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곳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그곳이 떠오른다. 바로 국립서울현충원이다.
6월을 앞둔 어느 날,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위로하듯 이팝나무꽃이 흩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슴이 아려지는 그곳에서 김수삼(57) 현충원장을 만났다.
김수삼 원장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행시 40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국방부 군수기획과장, 직무감찰담당관, 기획총괄담당관, 국제군수협력과장, 기획관리관 등을 역임했다.
국립서울현충원도 국방부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지난 1월, 제23대 국립서울현충원장으로 취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별도의 취임식을 치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TV에서 그를 볼 기회가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후와 5월 10일 취임식 때 현충원을 찾아 참배했기 때문. 김 원장은 “TV에서 저를 봤다며 반가워하는 지인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현충원장에 취임해 책임감을 느끼고 걱정도 많았는데요. 무사히 치를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어요.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르거나 당선될 때 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을 보고 정말로 중요한 곳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국민이나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의 중요성을 느끼고 자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국을 위한 선열들의 장소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현충탑에 새겨진 글귀
서울 동작구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은 휴전 2년 후인 1955년 설립된 국군묘지가그 뿌리다. 6·25전쟁에서 전사·순직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5년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군인이 아닌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 안장도 가능해졌다. 이어 1996년 국립현충원,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김수삼 원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은 조국의 독립과 수호, 발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면해 계시는 민족의 성역이다. 국난을 극복해온 민족의 얼과 호국 의지, 나라 사랑 정신이 가득 서려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총면적은 약 44만 평이며, 네 분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총 18만 7000여 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모시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국립대전현충원은 1985년 건립됐고, 국립연천현충원은 2025년 건립을 목표로 준공 중이다. 김 원장은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연천현충원은 모두 같은 위상을 가진 국립묘지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서울, 대전, 연천현충원에 안장되는 대상자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속이고, 대전과 연천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속이다.
김수삼 원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의미 있는 곳의 원장으로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의 소감은 어떨까.
“올해 1월 국립서울현충원장에 취임해 현충탑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께 참배를 드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반기가 다 지나갔네요. 처음 참배를 드릴 때 현충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한편,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느꼈습니다. 제가 당시 다짐한 것이 있어요. 장례와 추모 행사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와 엄중한 코로나19 상황 등에 맞춰 보다 체계적이고 품격 높은 안장 및 참배·추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공자 및 유가족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기 위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수삼 원장은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설 명절 때 유가족을 대신해 직원이 참배드리고 이를 사진 찍어 전송해주는 ‘설맞이 참배 대행 서비스’를 실시했다. 또한 유가족의 편의를 위해 참배용 사다리 및 참배용 원목 의자를 비치했고,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던 셔틀버스 운행도 시작했다고.
김 원장은 취임 후 가장 뜻깊었던 일로 지난 4월의 ‘제2충혼당 개관’을 꼽았다. 제1충혼당은 영현 2만 468위를 모신 후 2020년 7월 만장됐다. 제2충혼당은 2018년 착공돼 올해 4월 13일 완공됐다. 제2충혼당에는 3만 2952위를 추가로 안장할 수 있다.
“제2충혼당 건립을 통해 유공자분들을 최고의 시설로 모실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나라 사랑 및 호국 정신을 후대에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제2충혼당 개관식에서 배우 신현준 씨가 사회를 봐주셨고, 가수 진미령 씨가 추모시를 낭독해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이곳 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유공자의 후손입니다. 행사 며칠 전에 갑자기 부탁드렸는데도 기꺼이 다른 일정을 조정하고 참여해주셨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유해 발굴 및 확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한 사실은 확인됐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이들의 위패가 10만 3000여 위나 있다. 김수삼 원장은 “현재도 이분들의 유해를 찾기 위한 유해 발굴 사업이 꾸준히 진행 중이지만 발굴된 유해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호국용사는 극소수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또한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에도 134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구한말 의병 활동 및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분들 가운데 유해를 찾지 못하고 후손이 없는 선열들의 위패다.
그러나 안장되어 있고 유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유가족이 꾸준히 현충원을 찾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그 원인은 거주 지역이 멀어서 일 수도 있고, 가족이 달라지거나 건강 상태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에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때문에 기혼자가 적어 후손이 없거나, 남은 유가족 대부분이 형제나 조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유가족이나 친지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점점 쓸쓸한 묘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열의 희생에 감사하며 ‘내가 후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쓸쓸한 묘소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현충원, 국민 속으로
일반 국민에게 ‘현충원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나?’, ‘실제로 현충원에 가본 적이 있나?’라고 물어보면, 현충원 근처에 사는 서울시민이나 견학을 가본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현충원을 찾아가 봤다고 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보통 TV를 통해 6월 6일 현충일 행사를 보면서 국립서울현충원을 접한 경우가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현충원은 정부 관계자나 유공자의 후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원래는 국립묘지였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김수삼 원장 역시 ‘일반인이 현충원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현충원이 무겁고 어려운 이미지가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열린 호국공원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특히 44만 평의 국립서울현충원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 원장은 “봄에는 아름다운 수양벚꽃, 여름에는 이팝나무 가로수길, 가을에는 현충원 둘레를 잇는 은행나무길이 아름답다”면서 “이와 더불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수삼 원장의 말대로 국립서울현충원은 아름답고 뜻깊은 곳이다. 현충원을 걷다 보면 느껴지는 감정도 많을 것.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무 환경이 좋아서 오래 일하고 싶다”는 김 원장은 현충원의 명소로 현충천과 현충지를 추천했다.
