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최다 노미네이트, 두 번의 여우주연상과 한 번의 여우조연상 수상. 이 놀라운 기록을 보유한 자는 누구일까? 바로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이다. 1977년 영화 ‘줄리아’로 데뷔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60여 작품에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성별과 연령의 한계를 뛰어넘고 오직 연기력만으로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그야말로 ‘철의 여인’ 같은 배우다.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스크린 속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사회부 기자를 꿈꾸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최고의 패션 잡지 '런웨이'에 입사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와 함께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의 비서로 일했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편집장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았으며, 제64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앤 해서웨이 또한 20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초년생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며 메릴 스트립과 나이 차를 뛰어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2.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1979)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지친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와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를 두고 떠났다 1년 만에 돌아와 양육권 소송을 거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의 해체를 소재로 한 고전 영화로, 이혼 가정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당시 데뷔한지 약 3년이 넘은 신인배우였던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격인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할리우드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혼 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더불어 메릴 스트립의 젊은 시절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3. 시크릿 세탁소 (The Laundromat, 2019)
유람선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앨런'(메릴 스트립)이 터무니없는 보험료에 수상함을 느끼고 보험 회사로 향하며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다. 2016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세 회피 자료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영화의 원제인 '세탁소' 또한 옷이 아닌 돈 세탁을 의미한다. 불법적인 자금 세탁을 고발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됐으며, 배우들은 작품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이동해가며 내레이터와 연기자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한다. 주인공을 맡은 메릴 스트립 또한 영화 후반부에는 극중 역할에서 벗어나 영향력 있는 배우이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탈세를 지적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아는 길도 물어보고 가자. 힘든 일들이 많이 생기는 날이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차근히 진행할 것이니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뚫고 나갈 길이 보이게 될 것이다.
•84년생 : 나아가는 데 방해가 심하니 윗사람에게 상의함이 길하다.
•72년생 : 관재를 조심하면 나중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
•60년생 : 투자는 힘드나 재수는 있으니 관리를 잘하라.
•48년생 : 안에서 좋던 일이 밖에 나가면 모든 일이 잘 안 통한다.
◈ 소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가벼운 마음은 건강을 돕고 재수도 끌어들인다. 길운이 있으니 어렵게 진행하던 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자중하며 진행하라.
•85년생 : 무엇이든 잘 풀리는 운이나 이성 문제에 묶여 힘들게 된다.
•73년생 : 정도를 지키면 하는 일이 잘되고 재운은 좋으나 손재를 조심하라.
•61년생 : 다툼과 소송 문제는 합의가 잘되어 해소된다.
•49년생 : 막혔던 일이 친구 형제의 조력으로 잘 해결된다.
◈ 호랑이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늑대를 피하면 사자가 나타난다고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니 자못 산 넘어 산이 될 우려가 있다. 차근히 진행하라.
•86년생 : 문을 나서면 불리하니 집에 있는 것만 못하다.
•74년생 : 재운은 좋으나 애정 문제는 갈등 해소하기 힘들다.
•62년생 : 밀고 나가는 힘은 좋으나 건강에 신경 쓰도록.
•50년생 : 비록 재물은 많이 생기나 절반은 나간다.
◈ 토끼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나 한 가지 일에 신경 쓸 때이다.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겠다는 마음을 버리라. 한 가지 일이라도 신중히 처리해야 성사가 쉬울 것이니 자중함이 길하다.
•87년생 : 정신이 산만해질 때이니 만사를 뒤로 미루고 조용히 자중하자.
•75년생 : 재운이 좋으니 한 우물을 파자.
•63년생 : 가끔 들려오는 소리를 진심으로 들으면 손해 본다.
•51년생 : 좋은 일은 많으나 한가지 골라잡기가 힘들다.
◈ 용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산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니 하는 일에 허황함이 있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성급하게 처리하지 말 것이니 분주히 움직여도 얻음은 없을 것이다. 자중함이 길하다.
•76년생 : 심신이 괴로우니 두려운 사건을 조심하라.
•64년생 : 머리는 있고 꼬리는 없으니 일마다 이루기 힘들다.
•52년생 :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기만 하고 실속은 없다.
•40년생 : 무리하게 재물을 구하면 허망함이 있으리라.
◈ 뱀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일에 앞뒤가 없으니 일은 구하나 이루지 못한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일의 두서를 잡지 못하니 어찌 결과를 볼 것인가 일목요연한 계획이 필요하니 자중하라.
•77년생 : 머리는 있고 꼬리가 없으니 일에 미결함이 있으리라.
•65년생 : 재물은 먼 곳에 있으니 나가서 구하면 얻으리라.
•53년생 : 음양이 합 되니 어려운 일도 속히 이룬다.
•41년생 : 위는 맑고 아래는 편하니 재물이 밖에서 온다.
◈ 말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비록 재물은 생기나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생긴다. 재상은 길하게 추천하지 않나 작고 큰일로 인해 일신이 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망동하지 말고 사태를 잘 수습하라.
•78년생 : 돈 그릇이 비고 복이 숨으니 소망이 없다.
•66년생 : 사방이 꽉 막혀 어두우나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54년생 : 실물수가 있으니 도둑을 조심하라.
•42년생 : 집안에 경사가 있으니 슬하의 경사로다.
◈ 양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도를 닦고 악을 멀리하니 길함이 이른다. 군자는 도를 알고 행하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화를 부르니 자중함이 길하다.
•79년생 : 심중에 숨은 근심을 누가 알까 재수와 이성이 힘들다.
