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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밥바룰라’ 욜로 시니어로 돌아온 박인환
-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해.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영화 ‘버킷리스트’ 속 대사다. 인생의 기쁨과 타인을 기쁘게 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찾자면, 그이가 바로 배우 박인환(朴仁煥·73) 아닐까? 평생 연기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니 말이다. 데뷔 후 53년 동안 10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며 숱한 기쁨을 공유해온 그가 이번엔 버킷리스트 달성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유쾌한 행보를 그린 영화 ‘비밥바룰라’로 노년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그래 맞아, 브라보!” 2016년 연극 ‘아버지의 선물’ 출연 당시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은 박인환은 1년여가 흐른 뒤에도 기자의 명함에 적힌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이 드라마, 영화, 연극 등 7개 작품에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그의 미소는 여전히 편안하고 건강해 보였다. 1945년 1월 닭띠 태생인지라 2017 정유년 한 해의 감회가 남다르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울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부턴가 잊고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70대야? 옛날 같으면 그냥 늙은이도 아니고 곧 떠날 사람인데, 이렇게 활동해도 되나?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잖아요. 내가 인식하는 숫자대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다행히 배우는 정년퇴직이 없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하려 해요. 흔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습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연기자로 남고 싶다는 박인환은 그야말로 오로지 연기뿐인 인생을 살아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공, 연기 인생 53년 차,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연기만 해온 것’이 아닌 ‘연기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장남인데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취직하려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편입 지원서까지 받아놨는데, 때마침 ‘나병(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공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지방 순회공연이라 3개월 돌았더니 제법 돈을 주더라고요. 배우를 해도 괜찮겠다고 다시 마음을 바꿨죠. 그런데 그 뒤로 한 10년간 돈을 못 만졌어요. 친구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로 전향하기 시작했죠. 그땐 소위 빽만 있으면 취직은 문제없던 시절인데 나는 연줄도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다른 일은 꿈도 못 꿨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었고, 계속하다 보니 지금까지 질기게 살아남은 거죠.”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 ‘연기’ 스스로 별다른 재능이 없어 연기밖에 못 했다는 그는 연극무대를 떠나 TV 드라마로 적을 옮기면서도 고초를 겪었다.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는 예술가, 방송 연기자는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무대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야 했기에, 예술가의 사명보다는 가장의 책임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말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밥벌이였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이 배우였고, 일이 곧 연기였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짐을 들 때도 있고 삽질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뭐든 해야 돈이 나오잖아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역할이 도둑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야 했어요. 이런저런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며 좋게 이야기하는데, 내겐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죠. 아마 아내와 둘만 살았다면 견딜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이 생기니 도무지 타협이 안 되더라고요.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당장 우유 먹이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언제까지 예술 타령하며 작품을 따져 고를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준비했지만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도 어엿한 성인이 됐고, 우리 시대 아버지 연기의 대표주자로 다양한 작품에서 러브콜을 받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원하는 작품을 골라 출연해도 되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 물어 보기로 했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에요. 누가 찾아줘야 연기를 하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동년배 중에 역할이 없어 노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을 안 받는다고 해도 써주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직업이 겉보기엔 부러울 수 있지만, 그 속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더 능력 있는 후배들이 계속 나오니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죠. 그 와중에 내 나이에 들어오는 역할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고요. 여전히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스케줄만 맞으면 웬만한 역할은 다 하려고 합니다.(웃음)” 연기 경력 합계 203년, 시니어벤져스의 열정 한때는 농담 삼아 사이코드라마의 괴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욕심 없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연기 베테랑인 그이지만 젊은 시절보다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촬영장에 가면 대개 최고참이죠. 후배들이 많으니 더 조심해야 해요. 어른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괜히 모범을 보인답시고 뭔가 했다가 주책없어질지 모르니 가급적 조용히 있으려 해요. 작년에 드라마를 하면서 대사를 잘 못 외운 적이 있어요. 한 번 NG를 냈는데, 당황하니까 계속 틀리는 거예요. 후배들이 다 쳐다보는데 망신스럽기도 하고, ‘아, 이제 내가 그만할 때가 됐나?’ 