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 심천면. 물이 깊다[深川]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 뿌리 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50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새 둥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술 익는 내음. 이 고즈넉한 풍경과 꼭 닮은 ‘시나브로 와이너리’ 소믈리에 가족을 만나봤다.
“아가, 와인 한 모금 마셔볼래?”
이른 아침, 시아버지 이근용(60) 씨가 며느리 박영광(28) 씨에게 와인을 건넨다. 그러곤 와인의 향과 풍미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구부간(舅婦間) 모습에 시어머니 이성옥(58)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평범하지 않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일상은 이들 모두가 소믈리에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여기에 한 명 더, 아들 이병욱(33) 씨 역시 소믈리에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로 가족 모두가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이들의 와인사랑은 2007년, 이근용 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부터 숙성되기 시작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덜컥 회사를 그만뒀어요. 어느 날 영동에 땅을 사더니 이름도 ‘불휘농장’이라 지었더라고요. 불휘가 ‘뿌리’의 고어인데, 자기 이름에 ‘근(根)’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지었다나.(웃음) 그렇게 한동안은 대전 집과 영동을 오가면서 농사를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집터에 정착했어요. 그때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가 참 마음에 들었죠. 이웃 어르신 권유로 포도를 재배했는데, 수확물은 품질이 괜찮았어요. 근데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죠. 그러던 차에 영동군에서 와인산업 특구 조성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는지 이번엔 남편이 와인 양조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레드 와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반면, 청포도로 화이트와인을 선보인 것이 차별화가 됐던 것. 천천히 음미하고, 서서히 와인에 빠져든다는 의미로 ‘시나브로’라는 브랜드네임을 달았다. 또 보금자리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의 모습을 본따 와인 레이블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불휘농장표 시나브로 와인은 각종 와인 품평회에서 대상, 금상의 영예를 안으며 토종 와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나브로 새댁, 토종 와인 전도사 되다
한창 와인 사업에 물이 오를 무렵, 아들 병욱 씨는 당시 여자 친구였던 영광 씨를 와이너리에 초대했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근용 씨 내외와 영광 씨는 그 이듬해 가족이 됐다. ‘시나브로’라는 와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뤄진 셈. 결혼과 더불어 아들 내외는 부모님의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겠다는 결심도 들려줬다. 와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던 두 사람, 특히 서울 토박이였던 영광 씨가 귀농을 결심한 까닭이 궁금했다.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당시에 한창 사업이 바빴는데 시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시기에 버거우실 것 같더라고요. 가업도 돕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경험해보고 싶어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가업에 뛰어들며 영광 씨와 남편 병욱 씨는 소믈리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아버지 근용 씨, 2016년 어머니 성옥 씨에 이어 2017년 아들 내외까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 이로써 소믈리에 패밀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온 가족이 영동 유원대학교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가업과 학업을 위해 서울과 영동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에 신혼인데도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아들 부부. 인터뷰를 당일에도 가능한 한 네 사람이 모이길 바랐으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쉽게도 아들 병욱 씨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업이니 늘 가족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포도 농사부터 와인 판매까지 일련의 과정을 단 네 사람이 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아버님은 포도 재배와 양조, 어머님은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판매, 저와 남편은 와이너리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가족끼리 하는 사업이다 보니 선 긋듯 일하기보다는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전에 직장에 다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일을 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그런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임원, 회의는 식사시간에
가족이 사업을 함께하면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 장점이 크지만 자칫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며 차츰차츰 균형을 잡아나갈 계획이라고. 서로 일적으로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바로 호칭 아닐까? 각자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남편이 대표, 아들은 실장, 며느리는 이사예요. 저는 작년까지 홍보 팀장이었는데 애들이 오고 나서 홍보이사로 승진했어요.(웃음) 기업으로 따지면 가족 모두가 임원인 셈이죠.”
일과 관련한 회의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주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 부모 자식 간 일상 대화에서도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사업을 함께하는 네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근용 씨다.
“나랑 아내는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뭔가 변화를 주더라도 천천히 했으면 하는데, 애들은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신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거를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해요. 멀리서 보면 별일 아닌데도, 가족이니까 더 가감 없이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다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갈등이죠. 그래도 역시 가족이다 보니 금세 마음 풀고 웃게 돼요.”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음은 필수. 가족 구성원이 60대, 50대, 30대, 20대인 덕분에 각자 세대의 대표주자가 되어 의견을 나누고 대중적인 와인 맛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근용 씨가 영광 씨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와인 맛을 조절한 덕분에 이전보다 젊은 여성 고객의 주문도 늘어났다고. 일 때문에 와인을 달고 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 와인을 즐기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이들이다.