•67년생 : 집에 불안함이 있으니 일이 풀리려면 가정을 돌봐야 한다.
•55년생 : 만약 관록이 아니면 재운이 열린다.
•43년생 : 시운이 이롭지 못하니 아무것도 경영하지 마라.
◈ 원숭이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유월 염천에 한가로이 높은 정자에 누웠도다. 남들은 어려움에서 허덕이고 있으나 홀로 유유자적함과도 같다. 운기가 길하니 다른 이도 살핌이 더욱 길할 것이다.
•80년생 : 구름을 헤치고 달을 보는 상이니 만사가 이루어진다.
•68년생 : 낚싯대에 용이 걸리는 상이라 이름 날리거나 상 받는다.
•56년생 : 화가 변하여 문서가 되니 재물이 손에 들기 힘들다.
•44년생 : 외부내빈 하니 홀로 마음이 상하도다.
◈ 닭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봄비에 만물이 다 즐기는 운이라 잘만하면 이루어진다. 만사가 여의 하니 봄비에 꽃나무가 물이 오른 것과 같다 하겠다. 망동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좋은 일들만 생각하라.
•81년생 : 여행을 조심하라 구설이 들어온다.
•69년생 : 귀인이 도와 일은 잘되나 실물을 조심하라.
•57년생 : 괴로운 마음을 어디다 하소연할꼬, 먹고 자는 운이다.
•45년생 : 비록 구설은 있으나 크게 통한다.
◈ 개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백사가 여의하니 더는 무엇을 바랄 게 없도다. 운기가 길할수록 자중함이 좋으니 자만은 가지지 말라. 운기가 감할까 두렵다.
•82년생 : 우물 안 고기가 바다로 가니 힘이 생기고 막힌 일이 잘된다.
•70년생 : 가물치 판돈은 통속에 있다. 멀리서 찾지 마라.
•58년생 : 심혈을 기울이면 힘든 것을 얻을 수 있다.
•46년생 : 모든 일을 급하게 처리하지 마라. 손에 미치지 못한다.
◈ 돼지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포기할 것은 빨리 잡을 것을 생각하는 날이 되자. 풍파가 몰아친다고 하나 운하던 일은 성사하고 구할 것이니 인내하는 가운데 길함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노력하라.
•83년생 : 경쟁, 방해는 많으나 내 것은 안 놓친다.
•71년생 : 누구와 같이하는 일은 손해가 크다.
•59년생 : 역마가 왕기를 띄우니 나가면 이익이 있다.
•47년생 : 배가 선창에 닿으니 비바람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동네 책방을 되살려낸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책 산업에 종사했던 전문가들이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을 설계하며 자연스럽게 “책방이나 내볼까?” 했던 말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이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우리 동네 책방들을 찾아 소개한다.
블로그에 소개된 사진만 언뜻 보면 강원도 깊은 산속 같다. 어라? 주소를 보니 용인이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약 45분), 양지에서 하차한 후, 택시를 이용(10여 분)하니 금세 도착이다. 낚시꾼들에게 유명한 용담저수지 건너편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만 벗어나도 이렇게 깊은 숲을 만날 수 있다.
‘생각을 담는 집’의 주인장은 임후남 씨다. 오랫동안 잡지의 인터뷰어로 이름을 떨쳤던 기자 겸 작가다. 2008년부터 1인 출판사 ‘생각을 담는 집’을 운영하다 2018년 용인 원삼면에서 동네 책방을 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북카페에서 커피도 내리고 차도 우려낸다. 북스테이를 이용하는 투숙객들에게 조식을 근사하게 차려내는 호텔리어 역할까지 1인 5역을 해낸다.
어떻게 산속에서 책방을 열 생각을 했나?
남편이 회사를 그만둘 때가 됐는데 아무 일 안 하고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입버릇처럼 은퇴 후에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시골에서 매일 의미 없이 사는 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일도 하고 시골생활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북카페를 해보자”는 의견에 서로 동의했다.
결정을 한 뒤에는 사방팔방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다. 열망이 강해서였는지 우리가 딱 원하는 공간을 찾게 됐다. 이 집은 원래의 건축주가 황토벽돌로 지은 4층 건물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만 사용하기에는 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단절돼 핸드폰도 끄고 TV도 안 보고 책 읽으며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을 제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북스테이까지 운영하게 됐다.
마침 그 무렵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고 근교에서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내거나 휴식을 취하는 트렌드가 생겨나면서 북캉스(책+바캉스) 혹은 북스테이(책+숙박)란 말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해 더 힘을 얻었다.
북카페를 운영하면서 가족의 행복도가 높아진 게 무엇보다 만족스럽다.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 신간서적 소개를 담당할 만큼 책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많이 읽었다. 저쪽 서가에는 그동안 내가 읽어온 3000여 권의 책들이 있다. 북카페를 하면서 서재까지 갖게 된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손님들 중에 내 손때가 묻은 책들을 펼쳐 읽으면서 감개무량해하는 이도 많다. 어느 날은 책 속에 붙여놨던 포스트잇이 뚝뚝 떨어지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지?
다양하다. 자녀와 함께 오는 젊은 부부가 많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맘껏 책을 고르고 구입한 후 산속 의자에 앉아 해거름을 보며 독서를 한다. 잠깐 책을 놓고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밤에는 반딧불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젊은 엄마들의 만족도가 높다.
