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칠천교를 건너다가 소나기를 맞았다. 칠천량(漆川梁) 해전 기념관을 둘러볼 때는 청명한 봄날이었다. 버스 기다리기 지루해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리 한가운데 이르러서는 소나기였다. 세찬 바람까지 몰아쳐 금세 신발과 바지 자락이 젖었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 치욕의 날도 이런 날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년 난리 이래 적선이 얼씬도 못하던 부산 서쪽 바다에 150여 척 전선(戰船)이 모조리 수장된 참담한 패전의 날도 비바람이 거세었다는 기록을 읽은 탓이리라.
기념관에서 관람한 영상물에는 수군이 곤히 잠든 한밤중 왜군이 작은 배를 몰고 와 판옥선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모르고 자던 조선 수군이 미처 응전 태세를 갖추지 못해 속절없이 왜적의 창칼과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패주해온 군대가 적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자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장수 한 사람 잘못 쓰면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교훈을 칠천량 패전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주말에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유년 7월 16일 자에 칠천량 전투 상황 개략이 나와 있다. 격군으로 출전했던 세남(世男)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알몸으로 찾아와 전한 참상이었다. 7월 4일(음력) 한산도 통제영에서 출진해 칠천도와 옥포를 거쳐 7일 부산 다대포에 정박한 왜선 8척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왜군이 뭍으로 도망쳐 빈 배들을 불 지르고 절영도 바깥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대마도 쪽에서 적선 1000여 척이 건너오기에 싸우려 했더니 적이 회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판옥선 6척은 서생포 앞바다로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다 왜적에게 거의 다 살육당하고 자신은 숲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왔다는 내용이다.
늑장을 부리다가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곤장을 맞고 부산포에 출진한 통제사 원균은 제대로 싸워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군 함대가 1000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였음에 틀림없다. 병력과 군량, 병참물자 등을 싣고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수송선단이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선들은 흩어져 달아나기만 했다. 부산 앞바다는 섬이 없어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좀 멀리 나가면 파도가 높은 물마루[水宗]다. 바람은 거칠고 물결은 높다. 왜선들은 접근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의 힘을 빼려는 것 같았다.
간신히 선단을 수습하여 후퇴 길에 들어선 원균은 가까스로 가덕도에 기항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섬에 닿자마자 병사들은 다투어 내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
칠천도로 가는 중에 거제도 북단 영등포에 닿아 밤을 보내려 했으나 적선 500여 척이 추격해왔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지가 거제도 서북쪽 칠천도였다. 본섬과 어깨를 겯고 있는 이 섬에는 아늑한 포구가 많아 선단을 숨기기 좋았다. 칠천도 도착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여러 포구에 전선을 분산 정박시키고 원균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후퇴를 제안했다. “용기백배할 때와 겁낼 때를 구분하는 것이 병가의 계책인데 지금은 싸움을 회피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원균은 이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쉬고만 싶었던 것일까.
그대로 주저앉아 뭉개자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가덕도에 부하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죄를 문책한 것이었다. 원균은 부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드러누었다. 이 모습을 본 장수들과 병졸들이 통제사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배설은 몰래 제 부하들을 이끌고 한산도로 튀어버렸다. 다른 부대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화 에서 배설은 비겁한 도망자로 묘사되었지만, 그가 인솔해간 전선 12척은 뒷날 이순신의 수군재건에 밑천이 되었던 유명한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그 배들이다.
칠천량 해전의 수치
운명의 날은 16일 새벽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지만 어떻게 번을 섰기에 소형 적선 5~6척이 밤중에 수군선단 정박지에 잠입하는 것을 몰랐을까. 추격을 당하는 패주 길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경계하는 게 마땅할진대, 적병이 판옥선 밑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도록 모르고 자기만 한 것인가!
원균 함대 곳곳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놀라 일어난 수군들은 미처 전투 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허둥거리다가 왜군의 총격과 창칼에 쓰러져갔다. 불붙은 판옥선들은 맥없이 침몰했다. 적은 3중 4중으로 조선 수군 함대를 둘러싸고 소총과 포화를 쏘아댔다. 적은 포구에 갇힌 조선 판옥선에 붙어 자기 배 돛대를 누이고 사다리처럼 타고 건너와 맹수처럼 날뛰었다.
