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옛날에는 자료가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은 예쁜 사진이나 귀중하게 모았던 자료는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관리하기도 어렵지만 다시 찾아보기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시니어는 ‘손에 들고 있는 숟가락을 찾는 경우’가 있다. 많고 많은 사진이나 자료를 손쉽게 관리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디지털화하기
하지를 지나서 날마다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있다. “올 여름 열대야가 처음 나타났다.”고 방송은 보도하고 있다. 산행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친구에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자.”고 연락했다. 이런 날 그간 생산하고 수집하였던 사진과 문서자료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하였다. 현대인은 간편·신속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많고 많은 사진이나 자료를 손쉽게 관리하는 방법으로 이를 관리번호를 부여하여 디지털화할 필요가 있다. 자료나 사진이 없어지기 전에 틈틈이 하나씩 디지털화를 권고한다. 한 번 보고 방치하면 나중에 다시 찾기 어려운 것이 모두의 경험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중요한 것은 디지털화하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자료정리의 한 방법이다.
연도별 관리번호 부여
사진, 문서 등 모든 자료에 관리번호 부여하기를 권장한다. 많은 종류의 자료를 장기간 관리하기 위하여 날짜순, 종류별, 일련번호 순서로 관리번호를 부여하고, 제목이나 주제를 기록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첫 8자는 연월일, 둘째 숫자는 종류구분, 끝으로 같은 날짜, 종류별로 일련번호를 부여한다. 예를 들면 ‘20151127.2.3 유치원 가는 길’은 2015년 11월 27일 쌍둥이 손주가 유치원 가는 사진이다. 이런 방식이다.
연도별 관리번호를 부여하면 다시 찾기에 매우 편리하다. 정확한 기억은 없더라도 대개 얼마 전은 추측하는 것이 모두의 경험이다.
종류별 파일관리
자료 건수가 많아지면 한 곳에서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종류별로 파일을 관리해야 편리하다. 사진은 ‘가족, 친구모임, 자원봉사, 평생교육 참여’ 등으로 구분하여 별도 파일로 보관한다. 많은 양의 칼럼이나 주요자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다시 분류한다. 기고기사나 자기작성 문서는 문서성격 등을 감안하여 분류한다. 예를 들어 ‘아들가족 2, 고교친구 모임 31,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95’로 부여한다. 문서도 같은 요령이다. ‘31’에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나 산행을 보관하고, ‘95’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활동을 관리한다. 평생교육 파일에는 ‘한 방에 익히는 시니어 재무 설계’ PPT 자료를 보관한다.
일련번호 부여하기
일자별, 종류별로 구분한 자료에 끝으로 일련번호를 붙이면 모든 사진과 문서는 중복 없이 정리할 수 있다. 대개의 자료는 파일 하나로 관리할 수 있으나 가족사진과 친구모임 사진은 양이 많아 연도별로 별도 파일을 만든다. 예를 들면 ‘2015년 가족사진, 2016년 친구모임’ 방식이다. 편의상 종류별로 구분하였으나 자료의 분량이 적은 경우에는 파일 한 곳에 여러 종류를 통합관리하면 편리하다.
위에서 소개한 것은 필자가 사용하는 방식의 한 부분이다.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조그만 참고가 되시기 바란다.
보육과 다닐 때 ‘왜 그랬을까’를 부른 쿨시스터즈 막내 은교가 과 친구였다. 그런데 은교가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와서 만났다. 그친구은 이름은 옥이다.
은교는 좀 화려한 마인드였던 데 비해 그 옥이는 어린 나이부터 가장 역할을 해온 처지라 더더욱 마음이 갔다.
이 친구도 노래하는 가수였지만 가장 역할을 하고 있고 차도 없이 서울 명동에서 천호동으로, 다시 영등포까지 이른 저녁부터 오밤중까지 이동하면서 노래하는 친구였다. 필자는 낮에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옥이가 노래하는 곳마다 가방과 구두를 들고 따라다녔다. 지금 말하자면 로드매니저 역할이었다.