최근에는 노부부가 전남 광주에서 올라왔다. 내가 ‘시골책방입니다’란 책을 얼마 전에 출간했는데 그 책을 보고 이곳이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책방지기 추천으로 문화 분야의 책 10여 권을 구입하고 방에 올라가시더니 그다음 날 아침에 재미있게 잘 읽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곤 또 10여 권을 구입했다. 이럴 때 제일 힘이 나고 보람을 느낀다. 내가 추천한 책을 읽고 인정하는 거니까…. 이런 게 동네책방의 매력 아닐까 싶다.
이 책방만의 프로그램이 있다면?
동네 책방을 찾는 분들은 정말 책을 좋아하고 문화 관련 모임에도 열성적이다. 그러다 보니 찾아오시는 분들의 수준이 매우 높다. 그분들이 만족할 만한 책을 추천한다는 것이 내게는 새로운 도전 같다. 그래서 책도 더 열심히 많이 읽는다. 신간을 추천하기도 하고 내 인생의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동네 책방을 즐겨 찾는 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책방지기의 북큐레이션이 아닐까 싶다.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는 작가와의 대화다. 그림책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참석하는 분이 많다. 시 창작교실, 에세이 창작반, 책과 함께하는 서점 음악회 등 소소하게 준비한 프로그램도 있다. 북클럽 회원들에게 초청장도 보내고 홍보도 한다. 참, 얼마 전엔 모닥불 피워놓고 모닥불 시낭송회를 했는데 호응이 좋았다. 생각보다 어린 자녀들이 더 집중하면서 참여하더라. 부모, 자녀들 모두 만족해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아! 나 이 말 꼭 하고 싶다. 나이 들어 할머니가 돼도 우리 책방에 오면 신간을 추천해줄 수 있는 그런 책방지기가 되고 싶다.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고 꾸준히 책과 함께 지내는 삶이 최고의 행복 아닐까 싶다.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동네 책방인 것 같다. 돋보기 쓴 할머니가 권해주는 신간… 뭔가 그림이 멋있지 않나?
박종서(74) 관장은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 1세대로 이 분야의 선구자이자 산증인이다. 예술 관련 잡지와 도록들이 꽂혀 있는 책장, 박 관장이 직접 만든 모자이크 작품과 다양한 소품들, 도자기들이 정갈하게 진열된 공간에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옆자리에는 세 살짜리 고양이 금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2019 디자인코리아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상자로 선정됐을 때 쑥스러웠다. 후배들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추천을 못하게 했는데 일방적으로 받게 됐다. 나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정도로 인품이 있지도 않다. 옛날에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은사님이 계신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승낙했다.
코로나19로 미술관이 휴관 중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생활은 식칼과 똑같다. 한쪽에는 날카로운 면이 있고 한쪽에는 무딘 면도 있다. 삶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어려서 구석진 곳에 있으면 너무 편안했다. 그래서 책상 밑, 어머니의 재봉틀 발판 속, 장롱과 벽 사이로 들어가 있곤 했다. 어른이 되어 등산할 때도 바위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이 미술관을 지을 때 건축가에게 “유리로 만들어서 한눈에 다 보이면 안 된다. 내가 숨을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런 공간을 확보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혼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날 일을 기록한다. 어제는 잎이 삐죽삐죽한 씀바귀를 스케치한 다음 마시던 커피를 이용해 잎사귀를 채색했다. 이런 시간들이 가장 행복하다.
관장님에게 디자인은 어떤 의미인가요?
음악은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런데 디자인은 절대 사람을 울게 하지는 못한다. 감정적으로 음악만 못하다. 다만, 소유한 사람이 오래 소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줘야 한다. 디자인은 항상 보편적인 개념을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는 비행기다워야 하고, 자동차는 자동차다워야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자동차가 갖는 보편적 개념과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무조건 새로운 게 디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안목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스킬은 배울 수 있지만, 창의력은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안목을 키우려면 흙, 나무, 종이 등 기본 물질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년 후나 20년 후에는 못 쓰는 지식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지식의 반감기라고 하는데, 디자인은 90%가 없어진다. 지식이 반감되지 않으려면 내 손으로 만든 기억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 때 어린 시절 진흙을 가지고 놀던 기억을 떠올린다. 진흙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어떻게 해야 갈라지지 않는지,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하는 것들을 디자인에 적용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신데요.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먼저 진화했다. 우리가 오늘날 겪는 시행착오는 이미 생태계가 오래전에 겪은 시행착오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을 못 따라간다. 황금분할 1:1.61803은 암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연에서 뛰어놀았던 아이들 머릿속에 이미 다 들어가 있다.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그렇다. 그냥 척척 했는데, 재보면 황금분할이다. 특별한 툴이나 연장이 필요 없다. 무엇을 만들고자 할 때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구를 구하러 다니는 동안, 초기의 생각이 변질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면 거짓일기처럼 된다.
자동차 디자인의 장인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디자이너는 월급이 아니라 명예와 사명감으로 살아간다. 윗사람이나 상대 부서 등 타인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모델이 있어야 하고, 논리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논리는 빈약해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도둑맞은 내 생각을 찾아오기 위해서다. 독서를 하다 보면 내가 생각한 것들이 이미 글과 디자인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바로 움직여야 한다.
아들 박찬휘 씨도 현재 아우디 디자인 파트에서 일하고 있지요?