싶은데, 한편으론 다들 속으로 ‘선생님 이제 좀 쉬시지’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 더더욱 이 난관을 딛고 넘어서야겠더라고요. 1시간 연습할 거 2시간 연습하고, 세 번 볼 거 네 번, 다섯 번씩 봐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사 외웠습니다.” 후배들이 주를 이루는 현장이 아닌 신구, 임현식, 윤덕용과 함께한 ‘비밥바룰라’ 촬영장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할 수 있었다. 척하면 척, 연기 경력 합만 무려 203년인 네 배우의 앙상블은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고, 촬영을 마치고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은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특별히 시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만큼 네 배우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대본에 변화를 주는 등 중장년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연기 그 이상의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이가 있을 때나 격식 차리려고 하지, 우리끼리는 서로 별명도 막 부르고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그래요. 몸은 늙었어도 감성은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노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상상보다는 중장년 세대가 공감하는 현실적인 상황과 대사를 표현하고 싶어서 이성재 감독과 미팅을 자주 했어요. 또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했죠. 그 덕분에 젊은 관객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들만의 웃음과 감동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 같아요. 아마 우리 세대가 본다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이자 전부인 나의 버킷리스트 박인환이 연기한 영환은 ‘비밥바룰라’의 다른 세 주인공을 이끌며 ‘친구들과 한집에 살기’, ‘영정사진 같이 찍기’, ‘미팅하기’ 등 그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새해도 밝았고, 이번 작품을 계기로 그도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라고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어떻게 죽을 것이고, 죽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라는 거죠. 반대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는 게 버킷리스트인데, 글쎄요. 떠오르는 게 없네요.(웃음) 그저 내년에 ‘비밥바룰라’가 잘되면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가 없다는 말이 어쩐지 아쉬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가 원하는 일과 바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완성한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바로 ‘‘비밥바룰라’가 흥행해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기’다. 배우로서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바람일지 모르지만, 인터뷰 내내 가식 없는 정공법을 택했던 그를 보았기에 얼마나 간절하고 묵직한 소망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토록 그가 쉼 없이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막힘없이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제는 돈 때문이 아니라 불편한 인사치레를 받기 싫어서 작품을 해요. 식당을 가거나 택시를 타면 꼭 사람들이 ‘요새 안 보이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개봉하는데 내가 안 보인다니… 그런데 정말 쉬고 있으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할 거 아녜요. 작년 11월에도 아주 바빴어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사람이 간사해서 며칠 쉬니까 지겹더라고요. 일을 해야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아는 거지, 매일 쉬는 사람에겐 지루한 일상인 거죠. 연기를 할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이제는 아낌없이 즐길 때 결국 버킷리스트 추가 항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은 단 하나의 바람이 아닌 그의 전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차 새로운 항목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와 ‘비밥바룰라’ 관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뭐든 낭비하는 법이 없어요. 절약 정신이 배어 있죠. 늘 이걸 꼭 사야 해? 저걸 꼭 먹어야 해? 그러면서 돈이 있어도 ‘됐어, 됐어’ 하고, 때론 자식들의 효도도 마다하며 살죠. 그런데 이제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있으니 문화생활을 즐겼으면 해요. 그래도 괜찮잖아요. ‘비밥바룰라’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그려나가면 좋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세대가 더욱 즐겁게 잘 살길 바랍니다.”
- 2018-01-0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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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개띠의 여행 추억, "먹고살 만해졌을 때 우리는 봇짐을 멨다"
-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 2018-01-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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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계올림픽은 제가 꾸던 꿈이었습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 박종흔 씨
-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2017-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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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체 사진작가가 된 前 지구과학 선생님 이경훈씨
