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회상해보자.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유치원 딸아이가 엄마의 하이힐을 신고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지 않은가? 혹은 말도 안 되는 치장과 메이크업을 하고 빤히 서로를 바라봤던 일 없는가? 그래서 준비했다. 오래전 당신의 옷장과 화장대가 딸에게 점령당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다. 대신 딸이 아닌 에디터의 옷장 문을 열었다. 봄바람 살살 부는 3월, 한흥옥(66) 동년기자가 과감히 도전했다. 권지현 기자 모델 한흥옥 동년기자 스타일리스트 이미경
◇ 변신 전
2월 초, 날씨가 풀리지 않은 탓에 한흥옥 동년기자는 니트 모자에 두꺼운 패딩 코트 그 안에 또 패딩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말 그대로 그냥 나왔다.
“10년간 보험 영업을 했어요. 상속·증여 관련한 보험을 다뤘어요. 오십이 넘어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내 고객들은 CEO가 많았어요. 길을 가다가 ‘아!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지’ 하다가도 옷차림이 별로이면 가지 않았습니다. 몇백짜리 옷을 입은 것 아니지만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고 다녔습니다. 상대에 따라서 옷은 바꿔 입어야 해요. 특히 큰돈이 들어가는 상속·증여 보험이니 고객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정장을 입을 일이 이젠 없습니다.”
◇ 변신 후
“정말 재밌었어요. 옷을 바꿔 입으면서 내가 변신한다는 것. 사진이 나오면 깜짝 놀랄 것 같아요. 특별한 옷을 입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옷을 입어보겠어요? 재밌을 거 같아요. 내 주변 사람들 반응이 너무 궁금해요.”
“신발이 문제였어요.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꿈은 이뤄진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제가 매일 킬힐 한 번 신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네요.”
“제 삶의 모토가 ‘지금 이 시간에 행복하자’입니다. 잡지사에서 왜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내가 ‘노(No)’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노’를 해야 하지? 하면 어때? 내가 해보고 싶고, 내가 궁금한 건데? 이게 시니어가 되니까 가능한 생각인 것 같아요. 오늘 너무 행복해요. 잃어버렸던 빛을 찾은 느낌입니다. 잘 노는 시니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몸속 깊이 파고드는 아라비아 음악의 선율이 천장이 높고 너른 교실 안에 울려퍼진다. 이에 반응하듯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들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듯 땀을 흘리며 경건하게 춤을 춘다. 지난 1월 문을 연 수원시 영통구 ‘영통2동 주민문화센터’. 이곳 벨리댄스반에서 만난 수강생들의 모습에서 진지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3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벨리댄스 매력 속에 푹 빠진 그녀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봤다.
감이 오지 않았다. 벨리댄스를 춤추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무희가 도전하는 고난위도 춤으로 인식했다. 반짝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월 초, 영통2동 주민문화센터 다목적 연습실에서 만난 벨리댄스 강좌 수강생들은 코끝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새로운 춤 배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 벨리댄스 강좌는 초급반과 중급반으로 나뉘어 진행되지만 수업에 임하는 태도만큼은 초급과 중급 왕도를 가릴 수 없다. 연습실이 무대처럼 반짝이는 이유는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는 수강생들의 열정 때문이 아닐까.
중급반 중에는 외부 공연은 물론이고 각종 벨리댄스 대회에도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둔 동아리 팀도 있다. 벨리댄스 강좌가 개설된 지는 8년쯤 됐다. 주민문화센터 개관 전에는 주민센터에 마련된 공간에서 강좌가 열렸다. 희망하는 사람들은 3개월 단위로 수강신청을 할 수 있다. 여성에게 유익한 춤으로 소개되고 있는 벨리댄스는 여성이 갖고 있는 둥근 곡선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춤으로 나이를 초월해 멋진 율동을 따라할 수 있다. 강사 최상미씨는 시니어 여성에게 벨리댄스를 권하는 이유에 대해 “복부와 골반을 자극하는 동작이 많아 장운동과 근육운동에 특히 좋다. 요실금이나 자세 교정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미니 인터뷰
한영숙(65세) 환갑 넘은 저에게 딱 맞는 춤입니다!