아들은 페라리, 벤츠를 거쳐 현재 아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2022년에 나올 자동차 프로젝트명이 아들 이름을 딴 ‘CHAN22’라고 한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명예롭게 근무한다. 이곳을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들을 키울 때 자연을 많이 접하게 했다. 내가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같이 그렸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렸다. 내가 그것을 모아 유학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이게 네 진짜 그림”이라며 건네줬다. 덕분에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들은 이제 진실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내게 많이 감사해한다.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이 부딪친다. 언젠가 내가 티뷰론을 실험적으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니, “은퇴 후 졸작들을 만들더라, 아빠도 그 꼴이 되고 싶으시냐, 하지 말라”고 했다.(웃음)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자동차는 비행기가 될 수 없다.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동차는 그럴 수 없다. 미래에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나와야 한다.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떼어내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디자인 명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강조한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장식이 많아지고 허세가 넘친다. 지금 우리나라 차들이 그렇다. 대기업은 이제 소비자에게 판매만 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식에 대한 계몽적 마케팅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기자동차부터 수소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까지 자동차의 미래 트렌드가 많이 바뀔 것으로 예측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이유는 앞쪽에 엔진과 미션이 들어가고 뒤쪽에 트렁크가 있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라면 앞쪽이 텅 비어도 되니, 현재의 자동차 모습일 필요가 없다. 앞으로 고밀도 사회(high density society)가 도래하면 크기도 지금처럼 클 필요가 없다. 현재 패키지 레이아웃(package layout)은 가솔린 자동차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모양과 디자인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테슬라도 그대로 하고 있다. 이게 급선무인데 관념에 묶여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게 제일 안타깝다. 소재도 철판으로만 한정하고 있는데 달라져야 한다. 카본 파이버는 철판보다 30배나 더 가볍다. 현재 쏘나타의 무게는 1톤에 가깝다. 카본 파이버로 바꾸면 200㎏ 정도밖에 안 된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나는 평생 메모를 습관화했다. 신입사원 시절 일본 출장을 갔다. 비행기 옆자리에 한 할아버지가 앉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가는데 그분은 뭔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기록할 게 많은 일을 하시나보다” 했다. 나에 관해 물어봐서 신입사원이라고 했더니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해라. 윗사람이 지시하면 그것을 적어라. 상사가 묻기 전에 보고해라. 윗사람이 물어보는데 내가 ‘아차’ 한다면 이미 회사생활은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은 일본 스미토모상사 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때부터 메모를 생활화했고 그 내용을 모아 책도 출간했다. 요즘 세대는 휴대전화나 컴퓨터에 기록한다지만, 우리 세대는 바로바로 손으로 쓰면서 생각도 정리하니까 더 좋은 것 같다.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취미로 1990년대 초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빙상 500m 쇼트트랙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취미이지만 하나를 하더라도 기초만큼은 제일 탄탄한 사람이 돼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정확한 자세와 아름다운 폼은 기본이 튼튼해야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지는 건 자세가 흔들렸거나 승부욕이 넘쳤다는 의미다. 뭐든지 기본을 먼저 갖춰야 한다. 기본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테크닉부터 터득하려고 하니까 무너지는 거다.
아직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신데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뭔가 일을 벌이면 사람들은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 한다. 대부분 그 말을 들으면 포기한다.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생각날 때 바로 시작해야 한다. ‘포니정’으로 불렸던 정세영 회장은 “결론은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한다. 단점일 수도 있지만, 생각을 오래하면 하지 않을 구실을 찾게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노년을 준비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산에 가면 작은 꽃, 작은 버섯, 이름 없는 가랑잎을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 벌레 먹어 썩은 나무가 있으면 가져와서 그 흔적을 입체적으로 만들곤 하는데, 벌레가 그린 그림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갔다고 할 수도 있다. 자연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건 아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 뜻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길을 열어준다. 즐거운 일, 사랑할 일이 구석구석에 많다.
우리 연배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화물차처럼 중요한 존재다. 그런데 노인들을 홀대한다. 이런 풍토는 바뀌면 좋겠다. 나이 들면 하찮고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길 바란다.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한다.
버킷리스트가 있으신가요?
첫 번째로 이탈리아 스승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페라리 자동차를 만든 명인 스칼리에티는 나의 스승이다. 14세 때 기름 1ℓ를 넣은 오토바이를 타고 모데나에서 베로나까지 100㎞ 구간을 갔다고 한다. 집에 돌아올 때는 적정 속도와 연료 소모량을 계산해, 오토바이를 개조한 다음 소량의 연료만으로 오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950년대 벨로솔렉스 오토바이를 주문했다. 미술관 아래 밭 근처에 있던 밤나무가 죽었다. 지름이 1m 정도 되는 큰 나무였다. 그 나무와 오토바이를 결합한 작품으로 스승에게 보답하는 오마주 작업을 준비 중이다.