단병접전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사무라이들이었다. 일본 수군의 전법은 적선에 올라 칼과 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일대일로 벌이는 단거리 접전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
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金軾)의 장계(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김식은 시종 통제사와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임진년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수많은 패전에 절치부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 전력을 크게 강화해 떼 지어 건너보냈다. 해전의 명장이라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칠천도 남쪽으로 빠져나가 허겁지겁 서북쪽으로 노 저어 갔다.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해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수하 병사에게 업히다시피 뭍에 오른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그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추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는데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원균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던 사실이 뒷날 조사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 전 재산인 전함 150여 척과 1만 안팎의 장병 목숨을 수장시킨 장수가 천명을 다 살았다는 사실은 칠천량 해전의 또 다른 수치다.
원균의 무능이 패인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선 수군이 왜 그런 치욕을 당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추상같던 기율의 해이와 사기 저하라는 게 임진왜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상승 조선 수군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누렸던 수군 장졸들은 후임 통제사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 옥에 갇히게 한 세력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수군을 지휘해 전투를 수행할 실력도 지략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졸들이 그와 따로 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병사들 사이에는 “이런 군대로는 왜적을 이길 수 없어!”, “적을 만나면 36계 줄행랑이 상책이야” 하는 말들이 돌았을 정도다.
거기에다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 더욱 영이 서지 않았다. 2년이 넘도록 수군을 떠나 있었던 원균은 전투가 두렵기도 했다. 도원수에게서 득달같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날아오는데 따르지 않는 장졸을 이끌고 나가기가 무서웠다.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여 배후를 튼튼히 한 뒤에 수군이 부산을 치는 수륙(水陸) 병진론을 거듭 건의하면서 날짜를 끌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을 거느린 삼도수군통제사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명령을 듣지 않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참모총장을 곤장으로 다스린 사례가 있을지 모르겠다. 육군 책임자인 도원수 권율이 수군 장수를 징치한 이상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권율은 또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6월 안골포 출동에 직접 앞장서지 않고 수하 장수들만 보냈다는 이유였다. 합천 초계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은 사천 곤양까지 내려가 원균을 불러올렸다. 매 맞는 통제사는 수하 장졸들 사이에 웃음거리일 뿐 존경과 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수하 장졸의 사기가 어땠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조정의 전투 수행 능력 부족도 큰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전투 지휘자 원균의 무능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칠천도로 가지 말고 좀 더 항해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갔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칠천도로 갔더라도 경계를 철저히 폈으면 그런 치욕은 면했을 것이다. 쫓기는 군대가 경계를 소홀히 해 적선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면 전투의 ABC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둔지 주변뿐 아니라 물길 곳곳에 척후를 박아 적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 한 이순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능이고 태만이고 무책임이었다.
패전의 결과는 수군에게만 참담한 것이 아니었다. 남해바다를 마음껏 휘젓게 된 왜적은 마음 놓고 전라도 땅을 유린할 수 있었다. 도망친 배설이 한산도 본영에 남은 군량과 병기들을 바다에 처넣고 불을 지르고 도망친 뒤 한산도와 전라우수영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남해와 순천을 차례로 손에 넣은 적은 전주를 목적으로 두 갈래 협공을 시작했다. 남원성을 지키던 군민이 모두 참살당하고, 전주성도 허무하게 떨어졌다. 두 성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삼남의 백성들은 조정의 청야(淸野)작전에 삶의 뿌리가 뽑혀나갔다. 청야란 왜적에게 이용되지 못하도록 집과 경작지를 태워 청소하듯 깨끗이 들판을 비우는 것이다. 도체찰사가 경상·전라·충청 삼도에 파견되어 제 손으로 제 집과 곡식을 태우지 않는다고 백성들 목을 쳤다. 왜적에게 당하고 제나라 조정에 당한 중첩된 비극이었다.
원균이 상륙한 장소는 고성 ‘추원포’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춘원포’의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 안정 국가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곳이다. 통영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그곳에 갯마을은 흔적도 없었다. 바닷가에 높다란 조선소 크레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런 데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조선소와 협력 업체들이 타운을 이룬 산업단지가 춘원포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택시를 내려 나이 지긋한 현지 주민에게 물으니 “어릴 때 저 너머에 목 없는 장균 묘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포구 뒤편 야산을 가리켰다. 거기서 원균이 최후를 마쳤다는 기록에 근거한 설화일 것이다. “옛날부터 이 포구마을을 춘원개라 불렀다”는 주민들 말에서 춘원포 위치를 믿게 되었다.
