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출가 전, 어둡고 아픈 나날을 보낸 승한 스님에게 용기와 행복을 준 ‘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좋은 말이 지닌 기운과 파동에 대해 언급하며, “좋아!”라고 말하면 좋아진다는 단순한 원리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정말 좋아지게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의숲)의 저자 승한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책을 펴낸 계기와 공유하려는 메시지
2년 전부터 매일 아침 BBS 불교방송 문자서비스를 통해 전달한 ‘승한스님의 행복을 여는 힐링편지’를 간추려 묶은 책입니다. 이 글들은 제가 누구를 힐링해주기 위해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젊은 날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제 영혼의 치유를 위해 자신에게 보낸 글입니다. 저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과 함께 그 아픔을 나눔으로써 치유의 길로 더불어 가고 싶었습니다.
출가 전, 알코올중독과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를 극복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
일차적으로는 병원과 약물치료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더 큰 치유는 영혼과 마음의 평온함으로부터 왔습니다. 명상과 마음 수행을 통한 영혼과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러한 변화의 끈을 놓치지 않고 계속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하루에 살자’ ‘먼저 할 일을 먼저 하자’ ‘나도 살고 남도 살자’ 등 이번에 펴낸 책 맨 뒤에 실린 ‘행복한 삶을 위한 나의 108계명’이 그것입니다.
‘행복을 여는 힐링편지’를 하며 기억에 남는 이야기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구제불능 선고를 받고 강제로 퇴원한 40대 후반의 알코올중독자를 치유의 길로 인도한 일입니다. 북한산 중흥사에 상주하고 있을 때 1년 가까이 함께 생활하며 제가 경험한 알코올중독 치유의 경험을 들려주고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술에서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현재 3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술을 잘 끊고 있습니다.
“인생은 상황의 몫이 아니라 해석의 몫입니다”라고 했는데,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한마디로 인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러나(But) 묘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긍정적인 상황보다는 부정적인 상황에 훨씬 더 많이 처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업무처리를 못 할까?”하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상황 뒤에 ‘그러나’를 붙여버리면 내 마음은 물론 상황도 긍정적으로 변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할까? 그러나 수학은 잘하지” “나는 왜 이렇게 업무처리를 못 할까? 그러나 직장 분위기 하나는 잘 잡지”하고 ‘그러나’를 붙이는 것입니다. 단, 긍정적인 상황 다음에는 ‘그러나 묘약’을 쓰면 절대로 안 됩니다.
“생각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은혜’가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같은 상황이라도 ‘보는 상황(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상황이 나에게 긍정의 힘을 주기도 하고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인식의 전환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혹은 무슨 상황이든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땐 항상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대부분의 ‘원수’는 ‘은혜’로 바뀝니다.
중장년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한마디
“그래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속엔 내 의사보다는 상대방의 의사를 더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주장과 신념이 더 완고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수록 상대방의 의견을 더 존중하고 먼저 받아들이면 배우자는 물론 성년이 된 자녀와의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게 돈이다.
은행권에서는 금융자산 10억원, 평균 재산 50억원 정도가 있으면 VVIP 자산가로 본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18만2000명이 여기에 속한다. 대체로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양천과 경기 분당, 동탄, 일산에 가장 많은 부자가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자산가들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문 잡지를 통해 세계 경제 흐름을 파악하고, 의식주 행락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가는 손주한테 우아하게 지갑을 여는 것보다 경제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손주에게 무조건 좋은 선물, 지갑을 크게 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며 “올바른 경제관념은 손주아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힘을 길러주므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돈을 벌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산가들은 분명 일반인들과 다른 공통적 습관이 있었다. 청국장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곳을 가는가 하면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둘이서 나눠 마시는 등 아낄 때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는 과감히 용단을 내린다.