무명가수였던 옥이가 방송을 타도록 필자는 엽서를 하루 수십 통씩 써서 보내고 옥이의 언니가 레코드샵을 낸다고 하여 필자 오빠를 동원하여 매장 매대 설계와 설치까지 도와줬다.
그러던 어느 날 옥이는 사소한 일로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매일 헌신해준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필자는 ‘나를 친구로 여겼다면 저런 태도는 안 보일 텐데’하는 맘으로 95번 버스를 타고 명동에서 집인 신림동까지 오는 내내 창피한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
우리 둘을 다 잘 아는 작곡가는 임종수 선생(옥경이, 고향역 작곡)은 황금당빵집에서 가방과 구두를 들고 우는 필자에게 위로의 말을 하였지만 옥이가 연락할까, 아니 필자가 맘약해 연락할것같아서 전화번호도 수첩에서 지웠다.
하지만 이 사건이 필자에겐 전화위복이 됐다. 갑자기 시간이 나게 된 시간을 체력장과 학력고사 공부하여 4년제 대학에 다시 입학한 것이었다.
그리고 4년이 흘러 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옥이가 먼저 전화했다. 대뜸 숫자 욕이 들어간 욕이지만 결국 무너졌다.
본인도 가슴이 멍들었지만 갑자기 매일 보던 친구가 몇 년간 연락 없으니 옥이도 힘들었던가 보다. 옥이와 필자는 이제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함께 가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불쑥 다시 만나는 사이가 이어지고 있다. 옛날 이야기할 때 옥이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야!! 너 나랑 다녔으면 행정학과 다시 갔겠니. 나 때문에 더 발전적으로 산 거야.”
이대목에서 웃어야 할지 아니라고 소리 질러야 할지 난감하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최근 영화 이 할머니와 손녀지간이라는 독특한 관계 설정으로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 , 등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를 그린 몇몇 영화들이 나왔었지만,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라는 점이 신선함을 주었다. 처럼 할머니와 손녀의 동거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 은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손녀의 한글 정복’이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돋보인다.
아들·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한글’로 채우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으로 시골에서 손녀 동이를 키우게 된 할머니 오난이는 아들이 남긴 다이어리와 편지를 읽기 위해 한글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죽기 전에 꼭 아들의 편지를 읽겠다’는 각오로 다문화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에 다니기로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선생이었던 부녀회장이 병원에 실려 가고 더는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오난이는 어쩔 수 없이 혼자 한글 공부를 하지만, 선생이 없어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모르는 채 지나가기 일쑤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본 동이는 그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실력으로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 갈 무렵, 일곱 살밖에 안 된 손녀에게 가르침의 한계가 찾아온다. 할머니보다 한글을 잘 알았지만, 시골로 내려온 뒤로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어 완벽하지 않았던 것.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낀 오난이는 학교를 찾아가지만 이내 거절을 당한다. 학교 직원에게 아들의 유품을 보여주며 “그동안 아들이 내게 보낸 편지들인데 내가 글을 못 읽어 미안한 마음에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았다. 죽기 전에 꼭 읽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한다.
