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나를 케어해준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아마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업에 대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확신을 가진 자유인이 아닐까 싶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김목경(60)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롯이 홀로 서서 자신의 일가를 이뤄냈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남자, 김목경의 이야기는 고독하지만 당당한 인생찬가였다. 그를 통해 신중년 시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해봤다.
촬영 협조 청파동 블루스소사이어티
우리나라에서 블루스는 ‘부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빠른 리듬의 노래들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느린 템포로 나오는 사교댄스에 가까운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통파 블루스란 현대 록 음악의 기원이며 다양한 장르에 강렬한 영감을 준, 사실상 팝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르다. 한국에서 정통파 블루스 뮤지션을 말할 때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김목경이다. 올해 나이 예순.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대에서 말 그대로 ‘살고 있는’ 현역 음악인이다.
“한국의 에릭 클랩튼이란 말은 듣기 싫네요. 그냥 김목경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젊었을 때는 에릭 클랩튼을 많이 연구했으니까 기타 플레이가 비슷했을 텐데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이니 지금은 에릭 클랩튼과 비슷하지도 않아요.”
블루스의 성지에 서다
김목경은 천생 음악인이다. 그는 음악을 하며 산 인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들이니까. 돈이 되든 안 되든 매순간을 즐기며 사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또래 친구들 중에 돈 많이 번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는데 다들 저를 제일 부러워해요.”
그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도 음악이었다. 그는 200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블루스의 성지인 미국 멤피스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그때 조 카커, 쉐릴 크로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만 초청된 자리였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대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 확고하게 굳혔다.
“제 인생 최고 보람이었죠. 그 무대에 서고 난 뒤 일본, 인도네시아 등에서 초청이 계속 이어져서 공연을 다녔어요.”
블루스는 감정이자 반추상화
사실 우리나라에서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루스의 최고 대가가 생각하는 블루스론이 궁금했다.
“블루스는 감정으로 해야지 테크닉이나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재즈는 테크닉과 음‘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즈는 그림으로 말하면 추상화예요. 반면 블루스는 반추상화. 약간 정형화되어 있으면서 추상의 느낌이 있는거죠.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 있어 재즈는 무한대에 가까워요. 음을 벗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재즈죠. 그러나 블루스는 그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요.”
기타가 텐션이 살아 있어 쫄깃쫄깃한 음을 낸다고나 할까. 블루스는 마치 희롱하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아마 그가 말하는 ‘넘을 듯 말 듯 한다’는 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블루스는 Blues, 블루(Blue)에다 에스(S)를 붙인 거예요. 블루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외로움, 차가움, 쓸쓸함이죠. 블루스가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처음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기에 그런 인상이 있어요. 블루스는 17~18세기 미국 식민지로 건너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음악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어떤 음악적 지식도 없었죠. 그런데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읊조리듯 노래를 했어요. 그게 블루노트고 블루스의 음계죠. 백인들이 어느 날 그걸 들어봤는데 자기들이 쓰지 않는 음계였어요. 신기했겠죠. 그래서 그 음계를 훔쳐와,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음악과 접목을 한 거죠. 록큰롤은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청계천 ‘빽판’이 알려준 진실
그렇다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삶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 사는 김목경은 어떻게 블루스라는 영역에 매혹된 걸까?
“어렸을 때는 통기타를 쳤어요. 그때는 롤링스톤스와 레드 제플린 흉내 좀 내보고 싶어도 어려워서 못하던 시절이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청계천에서 ‘빽판’을 사러 다니는 게 낙이었어요. 학교 가면 애들이 빽판을 가져와서 ‘너 이거 있냐?’는 식으로 겨루곤 했죠.(웃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반 레코드를 불법 복제해 만든 ‘청계천 빽판’ 수집은 음악 검열을 하던 시대에 제대로 된 음악을 듣고 싶었던 이들의 은밀한 취미이기도 했다. 불후의 팝 명곡으로 여겨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검열로 들을 수 없었던 시절, 청계천 빽판이라는 불법 유통망은 금지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명이 기타를 치고 있는 두 장짜리 앨범이 있더라고요. 그림이 멋있어서 샀지. 집에 와서 틀었는데, 그 앨범에 기타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었어요.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스톤스나 다 그 음악을 베낀 거더라고요. 그게 바로 블루스 음악이었어요.”
3개월 가기로 한 영국, 6년을 살다
1984년, 김목경의 대학 시절 원래 전공은 일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해야 할 때였는데, 겨울에 제대하는 바람에 가을에 복학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생겼다. 딱 3개월만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께 얘기해서 3개월 지낼 비용만 받고 영국을 갔어요. 그런데 갔더니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한참을 더 머물러 있다가 1990년도에 귀국하게 됐죠. 그런 이유로 난 데뷔가 되게 늦은 편이에요.”
3개월만 있다가 오겠다는 외동아들이 장장 6년 동안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부모님 속은 오죽했을까.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게 미안하지. 죄지. 너무너무 죄송해서 이제야 이번 앨범 신보에 음악을 만들어서 넣었어요. ‘엄마 생각’이라는 연주곡이에요.”
