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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체험하기
- 필자는 올 한 해 서울 시정 모니터로 활동 중이다. 무슨 큰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서울시에서 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여러 방면의 일을 알 수 있어 유익하다. 가끔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재미있다.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가 되어 공공기관을 방문해 직원들의 방문객 대하는 태도를 점검하기도 하고 택시기사들의 불편사항과 서울시에 바라는 점을 모니터하기도 한다. 오늘은 광나루 안전체험관에서 안전체험하는 과제가 있었다. 화재 대피나 태풍,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대처 방법을 체험해본다고 해서 재빨리 신청했다. 남의 나라 일인 줄로만 알았던 지진이 요즘 들어 우리나라에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어 불안하고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광나루 안전체험관은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어 찾기도 쉬웠다. 오늘 시정 모니터 체험단은 20명이다. 오후 3시에 시작해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도착해보니 안전체험관 안은 유치원 꼬마들과 다른 동에서 온 단체 체험객들로 시끌시끌했다. 광나루 안전체험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재난 안전체험관이라 한다. 시민 스스로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을 배우는 공간으로 지진, 태풍, 소화전, 건물탈출, 응급처치 등 다양한 안전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친절하게 안내해준 소방관을 따라 처음 체험한 건 화재 상황이었다. 이 체험은 실제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심장이 약하거나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필자는 두렵긴 했지만 체험이니 무슨 일이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도전했다. 화재 대피 땐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려야 하며, 벽을 짚고 몸을 낮춘 상태로 대피해야 하고, 1층으로 가는 게 좋은데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베란다나 창문 쪽으로 가서 구조 요청을 해야 한다. 손잡이가 뜨거우면 문을 열면 안 된다는 등 여러 가지 주의사항도 들었다. 소방관의 자상한 안내가 있었음에도 화재 대피 체험은 정말 무서웠다. 건물 복도에 켜 있는 비상구 유도등 표시만 보일 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줄지어 걸어야 했다. 어느 구간에서는 인체에는 해가 없다지만 공포스러운 하얀 연기를 뚫고 지나야 했다. 실제로 불이 나면 하얀 연기가 아닌 검은 연기가 난다고 했다. 필자가 폐쇄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체험에 참여한 게 후회가 될 정도로 5분 남짓한 시간이 몹시 두려웠으며 숨이 막혔다. 깜깜한 곳에서 대피처를 찾아 움직이는데 실제라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되었다. 화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드디어 화재 공간을 벗어나 대피 훈련을 했다. 건물탈출 체험으로, 불이 나서 건물이 고립되었을 때 완강기 등 피난기구를 사용해보는 체험이었다. 겨드랑이에 완강기를 채우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영화 에서 배우 전지현이 완강기를 허리에 차고 건물을 멋지게 뛰어내리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해보는 체험이 재미있었다. 건물마다 완강기가 설치되어 있다는데 평소엔 관심이 없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앞으로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풍 체험에서는 초속 30m의 바람을 맞았다. 필자의 몸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매우 강력한 바람이어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태풍이 불면 무조건 건물 안으로 피해야 한다. 드디어 지진 체험도 했다. 진도 7의 체험이었는데 이곳은 가구들을 고정시켜놓았지만 실제라면 냉장고가 이리저리 돌아다닐 정도라 한다. 정말 흔들림이 대단해 식탁의 다리를 꽉 붙잡고 있어야 했다. 지진을 감지하면 먼저 지진이 났다고 소리쳐 알리고 식탁 밑이나 머리를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진이 일어나는 시간은 길어야 2분 정도이고 짧으면 10~20초라고 한다. 지진이 멈추면 가스밸브나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운동장 같은 넓은 장소로 대피해야 한다. 불이 났을 때 각 건물에 비치되어 있는 소화기 사용법도 체험했다. 이렇게 재난체험을 해 보았지만 실제 상황이 되면 배운 대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체험을 해봤으니 덜 당황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무료로 안전체험을 해볼 수 있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참여해 재난 상황에 대비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 2016-10-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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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러브레터를 쓴다
