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에 잎사귀들은 메말랐어도 마음은 따뜻하게 감성은 촉촉하게 보내고 싶다면 미술관 나들이를 추천한다. 전시에 따라 매력이 달라지는 게 미술관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전시물 외에도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눈 오는 날 방문한다면 미술관 통유리로 바라보는 풍경이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심 속 열린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MCA) 서울관은 문화·예술인들이 사랑하는 거리 ‘삼청로’에서 만날 수 있다. 과거 국군기무사령부가 사용하던 공간에 터를 잡아 2013년 11월 개관했다. 조선시대에는 소격서, 종친부, 규장각, 사간원 등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과천관, 덕수궁관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서울관은 ‘도심 속 열린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갤러리 공간 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갖춘 복합예술문화센터로 발돋움하고 있다. 8개의 전시실을 비롯해 멀티프로젝트홀, 미디어랩, 디지털 도서관, 교육동, 세미나실 등을 운영한다. 한 번 방문하면 전시뿐만 아니라 영화, 공연, 교육 등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카페테리아, 푸드코트, 북카페, 아트존 등 다양한 편의시설도 이용할 수 있어 오랜 시간 머물러도 부담이 없고, 지루할 틈도 없다.
크게 전시동과 교육동으로 나뉘는데, 미술을 보고 느끼는 것에서 배우고 체험하는 기회까지 골고루 만끽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시동 지하 1층에는 서울박스와 전시마당을 중심으로 6개의 전시실과 멀티프로젝트홀, MMCA 필름앤비디오·미디어아트월 등이 마련돼 있다. ‘멀티프로젝트홀’은 퍼포먼스, 다원예술, 전시, 교육 등 여러 장르가 융·복합되는 현대미술의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공간이다. ‘MMCA 필름앤비디오’에서는 총 120여 석 규모로 예술영화와 실험영화를 비롯한 국제영화제 개최 작품들을 상영한다.
오감이 즐거운 복합예술문화센터
미술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트존(Art Zone)은 전시동 1층 570㎡ 규모로 3개의 존 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구역(갤러리1)에서는 국내 작가와 그들의 작품, 특히 공예 분야의 유망 작가들 작품을 지속해서 전시한다. 제2구역(갤러리2·3)에서는 미술관에서 개발하는 문화상품과 도록, 디자인 아이디어 제품을, 제3구역(갤러리4·5)에서는 섬유·패션 상품 및 국내외 미술 전문서적 등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전시와 연계한 작가들의 실험적인 문화상품을 소개해 누구나 편하게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미술 서적에 관심이 있다면 ‘디지털 도서관(2층)’에 들러보자. 미술관이 소장한 다양한 미술 분야 출판물, 단행본, 잡지 등 8000여 권을 열람할 수 있다. 도서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간은 통유리로 돼 있어 인근에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삼청동 등 미술관 외부 전경 등을 훤히 보여준다. ‘친환경 미술관’이라는 취지에 맞게 자연채광을 전시 및 내부 조명에 활용하기 때문에 유독 햇살이 잘 들어 따뜻하고 환하다. 특히 야외 전시물인 ‘연역적 오브제(김수자, 2016)’가 한가운데 놓인 잔디밭 인근 통유리에 알록달록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쏟아져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3층 교육동에서는 디지털아카이브와 멤버십라운지를 운영한다. 멤버십라운지는 국립현대미술관 특별회원(연간 10만원으로 가입 가능)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된다.
내부 전시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야외로 향하는 문을 발견하는데, 그럴 땐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오는 것도 좋겠다.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오르막길을 걸으면 너른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는 종친부(宗親府)를 만나게 된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역대 제왕의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했던 관청으로 미술관이 개관하던 당시 이전·복원한 것이다. 종친부가 있는 곳에 서서 미술관을 바라보면 저 멀리 경복궁 돌담길과 인왕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전통문화와 현대 예술의 조화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0 이용시간 월·화·목·금·일 (10:00~18:00), 수·토(10:00~21:00) ✽야간개장(18:00~21:00 무료관람) 관람요금 통합입장권 4000원
지난 주말 서울 하늘은 푸른 바다 빛이었다. SBA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박주순 소장) 산악회원 (전창대 산악대장) 12명은 아침 10시 동대문역에 모였다.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을 오르고 와룡공원을 지나서 말바위 안내소까지 걸었다. 잘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꼭 걷고 싶은 성곽길이다.