“현충원에 천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 많지 않은데요. 현충천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사시사철 다양한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고기들도 많고요. 현충지는 조그마한 연못으로 가만히 앉아서 사색하거나 소위 ‘멍때리기’ 좋은 곳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찾아와 휴식을 취하시기도 하는데요. 심지어 심신을 치유하신 분도 많아 후손들이 감사한 마음에 기증한 의자도 있어요. 저도 점심 식사 후 산책할 때 현충천과 현충지는 거의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김수삼 원장은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은 온라인을 통해 ‘기일 : 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독립유공자가 서거한 달에 맞춰 업적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독립유공자 하면 어떤 분들이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이분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이 계십니다. 기일 프로젝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신 독립유공자들의 업적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기획했습니다. 한분 한분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5월 21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경내에서 호국 문예 백일장과 그림 그리기 대회를 개최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2년간은 비대면으로 개최됐다. 김 원장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면서 많은 이들의 현충원 방문을 뿌듯해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제한됐던 행사를 앞으로 적극적으로 개최하고, 시민들의 참여의 장을 넓히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수삼 원장은 재임 기간의 목표에 대해 “국민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열린 호국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언제나 편안히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호국정신을 배우며 후손들에게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수삼 원장에게 현충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목표를 물었다. 그는 “곧 정년을 맞이하기 때문에 퇴직 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먼저 퇴직하신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돈, 건강, 취미, 친구들이 있어야 노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근로소득은 정년까지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퇴직 이후에는 금융소득을 통해 번다는 목표로 퇴직연금, 리츠, 부동산 펀드 등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사이버 대학이 많아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공부를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며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한국어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졸업하면 외국인 학습자를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교원자격증이 부여됩니다.”
언덕을 오르면 무슨 일이 기다릴까. 종로구의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목이 중심을 잡고 있다.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다. 여름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할 만큼 초록이 울창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린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살던 집을 찾기 위한 단서로 붉은 벽돌집과 바로 이 큰 나무가 있는 은행나무골 1번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역사를 언덕 위의 은행나무는 지금껏 지키고 있었다.
거의 100년 전 개인의 공간이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복원되었다. 딜쿠샤는 그 시절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저택으로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살던 집이다.
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이 우리의 오묘한 역사의 흔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깃든 딜쿠샤는 그 시절의 디테일한 분위기와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되어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탄광 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한국을 찾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메리를 만난다. 영국 출신 배우 메리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양도성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의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1923년에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만에 완성된 딜쿠샤(Dilkusha). 이국적인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한다. 부부는 인도에서 딜쿠샤라는 궁전을 보고 그들의 스위트홈이 완성되면 딜쿠샤라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정착해 살면서 창 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는 딜쿠샤에 살게 된 부부는 고통스럽고 혼란했던 시기의 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금광사업과 특파원으로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테일러 부부는 점차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도 가택연금 상태가 되어 결국은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이 땅을 떠나게 된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테일러는 줄곧 한국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한국을 사랑한 남편의 뜻에 따라 테일러의 유해를 가지고 그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딜쿠샤에도 들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이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위험 속에서도 한국을 위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앨버트 테일러,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에서 잠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테일러와 메리 부부의 딜쿠샤가 잊혀 가던 중 아들 브루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소유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지만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릴 만큼 방치되었던 집, 한국 전쟁 후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딜쿠샤의 공간을 쪼개서 살았다고 한다. 2006년 66년 만에 딜쿠샤를 찾은 부르스는 이것을 보고 그동안 어려운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어 감사해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특히 메리는 다재다능해서 글과 그림이 뛰어나 남겨진 많은 그림과 기록이 전시되었고 그녀의 기록이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테일러 씨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는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기증했다. 2018년부터 시작한 복원 작업 끝에 역사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2021 3월에 개관에 이르렀다.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
1층과 2층의 전시장은 그들이 살던 1920년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파티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1층은 거실 내부를 상세히 재현했다. 부부의 결혼과 입국, 한국생활을 보여준다. 메리의 그림이나 호박 목걸이 이야기도 전시되었다. 테일러가 메리에게 청혼할 때 준 호박 목걸이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살면서 한국에서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호박 목걸이'다. 그리고 금광 사진이나 금강산 여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들, 벽난로…. 모두 그들의 숨결이 깃든 추억들이다.
2층에는 테일러 부부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는 메리가 한국의 주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가 인상적이었고 테일러의 언론활동 모습도 남겨져 있다. 한국의 병풍이나 고려청자, 램프나 테이블 등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집안이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낸 널찍한 거실의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당시에는 언덕 꼭대기 집이어서 멀리 지나가는 기차가 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로막혀있다. 다만 옆의 창문을 통해서 은행나무의 풍경은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딜쿠샤는 종로구 사직터널 오른쪽 축댓길로 오르면 언덕 위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이제는 복원되어 겉모습이 살짝 새것 느낌이 들긴 하지만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테일러와 메리 부부 가족이 살던 100년 전의 테일러가(家)이다.
◇ 가는 길: 서울의 서대문역이나 독립문역에서 나와,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京橋莊)을 거쳐 돈의 박물관을 지나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월암근린공원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가옥을 지나면 저 앞으로 400년이 넘는 수령의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집터를 선택한 메리의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발걸음을 하다 보면 “DILKUSHA 1923” 명판이 새겨진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맞아준다.
◇ 딜쿠샤 방문은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 예약 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검색 → 딜쿠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10226112026774583
- 문의 : 딜쿠샤 전시관(070-4126-8853)
중장년층이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한다. ‘광고’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읽는 전시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告白)’이다.