- 내게는 두 딸이 있다. 첫째 딸은 현재 LA에 살고 있고 딸만 한 명이다. 둘째 딸은 쌍둥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모 그룹의 호주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 모두가 호주에서 4년 동안 살다 얼마 전에 귀국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호주로 떠난 손주들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지금은 귀국해서 서초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귀국하기 전 4년 동안 나는 전화와 카톡으로 손주들과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눴다. 세상이 참 좋아져 무료통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손주들을 향한 내 사랑 휴가 때면 한 달씩 서로 오가며 만나기도 했지만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한 것은 그때였다. 내 사랑의 대상은 당연히 손주들이다. 내 자식 키울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랑이 솟는다. 내 자식 키울 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커서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손주들하고 대화할 때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또 손주들이 내 집을 방문할 때는 옛말로 표현해서,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긴다. 손주들이 네댓 살쯤 되었을 때는 손주들 키에 맞춰 앉아 신발도 직접 벗겨줬다. 올망졸망한 발을 보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럽고 행복했다. 나는 손주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좋아할 만한 간식을 직접 만들어 준비해놓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연휴를 맞아 함께 임진강 근처로 놀러갔다. 오가는 시간이 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여서 둘째 딸이 간식을 준비해 왔지만 나도 차 안에서 손주들에게 먹일 수 있는 간식거리를 준비했다. 내가 늘 먹을거리를 준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손주들은 교외로 나갈 때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무엇을 싸오셨을까?’ 하고 소풍 도시락 열어보듯 설레어한다. 내가 힘들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손주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려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땀 뻘뻘 흘리며 과일 잼도 직접 만들어 먹인다. 아이들은 보는 대로 배운다 얼마 전에 손주들한테 용돈을 줘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용돈을 줄 때마다 새 지폐를 마련해 반드시 짧은 글이라도 써서 깨끗한 봉투에 넣어서 준다. 헌 돈과 새 돈의 가치는 똑같지만 시장에서 거스름돈으로 더럽혀지고 심하게 구겨진 돈을 받았을 때는 새 돈을 받았을 때와 기분이 다르다. 은행이 막 찍어낸 듯한 빳빳한 새 돈을 받으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돈처럼 귀중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용돈을 줄 때도 정성을 다하는 것은 손주들이 어려서부터 돈을 귀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교육적인 의미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주들이 용돈 봉투를 열고는 “와~ 새 돈이다!” 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그래서인지 손주들도 내게 줄 선물을 준비할 때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춘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맞다.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들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 느낌과 강도가 다르다. 손주들도 그것을 아는 것 같다. 말은 그 순간에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지만 편지로 정성스럽게 표현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손주들 책갈피에서 종종 다시 발견되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주고 내가 써준 편지들을 보고 자란 탓인지 아이들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참 행복하다. LA에 사는 손녀는 멀리 있어 행여 할머니 사랑이 부족하면 어쩌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서울에 올 때마다 내가 사용하는 붓과 책 등의 물건들에 “할머니 사랑해요!”라는 글을 몰래 남기고 가는 것을 보면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돌아간 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손녀의 흔적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짠해진다. 그리고 LA로 돌아가 정성을 다해 쓴 ‘할머니의 Love Letter’를 보고 까르르 웃으며 곧 답장을 보내올 손녀가 그때부터 그리워진다. 손주를 예뻐하느니 홍두깨를 예뻐하라는 옛말이 있다.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사랑은 그저 순간순간 느끼면 되고 그 순간이 쌓이면 한 권의 아름다운 책만큼 풍성한 이야기들이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훗날 추억을 더듬듯 그 책을 살며시 펼쳐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 사랑하는 정민, 지민, 성수, 멀리 바다 건너에 살아 자주 볼 수 없는 솔라야 예쁘고 바르고 씩씩하게 성장해줘서 참 고맙다!!!