글로리아 와인, 그 이후
인터뷰 당시, 시나브로 와인들 좀 자랑해주시라 했더니 근용 씨 내외는 너 나 할 거 없이 ‘글로리아’ 와인을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핑크빛이 도는 레드 와인인데, 캠벨과 아로니아로 맛을 냈다. 그런데 시나브로 특유의 느티나무 레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와인 잔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 성옥 씨는 와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며느리 자랑으로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탄생시킨 와인이에요. 우리 며느리 이름(영광)을 따서 ‘글로리아’라고 지었어요. 이 로고 디자인은 며늘아기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창가에 있는 보자기 상자들 보이죠? 다 며느리가 배워서 꾸며놓은 것들이에요.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창가마다 줄줄이 전통 보자기로 감싼 상자들이 진열돼 있었다. 토종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인 만큼 제품 포장도 한국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란다. 아직 해외 와인에 비해 국내 와인이 저평가받는 것이 안타깝다며 적극 토종 와인 홍보에 나서겠다는 영광 씨. 열정적인 며느리의 모습에 반한 근용 씨 내외는 장차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막중한 임무라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 패기 넘치는 새댁은 글로리아 와인처럼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도, 변화시킬 것도 많죠. 뭔가를 시도해보고,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멀리 보고 하나하나 시나브로 정착해나가야죠. 아마 저와 남편이 시부모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시나브로 와인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시나브로 브랜드 와인 중 가족 이름을 담은 와인은 ‘글로리아’가 처음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시며 후손들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하자, 맞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피는 세 사람. ‘소원 나무’라 별칭을 붙인 정원의 느티나무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수기업으로 이름 남길 소망한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었다. 몇십 년 만의 강추위가 엄습했고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도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사람들은 맹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가 읊었던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은 멀지 않으리~”라는 시 구절처럼 봄이 다가왔다. 이제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봄을 만끽하며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다. 메마른 대지 위에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꽃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제1추천지 : 접근성이 좋은 서울대공원에서 테마별로 즐거움 만끽하기
필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대공원을 한때 자녀들을 데리고 갔던 동물원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대공원은 동물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첫째는 동물원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호랑이, 사자 등 맹수와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희귀동물로 가득하다. 세계 각국의 동물들을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동물의 고향과 각각의 성향과 습성 등을 살펴보고 관찰하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1984년 5월 1일 개장한 이래 29개 동물 막사에 332종 2700마리의 동물이 있다.
둘째는 식물원이다. 진귀한 꽃들이 많다. 봄꽃들의 화려한 자태를 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다. 꽃향기는 덤이다. 봄은 꽃들의 잔치가 화려하게 열리는 계절이다. 2017년 5월에는 600여 종의 식충식물로 꾸며진 식충식물관도 개관을 했다. 식충식물은 향, 색, 꿀 등으로 먹이를 유인하는데 끈끈이형, 포획형, 흡입형, 유도형 등이 있다. 날카로운 덫으로 순식간에 파리를 낚아채는 파리지옥, 끈끈이주걱, 벌레잡이제비꽃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셋째는 둘레길이다. 둘레길은 힐링할 수 있는 좋은 코스다. 맑은 공기와 꽃향기를 맡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봄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장소다. 호수 둘레길, 동물원 둘레길, 숲속 愛 힐링 코스가 있다. 호수 둘레길은 분수대 광장에서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아오는 산책로여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가볍게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며 잠깐 커피 한잔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동물원 둘레길은 제법 길다. 청계산 자락인 이 길은 2013년도 서울시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 81개소’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한 곳이다.
서울대공원을 추천한 이유는 동물원뿐만 아니라 테마별로 즐길거리가 있고 사계절의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벚꽃이 화려하게 피는 봄에는 나들이하기 좋은 최고의 명소로 꼽힌다. 벚꽃 축제, 튤립 축제, 장미 축제도 열려 축제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제2의 추천지 : 고창 청보리밭
청보리밭 축제는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열린다. 봄을 꽃의 계절로만 보는 것은 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푸른 언덕 위에 펼쳐진 청보리의 싱싱함을 느끼고 풋풋한 내음을 맡다 보면 젊음의 에너지가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다. 영화 ‘도깨비’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해마다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아온다. 청보리밭을 걸으며 청보리 향에 취하다 보면 도시의 소음에 지친 심신이 어느새 맑아진다. 또한 이곳에서는 푸른 청보리밭과 함께 유채꽃도 즐길 수 있다.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는 유채꽃의 샛노란 자태가 눈부실 정도다.
고창 청보리밭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곳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는 선운사 동백꽃을 함께 볼 수 있어서다. 또 먹거리가 풍부하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 시간을 내어 청보리밭을 거닐고 선운사에 들러 동백꽃까지 감상한다면 시간과 경비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는 오래된 장어 요리집도 있다.
제3의 추천지 : 수안보 벚꽃 축제와 온천 축제
수안보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온천 지구다.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이곳은 태조 왕건과 숙종은 물론 현대의 역대 대통령들도 즐겨 찾았던 곳이다. 53℃의 적당한 수온과 각종 미네랄까지 포함돼 있어 장수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매년 4월 중순 벚꽃의 개화 시기에 맞춰 온천 축제와 벚꽃 축제가 함께 열려 온천욕도 하고 벚꽃까지 즐길 수 있다. 천변으로 길게 늘어선 벚꽃길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아름드리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하게 핀 벚꽃길을 걷노라면 향기는 물론 눈꽃을 맞으며 황홀감에 젖어들게 된다.
행사기간에는 행진 퍼레이드, 각종 축하공연, 이 고장 명물인 꿩고기 시식회도 열린다. 다채로운 볼거리와 힐링온천 그리고 아름다운 벚꽃이 더욱 풍요로운 봄의 축제를 선사한다. 벚꽃 축제, 온천 축제가 열리는 수안보는 전국 어디에서든 승용차로 오기 적당한 거리에 있다. 문경 옛길을 걸으며 등산도 할 수 있다. 30년 전통의 꿩 요리가 유명하며 올갱이 해장국, 칡냉면, 물만두 전골집 등 맛집도 많아 식도락을 느끼기에도 제격이다.
폴란드 남부에 자리한 크라쿠프는 옛 폴란드의 수도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때 완전 파괴되어 온 도시를 새로 복원했지만 크라쿠프는 옛 유적지가 고스란히 남은 고도다. 구시가지는 세계유산 등재가 시작된 첫해(1978)에 지정되었다. 매력이 폴폴 넘치는 그곳엔 동양적인 것들도 남아 있다. 13세기 타타르족에게 굴복당했던 이 도시에는 만두를 닮은 ‘피에로기’가 전통음식으로 남았다.
