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원효 이래 1300년에 걸친 한국 철학사를 강의를 하듯 현대적 언어로 쉽게 풀어낸 . 저자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역사적 인물 35명의 삶의 철학을 비롯해 성리학과 양명학, 서학과 동학 등 대립하는 철학의 주요 개념과 차이까지 설명한다. 아울러 유학, 불교, 도교, 동학, 마르크스주의 철학, 기독교 사상의 개념을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철학의 전체상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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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계획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완성하게 됐나요? 또, 두세 권으로 나누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총 800페이지가 넘는 한 권의 책에 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대학에 있지만 시민강좌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국철학이라는 주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2012년에 동대문정보화도서관에서 한국철학을 주제로 40회 강의를 진행했는데, 100명 가까운 분들이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때 메멘토 출판사 대표가 제 강의를 모두 듣고 녹음한 내용을 풀어서 책으로 펴내자고 제안해서 그것을 토대로 집필한 겁니다. 896쪽 분량이니 조금 두꺼운 편이지만, 여러 권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한 권으로 엮는 것이 단숨에 읽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서양 철학서가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가 주는 의미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한국철학을 정리하면 한마디로 ‘통합과 포용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철학사를 읽으면 현대 한국인들이 마주한 온갖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눌의 글을 읽으면 내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그로 인해 미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 부자간의 사랑이나 형제간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혹 가족 간의 다툼을 경험해 본 분이 계신다면 이 책을 읽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오래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원효와 의상, 균여와 의천, 정몽주와 정도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우리 철학사의 라이벌로 거론되는 인물들의 사유를 비교할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화두가 되고, 사고를 할 만한 두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박지원과 정약용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박지원과 정약용의 경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와 삶의 태도, 정치적 입장 등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지만 두 철학자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각 거리를 던져줍니다.
18장 조식의 이야기에 ‘100권의 책을 한 번씩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100번씩 읽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나옵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읽었던 책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려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공이 아닌 경우에는 한두 권이라 하더라도 즐겨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 , 를 가장 자주 읽었습니다. 는 일상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기 때문에 늘 곁에 둡니다. 를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또, 는 철학우화집인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양도 많고 조금은 어려울 수 있을 텐데요. 일반 독자들을 위한 독서 방법을 추천한다면?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강의하듯 풀어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양도 한국철학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오히려 짧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연대기 중심의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 때 굳이 앞에서부터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펼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저는 철학이 삶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같은 철학 전공자는 철학에 봉사해야겠지만, 결과물은 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정약용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가 말해주듯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지식인이었지만 한 번도 세상을 잊은 적이 없었던, 지식인의 책임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학자이니까요.
△저자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 , , 등을 펴냄.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청바지’를 즐겨라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건배사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친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다 보니 자영업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일에 매달려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 욕구 심리로 ‘청바지’를 부르짖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모두들 일에 매몰돼 요즈음처럼 자유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내 경우도 1975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잠시 공직, 삼성그룹 간부 임원, (주)신라밀레니엄 CEO, 일요시사 회장 등으로 일에 파묻혀 지내다 2013년부터 자유인이 되어 최근에는 매주 2회 문화 강좌 수강, 1~2회 등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2013년 8월에는 백두산 서파-북파 트레킹을 계획했는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서파, 북파 등정 및 지하삼림 트레킹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를 트레킹하기로 하고 건기에 트레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10월 24일~11월 3일 사이에 친구 3명 등 일행 13명이 H여행사를 통해 카트만두-포카라-푼힐 전망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체력, 고산병, 식사 걱정할 필요 없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운 뒤로 히말라야에서 매일 6~9시간씩 총 80km를 팔일 동안 트레킹해야 하고 4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데 따른 체력과 고산병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은 나름대로 일년 넘게 매주 1~2회 4시간 내외 등산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안 했으나 4000m 이상 고산 경험은 처음이라 고민이 돼 출발 전 병원에서 다이막스(이뇨제)와 비아그라를 처방받았다.
고산은 산소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뇌에 적정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혈류량을 늘려주는 비아그라와 이뇨제 이외 별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트레킹 과정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보리차를 물통에 채워 수시로 마신 결과 처방해 갔던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천천히 걷고 물 많이 마시는 것이 고산병의 약인 셈이다.