벨리댄스는 2년 정도 했어요. 이 춤을 전에는 전혀 몰랐어요.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60세가 넘으니까 몸이 점점 안 좋아지더라고요. 운동 좀 해보려고 여기저기 알아봤어요. 40대 때 잠깐 해봤던 에어로빅을 하려고 갔더니 너무 많이 뛰더라고요. 제 나이에는 무리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 살 때 마침 지역 복지관에서 60세 이상만 배울 수 있는 벨리댄스 강좌가 있어 부담 없이 시작했습니다. 젊을 때도 클럽 같은 데 가본 적 없습니다. 춤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지요. 그런데 벨리댄스를 해보니 재밌더라고요. 초보 때도 주눅 들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벨리댄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음악이 좋아서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벨리댄스 음악에 맞춰서 몸을 움직일 때 기분이 좋습니다. 라인댄스도 해봤는데 제가 하기에는 몸을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는 춤이었어요.
벨리댄스의 장점은 근육운동이 된다는 겁니다. 허벅지하고 골반,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춤을 추면 근육이 서서히 생기는 게 느껴져요. 제가 살이 찌는 체질이 아닌데도 환갑이 넘으니까 배가 막 늘어나서 충격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부끄러워 옷으로 막 가리고 의상을 입었는데 이젠 과감하게 입고 운동해요. 벨리댄스는 내 몸을 보면서 해야 운동이 돼요. 춤을 출 때 배 근육과 허벅지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군살이 살살 빠져요. 건강만 허락하면 벨리댄스를 계속하려고요. 그래서 옷도 더 과감하고 좋은 걸로 샀어요.
이봉순(58세) 딸들과 함께 벨리댄스대회 나가는 게 꿈이에요.
우리 큰딸이 이곳 벨리댄스 강사예요. 작은딸이랑 함께 수업 들은 지 8개월 됐어요. 오늘이 돼서야 다른 분들에게 말씀드렸고요. 우리 딸이 원래 유치원 원감이었는데 벨리댄스가 너무 좋은 것 같다며 진로를 바꾸더라고요.
저도 딸이 좋다고 권유해서 최근에야 시작했어요. 딸이 하는 거만 봐도 굉장히 쑥스러웠는데 해보니까 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지금 알았나 싶을 정도예요. 변비가 심했는데 하루아침에 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벨리댄스를 한 날하고 안 한 날하고 완전 달라요. 직접 느꼈어요. 제가 약을 안 먹으면 화장실에 못 갔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약을 먹지 않아요. 소화가 정말 잘됩니다. 벨리댄스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웃음).
오늘은 좀 과하지 않게 옷을 입었는데 과감한 벨리댄스복을 입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어요. 옷을 제대로 입었을 때와 안 입었을 때 자세가 달라요. 옷을 잘 갖춰 입으면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 몸이 드러나니까 틀리지 말고 잘해야지 다짐하게 돼요. 또 다리에 힘이 생겨서 좋아요. 모녀 벨리댄스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대회에도 나가보고 싶고요. 아니면 해변에서 셋이서 한번 벨리댄스를 멋지게 춰봤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은 언제라도 그럴 작정을 하고 있어요. 집에 돌아가도 셋이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아서 너무 좋습니다.
※3월 20일부터 영통2동 주민센터 홈페이지 (yeongtong2.suwon.go.kr)에서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할 수 있다. 4월 3일 개강한다.
어린 시절, 소설을 읽다 사랑에 빠져버린 첫 작품이 바로 다. 푸르른 무밭하며 실개천 돌다리길,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소나기처럼 온몸에 녹아들었다. 애잔하지만 환상적인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설 . 의 작가 황순원의 따뜻함을 간직한 그곳에 찾아갔다.
황순원 문학관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의 2009년 개관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기도 양평군에 조성된 황순원 문학촌은 소설 를 소재로 문학 테마 공원으로 꾸며졌다. 황순원의 장편소설 을 주제로 한 ‘해와 달의 숲’과 단편소설 의 분위기를 빌린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소나기 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개관 이후 우리나라 문학관 중 유료입장객이 가장 많은 문학관으로도 꼽힐 만큼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윤초시네가 이사 간 곳에 황순원 문학관
그렇다면 왜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 문학관이 생긴 것일까? 소설가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평양과 오산에서 짧게 보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경희대학교 국문과에서 23년 6개월 동안 교수생활을 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양평에 적을 둔 적이 없다. 양평이 황순원 문학관의 최적지가 된 이유는 바로 소설 때문이다. 2000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나 고향도 연고도 없이 병천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한 황순원. 경희대학교 제자들은 황순원 문학관을 짓기 위해 뜻을 모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내용과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만난 징검다리 등 소설의 배경과 닮은 곳이 바로 양평이었기에 문학관 자리로 낙점됐다.