단 3개월 머물 비용만 갖고 가서 6년이나 있었으니 영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4~5가지 일을 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아침에 여행객이 오면 버스 태워서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호텔에서 아침 먹은 후 일본 식당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죠. 점심은 그 식당에서 먹고, 네 시부터는 페인트칠을 했어요. 이게 벌이가 가장 짭짤했죠. 그리고 저녁 여덟 시부터는 클럽에서 연주를 했고요. 그러면서 돈을 좀 벌 수 있었죠. 쓸 시간이 없었으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원래 건전가요
영국에서도 당연히 블루스 밴드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88년, 1989년 즈음에 앨범을 녹음했고, 마스터 테이프를 갖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테이프는 서라벌레코드 사에서 발매된 그의 1집 앨범이 됐다. 나이를 생각하면 다소 늦은 데뷔였다.
“그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앨범이 될 듯 말 듯 하는 게 있었어요. 에이, 그러면 한 장만 더 내고 가자 하고 한 장을 더 냈는데, 그다음에는 계속 한국에 있게 된 거죠.”
그렇게 낸 데뷔 앨범에 저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 김광석이 불러서 유명해진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처음 노래 부른 이가 바로 김목경이다.
“1집 맨 밑에 있던 곡이었죠. 넣을까 말까 하다가 넣은 건데, 그때만 해도 건전가요를 하나씩 넣어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래는 건전가요로 쓸려고 넣은 거였죠. 그런데 그거 말고 건전가요를 따로 또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저작권 덕분에 많이 도움이 돼요.(웃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씩 연습
“기타는 나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기타로 하는 거야.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연주할 때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연주하는 거죠.”
김목경은 지금도 매일 배우며 산다고 말한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은 컴퓨터 틀어놓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 시간 동안 하는 연습이다. 매일 지키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
“연습을 안 하면 금방 티가 나요. 무대에서 바로 드러나죠. 내가 원하는 플레이가 나와야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는 말 그대로 무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일주일에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한다 가정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공연할 수 있을지를 계산해봤다.
“내 남은 생애에 오백 번을 못 넘긴다고 나오더라고요. 숫자 오백 번이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지더라고요. 에릭 클랩튼이나 비비 킹이 돈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그렇게 계속 공연을 간절히 원했는지 이해가 됐어요. 그 순간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어디든지 가요. 어디든지. 그렇게 해서 좋은 점은, 공연 횟수도 채울 수 있고(웃음) 내가 항상 준비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항상 무대 사운드에, 무드에 젖어 살 수 있는 거죠.”
그 대답만 들어도 그가 왜 행복한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철저한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목경은 최근 신보 녹음을 끝마쳤다. 그의 정규 앨범으로는 일곱 번째 앨범이다.
“총 아홉 곡 중 일곱 곡은 내가 만든 거고 두 곡은 남의 곡이에요. 한대수 씨 거 하나와 옛날 록 그룹 무당의 노래 리메이크 하나. 타이틀곡은 고민 중인데 ‘산을 돌아’로 할까 ‘더 블루스 밴드’로 할까 고르고 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곡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그 전에 그러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기타리스트 김목경, 무대에서 늙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거 없는데? 건강관리? 담배 피고 술 먹고.”
소위 말하는 웰빙 라이프와는 거리가 한참 먼, 뭔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음악인다운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목경은 최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한 깊이는 젊었을 때와 큰 차이 없는데, 밴드하고 연습할 때 뭐가 잘못되면 예전에는 날카롭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잘못됐을 때 내가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둥글둥글 넘어가주죠. 이게 나이 먹으면서 좋은 점이기도 해요.”
브라보 공식 질문인,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우직하게 “기타리스트 김목경”이라고 대답했다. 초지일관 그다운 대답이었다.
“앞에 ‘좋은’이 붙으면 더 좋고.(웃음)”
그는 이미 삶의 상당 부분을 확신하고 확정지었으며 이제 그곳에서 즐거움을 퍼 올릴 일만 남은 사람이다. 자신만의 답도 찾아냈고 그걸 실현시킬 능력도 갖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지금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지 못할 때까지 하고 싶은 거죠.”
올해 60의 나이가 된 그가 부르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노래 맛은 어떨지 오늘 밤에 소위 그의 ‘나와바리’인 논현동으로 노닐러 가볼까나. 헤이, 브라보 블루지 라이프!!
‘하나 더하기 하니는 더 큰 하나’ 는 서울시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의 슬로건 이다. 각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하하하’ 로 함축했다.
둘이 아니고 계속 하나가 되려면 동질성을 지속 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적은 분명 한국인인데 이주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고 차별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라도에서 태어났어도 경상도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사람이 분명하듯이 이제는 좀 더 넓은 안목을 갖고 베트남에서 태어났든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도 대한민국의 국적이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이다.