또한 20여kg의 짐, 식사 등도 걱정되었으나 여행사의 편의 제공으로 걱정 없이 트레킹만 하면 되었다. 식사는 매 끼니 한식이 제공돼 잘 먹고 영양 섭취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 13명을 위해 트레커 개인 짐과 식자재 등에 포터 15명이 동원되고 식사 준비에 조리팀 5명, 전문 안내인을 비롯한 가이드 3명 등 그야말로 ‘황제 트레킹’(그러나 경비는 300만원 미만)이었다. 일행 중 50대 중반 여성이 있었는데 등산 경험도 적어 항상 맨 꼴찌에 처졌으나 마지막 가이드가 따라붙어 전속 가이드 역할을 해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도 각자 등산 장구를 메고 침식을 하며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라면 전문 산악인 이외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봉(高峯) 무리, 일출 황금설경(黃金雪景)은 장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푼힐 전망대를 경유할 경우 닷새 동안 올라가고 사흘 동안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으로 포카라(40여분 탑승)를 거쳐 버스, 지프로 두 시간 이동 후 맛보기 트레킹을 한 뒤 힐레에 도착하면서 롯지 생활과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쨋날 일곱 시간 트레킹 끝에 고라파니에 다다른다. 푼힐 전망대 (3210m)를 들르기 위해서다. 이튿날 새벽 네시반 기상해 한 시간에 걸쳐 등산 후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준봉에 비치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172m), 투크체(6920m), 안나푸르나(8091m) 등 고봉들의 꼭대기 만년설을 비출 때 시시각각 눈이 반사돼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고봉들의 일출 황금설경 장관을 보러 온다. 하산할 때 보니 입장료를 받던 관리인들이 없어졌다. 새벽 등정객 외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아침 식사 후 트레킹을 시작해 때로는 3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숲속 길도 지나고 만년설이 녹은 장엄한 물소리의 계곡, 수백 미터 높이의 폭포 등을 지나 츄일레 롯지, 시누와 롯지, 데우랄리 롯지 등에서 머문 후 마침내 트레킹 닷새째 저녁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를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입구에 이르렀다. 불과 몇km 앞에 펼쳐지는 고봉들이 우리를 반기듯 그동안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속살을 드러낼 때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전기 사정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 몇 백 미터 올라가 일출이 비추는 고봉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푼힐 전망대는 일출시 멀리서 히말라야 황금 고봉을 감상하는 데 비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바로 지척에서 안나푸르나(8091m), 안나푸르나 사우스 피크(7219m),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III(7555m), 네팔 성산(聖山,등정 불허)인 마차푸차레(6997m) 등의 고봉들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분지로 돼 있어 가장 가까이 한 곳에서 여러 고봉을 감상할 수 있는 히말라야 가운데 유일한 곳이라서 많은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은 발길이 한결 가볍다. 하산이라 해도 사흘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해야 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가뿐하다.
등정할 때 하산하는 트레커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부러워 보였는데 지금 등정하는 사람들의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이 비슷해 보였다. 밤부 롯지, 지누단다 롯지 등에서 머문 뒤 사흘 하산 트레킹을 마치게 되었다. 지누단다에서 노천 온천과 저녁 식사 때의 염소 수육 맛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포카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으로 옆을 보니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뒤덮여 줄지어선 고봉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카트만두 도착 첫날과 귀국 전날 밤은 카트만두 최고급 오성 호텔로 과거 궁전이었던 소알티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둘쨋 날부터는 고산지대여서 숙소가 롯지로 열악해 2~4인실에 투숙하고 공동 변소와 샤워장을 사용해야 했다. 공동 샤워장은 일 달러 지불하면 더운 물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산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해 자칫 열을 빼앗기면 감기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준비했던 물티슈를 활용해 얼굴, 손발 등 온몸을 씻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티슈로 등도 닦아달라고 해 매일 '물티슈 사워'를 했다.
그리고 첫날은 면도를 했으나 둘쨋 날부터는 도저히 면도하기 힘들어 수염을 기르기로 하였다. 일주일 기르니 제법 멋있게 자라 주변에서 ‘만화가 이모(某) 씨 같다’면서 계속 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옷도 등산복, 평상복, 속옷 등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많이 준비했으나 초반 하루 이틀 이외 별로 갈아입지 않게 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멋내기도 필요 없었다. 준비해간 체육복은 만사형통이었다.