올겨울 제일 추운 날씨에 모두가 에스키모처럼 중무장이다. 낙산은 북악ㆍ인왕ㆍ남산과 함께 내사산을 이룬다. 서울의 내사산을 잇는 서울 성곽길은 서울의 4대문(숙정문ㆍ흥인지문ㆍ숭례문ㆍ돈의문터)과 4소문(창의문ㆍ혜화문ㆍ광희문ㆍ소의문터) 및 성곽길 18.2Km를 따라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탐방로다.
낙산은 해발 125m의 낮은 산으로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 된다. 낙산은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인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에 해당된다.
낙산 정상에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대학로, 벽화로 유명한 이화마을 등과 연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성곽 안팎으로 서울 시가지를 조망하기에도 좋다. 성곽길이 예쁘게 조성 되어있어 누구나 탐방하기에 편하다. 낙산공원에서 혜화문을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6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약18.2Km, 높이는 약12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한양도성은 태조4년(1395)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1396년 농한기인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다.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청문(숙정문으로 개칭)-과 4소문-동북 홍화문(혜화문으로 개칭),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소의문으로 개칭)을 준공 하였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와룡공원이 나왔다. 날씨는 몹시 추웠지만 바다처럼 푸르른 하늘을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양지바른 쉼터에 풍성한 뷔페식당이 차려졌다.
정상주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이를 잊고 재능기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을 다지는 회원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말바위 안내소에 삼청공원으로 하산하였다. 칼국수와 막걸리 한 사발에 추위도 사르르 녹고 말았다. 잘 다니지 않지만 꼭 한번쯤 걷고 싶었던 도성길을 완주한 기쁨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었다.
새해 맞이하기 바쁜 세밑이다. 한해를 정리하면서 가까이서 새해일출을 즐기는 방안을 찾는다.
준비물을 철저히 챙겨야
북한산ㆍ도봉산ㆍ관악산 등 평소에 쉽게 다니는 등산 코스도 준비물을 철저히 챙겨야 한다. 햇볕 없는 겨울 산 속은 상상을 뛰어넘게 춥다. 에스키모처럼 중무장이 필요하다. 방한모ㆍ목도리는 필수품이다. 특히 방수가 잘된 신발을 신어야 한다. 눈이나 비가 오지 않는 날이더라도 아이젠이 꼭 챙겨야 한다. 겨울철에는 항상 미끄러운 얼음이 있기 마련이다.
일출 전 산 속은 엄청 어둡다. 랜턴 준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배터리는 새
로 교체하고 여벌도 꼭 챙기기 바란다. 남이 비추는 불빛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불빛은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뜻한 물과 비상식량도 꼭 준비하여야 한다.
서울 근교 산 새해일출
서울 근교 산의 새해일출은 아침 7시 40분경에 완성된다. 평상시 주간등반보다 야간등반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므로 충분히 고려하여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손전등을 안내삼아 산행을 하여야 한다. 남산이나 정동진 등 일출명승지 못지않게 평소보다 등산객이 훨씬 많다. 앞 사람 궁둥이만 보고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모습이 일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손전등 불빛이 여름철 반딧불 같기도 한다.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면 봄이나 여름에 보았던 산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발 디딜 틈 없다. 자리를 잡고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추위를 달래야한다. 따뜻한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없고, 발이 시려 제자리 뛰기를 하여야 한다. 바로 옆 사람과 품앗이로 사진 한 장 겨우 찍을 수 있다. 저 멀리 옅은 구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면 눈을 지긋하게 감고 무언가를 갈구할 것이다.
서울에서 50년 넘게 살면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서을 근교 산을 자주 오르고 있다. 봄철의 연두색은 새 색시처럼 포근하다. 여름날에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도록 시원한 그늘로 가슴을 연다. 붉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은 가슴을 뛰게 한다. 순백의 겨울은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서울 근교 산은 어느 곳보다 뛰어난 새해일출 명승지다.
둘레길 새해일출 명소
등반시간 맞추기 어려우면 둘레길 수준의 일출명소를 찾으면 된다. 남산이 대표적인 명소다. 지하철역에서 접근하기 쉽고 거리가 길지 않아 새해일출 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하지만 지하철 출퇴근 때처럼 사람에 밀려다니는 북새통이 문제다. 좀 일찍 서둘러야 사진 한 장 남길 수 있다.
