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커덩’ 캐리어 끄는 소리와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어딘가 바삐 움직이는 승무원의 발걸음. 그리고 손에 쥔 비행기 표까지. 공항이란 장소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 가슴을 한껏 웅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그 설렘을 잊고 지낸 지 어느덧 2년째다. 여행이 멈춘 세상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휴가철이 되면 하늘 위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그런 이들이 주목할 만한 곳이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서울 강서구 하늘길 177. 내비게이션에 적힌 주소에 도착하자 드넓은 평지 아래 자리 잡은 거대한 원통형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가가 살펴보니 빗살무늬 구조물이 건물을 둘러싸고 반복되는 패턴을 그려낸다. 그 모습이 비행기의 동력 장치인 ‘터빈’을 연상케 한다.
비행기의 심장을 닮은 역동적인 외관에서부터 항공의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이곳은 지난해 7월 개관한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연면적 1만8593㎡,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에 이르는 규모로, 그 이름처럼 하늘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른다. 새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글라이더를 띄우던 시대의 역사부터 우리나라를 오늘날 항공 강국으로 만든 각종 산업과 에어택시 가 날아다닐 공항의 미래상까지, 항공 분야의 면면을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시설로 소개한다. ‘하늘길’이라는 도로명 주소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상공에서 만난 민족의 얼
박물관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외관의 구조물이 내부에서는 또 다른 각도로 존재감을 뽐낸다. 안으로 입장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둥그런 천장이 빗살무늬로 퍼지는 채광과 만나 제트 엔진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다.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라는 듯, 천장 주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거대한 항공기가 관람객을 반긴다.
전시는 국내외 비행의 기원과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1층 ‘항공역사관’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 하늘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해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했던 옛 조상의 염원을 각종 유물과 문헌으로 소개한다.
다양한 전시물 가운데 라이트 형제보다 300여 년 앞서 우리나라에 이미 ‘하늘을 나는 수레’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기록물은 가히 인상 깊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 정평구가 발명한 유인 비행체 ‘비거’(飛車)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작에 따르면,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고립되었을 때 정평구가 오늘날의 글라이더와 유사한 비행체를 날려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비거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지만, 우리 항공 역사에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 비행은 하늘을 난다는 일차원적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찾는 ‘구국’의 수단이자 전쟁 중 ‘호국’을 위한 무기였고, 첨단 기술을 활용한 각종 산업으로 ‘부국’을 이루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한인비행학교가 있다.
1920년 7월 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비행학교는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곳이자 오늘날 공군의 뿌리가 된 역사적인 활동이다. 국립항공박물관이 코로나19라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개관 날짜를 지난해 7월 5일로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당시 훈련기로 사용했던 2인승 복엽기 ‘스탠더드 J-1’은 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물 중 하나다. 스탠더드 항공사가 개발한 이 훈련기는 우리나라가 소유한 최초의 비행기로, 수직 날개에 태극 문양이 진하게 새겨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국인을 태우고 우리나라 상공을 최초로 비행했던 ‘금강호’도 박물관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전시물이다. 조선 최초 비행사 안창남 선생이 몰았던 복엽기로, 당시 서울 여의도와 창덕궁 일대를 자유롭게 날던 금강호의 모습은 조국을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긍지를 일깨웠다. 박물관에 설치된 금강호는 복원 모형이지만, 실물 크기를 그대로 재현해 그 압도적 규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사들인 최초의 공군 전투기 ‘T-6 건국기’부터 영화 ‘빨간 마후라’에 등장한 한국전쟁의 영웅 ‘F-86 세이버’, 우리 자체 기술로 만든 초음속고등훈련기 ‘T-50 골든이글’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공기를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하늘 위로 꿈을 펼치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볼까. 2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설치된 ‘에어워크’는 나선형 경사로로 관람객을 부드럽게 안내하며, 걸어 올라가면서도 실물 비행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이동 과정에서 생겨나는 시간의 공백까지 촘촘히 메운다. 보딩 브리지(Boarding Bridge)를 통해 비행기에 오르는 느낌과 비슷해 여행 전의 설렘도 선사한다.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관람객은 2층에 다다르는 순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짐 찾는 곳부터 입국 심사대, 세관 신고장 등 공항의 각종 시설이 재현돼 있다. 항공 운송 및 항공기 제작, 정비 등 오늘날 항공산업 전반을 다루는 ‘항공산업관’이다. 이곳에서는 수화물 이동 과정, 비행기 이착륙 원리 등 공항과 기내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2층을 둘러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더 먼 미래, 인류는 무엇을 타고 이동할까? 비행기 그 이상의 것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3층 ‘항공생활관’에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자율비행 드론과 자율비행 개인항공기(OPPAV), 수직 이착륙과 고속비행이 가능한 스마트 무인기 ‘TR-100’ 등 현재 개발 단계에 있거나 완료된 최첨단 교통수단을 전시하고, 미래 인류의 생활상을 예견한다. 이로써 항공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최첨단 항공 시설로 생생한 비행 경험을 제공하는 체험형 교육·문화 공간이다. 관람객은 기내 방송으로만 듣던 안전교육을 전·현직 승무원에게 배워보고, 가상현실(VR)과 360도 회전 장비를 활용한 기기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부조종석에 탑승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5곳의 체험관 중 단연 인기인 것은 ‘조종·관제 체험’이다. 인천공항의 관제탑과 보잉 747기 조종실을 재현한 시뮬레이터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관장하며 관제사와 조종사가 되어보는 시간이다. ‘체험’일지언정 생생함은 실제와 견줄 만하다. 조종실 부기장석에서 이륙을 알리는 기장의 사인과 귓가를 멍멍하게 만드는 엔진 소리,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하늘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앉아 있는 곳이 지상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게 된다.