황순원 부부, 문학촌 안에서 잠들다
문학관 개관과 함께 황순원의 유골은 이장돼왔다. 2014년 한국 나이 100세로 숨진 동갑내기 부인 양정길씨도 이곳에 함께 안장됐다. 두 사람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로 만나 결혼했다. 평양에 살 때부터 교제한 사이로 알려졌는데 황순원은 숭의중학교, 부인 양정길씨는 숭의여중에서 문예반장을 했단다. 1935년 둘은 일본 유학 중에 결혼해 1938년 장남 황동규를 낳았다. 이후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를 차례로 얻어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남인 황동규는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황순원 문단 데뷔는 소설이 아닌 시
황순원이 쓴 작품은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이다. 놀랍게 시도 104편이나 된다. 사실 황순원은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17세 때 문학잡지 에 ‘나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17세 소년의 꿈을 잘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독자가 그를 소설가로만 기억하지만 70세 이후로는 그는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순수와 서정미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황순원. 깔끔하고 잡문을 일절 쓰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등단 초기 시작(詩作)의 영향이 역작에 그대로 배인 것이다.
황순원은 한국 근대소설의 대가다. 사람들은 그가 일필휘지하듯 글을 썼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공책을 열 권, 스무 권, 백 권 가까이 쓰면서 교정을 보고 글을 고쳐 완성했다. 교정도 절대 제자들한테 맡기지 않았다. 문학관에 전시돼 있는 그의 초고 공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을 엄격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순원은 라는 수상집을 제외하고는 시와 소설만 썼다. 신문 기고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순원의 작품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4·19, 5·16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작품 하나하나에 녹여낸 결과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제작돼 다양한 계층의 공감을 샀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황순원의 작품 , , 의 책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가 표지 그림을 그려준 작가는 황순원이 유일하다.
소박한 일상이 엿보이는 황순원의 서재
황순원이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던 서재를 문학관에 옮겨놓았다. 책상 뒤 병풍은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8)이 황순원 선생의 작품 제목을 써서 만들었다. 황순원의 문학전집 4권의 글씨도 그가 썼다. 황순원 선생의 제자 황재국(76)이 쓴 미도거진(味道居真)이라는 서예 작품도 눈에 띈다. 이 글에는 ‘도를 맛보게 하고 진실되게 가르쳐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란 뜻이 담겨 있는데 스승에게 고희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다. 경희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러 갈 때마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입고 다녔던 트렌치코트와 베레모가 서재 왼편에 전시돼 있다. 살아생전에 쓰던 낡은 시계와 면도기 등도 전시돼 있는데 특히 면도기는 1934년부터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절제의 미학은 바로 군더더기 없는 그의 소박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이 느껴진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11월~2월), 오전 9시 30분~오후 6시(3월~10월)
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군경 1500원. 유치원생 무료 주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산 74(소나기마을길 24)
※가능한 한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함.
하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린이들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산타할아버지 ‘선물’에 크게 감동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는 손주와 함께 어울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지냈다.
할아버지ㆍ할머니를 초대한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
지난 목요일 오후, 자원봉사활동을 마치고 세종시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다른 때는 가끔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하였으나, 오늘은 내일 열리는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에 초대를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 젊은 세대가 많이 사는 세종시에서는 아이들 등하교를 조부모님이 주로 돕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부모 대신 “할아버지ㆍ할머니를 초대하였다”는 고마운 이야기를 들었다.
금요일 아침, 기온이 떨어지고 가는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손을 잡고 유치원 가는 몇 분간의 거리를 매우 즐거워하였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강당에 가득 자리하였다. 연방 손주와 눈을 맞추느라고 정신이 없다.
외손자 유치원 재롱잔치
아이들은 매직 마술쇼에 흠뻑 젖어서 하늘을 날았다. 함성을 질렀다가 박수를 치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천정을 뚫었다. 산타복장을 차려입은 아이들의 재롱잔치에 할아버지ㆍ할머니는 손뼉치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누리 바른 반ㆍ알찬 반 등 아이들은 평소 연습을 열심히 한 캐롤송 합창, 러브송 율동 등으로 할아버지ㆍ할머니에게 감동을 주었다. “손주 돌보았던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조용히 속삭이는 노부부도 있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산타할아버지였다. “산타할아버지 나오세요!” 아이들을 따라서 할아버지ㆍ할머니도 덩달아 소리쳤다. 꾸부정한 세 할아버지는 선물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행사를 마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식사를 하였다. 낮은 어린이 식탁에서의 떡국 한 그릇이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하였다. 아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가 되어 행사가 끝났다.