마침내 초등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오난이는 손녀의 핑크색 책가방까지 메고 등교한다. 학교에 다닌 뒤로는 이전과는 반대로 오난이가 동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대화도 없이 서먹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들은 한글을 배우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한글을 익히고 아들의 편지를 열어보는데, 편지봉투 속 아들의 편지는 글이 아닌 사진이었다. 오난이는 “어미가 까막눈인 것을 알았구나”라며, 동이에게 “세상은 많이 안다고 잘 보이는 게 아닌가 보다. 글자도 세상도 마음으로 읽어야지”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한글을 가르쳐 주며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이 웃음 짓게 하고,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나고 사회적 수명인 정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제2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 즉 은퇴자금 준비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2 직업은 더 중요하다. 시니어들의 이러한 요구에 발맞춰 여러 민·관 기관에서 제2 직업에 관한 다양한 안내와 새로운 직업 소개를 하고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기보다 교육과 준비과정을 통해 새 인생에 어울리는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최근 제2 직업을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시니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펼치는 업체나 기업을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노사발전재단이나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은퇴자협회 등 여러 기관에서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를 전국 단위로 운영하고 있다. 이 일자리 희망센터를 이용하면 구인구직 정보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 관련 컨설팅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시니어 구인구직 단순직종에 집중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직업이나 일자리가 시니어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경비직이나 청소, 택배와 같은 단순 노무직이고 그나마 이런 일자리의 대부분은 40대를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연령이 높은 시니어들에겐 순서조차 돌아오기 힘들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센터가 최근 사회공헌형 일자리로 사업 방향을 옮긴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제적으로 자유롭거나 노후 자금이 해결된 시니어들은 단순직 일자리를 원치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그간의 경력을 살릴 수 있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 소득보다는 보람을 찾으려는 분들이 많아요. 수고를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죠. 저희 센터에서는 이런 시니어들의 요구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센터에서 준비하는 직업들은 경제적 소득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이나 참여 시니어들의 자부심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 중에는 건강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이 있다. 지역 치매센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도 인지장애(초기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인지학습 역할을 할 사회공헌 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밖에 바른먹거리전문가 양성과정은 유치원 등 각 교육기관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먹거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를, 다문화가족 서포터스 양성과정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요청을 받아 한국생활 정착의 멘토 역할을 할 지원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수익보다 보람과 자부심 얻을 수 있어야
지난해 도심권 50플러스센터를 통해 SNS전문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종로지역자활센터 등에서 강사로 활동 중인 김희순씨(64)는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니어들에 대한 직업 교육은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요. 재능기부를 통해 교육생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습니다. 예전엔 손주들이 와이파이 터진다고 하면 뭐가 터졌냐며 놀랄 정도였지만, 이제는 대화도 통하고 생활이 달라졌어요.”
물론 일자리나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현장에선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실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겹치게 되면 사업 자체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현장에서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활동 무대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성공적인 직업에 정리수납전문가가 있다. 정리수납전문가는 여성발전센터, 여성인력 개발센터 등을 통해 민간에 알려졌다가 현재는 협회까지 설립됐다. 한국정리수납협회의 정경자 협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정리수납은 보통 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시니어,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한 직업입니다. 평생 살림을 해온 분들은 원칙과 이론을 알려주면 금방 익숙해지거든요. 이렇게 새로운 직업을 만들거나 창업하려면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문성,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 구성원과 소비자를 대할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찾을 수 없다면 창직(創職)도 방법
새로운 직업에 대한 단서가 필요하다면 한국고용정보원(www.keis.or.kr)을 노크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곳에선 제2 직업을 필요로 하는 중년들을 위한 자료를 연구하고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올해 3월에 발간된 자료집 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인생 2막을 설계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도전하기에 적합한 직업 30개를 선정해 하는 일을 소개하고 해당 직업을 가지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다. 또 지난 5월부터는 중장년층의 창직 활동을 돕기 위한 라는 지침서를 배포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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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 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오늘과 비교되었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하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님이 만드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님에게 한글을, 어머님에게 산수를 익혔다. 하지만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님은 공책과 연필을 사주셨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낫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셨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 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님의 주의 말씀과 학교생활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를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김원휘 목사는 독립유공자다. 필자가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그리워 더욱 존경스러운 아버지다.
아버지 김 목사는 갑신정변의 해 1884년 7월 20일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의성군은 안동군과 함께 우리나라 유교의 본고장이고 한학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신학문의 흐름을 빨리 받아들여 대구에서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고 한국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로 진학했다.