체험관을 비롯해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항공다빈치클럽’ 등 박물관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눈에 띈다. 이는 어린이에게 항공인의 꿈을 키워주고자 한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다.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은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은 앞으로 항공 기술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아이들이 이곳을 통해 꿈을 꾸고, 이루어가고, 먼 훗날 항공인이 되어 돌아와 꿈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매시 30분마다 조종사 또는 승무원 출신 도슨트가 전시 해설을 진행한다. 더욱 흥미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시간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다.
국립항공박물관
관람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휴무
입장료 무료(체험 비용 별도)
가는 길 지하철 5호선, 9호선, 공항철도를 이용해 김포공항역 하차. 김포공항 국내선 1층 국립항공박물관 안내표지를 따라 제2주차장 방면 게이트로 나와서 직진, 박물관까지 약 400m. 또는 국내선 1층 4번 게이트에서 공항순환버스 이용.
※블랙이글스 탑승 체험을 제외한 전 체험은 홈페이지(aviation.or.kr)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30년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인 남편, 함께 보내는 시간이 영 답답한 아내. 깊어지는 황혼의 동상이몽,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이를 회복하는 데 그리 대단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배우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공유하고, 부족한 부분을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신혼의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다. 아래 사례가 자신의 이야기 같아 ‘뜨끔’했다면, 부부 사이를 개선하는 생활 속 크고 작은 행동 가이드를 실천해보자. 시작이 반이다!
CASE 1
은퇴 증후군 VS 갱년기
김은퇴 35년 일한 대기업에서 퇴직했다.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고생 끝에 얻은 명예와 남부럽지 않은 연봉, 화려한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당신 뒷바라지하느라 내 인생이 끝났다”며 언성을 높이고 잔소리를 한다. 잘나가던 시절이 꿈만 같고 매일이 우울하다.
이홍조 어느 날부터 몸이 자주 홧홧하더니 관절통, 근육통, 불면증까지 전에 없던 증상이 밤마다 괴롭힌다. 한평생 반복된 가사노동에 체력은 점점 떨어져가는데, 남편은 은퇴하고도 하루 종일 누워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의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억울함과 분함, 회한이 사무친다. 밤만 되면 20~30년 전 서운했던 일까지 하나하나 생각나 일일이 따지고 싶은 기분까지 든다.
행복 솔루션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활동을 하던 시절 직장은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의 개념이었다. 성공의 상징이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였다. 또 오늘날과 달리 ‘워라밸’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당시에는 가족에 소홀할지언정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풍족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가정 평화를 위한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30~35년간 직장에 헌신하다 은퇴한 이들은 가정과 직장 모두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존감 회복이다. 먼저 아내는 앞선 상황을 이해하고 남편의 장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재취업을 독촉하는 대신 승진한 날, 큰 프로젝트를 성사한 순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식 대학 보낸 때 등 생애 성취 경험을 되짚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며 의욕을 북돋아준다. 회상의 시간을 가지다 보면 아내 또한 그동안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남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또 남편 역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 회사의 책임자가 아닌 배우자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해보고, 가정에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편 남편은 아내가 ‘갱년기’라는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가시 돋친 말과 행동이 진심이 아닌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외면하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준다. “왜 또 그래”, “당신 그거 병이야. 병원 가” 등의 반응은 전쟁의 총성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현하는 게 어색하다면 갱년기 증상에 좋은 음식, 영양제 등을 챙겨주며 ‘당신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마음을 슬쩍 내비쳐본다. 나이 들수록 배우자의 건강을 챙기는 것만큼 소중한 애정 표현은 없다.
