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우리나라 사계절 중에서 여름철 건강관리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요즘 같은 폭염에 지치고 땀을 많이 흘리면 체력 소모가 많다. 필요한 영양을 반드시 보충해줘야 한다. 당분이 많이 첨가된 찬 음료나 아이스크림 같은 얼음 종류의 음식은 위장을 자극하기 때문에 적당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럴 때는 참외나 수박처럼 수분이 많고 시원한 과일로 대체하는 게 좋다. 요즘은 사계절 언제든 과일을 먹을 수 있지만 제철 과일의 맛과 영양은 따라올 수 없다.
참외는 심혈관 질환을 예방하고 천연 항산화제인 베타카로틴이 풍부해서 나쁜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걸 막아준다.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엽산은 특히 씨가 붙은 부분에 많다. 식이섬유도 나트륨을 제거해주고 활성산소를 억제, 제거한다고 알려져 있다.
수박은 수분이 엄청 많아 수분 보충, 피부 보습에 좋다. 이뇨작용 효과도 커 나트륨 등 노폐물 제거와 부기 완화에도 도움을 준다. 항산화 물질인 베타카로틴과 리코펜, 칼륨과 식이섬유는 콜레스테롤을 낮춰준다. 수박의 단맛과 비타민C는 피로 해소를 도와준다.
참외와 수박은 무더위를 이기는 여름철 대표 과일이다. 참외와 수박을 이용한 손쉽고 간단한 음식으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레시피를 소개해본다. 특별한 추가 재료도 필요 없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채소들을 활용하면 된다.
♧참외 샐러드
재료: 참외, 게맛살(또는 닭가슴살), 무순, 방울토마토
드레싱: 레몬즙, 까나리액젓, 올리브오일, 설탕, 매실청, 다진 마늘, 다진 견과류
*참외 외의 채소나 소스 재료는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
♧참외 냉국
재료: 참외, 오이, 방울토마토
국물: 물, 국간장, 설탕, 매실청, 소금, 파, 통깨
♧참외 피클
재료: 참외, 설탕, 소금, 식초, 물, 월계수 잎, 향신료 약간
*분량의 재료를 끓여 식힌 후, 슬라이스해서 병에 담아둔 참외에 붓는다. 냉장보관.
♧이국적인 수박 주스 ‘땡모반’
재료: 수박, 얼음. 레몬즙 또는 탄산수. 소금. 꿀 또는 올리고당, 사이다
*블렌더에 재료를 넣고 갈아준 뒤 컵에 3분의 2쯤 담고 나머지는 사이다로 채운다.
수박은 잘라서 먹는 맛도 있지만 주스로 마시는 것도 좋다. 태국 음료인 수박주스는 ‘땡모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한 번쯤은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줄 이국적인 음료를 만들어보자.
장맛비가 오락가락하고 폭우와 폭염으로 주춤해진 일상이다. 그사이 해바라기는 벌써 피고 지고 있다. 길도 나지 않은 언덕을 오르기 전 백련이 가득한 연못을 지나는데 군데군데 남아 있는 수련이 생존을 알린다. 밭둑 위로 노랗게 해바라기 군락이 보인다. 풀섶 둑길을 걸어도 뜨거운 김이 훅훅 느껴지는 여름날이다.
조붓한 그 길을 따라 오른 언덕 위 넓은 밭에는 해바라기가 장마와 폭염으로 무참하게 축축 늘어져 있다. 마치 뙤약볕 아래서 처절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광활한 벌판에 모두 함께 뒤섞여 피어 태생적으로 고독과 외로움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는데 수만 평의 풍광은 지독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태양의 꽃(sunflower)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해바라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자비한 무더위 속에 늘어진 채 맥을 못 추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이 발동한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태양을 바라보던 모습은 간데없다. 이렇게 지구가 변해가고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 우리가 산다.
세파에 지쳐 고개 숙인 해바라기 모습만큼이나 그리스 신화 속의 해바라기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물의 요정 크리티에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사랑했으나 아폴론은 바빌론 왕의 딸인 레우코토에를 흠모했다. 질투에 사로잡힌 크리티에의 모함으로 레우코토에가 죽자, 아폴론은 크리티에를 더 철저하게 외면했다.