강서구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서는 다문화 축제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그간 알게 모르게 그 니라의 GNP로 그 나라 국민과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다문화 축제의 현장에서는 ‘우리는 당신과 다른 이런 문화를 갖고 있어요. 우리의 문화도 아름답지만 당신의 문화도 역시 아름답네요.’ ‘우리의 음식도 맛있지만 당신네 음식도 역시 맛있어요.’ 서로 이런 격려의 말이 없어도 축제는 이미 국경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고유의상인 아오자이를 예쁘게 입고 나왔고 중국은 치파오를 입고 나왔다.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했지만 문화의 경쟁이 아닌 서로가 잘 모르던 이국의 문화와 융합의 현장이었다. 아름다웠다. 문화에는 더 이상 국경이 없었다. 다문화 축제현장은 한마당 흥겨운 잔치판이었다.
우리국민들의 열심 있는 노력으로 당당히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외국인은 ‘코리아 드림’(Korea Dream)을 꿈꾸며 이 땅으로 몰려왔다.
한때는 길림 영사관 앞에는 대한민국에 입국을 위해 심사를 받으려는 중국 동포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던 적도 있었다. 미국 영주권을 위하여 미국대사관 앞에 길게 줄지어 서서 인터뷰의 순서를 기다리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들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까다로운 한국 입국비자를 받기위해 결혼이란 쉬운 방법을 택하였다. 혼기를 놓친 수많은 농촌 총각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외국인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 된 것 같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파경을 맞았다.
국제결혼에 대한 인프라(INFRA)가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초기에 결혼하여 입국한 외국인들을 감싸 안을 그들의 문화가 없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인천 월미도관광 특구에 가면 1905년 미국기선 ‘갤릭’ 호에 의하여 총 출항 횟수 64회 총인원 7415명의 이민 기록이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민 초창기의 아픈 기록이 있는 한국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살아서 장례를 치르는 아픈 이별을 하며 아메리카 드림(America Dream)을 꿈 꿨던 우리의 선조들의 노력으로 이민 1,5세대~이민 3세대가 되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곳에 집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탕수수로 움막을 짓고 고생하며 지낸 기록도 있다. 슬픈 우리의 상처들을 안고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다문화라고 하기 보다는 융합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외국의 문화와 결합되어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하듯 문화는 진화 할 것이다.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공동의 스트레스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기능이 있다. 서로 모여 정보도 교환하고 갈등도 해소 하지만 이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를 신경을 써야 한다면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의 시선이면서 너의 시선이기도 한 우리의 공동시선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국문화와 이 땅의 문화가 협력하는 융합 문화이다.
문화융합의 성공이 강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이미 그길로 들어섰다.
퇴직 후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조촐한 사업단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최근 하반기 예산 부족으로 인원을 줄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원을 줄일 수 밖에 없으니 혹 사정이 나은 사람이 있으면 몇 개월 쉬었다 다시 만나자고 전체 회의에서 부탁했으나 자원자가 없었다. 넉넉한 연금을 받는 퇴직 교원도 있고 공무원 부인도 있으나 밥그릇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러시안룰렛, 제비뽑기로 선택을 했다. 재수 없게 선택된 사람은 40대 미혼남이었다. 그는 홀아버지를 부양하고 있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구구절절 눈물까지 보이며 애원했으나 서울시 핑계만 대며 냉정하게 이별을 고했다.
20여 년 전, 중소기업에 근무할 당시 해외 공장 이전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다니던 회사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러나 현지 공장이 안정화되기도 전에 IMF의 쓰나미를 만났다. 회사의 구조 조정 칼춤에 간부 사원들부터 적절한 보장과 대안 없이 그냥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해고 통보를 받는 날, 너무 당황하고 낙담하여 수십 번 드나들어 익숙한 대표이사실의 출입문 손잡이를 찾지 못해 허둥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복도를 걸어가는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구토가 나기까지 했었다. 천지가 무너진 느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고 두렵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은 평상시와 똑같이 정장을 입고 집을 나왔다. 갈 곳이 없어 2호선 전철로 도심을 순환하고 남는 시간을 사우나 수면실에서 잠으로 보내다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생활을 1주일 했다. 가장(假裝)직장인인 생활은 1주일이 한계였다. 너무나 많이 남는 시간과 무기력한 일상을 감당할 수 없어 가족에게 고해성사하고 긴 절망과 어둠의 터널을 함께 건널 수 있었다.
2000년 초 회사를 창업하여 월급을 받는 처지에서 월급을 주는 처지가 된 적이 있었다. 초창기는 회사가 잘 굴러가 직원도 많이 뽑고 사업장도 늘리고 배포 크게 다른 회사도 인수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인수 회사의 심각한 부채가 발목을 잡았다. 승자의 저주, 매몰 비용의 오류에 빠져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마음이 급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직원정리부터 시작했다. 연봉을 많이 받는 힘 좋은 간부 사원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가장 힘없고 연약한 직원부터 칼을 대기 시작했다. 모두 험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눈치라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직원을 불러 상황을 에둘러 설명하고 해고 통보를 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담긴 얼굴로 인사를 한 뒤 휘청거리며 출입구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20여 년 전 내 모습이 보였다.