CASE 2
여가 시간의 동상이몽
강바다 회사 다닐 때부터 쉬는 날마다 낚시를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은퇴 후에는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이 찾아올 때마다 종종 바다를 찾는다. 낚싯대를 잡고 머리를 식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가 혼자 즐기는 취미 생활에 불평을 토로한다. 운동은 취미가 없는데, 자꾸만 함께할 것을 강요해 잦은 언쟁이 벌어진다.
최운동 은퇴 전 해외 주재원이었던 남편은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았다. 그러다 간혹 시간이 나면 집에서 누워 있거나 홀랑 낚시를 하러 바다로 떠나버렸다. 용기 내 함께 운동할 것을 제안하면 “일 때문에 바빠 그렇다. 퇴직하면 같이 놀러 다니자”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은퇴하니 이제는 “취미가 다르지 않느냐”는 핑계를 대며 함께하는 시간을 피한다.
행복 솔루션 20~30년 함께 산 부부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공통의 취미를 갖기 어렵다. 은퇴 전부터 각자의 여가 시간을 보낸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이가 더 소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부부끼리 ‘따로 또 같이’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먼저 지난 일주일간 부부가 함께한 시간, 활동, 대화 내용 등을 적어본다. 그 다음 이를 반성의 지표로 삼아 ‘주 3회 저녁 식사 후 산책하기’, ‘주 1회 같이 문화생활 하기’ 등 실천하기 쉬운 부부 생활 강령을 만들어본다. 요일별로 정해도 좋다. 이를테면 월·수·금은 ‘부부 동반의 날’, 화·목·토는 ‘혼자만의 날’을 보내기로 약속한다. 다소 숙제처럼 느껴져도 긴 시간 쌓인 마음의 벽을 서서히 허물고 함께하는 시간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다음 서로의 취미에 발을 들인다. 반드시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데 방점을 둔다. 이를테면 남편이 낚시를 할 때 옆에서 자수를 하거나, 아내가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상대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존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본인은 배우자에 대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고 싶다면, 서로의 관심사를 탐색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이때 배우자의 관심사를 다 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데이터가 연애 시절에 멈춰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상대방을 알아가던 풋풋한 그때처럼 “당신이 요즘 재미있어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 “당신, 예전에 ○○하는 것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맞아?” 등 호기심 어린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CASE 3
다시 불붙은 경제권 전쟁
박지출 은퇴 전 가정의 경제권은 아내가 책임졌다. 월급은 타는 족족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30년 넘도록 용돈을 받아 썼다.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진 결정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과자 한 봉지를 사더라도 아내 눈치를 보느라 답답할 때가 많았다. 노년기만큼은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은퇴 후에는 소일거리를 찾아 직접 번 돈으로 골프용품을 사고 소소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아내가 간섭하려 든다.
오경제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결혼 생활 내내 꼬박꼬박 가계부를 정리하며 재산을 불리는 데 힘썼다. 덕분에 노후 자금에 보탬이 될 건물을 사고, 투자로도 수익을 얻었다. 그래도 자식 결혼 전까지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남편이 은퇴 후 소일거리를 시작한 뒤부터 벌이를 공개하지 않고 고가의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남편의 태도가 당황스럽다.
행복 솔루션 경제권은 신혼, 황혼을 막론하고 부부 사이 다툼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결혼 생활을 갓 시작한 신혼부부는 경제권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쟁이 오고 간다면, 황혼 부부의 갈등은 그동안 참아온 불만이 특정 계기로 폭발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가정에서 성 역할이 비교적 뚜렷한 베이비붐 세대 부부는 주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경제권을 관리해, 돈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 쪽으로 힘이 편중되며 갈등이 빚어진다. 이에 많은 남편이 은퇴를 기점으로 재정 독립을 선언하고, 아내는 달라진 남편의 태도를 비협조적으로 느낀다.