쌍둥이 손주와 서점 나들이
진눈개비가 내렸다. 사위와 딸, 외손자의 환송을 받으면서 조치원에서 열차를 타고 두어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쌍둥이 손주들과 서점에서 책을 사기로 약속했었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장난감 선물대신 올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부쩍 늘어난 독서량에 맞춰 책 선물을 하기로 하였다.
“크리스마스 때 무슨 선물할까?” 아이들은 쉽게 정하지 못하였다. 책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이미 읽었거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결론은 아이들이 직접 고르도록 서점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읽고 싶은 책 몇 권씩 찾았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매우 기뻐하는 모습에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 “아이들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여라!”
축제였다. 규모는 작았지만 분명 축제다. 지난 12월 3일 애월체육관에서 제주원광재가노인복지센터가 주관하고 제주시 애월읍이 후원하는 실버 학예회가 있었다. 이 행사는 몇 회째라는 말이 없다. 프로그램에도 없다. 필자가 참석한 것은 세 번째다. 첫 행사 때는 주최 측에서도 준비가 부족했다.
어느 날 낯선 인물들이 마을 보건소에서 주관하는 건강교실인 기체조 연습 중에 방문했다. 지도자와 노인회장이 의논을 했고 곧 회원들에게 참가 의사를 물었다. 참가에 적극적인 회원들이 있었다. 행사 참가는 연습의 기회이고 실력도 좋아진다면서 참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동안 대략 익혀온 운동을 조금 더 연습하고 다듬어서 참가했다. 무대복도 이전 공연 때 입었던 옷으로 성의 없이 결정했다. 첫술에 배부를 리 없었지만 그야말로 무대 분위기는 아이들 학예회, 유치원의 학기말 발표회 수준이었다. 회원들은 우리가 제일 잘했다고 자화자찬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지만 수준이 너무 낮아 싱거운 대회였다. 회원들의 의견은 대부분 “기왕 참가한 대회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이번은 세 번째 참가여서 경험이 있는 회원들이 잘하자며 의견을 모았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시기였다. 이때는 감귤 따는 사람이 부족해 이 밭 저 밭으로 품앗이하러 나가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해서 연습하러 모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행사가 없었다면 회원의 절반 정도는 일하느라 빠지는데 이번에는 잘해보자 의기투합한 회원들은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 마음이 피로를 이기게 해줬다.
이번에는 댄스 종목을 택했다. 농업에 종사하는 제주도 할망 할방들의 근면성은 알아줘야 할 만큼 악착같다. 그러나 노동만 한 신체가 제대로 움직여줄 리 없다. 단순한 동작도 참 어렵게 배운다. 지도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진전이 없었지만 잘해보겠다는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행사 날이 가까워오자 회원들은 특별히 시간을 내어 극성스럽게 연습을 했다. 그 덕분인지 몸도 처음보다 유연해졌고 율동도 상당히 부드럽게 한다.
무대복도 신경을 쓰겠다며 대표가 며칠 시장을 누볐다. 눈에 잘 띄는 특별한 색상, 그러면서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무대복을 선택했다. 그 위에 알록달록 반짝이가 있는 원색의 조끼를 걸치자 화려한 무대복으로 변신했다. 당일에는 한 회원이 수소문해서 시니어를 위한 무대 화장 봉사 그룹을 섭외해 무대 화장도 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세 시간 전부터 회원들은 마을 노인회관에 모여 머리 손질은 물론 짙은 무대 화장을 하면서 고조된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댄스곡으로 선택한 곡에 ‘매니큐어 바른 이유’라는 노랫말이 있다 해서 할아방들까지 매니큐어를 바르는 애교를 부렸다.