인왕산, 서대문 안산, 아차산, 강동구 일자산 등 우리 주위에 새해일출 명소가 많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먼 거리 여행도 좋고 이름 없는 호젓한 바닷가도 좋다. 아니면 자기 집 옥상에서라도 새해일출을 맞보기 바란다. 새해일출! 내 손 안에 있소이다!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언제나 교회로부터 시작한다. 정기적으로 점집을 드나드는 어머니와 굿, 고사 등에 익숙하던 필자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미션스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어려서 필자에게 각인된 교회 이미지는 색색으로 물들인 부활절 삶은 달걀과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함박눈이 쌓인 뾰족한 첨탑의 이미지와 함께 온다.
중3 때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흥청거리며 시작되었다. 당시 중등부 선생님은 “이제까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선물을 받기만 했는데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가 선물을 주기로 하자”고 제안하셨다. 딱히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것은 아니었고 교회의 새로운 행사였던 셈이다. 물론 선물은 교회에서 준비하고 우리는 포장만 했다.
그런데 선물은 평소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치약, 칫솔, 비누, 밀가루 등 생필품이었다. 마치 국군 아저씨한테 보내는 위문품 같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가 직접 전달한다니 국군 아저씨는 아닌 것 같았다. 꽤 큰 보퉁이의 선물을 하나씩 든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 아래 교회 근처에 있는 인왕산으로 올랐다.
깜깜한 밤에 랜턴을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얼마쯤 올랐을까 선생님은 가마니 같은 것이 드리운 작은 굴 같은 곳을 가리키며 선물을 전달하라고 하셨다. ‘도대체 여기에 누가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깡마른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시며 얼굴만 내밀었다.
깜짝 놀란 필자는 선물꾸러미를 말없이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 받으시고 고맙다고 인사를 여러 번 하셨다. 우리는 그날 난생처음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짓말같이 그곳에 다녀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마음은 오를 때처럼 신나지 않았고 모두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필자는 늘 하던 반찬 투정도 안 하고 고집도 덜 부리고 엄마 말을 제법 잘 들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버릇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의 기억이 행복함으로 인식된 것은 한참 후였다.
몇 년 전 당시 인왕산에 같이 올랐던 친구가 45년 만에 전화를 했다. 그 친구도 그날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해 그동안 봉사하는 일에 많이 동참했는데 그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어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부터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우리는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 12월이 오면 올해도 어김없이 인왕산 친구들이 모일 것이다. 열다섯 살 때 우리 맘속에 뿌려진 그 작은 행복을 키우며.
서울에는 내사산과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서울 4대문 안 4개의 산을 말한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이다. 한 바퀴 돌면서 건강다지기 딱 좋은 계절이다.
수도 서울의 유래
서울은 조선 태조 3년(1394) 10월 25일 지금의 수도로 정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 세월이 지났다. 영역·규모·기능에 있어서도 많은 변천이 있었다. 이러한 변천을 평면적으로 보면 현재의 광화문 비각을 기점으로 하는 북위 37도 34분, 동경 126도 59분의 위치를 중심으로 방사선 상으로 확대·발전해왔다.
14세기 한양 천도 당시의 서울은 대체로 도성 내를 말한다. 이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백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 이른바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약 500만평에 불과한 지역이었다. 광화문 비각을 중심으로 내사산은 반경 약 2㎞ 이내 지역이 된다. 내사산은 성벽으로 연결되어 서울 방어의 제1선이며 한강은 서울시의 동남쪽을 자연호와 같이 흘러 서울의 방어를 더욱 튼튼히 하고 있다. 서울이야말로 천연의 요새지인 것이다.
백악산은 흔히 말하는 청와대 뒷산이다. 한양의 주산으로 북악산이라고도 불리며 높이가 342m인 나지막한 산이다. 서쪽 인왕산은 자하문에서 연결된다. 경복궁역에서도 쉽게 갈 수 있으나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는 통제 지역이다. 338m 높이의 아름다운 산인 인왕산은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서쪽으로는 안산과 마주해 있고 동쪽으로 백악산과 연결된다. 능선 산행이 어려우면 둘레길 산책을 할 수도 있다. 능선 경비가 청와대 쪽 사진 촬영을 제지하고 있는 것이 ‘옥의 티’다. 수 킬로미터 밖 스마트폰 사진 하나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읽고 마음을 열었으면 한다.