한때는 해고자, 실업자라는 주흥 글씨 때문에 참담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을 가슴 시리게 느껴 본 적이 있었음에도 타인에게 그 살인을 죄책감 없이 너무 쉽게 자행했다. 참으로 못난 경영자임을 자책하며 그날 몰래 서럽게 많이 울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은 개인의 장구한 서사를 만들고 생존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음을 요즘에서야 조금 알 수 있다. 한때는 노동이 개인의 시간과 영혼을 구속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은 비전과 가치를 실현하는 가슴 저린 화학적 변화의 실천은 아니더라도 단순한 밥벌이를 넘어 생존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임을 철들어 알게 되었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나이가 되었다.
걷기가 일상의 행위를 넘어 여행이 되려면 나름의 계획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유유자적 도보 여행가를 꿈꾸며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전 알아두면 쏠쏠한 걷기 정보를 담아봤다.
◇웹사이트로 걷기 코스 찾기
두루누비 www.durunubi.kr
걷기와 더불어 자전거 길까지 교통, 숙박, 음식, 문화 등 관련 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다. 길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지도에 표시된 아이콘을 클릭해 지역에 따라 코스 찾기가 가능하다. 코스에 대한 소개 글과 사진, 지도, 거리, 시간, 난이도, 편의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와 전문가 평점까지 골고루 담았다. ‘여행일정 짜기’, ‘이달의 추천 길’ 등을 이용하면 더욱 수월하게 도보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서울두드림길 gil.seoul.go.kr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강·지천길 등 서울의 도보 코스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지도와 거리, 소요시간을 비롯해 난이도, 진입로 교통정보, 주변 볼거리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자료는 그림 파일로 다운로드 및 출력 가능하다. 한양도성길의 경우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도메인(seoulcitywall.seoul.go.kr)을 직접 입력해 접속하면 된다.
강화나들길 www.nadeulgil.org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강화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연결돼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시대 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저어새,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환경까지 경험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주변 볼거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걷기 모임 일정과 더불어 ‘나들길지기’의 연락처와 콜버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강릉바우길 www.baugil.org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 400km의 코스다.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대부분이라 경사가 높지 않아 초보 여행자들에게 부담이 덜한 편이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교통정보, 준비물을 비롯해 길마다 히스토리를 담은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jirisantrail.kr
지리산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을 아우르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총 22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의 지도, 거리, 예상시간, 난이도뿐만 아니라 해발고도까지 볼 수 있다. 더불어 주요 경유지와 안내센터 전화번호, 민박 정보, 마을회관 전화번호 등을 제공한다.
해파랑길 haeparang.org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 장거리 도보여행 길이다. 고성 구간, 울진 구간, 포항 구간 등 크게 10개 구간으로 나뉜 50개의 코스가 있다. 사이트에서는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 난이도를 비롯해 지역별 대표 연락처와 전 구간 교통편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올레길 www.jejuolle.org
제주올레길 18코스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사이트다. 각종 안내소, 화장실, 숙소, 식당, 볼거리, 즐길거리와 시간대별 날씨와 미세먼지, 오존 상태, 휠체어 가능구간 정보도 제공한다. 걷기 또는 제주 여행 관련 행사, 축제, 프로그램 소개와 제주 소식,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조언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기분 좋은 걷기 매너
01 오르막길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에게 길 먼저 양보하기
02 추월할 때는 앞사람에게 양해 구하기
03 시끄러운 음악이나 요란한 행동 삼가기
04 지정된 노선을 이용하고 안전수칙 지키기
05 걷기 중 음주, 흡연하지 않기
06 야생동물에게 먹이 주지 않기
07 쓰레기 되가져오기
08 여럿이 걸으며 길 막지 않기
09 주변 농작물과 열매는 눈으로만 바라보기
10 공공시설물 깨끗하게 사용하기
11 도로변이나 좁은 길 지날 때는 한 줄로 걷기
12 지역 문화 및 지역민 존중하기
13 위험 구간 발견하면 제보하기
14 이정표나 길 표식 훼손하지 않기
15 길가에 핀 꽃과 나뭇가지 꺾지 않기
◇2018 주요 걷기대회 일정
△4/21~22 제12회 한국 100km 걷기대회 4/26~29 IML 총회 및 스웨덴국제걷기대회 △5/12 제5회 고양누리길 전국걷기축제 △5/18~27 재미대한걷기연맹 2018 미국그랜드캐니언 걷기 △6/2~3 제18회 일본 SUN-IN 미래걷기대회 △7/17~20 제102회 네덜란드 나이메헨 국제걷기대회 △9/15~16 제2회 낙동강 세븐 스테이지 걷기대회 △10/13 제9회 군산 66km 새만금걷기대회 10/20~21 △제11회 울산 태화강전국걷기대회 △제8회 부산 갈맷길국제걷기대회 △제4회 영주 소백힐링전국걷기대회 △10/27~28 제24회 원주국제걷기대회 △11/2~5 제41회 일본 히가시마쓰야마 국제걷기대회 △11/10~11 제6회 일본 SUN-IN 100km 걷기대회 △11/17~18 제10회 인도네시아 족자 국제걷기대회 △12/1 2018 워커인의 밤
왜 여행하느냐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정의와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 묻혀버린 꿈과 환상을 충전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른이 된다는 건 시시해지는 것”이라고 일갈했듯이,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후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고, 이럴 땐 다시 한 번 꿈을 충전하기 위해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행이야말로 진정 젊음을 충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 사이의 바다, 인도양에 유유히 떠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는 실제로 가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와 보아뱀의 고장이며,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비행기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목적한 나라의 비행기를 타는 경우 여행 기분은 배가된다. 마다가스카르항공은 프랑스 것이라더니 모든 안내방송이 프랑스어가 먼저 나온다. 그다음이 영어, 그다음이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 공용어) 순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행의 인상은 바로 승무원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마다가스카르에는 18개에 이르는 다양한 부족이 살고 있고, 외모 또한 아시아인에서 아프리카인까지 다양하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2000년 전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의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80%의 국민이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로, 국토의 많은 부분이 논이며, 우리처럼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루 세끼 흰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게 다가오면서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바오바브나무의 고향, 모론다바!