사랑을 받지 못해 상심한 크리티에는 하루 종일 아폴론의 상징인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앉아서 해만 바라보았다. 9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해만 바라보던 그녀의 다리는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가 되고 얼굴은 꽃이 되었다. 그 꽃이 바로 ‘태양의 꽃’ 해바라기다.
해바라기는 자생력이 강해 어디에서나 쉽게 뿌리내리고 번식한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키가 2m 정도 되는 키다리 식물이다. 까슬까슬한 털이 억세지만 꽃은 밝고 환하며 지름은 8∼60cm로 제법 크다.
해바라기는 이런 신화가 아니어도 떠올려지는 이야기가 많다. 열정적이었던 화가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있고, 잘 알려진 드라마나 노래도 있다. 그중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던 영화 ‘해바라기’를 가장 많이 떠올릴 듯싶다. 영화 시작부터 끝도 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의 물결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볼 만했다. 게다가 배경 음악은 또 어찌나 가슴 저리게 했는지. 그뿐만 아니다. 어쩐지 해바라기와 소피아 로렌의 인생도 함께 겹쳐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스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듯 소피아 로렌도 파스타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내 몸은 스파게티로 만들어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난했던 그녀가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그냥 다섯 가지 파스타를 매일 먹을 수 있는 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어서…"라고 했다. 미모만큼 사랑스러운 배우다.
그랬던 그녀는 16세에 만난, 이십여 년 나이 차이가 나는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와 결혼한다. 그리고 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스캔들이나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 폐 합병증으로 남편 폰티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재혼을 묻는 질문에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오직 남편만 바라보는 사랑을 보여줬다. 영화 해바라기에서처럼 86세인 그녀는 지금도 혼자 살고 있다. ‘해바라기’는 당연히 그녀의 인생작이고 여전히 소피아 로렌만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그뿐인가. 아주 오래전의 경쾌한 노래도 있다. 가수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선플라워’(Sunflower)는 풋풋했던 그 옛날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들려와도 즐거웠고 무심코 혼자서 흥얼거려도 기분 좋은 리듬의 노래였다. 누군가는 케케묵은 리듬이라 웃겠지만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해바라기 밭을 오가며 느닷없이 기억 속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기분 좋은 순간이다.
“해바라기, 좋은 아침, 당신은 언제나 기분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는군요(Sunflower, Good morning, You sure do make it like a sunny time)"라고 시작하는 긍정적인 노랫말처럼.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숭배', '기다림' 등의 꽃말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그 느낌이 전해지는 꽃. 영화나 그림이나 노래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하늘을 향한 그리움과 희망으로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의 마음이 저절로 느껴진다. 비록 폭염과 폭우와 세상을 뒤덮은 바이러스가 기진맥진하게 할지라도 해바라기의 노란 희망처럼 이 험한 시절을 모두들 잘 건너가시기를.
영화 포스터의 멘트와 스틸 컷이 기대를 하게 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연일 내리는 장맛비와 열대야가 더해져 습한 더위가 이어지겠다고 말한다. 고온다습한 8월 한여름, 머릿속 복잡하게 엉킨 일들을 그저 우두커니 방치하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문득 122분짜리 프랑스 코미디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기분을 좀 가볍게 해줄까 하며 VOD 버튼을 눌렀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울퉁불퉁한 몸매의 남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서 있는 포스터를 보니 여름을 위한 영화 같다. 편안하게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감독은 질 를르슈. 영화배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공동 연출한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은 보고 싶은 영화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그가 단독으로 각본과 연출을 맡아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기욤 카네는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논-픽션'에서도 봤는데 연달아 그의 연기를 감상하게 됐다.
경제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 직장에서 밀려나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하는 남자들이 어느 날 뭉친다. 수중발레팀 모집 공고에 신청하면서 오합지졸의 중년 남성들이 감히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대회에 도전하며 겪는 이야기다. 배우들의 망가진 모습이 압권이다. 그 모습이 당사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배우들의 높은 연기력 때문이 아닐런지. 그렇게 또 다른 어벤저스가 시작된다.