- 2016-10-0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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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같이 버는것도 아주 의미가 있는 시니어인생이다
- 앙코르인생,액티브시니어, 인생이모작 요즘 시니어들에게 많이 갑자기 자주 다가오는 단어들이다. 과연 앞만 보고 달려오기에도 바쁜 인생을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살아가야하는 장수시대이기에 정리해가면서 가야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였던 60세인생속에 앞으로 무엇을 할까 너무 이것 저것 해온 상태라서 정리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좁혀져 실행하기에 권해본다. 1번 마음속에 내가 뭘 원할까 앞으로 어떻게 무슨 일을 하고 살면 좋을까 적어본다. 막연한 이런 말을 써도 좋을까 하면서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가 원하는 부분을 적어본다. 예: 우울증 생기지 않게 취미활동을 하면 좋겠다. 약간의 비용이라도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봉사활동하면서 소일거리와 친구를 만들고 싶다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제공하고 싶다. 등등 2 나의 매력은 나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나를 아끼기에 다 적어본다. 난 다른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가 한번 적어본다. 예: 난 말을 잘한다고 한다. 그것도 재밌게 말한다고 한다. 옷을 잘 입는다고 칭찬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음식을 잘하여 간단한 요리만 해줘도 아주 맛있다고 한다 등등 3. 이제껏 살아온 경력을 일단 다 적어본다. 스쳐지나온 일이라도 다 적어보면 좋다. 예: 과거 교사를 한 적이 있다. 사업을 해서 잠깐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본 경험이 있다. 말을 잘 정리할 수 있다. 사진을 잘 찍는다. 아이디어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영상편집등 나만의 특별한 재주가 있다. 등등 4, 난 무엇을 추구하는 성향인가 적어본다. 현재 상황과 나의 나아갈 방향등을 정리해본다. 사람마다 다르다.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예: 어떤 이는 기본적인 생활비는 해결되기에 명예가 더 중요하다. 경제적인 문제가 시급하다. 봉사하면서 친구가 있었으면 한다. 하루하루 외롭지 않게 몰두할 일이 필요하다. 5. 하고 싶은 것, 가능한 일을 농축하여 정리하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적어보면서 보충하는 방법을 적어보고 실행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일거리: 창업,창직을 구체적으로 본다./취미활동/봉사활동 구체적으로 적는다. 예: 창업을 할 것이다. 아니 구직이나 창직 새로운 직업이라고 갖고 싶다. 봉사 활동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 취미활동만 하면서 친구를 갖고 싶다.등등 위의 내용을 도와줄 시니어 교육센터 http://50plus.seoul.go.kr 서울 www.50pluskorean.or.kr 50플러스코리안 은퇴자일자리 http://scsongpa.or.kr 서울송파 http://miraeseum.or.kr www.sbdsenior.or.kr 성남 www.naewoncsc.org 부산 www.dgscc.net 대구 https://www.yourstage.com 전국 필자의 예 시니어는 이제 한꺼번에 어느 직장이나 창업으로 목돈이 하루혹은 한달에 들어오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개미같이 벌어서 좋은일도 하고 품위유지비도 쓰면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 해야한다고 본다. 1번 마음속에 내가 뭘 원할까 앞으로 어떻게 무슨 일을 하고 살면 좋을까 적어본 내용중의 하나 : 일을 하면서 비용도 창출하면서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다. 2번 나의 매력내지는 장점은 무엇인가? 적어본 내용중의 하나 : 만나면 기분 좋고 재밌다고 한다 남앞에 이야기를 잘 한다. 3번 : 과거 활동과 현재 활동을 다 적어본다. 블로그체험단관리와 레크리에이션강사,유치원교사등등 다 일단 적는다. 4번 : 말을 하면서 도움되는 일을 위해 파워포인트배우기, 커피를 좋아하기에 바리스타자격증,영상프로그램등 적용을 위해 배우다. 블로그활동은 이미 12년이상 진행해왔지만 SNS도 다양하게 조금씩 자주 활동하고 있어서 이웃이나 팔로워를 늘리고 있다. 5번 : 성남 고령친화종합체험관 교육지원센터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외 커피관련 블로그포스팅을 하도록 커피머신이나 원두가 제공되고 있다.