바오바브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쪽 끝에 있는 모론다바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모론다바로 가는 비행기는 19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로, 손님의 숫자에 따라 제멋대로 항공시간을 변경해버리기도 해서 고객을 당황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탑승수속 땐 짐의 무게뿐만 아니라 승객의 몸무게도 잰다. 비행기가 워낙 작아 무게를 초과하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오지를 가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천천히, 천천히”와 “문제없다”는 말이다.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로는 “모라모라”, “짜마니노나”라 한다. 황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모라모라”, “짜마니노나” 하며 활짝 웃는다. 오지 여행에서는 아무리 서둘러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니 느긋한 마음을 먹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다가스카르의 최대 볼거리로 꼽히는 바오바브나무 군락지와 칭기국립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는 모론다바는 ‘긴 해안’이라는 뜻으로 바닷가에 면해 있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살갗을 태울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람도 개도 늘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휴양 모드의 유럽 여행자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동네 소녀들은 그늘에 앉아 머리를 땋으며 놀기도 하고, 소년들은 타는 듯한 태양 볕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천 년의 지혜가 들려주는 말들
해안가를 벗어나 바오바브 애비뉴로 들어서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드문드문 바오바브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바오바브나무 군락지! 그것은 목이 꺾어질 듯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도 장대했다. 1년에 고작 3mm씩 자라는 나무가 저만큼의 크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걸까. 정말이지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보고 간다 해도 마다가스카르 여행은 충분할 것 같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적으로 8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 7종이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1종은 호주에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의 비교를 불허한다. 속이 뻥 뚫릴 만큼 하늘을 향해 길쭉길쭉 늘씬늘씬 시원하게 뻗어 있다.
감탄사가 터지는 순간을 많이 만나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소혹성 B612를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무서운 식물이 있다”며 바오바브나무를 안 좋게(?) 묘사하고 있지만, 난 천 년이나 되었다는 신비한 바오바브나무를 보면서 식물이야말로 신의 안장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바오바브나무를 바라보며 한없이 걷고 또 걷는데 저 멀리 보이는 바오바브나무에 뭔가 자그마한 것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벌레라기엔 좀 크다 싶은 그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한 아이였다. 아이는 바오바브나무와 인간을 대조해서 보여주려는 듯 나무에 딱 붙어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천 년이나 된 바오바브나무와 대조되는 작은 인간의 모습. 마치 “문명국가에서 온 너희들이 좀 산다고 오만해봤자 천 년 된 바오바브나무 앞에선 모두 다 ‘고작 요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내게 나무처럼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도, 끝없이 천상을 향해 뻗어 나가라고….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러운 바오바브
두 번째 날엔 바오바브 애버뉴를 조금 벗어나 독특한 바오바브나무들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러브 바오바브(love baobab)’와 ‘성스러운 바오바브(holy baobab)’다. ‘러브 바오바브’는 다른 바오바브나무와 달리 두 개의 줄기가 엉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혼여행객이나 연인이 많이 찾아와 사랑을 맹세한다고.
‘신성한 바오바브’는 성황당처럼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마을 주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몹시 영험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가 소원을 빈다.
그렇게 러브 바오바브와 성스런 바오바브를 거쳐 이윽고 다시 돌아온 ‘바오바브 애비뉴’. 역시 마다가스카르는 바오바브나무 하나만 실컷 봐도 그만인 곳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그래도 묘사할 게 몇 개 있었던 것 같다. 온종일 먹어도 좋을 것 같은 끝내주는 바게트 맛이라든지 수도 안타나나리보 재래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 칭기국립공원의 찌를 듯한 암석들까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숙소를 향해 달리는 길. 군락에서 떨어져 혼자임을 즐기는 바오바브나무들이 양손을 펼쳐 바이바이를 한다.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며 바오바브나무들에 이름을 붙여본다.
발레리나 바오바브나무, 고독한 바오바브나무, 체조하는 바오바브나무….
천 개의 느낌표가 가슴에 와 박힌다.
travel tip
★찾아가기인천에서 방콕까지 타이항공(5시간소요), 방콕-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마다가스카르 항공(9시간 소요).
