느린 거북이 기어가듯이
나도 엄마를 따라갈 테야
#1 김종억 동년기자의 '설레는 손주와의 첫 만남, 잊지 못할 첫 여행'
일정 40일, 미국
구성원 김종억 동년기자 부부, 아들, 딸 내외와 손자
코스 미국 콜로라도 덴버→로키마운틴→레드락→라스베이거스
2014년 정년퇴직 후 꿈에도 그리던 미국여행을 계획했다. 미국 콜로라도에 사는 딸네 가는 것인데,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자와의 첫 만남이라 몹시 설다. 스마트폰 앱과 인터넷 웹서핑을 이용해 일정을 짰다. 그렇게 준비하고도 인천공항 출국수속대 앞에서 전자여권만 손에 든 채 비자신고를 하지 않아 퇴짜를 맞고 아연실색 허둥대고 말았다. 출국 2시간 전, 여행사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비자신청을 마쳤다. 무사히 딸네 도착해 손주의 방학식 겸 발표회 파티에 참석해 아이의 모습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40일간의 일정 중 로키마운틴에서 가족들과 신나게 스키를 탔던 시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4박 5일은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준 좋은 시간이었다. 대형마트에서 막걸리를 사 마시며 가족들과 호텔에서 보낸 그날 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자녀들에게 무한 신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미래에 떠날 여행도 계획했다. 다음 가족여행은 플로리다 해변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정했다.
#2 가재산 동년기자의 '사돈, 손주들과 다시 찾은 제2고향 오사카'
일정 3박 4일, 일본 오사카
구성원 가재산 동년기자 부부, 사부인, 딸 내외와 두 손녀
코스 오사카→녹지공원(살던 아파트와 아이들 유치원)→오사카 시내관광(도톤보리, 오사카성, 레고마을 등)→교토관광(청수사, 금각사 등)
아들 내외가 추석에 장인·장모를 모시고 손주들과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은근히 시샘이 나서 사위에게 “우리도 여행가자”고 해서 떠나게 됐다. 특별히 35년 전 상사주재원으로 4년간 아이들과 살았던 오사카를 여행지로 골랐다.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통해 15만 원에 아담하고 깨끗한 32평 아파트를 통째로 사용했다. 그 외 정보는 딸이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맛집과 관광지를 알아보고 예약한 덕에 여행 중 특별히 힘든 점은 없었다. 오사카에 도착해 35년 전 살던 집을 맨 처음 들렀는데, 반갑게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딸이 다니던 유치원을 방문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개원 70주년이 되었다는 유치원을 배경으로 가족 단체사진도 찍었다. 이번 여행에서 특별했던 점은 해외에서 사돈댁과 함께 추석 차례를 지냈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음식을 사다 약식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아이들과 절을 올렸다. 여행을 계기로 외손주들과 놀아주며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내년에는 아들네 가족, 사돈 내외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가보려 한다.
#3 최원국 동년기자의 '통영 겨울 바다로 떠난 감성 충전 가족여행'
일정 2박 3일, 경남 통영
구성원 최원국 동년기자 부부, 딸 내외와 손녀
코스 부천→천안→마산→통영
통영에서 겨울바다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한산도를 보며 국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떠난 가족여행이다. 직접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박할 곳을 예약하고,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맛집을 찾았다. 우리 가족이 묵은 아파트는 변두리에 있어 통영 바다로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관리가 소홀한 탓에 취침 중 벽의 부착물이 떨어져 사고를 당할 뻔했다. 숙박지를 찾을 때는 저렴한 가격도 좋지만 사전 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동차로 한산도를 일주하며 멋진 풍경을 즐기고,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니 한껏 감성이 고양됐다. 여행 중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족이 협력하며 긴밀해진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평소 서로 몰랐던 면모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여행은 중국 청두로 가보려 한다.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데 의미가 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가족여행을 가자고 정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을 미룰 테니까!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중에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엄홍길(嚴弘吉·59) 대장은 ‘신들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 정복이 그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꿈을 위해 목숨까지 건 남자,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해발 8000m 이상의 봉우리 중 독립된 산줄기를 이루는 봉우리는 총 14개.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한 이 14개 봉우리를 통틀어 ‘8000m 14좌’ 또는 ‘히말라야 14좌’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뒷동산 올라가듯 히말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히말라야도 그저 그런, 높고 추운 산에 불과했겠지만, 순순히 정상을 내어주지 않는 히말라야는 실패를 마약으로 삼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엄홍길 대장은 14좌를 오르는 대가로 동상에 걸린 엄지발가락 한 마디를 잘라냈다. 또 등반 중 사고로 부러진 발목은 뼈가 그대로 굳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는다. 죽음의 경계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그는 등반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말렸어요. 근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아요.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기분이었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처럼 저도 산이 그곳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매년 히말라야를 정복하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산악인이 산 4000~5000m 부근에 설치된 등산기지, 베이스캠프에 모여든다.