- “학교는 왜 그만두셨어요?” “8월에 미국에서 있었던 개기일식이 보고 싶어서요.” 정년퇴임 2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전 부산과학고등학교 이경훈(李京勳·60) 선생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놀랍고 신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하산하듯 선생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답변 한번 간단하다. 통쾌함도 몰려온다. 걱정 따위는 잊고 내가 즐기는 삶, 내가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좌우명 ‘놀자’, 백발소년(白髮少年) 이야기 “개기일식 날짜가 딱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 개학하고 나서였거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인생 좌우명이 ‘놀자’거든요(웃음).” 개기일식을 이런 것 저런 것 신경 안 쓰고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날짜도 조금 애매하게 걸려 있었다. 그렇게 과학 선생님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신나게 개기일식 여행을 준비했다는 이경훈씨. 부산지부장으로 있는 (사)아마추어 천문학회 회원 48명과 함께 미국 아이다호로 개기일식을 보러 다녀왔다. “이번 개기일식은 2분 16초 동안 진행됐거든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촬영을 하기 위해 두 달 동안 계획을 세웠어요.” 달이 해를 가리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을 동시에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다려왔던 그 순간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개기일식을 볼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좋아요. 현실로 닥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계획했던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하늘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일도 좋지만 새로운 장비를 장만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 즐겁다고. 사실 간단하게 ‘개기일식 때문이었다’고 은퇴 이유를 밝히긴 했지만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현직과 전직의 차이, 정년퇴직으로 누릴 수 있는 금전적 차이가 꽤 크다. “3월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은퇴가 한 2년 반 정도 남아 있었을 때죠. 계속 과학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면 연봉이 대략 1억이 넘어요. 제가 2년 반을 일찍 그만둬서 명예퇴직수당이 한 5000만원 조금 안 됩니다. 임용과 관련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개기일식이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훌쩍 떠나버린 선생님의 빈자리에 대해서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교직에 있던 시절 이경훈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깨나 누렸던 선생님이었다. 친구처럼 함께했던 선생님과의 갑작스런 이별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학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마 알았을 거예요. 제가 나중에 자유로워지면 뭘 할 거다, 이런 얘기들을 자주 했어요.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 한마디 딱 던져도 눈치를 잘 채거든요. 깜짝 놀랐겠지만 ‘아, 이 선생님 같으면 그래서 은퇴했을 거야’라고 짐작을 했을 겁니다.” 백발의 이경훈씨는 철없는 소년처럼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얘기한다. 인생의 좌우명이 ‘놀자’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고 즐거운 소풍 길이었으리라. 사업가 집안에서 선생님을 꿈꾸다 이경훈씨가 만약 선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부산 지역에서 이름 높은 기업 대표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척 대부분이 국제시장에서 철물, 전기와 관련한 사업을 했고 지금도 부산 지역에서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우리 집안과 친척들 중에서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적 이경훈씨는 사업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선친이 운영하던 사업은 바로 위 누님 내외가 이어받았다고 한다. “제가 뭘 보고 컸냐면 월말이 되면 직원들에게 급여 챙겨주려고 돈 세는 모습과 부도였어요. 부도나면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잖아요. 그걸 보며 사업은 ‘내가 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물론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거예요. 하기 싫어서 그렇지(웃음).” 사업가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한 번쯤은 찾아오는 ‘고비’ 때문이다. 고비에 대처할 자신이 없어 일찌감치 사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그럼 뭘 할까 고민하다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과학에 대한 흥미도 좀 생겼고요. 선생님이란 직업이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사업도 사업이지만 대단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렇게 사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그냥 교실에만 앉아 있으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잖아요. 공부를 치열하게 했으면 성적이 더 나왔겠죠. 그럼 인생 진로가 바뀌었을 거고. 만약 그랬으면 대단히 피곤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커요.”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사회적 지위는 더 올라갔겠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놀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경남고등학교에 응시했다 떨어져서 부산사대 부속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고3 때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사업을 이어받으려면 관련되는 학과를 가라고요.” 사범대 지원을 못하고 부산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다. “1학기 다니고는 몰래 자퇴했어요. 그리고 한두 달간 입시준비 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자신의 성적과 상황을 받아들이며 진로를 결정했다. 그렇게 전공과목으로 선택한 것이 지구과학교육학과였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대학교 때 지구과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과학이 천체 사진에 빠져들게 하다 지구과학교육학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천체 사진에 눈을 뜨게 됐다.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바로 핼리 혜성 때문이었다. “1986년에 핼리 혜성이 한국에 왔었어요. 모교였던 부산사대 부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학부생들이랑 같이 핼리 혜성 찍겠다고 다대포도 가고 금정산성도 오르고 그랬죠. 차가 없어서 많은 장비들을 짊어지고 버스 타고 다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천체 사진을 찍으려면 천체망원경이 필요했다. 중등 교사를 하는 동안 학교와 정부 지원 예산을 적절하게 지원받아 천체망원경을 구입해 학교에 비치했다. “선생님들이 예산을 잘 안 써요. 돈 세고 계산하는 거 귀찮으니까요. 연말이 되면 다른 과에서 돈을 안 쓰니 돈이 남죠.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이번에 안 쓰시면 천체망원경 하나 사겠다고 말하고 장만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천체망원경 한 세트 사고 카메라도 샀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고 학생들의 천체 동아리 활동을 이끌었다. 지금도 그렇게 만난 제자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그는 천체 사진을 찍고 또 천체 사진 찍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학교 과학 선생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때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대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천체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한 매력이죠. 