그렇게 극성을 부린 실버 학예회의 무대 공연은 5분도 채 안 될 만큼 짧았다. 그러나 그 5분은 50시간의 함축이었다. 투자한 시간만큼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 후 댄스교실의 회원이 두 배로 늘었다. 늘 헐렁하기만 한 교실을 볼 때마다 회원이 적어 이 프로그램이 곧 종결될 수도 있겠다 걱정되었는데 그 염려는 씻은 듯 날아갔다. 새로 들어온 회원은 기존 회원들의 스텝을 배우려 열성적이고 기존 회원들의 끼는 더욱 대담해졌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딸 둘을 키웠는데 3년 터울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으로 자라게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엔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끼리도 서로 선물을 나누며 감사와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인디언 핑크 스웨이드 천을 잘라서 손바느질로 고리가 달린 버선을 두 개 만들었다. 버선엔 각자의 이름을 흰 실로 수놓고 테두리 마감 스테치도 한 땀 한 땀 공을 들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한 달 전쯤부터 이층 침대에 걸어두었다.
아이들이 서로 다투거나 양보나 배려가 부족할 때는 크리스마스에 올 산타할아버지를 불러내 긴장을 시키곤 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해마다 필자가 몰래 넣어주는 선물을 기다렸다.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이들은 평소 갖고 싶은 물건 이름을 적어서 버선 속에 넣으면 산타할아버지가 보시고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기대에 가득 차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필자는 아이들 몰래 메모지를 꺼내 보곤 혼자 나가서 선물을 사고 포장도 했다. 그리곤 커다란 장바구니에 숨겨 집으로 돌아온 후 살짝 안방 장롱에 숨겼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기대에 들떠 잠도 자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자다가도 부스럭 소리만 나면 혹시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나 하고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날 늦게 귀가한 남편이 현관 벨을 누르자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아이들이 비어 있는 버선 속을 보며 거의 울상이 되어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이 착하지 않아 선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남편이 기발한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이미 일어났으니 선물을 넣을 기회는 놓쳤고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남편은 버선 속에 몰래 메모지를 넣었다. 아빠가 썼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왼손으로 쓴 글씨의 메모지였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할아버지다. 거실 두 번째 서랍장을 보아라.’
아이들은 울다가 깜짝 놀랐다. 흥분한 아이들은 거실로 도토리처럼 굴러갔다.
‘흐음, 잘 찾았구나! 착한 아이들아.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피아노 뚜껑을 열려고 또 뛰었다.
‘이것도 잘 찾았구나! 이번엔 세탁기를 열어보아라.’
아이들은 다용도실로 뛰었다. 그리곤 환성을 터뜨렸다. 세탁기 속에 예쁘게 포장된 선물 보따리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을 다소곳이 들고 거실로 돌아온 아이들 얼굴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와 유치원에서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커다란 비밀이라도 알게 된 듯 울먹이며 내게 안겼다.
“엄마, 아이들이 그러는데 산타할아버지는 없대요. 맞아요?”
지난 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던 행복했던 순간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모두 그런 할아버지는 없다고 해서 자기만 있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한 필자는 고민하다가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한동안 절망하며 슬퍼했다.
그 후로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누던 따스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용돈을 모아 조몰락거리며 서로의 선물을 준비했다. 서로에게 산타가 되어준 것이다. 그렇게 동화 속 마지막 산타할아버지는 떠났지만 그 아름다웠던 크리스마스이브는 영원히 아이들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스크루지 영감이 떠오른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도 좀 구두쇠이기 때문에 더 공감이 간다. 그래서 반성도 하며 교훈을 얻어 지침으로 삼는다. “그 친구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처진 어깨 다독여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거였어.” 특히 이 구절을 늘 가슴에 품고 지낸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집 안에는 한 달 전부터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번쩍번쩍했다. 두 아들은 그 앞에 옹기종기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펄떡펄떡 뛰었다. 전구 불빛 한 번 만지고 자지러지게 좋아했고, 장식을 살짝 손대면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필자도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해가 어둑해질 무렵 유치원 교사와 운전수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복장을 하고 서로 약속된 시간에 찾아와 현관문 벨을 울렸다. “나 산타 할아버지야, 하우가 말을 잘 들어 선물을 가지고 왔어.” 선물을 손에 들고 줄듯 말듯하면서 “엄마 아빠 말 잘 들었지?” 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네” 했다. 선물을 받고 아들은 자기가 평소에 갖고 싶었던 것이라며 끌어안고 좋아했다. 필자가 미리 선물을 사다가 유치원에 맡긴 걸 알 리가 없는 아들은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기뻐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밤은 눈이 펄펄 내렸고, 새벽녘에는 동네 골목에서 교회 성가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러….” 낭랑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축복의 기도를 해주시는 듯 아름답게 들려왔다.