글·사진 이신화(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피아스트 왕조와 야기에워 왕조가 남긴 위대한 업적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로 가는 중요한 목적은 아우슈비츠를 보기 위함이다. 침대열차를 타고 승무원에게 오비시엥침 역에서 깨워 달라 부탁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도 기적소리도 못 느낀 채 깊은 잠에 빠진 그날. 친절한 승무원이 일부러 깨우러 왔지만 잠에 취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크라쿠프 역에 내린다. 첫새벽이라 검표원도 없다. 부산하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사라진 역사에 우두커니 한참 서 있다가 빠져나온다. 요새 역할로 성을 에둘러 심은 숲 정원을 넘어서자 바로 구시가지다.
도시는 기대 이상으로 고풍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라쿠프는 그 역사가 깊다. 폴란드의 첫 번째 피아스트 왕조(960년경~1370년)가 410년간 통치했다. 피아스트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3세는 폴란드의 역대 왕들 중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피아스트 왕조 이후 야기에워 왕조(1386∼1572)가 186년간 통치한다. 야기에워 왕조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작이었던 요가일라가 야드비가 여왕과 정략결혼(1386)하면서부터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 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가 출현한다. 역 앞에서 만난 야기에워 기마상(1910, 그룬발트 전쟁 500주년 기념)이 힘차 보이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1410년,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전투는 대단한 일이었다.
500여 년의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 유적으로 남아
도심을 에두른 방어벽인 바비칸(누문, 망루, 1498년경)이 남아 눈길을 끈다. 바비칸은 성 플로리안의 성문을 통과하고 도시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검문소 역할을 했다. 성문을 통과하면 겨우 마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돌로 포장된 좁은 플로리안스카 길이 펼쳐진다. 올드 타운의 메인 광장은 리네크 글로브니(마켓 광장)다. 근 500년 넘게 크라쿠프 상징의 장소다.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활기가 넘치는 광장엔 골목을 누빌 관광마차가 대기해 있고 카페, 레스토랑은 물론 난전도 펼쳐진다. 광장에는 14세기에 지어졌다가 1555년 재건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 길드관(sukiennice)이 있고 그 앞에는 19세기 폴란드의 위대한 작가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에 비교될 정도다.
또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두 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 성 마리 성당이 있다. 첨탑을 만든 형제의 불행한 전설이 흐르고 종탑에서는 매시간 ‘헤이날(Hejnal)’이라는 트럼펫 멜로디가 연주된다. 1241년, 몽골군(타타르족)의 침략을 알리던 노 나팔수를 기리기 위한 연주다. 이 성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년간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성 마리 성당 뒤에는 성 바바라 교회가 있고 중앙 광장 남쪽 끝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작고 오래된 성 아달베르트가 남아 있다. 유럽을 종단하던 중세 상인들의 예배처는 원래 10세기에 지어졌지만, 바로크양식의 지금 모습은 17세기에 재건축된 것. 이 작은 성당은 몽골 침략 때 시민들의 피난처였다.
긴 역사의 명문, 야기엘론스키대학교
크라쿠프 거리가 젊음이 넘치는 것은 야기엘론스키대학교 덕분일 것이다. 1364년, 카지미에시 대왕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됐다. 유럽 최초로 지어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를 본떴다. 그가 죽은 후 답보 상태에 있던 대학교는 야기웨어 왕조의 야드비가 여왕이 산후풍으로 죽으면서 남긴 보석과 유언을 받들어 재건(1400)했다. 1406년에 예술학부가 창설되어 많은 음악가가 이곳에서 수학했다. 15~16세기에 크게 발전했고 1817년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개명했다.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때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1918년에 폴란드가 해방된 후 눈부시게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교 출신이다. 16세기에 파우스트 박사도 이 대학교에서 연구했다. 특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1996년 노벨상을 받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공감적이며 가슴을 폭 파고 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쉼보르스카 시 ‘여기’ 중).
‘북쪽의 로마’, 무수한 성당들과 바벨 궁전
메인 광장에서 곧추 직진해 카노니차 거리부터 바벨 성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교회들이 열 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는 비스와 강변까지 이어진다. 17세기, 이 도시에는 수도원과 오래된 성당(약 65개소)이 워낙 많아 과거 ‘북쪽의 로마’로 불렸다. 도시 남쪽, 비스와 강 상류의 석회암 언덕(해발 228m)에는 바벨 성이 우뚝 서 있다. 바벨은 폴란드 왕조의 가장 중요한 궁이었으며, 폴란드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자 기념물이다. 500여 년간 군주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가 열리던 곳. 특히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의 탑은 작고 소박하지만 예술미가 뛰어나다. 지그문트 종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봉직했던 성당이다. 그 외에도 유대인 지역인 게토가 남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비롯 많은 명화를 만들어낸 로만 폴란스키가 8세 때 탈출한 곳이다. 또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 전반은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지였던 크라코브스카 거리가 배경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의 배경이 된 골목들이다.