“베이스캠프에선 닭볶음탕, 김치찌개, 냉면 등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해먹을 수 있어요. 주방장도 있는걸요. 다만 산속이다 보니 수산물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짐을 꾸릴 때 간고등어, 홍어, 조기 같은 생선을 챙겨가죠. 양이 한정적이다 보니 생선 먹는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아껴먹어야 하죠.(웃음)”
비 오는 날엔 막걸리에 전, 스키장 정상에선 따끈한 라면 국물, 운동 후엔 시원한 맥주가 당긴다면 영하 20~30℃를 웃도는 베이스캠프에서는 어떤 음식이 가장 꿀맛일까. ‘그’ 음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엄홍길 대장의 얼굴이 미소로 번졌다.
“홍어찜! 홍어 냄새가 코를 찌르잖아요. 근데 그 산속에서 먹는 홍어찜은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어요.(웃음) 홍어찜 한 젓가락 입에 딱 넣으면 햐…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도는데 아주 황홀한 맛이죠.”
먹는 이야기까지 들어보면 히말라야도 참 살 만한 동네(?)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리얼’ 히말라야 등반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엄 대장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눈사태,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크레바스,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낙빙 등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상을 오르는 내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장 두려웠다.
“눈사태에 휩쓸려서 눈에 파묻히면 운 좋으면 사는 거고 나쁘면 죽는 거예요. 얕으면 파내면 되지만 큰 얼음덩어리에 갇히면 파낼 수도 없거든요. 히든 크레바스는 눈이 살짝 덮여 있어서 잘 안 보여요. 거기에 발을 잘못 디디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틈 사이로 추락할 수도 있어요. 이 중 어느 하나도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아요. 마치 죽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산
높이 8092m의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에서 10번째로 높은 산이다. 산 이름은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이지만 온화한 느낌과는 다르게 예측 불허의 기상과 난코스로 악명이 높다. 엄 대장도 이곳에서 네 번의 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도는 기상악화로 실패. 이듬해 봄, 그는 다시 장비를 꾸렸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고개를 들었는데 앞에 있어야 할 셰르파가 사라진 거예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히든 크레바스를 보지 못하고 빠진 거죠. 깊지는 않았는데 V자 모양이라 떨어질 때 턱을 찧었나봐요. 숨을 희미하게 내쉬고 있었는데 구조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어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동료의 죽음은 언제 겪어도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일 년을 다시 기다려 네 번째 등반길에 올랐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산에도 와 닿은 걸까, 7600m까지는 순조롭게 오를 수 있었다. 정상까지 400여 m를 남겨둔 상황, 마치 손만 뻗으면 정상에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그때 앞서가던 대원이 실수로 경사면에서 미끄러져버렸다.
“그 친구한테 묶여 있던 로프가 제 옆으로 후루루루룩 지나가는 거예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로프를 낚아챘죠. 가속도가 붙으니깐 두꺼운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타들어 가. 놓자니 놓을 수 없고 잡자니 잡히지 않고. 근데 어느 순간 몸이 붕 뜨는 거예요. 로프 끝자락이 제 오른발 발목을 낚아챈 거죠. 정신을 차려보니깐 눈에 제가 처박혀 있더라고요. 발목이 180도 돌아가서 뒤꿈치가 앞에 있는 상태로.”
목숨은 건졌지만 달랑거리는 발목을 끌고 4500m까지 내려가야 구조용 헬기를 탈 수 있었다. 빙벽에서는 줄과 한 발에만 의지한 채, 그리고 평지에서는 기어기어 내려가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발목을 현지에서는 수술할 수 없어 급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목에 쇠 핀 두 개를 박아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의사가 앞으로 등반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죠. 5개월 동안 재활 치료를 하고 삼각산 백운봉에 올라갔어요. 그때 든 생각이 ‘이젠 포기해야겠다’가 아니라 ‘조금만 열심히 치료하면 곧 산을 탈 수 있겠다’였어요. 그리고 10개월 만에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아갔죠. 다들 저보고 정신 나갔다고 했어요.(웃음)”
멀쩡한 몸으로도 네 번이나 실패한 안나푸르나를 쇠 핀을 박은 채로 올랐다. 발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뼛속을 타고 전해졌지만 죽은 동료의 목표까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8092m,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도착했다.
“엉엉 울었어요. 행복해서가 아니라 너무 서러워서. 하늘로 가버린 동료 생각, 지난날들의 여정. 막 소리 질렀어요. ‘결국 이렇게 받아주실 거면서 왜 그런 고통을 주시고 동료까지 데려가시고,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면서요.”