마땅한 일자리도 커리어도 없는 남자들이 모여 수중발레라는 스포츠에 도전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생각만큼 안쓰럽지 않다. 물론 미숙하고 실수투성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웃음이 터지곤 했다. 종종 아릿한 마음으로 응원을 하게 되는 건 그들이 최선을 다하며 진지했기 때문이다. 도전 속에서 차츰 심리적 안정을 찾고 단단한 마음 근육이 생겨나는 모습은 기쁨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일반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수중발레에 도전한 어리숙한 이 남자들은 훈련하고 충돌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그리고 결국 높은 산을 넘어선다. 평범한 영웅들이 전하는 재미에 소소한 위로까지 얻는다.
훈련 중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찰지게 등짝을 후려치며 거칠게 야단을 치는 열혈 코치 아만다가 나올 때마다 빵빵 웃었다. 그게 통쾌함 때문인지 대리만족 때문인지 정말 상황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웃기니까 무조건 좋다. 게다가 지치지 않고 훈련하는 그들의 어리바리한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간간이 왜 저러지 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재미있는 영화로만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끔씩 나타나는 웃음 포인트,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응원하다가도 과연 어떤 결말일지 미리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모두들 예상하는 결과일 수는 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옥신각신하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거기에 가족 간의 사랑, 부부간 위기극복의 모습도 빠지지 않는다.
만만찮은 과정을 거치고 인생의 낙오자들이 어벤저스로 거듭나며 들판에서 일몰을 함께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 멋진 엔딩이다. 기분 좋게 뭉클하다. 혼자서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고단한 세상, 그 누구의 삶이든 모두 해피하기를 바라는 요즘의 내 마음이 너무 티 나나?
My Dear 피노키오展, 아무런 정보 없이 가서 봐도 친근한 전시 제목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말이 진실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래서 정직함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게 했던 이야기 ‘피노키오의 모험’.
'피노키오'는 1883년 이탈리아 작가 콜로디의 동화로 탄생했고 우리에게는 월트 디즈니가 각색하고 제작한 '피노키오의 모험'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하다. 착한 목수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만든 피노키오 인형 이야기는 동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껏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가까운 벗처럼 친숙한 캐릭터인 피노키오를 주제로 한 전시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동안 책이나 영화 등에서 봐왔던 것과는 달리 쉽게 접하지 못했던 관련 희귀 도서나 소품들도 진열되어 있어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크다. 특히 국내외 작가들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표현한 피노키오 작품 173점도 전시돼 있다.
환하고 밝은 분위기의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 섹션 '서막: 피노키오의 모험'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섹션의 작가는 카를로 콜로디.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누구나 유명 작가들의 피노키오의 해석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공간이다. 플래시 없이 대부분 촬영도 가능하고 군데군데 쉴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영상이나 나무로 설치된 작품과 소소한 소품 전시가 계속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작권 보호 때문에 촬영을 할 수 없었던 로베르토 인노첸티 작품 위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나무토막으로부터 학교에 다닐 즈음의 나이로 만들어진 피노키오는, 유아기를 지나며 성장하는 과정 없이 그렇게 곧바로 세상 속으로 던져졌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많은 작가가 피노키오 캐릭터에 집중할 때 피노키오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 속에는 피노키오의 성장 스토리가 녹아들어 있다. 마을이나 마을 사람들, 시대적 풍경이 피노키오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했다. 화풍은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소박하고 적막한 골목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앤서니 브라운, 제럴드 맥더멋, 마우리치오 콰렐로 등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션 거장들이 그려낸 개성 넘치는 피노키오를 볼 수 있도록 몇 개의 전시관이 이어져 있다. 국내에서는 민경아, 조민서 작가 등이 참여했다. 이들이 독특하고 현대적인 감성으로 우리가 몰랐던 피노키오 이야기를 풀어놓아 시종일관 흥미롭다.
피노키오를 소재로 한 그림과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영상 역시 재미있다.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도 있는 관람을 시도해 눈길을 끈다. 시간 맞춰 도슨트 해설을 들으면 이해도 쉽고 몰랐던 사실까지 알게 된다.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된 복합 전시 'My Dear 피노키오展'이다
전시장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주부가 유난히 많았다. 피노키오라는 동화적 특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작가 콜로디는 동화를 쓰면서 "어른들은 즐겁게 해 주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작가들의 동화적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기성세대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준다.