별에 대한, 우주에 대한. 우선 별을 좋아하지 않으면 천체 사진에 관심이 생길 수가 없죠. 과학 중에서도 아마추어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천문학밖에 없습니다. 과학 이론이나 지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고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체를 ‘아름답다, 정말 보기 좋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아마추어 천체 사진가들 중에는 천문학적인 과학 지식과는 상관없이 미적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이경훈씨는 취미로 찍기도 하지만 주로 전문 사진을 찍고 있다. 과학 정보를 얻기 위한 데이터 중심의 천체 사진은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놓는다. 이렇게 저장된 사진과 영상들은 필요할 때 과학 자료로 쓰인다. 미치지 말고 서서히 중독돼라 “경북 영천에 보현산 천문과학관이라고 있거든요. 바로 그 건너편에 제 개인 천문대를 만들려고 올 초에 땅을 좀 매입했어요. 개인 공간에서 별이나 원 없이 봐야죠.” 천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인류를 위한 봉사 같은 것. 수익을 생각해 영천에다가 개인 관측지를 만들 생각이다. 전문적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체 펜션도 생각 중이다. “별을 보러 온 사람들은 통제된 숙박을 하게 될 겁니다. 먹는 것도 통제를 받고 자는 것도 통제받고요. 별을 보기 위한 게 목적이니까. 와서 먹고 자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닌 거죠. 먹고 잘 시간에 별을 봐라, 뭐 이런(웃음).” 펜션 관리를 하는 대신 천체와 관련한 고급 정보를 주고 가이드도 해줄 생각이다. 장비가 없는 사람들한테는 장비도 대여해주고 말이다. 천체 사진이나 천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당부할 게 있단다. 갑자기 매료돼 미쳐서 달려들지 않기를 말이다. “제일 경계하는 게 미치는 거예요. 미치면 빨리 떠나요. 대체로 그래요. 너무 치열하게 하지 마라.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라고요.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2035년 9월 2일 우리 만나자! “은퇴하고 나니까 남는 건 시간, 모자란 건 돈이에요. 2019년과 2020년 칠레에서 개기일식이 있는데 한 번은 갈 거예요. 2024년에는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 바로 2035년 9월 2일. 제자들을 비롯해 강연회에서 만난 교육생들과 이날 만나자고 이미 약속했다. “이때 개기일식이 평양을 지나 동해안, 그리고 DMZ박물관을 지나갑니다. 통일이 되면 평양 가서 볼 거고, 안 되면 동해안 DMZ박물관에서 봐야죠. 2004년부터 개기일식 관련 수업을 학생들과 할 때마다 2035년 개기일식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그때마다 얘기했죠. 만나자고요.” 물론 제자들이 그 약속을 평생 간직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35년이 되면 한국의 개기일식에 관한 뉴스가 나올 테고 제자들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듯 살아날 거라 생각한다. “2035년 9월 2일 DMZ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다들 올 거예요. 근데 당일 출발하면 동해에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올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4~5일 전에 캠핑카 타고 가서 천체망원경 몇 대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애기들 데리고 오겠죠?” 이경훈씨가 팔십이 되기 전이니 정정하게 제자들과 해후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제자가 모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 2017-12-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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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이 계시면 손님이 안 들어와요
-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을 다섯 군데나 갖고 있는 올해 환갑을 지낸 K 사장은 나와 테니스 동호회원이다. 이분은 30대 초반부터 이런 피복장사를 해왔으니 이 방면에서는 알아주는 베테랑이다. 한때는 본사에서 매출을 가장 많이 올려주는 가맹점이라고 특별대우와 표창장도 받았다고 한다. 본사에서 경쟁브랜드사와 맞장 뜰 지역에는 K 사장에게 적극 지원을 전제로 점포를 개설하도록 권유하다고 하니 본사에서도 인정하는 장사꾼이다. 여러 곳의 점포를 혼자 운영할 수는 없다. 각 점포마다 팀장이라는 직책의 책임자를 지정하고 그 밑에 알바들을 고용하여 장사를 한다. 알바생중에서 경력이 있고 장사수완은 물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선발하여 팀장이라는 책임자 직책으로 키워간다. 팀장은 급여대신 매출액의 몇 %를 갖고 가는 소 사장이다. 물건을 많이 팔아도 알바들은 시간당 임금을 받아 가는 것으로 끝이지만 K사장이나 팀장은 직접적인 이익이 많이 생긴다. 반면 장사가 안 되면 팀장은 급여를 못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K사장은 가게임대료와 관리비등 직접적 손실이 생기는 구조다. K사장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직원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데 직원들은 별로 귀담아 듣는 기색이 아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팀장이 말하길 ‘사장님이 가게에 있으면 손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앞으로 여기는 나오지 마세요.’ 라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인지는 몰라도 손님에게 물건을 팔아본 기억이 없다. 손님들이 젊은 종업원하고만 이야기 하려고하지 사장이지만 늙은 자신에게는 아무도 말 붙여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가게에 가도 동태만 살피고 나와야하고 자신의 신세가 물위에 기름 뜬것처럼 점포에서 겉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P는 과장급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하여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고객을 위해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통 손님이 없다. 누가 귀 뜀을 해줬다. 늙은이 그것도 남자 늙은이 혼자 있는 부동산점포에 아무도 가지 않으니 참한 아줌마를 실장급으로 한사람 체용 하라고 했다. 결국 여성실장을 체용하고 이익금을 절반씩 나누기로 하면서 손님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길 호박은 늙으면 쓰임새가 많으나(호박죽, 호박범벅. 호박꼬지, 약초 넣고 호박다림 등) 사람은 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했다. 노인이 죽으면 동네 도서관이 하나 없어지는 것처럼 노인은 지혜의 샘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장이면서도 종업원에게 까지 배척당하고 자격 있는 공인중개사임에도 무자격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이 노인의 현실이다. 그렇다하여 세태를 원망만하고 뒷방 늙은이로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100세 시대에 70대는 너무 젊다. 영원한 현역이 좋다. 걸음을 걸어도 몸을 꼿꼿이 치켜세우고 힘차게 빨리 걸어야 한다. 몸에서 노인 냄새가 아니라 향기가 나도록 청결을 유지한다. 오늘도 힘차게 구두끈을 졸라매며 ‘아빠 출근한다’라며 크게 외치고 현관문을 나선다.