★기본여행정보한달간 무비자국가로 오랫동안 프랑스식민지였던 관계로 현재까지도 불어가 널리 통용되며 마다가스카르어(말라가시어)가 공용어다. 화폐단위는 아리아리(Ariary)로, 1000원=2000아리아리 정도. 커피와 사탕수수, 쌀이 주농작물이다.
★지도 & 추천여행루트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시내관광, 재래시장, 유적지를 본후 국내선으로 모른다바로 이동해서 바오밥 군락지, 그랑칭기국립공원을 보는 것이 핵심코스.
★준비물오프로드에 가까운 비포장도로를 장시간 달리므로 앉아있기 편안한 차림을 하는게 좋으며, 오지마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필이나 공책, 천으로 된 가방, 의류, 풍선, 사탕 등 준비해가면 현지인들을 위한 소중한 나눔이 될 수 있다.
★여행경비350만원 내외
글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비에 흠뻑 젖어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추워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도 그랬습니다. 집에 가면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고, 따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언짢은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었으니까요. 어렸을 적에 집은 그랬습니다. 걱정이 없는 공간, 집을 그렇게 지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의 소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집[家屋]도 집[家庭]도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나는 집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지면 으레 집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은 서두는데 막상 일어서면 망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갈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저렸던지 나중에 내 집을 지니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래저래 집을 꾸리고 장만하는 일은 내 삶의 목표이기도 했고 삶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집 한 칸도 없으면서,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집을 꾸렸습니다. 둘 다 눈이 멀어서 그랬겠지만 아무튼 집은 둘이서 함께 장만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랑하는 여인의 말에 감동해서 벌컥 일을 저지른 셈인데 집 장만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집 장만 하느라 우리 둘의 세월을 다 보냈다고 해야 할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셋방살이조차 방 넷에 부엌이 세 개인 산등성이 무허가 주택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꼽아보니 그 뒤로 정확하게 14번째 집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집을 살아가면서’ 어줍지만 집을 나 나름대로 다듬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은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집은 머무는 곳입니다. 하기야 집뿐이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것도 누가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처럼 어리석고 딱한 사람이 따로 없다고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실은 나도 별 차이가 없지만 나는 ‘소유라는 착각’, 그것의 비극성을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자기 것이라 여겨 그것을 자기가 누릴 영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거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집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집이란 자기가 살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온갖 정성을 집을 장만하고 집을 짓고 집을 꾸미는 데에 쏟아 붓습니다. 참 좋고 부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기술한 ‘집의 생애사’ 또는 ‘집의 편력’이 개인의 독백만이 아니라 어쩌면 ‘집 경험의 보편성’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지니는 것으로서의 집’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서의 집’을 생각하면서 집에다 쏟아 붓는 정성을 조금은 ‘절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소유의식의 과잉은 사치를 낳습니다. 그리고 사치라는 이름의 넘침은 늘 일컫듯 모자람만 못합니다. ‘지님의 의식’이 아닌 ‘머묾의 의식’은 그 사치를 억제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집은 그저 ‘웬만하면’ 된다는 자족감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지 내 것이니까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하면 뜻밖에 삶의 많은 부분을 나도 모르게 잃어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생각이 집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집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그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집의 삶’입니다. 디자인을 공부한 친구는 젊었을 때 나중에 자기는 자궁(子宮)과 같이 생긴 집을 짓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까닭을 묻자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원초적인 평온(平溫)함 안에 머물고 싶으니까!” 평온을 일게 하지 못하는 집은 집이 아닙니다. 평온이 담기지 않으면 그 집은 집이 아닙니다. 집이 있어도 집은 없습니다.
세상의 집들은 참 여러 모습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시골에서 어느 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고 거기 거의 투명한 발이 처져 있어 방과 방을 구분한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야 바람이 시원하게 드나들겠지만 사사로운 공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게 부부간의 은밀한 사랑을 어떻게 나누느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꼭 집에서 나눠야 하나요?” 우리가 이해하는 집 안에서의 삶이 집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이완의 한 고산족 집은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집 안에서는 일어나 걷지 못합니다. 천장이 낮으니까요. 불편하지 않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일어나 걸을 필요가 있나요?” 집은 오로지 누워 휴식하는 공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삶은 집보다 훨씬 넓고 높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몽골의 집 게르[包]는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옆으로 새어 흘러 집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니면 이동하기 좋도록 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의 지혜가 낳은 건축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스키모의 얼음집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도 전통적인 집들이 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곳인데도 둥근 집에서 삽니다. 둥근 집의 산재(散在) 현상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둥근 집을 설명하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퉁이, 모서리, 구석에는 못된 귀신이 깃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귀신이 집안 식구들을 병들게 하고 다투게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피하려면 모서리나 모퉁이나 구석이 없는 둥근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집을 꾸리고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휘인 채 한살이가 훌쩍 지납니다. 겨우 집을 장만해놓았더니 꾸린 식구들이 훌훌 떠나가 텅 빈 집을 마련하느라 이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합니다. 애써 온갖 치장을 다하여 이상적인 집을 가꿨나 싶은데 이제는 내가 모든 것 버리고 떠나가야 할 때가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노력이나 정성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내 집에 모퉁이나 그늘진 구석이 없는 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집을 마련하려면 모퉁이 없는 둥근 집을 마련하십시오. 집을 꾸리려면 구석이 없는 환한 집을 꾸리십시오”라고.