전시장 입구부터 노랑과 분홍, 파랑 등의 밝고 과감한 색감이 압도한다. 그림동화다운 따스하고 서정적인 느낌 속에 푹 파묻혀 작품을 구경하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낄 것이다.
전시기간: 6월 26일~10월 4일
관람시간: 10시~19시(매표 및 입장 마감 오후 6시) 매주 월요일은 휴관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장료: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000원, 어린이 1만 원
★ 그림자 극장: 토․일요일 11:30 / 13:30 / 16:00 (선착순 20명)
★ 도슨트 해설: 화요일~일요일 11:00 / 13:00 / 15:30 / 17:00
★ 구연동화 : 피노키오의 오리지널 이야기(화요일~금요일 14:30 / 16:30)
연밭에 들어서기만 해도 연못의 수온이 후끈하게 다가오는 여름이다. 더위가 시작되면 넓은 연밭 가득 피어나기 시작하는 연꽃들은 제각각의 색상으로 품위를 내뿜기 시작한다. 한여름 땡볕에도 그 미모를 발화한다.
대부분의 연못은 여러 군데로 구획되어 있다. 열대 수련이 모여서 피어나는 데가 있고 잔잔한 모습으로 노랑어리연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못도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희귀 연들이 물 위를 덮고 있다. 진흙 속에서도 청결함이 돋보이는 백련과 홍련이 탐스럽다. 부처님의 진리가 스민 연꽃이 힘든 세파 속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다.
차츰 연꽃이 지고 나면 이어서 볼 수 있는 희귀한 꽃이 있다. 밤에만 꽃을 피우는 것으로 유명한 빅토리아연꽃. 우리가 흔히 보던 연과는 다르다. 연꽃 중에서 가장 큰 잎으로 쟁반처럼 물 위에 떠 있다. 잎의 지름은 1~2m가량. 어린아이가 앉아도 될 만큼 탄탄하다. 잎 표면은 짙은 녹색으로 반질거린다. 뒷면은 붉은색이다. 가시 같은 털이 붙어 있고 톱니바퀴 모양을 하고 있어 큰가시연꽃으로도 불린다. 꽃의 크기도 지름이 20~40cm나 되고 4개의 꽃받침에 꽃잎 수는 150장 정도 된다.
빅토리아연꽃은 남미 아마존 강 유역에서 자라는 열대성 수련과 식물이다. 7~9월경에 피는 꽃으로 영국의 식물학자가 처음 발견했다.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학명을 ‘Victoria regia’로 명명했다고 한다. 빅토리아연꽃은 3일간 밤에만 핀다. 좀처럼 보기 힘든 도도한 꽃이다.
첫날은 절반만 피고 이틀째에 활짝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낸다. 그리고 3일째에는 연밥과 꽃술만 남기고 안타까이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린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시구처럼 연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일 때 떠난다.
여름철 저녁이 되면 빅토리아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연못가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마치 출산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숨죽이며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예민해져 있는 빅토리아연꽃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불빛도 줄이고 말소리도 낮춘다. 빅토리아연꽃은 순백색과 붉은 계열이 있다. 붉은 연은 처음에는 흰색이었다가 점점 붉은색으로 짙어진다. 차츰 벌어지다가 오므라들며 왕관 모양으로 변한다.
귀족처럼 우아하게 피어난 빅토리아연꽃은 달빛을 받아 고고하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면 물속으로 잠기며 장렬하게 사라진다. 단 이틀간의 고고한 자태로 화려한 대관식을 하고 절정의 순간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이토록 덧없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떠나는 빅토리아연꽃의 신비한 생애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가는 즈음이다.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
피자는 골고루 맛보리라 생각하며 떠났기에 피자집이나 음식점, 그리고 길거리를 다니며 피자를 먹어댔다. 물론 서울에서 먹던 불고기 피자는 당연히 이탈리아에 없었다. 내가 다닌 장소의 한계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으나 새우나 감자 고구마가 토핑 재료였던 피자도 보질 못했다. 25년 전 로마 여행 중에 먹었던 피자도 채소라곤 거의 없었고 쟁반만큼 크기만 했던 피자였는데 지금은 그 맛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엔 지중해의 채소와 시큼하고 쿰쿰한 듯 고소하고 부드러운 치즈가 듬뿍 얹힌 피자를 실컷 먹었다. 그 특별한 맛을 만끽하느라 사진 찍는 걸 자꾸만 잊곤 해서 인증샷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그중에서 내가 매료됐던 피자는 바삭한 도우에 토핑으로 큼직한 채소가 푸짐하고 널찍하게 올려져 있는 피자였다. 무엇보다도 채소의 단맛이 풍부하다. 지중해의 태양을 받고 자란 올리브와 양파, 가지. 호박. 파프리카 등의 채소가 잔뜩 올려져 있는데 한 조각만 사도 내 얼굴을 덮는 크기여서 아쉬움 없이 흡족하다. 조각 피자는 베네치아 여행 중 수상 버스에서 오르내릴 때마다 한 조각씩 사 먹기도 했다. 밀라노에서는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먹을 수 있어서 남편과 둘이 한 판 시켜놓고 간신히 다 먹었다.