롯지에 도착해 간편복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잠잘 때도 보온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침낭에 드는 것이 매일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노숙자’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등산 스틱 한 개가 고장나 ‘장애 스틱’이 되어 다소 불편했는데 친구가 맥가이버칼로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줘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대나무 스틱’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행복의 근원
네팔은 1인당 국민소득이 750달러로 가난한 나라이다. 카트만두 이외 거주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트레킹하다 보면 수십 계단의 다랑이 논(주로 벼, 조 농사)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부 국민이 트레킹 가이드, 포터, 셰르파(전문 산악인 가이드) 등 관광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 트레킹 포터들이 일주일 동안 짐을 져나르고 몇 십 달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 이마저도 고루 나누기 위해 마을별로 할당하고 순번을 정해 고용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18일 에베레스트 남동루트 쿰부 얼음폭포(5800m) 눈사태로 사망 14명, 실종 3명 사고 당시 셰르파 사망 보상금이 1인당 415달러에 불과해 셰르파 300여명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네팔인들은 대체로 낙천적이다. 40여 kg의 무거운 짐을 이마에 메고 3000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겠지만 ‘나마스테(Welcome)’인사하면 웃으면서 ‘나마스테’한다. 저녁 식사 때 포터, 가이드, 조리팀 등 일행은 별도로 식사를 하는데 식사 전, 식사 중, 식사 후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
트레킹하면서 마을을 지날 때 어른,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항상 밝게 웃는 낯이고 얼굴이 평화롭다. 카트만두만 해도 거리가 무질서하게 복잡하고 매연이 심해 몇 분만 걸어가도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인데 그래도 네팔인들은 잘도 참고 견디며 산다.
그동안 보도 등에 따르면 가난한 부탄, 네팔 같은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 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 아닐까?
노자(老子)는 소우주(小宇宙)와 대우주(大宇宙)를 설파하였다. 대우주는 우주의 생성, 존재, 법칙 등 진리로 인간이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하는 것이고 소우주는 인간 각자 거울 속에 비친 인식으로 소우주는 각자의 지식,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네팔인들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 수준 및 문명 정도가 낮은 데다 전기 및 통신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뿐더러 개별 수준 차이도 별로 없어 그 정도 생활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든 그네들의 참삶의 지혜를 맛보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 감사하며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매일 매일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을 기약해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당신이 쓸모없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always is tomorrow that the one who died yesterday wanted to have so desperately.)’라는 경구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변종경(65) 일요시사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1973)한 뒤 잠시 공직을 거쳐 미국 유학, UCLA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1985) 후 1987년 삼성물산(주) 조사부장, 경영기획부장,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 담당 임원(이사,상무,전무), 2004년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기획 분야에 주로 종사해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삼부그룹 계열 ㈜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에 취임해 경영 혁신을 통해 2011년 지식경제부, 중앙일보 주관 '한국을 빛낸 창조 경영인' 대상(혁신 경영 부문)을 수상하였고 2012년 일요시사 회장으로서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경영자로서 경륜을 쌓기도 하였으며 2013년 자유인이 된 뒤 등산, 사진 등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그동안 못 다한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최근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퇴직한 A씨(56)는 아내와 함께 종종 백화점이나 마트를 찾는다.
소일거리 삼아 주1∼2회 시간을 넉넉히 두고 쇼핑을 하는 편이다. 쇼핑에 많은 지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은 꼭 사고, 이왕 사는 것은 오래 쓸 수 있도록 좋은 것을 사자는 쪽이다. 옷은 눈썰미 있는 아내가 주도하지만 '나이먹은 티' 난다며 젊은 취향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다.
유통업계는 50ㆍ60대 중장년층이 '큰 손 고객'을 부상하자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백화점, 편의점 등 오프라인 업체들은 물론 홈쇼핑, 오픈마켓 등 온라인 업체들까지 상품구성과 판매방식에서 50∼60대를 겨냥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는 경기 불황으로 젊은층의 소비는 줄어드는 데 반해 경제력을 갖춘 50대 이상은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50∼60대 고객들이 젊은 층이 즐겨입는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판단에 따라 중장년 여성을 겨냥한 상품군 '어덜트 컨템포러리'를 신설했다. 또 장년층을 위한 쿠폰북을 별도로 만들 계획이다.
현대백화점은 5월 가정의 달에 패션·스포츠·건강식품 등을 망라한 '액티브 시니어 페어'를 열 예정이다.