- 2016-09-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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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 살고 있는 아파트에 유치원이나 유아원 버스가 오면 직장에 출근한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원생들을 데리러 온 선생님에게 인계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한 함박웃음을 짓고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조심스럽게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보면 대부분 외손자. 외손녀라고 답을 한다. 자식들이 인근에 살면서 출근 전에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맡기고 가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식들 집에 아침마다 오기도 한다. 어떤 집은 아예 딸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산다. 어떤 할머니는 딸 식구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창피한지 속마음과 다르게 ‘딸년은 도둑년이야 사위 놈은 더 나쁜 놈이고’ 하고 웃지만 퍼줘도 기분 좋은 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처가에 얹혀사는 것이 남자들의 수치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은퇴한 노인부모들이 의료, 간병이슈의 돌파구를 딸에게서 찾으려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다. (은퇴위기의 중년 보고서, 전용수 지음에서 인용)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예도 딸이 우선이다. 일본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대도시 고령부부의 근거리에 살고 있는 자녀의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1시간이내 거리는 딸(75%)이 아들(55%)보다 많다 (2012년도 통계임) 30분이내도 각각 51%, 42%로 딸의 승리다. 딸이 가까이 살면서 부모와 일상을 공유하며 긴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다. 또 다른 재미있는 통계도 있다. ‘곤란해 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에 딸(86%)이 아들(76%)보다 높게 나왔다. 기억력,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눈치 채는 것도 딸(86%)이 아들(76%)보다 먼저다. 돈독한 모녀관계에서 일상교류가 훨씬 잦다는 의미다. 2~3일 한번이상 대화한다는 응답자는 ‘딸+엄마(60)%)가 아들+엄마(26%)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딸+아빠(42%)도 아들+아빠(23%)보다 높다. 점점 모계사회로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다. 우리의 부모들은 딸은 출가외인 이라 하여 시집보내면 끝이었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보편화 시대로 살았다. 지금도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쪽은 남자 쪽이니 비용부담이 아들이 크다. 아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재사를 지내주고 집안의 기둥 같은 존재라고 인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딸에게 쏠리고 있는 세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아들하고 살면 며느리가 좋아하나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각종 통계가 이 말을 뒷받침 한다.
- 2016-09-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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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특집] 손주와 함께 하는 문화 나들이
- 이번 추석 연휴는 바로 뒤에 주말이 있고, 그 전 주말과 연휴 사이에 낀 이틀만 휴가를 내면 9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다. 쉬는 날이 많으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장기 일정을 잡기도 하지만, 여름휴가를 길게 다녀왔다면 어쩐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만 앉아 쉰다면 손주들은 지루해 몸이 근질근질할 테니, 그럴 땐 아이들을 위해 잠시 나들이 삼아 영화를 보러 가거나 전시장 등을 찾아가 보는 것 어떨까? 글 이지혜 jyelee@etoday.co.kr 판타스틱 뮤직 어드벤처 감독과 제작진이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 추석 당일 개봉한다. 뮤지션이 되고 싶은 주인공이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위해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음악을 주제로 한 만큼 신나고 활기 넘치는 영화 삽입곡들이 듣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개봉 9월 14일 감독 애시 브래넌 목소리 출연 J.K. 시몬스, 루크 윌슨, 에디 이자드 등 창덕궁 속 달빛 세계의 문이 열렸다! 우연히 창덕궁 속 환상의 세계인 ‘달빛궁궐’로 들어가게 된 소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담았다. 개봉에 앞서 8월 29일 국내 최초로 창덕궁에서 야외 시사회를 가져 화제를 모았다. 개봉 9월 7일 감독 김현주 목소리 출연 김서영, 이하늬, 권율, 김슬기, 신용우 등 동물들 섬에 갇힌 인간의 생존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엔웨이브 픽처스의 신작이다. 동물만이 살고 있는 무인도에 갇히게 된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기를 그렸다. 를 모티브로 귀엽고 개성 넘치는 동물 캐릭터가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개봉 9월 8일 감독 벤 스타센, 빈센트 케스텔루트 목소리 출연 유리 로웬탈, 데이비드 호워드, 콜린 메츠거 등 위기에 빠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장난감들이 깨어나며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이미 해외에서는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뉴욕 국제 어린이 영화 축제 대상을 받은 기대작이다. 국내에서는 컬투(김태균·정찬우)가 더빙을 맡았다. 개봉 9월 8일 감독 후앙 호세 캄파넬라 목소리 출연 니콜라스 홀트, 아리아나 그란데, 케이티 홈즈 등 미술관 속 모래사장에서 발견하는 관찰 놀이 ‘관찰놀이터(Seek&Find)’ 기술의 발달로 직접적인 소통과 접촉에 소홀해진 시대에 ‘관찰’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다. 모래사장을 콘셉트로 꾸민 전시장에서 삽으로 모래를 파내어 숨어 있는 작품 이미지를 발견하는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아이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 ‘관찰과 발견’도 함께 운영한다. 