신기한 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서 한 판을 다 먹어치운다. 마치 우리가 파전 한 장 먹어치우듯, 제과점에서 간단히 빵이나 파이 하나 먹고 나가듯 간단히 먹고 나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피자(Pizza)와 함께 리소토(risotto) 파스타(Pasta) 3종 세트 모두 맛보았는데 다행히 운 좋게도 모두 내 입에 딱 맞아떨어진다. 이태원에서 먹었던 이탈리아 본고장의 맛이라던 것과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풍미가 다르다. 코끝을 자극하는 해산물의 풍미와 푸짐한 양이 마냥 행복하다. 지중해의 태양이 익혀낸 올리브와 빨간 토마토가 주는 정열적인 풍요로운 느낌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토마토와 해산물과 올리브유의 절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조화가 입 안에서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다르달까 아쉽달까 맛은 내 입맛에 더없이 잘 맞았지만 그릇에 담음새가 그리 이쁘지 않았다. 혹시 최고급 식당이 아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널찍하고 이쁜 접시에 깔끔하게 세팅되어 나오는 서울과는 다르다. 접시에 그냥 담기는 그대로의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물론 이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저 여행지의 다른 모습 그대로 보고 즐기기로 한다.
한 번은 그날이 마침 이탈리아의 휴일이었다. 문 연 가게가 많지 않았는데 밀라노 숙소 근처의 레스토랑이 문을 연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간신히 빈자리 하나 찾아서 앉을 수 있었다. 리소토도 스파게티도 커피도 모두 기대 이상이다. 운이 좋다. 한 잔 마신 맥주까지 입 안에 감칠맛을 돌게 한다. 충분한 양으로 허기와 갈증을 마음껏 채우며 그 맛을 즐기던 저녁이었다. 무엇보다도 홀 안을 흐르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귀를 시원하게 뻥 뚫어준다. 음악의 나라였던 것을 실감하며 먹었던 그 저녁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느 날은 밀라노 시내의 식당에서 알 수 없는 글자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그나마 알만한 단어가 들어있는 메뉴를 주문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체모를 요리가 나왔다.
당황스러워하며 난감하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셰프가 다가와서 '원했던 요리가 아니구나?'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걱정 마라' 안심시키는 얼굴로 돌아가더니 토마토 파스타를 한 접시 만들어 내왔다. 한 그릇 값만 받을 테니 아까의 그 음식도 먹고 이것도 먹으라고 한다.
어찌 고맙기만 할까. 셰프의 따뜻한 인간미에 이탈리아 여행의 기억이 기분 좋게 달라진다. '땡큐' 대신에 '그라찌에'란 말을 이때 한 번 사용했다.
특히 운이 좋았던 것은 커피 맛이었다. 호텔 조식의 커피도, 시내에서 마셨던 커피들이 모두 내 입에 good~. 까다로운 입맛의 남편도 동감했던 커피였다. 진하면서도 거부감 없는 쌉싸래한 개운함과 뒤끝의 단맛이 흡족한 풍미를 준다.