두번째는 책을 출간하려고 한다. 10년 전 ‘꼴, 좋다! 자연에서 배우는 디자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강의 교재로 썼던 내용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 모든 형태는 자연을 따른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지금 두 가지 책을 구상 중이다. ‘꼴, 좋다’와 같은 내용의 글을 새로 써서 큰 사이즈로 낼 계획이다.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스승에게 들은 자동차와 카로체리아(carrozzeria)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할 생각이다. 카로체리아는 디자인 능력을 갖춘 소량 주문제작 방식의 자동차 회사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집 뒤에 있는 500평(1652㎡) 규모의 정원을 영국의 채리티 가든(Charity Garden)처럼 만들고 싶다. 자선 정원으로 운영해 입장료를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 이 사업은 아내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술관을 통해 이미 사회에 기여하고 계신데요. 사재를 들여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술관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꼭 자동차와 관련된 꿈이 아니어도 좋다.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미술가가 될 수도 있다. 그 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교수로 있는 김상배 박사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연세대 공대를 졸업하고 뭘 할지 몰라 고민할 때 내가 “천장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도마뱀을 가지고 연구해봐라” 했다. 이후 스탠퍼드대학에 들어가더니 졸업작품으로 유리벽을 타고 오르는 로봇을 만들어 미국에서 올해의 과학자에 선정되었다. 많은 분이 여기를 자유롭게 방문하시길 바란다. 예약하면 전문가가 해주는 설명도 들을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동일한 탄소 성분으로 이루어진 흑연 연필은 꿈을 그릴 수 있다. 연필로 꿈을 그리듯 이곳이 모두의 꿈을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소망도 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육세라 씨는 170cm의 큰 키에도 단아함이 풍긴다. 알고 보니 1993년 미스코리아 출신. 전업주부로 산 기간이 길다지만 1998년까지 방송 생활과 모델 활동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KBS, SBS, MBC의 각종 프로그램에서 생방송 리포터를 했습니다. 백화점 전속 모델로도 활동했고 잡지 광고도 찍었어요. 1997년에는 서울모터쇼와 도로사업 기공식 때 김영삼 대통령 바로 옆에서 내레이션 진행을 봤습니다. 기관에서 하는 큰 행사에 많이 참여했죠. 목소리 톤이 좋다고들 하셔서 멘트가 있는 광고도 꽤 했습니다. 앵커 시험을 권유하는 방송사 PD도 있었는데 대학 졸업하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어요.”
방송에 미련이 좀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고 싶어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한국에서는 전공이 유아교육학이었는데 바꾼 거예요. 유학 시절 가끔 할리우드에서 단역배우 활동을 했고 광고도 찍었어요.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셋이에요. 양육하는 동안에는 아이들만 키웠어요. 무역업 하는 남편을 도와서 통역 업무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긴 미국 생활을 접고 2014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TV를 틀면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미스코리아 동기들이 보여 마음이 요동칠 때도 있었다.
“제가 한창 어린 나이에 활동하다가 꿈을 접어서 그런지 다시 일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도 이제 중학생, 초등학생이고요. 세 살 막둥이도 좀 커서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일을 다시 시작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리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해도 20년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하던 일을 다시 해볼까 생각해도 아는 기획사도 없더라고요. 마침 지인이 국민대학교 평생교육원 패션모델 과정이 있다고 추천해줘서 들어가게 됐습니다. 모델 트레이닝은 그곳에서 받았고요. 6개월 공부 마치고 마침 이번 대회 날짜와 맞아서 출전하게 됐습니다. 제 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가 됐죠. 남편도 아낌없이 지원하고 응원해주고 있어요.”
이번 ‘KMA시니어모델선발대회’를 발판 삼아 다시 한번 젊은 시절의 꿈을 펼치고 싶다는 육세라 씨. 앞으로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3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던 노래가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제목을 몰라도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는 후렴구만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 노래, 바로 ‘논개’다. ‘논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 이동기(65)는 현재 2700여 명이 가입한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이다.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올해로 14년째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무려 32년 만에 10집 앨범 타이틀곡 ‘약국집 딸’을 내놓았다.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기 위해, 일단 그가 처음 이름을 날린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83년에 발표한 노래 ‘논개’는 4집 앨범에 실렸어요. 1집은 1978년에 나왔죠. 그런데 내 1집, 2집, 3집 앨범들에 관심이 많았던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 대표가 서라벌레코드 사에 있던 나를 데려와서는 3년 전속으로 계약을 맺었어요.”
일단 계약을 했으니 노래를 만들어야 했던 이동기는 친하게 지내던 작사가 이건우에게 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 바로 ‘논개’였다. 이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논개’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없었다. 4집 앨범에 실린 11곡들 중 맨 뒤에 ‘논개’를 밀어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분도 안 걸려 만든 노래 ‘논개’
4집 앨범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처자식도 있었다. 3집 앨범까지 낸 6년 차 가수였지만 그는 그리 잘나가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4집을 들고 라디오 공개방송의 일인자였던 KBS 신광철 PD를 만난 사건으로 삶을 뒤바꾼다.
“신광철 PD가 나한테 ‘그만해, 노래. 가서 농사나 지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분이 마음속으로 저를 아껴서 밀어줬는데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그리 말한 거였어요. ‘네가 백이 있냐, 돈이 있냐, 얼굴이 있냐. 그만해’라고 말하는데, 몇십 장 가져간 음반을 그 자리에서 떨구고 무지하게 울었어요. 그리고 ‘그래, 난 안될 거야’ 하고 포기했죠. 그러고선 곧바로 고향 음성으로 내려갔어요.”
4집을 가장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30대를 코앞에 두고 처자식까지 있었는데, 노골적인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러나 얘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지금의 이동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 신 PD 옆에 있던 사람이 ‘이 사람아, 판 만들어 왔는데 울게 만들면 어떡해’ 하며 그를 나무랐고, 신 PD는 이동기가 놓고 간 4집 앨범에서 ‘논개’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그는 그 곡을 집중적으로 틀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TV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게 내 노래인 줄도 몰랐죠.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지구레코드 사에 6개월 만에 전화를 했더니 ‘너 빨리 올라와라, 노래 뜨고 있다’ 하더군요. 가봤더니 짐차에 내 앨범들이 막 실려 나가고 있더라고요.”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되다
이동기의 ‘논개’는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한사코 TV 출연을 피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전에 발표한 노래들도 어느 정도 뜨다가 그가 TV에만 나가면 인기가 떨어졌던 걸 기억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MBC의 신종인 PD는 집요했다.