왜적의 소굴이었던 안골포도 거기서 멀지 않다. 육지가 바다로 길게 뻗어 나온 곶이다. 그 끄트머리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에 안골포 왜성이 있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택시를 내렸더니 바로 성터 입구였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 나무계단 길을 오르자, 무너진 성터 위에서 아낙네 둘이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그 너머로 부산 신항 크레인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 아래에서는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성터에서는 가덕도와 거제도가 보인다 했지만 초행자 눈에는 구별이 안 갔다. 남쪽 오른편 어름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거제도가 아닐까 짐작만 해보았다. 다만 거제도 가덕도 앞바다를 감제할 수 있는 작전 요충지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칠천도에 기항한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의 출진 기지가 바로 그곳이었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칠천도도 이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다. 2000년 거제도와 연결된 다리가 생겨 연륙이 되었다. 통영과 연결된 거제대교, 부산과 이어지는 거가대교를 건너 본섬 서북쪽으로 달려가면 바로 칠천도다.
본섬 서북단 칠전삼거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잠시 벚꽃 길을 따라 걸으니 이내 칠천교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크루즈 관광선 터미널이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횟집 숙박업소들이 고객을 부르고 있다. 다리에서 20여 분 더 가면 2013년에 문을 연 칠천해전기념관이다.
거제도 본섬을 마주 보고 걷는 칠천도 바닷길에는 온갖 봄꽃이 다투어 피고, 호수 같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어약연비(魚躍鳶飛)의 바다가 그런 참극의 현장이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하리오!
근래 경남도에서 거북선 찾기 운동을 벌였다. 칠천량 바다에 가라앉았을 잔해를 건져내 거북선의 실체를 마주해보자는 취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10억 가까운 비용과 3년이 넘게 걸린 그 사업의 결실이 보도된 일은 없다.
마치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강은 사람들이 쉬이 찾지 않는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길을 내어 고고히 흘러가는 강이다. 한 시간 동안 윤석화와 인터뷰를 끝내고 든 느낌이다. 42년간 활동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배우로서,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늦깎이 엄마로서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그런 엄격함이 빚은 솔직한 결론들을 청명한 울림으로 던져줬다. 배우와 모성에 대해 그리고 고난을 감히 축복이라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윤석화는 인터뷰하는 동안 쑥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리고 아직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외다.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인을 꼽으라면 항상 첫 손가락에 들어갈 그녀가 사진에 익숙하지 않다니?
“연극배우란 것이 늘 배역에 대해 면밀히 연구한 후 제 마음속에서 새로이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저한테 그 인물을 오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어찌 보면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 제가 처음부터 꿈이 모델이었다거나 어찌어찌하다 모델이 됐다면 이렇게 쑥스러울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미련한 작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게 굉장히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웃음), 아주 쑥스러워요 정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소녀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 윤석화의 어린 시절 꿈은 다름 아닌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꿈도 어느 정도 이룬 그녀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지 올해 42년. 불꽃같은 ‘돌꽃’ 윤석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론 저에겐 소망이 있죠. ‘무대에서 참 아름다운 배우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저 자신은 속이기 힘들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선택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왔어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늘 똑같아요. 어떤 때는 제가 참 괜찮은 배우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 되나 싶고.”
그녀의 토로에는 살아온 시간에서 증명되는 모종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여전히 현장에서 뛰는 배우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녀는 ‘속도야 달라지겠지만 은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배우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좋을 수는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아직도 배우 윤석화에게 하고 싶은 역할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제는 한계가 있는 것도 인정을 해야겠죠. 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에요.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저의 식지 않은 열정을 얘기하죠.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꿈꾸게 되면, 예를 들어 열 작품을 꿈꾸면 최소한 다섯은 현실로 이뤄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가 가진 고민은 허심탄회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와 그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지만 연극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예전에 비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환경과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죠. 십 년 전만 해도 작품을 할 때 ‘거침없이 하이킥’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 조금 겁도 나고 두렵고…. 나이가 드니 계획을 세우면 젊었을 때는 이삼 일 정도면 실행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이 되어야 움직이는 것 같아요(웃음). 이러다 혹시라도 직무유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죠. 제가 생각하는 최선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음 스텝에 많은 걸림돌이 될 테고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삶의 가치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윤석화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삶에 대한 깔끔한 태도는 나이가 주는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나이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지혜가 발휘되는 거겠지요. 내 앞의 현실을 수용해야지, ‘이래도 할 수 있어’라고 우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추해보일 수도 있고, 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나이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수용을 추구하는 본인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고집한다. 그녀의 꿈은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고, 지금 기자 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충실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보톡스를 안 맞는 거죠. 배우는 자기를 관리하는 게 의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면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예전부터 하는 얘기지만 나이든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책임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 굉장히 두렵죠. 저도 그것에 대해선 자신 없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냥 잘하려고 노력해요. 가능하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고 내게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거죠. 그렇게 나이 들다 보면 향기가 나지 않을까요(웃음)?”