밀라노 거리를 걷다가 커피 가게를 지날 때마다 바람결에 날아와 코끝을 스치던 짙은 커피 향은 지금도 때때로 그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걸으면서 먹었던 것 중에는 아이스크림도 빼놓을 수 없다. 산시로 축구장 가면서 먹었던 입안에서 쫄깃하고 부드럽게 녹는 젤라토의 달콤함 역시 잊지 못할 맛이다. 여행 중 맛의 기억은 냄새나 입 안에서의 질감으로도 여행지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의 맛은 대체로 내게 안성맞춤처럼 괜찮았다. 하긴 아마도 허기진 여행자와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마늘을 사용하고 느끼함이 덜한 담백함이 우리네 입맛과 닮아서인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이탈리아 요리를 잠깐 배울 때 시연한 요리 선생님도 시식하는 우리에게 '입에 안 맞는 거 없을 거예요' 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양념과 식재료가 우리 입맛과 비슷한 친근함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 지리적 환경도 비슷하다. 또한 마늘을 맛 내기의 기본으로 하는 공통점도 동질감을 갖게 한다. 마침 근처에 대형 식재료 마켓이 있어서 그곳을 떠나 올 때 토마토소스와 올리브, 올리브유, 바질 페스토와 발사믹 식초 등 본토의 식재료 몇 가지를 담아왔다. 일상에서 때로 현지의 재료로 요리를 하면서 여행지의 추억을 소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
여행지에서든 어디서든 아무거나 잘 먹던 내 입맛이 언제부터인가 나랑 안 맞을 때가 가끔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로 수수하게 무난했고 맛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설렘이 입맛을 끌어올리기도 했겠지만, 다행히도 그 모든 게 잘 맞아줘서 그저 좋았다. 아니, 그라찌에(Grazie) ~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고 있다. 충남 서천 여행 중에 마침 한산 모시관이 있어 들렀다. 예로부터 한산 모시는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를 보여주는 한여름 최고의 전통 옷감이었다. 무더위를 이기게 해줄 간소하면서도 시원한 옷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요즘이지만 옛 어른들은 모시옷으로 더위를 잊었다.
산아래 멋진 한옥으로 단정하게 지어진 한산 모시관으로 들어가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백제시대 때 모시풀을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 건지산 기슭이었기 때문에 모시관을 이 땅에 지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니 뜰 한쪽 작은 밭에서 재배되고 있는 모시풀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심어놓은 듯했는데, 마치 깻잎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산 모시로 만들어진 품격 있는 역사 속 옷들을 보고 싶었다. 지하 1층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시의 역사와 함께 시대별 전통 복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신분과 관계없이 옛 조상들이 입었던 옷과 의복 재료로 다양하게 사용된 모시의 우수한 품질을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한산 모시의 유래와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시된 글에는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하여 모시 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2층에서는 4000번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한산 모시의 제작 과정을 영상과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동양의 5원색 백․청․황․적․흑의 천연염료로 만들어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들도 감상할 수 있다. 역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무화유산으로 불릴 만하다.
전통관 안채에서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 모시 짜기 보유자 방연옥 선생의 시연을 보며 전통 공예의 섬세함과 인내의 작업 과정을 이해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다는 모시올은 작업자들의 입술과 이로 뽑아낸다고 한다. 그렇게 뽑은 모시올을 모아 모시실을 만들고 그 모시실을 베틀에 올려 한 필을 만들어내는 데 무려 5개월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 과정을 직접 보니 소중함과 특별함이 더했다.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에 모시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모시 째기’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이[齒]를 사용하는데,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 쪼개다 보면 피가 나고 이가 깨지는 고통스러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에 골이 파지고 모시 째기가 수월해진단다. “길이 들어 몸에 푹 밴 버릇”일 때 흔히들 “이골이 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분들의‘이골이 나는’작업에서 생겨난 말이다.
한산 모시 홍보관에서는 모시로 만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립 농산물품질관리원의 엄격한 품질 기준에 따라 유통 판매가 이뤄지고 있어 믿음이 간다.
모시 전시관에서 연결된 육교 건너편에 한산모시 공예마을이 있어 넘어가 봤다. 1500년 전통의 한산 모시를 현대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모시옷 입기 체험, 미니베틀 체험, 천연염색, 부채 만들기, 모시 공예, 한산 모시식품 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모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시간이다. 미리 예약하고 방문하면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시옷은 더운 여름 특별한 경우에만 입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가격도 아니어서 대중적이지 못한 편이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듣고 살펴보니 한 번쯤 입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는 한산 모시가 얼마나 시원하고 착용감이 좋은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이 가늘고 고울 뿐 아니라 통풍까지 잘되는 우리의 여름옷이 바로 모시옷이다.