비슷한 상황으로 갈등을 겪는 부부가 있다면 두 사람의 합의를 거쳐 경제권을 교체해보는 것이 좋다. 남편은 가계부 작성, 대금 납부 등 재정 관리를 오롯이 책임지고, 아내는 정해진 용돈으로 한 달간 생활하는 것이다. 역할을 바꾸면 각자가 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자의 고충을 깨닫고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매달 ‘가계 대화의 날’을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 대화의 날에는 가계 자산과 부채, 현금 흐름 등을 공유하고 재테크 계획을 논의한다. 모래시계를 활용하면 발언권을 보다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 날짜는 매월 말이나 초가 적당하다. 지난 한 달간의 재무 상황을 살펴보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되 배우자의 잘못을 질책하지 않는다.
도움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일리아드’ 배우 황석정
모두가 아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기원전 13세기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 간의 전쟁 이야기를 다룬다. 그 방대한 텍스트 속에는 이름을 다 읊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신과 병사가 등장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며, 전투를 벌인다. 반면 원작을 기반으로 한 연극 ‘일리아드’에는 오직 단 한 명의 배우가 무대에 선다. 그녀는 100분간 전장을 이끄는 영웅이 되었다가, 이들을 태우는 말(馬)로, 초월적인 신으로 변신하며 그 치열한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두려움이란 무기를 쥐고, 무대라는 전장 속에 홀로 뛰어든 배우 황석정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학로 연극은 오랜만이다. 소감이 어떤가?
저는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서 젊은 날에 고생했던 기억이 대학로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사실 이곳에 오는 걸 꺼려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 사랑하면 오히려 싫어지는 거. 돌아오니까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함께 작품 하던 배우, 스태프도 없고, 심지어 제가 연극을 했다는 걸 모르는 분들도 있고요. 이제 내가 서 있을 곳은 없구나 싶었어요. 고향이 재개발된 기분? 근데 저는 두려우면 오히려 도전하는 사람이거든요. 두려움을 무기 삼아 용기를 냈죠.
작품에 어떤 매력을 느껴 참여하게 되었나?
개인적으로 고전을 굉장히 좋아해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내면에 자양분이 되어주잖아요. ‘일리아드’도 신화 속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시대에 맞게 잘 풀어낸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또 제가 맡은 역이 남자예요. ‘일리아드’를 쓴 시인 호메로스 입장을 대변하죠. 여러 가지로 좋은 도전이 될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어요. 이 작품은 힘이 닿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수록 호메로스처럼 더 깊이 있고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내레이터’ 역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
흔히 아는 ‘내레이터’처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읊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일리아드’에는 전쟁을 치르는 이들 간의 대립 관계가 있잖아요. 인물 각각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려 하고, 가슴 아파하는지 표현하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극의 중심을 잃지 않고 전쟁의 잔혹성을 비판하죠. 큰 이야기를 아우르는 만큼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1인극인 만큼 부담도 클 텐데, 어려움은 없나?
안 어려울 수가 없죠. 1인극은 제가 기둥이 돼야 해요. 감정을 내보내고, 쓸어 담고, 통제하는 과정을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죠. 혼자서 집을 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것 같달까요? 게다가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3자로서 타인의 감정을 대변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죽어가는 사람들, 고통에 젖은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그래서 공연하는 날은 새벽부터 사제의 마음처럼 경건해져요. 신화에 나오는 그림처럼 돌덩이를 메고 산을 오르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기꺼이 올라야죠.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해 적의 진영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인 당사자지만, 프리아모스를 보는 순간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라 시체를 돌려주며 눈물을 흘려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분노를 놔버리고 함께 울어요. 우리도 살면서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리르고 후회하는 순간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 장면이 좋더라고요.
작품을 통해 관객이 느꼈으면 하는 바는?
지금이야말로 ‘일리아드’를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이 세상도 전쟁통과 다를 바 없잖아요. 패권 다툼부터 환경 문제까지 무기만 안 들었지 무언가와 맞서 계속 싸우고 있죠. 그 과정에서 분명 희생되는 존재도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하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요. ‘일리아드’는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줘요. 평소 고전을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도 흥미롭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뮤지컬 '일리아드'
일정 9월 5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2관
연출 김달중
출연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
베이비부머에게 가장 어울리는 여행지는 어디일까. 한 온라인 숙박 예약사이트가 지난 15일 여행 플랫폼 이용자(한국인 1003명 포함 총 2만8042명)의 의향조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세대별 추천 여행지를 집계했다. 이 중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시기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에게 어울리는 여행지로 오스트리아 비엔나가 선정됐다.
조사 결과 베이비붐 세대는 선호하는 여행지로 33%가 편안한 도시를 선택했다. 해당 사이트 사용자들이 ‘산책하기 좋은 도시’로 가장 많이 추천한 여행지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다.