인생의 오후를 여유롭게 유유자적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 돈을 사회적으로 의미있게 사용하는 태도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과 4명의 자산가에게 질문, 용돈관리의 결정적 오류에 관한 실체적 담론을 짚어봤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PB센터 부센터장은 20년 넘게 KB국민은행에서 퇴직연금과 프라이빗뱅킹(PB)을 담당하면서 KB국민은행 최초 국은인상 2회 수상, 카드 2만500장 신규 유치, 보험 700억원 이상 판매라는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 1퍼센트 부자들의 삶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자리하면서 돈을 다루는 그들의 마음과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베스트셀러 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부자를 가장 잘 아는 그가 말하는 ‘부자의 법칙’을 들어보자.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은 인터넷에 ‘신동일 꿈발전소’라는 자신의 사이트를 개설하여 스스로를 꿈발전소 소장으로 부르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경제독립을 이뤄야 하는 법이다. 그가 운영하는 꿈발전소는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존경받는 1퍼센트 부자와 행복한 부자들을 명예이사로 위촉하여, 그들에게 직접 배우며 부자의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50만원을 쓰느냐 50만원을 채워 넣느냐의 차이
“한 회장님이 해주신 얘기가 기억납니다. 그분은 과거에 바이어와 약속을 잡았는데 차가 밀려서 약속 시간 단 5분이 늦어지는 바람에 1년 매출의 절반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약속 시간 5분 전이나 10분 전으로 설정하지 않고, 반드시 15분 전으로 해서 여유 있게 사람을 만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고 하죠.”
부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그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습관은 돈을 대하는 마음에서부터 다르게 접근함으로써 갖게 된다.
“한 공무원이 휴가를 내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월 소득이 적지 않았고 정년이 7년 정도 남아 있었는데 내 집 장만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금융자산은 2000만원에 불과했죠. 그동안 푼돈을 소홀히 다룬 게 원인이었던 겁니다. 백 원 단위의 거스름돈을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부자들은 돈을 1원 단위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푼돈 관리를 잘 못하는 걸 보면, 그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부자와 보통 사람은 차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푼돈 관리뿐만이 아니다. 돈을 만드는 사람과 못 만드는 사람은 큰 돈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예를 들어 정기예금을 만들기 위한 950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서 50만원은 쓰고 900만원을 예금으로 운용하기 마련이란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디서든 50만원을 가져와서 1000만원짜리 정기예금을 만든다고 한다. 간단한 차이처럼 보여도 습관으로 몸에 배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든 일이다.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
신 부센터장은 그래서 ‘마이 라이프 북’을 만들었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적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인 도움을 주게끔 도와주는 다이어리다. 다이어리에는 로드맵을 3년, 5년 단위로 작성하는 것과 수입 및 지출 파악, 다양한 종잣돈 마련 계획 설정 등 돈을 모으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세부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1퍼센트 부자들을 만나온 신 부센터장의 노하우가 그 안에 녹아들어있다. 그가 다이어리에 적용한 부자들의 성공 노하우는 크게 다섯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입-지출?1원’ 이상이 되는 것이다. 다양한 지출이 넘쳐나는 현대에 매월 마이너스가 아닌 생활을 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는 수입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이거나 2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 해야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며, 현실적으로 당장 소득을 늘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지출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두 번째 단계는 종잣돈 마련이다. 1원이라도 남으면 그 돈을 쓰지 않는 한 반드시 종잣돈이 된다. 그리고 1원도 버리지 않고 살피는 습관이야말로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는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아바타’ 창출이다. 여기서 ‘아바타’란 나를 대신해서 수입을 올려 줄 모든 수입원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월세가 나오는 수익형 부동산, 증권 투자를 통한 금융소득을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아바타’ 수입이 현재 수입을 초과하는 단계인데, 신 부센터장은 이를 진정한 경제독립이라고 부른다. 확실한 ‘아바타’가 생겨서 그것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하는 게 가능할 때, 그때야말로 현직에서 은퇴해도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한 첫걸음은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죠. 특히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일은 스마트폰보다는 종이에 적는 걸 추천합니다. 스마트폰에도 일정 관리 및 메모 기능이 있긴 하지만 경제독립의 꿈을 이룬 부자들은 여전히 종이에 적기를 좋아해요. 손을 움직일 때 가장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부자는 돈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신 부센터장의 말을 들을수록 부자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돈에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이란 돈에 대한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부자들이 작은 습관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런 작은 습관마저도 무너지면 그보다 더 큰 것들도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낭비가 없으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방법들을 자연스레 모색하게 된다.