일정 9월 18일까지 장소 블루메 미술관 ‘파리도서전’에 간 우리 그림책 130권을 만나다 ‘7가지 마음의 모양’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파리 도서전에서 선보인 한국 대표 그림책 130권을 살펴볼 기회다. 기쁨과 즐거움, 노여움과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과 연민, 미움, 욕망 등 7가지 주제로 나뉜 그림책과 그림으로 표현한 마음의 모양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같은 주제의 프랑스 그림책 130권도 함께 전시해 의미를 더했다. 일정 10월 30일까지 장소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상상 속 자동차를 현실에서 체험하다 ‘브릴리언트 키즈 모터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현대자동차가 함께 어린이들이 상상한 자동차를 실제 자동차보다 작은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펭귄을 도와 얼음집을 지어주는 이글루 자동차, 조개를 연료로 하는 수중 자동차 등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상상 자동차 그림 공모전을 통해 7300여 점 중 선발한 15개의 작품이다. 전시된 자동차는 어린이들이 직접 타고 체험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정 2017년 4월 14일까지 장소 DDP 배움터 4층 디자인놀이터 창의력과 꿈을 키우는 국내 최대 어린이 실내 놀이터 ‘텔레몬스터 대모험’ MBC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꾸며진 어린이 실내 놀이터로 1만3072㎡(약 4000평) 규모의 체험전시장이다. TV, 컴퓨터 게임 등에서 벗어나 신체 발달 및 지능 발달 놀이 등 아이들의 건강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놀이 테마존 30여 개가 설치돼 있다. 매일 2~3회 마술, 비눗방울, 풍선 공연이 열리고, 각 체험장에서는 미션을 수행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제공한다. 일정 9월 18일까지 장소 킨텍스 제2 전시장 부산에서 만나는 신비한 동물 여행 ‘판타스틱 애니멀’ 쉽게 만나 볼 수 없었던 희귀 동물들의 생생한 표본 216점을 전시하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체험과 놀이를 통해 동물을 이해하는 ‘사이언스 존’, 흔히 만나는 동물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동물원 존’,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사파리 존’ 등 세 가지 테마관으로 구성된다. 척추동물 해부학모형 체험, 동물 페이퍼토이 제작 등을 즐길 수 있다. 일정 9월 23일까지 장소 벡스코 제1전시장
- 2016-09-0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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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가 막힌 나만의 아지트 대공개] 정동
- 정동 전망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스처 간 사람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1동 13층에 있는 정동 전망대이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인왕산과 백악산이 펼쳐 보인다. 가까이 서울 신청사가 우람하게 서 있고 빌딩 숲 속에 옛 고궁인 덕수궁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변에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정동 전망대에서는 커피를 비롯한 각종 음료를 주변 반값에 즐길 수 있다. 서울 시청역에서 나와 덕수궁 쪽 출구로 나오면 대한문이 보이고 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진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며 옛 왕궁을 둘러 볼 수도 있고 빌딩 숲 속의 허파와 같은 정원에서 힐링 할 수도 있다. 역사 유물이 늘어서 있고 덕수궁 주변으로 1897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일제하에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이 등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고. 1926년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성공회 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처를 걸어보면서 이 역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보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은 대한제국시 근대적 사법기관인 평리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재판을 받거나 고문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가볍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게 된다. 황제가 살던 왕궁 그리고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수궁에는 역사의 수례 바퀴를 돌려 대한제국의 그 시대로 돌아갈 듯 착각에 빠진다. 그 굴곡의 역사가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했고 1919년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왼쪽 옆으로 정관헌이 보이는데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덕수궁내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 앞으로 덕수궁 석어당은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축물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바로 앞쪽에 웅장한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요한 으뜸 전각이기도 하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중명전이 있는데 왕실도서관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장소이기도 하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 덕혜옹주를 낳아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장소도 여기에 있다. 최근 덕혜옹주가 영화로 만들어져 관심을 받고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곳, 정동 전망대는 이 역사의 숨결이 잠들고 있는 현장을 차 한 잔 하면서 바라볼 수 있다. 필자는 시내를 나오는 길이면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 빌딩 숲 속에 황제가 집무를 보던 집무실이 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덕수궁을 바라보며 필자 또한 한 시대의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커피 향기를 맡으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어 있는가?