비엔나는 음악과 건축의 도시다. 왕궁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지는 지역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말러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주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비엔나 곳곳에는 이들이 살았던 집과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이 활동했던 무대나 결혼식, 장례식이 열렸던 성당도 직접 가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 600년 역사가 깃든 고풍스러운 궁전 정원을 산책하거나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시니어에게 매력적인 여행지다.
알베르티나 박물관
알베르티나 박물관은 원래 1805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으로 건축된 궁전이다. 왕궁과 미술관으로 활용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연못’(The Water Lily Pond), 마르크 샤갈의 ‘연’(The Kite), 파블로 피카소의 ‘녹색 모자를 쓴 여인’(Woman in a green hat)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작품부터 근세 미술, 100만 점의 그래픽 아트까지, 시기와 장르를 초월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국립오페라하우스 뒤편에 있는 알베르티나는 멜로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6)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알베르티나를 거닐다 보면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오페라하우스
비엔나의 국립오페라하우스는 파리 오페라하우스, 밀라노 오페라하우스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로 꼽힌다. 유럽 최대 규모로 객석 2200석, 객석보다 세 배 넓은 무대, 관람객이 악보를 볼 수 있게 한 천장 객석 등을 보유하고 있다.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이자 짤츠부르크 음악제의 중심인 빈 필하모닉이 이 극장 소속 오케스트라다. 클래식 애호가인 시니어라면 비엔나에서 빠지지 않고 들려야 하는 이유다.
오페라 시즌인 9월부터 다음해 6월 사이에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같은 인기 공연이 여러 차례 열린다. 7~8월은 공연 대신 가이드 투어만 진행하므로 오페라의 진수를 즐기고 싶은 시니어라면 이 시기를 피하는 것이 좋다.
쇤부른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장인 쇤부른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자 유산이다. 공간은 50만 평으로 방이 1411개나 있다. 쇤부른 궁전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자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왕궁에는 ‘파노라마반’이라고 부르는 꼬마기차가 다닌다. 방문객은 이 기차를 타고 넓고 화려한 궁전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다. 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만든 글로리에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인 쇤부른 동물원, 야자수 식물원과 마차 박물관 등 9개 정류장을 돌면 쇤부른 궁전을 힘들이지 않고 관람할 수 있다.
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매년 6월마다 쇤부른 궁전 정원에서 밤의 음악제를 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험이 사라져 다시 여행이 가능해진다면 6월을 노려 이른 여름 휴가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책이 있을 만큼 떡볶이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궁중의 격식 있는 명절요리에서 서민의 음식이 되기까지 이 변화의 뼈대에는 서민의 삶과 문화가 함께했다. 대한민국과 더불어 산전수전을 겪으며 변화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서 사랑을 받는 K떡볶이. 떡볶이의 역사와 함께한 시니어들의 추억을 따라 K떡볶이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너 떡볶이 또 주문했어? 요즘 떡볶이는 채소도 하나 없고, 왜 이렇게 비싸기만 해?”
60대 A 씨는 딸이 시킨 떡볶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육수 맛을 풍부하게 돕는 채소도 없고, 식감을 살리는 각종 사리도 몇천 원씩 돈을 내고 추가해야 한다. 자극적인 매운맛에 영양가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30대 딸에 따르면 요즘 사람들이 이런 떡볶이를 많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먹는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떡볶이는 원래 빨갛지 않았다
60대 A 씨는 옛날과 많이 다른 ‘요즘 떡볶이’를 보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A 씨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떡볶이는 신당동에서 먹었던 고추장 떡볶이다. 가스버너에 얹힌 프라이팬, 동그랗게 올라오는 육수 거품, 다양한 야채들, 빨간 양념.
그런데 떡볶이의 과거를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가면, A 씨 기억과도 차이가 크게 나는 떡볶이를 만날 수 있다. 원래 떡볶이는 붉은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 기록은 ‘시의전서’로 남아 있는데, 궁중에서 흰떡과 등심살,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떡볶이에는 평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비싼 식자재들이 사용됐으며,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당시에는 떡볶이라는 이름 대신 떡찜, 떡잡채, 떡전골 등으로 불렀다.