“샐러리맨은 수입이 월급 통장 하나지만 부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수입원을 모색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퍼리치들은 투자를 할 때면 3-3-4의 균형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슈퍼리치들의 자산을 보면 부동산이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부동산은 사실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나머지 30퍼센트를 주로 운용하는데, 그 30퍼센트 중 절세 상품에 30퍼센트, 정기예금 같은 상품에 30퍼센트, 그리고 투자 자산에 40퍼센트를 배분합니다. 안전 자산과 투자 자산을 6 대 4로 놓는 거죠.”
‘돈에는 흐름이 있는데 그 길을 막지 말라.’ 신 부센터장이 좋아하는 말이다. 단순히 정기예금으로 쓰일 수 있는 돈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채권이라든지 펀드 등 그보다 더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관련 정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속 확인하며 기회를 보는 습관을 지녀야 할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통큰’ 확신이 있다
“과거에 한 1000억 원대 슈퍼리치인 회장님은 선풍기를 하나 틀어놓고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습관이라기보다는 신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낄 때는 아껴도 쓸 때는 또 통 크게 쓰기도 해요. 사업 기회가 오면 과감한 투자를 선택하고 아무도 모르게 기부하는 것 또한 슈퍼리치들의 특징이죠.”
크게 투자해야 할 때가 오면 크게 투자하는 것, 기부해야 할 곳에 기부하는 것은 자신이 투자할 대상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확신은 오랜 시간 동안의 공부와 경험을 통해 모종의 기술처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신 부센터장은 초고액 슈퍼리치로 갈수록 투자와 관련해 두텁고 핵심적인 전문가 집단을 네트워크로 두고 있다고 말한다. 보험 하나를 봐도 전문가 2~3명의 의견이 일치했을 때에야 가입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50퍼센트는 이룬 것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만 보면 저걸 어떻게 이뤘지 싶어 먹먹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힘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보다 나은 2016년을 위한 다짐, 아직 늦지 않았다.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해 검사로 활동하며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 원장 등을 거쳐 10년 전부터는 변호사로 살고 있는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정진규(鄭鎭圭·69) 대표변호사. 탄탄대로의 그의 삶에는 분명 나름의 비법이 있을 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말하는 정 변호사에게 은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준 책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인터뷰에 앞서, 추천 도서 선정에 신중함을 잃지 않았던 그다. 한때 낭만을 가득 품고 읽었던 러시아 문학, 나폴레옹의 전기나 헬렌 켈러의 수필 등 많은 책이 그의 생각에 머물렀다. 학창시절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에 심취했던 정 변호사는 그때 읽었던 책들이 삶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오랜 고민 끝에 선정한 책은 이다. 책에 대한 기억은 50여 년 전 처음 읽었던 그때가 전부라고 했다. 반세기 만에 꺼내든 책이지만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겼기에 그 메시지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코앞에 두고 목표는 서울대 법대였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모의고사를 보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께 지금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은 어림도 없다고 하셨죠. 남다른 의지가 필요했던 그때, 우연히 을 발견했어요. 마력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정말 순식간에 읽어냈죠. 사실 그때 이후로는 한 번도 읽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과 메시지는 매사 잊지 않고 지내왔어요.”
정확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열망으로 최선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은 정 변호사의 인생관과도 흡사했다. 본래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행동에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그였다. 책은 수줍음이 많았던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그 자신감은 곧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념은 죽은 것이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신념에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더해지자 그의 인생은 더욱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나아갔다.