“자기가 PD로 입봉하는 첫 프로그램인 ‘영 일레븐’에 내가 출연하면 좋겠다 하더군요. 피했지만 세 번째 찾아왔을 때 ‘대신 얼굴을 잡지 말고 멀리서 잡아라, 그 약속만 하면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영 일레븐’에 출연했는데, 이 양반이 바스트만 잡은 거예요. ‘왜 약속을 어겼느냐’고 항의하러 갔죠. 그런데 방송국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 있나 싶었죠.(웃음)”
1985년, 망하다
‘논개’가 대박 난 이후에도 그의 성공은 한동안 이어졌다. 다음 해인 1984년에 낸 5집에서는 ‘바보 바보’가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게 된 일이 터졌다. 그 일은 조영남과 관계가 있었다.
“제가 당시 5대 도시 콘서트를 했는데 기획자에게 조영남 씨를 게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 인연이 되어 친해졌죠. 그런데 조영남 씨가 가사를 쓴 곡 중에 ‘숨겨진 노래’가 있었어요. 내가 그걸 듣고 완전히 반한 거예요. 그래서 1985년에 발표한
6집 앨범에 넣었죠.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나는 젊은 취향이었는데 그 노래는 성인가요였던 거예요. 나와는 안 맞았어요. 실패했죠. 그때부터 고전하기 시작했어요.”
6집 앨범이 잘 안된 것도 문제였지만 그는 ‘논개’의 인기에도 돈을 벌지는 못했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그 시절다운 일이었다.
“대한민국 군부대가 정말 많았던 시대잖아요. 게다가 군사 정권이었고요. 아주 적은 돈을 주고 봉사 차원이라며 전방이고 후방이고 데리고 다녔어요.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바쁘긴 했는데 돈은 못 벌었죠. 그렇다고 안 돌면 방송 출연이 금지되니까 어쩔 수 없이 갔거든요. 기름 값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돈 줄 형편도 못 됐어요.”
우연히 이루어진 일본 진출
9집 앨범을 낸 1987년, 돈은 못 벌면서 계속 실패한 그에게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그때 홀리데이 인 서울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와세다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재일교포 2세 출신의 야쿠자 두목이 그를 발견하고 일본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나는 돈을 벌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일본에 갔어요. 당시는 15일짜리 관광비자밖에 안 나오던 때였는데, 13일 만에 2000만 원을 벌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한 달에 겨우 300만 원을 받고 그것을 소속사와 나누던 때였는데….”
그래서 그는 4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한 액수의 돈을 벌었다.
“일본에서도 ‘논개’가 유명했죠. 논개가 사연이 있잖아요?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 얘기를 먼저 했죠. 일본 사람들은 비록 논개가 임진왜란 때 일본 장군을 죽인 기생이지만 역사적 사연이 아름답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가수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
오랜 일본 활동을 마치고 철수한 그는 한국에서 컴백을 위한 음반을 준비했다. 그런데 기획사를 하는 친구가 시장 환경이 안 좋으니 음반을 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작업을 멈춘 그는 그 후로도 앨범을 내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지 않아 계속 미뤄야만 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우리나라 가수들은 참 사회적 약자예요. 당시 가수들의 권리와 권익을 대변하는 곳은 한국연예예술인협회 가수분과밖에 없었거든요. 방송국이 매년 그곳과 협상을 하긴 하지만 갑을관계가 강했죠. 부위원장 입장으로 협상에 참여할 때마다 일방적 양보를 요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2005년에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위원장 이경호 씨를 만나게 됐어요. 알고 보니 연기자들은 이미 28년 전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방송사와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방송사가 가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갑을관계가 아니라 상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만들라고 강력하게 권하더군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들을 만났다. 남진, 나훈아, 정훈희, 김도향, 김수희 등등 선배 가수들은 그의 설명을 듣더니 일리 있는 얘기라고 동의해줬다. 그래서 2005년 7월 1일 교원공제회관에서 300여 명이 모여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를 초대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그는 14년간 위원장 활동을 해왔다.
가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가 볼 때 연기자들은 자기권리를 위해 수많은 투쟁을 했다. 노동조합이 중심이 돼서 모두가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가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딱 한 번 2009년에 MBC에서 연기자들과 함께 연대 파업을 했어요.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관철됐죠. 그러나 그 후에도 투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호소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는 가수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TV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안타까워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정기적으로 가수들이 공연하는 쇼 프로그램이 없어요.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다 폐지했어요. 프로그램이 사라져도 그 시대의 대중가요는 꼭 히트하게 되어 있죠. 매체가 있든 없든 노래는 유행하는 거예요. 반드시 방송사 프로그램이 있어야 히트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는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이 사라져야 가요계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 가수들은 음원 저작권과 공연이 수입원인데 우리나라는 그걸 TV와 지역 행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니 음원과 티켓이 안 팔린다는 진단이다.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된 이유
사실 이동기가 새 앨범을 못 낸 이유에는 가수들의 권익과 관련한 문제들도 있다.
“음반을 내놓으면 방송사 PD들 찾아다니며 PR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노조위원장이면서 그러고 다니면 조합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섭외가 들어오면 “얼마 줄 겁니까?” 하고 물어본 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되었다.