- 2016-09-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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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많은 책 정리하는 나만의 방법] 북카페 기증
- 책은 빌리고 안 갖다줘도 범법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책을 여러사람이 쉽게 빌리고 쉽게 사고 애착이 없는 분들도 있지만 어린시절부터 책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빌려줘도 꼭 받아서 찾아오는 편이었다.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백과사전,종이신문 조간석간신문을 정독을 하는 선생님이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계속 책을 모아두고 이동할 때 어린시절 썼던 일기장도 수십권까지 지니고 있어서 이사할 때 꼭 갖고 다니는 최우선순위의 이삿짐이 책이다. 지금도 유치원교사때 쪽지에 메모한것까지 모아둔 성격이니 오죽하겠냐만서도 2000년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죽음의문턱까지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이후 너무 애착을 갖는 책에 대한 애착을 놓게 된 기회가 되었다. 이젠 책을 기증하는데 앞장서는 입장이 되었다. 북카페를 개업하는 친구의 카페에는 대학생이나 직장인들 읽게 되기를 바라면서 詩集이나 문학적이거나 정보를 주는 도서를 기증하였고, IT관련회사 취업중에는 IT관련회사라 이미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봤던 컴퓨터관련 책위주로 기증하고, 미용실에는 머리식히면서 읽을수 있는 잡지류를 선물내지는 기증한다. 커피바리스타 필기 실기 시험을 여러번거치면서 책이 그대로 다 있다. 경우에 따라서 시험만 통과하면 되니 필기시험 격려차원으로 자격증 준비도서를 선물하기도 한다. 책욕심이 많았던 예전과는 달리 나아닌 누군가 읽으면 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책은 반드시 나만 갖고 있어야 하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지금도 북카페에 가본다. 가서 책정리도 하고 스카치테이프 큰 것 가방속에 넣고 가서 표지가 찢어지려고 하면 알아서 붙여놓고 온다. 물론 주인은 모를수 있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서 혹은 지인들과 가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 그만둔 회사이지만 기증한 책을 누군가 읽고 있겠지 필자가 근무할 때처럼 빌려가는 도서 목록에 인기상위 목록에 있을것이기에 그 회사가 아직도 애정이 간다. 미용실은 가끔이라도 가게 되면 일반여성잡지만 있는곳에 브라보마이라이프가 있다. 연세 드신분들도 많이 오시는 곳이기에 강조하면서 브라보마이라이프를 보라고 하였다. 다음에 가면 구독도 슬쩍 권해보라고 하려고 한다. 혹시 브라보마이라이프회사에도 북카페를 만든다면 기증할 책을 내놓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 끌어앉고 나만의 책장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 2016-09-0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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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결혼하여 살면서 온몸으로 느낀 삶의 지혜