즉 과거 떡볶이는 가래떡을 기본으로 갖가지 비싼 재료를 넣고 간장으로 볶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궁중 떡볶이’라고 부른다. 궁중 떡볶이는 잡채를 만드는 방식과도 비슷해 잡채에서 떡볶이가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고추장 떡볶이의 살아있는 역사, 마복림 떡볶이
명확한 유래를 알기는 어려우나 매콤한 고추장 떡볶이는 6·25 휴전 직후 1953년 마복림 할머니 손에서 탄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쟁 피난살이에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마복림 할머니는 집안의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당시 개업한 한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을 보던 할머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중국 요리에 손을 대지 못했다. 대신 가장 만만해 보이는 개업식 떡을 먹다가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떡을 빠뜨린다.
춘장이 묻은 떡은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마복림 할머니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을 이용해 '고추장 떡볶이'를 개발했다. 이날의 실수가 ‘국민 간식’ 고추장 떡볶이를 만들어 낸 셈이다.
처음에는 연탄불에다 큼직한 떡을 고추장에 범벅을 해서 한 개씩 팔았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라면을 가져와 끓여 먹는 걸 보고 라면도 넣었다. 그리고 가스가 들어오면서 지금과 같이 떡과 채소, 각종 사리를 넣고 뽀글뽀글 끓이는 신당동 즉석 떡볶이로 변신했다.
그 시절 청춘들의 무대, 신당동 떡볶이 골목
마복림 할머니 가게를 선두로 신당동에 떡볶이집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떡볶이 골목이 조성됐다. 중구청 자료집에 따르면 이 시기 신당동 골목에는 떡볶이집이 40여 개 있었다. 학생들은 허름한 골목 안 누추한 가게에 빼곡히 들어차 떡볶이를 즐겼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유명해진 것은 MBC ‘임국희의 여성 살롱’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부터다. 1970년대 중반 떡볶이집 한 곳이 뮤직박스를 설치하고 DJ를 고용해 인기를 끌면서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는 DJ 문화까지 상륙한다. 당시 DJ는 어린 소녀들에게 아이돌과 같은 우상이었고, 심지어 라디오에 소개되기도 했다.
더불어 정부에서는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가루 장려 운동'을 펼친다. 이때부터 밀가루를 사용한 떡볶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를 형성했다.
연예인 못지않은 DJ가 음악을 틀어주던 문화공간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던 떡볶이. 젊은 학생들의 호응을 크게 받으며 국민 간식으로 거듭났다. 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떡볶이는 돌이키고픈 청춘의 한 페이지다.
기상청이 오는 25일까지 체감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역대급 폭염’을 예상한 가운데, 지자체들이 양산 대여, 생수 나눔, 쿨링 의자 등 지역주민이 안전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대책 마련에 한창이다.
무더위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온열질환자가 이미 지난해보다 1.3배 많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5월 20일부터 이달 18일 오후 4시까지 온열질환자가 436명 발생했고 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온열질환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339명)보다 약 1.3배가량 많다. 지난해에는 이 기간 동안 사망자도 없었다.
행안부는 온열질환 중 11.1%는 집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피해 대상은 주로 고령층이라고 설명했다. 고령자는 땀샘 감소로 땀 배출량이 적어지고, 체온 조절기능이 낮아지며 온열질환을 인지하는 능력도 약하다.
노약자를 포함한 지역 주민의 열사병 같은 온열질환을 막기 위해 각 지자체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서울시는 한여름 뜨겁게 달아오른 도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 시청역, 발산역, 증미역, 효창공원앞역, 종로3가역, 동묘앞역, 장한평역 등 7곳에 '쿨링로드'를 설치해 가동하고 있다. 쿨링로드는 도로 중앙선에 작은 사각형 모양으로 설치된 시설물로 지하철역에서 유출돼 버려지는 지하수를 활용해 도로 면에 물을 분사하는 시스템이다. 한여름 지면 온도를 7~9도, 미세먼지도 12㎍/㎥ 줄여주는 효과를 낸다.
노원구는 관내 호텔 50객실을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야간안전숙소’로 운영한다. 호텔 숙소에 이용자가 몰려 정원을 초과하면 구청 2층 대강당에 쉼터를 추가로 마련할 계획이다. 또 산책로와 강가 등 야외 무더위쉼터에는 ‘힐링냉장고’를 배치하고 주민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공급한다.
서초구는 관내 버스정류장 60곳에 ‘쿨링의자’를 설치했다. 의자 위에 열전도율이 낮은 폴리카보네이트 소재 덮개를 깔아 기존 의자보다 5∼6도 온도를 낮춘다. 또 폭염에 취약한 홀몸노인과 한부모가정 등 1000명에게 냉방용품으로 구성한 ‘쿨키트’를 제공한다. 쿨키트에는 냉찜질팩과 쿨토시, 소금사탕, 모기퇴치제 등이 들어 있다.