“히트곡은 달랑 ‘논개’밖에 없는데 그래도 되냐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도 ‘이렇게라도 권리를 찾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른 가수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PD들에게도 그런 속내를 설명하니 존중해주더군요. 사실 일선에 있는 PD들은 저희들 출연료 처우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협상할 때는 PD들과 하는 게 아니라 방송국 노무 담당자들과 하니까 거기서 갭이 생기는 거죠.”
요즘은 자꾸 고향 생각이 난다
그렇게 불도저, ‘무데뽀 투쟁’의 화신이었던 이동기가 새 앨범을 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활동해온 위원장직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새 노래 ‘약국집 딸’을 내놓은 가수로서 활동해야 한다.
“열정과 사명감이 있는 후배에게 넘겨줘야죠.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직은 내년 5월 30일에 임기가 끝나요. 이번 앨범은 예전처럼 저돌적으로 PR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직까지 이동기가 가요계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진솔한 이야기를 내놓는 거죠. 히트와는 상관없이.”
그는 요즘 자꾸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담대함을 가진 동시에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뚝심으로 살아온 그는 이제 칩거의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처음 노동운동을 할 때는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어요. 사나운 매파였죠. 그런데 나이를 먹고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전략적 평화주의가 됐어요. 이제는 노사관계를 대화로 풀죠. 노동운동 초창기보다 지금 사람들이 더 많이 따라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구나 싶어서 감격스럽죠.”
가수는 자기 노래를 닮는다고 했던가. 이동기는 사랑보다는 의리와 우정을 위해 ‘몸 바쳐서’ 살았다. 그가 몸을 바침으로써 조금 더 나아진 세상에서 가수들이 누릴 평화가 있길 기원해본다.
36년 전통 ‘영동식당’
서대전네거리역 인근, ‘맛동네길’이라 불리는 계백로와 계룡로 사이 전문음식특화거리에는 오랜 전통과 맛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닭볶음탕을 비롯한 염소전골, 토끼탕 등 몸보신 메뉴로 사랑받는 ‘영동식당’은 대전광역시 인증 ‘모범음식점’, ‘3대·30년 전통업소’ 등의 타이틀로 믿음을 더하는 곳이다. 맛집들이 늘어선 큰길가가 아닌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은 가게에는 뜨내기손님보다는 오랜 단골이 주를 이룬다. 정겹고 한적해 보이지만 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이들로 종종 줄을 서기도 한단다. 어머니 정원자(77) 여사에 이어 영동식당의 맛을 책임지고 있는 김대흠(56) 씨는 오래 기다리는 손님들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했다. 때문에 맛집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와도 고사하곤 한다는 그다.
“방송을 타고 나면 갑자기 사람들이 확 몰려와 단골손님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벌어져요. 닭볶음탕 국물 반주 삼아 드시는 분이 많은데, 그분들도 여유롭게 즐기지 못하고, 밖에 있는 손님들도 오래 기다려야 하니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애써 방송으로 사람을 끌어모으기보다는, 맛있게 드신 분들이 입소문 내주시면 그게 가장 고맙고 기분 좋은 것 같아요.”
단골 중에는 매번 다른 사람을 데려와 닭볶음탕을 맛보이는 이도 있단다. 누군가에게 식당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는 건 늘 그 맛과 서비스가 실망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인장 역시 변함없는 맛과 친절한 응대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그것이 가게의 장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프랜차이즈의 경우엔 어디든 일정한 맛과 서비스를 기대하고 가는데, 대개 그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 곳들은 금방 문을 닫게 돼 있죠. 우리처럼 작은 가게라고 다르지 않아요. 옛 맛을 잘 지켜내고,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 게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오래되고 유명한 가게라도 자칫 기본을 잊고 방심하면 안 돼요. 손님 마음이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영동식당의 닭볶음탕은 푸짐한 양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인데, 제철 나물이나 김치 등 다양한 반찬도 인심 좋게 내놓는다. 몇 해 전 닭볶음탕의 주재료인 감자 값이 폭등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격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땐 정말 빚 안 진 것만도 다행이지, 거의 남는 게 없이 장사했어요. 그런데 재룟값이 싸졌다고 가격을 내리지는 않잖아요. 그럼 비쌀 때도 가격을 올리지 말아야죠. 어떤 집은 대신 양을 줄이거나 재료를 덜 넣어주는데, 그러면 맛이 변하니 절대 안 되고요.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해도 지금껏 버텨온 뚝심으로 변함없는 맛을 지킬 겁니다.”
대전1호선 서대전네거리역 4번 출구 도보 4분
주소 대전시 중구 계룡로874번길 27-9
영업시간 11:00~22:00
대표메뉴 닭볶음탕, 염소전골, 토끼탕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9월 9일 '귀의 날'을 맞아, 중장년이 겪을 수 있는 노인성 난청에 대해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강우석 교수의 도움말을 담아봤다.
노인성 난청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발생하는 청력 손실이다. 60세 이상 3명 중 1명이 이러한 증상을 겪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5세 이상은 40~50%). 노화로 청력이 감소하면 일상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당혹스러워하거나,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시 경고음 등을 듣지 못해 위험에 노출될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노인성 난청과 연관된 청력손실은 보통 고음역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가령 근처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전화벨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진다. 반면 길거리에서 트럭이 울리면서 지나가는 등의 저음역 소리는 분명하게 들을 수 있다.