1919년 방학을 마치고 면학을 위하여 평양에 갔을 때는 이미 독립운동의 격랑으로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귀향하는 길에 서울에 잠시 머물렀고 서울서는 독립을 위하여 전 국민의 궐기가 동시에 거행되어야 하며 독립투쟁을 위한 전 국민의 궐기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서울서 의성으로 귀향하는 길에 김천시에 들렸다. 같은 신학생인 김충한에게 김천에서의 독립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당부했다. 김천군에서는 그해 3월 11일에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10일에 김충한이 검거됐다.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함구하므로 3월 11일에 예정대로 김천시의 독립만세시위는 거행되었다. 김충한은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김 목사는 안동시의 녹전교회를 거쳐 의성군에 들어온다. 의성군에서는 녹전교회의 박영화 목사와 먼저 대구 시위에 참가하였던 계성학교 학생 박영신과 힘을 합쳐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총칼 앞의 무모한 맨손의 시위였다. 일본 고등경찰에 붙잡힌 김 목사는 고문과 재판 과정을 거쳐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악명 높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경북의 여러 지역교회에서 목회했다. 목회지마다 유치원을 설립하고 야학당을 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는 그 시절의 우리 민족의 시대적인 슬로건이었다. 민족의 힘을 기르는 온건하고 강인한 독립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 목사는 1949년 5월 23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지금은 대구 동구 신암동의 선열묘역에서 1994년에 소천한 어머니와 함께 평화스러운 안식하고 있다.
이창식 번역가( 저자)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요즘 들어 내 인생을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만년에 이르러서야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 소박해서 성공적인 삶이라 주장하긴 낯간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
2)손주들과 즐겁게 노는 것
3) 조강지처가 곁을 지켜주는 것.
이 세 가지를 위해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을 한 번 살펴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거예요.
아침 6시 정각에 내 휴대폰 알람은 울립니다.
“오 해피데이~”
노래 가사와는 달리 내 허리와 다리는 묵직합니다. 그래도 일어나야 해요. 꾸물대다간 딸과 사위의 출근에 지장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딸네 집으로 먼저 출근해야 그들도 출근할 수 있거든요. 여섯 살 외손자와 세 살배기 외손녀를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늙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갑니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냄비에 담고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립니다. 10분쯤 끓여야 익죠.
베란다 광에서 고구마를 꺼내 깨끗이 씻은 뒤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립니다. 6분쯤 돌리면 익습니다.
계란과 고구마가 익는 동안 파프리카, 비트, 사과, 토마토를 꺼내어 깨끗이 씻은 뒤 칼로 잘라 커다란 접시에 담아냅니다. 한 입에 쏙쏙 들어갈 크기로 말이죠. 아침마다 하는 일이라 손길이 제비처럼 날렵합니다.
커다란 컵 두 개에 우유를 반쯤 따르고 미숫가루를 탑니다. 아내가 특별 제조한 종합 영양식이죠. 현미, 검정콩, 수수, 귀리, 보리, 율무, 약콩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티스푼으로 다섯 술씩 넣고 잘 저은 뒤 식탁에 올려놓고 익은 계란과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내면 아침식사 준비 끝입니다.
샤워하고 화장을 끝낸 아내가 때 맞춰 부엌으로 나옵니다.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남자는 젊으나 늙으나 그런 여자를 기다리고 달래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는 자연히 내 차지가 될 수밖에요.
즐거워야 할 아침 식사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무슨 입맛이 나겠어요? 그래도 먹어야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나는 그냥 욱여넣다시피 합니다. 식사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겨를도 없이 집을 나섭니다. 평생 운전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나는 요즘 마누라 잔소리를 보슬비처럼 맞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잔소리가 심할 땐 더러 저항도 해보지만, 대개는 지당한 말씀인지라 내 목소리엔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분당 딸 집에 도착하면 7시 반. 손자 손녀는 이미 깨어나 뛰놀고 있습니다. 재영이는 유치원 2년생, 희영이는 어린이집 1년생이에요.