영등포구는 홀몸 어르신과 저소득 취약계층 900여 가구에 휴대용 목걸이 선풍기를 나눠줬다. 용산구는 ‘뉴월드호텔’ 객실 12개를 빌려 열대야 안전쉼터로 운영한다.
경기도는 그늘막과 그늘나무 같은 생활밀착형 폭염 저감 시설을 지난해 6192곳에서 7523곳으로 확대한다.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실내 무더위쉼터 이용이 제한돼 냉방시설 이용이 힘든 폭염 취약계층 노인 5만여 명에게 쿨매트와 쿨조끼 같은 냉방 물품을 지원할 계획이다.
2년 전부터 양산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던 대구시는 올해도 ‘양심 양산 대여사업’에 나섰다. 시민이 양산을 빌려 간 뒤 자진해서 반납하는 식이다. 또 자원봉사자와 함께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 주요 지점에서 냉동 차량을 배치하고 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 시원한 수돗물을 나눠준다. 쪽방촌과 홀몸노인, 노인복지시설 등 폭염에 취약한 계층을 방문해 얼음물, 쌀, 휴지, 선풍기 등의 물품을 전달하며, 폭염 취약계층 보호에도 나설 계획이다.
부산시도 ‘양산 쓰기 캠페인’을 전개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유지를 위해 비말 확산 우려가 있는 바닥분수와 미세한 물 입자를 분사하는 쿨링포그 운영을 최소화한다.
폭염 대책에 첨단 장비도 등장했다. 여수시는 드론 5대를 농어촌지역에 띄워 열사병 등이 의심되는 지역 주민을 선제적으로 찾아내고 있다. 경북도와 부산시도 농어업에 종사하는 고령자나 해안가 낚시꾼,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드론을 활용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21일 구윤철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폭염 대응 상황점검 관계차관회의’를 개최하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폭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날 구윤철 국무조정실장은 “그동안 각 부처가 준비한 분야별 폭염 피해 예방 대책들이 실제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하며,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관계부처‧지자체‧유관기관‧단체 등이 유기적으로 협조해 분야별 대책의 현장 이행력과 실천력을 제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건희 컬렉션’이 21일부터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다. 그런데 이를 보고자 하는 관람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현재 관람할 수 있는 날짜 예약이 모두 마감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달 치 예약, 국립현대미술관 2주 치 예약이 매진됐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1일 동시에 개막한다. 고대 유물부터 현대 회화까지 이 전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일부가 일반 관람객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서울 이촌동 2층 서화실에서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9월 26일까지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소격동 서울관 1층에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을 내년 3월 13일까지 연다. 일정은 추후 변동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9792건, 2만 1600여 점의 미술품이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중 명품 45건, 77점 유물을 먼저 공개한다. 이번 전시작에는 국보 12건, 보물 16건이 포함돼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작품은 국보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보물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다.
국보 216호인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북악산에서 바라본 안개 낀 인왕산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풍 산수화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직접 그린 진경산수화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보물 1393호인 추성부도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다. 중국의 송시 ‘추성부’ 전문을 쓰고 갈필로 가을 산을 그렸다. 단원이 사망하기 전해에 그린 작품이다. 갈필은 먹물 사용을 억제해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 기법이다.
청동기 시대 ‘붉은 간토기’와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로 권력을 상징했던 국보 제255호 ‘청동방울’도 공개한다. 조선시대 당대 최고 기술과 디자인을 보여주는 보물 1390호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과 국보 256호 ‘백자 청화 대나무무늬 각병’도 전시된다.
이 밖에도 고려불화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 15세기 우리말과 훈민정음 표기법을 보여주는 한글 전적들도 포함돼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유물을 볼 수 있다. 토기⋅청동기, 금동불, 전적, 사경, 청자, 목가구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건희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은 소격동 서울관에서 이번에 기증받은 1488점 중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인의 주요작품 58점을 먼저 선보인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작은 크게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 세 가지 주제로 나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바꾸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수용과 변화 주제로 묶였다. 백남순 ‘낙원’, 이상범 ‘무릉도원’이 대표적이다. 백남순은 1920년대 파리 유학을 떠났던 여성화가다. 이중섭의 스승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낙원은 해방 이전 제작된 백남순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귀작이다.