집 밖을 나서면 걷거나 또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서 목적지를 향하게 된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요즘은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리고 여행을 하거나 아주 먼 거리 이동을 할 경우엔 비행기나 기차, 버스는 물론이고 여객선 등의 교통수단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준다.
그동안 누가 뭐래도 여행의 맛은 기차였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각 지역의 모습과 계절의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셀렌 여행길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KTX라는 빠른 기차를 이용하면 전국 아무리 먼 지역도 당일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시간 단축을 선사한 것이다.
얼마 전 섬 여행을 했을 때는 다섯 가지 이상의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KTX로 두 시간 달려간 도시에서 버스로 한 나절 돌아다녔다. 그리고 여객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조용하고 호젓한 섬 신안의 12사도 순례길을 앞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이동수단의 기본인 두 발로 긴 시간 걷는 행위가 사색과 치유의 시간을 준다는 것, 그래서 걷기 열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자전거로 돌아보아도 좋다. 근래 들어 코로나19 확산이 장기화하면서‘언택트’(비대면) 이동수단으로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분홍색 자전거를 빌려 천천히 섬을 돌아보는 재미도 있다.
다시 섬을 나올 때는 여객선을 타고 나와 약 한 시간 정도 요트를 타는 호사를 누렸다. 신안 섬 다도해를 즐기는 요트 투어가 있었다. 요트는 누구나 타기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한다. 예전보다 대중화하고 있는 중이어서 가격도 많이 낮아졌기에 한 번 용기를 내볼 만하다. 누구나 즐겨봄직한 다채롭고 재미있는 해양 레포츠다. 우리나라에는 부산, 제주, 여수, 통영, 신안 섬 등 요트 타기 좋은 바다가 많다.
그리고 목포로 나와 역으로 가기 전에 잠깐 해상 케이블카로 도심을 즐겨볼 수 있다. 땅과 바다는 물론이고 하늘 높이 날아보자. 케이블카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목포 시내 전경과 유달산의 속살을 내려다볼 수 있다.
유달산 아래로 명량대첩의 요충지였던 고하도가 용의 모습으로 앉혀져 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서 목포 근대문화 거리와 옥단이 길을 찾아본다. 내리막 끄트머리쯤에 세월호가 누워 있어서 바라보는 마음이 아프다. 틈새 시간을 이용한 도시 구경이다. 짧은 여행 중에 묵묵히 두발로 걷고, 버스, 자전거, 여객선, 요트, 해상 케이블카, 왕복 KTX가 함께했다.
우리에게 탈거리가 이뿐일까.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다.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것 중 보트 타기와 패들보트가 있다. 부모 세대는 그저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구경이나 하는 줄 안다. 물론 패들보트는 강습을 받고 타도 일어나려면 물에 빠져버리기 일쑤다. 아이들처럼 우뚝 서진 못해도 그저 물 위에 엎드려 유유히 손으로 물을 밀어내며 바다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 없이 재미있다. 아이들에게만 어울리는 놀이라는 고정관념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카약을 한 번 타보는 건 어떨지. 연인들이 데이트할 때 보트 위에 둘이 앉아서 유유히 물 위를 나아가는 모습이 먼저 연상될 것이다.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다. 서툴게 노를 저어도 바다 위를 즐길 수 있다. 안전교육과 구명조끼, 안전요원까지 있으니 그리 겁낼 일은 아니다.
또는 바다 위를 빠르게 달리는 보트 타기를 경험해보는 것도 신난다. 튀어오르는 바닷물을 맞으며 망망대해를 신나게 달려 바다 동굴이나 기암괴석에 다가가 신비로움을 확인하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상쾌함에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간다.