아들은 선물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운전수 아저씨 목소리 같아” “그랬어?” 그때는 숨기고 싶었다. 얼버무리며 필자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몇 년이 더 지난 후 아들은 “엄마 그때 운전수 아저씨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냥 말하지 않고 지나간 거지.”
잊히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떠들썩하게 보냈다. 선물도 주고받고 흥분된 마음으로 지냈다. 거리마다 가게마다 불빛이 빛났고 밤늦은 시간까지 술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가수들은 캐럴송 음반을 서로 다투어 출시했고, 거리에 한 가득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즘은 크리스마스 날이 되어도 조용하다. 이제 필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릴 적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가 그립다.
나이 65세가 되면 전철ㆍ공원 무료에 국민연금 수급자가 된다. 방학을 맞는 학생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고생은 끝나고 안락한 행복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스스로 물었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대답이 쉽지 않는 대목이다.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 2016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고령자가 된지 어느덧 몇 년이 됐다. “건강하고,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친구가 있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면 더욱 좋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사에 정신 차리기 어렵다. 머리 싸매고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몇 해 전까지 없던 나이제한이 보편화 되었다. 고령자는 수강이 제한되고, 수입창출 알바기회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이 위주의 취업과 창업만이 성행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주축으로 하는 재능기부 자원봉사단체가 많다. SNS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ㆍ그림그리기ㆍ스포츠댄스 등 배울 곳은 많다. 시대변화에 따라서 배움을 멈출 수 없다.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행동이 나태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일과표를 작성하고 꾸준히 실행하여야 한다. 올 겨울은 다른 때보다 추위와 찬비, 미세먼지가 많아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휴일 이른 아침, 몇 번이나 창밖을 살피고 나서야 친구들과 산행하려고 집을 나섰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비가 올지 걱정하지말자.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눈이 오면 방한복 하나 더 입고 아침부터 집을 나서자. 망설이면 하루를 헛되게 보내고 만다. 은퇴 전보다 더 엄격한 일정관리를 하여야 한다.
정기적인 모임이 운동을 쉬지 않고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운동을 지속하려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같은 운동을 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동호인과 사귀면 운동하는 재미가 난다. 30년 넘도록 산행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친구들과 정기적인 동호인 모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시니어 소비지출 항목 중에서 건강관리비가 상당함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단련비 등은 필요하지만 병원비, 약값은 건강을 미리 챙겼다면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건강이 행복의 시작이면서 소비절약의 중요한 요소이다. 건강한 생활을 하는 방법으로 운동ㆍ공부ㆍ자원봉사 등이 있다.
손주와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한다. 주말에 가까이 사는 쌍둥이 손주와 세종에서 올라 온 외손자 등 세 녀석이 한 달여 만에 ‘합숙’을 열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니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열렸다. 깔깔 웃어대고 놀이에 몰두하면서 할아버지ㆍ할머니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세 녀석을 옆에 뉘이고 잠자리가 불편할 새라 한밤을 지켜도 즐겁기만 하다. 손주는 인생의 제일 큰 행복이며 세대를 따뜻하게 이어줄 것이다.
어릴 적 할아버님, 할머님께 사랑 받았던 기억이 뚜렷하다. 손주들에게 그만큼 잘할 수 있나 종종 스스로 묻는다. 자식을 기르면서 한 세대를 다시 살았고, 손주를 돌보면서 또 한 세대를 다시 산다. 절묘한 자연의 순환이다. 건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은 손주와 친하게 지내는데 있다.
얼마 전 유치원에 다녀오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훌륭한 아빠·엄마가 사랑해 주시니 좋겠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빠·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줄줄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훌륭하지?”라고 너무 앞서고 말았다.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줄 모르겠어!” 뭔가 궁금한 것이 폭발하였다. 행동으로 대답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하는가
딸 가족이 근무관계로 세종시로 이사한 지 한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내와 교대로 가끔 그곳에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한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여느 때처럼 태권도학원 버스가 앞에 섰다. 손자 녀석이 반갑게 품에 안겼다. “왜 정장 입었어?” 할아버지의 평소와 다른 복장모습이 낯선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세 살이 되던 때 사회를 은퇴하였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간소복이나 운동복 차림을 대부분 기억할 터이다.
“오늘은 정장 입고 자원봉사하였어!” 설명을 하였으나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전에 창업 멘토 활동현장에서 정장 차림으로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무엇 하시는지 보여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할아버지도 훌륭한 사람 맞아!” 비로소 손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진을 통한 실체 확인이었다.