신세계백화점도 시니어 건강댄스, 시니어 테라피요가, 가락장구와 경기민요 등 50∼60대를 겨냥한 문화센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편의점의 경우 50∼60대가 부쩍 많이 찾으면서 이들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씨유(CU)는 좌식문화에 익숙한 성향을 반영해 좌식형 테이블을 늘리는 등 '생활 속 쉼터'를 표방하고 있다. 또 노년층을 판매원으로 고용하는 '시니어스태프제'를 통해 50∼60대 눈높이에 맞는 고객서비스를 제공한다.
세븐일레븐은 복고풍 도시락 등 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제품과 건강기능식품 등 50∼60대 맞춤형 상품을 출시했다.
알뜰폰은 가격이 싸고 조작법이 간단할 뿐 아니라 화면글자도 커서 50대 여성이 많이 찾는다고 편의점 측은 전했다.
GS25는 치아에 부담없는 무른 상품, 성인용기저귀, 영양식 등의 제품을 판매 중이다.
홈쇼핑의 경우도 중장년층 제품 비중을 높이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염색약, 보청기, 건강보조식품 등의 상품방송을 늘렸으며, 보험상품의 경우 60대 이상 고객들이 직접 가입할 수 있는 건강보험 상품을 확대했다. '장수흙침대'는 렌탈 방식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NS홈쇼핑은 50∼60대가 주로 시청하는 평일 아침 오전 6시에 건강정보와 요리법을 소개하는 '건강한 밥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GS샵은 50∼60대를 겨냥한 인터넷 쇼핑몰 '오아후' 운영 중이다. '오십 대부터 시작하는 아름답고 후회 없는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쇼핑몰'의 줄임말이다.
인터넷 이용에 익숙지 않은 장년층을 위해 TV홈쇼핑처럼 고객이 원하면 전화로 상품의 상담, 주문 및 결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 사이트의 글자와 이미지 크기를 키웠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은 50∼60대를 위해 건강식품브랜드 전문관을 통해 고려은단, 천호식품 등 인기 브랜드 상품을 싸게 판매하고 있고, G마켓은 중장년층을 위해 식품담당자가 산지를 직접 방문해 선별하고 있다.
이은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잇굿 예능 보유자 이은관 옹이 12일 오전 서울 황학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1917년 강원도 이천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6년 황해도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에게 서도소리와 배뱅잇굿을 배우면서 소리를 시작했다.
배뱅잇굿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대표하는 놀이다. 배우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역을 도맡아 장구 반주에 창을 부르는 연극적인 굿놀이다.
1957년 양주남 감독의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하면서 배뱅잇굿 1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19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잇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고인은 한국국악협회 이사, 이은관민속예술학원 원장을 지냈다. 국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90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1995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2002년 방일영 국악상을 받았다. 빈소는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10호실. 발인은 14일 오전 9시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은 친환경농업, 풀무학교, 생협운동 등 농업과 관련해 특별한 역사를 만들어 온 지역으로 잘 알려진 만큼 귀농하고 싶어도 집이나 땅 구하기가 어려워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다. 금창영 씨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이곳으로 귀농했다.
◇농부가 된 역사학도 = 건강에 적신호가 올 때까지 연구에 매진하던 역사학도. 귀농 전 그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것은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일을 그만두면서 더 이상 학업만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서울보다는 시골에 해답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시골은 역사를 탐구하는 그의 일이나, 책을 만드는 아내의 일에도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됐다. 홍동과의 인연은 먼저 귀농해 살고 있는 선배를 통해 이어졌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서울에 두고 먼저 내려와 빈집과 농지를 찾았다. 6개월 후 가까스로 가족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이로써 본격적인 그의 시골살이가 시작됐다.
◇세 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농산물 직거래 =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귀농 교육을 접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학습과 준비과정을 거쳐 귀농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도시에서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준비가 실패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그러나 금씨는 이러한 ‘귀농의 정석’과는 거리가 있는 길을 택했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일을 전혀 모르는 채 시작한 생활의 무게는 버거웠다. 농사를 짓고도 소득을 내지 못해 아내와의 말다툼이 잦아졌다. 그날도 아내와 다투고 집밖을 서성이던 날이었다. 절박함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정기적으로 상자에 담아 보낼 테니 팔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세 명의 회원이 탄생함으로써 농산물 판매를 통한 수입 창출이 가능하게 됐고 본격적인‘시민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이 시작됐다.