대중문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중에서도 광고는 그 시대의 소비문화, 유행 등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우리나라는 광고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30초짜리 광고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문화를 주도했고, 세월이 지나도 광고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광고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는 전시다. ‘고백’은 우리말로 ‘아룀’으로 우리나라에서 ‘광고’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이전에 사용된 용어다.
이 전시의 특별한 점은 ‘실감형 영상전시’라는 점이다. 전시는 아나몰픽 기법(특정 지점에서 착시효과로 입체감을 극대화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벽면과 미디어 큐브 기둥에 영상을 투사해 광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현재 1부와 2부 전시가 진행 중인데, 각각 상영 시간이 7분으로 소개돼 있다. 실감형 영상 전시이기 때문에 전시는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과거를 추억하면서 전시를 관람하게 되기 때문에 전시 시간이 짧다고 느껴질 정도다.
먼저 전시 1부는 ‘광고합니다’로 광고에 담긴 시대별 소비문화의 변화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 근대와 신문물 시대는 개항기 때로 광고를 보면 신문물의 도입과 함께 의약품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 금계랍, 국산 소화제 활명수 광고가 많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당시 양복, 화장품, 조미료 등 소위 근대문물의 광고는 식민지의 소비 욕망을 자극했다. 1920~30년대에 외국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화려한 패션과 스타일 등을 광고를 통해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광복과 재건 시대는 1950~60년대를 말한다. 광복과 6⸱25전쟁을 경험한 후 일상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광고가 주류를 이룬다. 최초의 국산 치약 광고가 나왔으며, 라면은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본격적으로 광고가 대중에게 친숙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1970년대에는 아파트의 대중적 보급으로 주거환경이 변화하면서 가전제품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는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강조했다. 1970년대 말, 국산 자동차 광고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이 카(My Car)’ 문구로 샐러리맨의 욕망을 부추겼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 광고는 개인·개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소비와 유행에 민감한 신세대의 문화가 반영됐다. 패션과 화장품, 삐삐와 휴대폰과 같은 품목들은 단순히 제품이 아닌 문화를 소비한다는 전략으로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어 1990년 후반 신세대의 관심은 인터넷이 만든 사이버공간으로 옮겨졌고, 초기 인터넷 광고와 이동 통신 광고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특히 1990년대 광고가 현재의 중장년층에게 익숙해서 반가움을 산다. 타키온, 걸리버 등 추억의 휴대폰 광고들이 등장한다. “같이 들을까?”로 유명한 SKY 광고도 나와 눈길을 끈다.
2부 전시 제목은 ‘그래, 이 맛이야!’로 시기별 식품 광고를 통해 대중의 음식 소비문화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미료 광고, 광복과 6·25 전쟁 이후에는 밀가루 광고가 많이 등장했다. 밀가루가 영양가가 높고 여러 용도로 활용 가능한 재료임을 알리는 데 광고의 초점이 맞춰졌다. 설탕과 분유는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1960년대는 밀가루 식품 광고가 본격화된다.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식품이 우리 식생활의 주류가 됐기 때문. 특히 국수와 국수 기계 광고 등에 혼분식장려 문구가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 초 출시된 라면은 당시 혁명적인 식품으로 주목받았고, 카레라이스가 쌀의 대용식으로 떠올랐다.
1970~80년대는 경제성장과 함께 식료품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조미료⸱제과⸱통조림과 같은 품목들이 가정의 식탁을 차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CM송이 크게 유행했다. 오란씨, 롯데 껌, 브라보콘 CF 등이 이에 해당한다. CM송이 유행하면서 광고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광고 문화는 더욱 발전했다.
이어 서울올림픽(1988)과 해외여행완전자유화(1989)를 거치며 외국문화와 외식이 유행했다. 점차 선진국의 식생활과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추구함에 따라, 패스트푸드⸱베이커리⸱패밀리레스토랑 등의 외식문화가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 식품기업의 해외 진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의 음식도 세계 속에 확산되고 있다.
한편, 3부와 4부는 올 하반기 공개된다. 3부 '참 곱기도 하구나'는 패션과 화장품 광고, 4부 '기적인가 기술인가'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은 전자제품 광고에 주목한다.
전시가 열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광화문 역 인근에 위치한다. 광화문 일대로 나들이를 갈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들러 추억 여행에 빠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노인과 노인문화의 이해를 돕는 영화제가 있다. 바로 올해 14회째를 맞는 서울국제노인영화제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는 노인문화를 넘어 삶과 죽음, 관계와 세대에 대해 질문하며 노년과 인생을 아우르는 신선한 통찰을 제시한다.
2022 서울국제노인영화제는 오는 19일부터 23일까지 5일간 종로3가역에 위치한 CGV피카디리1958에서 진행된다. 장편 7작품, 단편 77작품, 총 84편이 상영될 예정이며, 23일 시상 및 폐막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는 다양한 세대가 영화를 매개로 노년의 삶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글로벌 세대 공감 영화축제다. 노인 감독에게 영화 제작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청년 감독에게 노년 세대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고민을 담을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 영화제의 슬로건은 '오히려 좋아'이다. 예상치 못한 힘든 날들이 계속되었던 요즘, 어르신의 지혜와 힘을 빌려 청년들에게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지침이 되고자 한다.
개막식은 19일 오후 3시부터 열린다. 오프닝 공연부터 영화제 소개, 내빈과 홍보대사 소개, 트레일러· EPK(상영작 소개 및 하이라이트 영상) 상영, 본선 진출작 시상으로 진행된다.