아는 것이 무엇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손녀·손자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산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어린이집·유치원 등원을 종종 도왔다. 목마가 되어 무등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었다. 씨름상대가 되어 넘어져 주기에 땀을 흘렸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그것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넉 달 반 차이인 세 녀석이 모이면 어린이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라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아는 것이 궁색해진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질 터이다. 요사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체스를 배우고 있다. 늦기 전에 아이들과 이야기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하라
가까이 사는 쌍둥이의 등교를 돕고, 세종시를 왕복하면서 외손자의 유치원 하교를 돕는 일이 매우 즐겁다. 어릴 적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회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여야할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의 등하교 보살피는 일을 누가 하면 좋을까? 부모가 제일 좋겠지만 현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차선책으로 손주에 대한 사랑이 깊은 조부모가 맡는 것이 좋다. 조부모의 건강, 사는 집과의 거리 등 고려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 하지만 손주 보살핌이 조·손이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조부모의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가족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효과도 크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할아버지·할머니를 보고 배운다. 훈계하지 말고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책 읽으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 조용히 책을 읽으면 된다. 조그만 잘못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칭찬을 자주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더 따뜻한 가슴으로 몸소 실행을 보여라.
아들이 퇴근길에 아버지랑 술 한잔 하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필자더러 정하라고 합니다. 둘이 만나기 편한 장소와 시간을 정했습니다. 잠깐 생각해보니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불러 내가 저녁을 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들네 집 가까운 전철역 쪽으로 갈 테니 식구들 모두 부르고 저녁 값은 필자가 내겠다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아들네는 여섯 살짜리 손녀와 네 살 손자, 두 살 손녀 등 모두 5명입니다. 전철역에 도착하니 아들이 필자를 마중 나와 기다립니다. 좀 있다가 며느리가 아이들 셋을 차에 태워 예약된 음식점 앞으로 옵니다. “할아버지~” 하고 먼저 큰손녀가 뛰어와 안깁니다. 뒤이어 네 살짜리 손자가 뛰어옵니다. 막내둥이 손녀는 뭔지도 모르고 제 엄마 품에 안겨 손뼉을 치며 “아빠, 아빠” 합니다. 한 번씩 안아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메뉴는 며느리에게 일임합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메뉴 선택도 잘하고 식당에 요구할 것도 당당히 말합니다. 역시 내 예측대로 아이들 의자를 달라 하고 아기 숟가락도 주문합니다. 필자 같으면 대충 아이들도 옆자리에 앉히고 어른 숟가락으로 먹도록 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라 밥 먹는 것은 뒷전이고 식당에 설치된 놀이터로 뛰어갑니다. 큰손녀가 뛰어가니 네 살 손자도 달려갑니다. 얼마 안 있어 손자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아이 아빠가 금방 자식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뛰어갑니다. 손자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누가 자기를 밀어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달래면서 눈물을 닦아준 뒤 밥을 먹으라고 하니 몇 숟가락 먹다가 또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며느리는 연신 고기를 구워 필자 접시에 올려줍니다. 아이들 셋에게 밥 먹이랴 고기 굽느라 참 바쁩니다, 옆에서 아들도 고기 굽는 것을 거들면서 쌈으로 고기를 싸서 아내에게 줍니다. 우리 세대에는 부모님 앞에서 아내에게 고기쌈을 싸서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느끼면서 그런 아들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손녀와 손자는 지긋이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재잘거립니다. 다 알아듣지 못해서 통역 겸 며느리가 대화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그러다 또 뛰어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달라 하고 주면 안 먹는다고 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도 필자 눈에는 참 귀엽습니다. 마지막에 누룽지죽을 시켰는데 두 살짜리 손녀가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습니다. 손녀의 입맛에 맞나봅니다. 한 번 더 먹이겠다고 남은 것은 싸달라고 말하는 며느리가 대견합니다.
며느리는 현재 아이들 양육을 위해 육아휴직을 냈습니다.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유아원에도 보내고 발레 학원도 보냅니다. 병원에도 자주 가야 합니다. 혹처럼 붙어 있는 두 살짜리는 업고 동동걸음을 하기도 하고 승용차로 운전도 해야 합니다. 물론 아들이 적극 돕지만 아이의 양육은 대부분 엄마의 손이 필요합니다. 며느리가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내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며느리가 카톡으로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고 글을 보내옵니다. 필자도 고맙다고 답글을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