배우로서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깨닫다
윤석화는 연극배우로서 살아왔고 연극배우로서 세상을 익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연극이다.
“제가 연극배우로서 삶을 배우고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관점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TV나 영화나 음반 제의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유명해지는 게 싫어서 연극을 했어요. 연극을 해보니까 이건 유명해지지도 않고,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 같았죠.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연극이 무엇인지 깨달을 무렵 내가 평생을 걸어도 좋을 나의 업이다 싶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을 갔죠.”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언론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꾸밈조차 싫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가 없었다면 좀 더 자유롭게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을지도 몰라요. 늘 주목을 받는다는 게 제게는 자유를 뺏기는 기분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도 넘고 저 강도 건너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스타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백 명이 날 좋아한다고 쳐요. 그중 구십 명은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이고 열 명은 정말 윤석화를 사랑하는 팬으로 남을 수 있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찌됐든 인기가 있다는 것, 윤석화를 보러 그 연극을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인기가 있었으니 그만큼 연기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감사해요.”
연극에 뼈를 묻고 살아온 윤석화가 변신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최근 SBS 드라마 에 출연했다.
“드라마를 무조건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좋은 드라마가 있으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워낙 안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됐죠. 물론 제 본분은 연극이니 선배로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고집들에서 좀 자유로워졌어요. 뭐든 때가 있는 거겠죠(웃음).”
어머니는 위대하다
연극인으로서의 삶만큼이나 윤석화의 삶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늦깎이 엄마로서의 삶이다. ‘가슴으로 낳은’ 수민(아들 14세), 수화(딸 10세)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어머니는 정말 희생이에요. 육아를 해보니 힘들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면 어떤 이유라 해도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아는 게 중요하죠.”
‘제일 부러운 사람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있어서 급할 때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그간 겪었던 육아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의 경우 가장 힘든 것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죠. 공부를 하라고 해야 하는지 놀라고 해야 하는지, 야단을 쳐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정말 ‘뇌가 흘러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그녀는 어머니가 가정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단적으로 말했다. 가정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내심도 많아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되고 단호함도 있어야 해요. 그게 여자예요. 남자는 그게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결과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요.”
국내 입양 위한 일곱 번째 자선 콘서트
아이에게서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생각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윤석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그렇게 예뻤던 애가 지금은 내 아들이 맞나 싶고…. 한편으론 애가 컸구나 싶어 뿌듯하지만 ‘잘못 크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돼요. 말하는 것만 봐도 ‘으유~!’ 이러고 싶을 때 있죠. 그러나 ‘엄마 말 들어봐~’하며 인내심으로 달랩니다. 이론은 쉽죠. 저는 말하는 게 굉장히 직설적인데 아이한테는 그럴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기로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은 열악한 국내 입양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그녀는 국내 입양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바자회를 지금까지 여섯 차례 열었다. 2015년에는 이틀 동안 가수 이문세, 배우 황정민과 박건형, 기타리스트 함춘호 등 그녀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이 무대에 나와 그녀를 도와줬다. 올해는 하루 더 늘려서 5월 5, 6, 7일 3일 동안 동숭동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일곱 번째 콘서트와 자선 바자회를 연다. 그녀는 2003년부터 국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위해 자선 콘서트를 계속 열어왔으며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의연하게, 담대하게, 온유하게
“제가 오늘 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에요. 기쁘게 죽을 거예요. 저 자신을 위해선 할 만큼 했고 누릴 만큼 누렸어요. 누군가는 가소롭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그릇이 그러니까요. 물론 제 신념은 ‘죽을 때까지 결코 죽지 않겠다’예요. 미리 죽지 않고 그래서 그냥 인생을 다 사는 여자(웃음).”
시원시원한 목소리 톤만큼이나 인생을 논하는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아직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왜 없겠어요, 많죠.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거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뭘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것 자체가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걸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길을 가야겠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저는 저답게 살기를 바라요”라는 말에는 윤석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침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멋있게, 누구처럼 돈 많게, 누구처럼 가난하게도 아니고 저다운 저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저답게 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 넘게 살면서 약간의 후회는 있죠. 부족하고 거칠었던 철없던 날들이었지만 다시 다잡고 살았어요. 그래도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고 담대하고 온유하게 산 것이 바로 저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조금 더 깊어지면 예쁜 할머니가 되겠죠(웃음).”