노인성 난청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웅엉거리거나 얼버무리는 것 같다. △말의 받침음인 자음소리를 떨어진 곳에서 듣고 말하기 힘들다. △대화를 알아듣기 힘들어지며, 주변에 소음이 있을 때 그렇다. △음정이 높은 여자 목소리보다 남자 목소리가 알아듣기 편하다. △특정한 소리가 불쾌감을 일으키고 지나치게 시끄럽게 들린다. △이명(귀에서 울리는 소리, 우르릉거리는 소리, 쉿쉿하는 소리 등)이 생길 수 있다.
주로 유모세포(내이의 감각수용체)의 손실, 노화, 건강상태, 약물복용 등에 의해 나타난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귀로의 혈류공급에 변화가 생겨서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심장병, 고혈압, 당뇨에 기인하는 혈관 상태, 또는 기타 순환기계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청력 손실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의 감염, 심장 상태나 중풍, 머리 부상, 종양이나 약품들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노인성 난청 환자를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일부 환자에게 보청기가 추천된다. 보조적인 청각기구들은 몇몇 상황에서 듣는 능력을 더 향상시킨다. 특히 구화(시각적 단서를 이용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는 것)를 연습하면 대화 시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노인성 난청 환자를 위한 대화 요령
➊ 친구와 가족들에게 본인의 난청에 대해 이야기하자. 본인이 듣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상대방이 도움을 줄 수 있다.
➋ 친구와 가족들에게 말할 때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것을 요구하자. 대화 중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본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➌ 더 크고 명확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하자.
➍ 평상시의 빠르기로 이야기하고 음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부탁하자.
➎ 음식을 씹고 있는 중이나 손으로 입을 가리는 상황에서는 대화를 피하자.
➏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면 말을 더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다시 이야기하자.
➐ 필요하지 않다면 되도록 TV나 라디오는 끄고 대화하자.
➑ 청력을 방해하는 잡음들을 인식해야 한다. 식당에서는 주방이나 스피커 근처에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하자. 배경 소음은 듣기를 더 어렵게 한다.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
시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취미는 다양하겠지만 당구를 추천하고 싶다.
당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5세기에 크리켓과 비슷한 옥외 스포츠를 실내 게임으로 개량한 뒤 유럽 각지에서 오락으로 발달시켰다는 것이 정설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당구가 도입된 것은 1912년. 순종이 창덕궁에서 ‘옥돌대’라는 이름의 당구대 두 대를 설치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요즘에는 어느 동네이든 당구장이 많다. 당구는 남녀노소가 사시사철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다. 게다가 2018년 1월부터 당구장이 금연지역으로 지정되어 더 건전한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당구의 운동 효과는 이동거리에 있다. 운동량이 부족한 시니어에게는 안성맞춤인 스포츠다. 당구대의 둘레는 크기에 따라 7m에서 10m 정도 된다. 한 시간 당구를 즐길 경우, 약 2km를 걷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공을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하다 보면 집중력도 좋아진다. 당구를 칠 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기술을 익히게 되는데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 당구장에 가면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어 우울증 예방에도 좋다.
당구 게임비는 평균 10분에 1500~1600원 정도 한다. 65세 이상이면 할인을 해주는 곳도 있다. 당구장에 잘 다니는 분들에게 묻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저렴하게 당구를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당구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사구 게임, 포켓 게임, 스리쿠션 게임이 있는데, 요즘은 어느 당구장에 가나 스리쿠션 게임이 대세다. 스리쿠션 게임은 빨간 공, 하얀 공, 노란 공 각각 1개씩 3개의 공으로 게임을 한다. 점수는 제1적구를 맞추고 난 뒤 3쿠션 이상을 맞추고 제2적구를 맞추거나, 쿠션을 3번 이상 맞추고 제1적구 및 제2적구를 맞추면 1점을 획득한다.
당구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무엇을 먼저 배워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당구의 기본기다. 기본기에는 큐의 중심점 확인하기, 몸의 밸런스 잡기, 발의 위치 정하기, 그립 포인트 확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내가 당구를 쳐본 경험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브리지다. 브리지는 큐를 겨냥대로 정확히 쳐내는 토대가 되는 부분이다. 브리지를 잘 잡지 않으면 겨냥을 해도 그 포인트에 큐 끝의 탭을 맞출 수가 없고 큐 미스를 하기 쉽다.
당구는 지인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배울 수도 있고, 책이나 동영상을 통해 혼자 익힐 수도 있다. 짧은 기간에 당구 실력을 향상시키고 처음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려면, 당구 아카데미를 찾으면 된다. 일반인들은 1개월에 30만~50만 원 정도면 배울 수 있다.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결과가 다르겠지만 3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실력의 친구들과 무리 없이 당구를 즐길 수 있다.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처음 당구장에 갔는데 여러 번 패배를 당한 후, 그 즉시 가까운 헌책방에 가서 당구교본을 샀다. 그리고 이틀 만에 독파하고 다시 당구장에 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 당구장에 처음 가면 4구 경기에서 자기점수 30점을 놓고 치는데 책을 보고 간 두 번째 날에 친구들을 계속 이겨 80점이나 놓게 되었다. 그래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오래된 금언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당구를 칠 때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에티켓이다. 당구도 승패가 있는 게임이라서 승부욕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상대에게 실례를 범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샷이 성공할 경우에는 반드시 인사로 미안함을 표시하고, 상대방의 플레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술을 마시거나 잡담으로 다른 테이블 경기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된다. 이 외에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겠지만 어디에서나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된다. 노년에 당구를 즐기면 건강도 유지하고 매너 있는 신사가 될 수 있다. 내가 당구를 취미로 권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