개막 선포 후 올해의 개막작 콘스탄자 페르난데즈 감독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하찮음’이 상영될 예정이다. 연약해진 노년기의 신체를 화두로 ‘노쇠함’이라는 통념이 가져오는 오해와 차별의 시선을 담은 영화이다.
이번 영화제에는 한국·국제단편경쟁부문 해외 3055편, 한국 732편 총 3787편이 출품 됐다. 이 가운데 예심을 거쳐 본선에 진출한 한국단편경쟁 27편, 해외단편경쟁 30편을 비롯해 총 84작품이 상영된다. 특히 올해는 가족과 인간관계, 부양 문제 등 사회적 이슈, 죽음에 대한 생각, 사회적 갈등과 규정에 대한 고민 등을 소재로 노인과 청년 감독들의 고뇌가 담긴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영화제에는 다양한 배우와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GV, Guest Visit)에 참여한다.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기획 의도, 내재된 의미 등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직접 묻고 답할 수 있는 시간이다.
특히 청년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내는 프로그램 ‘기억 아카이빙 프로젝트-인생교환’에서는 작품 속 주인공인 어르신이 직접 GV에 함께할 예정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1960~70년대 독일로 떠난 광부, 간호사로 일했던 어르신과 그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영화제 온라인 사전 예매는 18일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 전화 또는 네이버 예약을 통해 예매할 수 있으며 무료 관람이다. 사전 예매 기간 이후에는 영화제 동안 잔여석에 한해 당일 현장에서 예매 접수가 이뤄진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좌석 간 거리 두기를 적용하며, 상영관 내 취식은 불가하다. 또한 단편경쟁부문 영화는 영화제 전용 온라인 플랫폼 ‘온피프엔’으로도 관람할 수 있다.
영화제 홍보대사는 배우 김영선이 맡았다. 그는 영화 ‘추격자’,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드라마 ‘응답하라1994’, ‘스물다섯 스물하나’ 등을 통해 활약을 펼쳤다.
김영선은 “어르신들을 뵈면서 배우는 것이 항상 많았다. 저 또한 연기자이다 보니까 그분들의 인생이 늘 궁금했다”라면서 “우리 젊은 청년들도 많이 보시고 어른들의 그 살아오신 지혜들을 많이 배우는 그런 기간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영화제가 막을 내리기까지 ‘시스프렌드’라는 이름으로 27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활동을 펼친다. ‘시스프렌드’는 SISFF(Seoul International Senior Film Festival)와 Friend의 합성어다. 청년과 노인으로 이루어져 홍보, 부대 행사 운영, 상영관 관리 등을 통해 2022 서울국제노인영화제를 함께 만들어 간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 집행위원장 희유스님은 “멈추었던 일상의 흐름이 시작되면서 우리 또한, 다시 나아가는 과정에 자리한 것 같다. 5일간 진행되는 올해 서울국제노인영화제를 통해 힘든 시기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긍정의 힘과 지혜를 얻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자생의료재단은 이른 무더위에 복지 사각지대 독거 어르신들이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혹서기 물품을 지원한다고 16일 밝혔다.
자생의료재단은 전국 12개 자생한방병원(강남·대전·목동·부천·분당·안산·울산·일산·잠실·창원·청주·해운대)과 협력해 5월 한 달간 전국 각 지역의 독거 어르신에게 여름 이불세트 총 360채를 기부한다. 혹서기 위험에 노출된 50가구를 선정해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청소 봉사도 실시한다.
지난달 28일 청주자생한방병원은 청주자생봉사단과 함께 여름 이불세트 30채와 독거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반려식물 30개를 청주시독거노인통합지원센터에 기탁했다. 지난 3일에는 자생한방병원도 강남구청을 찾아 혹서기 물품 지원에 동참했다. 특히 지역 내 독거 어르신 뿐만 아니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한국에 입국한 고려인 가정 1가구에 대한 지원도 이뤄졌다.
이어 지난 10일 일산자생한방병원과 일산자생봉사단이 지역 독거 어르신 30가구에 이부자리를 전달하고 주거 환경 개선 활동에 나섰다. 부천·잠실·해운대자생한방병원도 지난 12일 부천희망재단과 송파실벗뜨락 구립노인복지관, 대한적십자사 부산광역지시회에 이불세트 30채씩을 각각 지원했다. 자생의료재단은 이달 안에 대전·목동·분당·안산·울산·창원자생한방병원과 함께 전국적으로 이불세트 및 기타 혹서기 물품 기부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박병오 자생의료재단 이사장은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이번 기부 활동이 때 이른 무더위로 고생하는 독거 어르신들의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자생의료재단은 불볕 더위가 예상되는 올해 여름철 복지 사각지대를 적극 발굴해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의료기관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편 자생의료재단은 혹서기 물품 지원과 더불어 의료,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척추·관절 질환 치료 전문성과 노하우를 살려 복지 취약계층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한방의료방소에 나서는 등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5월 전국 아파트 입주 가구는 2만 5000여 건으로 올해 상반기 중 가장 많은 물량을 기록할 전망이다. 이에 전월세 시장 안정화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부동산 정보업체 직방에 따르면 5월 전국 아파트 입주 물량은 2만 5782가구다. 4월 대비 79% 증가한 수치다. 올해 상반기 중 가장 많은 물량이며, 6월(1만 6325가구) 이후 감소할 전망이다.
수도권은 전월 대비 3배 이상 많은 1만5335가구가 입주하며, 지방은 전월보다 8% 늘어난 1만447가구가 입주를 시작한다. 시도별로는 ▲인천 7659세대 ▲경기 7473세대 ▲부산 2838세대 ▲대구 1704세대 순으로, 특히 인천·경기의 입주 물량이 가장 많다.