엄마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수많은 동년배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20대에는 결혼과 출산, 30대와 40대는 지난한 육아, 50대에는 고장 난 몸과 싸웠다. 그리고 지금 엄마의 나이 앞자리는 6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수많은 58년 개띠처럼 형형색색의 아웃도어를 장례식장, 예식장 빼고 거의 모든 자리에 입고 나간다. 뒷모습만으로는 우리 엄마와 남의 엄마를 구분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렇다고 엄마의 지금 패션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는 이름 석 자만큼이나 옅어져버린 ‘자신’.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다’라는 말을 패션을 전공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남들에게 말했다. 엄마의 이름 석 자와 엄마라는 육체와 정신을 쏙쏙 빼먹고 자란 나는 할 말이 없다. 지금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무작정, “엄마 그 오렌지색 점퍼는 정말 아니지 않아?”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 엄마와 수많은 남의 엄마에게 패션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자신을 찾는 법에 관한 지도를 내밀어본다. 우선 이 지도의 가이드로 적당한 4명의 인물을 꼽아봤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h98008272@gmail.com
◇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인생 철학이 녹아 있는 옷을 입어라"
“옷을 잘 입은 사람은 옷보다는 그 사람이 기억나요.” 몇 해 전 라는 영화가 개봉될 즈음 실제 주인공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노라노는 1947년 국내에서 출발한 두 번째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유학을 간 신여성으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6년 한국에서 제일 먼저 패션쇼를 열었으며, 기성복이란 제도를 프랑스보다 앞서 만들었다. 인터뷰를 했던 그때 이미 노라노는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노라노는 심플한 디자인의 캘빈클라인 시계를 차고, 어깨선에 딱 맞는 벨벳 재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커트 머리에 보라색 아이섀도를 바른 모습에서는 바지런함이 느껴졌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가 아니라 참 노라노답다는 생각이 인터뷰 말미에 들었다. 인생을 일부러 ‘루틴’하게 만들었다는 노라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혹시라도 더 일찍 깨면 5시가 될 때까지 누워 있는다) 45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똑같은 식단의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동네 공원을 45분 걷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9시까지 출근한다. 퇴근은 당연히 6시, 칼 같이 맞춘다. “시계나 다름 없죠. 세상에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생활을 이렇게 루틴하게 만들어놓으면 쓸데 없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죠.” 그녀의 철학은 패션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스무 살부터 일을 했어요. 직장 여성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생활이 단순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패션도, 생활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머리를 짧게 유지하는 것도, ‘시그니처 룩’이라고 불릴 만큼 똑같은 스타일로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이런 패션철학 때문이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는 말에 노라노만큼 적당한 사례는 없다. 멋지게 입고, 트렌디하게 입는 것이 답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철학이 스타일에 녹아 있으면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 사업가 겸 스타일리스트 린다 로딘 차라리 ‘안티’ 안티에이징
“난 60대가 될 때까지 늙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종종 젊은 사람들 위주로만 돌아가는 문화 때문에 힘들기도 해요.” 곧 일흔을 바라보는 린다 로딘은 여전히 주말이면 빈티지 시장을 돌아다니고, 종종 ‘중고장터’를 통해 자신의 옷과 탐나는 남의 옷을 교환해서 입는다. ‘패션은 여자들의 창의력을 강물과 같이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돌파구’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래서 가끔 짧은 스커트에 타이츠를 신고(자신의 다리가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롤업 청바지를 애용한다. 부엉이처럼 큰 컬러 안경과 새빨간 립스틱도 즐긴다. 물론 한때 그녀도 하얗게 센 머리를 염색할까, 주름진 이마에 필러를 맞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필러를 맞고 마주한 제 얼굴은 제가 아니었어요. 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가 보일 뿐.” 그녀는 차라리 ‘안티’ 안티 에이징을 외쳤다. 젊어 보이는 것에 포커싱되는 중년의 패션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의외로 젊은이들만의 소유물인 줄 알았던 ‘신선함’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유니클로의 생지 데님을 툭툭 걷어 입고, 바삭한 화이트 셔츠에 빨간 플랫 슈즈를 신은 린다 로딘의 패션에서는 나이라는 코드가 읽히지 않는다. 그저, 린다 로딘이라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무언가를 기억하자
자신을 찾는 일에 불특정 다수, 즉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또 다른 정계 인물이 있다. 얼굴보다 구두로 첫 취임기사를 장식한 영국의 총리 테리사 메이. 그녀의 패션은 한마디로 멋지다. 20대 여자들의 트렌디함과 중년 여성의 묵직함, 워킹 우먼의 단호함이 한 벌에 담겨 있다. 한정판으로 출시된 구두를 사고(입술 모양이 그려진 앙증맞은 플랫슈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사이하이 부츠를 신는 과감한 여자다. “저는 늘 여성들에게 ‘고정관념에 맞추려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이 되라’고 말해요. 만일 당신 개성이 옷 또는 신발을 통해 보인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 바람에 테리사 메이의 연관 검색어에는 ‘슈즈 마니아’가 뜬다. 우리 엄마는 보라색을 좋아했고, 벨벳으로 만든 무언가에 항상 반했다. 하지만 언제나 손에 들린 건 물세탁이 가능한 실용적인 옷이었다. 테리사 메이에게는 구두 쇼핑이 취미활동이자, 스트레스를 푸는 창고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를 찾는 놀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무언가를 떠올리자. 엄마에게 보라색 벨벳 슈즈가 필요한 것처럼.