- 우리 시니어 모두다 세상에 애기로 태어나서 자라나 어린이로 학생으로 성장하여 특별한 경우 외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를 결혼시키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계속 되고 있다. 부모로서 지혜로운 삶의 지혜를 말해도 다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부모가 하는 말은 늘 하던 잔소리로 들을 수 있기에 글로 써본다. 1.공부하는 자녀들에게 낳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너의 인생을 맘대로 결정지어 미안하다. 그래도 바뀌지 않을 환경을 직시하여 어떻게 해야 좀 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지혜로운 상황일까 뭔가 안보여도 안 잡혀도 끓임 없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기를 권하고 싶다. 사춘기때 필자도 포기하는 모습으로 부모님을 일부러 속상하게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결국 본인이 손해였던 것을 알았을 때 돌아가서 다시 이루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해도 역시 마라톤우승자는 1그룹으로 치고 나간 사람 중에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나중에까지 일할 수 있는 것 등 지금보다 더 장수시대가 될 테니 미래와 노후를 미리부터 준비하는 인생을 상상이라도 해보기 바란다. 필자는 첫 번째 대학의 과선택은 잘 할 자신이 있고,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선택하여 선택했으나 결혼 후 아기를 가지면 더 이상 유치원평교사로 음악에 맞춰 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2.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옷매장에서 점원이 딱 내 옷이라고 부추긴다고 그냥 샀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부모님을 생각해서 떠밀리듯 하는 결혼은 하지마라 자녀들은 이미 낳아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줄 기쁨을 다 준 존재들이다. 부모자격시험없이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지금생각하면 참 걱정스런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이모저모 다 따져봐도 결혼은 했던 것이 잘 한일이라고 인생 후반에 미소 지을 자신이 있다면 해도 좋다. 신혼집인 것 말안해도 그 동네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사올 때부터 다 안다. 문단속을 소홀히 하는일이 없어야 하며, 확인후 문열어주도록 한다. 어떤 피해가 있었다면 본인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의 외출도 길가집이라면 외부로 통하는 창을 반드시 잠그는 것은 기본이다) 임신을 한 경우 아기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기고 아기를 기다린다. 한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뱃속에서부터 귀하게 여기기 바란다. 필자의 뼈아픈 경험이니 꼭 명심하기 바란다. 3, 아기를 키우는 초보부모들에게 뜨거운 다리미를 다루거나 주방에서 음식할 때 만일에 일어날 사태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라. 잠깐 이라도 집을 나설 때는 주방가스나 전기렌지를 끄고 움직인다. 모양이 예뻐도 아이가 어릴때는 유리주전자나 유리컵 사용등은 자제하라고 하고 싶다. 깨진후 위험은 물론 완벽하게 제거하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땀나는 일이다. 책자에 나오는 내용대로 싱크대에게 아기목욕을 시키지 마라. (지역에 따라 집에 따라 뜨거운 물이 갑자기 나와 여린 아기가 화상입을수 있다) 결론은 위험한 행동 ,만일에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고 안전하게 자녀를 키운다. 실제 경험한 내용만 적어보니 다른 분들도 어마어마한 실제 삶속의 경험속의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2016-08-1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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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파서 삼일천하로 무너진 반란!