8시쯤 딸과 사위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들은 우리 책임입니다. 나는 부엌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도망다니는 손자 녀석 쫓아다니며 아침밥을 먹이고, 아내도 똑같이 손녀를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식사 끝나면 손자 세수시키고 유치원복 입혀 셔틀버스에 태우는 일은 내 책임이고,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아내 몫이죠.
아내는 오후 4시에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오고, 나는 오후 5시쯤 유치원에서 손자를 데려옵니다. 그때까지가 우리들의 자유시간인 셈이죠. 나는 CGV에서 영화를 감상하거나 거실 소파에 앉아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며 휴식을 취합니다. 아내는 근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쉽니다.
유치원에서 외손자 녀석을 데리고 돌아오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녀석은 쉴새없이 지껄입니다. ‘하찌’는 무슨 얘기든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동요를 합창하기도 하고, 보도블록을 따라 깡총깡총 뛰며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합니다. 미리 챙겨 간 과자와 우유를 녀석에게 먹이는 것도 잊어선 안 되죠.
녀석이 지껄이는 얘기는 대체로 두서가 없습니다. 줄거리도 없고 내용도 없을 때가 더 많죠. 그래도 나는 열심히 들어주며 맞장구를 치고 가끔 추임새를 넣기도 합니다. 어쩌다 기막힌 얘기를 할 때도 있거든요. 같은 반에 있는 시아란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얘기 같은 것 말이죠.
언젠가부터 녀석은 “재영이는 시아를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유치원에서 시아랑 결혼까지 했다는 겁니다. 아마 ‘웨딩게임’ 같은 걸 했나봐요. 시아와 결혼한 아이가 저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니까요. 또래 중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 더 많거든요.
“결혼하려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데?”라고 내가 말했더니,
“프로포즈가 뭐야?” 하고 되묻습니다.
내가 보도블록에 한 쪽 무릎을 탁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며 여자한테 꽃다발을 바치는 거야”라고 했더니 녀석은 대뜸,
“그렇게 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더니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어요.
“응, 그렇게 하고 결혼했어.”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죠.
“엄마하고 시아하고, 누굴 더 사랑해?” 하고 물었더니,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엄마.” 라고 조그맣게 대답했어요. 아직 어린애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근데 시아한텐 그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하는 겁니다.
“알았어.”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녀석을 안심시켜야 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이미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와 목욕시키고 있습니다. 손자 녀석 샤워는 내 책임이죠. 바로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내 허릿병이 도졌는데, 녀석 몸무게가 어느새 부쩍 는 걸 간과하고 덥석 안았던 탓이었죠. 허리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열흘째 한방치료를 받고 있는데도 아직 허리가 묵직하고 왼쪽 다리가 저리답니다.
사위와 딸이 귀가하는 8시까지는 하루 중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손자 손녀 따라다니며 저녁밥 챙겨 먹이고, 우리도 대충 한술 떠야 합니다. 집에 가면 밤 9시가 넘어 따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 엄마 아빠 기다리는 아이들도 지쳐 짜증을 부리거나 칭얼대기 일쑤죠. 녀석들을 달래야 하는 우리 노부부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지고요. 그래도 살살 달래며 같이 놀아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손녀가 울음을 터트리면 늙고 지친 아내가 둘러업어야 하고, 그러면 힘이 몇 배로 더 드니까요.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고도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 자신이 바로 ‘아주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손자 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이들의 머리에 ‘하찌=재미있는 친구’로 새겨져야만 합니다. 눈높이뿐만 아니라, 마음 폭도 같아져야만 해요.
그러려면 실력을 쌓아야 하겠죠? 웬만한 동요는 다 부를 줄 알아야 하고, 무용도 곁들일 수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동요와 무용에는 우는 아이도 금방 달랠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심하게 울던 아이도 하찌가 신나게 동요를 부르며 무용을 하면 뚝 그치고 빠져들 때가 많아요.
상황 연출력도 필요합니다. 울거나 투정부리는 녀석을 한순간에 다른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술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죠.