◇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나’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자
흰머리에 쇼트커트, 수영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 조금의 경사도 느껴지지 않는 빳빳한 허리. 당당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이 프랑스 여자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다. 방탄 가공을 거쳤을 법한 그 단단한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최초’로 IMF 총재 자리에 앉았다. 줄곧 ‘남초’ 직장에서만 생활해온 그녀는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서 총을 잡기보다는 립스틱을 잡았다. 무채색의 팬츠 슈트로 넥타이맨들과 경쟁하는 대신 핑크색 스커트로 여자다움의 힘을 강조했다.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 좀 하시죠”라는 말을 자주 해 ‘아메리칸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행동파인 그녀 앞에서, “일이 힘들어서, 이게 편하니깐”이라는 말로 유니폼 같은 무채색 패션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워킹 우먼들은 용납이 안 된다. 그녀는 수년간 IMF 총재 역할을 해오며 능력마저도 스타일리시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여전히 스카프 쇼핑을 즐기고 핑크색 트위드 슈트를 입고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60대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그녀의 지금 룩은 뚝심 있게 지켜온 자기 자신 그 자체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남성지 를 거쳐, 와 의 패션 에디터로 10여 년간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에디터로 패션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싱글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지난 8월 말부터 매주 금요일 모여 난타 연습과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 강남시니어플라자 대표 싱글 모임인 회원 중 8명. 11월 말에 있을 플라자 내 교육 프로그램 발표회에서 난타 공연을 할 예정이다. 싱글들의 모임이라 그럴까? 생기가 넘친다. 왠지 모를 자연스러움에 나이까지 잊게 만든다. 그렇지만 속내는 알 수 없다. 탐색을 하고 있는지,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말이다. 격 있는 싱글들이 모인 김에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당신들의 속내, 지금 연애가 하고 싶습니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속사정
난타 소모임의 반장격인 이복자씨를 제일 먼저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어봤다. 초등교사로 은퇴한 이복자씨는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한국무용을 공부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도 무용학교 입시 안무가로 젊은 시절 제법 잘나갔다. 스포츠 댄서로서도 한 획을 그었다고 자부하는 이복자씨. 그랬던 그녀는 재작년 황혼이혼을 했다. 작년 9월부터는 싱글의 몸으로 봄빛클럽 회원이 됐다. 지금은 나름의 재능을 살려 회원들에게 난타와 댄스스포츠를 가르친다.
이복자 황혼이혼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남편의 술버릇 때문이었죠. 젊을 때는 교사라서 못하고, 아들 결혼식에 빈자리를 만들기 싫었습니다. 결국 이혼했어요.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호주로 떠났는데 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혼자 있다 보니 외로웠어요. 자존심상 주위에 혼자된 사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다가 봄빛클럽을 알게 됐습니다. 법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상담도 받은 뒤 회원이 되면 싱글들끼리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건전하고 나 또한 싱글이니까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봄빛클럽 안에 최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말 그대로 탐색 중이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
이복자 남자 경제력은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연금으로도 두 명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마음이 맞고 편한 상대를 만나고 싶어요. 사실 제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분에게 당신이 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뭐 어때요? 여자라도 마음에 들면 말하는 게 맞죠. 말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웃음)?
하나, 둘 회원들이 모이고 왁자하게 웃음꽃이 폈다
난타 모임은 발표회를 위해 급조된 모임이다. 이곳에 모인 회원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매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진 촬영을 위해 테이블 주위에 회원들이 오순도순 모였다. 봄빛클럽 단장이었던 이활주씨와 난타를 가르치는 이복자씨, 이영조·최연서·현정원·김순섬씨. 그리고 이복자씨의 댄스스포츠 파트너인 박노용씨도 나오지 않은 회원을 대신에 자리를 채웠다. 이날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가정이 있는 남자다.