필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건축 문화에 새겨진 ‘다름’을 언급한 바 있다. 중국 건축의 지붕선(Roof line)에서는 ‘권력, 권세’가 묻어나고, 일본의 지붕선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한국 건축물에서는 ‘여유와 푸근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線)의 예술적 감각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술가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우주에 “직선(直線)은 없다”며 직선에 잠재된 ‘인위성’을 배격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구가 며칠 전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외친 독일 출신의 세계적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Luigi Colani, 1928~)에 의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조선일보, 2017.12.11.). 콜라니는 “자연은 각(角)을 만들지 않으며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직선’을 배제한, 그래서 ‘자연에 순응’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건물의 내부 공간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건축물에서 바닥은 형태와 넓이가 규격화된 ‘다다미[疊]’로 꾸며져 있다. 천장을 장식하는 서까래 또한 대패로 깎아 직선, 직각으로 가다듬었다. 그에 비해 한국 전통 가옥의 서까래는 비슷한 크기에, 별로 가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조금은 투박한 느낌마저 준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바로 대구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이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배향한 도동서원의 서까래는 불균등한 나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마치 자연의 ‘숲’을 이루듯 말이다. 또한 대청마루의 바닥은 나무의 몸통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곡선의 미’를 한껏 자연스럽게 뽐내고 있는 것이다[사진].
일본을 대표하는 한 목재가구 공예가가 1930년대에 우리나라를 찾아왔을 때 겪은 일화가 전해온다. 한 목공소를 방문한 그는 목재를 다루는 목수(木手)의 모습을 보고 “왜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하느냐?”며 조금은 핀잔하듯 물었다. 그러자 목수는 “원래 나무는 비틀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하듯 대답했다고 한다. 예상 밖의 답변을 들은 일본 목재가구 장인(匠人)은 충격과 함께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일화다.
정원이나 건축 문화를 보면 한일 양국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정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요컨대 일본이 깔끔하고 정리 정돈된 인공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반면, 우리는 자연에 순응하는 포근한 미(美)를 추구한다.
주 이 글은 정원 및 건축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의 문화 코드가 상이하다는 점을 논한 것일 뿐 두 문화의 우열을 가리고자 함이 아니라는 걸 밝혀둔다.
해외여행에 익숙지 않은 초보 배낭 여행객들에게 홍콩은 매우 적격한 나라다. 중국 광둥성 남쪽 해안지대에 있는 홍콩은 1997년 영국령에서 반환되어 국적은 중국이지만 특별행정구다. 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딴 나라’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병 고쳐 달라 기원하면 낫게 해줄까? 웡타이신 사원
홍콩의 주룽반도(九龍半島)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교 사원이 웡타이신(黃大仙)이다. 원래는 중국 광저우(廣州)의 황사에 있었는데 1912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56년부터다. ‘웡타이신’은 우리말로 황대선이라는 인물을 뜻한다. 그는 원래 저장성의 한 지방에서 살던 양치기 소년. 15세 때, 정제된 황화수은을 질병 치료 약으로 만들어 인술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래서 이 사원은 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신앙처로 알려지게 된다. 모습은 여느 사원과 비슷하다. 각자의 소원과 병 치료를 기원하는 제수를 놓고 향초를 피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원 안은 눈이 매울 정도로 향내가 진동한다. 특히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나무 산통을 이용해 행운의 점(산통점)을 친다. 일을 그르칠 때 쓰는 ‘산통 깨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산통점’과 관련해서 생겨났다. ‘산통(算筒)’에 대나무를 잘게 잘라 100개 정도를 넣고 산통의 막대가 나올 때까지 흔들고 막대가 나오면, 막대와 같은 번호의 종이와 바꾼다. 점쟁이는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점괘가 나와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또 이 사원에 들러 꼭 찾아야 할 곳은 뒤쪽의 정원. 황대선이라는 이름이 선명한 정원은 연못과 함께 꾸며져 있어 주변 고층 아파트의 삭막함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적이다.
홍콩 영화 속 주인공처럼 침사추이 거리 헤매보기
주룽 지구의 침사추이(尖沙咀)는 홍콩 최대 번화가다. 고층빌딩 숲, 옛 향기가 가득 배인 칙칙하고 좁은 골목들. 오래된 재래시장과 파도처럼 일렁대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의 물결.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영화 같은 매력이 폴폴 넘쳐나는 곳. 홍콩 누아르 영화 속에서 이미 친근해진 풍경이 반갑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를 모티브로 만든 ‘스타의 거리’다. 2003년에 시작해 1년 뒤인 2004년부터 공개되었다. 너비 4~5m, 길이 440m로, 9개의 붉은 기둥에 홍콩 영화 100년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의 조형물, 이소령 동상 등이 눈요기를 시켜주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길바닥에 새겨진 영화인 명판들. 이연걸, 홍금보, 임청하, 양조위, 오우삼, 서극, 매염방 등 국제적으로 친숙한 홍콩 스타들의 손도장과 사인들이 거리를 장식했다. 이름만 새겨진 배우는 스타 거리가 조성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이곳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주변 바다 풍치가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과 고깃배가 떠다니고 바다 너머로 홍콩섬 금융가의 건물들이 뾰족하게 올라가 있는 주변 풍광이 매력적이다. 이외에도 미술관, 우주박물관, 시계탑, 문화센터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주룽반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높이 44m)은 1910~1978년 중국과 유럽을 오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었던 주룽역 앞에 서 있던 것. 조화롭지 않은 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침사추이가 매력적이다.
홍콩의 부자 동네, 리펄스 베이
침사추이에서 리펄스 베이(Repulse Bay)로 가려면 일단 홍콩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페리호와 해저터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홍콩섬은 홍콩 개항 이후, 상업 및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산, 빅토리아 피크(554m) 고갯길을 넘어서면 차창 밖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빽빽한 건물 대신 초록색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띄엄띄엄 고층 아파트가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 형태가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리펄스 베이다. 성룡 등 홍콩의 유명 인사들이 주로 사는 부촌이다. 길 끝나는 바닷가 끝에 틴하우(天后) 사원이 있다. 사원 앞에 틴하우 여신이 해탈의 미소를 건네고 있다. 산정이 아니라 바다와 눈높이가 같다. 1865년에 세워진 도교 사원은 독특한 중국 건축 양식을 전하는 지붕의 곡선이나 조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원엔 바다의 수호신인 ‘쿤암(Kwun Yum)’과 틴하우를 모시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틴하우 여신은 뱃사람들이 복을 빌면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믿었다. 또 건너가면 젊어진다는 장수교와 손으로 문지르면 재물복을 준다는 정재신(正財神) 석상, 만지면 3일 안에 인연을 만들어준다는 인연신이 있다. 특히 인연신 앞에서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떨어질 줄 모른다.