다만 직방은 우크라이와 러시아 전쟁으로 국제 원자재 가격이 올라 시장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새 아파트 수요자라면 당분간 입주·분양 시장을 잘 살펴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원자재 가격의 불안정함은 신축 아파트 공사 지연이나 새 아파트 분양가 상승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5월 입주를 앞둔 전국 단지는 총 31개로 수도권 14개 단지와 지방 17개 단지가 입주를 앞두고 있다.
봄볕이 이리도 눈부신데 가만히 있으라니, 봄바람 속으로 마음 놓고 산책하고픈데 조심하라니. 지금껏 갑갑한 일상도 잘 받아들였다. 봄 타령으로 호들갑 떨 때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에서 자신을 잠깐씩이라도 끄집어내 주고 싶다. 자동차 핸들을 돌려 경기도 화성 쪽으로 달리면 잔잔한 서해 바다에 천혜의 갯벌과 물때가 있고, 어스름 저녁 무렵엔 해넘이가 예쁘다. 시원한 궁평항과 뻥 뚫린 방조제를 달리고 평화를 되찾은 매향리와 잊지 말아야 할 제암리까지 돌아보는 하루. 멀리 갈 필요 없다.언제라도 부담 없이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 촉촉한 서해로 달려보자.
화성의 궁평항은 갈매기가 떼 지어 나는 풍경이 우선 떠오른다. 무엇보다 서해 노을의 명소다. 방파제 끄트머리쯤의 정자에서 즐기는 궁평항의 은은한 일몰은 화성 8경에 들 정도로 일품이다. 이젠 계절별 데이트 코스로 수많은 인파가 찾아드는 핫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바다 위로 걸을 수 있도록 설치한 데크에선 낚싯대를 던지기만 하면 해안 낚시터 피싱 피어가 가능하다. 물때만 잘 맞추어 가면 바다낚시의 짜릿한 입질과 손맛을 경험할 수 있다. 단, 요즘 코로나 방역지침이 불확실하니 피싱 피어 구조물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고 갈 일이다. 부근에 100년 세월의 해송으로 이루어진 군락지도 장관이다.
궁평항의 봄바람과 서해 일몰
산책이나 낚시를 즐기다가 출출해지면 주차장 옆으로 즐비한 푸드트럭이 있다. 20여 개의 빽빽한 푸드트럭에서는 새우튀김, 핫도그, 커피나 음료 등이 구비되어 군것질의 즐거움을 준다. 인근의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고, 생선이나 짭조름한 젓갈 등을 사올 만하다. 특히 전망대 카페에서 바다 쪽으로 쭈욱 나 있는 길은 최근 방영된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웅이와 연수의 이별 여행 촬영지로 알려졌다는 사실.
옛날 고려 시대 궁(宮)에서 관리하던 땅을 ‘궁평’이나 ‘궁들’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평항(宮坪港)은 일찍이 지형이나 기후 조건을 검증받은 셈이다. 평일 한낮에 찾아가면 천천히 산책하는 이들과 카메라를 든 몇몇 사진가들이 오갈 뿐, 그다지 붐비지 않아 비대면의 거리 유지가 가능한 궁평항이다.
궁평리에서 이어지는 화성방조제는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길이다. 가끔씩 차들이 지나가고, 우측의 자전거 도로엔 라이딩족들이 휙휙 달려나간다. 건물 하나 없고 도로조차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다. 장기간 이어지는 집콕의 갑갑함을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며 해소할 만하다. 쭉 뻗은 직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저 길 끄트머리에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게 보인다. 바야흐로 봄이다. 방파제 위로 부모님을 태운 듯한 휠체어를 밀며 걷는 풍경도 있다. 상쾌한 바닷바람 속 두 모자의 모습이 봄볕처럼 따뜻하다.
이곳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와 우정읍 매향리 사이의 바다를 막아 건립한 방조제다. 달리다 보면 화성방조제 중간 지점쯤에 선착장이 있다. 낚싯줄을 던지며 유유히 바다를 응시하는 강태공들의 여유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선착장엔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위로 무수한 갈매기들이 난다. 길 건너편에 보이는 화옹호(華饔湖)는 화성시에서 방조제를 막아 화옹 간척지구에 조성한 인공호다. 지금은 중요한 환경생태지역이다. 길 양옆으로 바다와 민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수로엔 겨우내 얼었던 물 위로 철새들이 떼 지어 있고 갈대가 잔잔히 흔들린다. 그 옆으로는 캠핑카와 텐트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화성 매향리 마을의 변신
궁평리에서 화성방조제를 따라 달리면 한쪽 끝에 이름도 예쁜 매향리(梅香里)가 나온다. 지금은 자연과 예술의 마당 매향리로 불리지만, 한때는 폭격 소리와 포탄 연기로 지역주민들이 고통받았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 미군의 사격장이 들어섰다. 매화 향기 날리고 갯벌이 아름답던 매향리 마을은 자그마치 50년이 넘도록 주민들이 일상의 불편함은 물론이고 생업에도 지장을 받으며 살아온 곳이다.
결국 2005년 사격장이 폐쇄되고, 그 자리는 포탄과 총알 흔적들이 모인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전쟁의 도구로 여러 아티스트들이 표현한 역사관 마당은 매향리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고 기억하는 문화예술 공간이 되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미군이 해상 표적으로 삼고 사격을 했던 부근의 농섬(籠島)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다. 매향리 역사관 주변으로는 화성드림파크가 있고, 최근 생겨난 평화생태공원도 들러볼 만하다.