“잠재하고 있던 능력들이 자신감을 통해 발현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이 책을 권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죠. 좋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사는 것과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적인 자세로 사는 것인데, 기왕이면 좋은 것을 취하고 장점을 부각할 줄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삶에 만족도 주고, 행복이나 가치 추구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또, 잘 안 되더라도 그 결과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생기고, 과정이 즐겁게 남겠죠.”
마음속 그림대로 끌려온다
열망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신념의 마력. 그의 신념은 정말로 마력을 발휘했을까? 정 변호사가 열망해온 삶이 궁금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잖아요.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고, 믿는 만큼 이뤄낼 수 있어요. 명예롭고 정의로운 검사가 되고자 마음먹었었죠. 그게 목표였고, 국가와 사회, 이웃에 보탬이 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테니 그것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보자. 그렇게 검사로서는 서울 고검장, 법무연수원장까지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한 셈이죠. 그 뒤로는 총장이나 장관이 돼야 하는데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온 덕분에 만족스러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정 변호사에게도 위기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날도 강한 신념과 노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마산지방검찰청 충무지청장으로 있었는데 대우조선에서 1만여 명에 달하는 노조가 열흘 넘게 파업하는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죠. 그맘때 울산에서 현대 파업 사태가 난항을 겪어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죠. 사용자와 노조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분명히 해결되리라는 강한 신념으로 최선을 다했어요. 당시 공권력이 1만4000여 명 투입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경찰이 3000여 명밖에 없었는데도 파업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죠. 그렇게 굉장히 크다고 여겨지는 문제에도 해결의 길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어려움에 닥치면 좌절하거나 꺾이지 말고 ‘어! 왔어?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부딪혀보고 열심히 방법을 찾다 보면 분명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열망하는 삶, 다채로운 삶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그는 아직도 해보고 싶은 일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망하는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실은 검사직을 그만두고 학계로 가거나 다른 일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인연으로 변호사를 하게 됐죠. 외국 기업으로부터 특허침해소송을 받은 우리 기업을 구제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들이 참 보람 있더라고요. 기업이나 개인을 도우면 사회에 보탬이 되고 제게도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게 지금은 법인의 대표 변호사로서 주어진 일에 전념해야겠고, 후배들을 잘 격려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어요. 일로는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다채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예요. 도둑질이나 남 해치는 것 빼고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왔죠. 가령 취미 생활을 해도 대충 하는 법이 없었어요. 바둑도 아마 5~6단 정도 될 때까지 했고, 테니스도 테니스 전문 잡지에 선수로 나갈 만큼 치열하게 했죠. 요즘은 클라리넷에 관심이 있는데 일이 바빠서 시작은 못 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에게선 삶의 만족과 행복이 느껴졌다. 너그러운 미소에서는 인생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반짝이는 눈빛에는 강한 자신감이 맺혀 있었다. ‘열망, 노력,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선순환하며 행복한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듯했다.