또 한 가지, 최근 어딜 가든 각 지자체에서 여행객 유치를 위해 마련한 시설 중 짚라인(짚와이어)이 있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듯 출발해서 하늘길을 가르며 바다 위를, 그리고 산 위를 미끄러져 간다. 온 산하의 정경과 다도해의 아름다움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이나 전망대에서도 보이지 않던 풍광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이 땅의 자연이 이리도 아름다웠음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액티비티한 즐거움은 하동 금오산, 가평 남이섬, 단양 만천하 스카이워크. 보령 짚트랙, 강릉 아라나비 짚와이어, 정선 짚와이어, 김천 짚와이어와 출렁다리, 군산 선유도 등지에 가면 누릴 수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모험적이란 생각에 지레 겁낼 일은 아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필수이고 사용법이나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문제없다. 미리 몸무게와 키를 재고 동의서 작성과 해당 질환이 있는지 확인한다.
어렵거나 헷갈리는 것 하나 없이 쉽고 신나는 놀이다. 타기 전에 겁을 잔뜩 먹고 긴장하지만 막상 타고 나면 또 하고 싶어 한다. 하늘을 나는 스릴을 만끽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짜릿함을 경험한다. 비행의 두려움도 단숨에 극복하게 된다. 연인들에게는 가성비 최고의 이색 데이트가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지역마다 스토리 투어 버스, 스토리 자전거, 하늘 자전거, 숲속 기차가 숲을 달린다.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다. 상공에서 걷는 아찔함을 즐기는 스카이워크, 출렁거림의 묘미를 즐기며 걷는 출렁다리도 지역마다 계속 생겨나고 있다.
굳이 해외까지 갈 필요 없다. 편리한 이동수단과 신나는 탈거리는 의외로 많다. 여행 떠나기 전에 미리 꼼꼼히 확인하고 예약을 하거나 계획을 세우면 더 확실하다. 수고로운 여행이나 동적인 놀이는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라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눈을 뜨니 간밤에 묵었던 신안 대기점도의 민박집이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마을 밖으로 슬슬 걸어 나가자 마치 가랑비처럼 짭짤한 해무가 서늘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섬 전체가 안개 속에 잠긴 새벽이었다. 전날 이 섬을 걸었던 경이로웠던 여정이 생생한데, 걷힐 것 같지 않은 이 짙은 해무 속 갯벌은 어쩌자고 또 이토록 신비로운지.
북촌마을 앞동산에 있는 12사도의 집 중 하나인 안드레아의 집은 안개에 휩싸여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운치 있다. 그 앞으로는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노두길이 안개 속에 푹 잠겨 입구 쪽 길만 조금씩 보여준다. 병풍도로 연결되는 노두길 양옆으로 보이는 물 빠진 갯벌 땅에는 작은 배가 붙박이처럼 찰싹 붙어 있다. 물이 차올라야만 떠오를 배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는 어민들의 순한 삶에 나 같은 뭍사람들이 오가며 민폐를 끼친다.
신안은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이다. 특히 오염되지 않은 갯벌을 12사도 길을 걸으며 눈으로 확인했다. 12사도 순례길은 대기점도-기점도-소악도-진섬이 노두길로 이어진다. 물이 차면 사라졌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보이는 신비한 길이다. '기적의 순례길'이라고도 불린다. 총 12Km의 길을 걷는 데는 대략 3~4시간이 걸린다. 이 길의 콘셉트는 자발적 가난, 즐거운 불편이다.
길 옆 꿈틀거리는 갯벌은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땅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찰지고 축축한 갯벌 위로 농게와 칠게가 기어 다니고 짱뚱어가 구멍 속으로 재빠르게 숨어 들어간다. 지금껏 이 갯벌은 어민들의 삶을 책임지고 그 자식들까지 키워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생존과 함께할 위대한 땅이다.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자연이기도 하므로 오염되지 않도록 잘 보전해야 한다.
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떠나 이렇게 드넓은 갯벌을 보며 오랜 시간 걸어본 건 처음이다. 아름다웠다. 산과 바다와 들판이 함께 어우러진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부디 영원히 이대로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청정의 섬에 만들어진 12사도 순례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우려스러운 마음은 나만의 기우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새벽 노두길 위로 자전거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안개 속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마치 마법의 나라 속 장면 같다. 12사도 순례길을 걷기 위해 신안 섬에 가면 몽환적인 새벽 노두길을 꼭 걸어봐야 한다. 굳이 무어라 그 이유를 다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잠깐 선계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 기억이 아릿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