지난 10월 약 한 주(13일~20일) 동안 해운대에서 열리는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다. 부산 영화제는 크게 두 분야로 거행되었다. 벡스코 A동에서는 영화기기관련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벡스코 B동(Asian Project Market-APM )에서는 75개 국가에서 298편의 영화를 출품하여 선보인 영화사 담당자들을 만나서 영화를 수출입하기 위한 상담 업무가 진행되었다. 영화분야는 필자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나 담당하고 있는 일이 국제계약분야이다 보니 한 주 동안 영화 수출입 관련 상담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한 주를 보냈다.
주간에는 APM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빈 시간에는 출품된 영화 시사회( P&I Screening)에 참석하느라 분주했고 야간에는 영화제 개막식 파티, 홍콩, 필리핀, 타이완 등의 영화사 초대로 Standing buffet 파티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티에 가면 유명 연예인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는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필자는 릭키 김 및 차 인표 씨와 팬으로 만나 기념사진을 찍어서 간직하는 기회가 있었다.
통상 영화제 기간 동안에 상영되는 영화는 영화의 전당, 롯데 시네마 센텀시티, CGV 센텀시티, 메가박스 장산 해운대 그리고 소향극장 센텀시티에 분산되어 일반 영화처럼 상영된다. 인기 있는 영화는 미리 인터넷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들 정도로 영화 동호인이 많은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미리 회원증을 매입해두면 아주 편하다. 하루에 5편씩 영화를 관람할 수 있으며 행사장에 가려고 하면 자가용 및 버스를 제공하여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 회원증 구입비는 초기에 구입하면 10만원, 중기 15만원, 말기 20만원으로 차별화 되어 있어 영화 애호가들은 매년 7월 쯤 미리 구매하여 두면 경제적인 영화 관람을 즐길 수 있다.
영화제작을 하시는 제작자나 감독하시는 분들은 출품하여 영화제 상연 작품으로 선정되면 감독 및 회사 대표에게 항공권과 호텔 숙박권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물론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APM 부스는 사전 신청하면 개설을 할 수 있고 회원증을 갖고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영화 수출입 상담을 위해서는 회원증을 발급 받는 것이 필수다. 부스에서 상담은 영화제 시작 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여 상담일정이 정해지면 약 30분씩 오전 10시 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하여 상담을 할 수 있다. 필자도 사전 예약으로 많은 수출상들과 상담을 하였으며 상담했던 영화 수출 담당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은 마치 내가 수상자가 된 것처럼 기뻤다.
벡스코에서 거행된 APM 마켓은 화요일까지만 진행했다. 대부분의 주요 담당자들은 바쁜 일정으로 주말인 14일 부터 17일까지 상담을 끝내고 대부분 다음 행선지로 가거나 귀국하였다.
아직 개봉되기 전 작품인 ‘유리정원’이 개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폐막작은 중국 영화인 상애상친이었다.
‘유리정원’은 한 차원 높은 예술영화로 한 여인의 사랑과 아픔을 환상과 현실사이에서 신수원 감독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보여주는 영화다. 문근영이 박사과정의 학생 장애인으로 등장하여 나무에서 추출한 녹색의 피로 죽은 애인에게 주입하여 살아있는 나무로 살리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내용이 한 소설가의 문학작품으로 보도되어 인기를 얻자 실화임이 입증되어 경찰에 쫒기는 내용으로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었다. 폐막작 ‘상애상친 (Love Education)은 딸이 아버지 산소 이장 문제로 고향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 갈등을 소재로 다룬 영화로 그 배경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번 부산 영화제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1.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 : 스즈키 세이준 (감독/일본)
2.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 : 크리스토프 테레히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독일)
3. APM 프로젝트 시상결과
1) 부산상. 부 탁 추옌 (베트남)
2) 브라이트이스트필름어워드: 리샤오펑 (중국)
3) CJ엔터테인먼트어워드 : 리리 리자 (인도네시아)
4) 로데 어워드 : 오승욱 (대한민국)
5) 한국콘텐츠진흥위원장상: 윤가은 (대한민국)
6) 아르떼상: < 비영한,까칠한, 위험한> 비삼 샤리프 ( 프랑스, 레바논)
7) 노르웨이사우스필름펀드상 : 민 바하드르밤 (네팔, 프랑스, 독일)
8) 모네프상 : 오승욱 (대한민국)
E-IP 마켓 시상 결과
New 크리에이터상 (북투필름): 이정연/고즈넉이엔티
New 크리에터상 ( E-IP 피칭) : 이수아 (주) 위즈덤 하우스
금년 부산 영화제 기간에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부산을 깜짝 방문하여 영화인을 격려하고 향후 부산 영화제의 발전을 위해 영화인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영화인들과 동호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부산 영화제 23회 2018 BIFF가 우리나라 및 세계영화산업 발전의 큰 도약의 전기가 되길 고대해 본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시원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만으로도 완벽했던 지난 9월 초. 직장인들과 동네 시니어들의 휴식처이던 서울의 ‘작은 터키’ 앙카라공원에 진짜 터키가 생겨났다. 무심코 지나지던 이곳에 ‘하루에 한 가지만 들어준다는 모래요정 바람돌이 선물’처럼 터키가 정말 짠 하고 나타났다.