◇상자 속에 담긴 철학 = 시민지원농업이란 농업인은 소비자 회원들에게 정직하게 생산한 농산물을 공급하고 소비자 회원
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농업의 한 형태를 일컫는다. 금씨가 꿈꾸는 농업은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간의‘관계’가 살아있는 농업이다.
그는 생산자가 소비자의 가족 구성, 건강 등까지 소비자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자가 가족을 대하듯 소비자의 안부를 묻고 좋아하는 농산물이나 건강 상태에 맞는 먹을거리를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다.
때문에 금씨가 생산한 농산물을 먹고 건강이 좋아졌다든지, 어렸을 적 먹었던 맛과 흡사하다든지 하는 회원들의 인사를 듣는 게 그의 가장 큰 보람이자 기쁨이다. 키우던 배추의 속이 차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을 때, 어머니가 아프시니 꼭 그 배추를 보내달라고 하는 소비자의 전화를 받고 나서 느꼈던 벅차오르는 행복을 잊을 수 없다는 그이다.
금씨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일명 ‘나눔상자’에는 그가 생산한 친환경 제철 농산물 6~7가지와 이웃집 할머니가 생산한 농산물 3~4가지가 담긴다. 그가 생산하지 못하는 농산물과 가공품은 이웃 귀농인들이나 홍성유기농영농조합, 풀무학교생협 등에서 사서 보낸다. 나눔상자 하나당 가격은 3만원, 소비자는 한달을 기준으로 원하는 만큼 횟수를 정해 이용할 수 있다.
현재 회원은 30명 정도인데, 입소문으로 회원이 60명까지 증가한 적이 있었다. 회원 수는 너무 많아도 관리가 어렵고,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작업량을 초과하기 때문에 30명 정도가 적당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나눔상자를 계속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전체 소득의 60%를 차지할 정도의 안정적인 소득원으로 정착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시 소비자 회원들의 재미와 만족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고집스런 농사 방식 = 금씨는 친환경농업을 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토종종자를 사용하고 논에는 우렁이나 오리, 쌀겨를 넣지 않으며 밭은 비닐 멀칭을 하지 않고 모두 손수 풀을 뽑는다. 보통 하는 친환경농업보다 훨씬 엄격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또 논에 들어갈 때에도 장화를 신지 않고 흙의 감촉을 즐기며, 작물을 돌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논밭에 들어가면 작물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호미 들고 한 고랑씩 김을 매어 나갈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하니, 이쯤 되면 농사일이 그에게 천
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는 농사 욕심이 아주 많다. 지금도 80가지 이상의 작물을 심고 많을 때는 130가지 이상의 작물을 가꾸지만, 아직까지 키워보지 않은 작물들에 욕심을 낸다. 하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이 규모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행복한 귀농 = 금씨가 가족이 함께 살아갈 보금자리로 홍동을 선택해 선뜻 내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도 한 몫 작용했다. 홍동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논생물, 비폭력대화 등에 대한 학습모임 뿐만 아니라 목공예, 장구 등 문화예술 강좌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어 금씨의 부인 장현숙 씨도 이중 여러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연 속에서 맘껏 뛰노는 생활을 즐거워하고, 무엇보다 친구가 많다고 좋아한다. 면 단위 어린이집이 현재 60~70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리가 부족해 줄을 서있는 정도라고 하니 홍동은 역시 특별한 시골이다.
금씨는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농사를 확장하지 않는 것을 또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농사일을 하다보면 하나라도 더 심어 더 거두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정직한 친환경농업과 규모화가 얼마나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에 적정수준을 유지하려 한다. 대신 이웃과 함께 먹을거리와 여유, 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공유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여럿이 함께 꾸는 꿈 = 금씨가 주도해 홍동에서 처음 연 ‘파머스마켓’은 여럿이 함께 가고자 하는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일례이다. 그동안 파머스마켓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생산자들을 설득해 20여 명을 모았고, 전단지를 돌려 행사를 알렸다.
주변에선 행사장이 휑할 것을 염려했지만 150여명의 소비자들이 행사장을 찾아 참여한 생산자들이 즐겁게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귀농 첫 해 논 1000평, 밭 1000평으로 시작한 그는 이제 논 2100평, 밭 2300평, 하우스 150평을 일구게 됐다. 그는 ‘준비 없이 귀농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부 모두 잘 몰랐기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덕분에 계산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고 이웃 주민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귀농 방식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과 두려움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높은 연매출을 올리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조언을 들어봄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