- 2017-12-1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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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퇴직 이후
-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 2017-12-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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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말고 꼭 있어야 할 것들
- 은퇴를 앞둔 사람이 제일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돈이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과연 먹고살 수 있는지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노후생활을 위해서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할까 궁금하다. 2017년 초 금융회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노후자금은 7억 내지 10억이 필요하다. 20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이렇게 큰돈이 필요한 걸까.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은퇴 후 부부가 생활하려면 월평균 200만원의 생활비가 든다. 만약 정기예금의 금리가 연 2.4%라면 10억원을 예치했을 때 월 200만원의 이자를 받는다. 금융회사에서 노후자금으로 10억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런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주장은 자사 금융상품을 팔기 위한 공포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자기 회사에 맡기면 월 이자로 그만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정해서 말하면 노후생활을 하기 위해 10억원의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적정생활비에 상응하는 월 200만원이 나올 수 있도록 현금흐름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이런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정상적으로 한 사람이라면 국민연금을 통해 월 100만원의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다. 국민연금으로 적정생활비의 반은 해결하는 셈이다. 그리고 정년이 되었을 때 규모는 크지는 않더라도 집 한 채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노후에 이 집을 주택연금에 위탁하면 또 월 100만원의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을 이용해 최소한 은퇴 후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 금융 회사의 말만 듣고 노후준비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물론 소비는 하방경직성이 있어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은퇴 전에 미리 소비 수준을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검소한 생활을 하겠다고 작정하면 살아가는 데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비싸지 않다. 가격이 비싼 것들은 생필품이 아니고 대부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들이다. 돈만 있으면 노후준비가 다 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돈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인생 2막을 살기 위해선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은 자존감을 지켜주고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다만 그 일은 남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로저스가 최근 자선단체에 180억달러를 기부했다. 우리 돈으로 20조원 가까이 되는 돈이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될 수 있다면 전 재산과 바꾸어도 좋다고 했다. 올해 그의 나이 87세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돈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인생 2막에는 자신이 꿈꾸었던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더욱 좋다. 이란 책이 있다. 오래전 이 책을 사서 캐나다로 이민 간 지인에게 선물을 했더니 교포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며 좋아했다. 이 책은 의대를 나와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던 저자가 54세에 밴쿠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캐나다 역사를 수학하고 쓴 것이다. 의사는 그가 먹고살기 위해 택한 직업이었지만 은퇴 후에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인생 2막은 바로 이런 일을 찾는 과정이다. 국내 H그룹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만돌린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지인도 있다. 그는 소기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지금은 이웃들에게 만돌린을 가르치고 있다. 간혹 서울시향과 협연하기도 한다. 그에게 직장을 중도에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물으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직장에 있었으면 지금쯤 퇴직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연주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다가 은퇴 이후에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되었다. 어느 정도의 돈, 좋아하는 일, 그리고 친구다. 얼마 전 란 책을 펴낸 김형석 교수도 무엇보다 친구의 떠남을 아쉬워했다. 나이 들어 친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빌 게이츠 이전에 세계 제일의 부자는 월마트를 창업한 샘 월튼이었다. 그는 죽을 때 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했다. 그의 주위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L회장도 그러지 않을까. 돈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죽을 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 더구나 주위에 자기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을까. 내가 먼저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후반생은 길지 않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홀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건강수명은 70세에 불과하다. 60세에 정년퇴직한다면 10년이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 전반생에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었다면 후반생은 선택이 필요한 시기다. 많은 사람을 사귀기보다 만날 때마다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인생 2막에서 어느 정도의 돈, 자신이 좋아하는 일,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친구, 이 세 가지만 갖출 수 있다면 비교적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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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해소에 좋은 ‘파크골프’