유럽 거리 걷는 건가? 스탠리 마켓과 머레이 하우스
리펄스 베이 해변을 벗어나 찾아갈 곳은 스탠리 마켓(Stanley Market)이다. 스탠리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150여 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거리다. 마치 서울의 이태원동과 같은 분위기다. 마켓 거리는 고급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반면 스탠리 베이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확연히 모습을 달리한다. 아기자기한 유럽식 바와 식당, 숍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세계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어 이국적인 풍치가 연출된다. 아기자기한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커피 한 잔, 파스타, 피자 한 조각으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만(灣)’ 형태의 넓지 않은 바다를 따라가면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를 만난다. 옛 센트럴에 위치한 1844년대 식민지시대 건축물을 1991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4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을 분해해서 옮긴 후 재조립했다고 한다. 아직도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물은 딱히 멋은 없지만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는 레스토랑과 홍콩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머레이 하우스 앞 바닷가 쪽의 정자와 옹기종기 매여 있는 조각배의 풍치에 반한 여행객은 그 순간 긴장을 스리슬쩍 내려놓는다.
홍콩 야경 보고 레이저 쇼 보니 기분 최고, 맥주 한잔 어때?
홍콩 여행에서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 홍콩섬의 빅토리아 피크는 야경 보는 인기 뷰포인트. 홍콩의 가장 높은 전망대로 서울의 남산타워, 63빌딩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훌륭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서야 완벽하게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것은 피크 트램. 1888년부터 긴 세월 동안 가파른(373m)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어느 순간 건물이 거꾸로 서 있는 듯 몽롱해진다. 특히 피크 타워 바로 옆, 사자 정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는 명소다. 또 승강기를 타고 타워 꼭대기 층인 스카이 테라스로 올라가면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야경을 보는 데에도 피크 타임이 있다. 오후 8시부터 약 20분간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영화 거리와 이어지는 시계탑 근처, 연인의 거리에 마련된 2층 뷰포인트가 명당자리. 바다 건너 홍콩섬의 금융가 건물에서 뿜어대는 광선에 취하는 홍콩의 밤이다. 이런 날, 침사추이 밤거리로 들어가 몽콕 야시장에서 야식을 사먹는 재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Travel Data
교통편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캐세이패시픽, 타이항공 등에서 매일 인천~홍콩 간 직항편을 운행한다. 2014년부터 제주항공, 진에어와 같은 저가 항공사도 직항편을 운항 중이다. 3시간 30분~3시간 50분 소요.
현지 교통 정보 홍콩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고속전철을 타고 20~30분 만에 중심가인 주룽반도와 홍콩섬에 갈 수 있다. 시내를 여행할 때는 배(스타 페리)와 2층 버스, 전차(트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옥토퍼스 카드라고 불리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지하철, 배, 전차, 버스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 홍콩 달러(HKD)를 이용해야 한다. 마카오에서는 홍콩 달러를 사용할 수 있으나 거스름돈은 현지 화폐인 파타카(Pataca)로 받을 수 있다. 화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식과 숙박 정보 홍콩 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완탕이 유명하고 시장통에만 가도 먹을 게 지천이다. 유명 호텔 숙박은 몇십만원대이지만 5만~8만원 선에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주룽반도 쪽이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1928년 문을 연 페닌술라 호텔(香港半島酒店)은 세계 10대 호텔 중 하나로 꼽힌다. 또 4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mandarin oriental Hong Kong)은 미슐랭 스타(Michelin Star)를 받은 호텔로 10개의 레스토랑, 스파 및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70만~80만원대다.
물가 정보 홍콩은 면세가 되는 품목들이 대부분이다. 의류, 가방, 시계 등은 한국보다 다소 저렴하다. 그러나 주류, 담배 등의 품목 몇 가지는 한국보다 가격이 더 높고 세금을 부과한다. 전체를 합치면 홍콩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날씨와 옷차림 정보 홍콩의 12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15.9℃, 평균 최고기온이 20.2℃로 우리나라 가을과 비슷하다. 일교차가 작아 낮이나 밤이나 서늘하고 쾌적하다. 가을 옷 위주로 챙기고 머플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홍콩과 마카오(澳門)는 빼놓을 수 없는 밀접한 여행지다. 홍콩 항에서 뱃길로 40여 분(약 60㎞) 달려가면 마카오다. 또 홍콩과 인접한 도시가 심천이다. 홍콩의 지하철(MTR)이 주룽의 홍함에서 중국 국경인 광둥까지 국철(KCR)로 연장되지만 통과하려면 비자가 필수다. 심천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새로 생긴 신흥도시. 건물들도 깨끗하고 홍콩보다 물가도 싸다. 매우 좁은 도시여서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포르투갈.
영토는 한반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서유럽에서는 최고로 가난하다. 그런데 포르투갈 여행을 하다 보면 왠지 친밀하다. 일찍이 해양 진출을 통해 동양 마카오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고 가난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겹고 사랑스러운 나라. 그라피티가 난무하는 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이 있는 빈민촌 같은 골목에서 은근슬쩍 비춰주던 강변의 아름다운 전경. 지는 햇살에 한껏 색깔을 내주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소도시 포르투 여행은 그냥 행복하다.