참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heritage.unesco.or.kr)
화창한 서울이 터키를 맞이하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인도네시아대사관과 9호선 샛강역 사이에는 시민들의 작은 쉼터 앙카라공원이 있다. 1971년 터키의 수도 앙카라와 서울특별시가 자매결연 맺은 것을 기념해 1977년 문을 연 곳. 시민들의 휴식공간이자 테마공원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장소다. 지난 9월 1일 이곳에서는 한국과 터키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가 열렸다. 주한 터키대사관(대사 아르슬란 하칸 옥찰)이 주최하고 터키문화관광부와 서울시, 영등포구청의 협조로 ‘터키의 날’ 행사를 진행한 것.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터키의 문화와 전통 예술, 음식 등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앙카라공원 내 앙카라하우스 앞에 마련한 간이 부스에서는 터키 전통 음식으로 유명한 케밥과 아이스크림, 커피와 터키식 젤리 로쿰을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특히 이번 ‘터키의 날’ 행사에는 터키에서 활동하는 터키문화관광부 소속 예술가들이 직접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전통 음악과 노래, 춤 등 공연과 터키 전통 미술을 감상하고 구입도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터키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푸른색으로 무늬를 낸 도자기 치니(ini, 수공예 도자기)와 에브루(Ebru, 터키 전통 마블링 공예) 작가도 이곳에 와 터키 전통 예술을 한국에 알렸다. 치니 전통 공예와 에브루 모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터키에서 날아온 예술가들
나지예 누르 아블루프나르는 치니 전통 공예가다. 치니는 도자기 공예로 터키 전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다채로운 색깔로 식물과 동물 문양, 기하학적 패턴을 그려넣고 유약을 발라서 만든 터키의 전통 수공예가 바로 치니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아블루프나르가 활동하고 있는 퀴타히아 지역은 서부 아나톨리아 내륙의 도시로 14세기부터 치니 중심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디뎀 유스튄은 에브루 공예 작가다. 에브루는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에브루는 금속제로 된 큰 그릇 안에 기름과 물을 담고 그 위에 여러 색상의 물감을 흩뿌리거나 붓질을 한 후 무늬를 만든다. 그 위에 종이를 덮어 전사(轉寫)하면 화려한 무늬가 종이 위에 그대로 연출된다. 흔히 ‘마블링(marbling)’이라고도 알려진 에브루는 꽃, 꽃잎, 격자무늬, 모스크, 달 등을 주로 표현한다. 전통 도서의 장정에 쓰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이용한다.
예심 카라이브라힘오울루는 터키문화관광부 소속 가수다. 이날 행사에서 터키 전통 음악인 할크 음악(Tu¨rk Halk Mu¨zig˘i) 연주에 맞춰 노래해 이곳에 모인 터키인들의 흥을 돋웠다.
커피 한잔이 40년의 우정을 나타낸다
행사 시작에 앞서 아르슬란 하칸 옥찰 주한 터키 대사는 환영사를 통해 모든 터키와 한국이 오래전부터 형제의 나라로서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또한 서울에는 앙카라공원이, 터키에는 한국공원이 있다고도 소개했다. ‘커피 한잔이 40년의 우정을 나타낸다’는 터키의 격언을 얘기하면서 이날 행사처럼 터키와 한국사람 모두 모인 자리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으면서 더욱 관계가 가까워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창범 서울시 국제관계대사도 축사를 통해 “한국과 터키가 수교를 맺은 60년 동안 양국 모두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이 행사가 정기적인 축제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오전 오후 2부로 나누어 공연이 진행돼 지나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잡았다. 케밥과 아이스크림 등이 일찍 동이 날 만큼 성황을 이뤘다.
작품을 보면 화가의 심성을 짐작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런 화가 중엔 단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나 에드바르트 뭉크(Edward Munch, 1863~1944)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미술 심리’, ‘미술 치료’ 분야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종교화가 아닌 작품에서 따뜻한 이해와 배려를 고스란히 담은 화가가 있으니, 바로 우리네 풍속과 풍광을 작품에 남긴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우리 땅을 밟은 키스는 많은 작품과 함께 소상한 인상기도 남겼다. 그중 3·1 독립선언서에 대한 글을 보면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발췌한 다음 글은 성명서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
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보름달이 있나니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Under humanity’s flag let us perish.
Shadowed from the great black cloud is perfect round moon
Which to us great hope will show.
에서 발췌
그리고 그는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라는 글을 여러 번 남겼다. 또한 키스는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각 나라의 문화를 고루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작품과 글을 통해 한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분명하게 표출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키스의 작품 중엔 ‘종묘 제례 관리’란 제목을 붙인 그림이 있다. 그런데 작가는 바로 그 선비에게서 ‘의젓한 몸가짐’을 보았다. 혼란스러웠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도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느낀 그것을 화폭에 옮겼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을 사랑한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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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