- “하루에 한 가지 취미를 즐기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외국 속담이 있지요. 누구나 현직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을 하거나 취미를 즐기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년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퇴직 이후 직장 동료나 후배·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인데, 이런 때일수록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찾아보고 경험해보려고 노력하셨겠지요. 이런 면에서 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3년 전의 일일 듯싶네요. 퇴직 후 동네 공원에 운동하러 갔다가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허리가 아파서 골프운동을 못하게 되어 파크골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참 잘한 것 같다”는 동네 형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져 그분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필자도 어깨가 좋지 않아 골프를 쉬고 있었기에 그분의 소개로 파크골프 운동협회에 가입한 이후 지금까지 즐기고 있습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골프와 아주 유사한 운동으로 공원 같은 소규모 녹지공간에서 누구와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골프게임입니다. 1983년 일본 북해도 마크베츠 강가의 진달래 코스로 7홀의 간이 파크골프장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파크골프의 시초는 1998년 진주 상락원 6홀을 시작으로, 2004년 서울 여의도에 9홀을 정식 개장한 한강 파크골프장 이래, 파크골프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그 수요에 발맞춰 파크골프장이 계속 신설되고 있습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생활체육회에서는 자치구별로 파크교실을 운영하게 하여 무료교육을 실시해왔습니다. 서울시를 예로 든다면 각 구에서 반상회 등 홍보활동을 통해 교육생을 모집, 약 2~3개월(주 1회 또는 2회), 지정된 장소(여의도 한강 파크골프장, 잠실 파크골프장 등)에서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파크골프장은 서울에 5개소를 비롯하여 전국에 총 160여 개소가 산재해 있으며, 9홀을 기준으로 Par 3홀 4개, Par 4홀 4개, Par 5홀 1개로 구성되며, 9홀을 두 번 운동하는 파크골프장이 많이 있으나, 최근 신설되는 파크골프장은 18홀, 27홀, 36홀 규모의 파크골프장으로 변화·발전되고 있습니다. Par 3홀 규모는 파크골프장의 시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티샷을 하는 티잉 그라운드로부터 홀컵까지의 거리가 대략 40~60m, Par 4홀은 70~100m, Par 5홀은 110~150m 정도의 거리이며, 페어웨이 폭은 5~10m 정도입니다. 파크골프는 3세대가 함께할 수 있으며 배우기가 쉽고 공을 치기도 쉬우며 비용도 적게 드는 반면에, 운동은 많이 되며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고 신체에 무리가 거의 없으며 시간이 적게 들어 쉽게 찾아가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지요. 수년 전 행해진 일본의 어느 대학 연구에 따르면 파크골프 운동의 효과로는, 첫째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사랑을 느낄 때 생성되는 다이돌핀이 왕성해지고, 진통효과가 있어서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으며, 둘째 온몸의 근육이 강화되어 낙상이나 골절이 예방되고, 잔디 위를 걸음으로써 허리나 무릎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셋째 함께함으로써 고독을 해소하는 데 더없이 좋은 운동입니다. 골프운동을 할 때는 운동할 사람과 골프장을 사전에 예약하는 등 신경 쓸 일이 많고 골프장을 찾아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고, 운동 후에는 허리도 쑤시고 갈비뼈와 어깨도 아파서 수시로 한의원을 찾아 치료를 해야만 했습니다. 파크골프 운동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몸이 아픈 데가 없으며, 운동량은 골프 운동이나 파크골프 운동이나 똑같이 잔디 위를 걸으며 동반자들과 대화를 하며 운동을 하니 골프 운동할 때와 거의 유사합니다. 파크골프에 입문하려면 여러 방면의 길이 있는데 첫째 파크골프 인터넷동호회에 가입하여 동호회원으로 활동하기, 둘째 협회에 가입하여 협회회원으로 활동하기, 셋째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개인 스스로 활동하기 등이 있습니다. 세상사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어느 방법을 선택하든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지요. 필자의 경우를 소개해드리면 협회에 가입하여 협회비도 내고 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정기월례대회, 연말대회 등) 또는 전국대회(전국에서 개최)에 나가기 위해 협회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협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해 자격을 취득할 수 있고, 일정 자격을 취득한 이후, 강사 또는 심판 자격에 도전하여 자격을 획득한 회원은 강사 또는 대회 심판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협회 회원들 간 상호 친목을 도모하며 생활할 수 있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입니다. 파크골프와 관련된 단체로서는 (사)대한파크골프협회, 대한파크골프연맹이 있습니다. 필자가 가입한 (사)대한파크골프협회는 2016년 5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통합 대한 체육회 정가맹 단체’로 승인을 받은 단체입니다. 파크골프를 하기 위한 용구와 복장으로서는 파크골프 클럽(채)와 공, 골프 티, 볼마커, 볼 포켓, 모자, 장갑, 골프화, 운동복 등이 필요합니다. 파크골프 클럽은 일반 골프 클럽의 퍼터와 비슷하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파크골프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가까운 소속 구청 생활체육과와 문화체육관광부 체육정책과에 문의해보시고 그래도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사)전국파크골프연합회 등에 문의하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숨 가쁘게 근무했던 현직에서 물러나 이제는 취미 하나 정도는 즐기시는 여유와 함께 제2인생을 살아가셔야 우울증 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시지 않겠어요?