도우루 강변의 항구도시, 2000년 역사지구
도우루(Douro) 강변 도시 포르투(porto) 시내에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상 밖으로 앤티크한 웅장한 건물들이 온 도심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벤투 역,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 포함된 도우루 강 어귀의 포르투 역사지구(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2000년 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시대별 건축물들이 있다.
포르투의 중심지인 자유(리베르다지, liberdade) 광장 위쪽, 포르투 시청사 주변에는 상벤투 역, 포르투 대성당, 76m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클레리구스(Clerigos) 성당과 종탑, 카르무(Carmo) 성당,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볼사궁전 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건축물 중에는 파란 타일을 이어 그림을 그려놓은 아줄레주(Azulejo, 주석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포르투갈 특유의 푸른 빛 타일)가 특징적이다. 또 포르투는 를 쓴 조앤 롤링(Joan Rowling, 1965~)과도 연관 깊은 도시다. 조앤은 1991년 11월부터 이곳 인카운터 영어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1992년 10월에는 현지 방송사 기자인 3세 연하의 조르즈 아란테스(Jorge Arantes)와 결혼해 1993년 7월에 딸을 낳았지만 그해 이혼하고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 명작을 남겼다. 그녀가 이 도시에 머물면서 자주 갔던 렐루 서점(Livraria Lello),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 1921년 오픈)는 이제 명소가 되었다.
포르투를 여행하는 재미는 따로 있다. 이런 역사적인 건축물도 좋지만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 여행이 특별하다. 강변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난한 건축물들과 그라피티가 난무한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도우루 강변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작은 박물관, 오래된 개인 저택, 공원 등도 흥미롭고 현지인들의 친절도 정겹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도와줄까?”를 묻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포르투다.
도우루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와이너리
포르투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도우루 강변을 잇는 카이스 다 히베이라(Cais da Ribeira, 강변의 부두라는 뜻) 거리다. 도우루 강변 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도심의 집들이 이어지고 동(쪽) 루이스 1세 다리까지 와인 판매장, 노천 바들이 이어진다. 도우루 강변을 걸치고 있는 172m의 길이에 아치형의 루이스 1세 다리는 포르투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이 다리는 에펠탑으로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eophile Seyrig)가 설계해 1886년에 완공했다.
1층에는 자동차가, 2층에는 트램이 다닌다. 1, 2층 모두 보행자 도로가 있어서 걸어 다니며 강변 풍치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와 강이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다.
강을 건너, 빌라 노바 드 가이아 지역의 강변길에는 샌드맨(Sandman), 테일러(Taylor), 그라함(Graham), 카렘(Calem), 오플리(Offley), 크로프트(Croft), 도우(Dow), 라모스 핀토(Ramos Pinto) 등 유명 와이너리가 줄지어 있다. 입장료만 내면 와이너리의 역사, 특징, 재배 및 제조과정, 저장 중인 와인 종류와 특징 등을 알아보는 투어를 할 수 있다. 또 강변을 따라 ‘도우루 아줄(Douro Azul)’ 유람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는 풍치는 훨씬 입체적이다. 도우루 강변에 있는 6개 다리(동 루이스 1세, 마리아 피아, 인판테, 상주앙, 프레이소, 아라비다)도 볼 수 있다.
포트와인 이야기
포르투 와인을 ‘포트와인(Port Wine)’이라 부른다. 이곳이 포도 산지로 유명해진 시기는 17세기. 100년 전쟁으로 오랜 견원지간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냉전에 들어갔다. 단단히 토라진 프랑스는 영국에 와인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와인의 공급지를 새로 구해야 했던 영국 상인들은 빌라 노바 드 가이아로 이주해 자국으로 수출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영국까지의 항해는 한 달이 걸렸고, 그 사이 와인은 식초가 되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와인에 브랜디를 넣어 숙성시킨 포르투 와인이었다. 알코올 도수는 더 높아지고, 당분 발효가 중단되어 더 달콤한 맛을 냈는데, 이것이 큰 인기의 비결이었다.
그 후 포르투갈은 발달된 항해술로 일찍이 신대륙과 아시아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한 서양 와인도 바로 ‘포트(Port)’다. 아직도 와인은 달고 은근히 취하는 술이라 여기고, 오래될수록 좋은 와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 ‘포트’ 때문이다. 포르투는 미국으로 수출되는 모든 와인에 포트와인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포트와인은 알코올 함량(18~20%)이 높아 취하기 십상이다. 잘 구운 닭 요리에 도수 높은 포도주 알코올에 취하는 포르투는 영원히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직항은 없다. 먼저 마드리드, 파리,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서 포르투갈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면 한국에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가는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마드리드에서 저가 항공을 이용하거나 차마르틴 역에서 야간열차를 이용해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 역(10시간 30분 소요)까지 가면 된다. 마드리드-리스본행도 운행되고 있다.
현지 교통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포르투까지 버스로 약 3시간 30분, 기차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리스본 공항역에서 출발하는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오리엔테 역(약 10분 소요)으로 가면 기차나 버스(Renex)를 이용할 수 있다. 기차는 포르투 캄파냐 역에서 환승해 지하철로 포르투의 중심지인 상 벤투 역에 하차하면 된다. 버스는 환승이 필요 없다.
맛집 정보 포르투갈은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프란세지냐(Francesinha)가 있다. 양이 어마어마해 ‘내장파괴버거’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또 그릴에 구워주는 닭고기 요리가 맛있다. 청과물 시장에서 파는 과일들도 맛이 좋다.