- ◇첫째 날 문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수입브랜드 의류매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아침에 남편 출근할 때, 부부싸움을 하였다. 다른 날은 다투고 나가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남편한테서 필자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전화가 온다. 그런데, 이날은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는 것을 보니, 단단히 삐쳤나 보다. 밤 12시가 지나도 남편이 집에 귀가하지 않았다. 매장과 집의 거리는 걸어서 10분 거리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보니, 이날은 하루 종일 서로가 전화 한통 주고받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니까, 어린 아들을 재워놓고 매장에 가보았다. 새벽 1시쯤 이였는데, 여름이라 그때까지도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매장에 들어가지는 않고, 길 건너 골목 입구에서 건너다보았더니 불빛이 보였다. 남편이 매장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집에 왔다. 재워놓고 온,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서다. 집에 도착해서도 남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둘째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어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은 ‘아빠 어디 갔느냐’고 찾는다. 필자는 어린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응, 좋은 물건 알아보려고 일찍 회사에 가셨어.” “그랬구나. 난 또, 어디 갔나 했지!” 남편은 평소에 어느 상품이 새로 나왔는지, 또, 어떤 상품들이 잘 팔리는지 살펴보러, 자주 의류회사에 가곤 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 까지도 그렇게 말 하면 잘 알아듣는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반찬거리를 사러 가락시장엘 갔다. 문정동 살 때는 가락시장이 가까워서 평소에도 잘 이용하는 곳이다. 필자가 반찬거리를 사러 간 것은 모두 다, 이유가 있다. 다음날 아침쯤엔, 남편이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서 집에 들어 올 것이라는 계산을 해서다. 그것을 노리고, 필자는 아침상을 생일상처럼 아주 풍성하게 차리려는 것이다. 남편이 이틀 동안 매장에서 자느라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다. 남편의 가출하는 버릇을 싸악 고쳐 주려는 것이다. ‘당신이 없어도 난, 아들하고 둘이서 더 잘 먹고, 더 잘 살 수 있어. 나가려면 나가! 난, 당신 같은 남편 필요 없으니까!’ 그런 마음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장을 볼 때도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일부러 골라서 샀다. 아들이 유치원에서 오기 전에 서둘러 집에 왔다. “엄마! 내일 누구 생일이야?” “아니!” “그럼, 할머니 오신댔어?” “그게 아니라, 우리 아들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러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빨리빨리 키가 쑥쑥 크라구!” 아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놀러 나간다. 엄마가 돼가지고 어린 아들에게 거짓말만 하구! 참, 필자도 한심하고 불쌍하다. 둘째 날도 서로가 전화 한통 주고받지 않았다. 셋째 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3일째 되는 날이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골고루 많이 차려놓고는 아들에게 밥을 먹인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식사 시간이 되니까 현관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린다. 필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모른 척하였다. “아빠! 회사에 갔다 왔어?” “으?응, 아들아, 밥 좀 주라, 아빠, 배고프다!” “아빠, 빨리 여기 앉어. 맛있는 거 아주 아주 많어.” “여기? 그래, 아, 알았어” “엄마! 아빠 숟가락 가져와야지. 빨리 빨리!” 필자는 못 이기는 척하고 남편의 수저와 밥, 그리고 국을 챙겨다 주었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준비를 마치고, 유치원차를 기다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유치원 차가 떠나고 나서, 필자는 머언 하늘을 쳐다 보면서 한 호흡 크게 쉬고는 씨익 웃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집에 들어왔다. 남편은 폭풍 흡입을 했나보다. 평소에는 한 공기 이외에는 절대 안 먹는 사람인데, 한 공기 다 먹고, 더 갖다가 먹었다. 거기다가 과일에 커피까지 챙겨 먹은 것이 아닌가! 먹을 건 다 먹었네. 필자는 남편에게 꼭 한마디를 했다. “왜 들어왔어? 우리는 당신 없어도 잘 살 텐데. 아! 서류 때문에 들어 왔구나! 그럼 오늘 법원가자.” “아,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늦었어. 빨리 나가 봐야 돼.” 남편은 급히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꽁무니를 뺀다. 배가 고파서 더 버티지 못하고 ,남편의 반란은 이렇게 허망하게 ‘3일천하’로 끝을 맺었다.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남편이 외박을 하거나, 가출을 해 본적이 없다. 먼 훗날, 남편에게 들은 얘기인데, 그날 아침에 집에 들어와 아침 식탁을 보고는 완전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한다. 집 나가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집을 나가지 않고, 싸우더라도 꼭 집에서 싸우겠다고 결심 했단다. 필자의 계획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지금은 집집마다 대부분 현관에 번호 키를 설치하니까, 열쇠로 열고 들어갈 일이 없지만, 필자네 집은 몇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드나들었다. 남편은 출근을 할 때나, 외출을 할 때면 꼭, 열쇠를 챙기면서 필자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그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열쇠 없으면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쫒겨 날까봐, 다른 건 몰라도, 열쇠는 꼭 챙겨야지.” 필자도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는다. 남편도, 필자도, 그 허망한 ‘남편의 3일천하’가 생각나서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항상 웃음부터 나온다.
- 2016-08-0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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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아직도 애인이 필요하다
-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 2016-07-25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