- 2017-11-2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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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약 먹는 기분처럼 흥이 돋는다
- 1976년 여름밤, 진하해수욕장에서의 남녀 신입사원들을 위한 캠프파이어는 현란했다. 어둠 속에서 익명성이 확보된 100여 명의 격렬한 댄스파티는 젊음의 발산 그 자체였다. 그중 열정적이고 현란하게 춤을 추어대는 한 여직원의 실루엣이 너무 멋있어 끝까지 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해보니 순박하고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익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기자랑에서는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끼를 경쟁적으로 선보여 필자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필자도 용기를 내어 국통과 식기를 악기로 삼아 중모리 12박을 치며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목청껏 불러댔다. 개성적인 민요가락에 빠진 남녀 신입사원들의 호응으로 심사위원들은 1등상을 줬고 부상으로 큰 밥솥을 탔다. 어깨너머로 배운 민요와 북장단 필자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훨씬 전인 1954년 혹은 55년경으로 기억된다. 밤이면 외양간이 딸린 우리 집 사랑방으로 아버지 친구분들이 몰려오곤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였는데, 환담을 나누면서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말라붙은 정서를 되살리는 수단으로 북장단과 민요와 창을 배우셨다. 국악 선생님 한 분을 초청하여 우리 집에 모시면서 밤이면 민요와 북장단을 상당 시간 배우셨는데 나는 어깨너머로 익혔다. ‘궁궁딱 궁또드락 똑딱 궁궁딱 궁궁궁’, 소위 중모리 12박 장단은 밤마다 배워도 어르신들은 많이 틀리셨는데 필자는 어렵지 않게 익히고 반복하곤 했다. 1000회에 가깝게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우리 한민족! 민중의 삶이 피폐하고 삶의 뿌리가 흔들릴 때마다 건전한 일상을 회복하고 즐거운 정서를 고양하기 위해 민요를 만들고 발전시켜왔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리랑만 해도 같은 3박 세마치장단에 300종류가 넘게 만들어져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고 2012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된 것이리라. 우리 가락의 멋과 흥 대형 조선소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봄가을이면 대형 선박을 발주한 여러 나라의 해운회사들이 선박 건조 현장에 파견한 감독 혹은 검사원들을 야유회에 초청하여 한국의 산하와 문화유산을 보여주곤 했다. 동해안을 따라 울산에서 감포항으로 야유회를 가던 때 한국 민요의 장점과 특징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었다. 서양음악은 4분의 3박, 4분의 4박, 8분의 6박 등이 주종을 이루는데 한국의 민요는 훨씬 창의적이고 다양하게 민족의 정한(情恨)을 표현함을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이 많이 부르는 아리랑만 해도 지역마다 달라 그 종류가 3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는 외국 선주 감독들의 질문에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가락’ 혹은 ‘고난을 삭이고 승화시키는 가락’이라고 말해줬다. 어느 해 가을,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직장이 있던 동해안 쪽 울산에서 천리길을 차로 달려 서해안 쪽 고향 영광 집에 도착하니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와 계셨다. 이내 부친과 두 분이 북장단에 민요를 교대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민요장단을 익힐 좋은 기회여서 부친과 담임선생님이 민요를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모리와 중중모리 장단을 쳐드렸다. 북이 자꾸 발에서 빠져나가려고 해, 장단을 치며 북을 끌어안으려 애를 쓰니 두 분 모두 웃으시며 즐거워하셨다. 그 후 영화 가 나와 장님이 된 누이가 민요를 부르고 남동생이 북장단을 치며 서로 회포를 푸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민요와 가락을 익힐 기회를 더 엿보게 했다. 정년퇴직 후 달려간 민요교실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가까운 신당5동 주민센터에서 민요·장구를 가르치는 것을 알고 바로 등록했다. 남자보다 여자 회원이 대부분이어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일주일에 두 번, 2시간씩 민요와 장구를 익히기 시작했다. 노랫가락, 굿거리장단, 세마치장단 등 여러 박자들의 민요 7곡씩을 조합해 교본을 만들어 매번 반복해가니 익히기 좋았다. 2년 정도 하니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부르며 장구를 동시에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모리 12박에 맞춰 부르는 금강산타령 등은 소리를 올리고 내리고 감고 꺾는 내용들이 악보에 없어 따라 하기 힘들었고 가사 또한 많은 분량이라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장구 치는 것은 북장단 익힌 경험이 도움이 되어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수요일과 금요일 2시간씩 민요·장구 배우는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 민요·장구 모임도 결성해볼 테다 경기도 용인으로 생활의 터를 옮겨 얼마 지나지 않아 집 가까운 곳에 노인복지관이 들어섰다. 약 60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민요·장구가 포함되어 있어 기뻤다.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장점들이 다름을 새삼 느꼈다. 빠른 자진(잦은)모리장단의 경복궁타령과 잦은 뱃노래는 매우 흥겨웠고 굿거리장단 4박에 실린 창부타령의 가사들은 민족의 애환을 다양하게 담고 표출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60개 프로그램 단체공연을 할 때 10여 명이 무대에 나가 배운 민요들을 부르며 흥을 돋우어줬다. 청중석에서 나와 어깨춤을 추는 관중도 있어 민요의 힘과 전파력을 느낄 수 있었다. 민요·장구도 좋은 취미로 익히고 만들려면 역시 지속성과 성실성이 필요하다. 집 가까운 노인복지관에서 경제논리로 폐강이 된 후 집에서 좀 멀지만 다른 지역의 주민센터를 찾았다. 이곳에선 금요일 초급반과 월요일 중급반으로 2시간씩 운영되어 좋았고 선생님은 또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었다. 특히 굿거리장단의 다양성을 익히도록 매번 반복하여 민요를 부르고 장구를 힘껏 쳐대면 일주일의 피로가 풀리며 심신 건강을 위한 보약을 먹은 기분이 된다. 1996년 부친을 위한 칠순잔치 때 국악인을 불러 부친과 고향 친구분들을 즐겁게 해드렸다. 내년 필자의 칠순 날이 오면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불러 노래와 한민족의 영원한 고향노래인 민요들을 같이 불러볼까? 이를 위해 작년 말에 어떤 모임에서 불렀던 중모리장단의 ‘한오백년’ 과 처가 마을에 가서 담 쌓는 봉사를 하면서 목청 돋워 불렀던 ‘창부타령’을 즐겁게 다듬어 가보자! 그리고 전 직장동료들 취미모임인 산악회, 역사문화탐방회, 바둑회, 독서문학회에 이어 민요장구회 결성도 건의해보자.