숙박 정보 포르투의 베스트 호텔은 도우루 강을 전망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이트맨(Yeatman) 호텔이다. 야외에서 레드와인 목욕을 즐기거나 와인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소니(Nicolau Nasoni)가 설계한 페스타나 팔라시오 도 프레익소(Pestana Pala′cio do Freixo)는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포르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 호텔의 프랑스풍 정원 앞으로 푸른 도우루 강이 펼쳐진다. 이 외 18세기 궁전을 개조해 만든 최고급 호텔인 인터컨티넨탈 포르투(Intercontinental Porto)와 2개의 실내 수영장, 터키식 목욕탕, 사우나, 스쿼시 코트 등을 갖춘 포르투 팔라시오 콩그레스 호텔 앤 스파(Porto Pala′cio Congress Hotel & Spa) 등 꽤 많다. 고급 숙소는 100만원이 넘지만 4~5만 정도로도 2인용 객실을 이용할 수 있다.
물가 정보 포르투갈의 통화는 ‘유로화’다. 유럽에서는 물가가 낮은 편이어서 큰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날씨와 옷차림 유럽의 11월(가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다. 평균 최저기온은 영상 11.2℃, 평균 최고기온은 영상 17.8℃로 선선한 가을 날씨를 생각하면 된다. 한 달에 2주 정도 비가 내리는데 적지 않은 양이기 때문에 우산을 지참해야 한다. 또 낮에는 선선하지만 밤에는 쌀쌀하니 긴소매 옷들과 두께가 있는 외투와 점퍼를 함께 준비하면 좋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포르투는 기대 이상으로 매력이 넘치는 도시다. 세계 베스트 관광지에서 항상 최고 순위를 차지하는 곳이지만 물가가 그다지 비싸지 않고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다. 강변에서 여유롭게 낚시도 즐길 수 있다. 가을이면 포도 수확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와인 투어는 필수다. 나라가 크지 않으니 수도 리스본과 주변의 소도시 여행을 연계하면 된다.
찬 서리가 내리고 산과 들이 붉게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이다. 누구라도 덥석 손을 붙잡고 싶다. 덕수궁부터 경복궁·경회루·창덕궁을 거쳐 창경궁에 이르는 고궁에서 가을을 만나려고 두툼한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하루에 다 걷기 어려운 일정이다. 자세한 공부는 다른 방법으로 하고, 오늘은 다가오는 가을에 묻히려고 한다.
시청역에서 내렸다. 덕수궁 정문 대한문이 바로 앞이다. 덕수궁은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명칭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덕수궁은 원래의 3분의1 규모로 축소되었다. 서대문 별관시청사에 올랐다. 울긋불긋 파스텔화로 물들어가는 덕수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덕수궁 돌담장 밖 정동에는 이국적인 역사물이 가득하다.
경복궁은 광화문으로 들어선다. 이 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1395년에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졌는데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은 2층 월대 위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공식 행사나 조회 등에 사용하였다. 근정전 뒤로는 임금의 사무실이라 할 수 있는 사정전과 침실인 강녕전, 왕비가 거처하였던 교태전이 이어진다.
경회루는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후, 경복궁 서쪽의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못을 파고 건설하였다. 태종 때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조선시대 사신의 접대와 궁중 연회가 베풀어졌던 공간이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면서도, 단종의 전위와 연산군대의 흥청망청 고사가 유래한 곳이기도 하다. 경회루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감상하면서 이곳을 거쳐 갔던 역사적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묘미도 있다.
창경궁 정문은 돈화문이다. 조선 사람들은 경복궁만 중국식을 따르고 두 번째 궁인 창덕궁부터는 조선식대로 지었다. 창덕궁은 한국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한국의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1997년에 세계유산이 되었다. 이 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궁이기 때문에 이궁 혹은 별궁이라고 불렀다. 경복궁은 정도전을 위시한 신하들이 설계했다면, 창덕궁은 왕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은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을 많이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다 탄 뒤 선조가 다시 지어 1610년부터 창덕궁은 정궁이 되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자락에 있는 매봉을 주산으로 건설되었다. 창덕궁의 자랑은 후원이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금원 혹은 비원 등으로 불렸다.
창경궁은 1484년에 완공되었으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하였다.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1983년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으로 나왔다.
재래시장에 갈 일이 생겼다.
떡 장수, 튀김 장수, 꽈배기 장수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전통시장
펄떡이는 생선처럼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곳.
왜 이럴까
비린 생선 냄새도,
발 구르며 떠들썩한 골라골라 소리도
최상의 정원이라는 곳에서 풍기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시작도 끝도 없는 그들만의 잡담도 없다.
영원의 잠이 지배하는 듯하다.
거래하는 동물이 없다.
곰처럼 두껍고 딱딱한 손마디가 힘을 잃었다.
휑한 바람이 피부로 느껴진다.
장바구니 푼돈이 나라경제 척도라는데
대형마트도 장사가 안 된다는 기사 본 게 엊그제
아줌마들은
찬거리를 구입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혹시나 하고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묻기도 망설여지고 걷기도 민망하다.
빨리 빠져나와 긴 숨 한 번 내 쉬었다.
한 동안 다시 가기 어려울 듯하다.