멈춰진 시간, 4.15를 기억하다
만개한 봄꽃을 아직 보기 어렵다면 실내 식물원으로 화성시 우리꽃 식물원은 어떨지. 화성에서 봄을 먼저 알리는 곳이다. 한옥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대형 유리 온실 속에서 수백 종의 우리나라 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야외에는 분수광장이나 생태연못, 철 따라 피어나는 다양한 목본류가 식재되어 있으나 아직은 푸릇푸릇해질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궁평항에서 30분 거리다.
우리 국민들이 잊지 못하는 3.1절이 지났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후 화성의 발안 장터에서는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이에 일본의 경고와 보복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이곳 제암리에서 무차별 학살당했다.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 사건은 그대로 묻힐 뻔했지만,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영국 의학자 스코필드에 의해 외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4월 5일 시장에 모인 주민들과 교회 청년들이 만세를 외치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의 무차별 총질과 매질로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4월 15일 제암리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해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시체를 끌어내어 칼질을 하고 불을 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제암리 기념관에 전시된, 1919년 4월 15일 당시를 증언하는 생생한 사진과 자료들은 온몸에 소름 돋는 분노를 일으킨다. 빠뜨리지 말아야 할 다크 투어 지점이다. 그 시간은 세월의 뒤안길로 흘러갔지만 실체적 진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제암리에 가면 절대 잊지 못할 우리의 진실이 있다.
“이 친구가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1967년 프랑스 정부의 해외연수 담당부서. 담당관은 긴장한 한국인 유학생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프랑스어 실력은 기대 이하였지만, 돌려보낼 수는 없기에 체념해서 나온 말이었을 거다. 재미있게도 그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담당관이 베푼 작은 선의는 훗날 프랑스에 큰 기회를 제공했다. 그 청년은 프랑스의 고속열차 TGV와 선진 항만 기술의 도입을 주도했다. 또 그곳의 아름다운 와인을 소개하는 명사가 되었다. 최훈(86) 前 철도청장 이야기다.
“필연이죠.”
최훈 전 철도청장은 그의 인생에서 프랑스와 계속된 관계를 그렇게 설명했다. 사실 청년 시절 그의 관심은 오직 취직뿐이었다. 프랑스와 길고 긴 인연을 이어갈 것이란 생각은 꿈에서도 못 했다.
“경북대 사범대학을 졸업했을 때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전쟁을 겪고 난 시기여서, 학교도 많지 않고 선생에 대한 수요도 적었죠. 일자리를 찾다가 국토건설단에 지원한 것이 공무원 생활의 계기가 됐어요. 영어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외무부 쪽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다가 교통부 쪽에서 외무 업무를 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길래 배속을 받았죠.”
그렇게 영남 출신 청년의 서울 상경 생활이 시작된다. 1961년의 일이다. 바라던 해외 공관 자리는 아니었지만, 맡은 일은 재미있었다. 대한민국이 이제 막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춰가던 시기.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과정에서 외국과 교류하고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업무였다.
그의 첫 임무는 국제민간항공기구에 한국의 항공 운항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에 미 제5공군 관할이었던 김포공항을 이양받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우리 의사를 정확히 제공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전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며 “그때 들인 습관을 아직까지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책상 정면에는 손때 묻은 낡은 사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같았던 프랑스 유학
“교수님 믿어주세요.”
1967년 심사를 담당하던 교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 정부의 부탁을 받아 국비유학생을 선발하는 자리. 교통부에서 신청한 청년의 프랑스어 실력이 문제였다. 퇴짜 맞을 가능성이 컸지만,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선발 예산은 다른 나라로 전용될 것이라는 이유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교통부에서 활약할 실력이면 현지에서 금방 배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국 교수님이 제 설득에 넘어갔죠. 낭만이 넘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죠. 프랑스 정부에서는 매년 국비유학생 형태로 지원자들을 받아 프랑스 유명 관광지의 호텔에 배치했어요. 프랑스의 선진 문화를 후진국에 전하면서 모자란 인력도 해결하는 정책이었죠. 결국 어렵게 프랑스에 도착하니, 현지 호텔에서도 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다행히 현지 지배인이 기회를 줘서 프랑스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죠.”
그렇게 그의 프랑스 생활은 시작됐다. 세 개의 5성급 호텔에서 매니지먼트 과정을 이수했다. 고된 일들이 이어졌지만, 센강과 에펠탑, 샹송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가슴속 목마름과 호기심은 조금씩 기쁨으로 변해갔다. 임계점을 넘어 끓어 넘치던 프랑스의 다양한 문화는 열정 넘치는 청년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니스의 호텔에서는 모나코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파티에서 쟁반을 들고 수백 명의 귀부인 사이를 누비기도 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인들로 가득했고, 하루에 수백 병의 최고급 샴페인이 소비될 정도였으니까요. 단순히 화려한 모습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회 문화나 와인 다루는 법 등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체득한 지식은 후에 제게 큰 도움이 됐죠.”
짧은 1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971년 교통부로 돌아온 그는 다시 프랑스행을 명받았다. 이번엔 출장이었다.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능하고, 현지 경험 있는 공무원이 흔할 리 만무했다.
“인천에 항만 시설을 지어야 하는데, 서해의 심한 조석간만의 차를 극복할 갑문 운영 기술은 국내에 없었어요. 우리 바다의 조건과 유사한 선진국 항구에 가서, 항만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할지 배워와야 했죠. 그래서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의 항구를 차례차례 들렀어요. 르아브르와 케르크, 안트베르펜, 브리스톨 같은 곳들이었죠.”