엄 대장과 안나푸르나의 지독했던 인연은 이렇게 끝나는 듯했지만 또 다른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뒤따라오던 여성 대원 지현옥 씨와 셰르파 한 명이 하산 도중 실종된 것이다. 밤새도록 무전을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안나푸르나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렇게 그 둘은 안나푸르나 꼭대기에서 영영 내려오지 못했다.
엄 대장은 14좌를 모두 오르고 위성봉인 얄룽캉(8505m)에 이어 로체샤르(8400m)까지 올라 2007년 16좌 완등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열여덟 번의 실패가 있었고 열 명의 동료를 잃었다.
제2의 16좌를 향하여
“저는 살아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이미 얼음산 속 어딘가에 냉동인간으로 잠들어 있어야 정상이죠. 산꼭대기만 보고 살았던 제가 어느 순간 산 아래가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아이가 보이더라고요. ‘아, 산이 나를 살려 보낸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산이 나에게 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라는 뜻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8년 그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하고 히말라야 아이들을 위해 학교 짓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엄홍길휴먼재단에서 현재까지 완공한 학교는 총 14개, 2018년 11월엔 15번째 학교가 완공될 예정이다.
“제가 16좌에 올랐기 때문에 16개 학교를 짓는 게 목표예요. 16번째 학교는 하나의 학교가 아닌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체육관이 있는 종합 교육 타운으로 만들고 싶어요. 여력이 된다면 대학교까지.(웃음) 제 인생을 8000m 산이라고 하면 지금 7000m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이제 가장 힘든 구간이 남아 있는 거죠. 16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비로소 하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백십 년 만의 무더위라고 하는 폭염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한여름이니 아이들도 방학을 맞았다. 유치원생인 손녀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도 일주일간 집에서 쉬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전업주부였던 며느리가 직장에 나가고 있다. 다행히 아침에 큰아이를 유치원 통원버스에 태우고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낸 후 출근하고 아이들 끝나는 시간 전인 4시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무리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미술 하는 날과 발레 하는 날만 유치원에서 손녀를 픽업하여 학원에 보내는 임무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 방학을 맞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안 가는 아이들을 며느리가 퇴근해 올 때까지 돌봐야만 하게 되었다.
물론 예쁜 손녀 손자를 매일 볼 수 있는 건 행복하지만, 시니어가 된 이후 내 일정도 만만치 않게 바빠서 걱정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손녀 손자 봐주는 일이므로 다른 일정은 당분간 모두 보류되었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 어미가 알아서 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예뻐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 방학 일주일 동안 먹이고 씻기는 일이 다 내 차례가 되어서 난감했다. 아들이 어릴 땐 좋은 음식만 먹인다고 요리 연구도 꽤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아기들을 위한 음식을 해보지 않아 서툴렀고 먹지 않으려는 작은아이 밥 먹이는 일도 큰 난관이었다.
두 아이 돌보기가 매우 힘들 거라는 며느리의 조언대로 아침 식사 후에 키즈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의 실상을 알고 나는 좀 놀랐다. 우리 어릴 땐 방학이 되면 골목길에 친구들이 모여서 소꿉놀이도 하고 술래잡기 등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요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키즈카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모 백화점 키즈카페에 갔다. 요 녀석들은 이전에도 와봤는지 무척 신났고 즐거워했다. 먼저 입장료는 한 시간에 8.000원이고 십분 초과마다 1.000원씩 추가된다고 한다. 보통 아이들이 두세 시간은 뛰어노니 두 아이의 놀이 비용이 꽤 나갔다.
물론 쾌적한 환경에 퍼즐이나 블록 등 장난감도 구비되어있고 볼 풀이나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으므로 아이들도 좋아하고 엄마에게도 휴식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뛰어놀던 내 어릴 적과는 매우 다른 놀이문화다. 점심을 사 먹이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후 집에 돌아오는 과정이 며칠 계속되었다.
온종일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힘에 부치니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손자이니 기쁜 마음으로 돌보지만 이렇게 방학 동안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 어찌하는지 걱정스러워 며느리에게 물었더니 다 방법은 있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방학이라도 선생님들이 순번을 정해 맞벌이 자녀를 위해 출근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과 이런 복지제도를 정부 차원에서 잘 운영해서 걱정 없이 아기들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돌 봐줄 사람 없는 맞벌이 가정 아이들도 안심하고 유치원에서 보호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월요일부터 닷새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북새통을 며느리는 매일 겪고 있을 테니 참 대견하고 고맙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오롯이 내 것이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이 행복했다. 이제 방학이 끝나 아이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반갑게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아기들을 생각하니 즐거워서 미소가 계속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