“빌 게이츠가 매일 뭘 하는지 아세요? 그도 신념의 마력을 아는 사람 같아요. 매일 아침 주문처럼 외우는 게 ‘아브라카다브라(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나는 할 수 있어’ 이 세 가지라고 해요. 그처럼 기왕이면 하는 일에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자신감을 느끼는 것이 긍정적 영향을 주죠. 무언가를 간절히 희망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그 성공이 다시 자신감으로 축적되죠. 그렇게 쌓인 자신감이 제 삶의 활력이자 원동력 아닐까요?”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 “불효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효에 관한 정서는 동·서양이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효야말로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로 언론인 권혁승(權赫昇·83)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 발상의 원대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효 문화의 세계적 전파를 위해,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분주해지고 있는 그의 발걸음 속에 담긴 효의 가치를 추적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국의 효 사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중국의 유교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중국의 학계에서조차도 유교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었을 정도다. 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효 사상 또한 한국에서 특히나 강렬하게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한류로 대변되는 케이팝이나 김치로 대변되는 식문화처럼, 효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널리 전파될 수 있다.’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그리고 현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한 추진력을 달아 효 사상의 세계 전파를 위해 야심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어머니를 기리는 사모정 공원을 만들다
어머니를 향한 권 회장의 그리움과 감사의 표현은 어언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 출신인 그는 고향인 경포동 지변 저수지 아래 핸다리마을에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공원을 조성한다. 이름하여 ‘사모정(思母亭)’ 공원. 이곳은 권 회장이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그의 생가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인 효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안에는 정자를 비롯해 3개의 시비(詩碑)와 강릉 출신 예술인 신봉승 시인, 권순형 도예가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냥 보통의 정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만들어진 전통 문화재에 진배없는 정자를 짓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장을 지낸 김진무 씨와 2년 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제가 원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자의 제작자를 만나 제작에 들어갔죠.”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사모정 공원은 자연스럽게 효에 대한 권 회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준공식 날 이 공원을 동네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강릉에 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친문학의 본산, 백교문학회의 시작
그런데 사모정 공원을 만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그에게 문인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역 규모의 공원을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것도 좋으나, 보다 큰 범주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들이었다. 문인들에게서 나온 발상인 만큼 문학상을 활용하는 방법이 추천됐다. 그리하여 백교문학회가 설립되었다. 백교(白橋)는 ‘하얀 다리’라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핸다리’가 바로 백교의 강릉 사투리다. 권 회장은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백교문학상은 우리나라에 사친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사친(思親)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 문신 겸 시인인 박인로가 ‘사친’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어 문집 에 실은 바가 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교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글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시와 수필만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권 회장 말마따나 사친문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2010년 제정된 백교문학상은 2014년에 5회째를 맞이했다. 제5회 백교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항아리’를 쓴 정재돈 작가.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백교문학상이 강원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안으셨다. (하략)
한국의 효 사상이 세계의 효 사상이 되어야
최근 권 회장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명희 강릉 시장이 어느 잡지에 수필을 쓴 걸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길, 효 사상의 정서와 일치하는 내용이었어요.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고향이 바로 강릉 오죽헌이란 것을 설명하면서 강원도의 효 사상을 2018평창 동계올림픽 때 보다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하여 강원도를 국제적인 효의 중심 도시로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제가 해야 할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 회장은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효 사상이 날로 꺼져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 잃어가는 효심을 적극적으로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화하여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워 한국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자, 그러면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남을 것 아니겠습니까?”
권 회장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것은 효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효의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효가 전세계 도서관에 꽂힌다
권 회장은 문학계,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예상보다 험난했던, 제작 시간이 무려 3년 이상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들로부터 원고, 프로필, 사진을 받고, 원고 교정 교열을 하고 감수도 받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야말로 책의 목적답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롯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 최명희 강릉시장, 이희종 강원일보 사장 등 사회 각계지도층 저명인사 문인 63명의 작품 71편이 실렸다.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국내 국립·대학도서관 190곳과 해외 60개국 국립·대학도서관 110곳에 기증됐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할 80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4명에게도 이 책을 줄 예정이다.
어머니, 신의 다른 이름
2남 2녀의 차남인 권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죽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권 회장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20여 년 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면 그래요, 대관령만 넘어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사모정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읽어보게 되고….”
권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어머니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 ‘오 마이 갓’ 하고 죽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엄마야’ 하고 죽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신과 같은 거죠.”
어머니를 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 권 회장이 품고 있는 효 사상이 일종의 신앙이자 율법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권 회장의 말에서 사모정 공원의 시비들 중 신봉승이 쓴 시 ‘어머니’의 한 구절이 보였다.
촛불이 심지를 태우듯
어둠을 밝혀 주시고
손 시린 겨울밤은 화로가 되시네.