125m 높이의 나지막한 낙산은 도심의 공원 같은 산이다. 성곽 바로 아래는 젊음이 넘치는 대학로다. 혜화역에서 바로 갈 수 있다. 관광명소인 남산은 265m의 나지막한 산으로 시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남산타워와 광장은 주로 차편을 이용해 관광을 하는 곳이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장충단공원부터 성곽을 따라 순환로 걷기를 권장한다. 색다른 남산을 볼 수 있다.
아침과 저녁이 제법 시원한 가을이 왔다. 다음 달 중순이면 단풍이 절정이라는 방송보도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맘 때 걷기 딱 좋은 자락길 몇 곳을 소개한다.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10일 토요일 9시 독립공원에서 모여 친구들과 어울려 안산 자락길 산행을 하였다. 안산은 서대문구에 있는 높이 295.9m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 340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대문 독립공원, 이진아도서관이 위치한다. 정상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보수한 봉수대(서울특별시 개념물 제13호) 등을 볼 수 있다.
안산의 백미는 메타세콰이어 숲길! 독립문공원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도는 거리는 7㎞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무장애 길로 조성된 이 산책로는 메타세스콰이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졌다. 메타세콰이어(Metasequoia)는 중국이 원산지로 35m까지 자라고 수피는 회색빛을 띤 갈색이고 세로로 벗겨진다.
숲속을 한 바퀴 돌고나서 쉼터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담을 나누면서 어느덧 봉수대 정상에 올랐다. 건너편 인왕산을 조망하고 독립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영천재래시장에 이르러 막걸리잔 높이 들고 ‘삶길 70년 살길 30년’을 자축하였다.
◇서울대학교 관악 수목원
서울대학교 관악 수목원은 관악산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무너미 고개를 넘어서부터 안양자연공원에 이른다. 멀리 가지 않고도 많은 수목을 감상할 수 있으며, 특히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시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곳이다.
현재는 시설 일부보수공사로 안양 쪽 정문에서는 입장을 제한하고 있으나 관악 쪽 후문에서 내려가는 것은 허용되고 있다.
문의처: 031-473-0071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은 관악구에서 금천구로 진입하는 호압사 뒤에 있다. 관악산 입구에서 석수역까지 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 5-2구간 산행로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여름철에는 날파리, 모기 등 해충이 없어 휴식하기 편리하고, 그늘이 크고 시원하여 남녀노소 자리 깔고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잣나무 잎이 두툼하게 쌓인 이곳은 눈이 많이 오는 겨울철에도 매우 따뜻하여 한겨울 추위를 느낄 수 없을 지경이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호암산 삼림욕장! 시설만 좀 갖춘다면 어느 삼림욕장보다 더 훌륭할 것 같다. 석수역으로 가는 길에 때죽나무 연리지를 만난 것은 보너스! “내년 여름에는 이곳에서 피서를 해야지!”
정동 전망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스처 간 사람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1동 13층에 있는 정동 전망대이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인왕산과 백악산이 펼쳐 보인다. 가까이 서울 신청사가 우람하게 서 있고 빌딩 숲 속에 옛 고궁인 덕수궁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주변에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정동 전망대에서는 커피를 비롯한 각종 음료를 주변 반값에 즐길 수 있다. 서울 시청역에서 나와 덕수궁 쪽 출구로 나오면 대한문이 보이고 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진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며 옛 왕궁을 둘러 볼 수도 있고 빌딩 숲 속의 허파와 같은 정원에서 힐링 할 수도 있다.
역사 유물이 늘어서 있고
덕수궁 주변으로 1897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일제하에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이 등사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고. 1926년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성공회 대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근처를 걸어보면서 이 역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감회가 아닐 수 없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보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데 그곳은 대한제국시 근대적 사법기관인 평리원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재판소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재판을 받거나 고문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가볍게 발걸음을 뗄 수가 없게 된다.