세 살배기 희영이가 악을 쓰며 웁니다.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니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할매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습니다. 또 둘러업어야 할 판이에요. 이럴 때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게 상황 연출입니다. 옆에 앉은 재영이한테 대뜸 이러는 거죠.
“재영아, 코끼리 어디 갔지? 방금 여기 있었는데. 소파 밑으로 들어갔나? 돼지는 어디 있지?”
그리곤 소파 아래를 들여다보며 계속 떠들어댑니다. 코끼리나 돼지나 염소 등은 희영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이거든요. 이쯤 되면 희영이도 울음을 그치고 함께 소파 밑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나는 한참 찾는 척하다가 장난감들을 슬쩍 꺼내며 다음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하죠. 동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리는 꽥꽥, 오리는 꽥꽥, 염소는 음메에, 염소는 음메에, 돼지는 꿀꿀, 돼지는 꿀꿀, 소는 음무, 소는 음무.”
상황 연출은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가 완전히 잊어버릴 때까지 충분히 오래 끌어야 합니다. 다른 세계로 완전히 밀어 넣어야 하니까요.
여섯 살배기 손자 녀석이 울 때는 그보다 정교하고 급박한 연출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도구도 달라야 합니다. 녀석이 즐겨 갖고 노는 장남감들을 총동원하는 거죠.
“재영아, 덤프트럭이 버스와 충돌했어! 트럭이 넘어지고, 버스도 뒤집히고, 굴삭기와 경운기도 쓰러졌네! 어쩜 좋아? 사람들이 많이 다쳤을 거야! 그러니까 운전할 땐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하찌가 그랬어, 안 그랬어? 빨리 구급차를 불러. 삐뽀! 삐뽀! 경찰차도 불러야지. 애앵! 애앵!”
상황은 새로운 내용을 보태며 계속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최대한 진지하고 박진감 넘치게 끌고 나가야죠. 아이가 울고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하고 끼어들 때까지. 그래서 마침내 하찌와 함께 즐거운 게임을 벌일 때까지.
귀가한 사위와 딸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9시 뉴스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TV를 보며 대걸레로 방바닥 먼지만 대충 훔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죠. 6시에 울릴 휴대폰을 머리맡에 놓아두고요. 후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주말 휴식이 월요일부터 기다려집니다. 그래도 잠자리에 누우면 재영이와 희영이의 웃는 얼굴이 맨먼저 떠오릅니다. “고것들 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녀석들 아니면 도대체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할매·하찌 기운을 쏙 빼놓지만 동시에 수많은 웃음을 선사하니 참으로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내년이면 희영이도 네 살이 되니 좀 수월해지겠지, 생각하며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떠했나요? 지금은 어떤가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나요?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겠죠.
신입사원 시절 저는 가전회사 판촉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사직한 뒤엔 영미 추리소설을 번역하며 먹고살았죠. 칠순을 코앞에 둔 지금 되돌아보니, 냉장고 세탁기 팔려고 뛰던 그 시절이나 남들이 쓴 책 번역하느라 골머리 앓던 그 시절이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내게 남은 건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절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군요.
1. 나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식을 지켜보고 있다.
2. 손주들과 날마다 즐겁게 놀고 있다.
3. 조강지처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자, 이래도 내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창경궁에서 숲 해설과 왕실 역사 강의가 있다 하여 갔다. 그런데 창경궁을 창덕궁으로 잘못 알고 갔다. 종로3가에서 내려 돈화문 쪽으로 10분 정도 걸었다.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창덕궁에 들어갔으나 창경궁은 창덕궁 안쪽으로 가서 다시 표를 끊고 가야 한다 하여 대략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시간이 늦어 빨리 가야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담장을 끼고 원남동 정문인 홍화문으로 갔다. 담장이 꽤 길었다. 빠른 걸음으로도 20분 정도 걸렸다.