개성의 발현 주제에는 광복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기에 새로운 미술을 추구한 작가들의 작품을 포함했다. 1950년대 작품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이다.
정착과 모색 주제에는 전후 복구 시기 고유한 조형 세계를 구축한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사전예약제로만 운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모두 무료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1회에 30명씩 1시간 관람할 수 있다. 매일 8회차가 운영되고 수⋅토요일은 야간에도 개장해 총 11회차가 운영된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 희망일 14일 전부터 예약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회차당 20명씩 30분 간격으로 매일 15회차 진행된다. 야간개장하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21회 운영한다. 관람 희망일 30일 전부터 예약할 수 있다.
“나라도 못 고치는 병을 병원에서 고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사람들이 마음 놓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나쁜 병들을 모두 없애주면 좋겠습니다.”
안암동 거주민 한종섭 여사가 환자로 반평생 인연을 맺어온 고려대의료원에 의학발전기금으로 5억65만 원을 기부했다.
올해 89세 할머니인 한종섭 여사는 6·25전쟁 중인 1951년 1·4 후퇴 당시 가족을 잃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당시 포화와 추위를 힘겹게 견뎌냈다. 특히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남한 생활에서 특유의 성실함과 사업 수완을 발휘해 실 공장을 운영하며 자녀 6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이후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살면서 지역 주민으로서 반평생 고대의료원과 인연을 맺었다.
한 여사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안암동 건물을 처분해 기부금을 냈다.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진 기부여서 더욱 빛을 발했다.
한 여사는 “예전부터 결심한 기부를 이제야 할 수 있어서 아주 후련하다"며 "돈이 많아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려대병원이 좋아서 기부했다. 예전에 전염병이 돌 때도 고려대병원이 앞장서서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 못 먹고 못 살 때는 병보다 배고픈 게 더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세상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마음 놓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고려대병원이 나쁜 병들을 모두 없애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정진택 고려대학교 총장은 “한종섭 여사님의 의미있는 기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평생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신 모습, 베풀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모습에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한다”고 전했다.
김영훈 의료원장은 “한종섭 여사님이 보여준 고려대의료원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고려대의료원이 한 여사님 바람처럼 전염병 없는 세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고전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보물창고입니다.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축적된 지혜는 면면히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전에 담긴 지혜는 삶의 고갱이가 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의 혼밥’을 짓는 신아연 작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동양 고전을 재료로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집에 글쎄 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기발랄한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에게 던진 대사입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젊은 층에서 딴에는 재치로 하는 말, 단순 유행어라고 하기엔 그 철없음에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일상의 자잘한 사건 사고를 장난삼아 6.25 난리를 끌어들여 말할까요. 6.25를 직접 겪은 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거겠지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면 그만인 거지요.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괴리, 허탈, 상처, 분노를 더해 세대 간의 정서적 공감력 단절에서 오는 잔인한 슬픔이 가슴에 멍울질지도 모릅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애곡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피로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만물을 낳는 흙조차 모성을 잃어버린다고. 무고한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간 말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그러니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겼다 해도 승리를 미화하지 않고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것은 흉사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리는 자리, 즉 오른쪽에 최고 지휘관이 서야 한다고.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며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서고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이를 애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치러야 한다.
-노자 ‘도덕경’ 31장
올해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6.25전쟁은 분단의 고통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조롱하는 듯한 유행어를 듣는 것은 언짢고 화가 납니다.
‘전쟁이 나쁘지, 농담이 나쁜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해학과 촌철의 달인 장자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장자’ 칙양편에는 인간사를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비유한 글이 나옵니다.
달팽이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나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나라다.
왼쪽 뿔은 촉나라고, 오른쪽 뿔은 만나라다.
이 두 나라는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틈만 나면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이 워낙 치열해서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가 수만 구나 되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
15일이나 걸려야 돌아왔다.
촉만지쟁, 와각지쟁으로 불리는 장자가 만든 우화입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처절하기 그지없지만 기껏해야 달팽이 뿔 위에서의 일이니 그야말로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늘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달팽이의 두 뿔은 한 몸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두 뿔 중 하나를 잃게 되면 달팽이는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맞게 되겠지요.
결국 전쟁은 승자가 없습니다. 노자 말씀대로 오른쪽을 높인들, 상례로 치른들 모두가 희생자요, 부질없는 일인 거지요. 병법가인 손자조차 이익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해도 감정이나 기분이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지혜의 대가들은 입을 모아 전쟁은 가급적 치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으며,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 신정근 ‘공자와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