당시 그가 만들었던 항만 운영 시스템 규정은 인천항 갑문 운영의 뼈대를 이루었다. 선진국의 운영 노하우를 집약한 결과물은 세세한 부분이 바뀌었어도, 기본적인 운영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항만청 국제과장 시절에는 항만 개발을 위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개발은행 등 각종 국제기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오일쇼크로 중동에 돈이 넘친다는 말을 듣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까지 달려갔다. 무엇보다 종교가 우선시되던 시절, 알라에게 절을 하라는 무례한 요구에 머리도 숙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기 위한 자금이었다. 그는 “정확히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확보한 차관을 합치면 1억 8000만 달러 정도 될 것”이라며 웃었다.
운송실장 시절, 부처 내에서 다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번에는 열차였다. 국내 고속철도 도입이 검토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내 기류는 ‘당연히 신칸센’이라는 분위기였다. 철도 기술자 상당수가 일본을 통해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익숙한 일본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열차는 프랑스의 TGV였다. 최고 영업 속도가 일제에 비해 시속 90km 이상 빠른 기술력을 자랑했다.
“당시에 프랑스나 독일의 고속철도를 경험해본 사람이 부처 내에 많지 않았죠. 전 각종 국제회의나 조약 협상을 위해 왕래가 잦았으니 익숙했고요. 또다시 그렇게 프랑스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 열차의 속도는 시속 80km 정도였으니까 신칸센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열차는 지연 없이 대량 수송이 가능한 최고의 물류 효율을 자랑하는 수단이었으니까, 경제 발전에 중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도 많았지만 세계 최고의 열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웠던 와인과의 재회
“여보! 이게 그 술이야! 바로 이 맛이야!”
1977년.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내던 그는 한국에서도 와인이 나온다는 소식에 가게에서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마주앙 와인이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제조가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한국에서 만든 와인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입에 대는 순간 의심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연수 시절 워낙 애주가였던 저는 밤마다 숙소 주변의 작은 가게에서 와인을 사 마셨어요. 1프랑짜리 싸구려 와인이었지만, 같은 값인 물을 사 먹을 순 없었죠. 저녁을 대신해 커다란 소시지 하나를 구워 와인 한 병을 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주앙을 먹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확 떠오르더라고요. 그 시절 추억의 맛이었어요. 미군에 연줄이 없으면 와인을 구하지 못하던 시절, 와인에 대한 갈증을 달랠 수 있었죠.”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핑계 삼아 여행도 갈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해답은 와인으로 귀결됐다. 우선 와인의 기본 정보를 요약해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첫 번째 작품이 1997년 600페이지 분량의 저서 ‘포도주 그 모든 것’이라는 책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와인 불모지였으니까요. 와인에 대한 개론을 상식선에서 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책을 내고 나니까 주변에서 문의가 늘더라고요. 그래서 자원평가연구원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어요. 지금의 ‘와인 리뷰’라는 월간지도 그때 시작했죠. 처음엔 광고도 많지 않아 고생을 꽤 했지만, 몇 년 지나고 나니 업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2005년에는 국제 와인 대회인 코리아 와인 챌린지를 시작했다. 일본의 대회를 롤모델로 삼아 시작해 지금은 세계적인 대회가 됐다. 업계에서는 해외 와이너리의 와인을 가장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대회라는 평가를 듣는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21개국 888종의 와인이 출품됐다. 만나기 어려운 조지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와인도 참가했다. 대회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대회 심사위원들도 자긍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발행하는 ‘와인 리뷰’를 살펴보면 발행인인 최훈 前 철도청장이 작성한 기사들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주요 기사의 대부분을 소화해내고 있다. 기사의 깊이도 대단하지만, 작성량 자체가 젊은 기자들을 뛰어넘는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유튜브도 시작했다. 와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채널이 필요하다는 유통업체들의 요청이 있었다. 와인 산지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징까지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지잖아요. ‘와인 리뷰’를 발행하면서부터 새벽에 원고 작성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새벽에 차분하게 글을 쓰다 보면 기사에 필요한 추가적인 자료나, 과거에 썼던 원고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과거에 다녀왔던 여행의 기억까지 말이죠. 기본적으로 와인을 이야기할 때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의 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부끄럽더라고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는 것 같아서. 지역의 로컬 와인이나 토양, 기후 등을 겪어봐야 그 와인에 대해 정확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마트에서 칠레 와인만 사다 마신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그저 털털한 인상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순간 ‘무언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진 그의 조언으로 오해는 풀렸다.
“어느 나라의 와인이라도 시작을 위해 저렴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좀 더 좋은 와인을 찾는 모험을 권하고 싶어요.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와인이 나오고 있으니까 너무 빨리 한정 지어 고집하기보다는 다양한 체험으로 와인의 즐거움을 누려보세요.”
●Exhibition
◇박래현, 사색세계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아트조선스페이스
“수많은 장벽에 부닥치고 가혹한 시련 앞에 몸부림치며 이를 넘길 수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존의 권리… 봄이라는 뽀얀 계절은 때때로 나를 이런 부질없는 사색세계에 몰아버린다.”
한국 근대 화단의 대표 여성 미술가 우향 박래현(1920~1976). 1959년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출품하며 에세이 ‘봄이면 생각나는 일, 삶과 마주 섰던 계절’을 함께 기고했다. 에세이의 한 구절인 ‘사색세계’가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됐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지난 몇 년간의 봄을 상기하며 식민국가의 운명 속에서 마음의 어두운 흔적과 불안한 감정을 더듬어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국의 봄은 아름다웠다고 술회했다.