원남동로터리가 보였다. 전철역이 멀어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보신탕에 얽힌 얘기이다. 필자가 군 입대를 1년 미루는 바람에 친구들 군대 송별회를 필자가 다 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필자가 군 입대를 할 때에는 모두 군에 있어 송별회도 제대로 못 받고 입대했다. 그래서 필자가 제대할 때 친구들이 대대적으로 신세를 갚는다며 부른 곳이 원남동로터리 보신탕집이다. 그 당시 원남동로터리에 보신탕집이 몇 군데 있었다. 인근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잘 안다며 데려간 곳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보신탕이 처음이었다. 전골로 나왔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깻잎만 건져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나중에 중소기업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일할 때 도움이 되었다. 기존 임원들이 젊은 공장장 기를 죽이자며 경기 성남시의 보신탕집에 데려 간 것이다. 두 번째 보신탕을 대하는 자리이므로 보신탕이 낯설지 않았다. 너무 맛있게 잘 먹으니 젊은 사람이 보신탕을 잘 먹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장장이었으므로 여름 피크시즌이 지나면 생산부 전원이 인근 개울가에서 보신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야유회에도 가야 했는데 거기서도 같은 칭찬 들었다.
창경궁의 추억은 필자가 군에서 제대한 바로 다음 해인 1976년에 이어졌다. 보신탕 덕분에 창경원을 생각해 낸 것이다. 복학하고 나니 1,2학년 여자 후배들과는 세대 차가 나서 같이 못 놀고 3,4학년 여학생들은 이미 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군 입대 전 가깝던 동아리 여자 후배가 근처 유치원에 배치받아 일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만나니 정도 들었는데 같이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가게 된 것이다. 인파는 북적이고 흙먼지가 날려 분위기는 부산스러웠다. 그 여자 후배는 사실 집안에서 어릴 때 정해준 약혼자가 있으며 결혼하게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살 예정이라고 했다. 시골 내려가기 싫어 마음이 움직이던 중 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전화를 사용할 때라서 전화할 때마다 원장이 받았다. 나랑 데이트하는 것을 눈치 챈 원장이 불러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조용히 타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밤벚꽃놀이 하는 날 이별장을 받은 셈이다.
세 번째 추억은 어렸을 적, 창경원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주사가 심한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어디서 호랑이 똥이 술 끊는 데 효과가 있다 하여 어머니가 여기서 어렵게 호랑이 똥을 구해 오셨다. 연탄불에 대야를 얹고 호랑이 똥을 태워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루를 걸러 그 당시 귀하던 양주병에 소주와 함께 타서 진열장에 놓아두었다. 조니 워커 병에 든 빨간 술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걸 드신 아버지는 여전히 주사가 심했고 같이 드신 작은아버지는 그 후로 이상하게 술이 안 받는다며 효과를 보였다.
그러니까 40년 만에 창경궁을 다시 가보게 된 것이다. 원남동로터리를 지나니 맞은편에 서울대 치과대학 건물과 암병동이 보였다. 창경궁 입장료는 1000원으로 창덕궁에 비해 쌌다. 화창한 봄날에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젊은 처녀들이 많이 보여 예뻤다. 알고 보니 근처에 1만5000 원 내외로 한복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그 옛날 그렇게 많던 벚꽃나무를 찾아 봤으나 안 보였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벚꽃나무들은 서울대공원과 여의도 등지로 옮겨 심어졌다는 것이었다. 창경원은 원래 창경궁이었으나 일제가 왕실 권위의 훼손 목적으로 다수의 건물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을 짓고 벚꽃나무들을 대량으로 심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09년부터 서울 시민들의 관광명소가 되었으나 역사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1986년 식물원은 그대로 두었으나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을 옮기고 다시 창경궁으로 원 이름을 찾게 되었다.
창경궁은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 숲속의 그늘이 조용한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아 보인다. 나와서 북쪽으로 20분쯤 걸어가면 혜화역과 대학로가 나온다. 저녁식사 겸 맥주 한 잔 하기 좋은 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