내가 묻힐 곳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취향이나 선호 방식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찾아올 자녀들도 고려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또 전통적인 매장묘 형태로 자리 잡을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묘지 부족을 생각하면 봉안당(납골당)이 답이지만 빽빽한 아파트 같은 장소를 마뜩찮아 하는 이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가까운 수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목장은 말 그대로 별도의 봉분이나 시설 대신 나무 밑에 골분을 뿌리거나 함에 넣어 묻는 방식을 말한다. 수목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업계에선 1993년 스위스의 우엘리 자우터(Ueli Sauter)란 사람이 유언에 따라 친구의 골분을 나무 밑에 뿌린 것을 시초로 꼽는다. 이후 자연을 해치지 않는 ‘녹색장묘’의 개념으로 확산되다, 2004년 故 김장수 교수의 수목장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국내 보급이 시작됐다.
서양에선 자연친화적 가치 중요시
국내에서 수목장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자연장’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이후 국내에 자리 잡은 수목장의 개념은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목장을 시작한 스위스나 독일, 영국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골분을 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묘비나 봉분 등의 인공시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 영국에서는 골분함을 사용하더라도 생분해성 재질의 제품을 써 시간이 지나가면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하고 있고, 스위스는 유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나무에 페인트로 표시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의 문화는 다소 다르다. 아무래도 고인을 모시는 것은 자손의 도리로 여기는 문화가 남아 있고 제사나 차례와 같은 풍습이 유지되는 만큼, 묘소는 고인을 모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운영되는 추모공원의 수목장을 보면 나무 밑에 오래 보관이 가능한 분골함으로 하거나 작은 비석을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예 소규모의 봉안당을 갖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 숲 활용, 국내에선 많지 않아
수목장은 기존 숲을 활용한 자연수목 활용 방식과 공원묘지 조성을 위해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는 식재형으로 나뉜다. 시설에 따라서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는 곳도 있다. 자연수목을 활용할 경우 숲을 자연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리가 어렵고 제반 시설을 갖추기가 만만치 않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선 산림청에서 조성한 경기도 양평군의 하늘숲추모공원이 대표적이다. 인천가족공원에서는 자연수목을 활용한 것과 임의로 식재한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쓰인다. 이외에 공설이나 사설 수목장 시설은 대부분 식재형이라고 보면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 달리 대부분의 수목장은 울창한 숲을 활용하는 모습보다는 인공적으로 갖춰진 정원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수목장의 증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에서도 보건복지부가 중심이 되어 묘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수목장 같은 자연장지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문중의 자연장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는 등의 제도개선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산림조합중앙회도 지난해 자체 상조회사인 ‘SJ산림조합상조’를 설립하고, 수목장을 위한 자연장지를 계속 늘려나갈 계획에 있다.
비싼 가격도 걸림돌
수목장의 단점 중 하나는 비싼 가격이다. 애초 취지대로라면 자연에서 온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린다는 개념이라 돈이 들 이유가 적지만, 국내에서는 수목장이 인공적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나무 값’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안장되는 공동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 봉안당(납골당) 시설보다 비싸다.
공설 시설의 경우 계약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50만~200만원 내외의 분양비용이 필요하고, 별도의 관리비가 청구되기도 한다. 사설은 훨씬 비싸 함께 사용하는 공동목은 300만~4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고, 부부목은 1000만원 정도가 든다. 일가(一家)가 사용할 수 있는 가족목은 서울과 가까운 사설 공원묘지의 경우 5000만원이 넘기도 한다.
문화답사를 목적으로 국내 여러 문화예술 애호가와 단체로 일본이 자랑하는 가나자와(金澤)시의 정원(庭園) ‘겐로쿠엔(兼六園)’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일본 전통정원이 그러하듯 잘 정돈된 일본의 정원을 거닐던 한 동행인이 “왜 우리 정원은 일본처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했다. 많은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불평이었다[사진 1].
일본 전통정원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 정원의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가위와 톱으로 두발(頭髮) 미용하듯 오밀조밀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손질로 가공한 조형물인 셈이다. 그래서 일본 정원은 바라봄의 대상이다. 교토시 료안지(龍安寺)의 정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사진 2].
방문자가 정원 안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나 괴석(塊石)을 손으로 만지며 촉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마치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긴장감마저 느끼게 된다. 일본 공영 방송사 NHK의 수석 디렉터인 후지모토 도시카즈(藤本敏和)는 “일본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살며 긴장감이 주는 아름다운 매력(Beautiful charm of tension)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반추하게 된다.
우리 정원은 일본 정원과 많이 다르다. 정원에 서 있는 수목(樹木)은 인위적 손질을 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물론 깔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 바라봄의 대상이 아니어서,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기대기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시간을 갖기도 한다. 안식처로서의 정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원은 수더분하게 다가온다[사진 3].
이와 같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정원문화를 살펴보면서 필자는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도자기 예술에서도 같은 맥박을 느낀다. 일본 남단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조선 도예가(陶藝家) 심당길(沈當吉) 집안의 14대손 심수관(沈壽官) 선생은 오래전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도자기에는 정성을 다해 물레질을 하면서 대가를 생각하는 욕심(慾心)이 묻어 있고, 도공이 무심한 가운데 물레질하여 만든 조선의 도자기에는 무심(無心), 즉 불심(佛心)이 있다.” 또 “영국박물관의 조선 도자기가 있는 전시대 앞 카펫이 유독 마모되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문화에 담긴 각기 다른 정신적 바탕에 대해 생각할 때면 떠올리게 되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간결함에 내재되어 있는 긴장감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문화를 창조했다면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아오며 엮어낸 ‘순수함의 문화’를 일궈냈다. 즉 일본 문화의 중추가 인위적이라면 꾸밈[假飾]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반면 가식을 배제한 우리 문화는 상대적으로 거칠게 다가오지만 자연을 거역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정직함이라는 더 큰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드높이며 자랑해야 할 심미안(審美眼)이다. 우리 문화의 높은 격조를 다시금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