본격적으로 싱글 남녀와 대화를 열다
싱글이신데 젊었을 때와 지금 이성을 만나는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영조젊을 때는 좀 화끈하잖아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만남은 하루하루 만나면서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서로가 함께 있으면서 취미를 공유하고 같이 모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복자 모여서 떠들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외로움도 해소하는 거죠.
최연서 젊었을 때의 연애는 쓰나미 같은 것이고, 지금의 연애는 밀물 같아요. 이 나이에는 쓰나미처럼 사랑할 수 없어요.
Q.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최연서 우리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어야 맞잖아요? 다른 사람 보면 또 바뀌고 그래야죠. 우린 싱글이니까요.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만 좋아할 수가 있어요(웃음)?
이복자 취미활동을 하다 보면 마음이 맞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갖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Q. 주로 어디서 만나시나요?
이영조사람이 그리울 때 저는 주로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합니다. 집에 볼 만한 영화도 많고, 노래방 기계도 있어요. 그런데 전부 다 모여 먹고 마시다 보면 같이 영화 보고, 노래 부를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음에 영화 볼 때는 몇 사람만 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때 갑자기 최연서씨가 이영조씨와 이복자씨가 함께 영화 을 봤다는 얘기를 꺼낸다. 야한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괜찮았냐며 소녀처럼 묻는다.
이복자 문제는 그런 거를 같이 봐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는 거 아냐? 이제 완전히 고목이 됐나봐. 지금 연서씨가 얘기하니까 그런 게 있었나보다 하지. 이제는 그런 장면을 봐도 감정이 막 생기고 그런 게 없더라고요.
Q.댄스스포츠 같은 거 하다 보면 찌릿한 느낌 없나요?
최연서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겠죠. 그런데 친구 사이로 생각하는데다가 배우는 데 집중해서 그런지 잘 몰라요, 그런 거.
이복자 지금은 댄스스포츠를 배우고들 있으니까 배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라도 더 배워서 안 잃어버리려고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잘하나 못하나 그거에만 신경을 쓰지 남녀라는 느낌이 없어요.
이영조 지금 자꾸 내용을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거 아닌가요?
수줍어서인지 즐거워서인지 다들 박장대소한다. 격조 있는 싱글들이 만났으니 뭔가 있을 거 같다고 느꼈다.
이활주 우리가 만나봐야 한 달에 번개까지 해서 한두 번 만나요. 좀 얘기하다가 식사하고 노래방 가고,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쁘니까 따로 시간 내서 한잔 더, 혹은 차라도 한잔 이런 걸 못 해요. 지금 그것을 파악하는 중이지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서로를 많이 알게 됐어요.
Q.솔직히 말해보셔요, 다들 연애는 하고 싶으세요?
최연서 좋은 친구는 만들고 싶죠.
김순섬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Q. 얘기가 잘 통할 때 연애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으신가요?
이영조 희망사항이죠. 문제는 생각하는 이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서 혹시 남녀가 불이 붙으면 이 모임에 나올까요(웃음)? 관둡니다. 그건 분명해요.
이복자 자기들끼리 만나야 하니까.
이영조 맞아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둘이 만나니까 안 나오더라고요.
Q. 혹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헤어졌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김순섬 다시 들어오지는 않겠지. 자존심이 있는데 헤어졌다고 들어오나?
이활주 사실 예를 들어 “나 누구하고 만난다”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존심이고 뭐고 없어요. 시치미 떼고 다시 오면 오는 거죠.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모임 회원 중 많게는 몇 사람 혹은 한두 사람은 서로 신상 탐색을 위해 밖에서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Q. 이 모임은 싱글 모임인데 다른 모임과 차이가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이복자 제 친구들 중에는 싱글이 많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하고 모임을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바삐 집으로 가요. 남편 밥 챙겨주러요. 집안일이 그렇게 딱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같은 싱글들은 집에 빨리 가야 하는 부담이 없어서 좋아요. 여기는 싱글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위화감은 없어요.
Q. 싱글 모임을 하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요?
김순섬 다른 내 친구들은 싱글이 아니니까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못 만나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전화하면 만날 수 있어요. 요즘 다른 친구들한테 자랑해요. 너희들 없어도 요새 나는 잘 놀고 있다고요(웃음).
Q. 같이 갔던 장소 중에 좋았거나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나요?
현정원 춘천 갔을 때도 재밌었고, 대하도 먹으러 갔었어요. 11월에는 충남 태안에 천리포수목원으로 2박 3일 계획하고 있어요. 봄빛클럽에서 희망하는 사람들만 갑니다.