황제가 살던 왕궁
그리고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수궁에는 역사의 수례 바퀴를 돌려 대한제국의 그 시대로 돌아갈 듯 착각에 빠진다. 그 굴곡의 역사가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했고 1919년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왼쪽 옆으로 정관헌이 보이는데 고종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덕수궁내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 앞으로 덕수궁 석어당은 덕수궁 내 유일한 2층 건축물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6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바로 앞쪽에 웅장한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대 등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중요한 으뜸 전각이기도 하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중명전이 있는데 왕실도서관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때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접견한 장소이기도 하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 덕혜옹주를 낳아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장소도 여기에 있다. 최근 덕혜옹주가 영화로 만들어져 관심을 받고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곳,
정동 전망대는 이 역사의 숨결이 잠들고 있는 현장을 차 한 잔 하면서 바라볼 수 있다. 필자는 시내를 나오는 길이면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 빌딩 숲 속에 황제가 집무를 보던 집무실이 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덕수궁을 바라보며 필자 또한 한 시대의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커피 향기를 맡으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시대의 주인이 되어 있는가?
한양도성길 구간 중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인근 혜화문과 창의문(자하문) 사이를 를 백악구간이라고 한다. 이 구간이 도성길 7개 구간 중에 가장 힘든 코스다. 북악산 능선을 타고 넘는 성곽 길을 따라 걸으면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그런데 북악을 넘어 창의문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가파른데다가 다리도 풀린 상황이라 매우 위험하다. 내려오면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 땀범벅이 된다. 다음 코스 인왕산 구간으로 접어드는 초입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땀도 식히고 잠시 쉬어갈 겸 가볍게 들른 윤동주 문학관. 그러나 그의 육필 원고를 읽어나가면서 가벼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과거 물탱크로 사용했던 구조물을 개조한 영상관에서 시인의 삶과 시를 만날 수 있다. 육면체 콘크리트 구조물의 검고 거친 표면이 암울했던 그 시기와 잘 어울린다. 천장에서 들어오는 한 조각 빛의 의미도 새롭게 느껴진다.
그 영상관에 시인이 다녔던 북간도 소학교에서 가져온 아주 작고 투박한 나무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초등학생의 기분으로 그 곳에 앉으니 시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어둡고 서늘한 육면체 방, 거칠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낡은 흑백사진들이 파르르 떨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시인은 여리고 부드러우면서도 우수가 어린 표정이다. 아주 익숙한 시가 조금씩 위로 움직여 사라지면서 약간의 울림과 함께 숙연하게 낭독된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에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환등기 영상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토록 여운이 남는다.
교과서에서 자주 만났던 익숙한 시가 그 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코미디프로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던 ‘별 하나에...’가 갑자기 애잔함과 슬픔, 그리움, 절망 등으로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전율을 느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서 별을 세고 있는 시인과 함께 서 있는 것처럼... 학창시절 이후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윤동주. 그의 육필원고를 숨죽이고 읽어 내려가면서 육십이 가까워진 필자가 비로소 시인의 애절함을 절절히 느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던 청년은 광복을 6개월 앞두고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기억되는 그의 숨결을 찾아갔다.
윤동주는 1941년 24세가 되던 해,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약 4개월간 하숙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에 윤 시인을 기억하게 하는 대표 시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가 쓰였다. 이 인연으로 설립된 것이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다. 더는 쓰이지 않는 수도 가압장 물탱크 두 개를 이용해 만들었다. 좁은 공간 안. 깊은 내적 의미를 이해하고 바라보면 문학관 자체가 윤동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 보는 스토리텔링형 문학관이다. 유물 등을 나열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 안에 의미를 부여했다.
제1 전시실에는 윤 시인의 사진과 시(영인본) 등 각종 문서와 만주 북간도 명동촌 생가에서 가지고 온 우물 목판이 전시돼 있다. ‘창씨개명’을 하기 전 윤 시인이 쓴 ‘참회록’ 영인본 원고지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서 갈등이 고스란히 적힌 낙서도 찾을 수 있다.
제2 전시실과 제3 전시실은 공간 자체가 윤 시인이다. 열린 우물로 불리는 제2 전시실은 윤 시인의 ‘자화상’을 표현한 곳이다. 마치 우물 안에서 사내의 얼굴을 대하듯 하늘을 마주하면 윤 시인의 서글픈 얼굴이 그려진다.
부대시설로 문학관 위에 작은 카페가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카페 길과 이어져 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관람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