아름다워라
형극의 가시만 골라서 지은
거친 옷, 새 옷처럼 입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
와 를 통해 일본의 순박한 매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저자(조경자)가 20여 년의 국내 여행담을 으로 엮었다. 사진은 를 통해 찰떡궁합을 선보였던 황승희가 맡았다. 여행 병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행에 심취한 그들이 기꺼이 꺼내놓은 은밀한 여행지, 보고 또 봐도 대단한 명불허전 여행지, 앞으로 뜰 여행지 등이 알찬 정보와 근사한 사진으로 맛깔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곳, 밥과 잠, 그리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슬로 트래블’에는 울릉도와 정선, 하동, 통영, 경주, 해남, 강진, 부산, 청산도 등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여행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풍경을 내어준다는 곰배령 야생화 트레킹, ‘한국관광지 100선’에서 1위로 꼽힌 문경새재 옛길 걷기, 차를 버리고 동해 바다를 품고 걸어야 제맛인 영덕 블루로드 등 그곳에 닿기만 해도 마음이 푸릇푸릇해지는 힐링 스폿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음식잡지 기자로 일하며 ‘지방 출장 전문 기자’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저자가 현지인들의 귀띔으로 찾아낸 단골 식당 리스트와 숙소도 ‘밥과 잠’에서 아낌없이 공개했다. 애국의 달 6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낸 우리 땅의 정직한 풍경들을 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김산환 저·꿈의지도
2010년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이다. 캠핑여행의 달인으로 불리는 저자가 강원도 인제에서 해남 땅끝을 거쳐 제주도까지, 그리고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와 알래스카, 미 서부, 캐나다 로키 등 세계의 여행지에서 20여 년간 캠핑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잔잔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이선재, 이연재, 최영원, 이영건 저·한국여성문예원
수필가이며 사업가인 아버지 이영건, 어머니 최영원,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두 딸 이선재·이연재, 이렇게 한 가족이 15일 동안 미국을 횡단하면서 행복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담고 정리한 여행도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국 LA를 시작으로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자연과 도시 그리고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화득 저·자동차 여행
지리 전문가이자 여행 마니아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여행한 저자가 가족, 연인과 함께한 자동차 여행 경험들을 모아 엮어냈다. 저자는 1991년 펴낸 국내 첫 자동차여행서 에 이어 에서도 유럽 자동차 여행자들과 주고받은 최신 정보와 실속 있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소개한다.
김혜남 저·갤리온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깨달은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2001년 마흔세 살의 나이에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정신과 의사로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잠시, 침대를 박차고 나온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서인지 사는 게 재미있다”며 끊임없이 꿈꾸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
이정미 저·라온북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에서 아이와 남편만 바라보는 ‘경단녀(경력단절녀)’가 된 저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경단녀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저자는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계발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얻고, 제2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 에서 아줌마로, 경단녀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랑스런 엄마로 행복한 나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한유석 저·달
양조장의 맏딸로 태어났지만 술을 못하는 어머니는 애주가 남편과 결혼하여 술을 잘 마시는 딸(저자)을 낳았다. 책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탁주, 위스키, 칵테일, 와인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처럼, 화요, 삿포로맥주, 금정산성 막걸리와 같이 비교적 친숙한 술과 히타치노 네스트, 필스너우르켈 등의 다양한 세계맥주, 클론 5, 부르고뉴 알리고떼 등 생소한 와인까지. 그야말로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술 약속은 잡았더라도, 운전대는 잡지 말아야 한다. 차를 끌고 간 술자리에는 대리운전만큼 편리한 게 없다. 그런 대리운전을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앱 ‘酒대리’를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SNS 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사용 Tip
장점 음주 상태에서 전화로 대리운전을 부르는 경우 주소와 거리가 정확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주대리는 지정된 주소와 GPS 위치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리운전을 이용할 수 있어 더욱 정확하고 편리하다. 신규 가입자에게 1만 원 할인쿠폰이 증정된다.단점 수도권에서만 이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