‘박래현, 사색세계’ 전시는 ‘생동하다’, ‘피어나다’라는 주제로 1, 2부를 나누어 그녀의 작품세계를 돌아본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대적인 회고전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로, 초기 대작부터 대표적인 추상 연작, 그리고 미공개 작품까지 8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아내로,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화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운보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리고 여류라는 굴레를 넘어 한국화의 현대화를 개척한 박래현을 만나볼 수 있다.
◇사빈 모리츠 : RAGING MOON
일정 4월 24일까지 장소 갤러리 현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독일 여성 화가 사빈 모리츠(53)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사빈 모리츠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 그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추상의 풍경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작가다. 독일 추상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부인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회화, 에칭 연작 등 50여 점을 소개한다. 동독에서 보낸 유년기의 경험과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구상 작업을 하던 작가는 2015년부터 추상 회화로 ‘정신적 풍경’을 다뤘다. 과감한 붓질과 풍성한 색채로 완성된 매혹적인 추상의 이미지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Book
◇백만장자와 승려(비보르 쿠마르 싱·다산초당)
사찰을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승려와 고급 호텔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해온 백만장자가 있다. 백만장자는 물질의 정점에, 승려는 정신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극과 극인 두 사람이 호텔에서 21일간 함께 머물며 행복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소한 삶은 성공으로 가는 첫 단계다”, “명상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라”,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있다” 등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넘나든다. 백만장자와 승려가 서로 배우며 깨닫는 인생의 본질을 통해 독자는 ‘지금 행복한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비보르 쿠마르 싱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인도의 전통 명문인 셔우드대학과 스리람상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재무회계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금융 최전선에서 일하는 그는 물질적 풍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 있는 삶이 주는 정신적 행복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맞추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행복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책은 인도에서 출간 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12개국에 판권이 팔릴 정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부자가 아니라서, 마음이 공허해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특히 추천하는 책이다.
◇울다가 웃었다(김영철·김영사)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DJ이자 코미디언, 김영철의 웃픈 휴먼 에세이다. 그는 “나의 명랑은 수없이 노력하고 연습한 결과”라고 고백하며 가족, 일상, 방송담을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달은 ‘웃음과 울음이 균형을 이룰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민음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5년간 매진해 써낸 신작. 코로나 이후 최초의 팬데믹 소설로 역사소설에 미스터리를 결합했다. 소설은 1901년 오스만제국의 민게르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하며, 페스트로 인한 종교적·정치적 분열을 그린다.
◇쓸모 있는 음악책(마르쿠스 헨리크·웨일북)
저자는 독일에서 독창적인 음악 테라피를 통해 대중의 고민을 해결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왔다. 그는 음악을 제대로 들으면 더 나은 일상을 꾸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뇌 기능 활성, 창의력과 영감 자극 등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Stage
◇데스노트
일정 4월 1일 ~ 6월 26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동연
출연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데스노트’는 2022년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뮤지컬로, 동명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가 이름을 쓰면 죽는 ‘데스노트’를 우연히 주우면서, 전 세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해온 베일에 싸인 명탐정 ‘엘’(L)과 맞서게 된다. 각자의 정의를 위한 라이토와 엘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두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갈등과 대결에 프랭크 와일드혼의 트렌디하고 팝스러운 넘버가 시너지를 더해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이번 시즌은 논레플리카(Non-Replica) 버전으로 작품의 고유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긴장감 넘치는 연출, 디테일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무대로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여기에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역대급 라인업을 자랑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몬드
일정 4월 2일 ~ 5월 1일
장소 코엑스아티움
연출 김태형
출연 문태유, 홍승안, 이해준, 조환지, 임찬민, 송영미, 김선경, 오진영, 유보영, 김태한 등
뮤지컬 ‘아몬드’는 2017년 출간 이후 해외 20개국 출간, 국내 판매 90만 부를 돌파하며 지금까지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는 동명의 소설(손원평 저)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 2월 뮤지컬 개막 소식이 알려진 후 2022년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아몬드’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감정조절 역할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문제가 생겨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인 알렉시티미아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주변인들과 갈등을 겪고 화해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광주
일정 4월 15일 ~ 5월 1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이지훈, 조휘, 정동화, 신성민, 문진아, 김나영, 효은, 최지혜 등
‘광주’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광주를 평화의 땅으로 일궈낸 열사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감동적인 서사와 ‘님을 위한 행진곡’, ‘투쟁가’ 등 웅장한 멜로디는 그날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광주’는 2020년 초연됐으며, 2년간 공연 횟수만 총 74회, 관람객 수는 2만 명이 넘는다. 미국 뉴욕 진출도 예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뮤지컬이자 아시아의 ‘레미제라블’로 극찬받고 있다.
시니어 모델들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에 휩싸인 우크라이나를 응원하고,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시니어 모델 전문 에이전시이자 교육기관인 EMA(Elite Model Agency)은 28일 소속 시니어 모델들이 참여한 화보를 공개했다. 8명의 시니어 모델이 참가한 화보에서 각 모델은 우크라이나 국기의 색상인 노랑과 파랑이 쓰인 의상을 입고 촬영에 임해,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또 “우크라이나에 평화를”이란 문구를 준비해, 빨리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했다.
EMA의 알렉스 강 대표는 “시니어 모델들은 직간접적으로 한국전쟁을 겪었던 전후 세대인 만큼 전쟁의 참상과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며,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조속히 끝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번 화보 촬영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