- 2017-11-1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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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향에 취해 나를 들여다본다
- 필자는 3년 전에 은퇴를 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게 된 것은 은퇴 준비 없이 살아가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되면서부터다. 필자도 쉼 없이 달려온 직장생활 43년 만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깨알 같은 시간들을 뒤로 한 채 텅 빈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허전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허둥대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녕 자신은 잊어버리고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사랑방은 필자의 큰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서당(書堂)이었다. 밤이 되면 사랑방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틈틈이 서당으로 불러 천자문을 읽고 쓰기를 가르쳐주셨던 큰아버님의 배려로 제법 붓 잡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께 사사 정년퇴직 후에는 그동안 잊고 살아온 서예를 다시 해보겠다는 희망의 불씨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천자문 읽는 소리와 아련한 묵향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서예 대가 김상용 선생님을 만나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연마하던 필자에게 선생님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고 글쓰기 이전에 마음가짐의 정갈함을 늘 강조했다. 어느 날 오후, 종로3가에 있는 서실(書室)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 개인지도를 받는 곳이었다. 필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스승님을 위해 가끔씩 간식을 준비해 찾아가곤 했다. 그날도 간식거리를 준비해 서실을 찾았는데 마침 후배 문하생이 지도를 받고 있었다. 느닷없이 필자가 등장하자 그날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신 선생님께서는 막걸리 한잔 하자며 극구 붙드셨다. 평소에도 선생님과 가끔씩 들르는 종로3가 단골 녹두빈대떡 집에서 스승과 제자가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졌다. 선생님은 값비싼 양주에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해도 이렇게 조촐한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막걸리 한 잔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과 호젓한 빈대떡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한잔의 행복!’으로 담소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린 시절 시린 손 호호 불며 주전자 들고 막걸리 받으러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고사리손에 주전자 들고 고개를 넘던 기억은 아버지와 관련한 소중한 추억 중 하나다. 필자는 서예에 입문하면서 선생님의 지도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면서 붓글씨를 배워나갔다. 다음 시간까지 해갈 과제물을 숙제로 받아오는 날이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몇 번이고 쓰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그중 제일 잘 썼다고 생각되는 한 점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서실로 달려가면 선생님은 가차없이 따끔한 지적을 하셨다. 어쩌랴! 다음번 과제물을 받아와 선생님께서 지적했던 부분을 염두에 두고 또다시 붓과 씨름했다. 묵향에 취해 어질어질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했다. 선배 문우들과 함께한 전시회 2010년 초, 우연한 기회에 중국 산둥 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린이(臨沂) 시를 여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린이 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왕희지의 고택을 방문했다.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 성 린이 현에서 태어났으며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서예 공부를 하던 중 돌아보게 된 왕희지의 발자취는 필자를 더욱 분발하도록 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던 2013년 11월의 어느 날, 인사동 모 전시회관에서 그동안 틈틈이 갈고닦았던 서예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턱없이 부족한 필력이었지만 까마득히 높은 선배 문우들 틈에서 몇 점을 출품하게 되었다. 비록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선배 문우님들 눈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자 겁 없이 전시회에 명함을 내밀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잘 쓴 사람은 없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자 해서였다. 쉼 없는 도전정신은 내면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다. ‘정년퇴직’은 은퇴자의 무덤이 아니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반전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니어들이여,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자!”
- 2017-11-09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