솔직하지 못한 싱글 남녀들의 머뭇거림에 이날 객원 멤버로 참여한 무용실 원장 박노용씨가 한마디한다.
박노용 너무 생각이 깊어요. 만나는 거 자체는 흥미롭고 좋은데 열지 못하는 거죠. 가정이 있는 제가 느끼기에도 몇 가지 장단점이 느껴집니다. 자유로운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좋아 보이기도 하네요. 각자에게 주는 감정이 참 세밀합니다. 그런데 젊음이 떠나서 그런가 들이대는 게 부족해요(웃음).
이활주 그 말이 맞을 거예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게 돼요. 가족의 눈 등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이요. 좋아하는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알아가면서 좋은 감정을 만들 수도 있으련만.
최연서 자신에게도 신중해야 하고 남들도 생각해야 하고 젊었을 때랑은 다를 수밖에 없죠.
이복자 나이 들어보니 감정은 뒷전이고 이성적으로 이것저것 가리게 되니까 빨리 뭐가 안 이뤄지는 거죠.
박노용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따뜻한 친구는 얻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싱글 모임이 좋은 거 같아요.
최연서 누군가 말하기를, 이성 친구는 딱 보고 1분 내로 결정하라더군요. 단 지성과 양심 중에 양심 쪽을 택하라고 하더군요.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은 만남이 달라요.
시니어 싱글 남녀. 이들도 결국은 진짜 사랑을 만나고 싶고, 지금까지의 삶을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젊은 사람들처럼 사랑을 표현하고 내세울 수 없다. 삶에 대한 책임감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마음이 시니어들이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닐까.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필자는 선생님과 대하기가 지금도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 선생님과 가까워져야한다'고 마음을 토닥이지만 몸은 선생님 앞에만 서면 얼어붙고 행동은 굼뜨고 말은 어눌해진다. 몇 년 전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프로에서 선생님을 찾는 사연과 과정이 소개되었다. 저런 천사 같은 선생님이 과연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 했다. 내가 겪은 선생님의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 뇌리 속에 선생님에 대해 나쁜 기억들이 여러 건 있어서 이런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점점 선생님은 두려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가까이 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옛 이름)2학년 다닐 때 까지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월사금(月謝金)이라 하여 정확한 금액은 희미하지만 매월 200환(지금화폐로는 20원)의 돈을 내야 했다. 70여명의 한반에 20여명정도는 가난해서 그 돈마저 내기가 어려웠다. 월사금을 내지 않은 학생들을 선생님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도 돈이 없는지 뻔히 아는 아이들이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교실에서 쫓겨나면 엉거주춤 학교운동장 구석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철봉대 주위를 맴돌았다. 월사금을 못내는 학생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학생의 잘못이 아니지만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슬슬 선생님을 피하게 된다. 나도 몇 번 이런 경험이 있다.
장관과 한국은행 총제를 역임하신 박승씨도 수업료를 못 내서 학교 기말고사 때만 되면 시험을 못보고 쫓겨났다고 했다. 수업료를 못 내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다. 난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믿었는데 박승 전 총재는 가난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라고 설파했다. 국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을 세워서 가난을 몰아낸 것만 봐도 개인보다 국가의 잘못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역시 이런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어 나라를 발전시킨다.
선생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예전에는 학생은 많고 교실은 부족했다. 저학년인 일 이 학년을 대상으로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수업을 실시했다. 가끔은 운동장에서도 수업이 있었다. 한번은 운동장 야외수업시간에 우리 반 2학년 초등학생이 무슨 잘못을 했다. 화가 난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내어 다짜고짜 입을 벌리라고 한 후 운동장의 모래를 한주먹 집어서 학생의 입에 뿌렸다. 지금도 충격적인 그 장면이 내 머리에 박혀있다. 한반에 70~80명의 콩나물시루 공부를 하던 시절이니 선생님도 아이들 통솔에 힘이 들고 짜증도 많았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처사는 지나쳤다. 지금 같으면 아마 교단에서 영구 추방되었을 것이지만 당시의 선생님 권력은 아무도 시비 걸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오래간다.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에 살아남은 사람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당시 사건이 나고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하철 타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면 승차장에서 CCTV를 향해 손으로 V자를 그리고 2~3초간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서 전철에 오른다고 한다. 혹 잘못되어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전철을 탔다는 증명을 남기기 위함이란다. 10 여년이 흘렀는데도 지하철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릴 적 기억에 강렬하게 남게 하는 트라우마는 폭력이나 성적 수치심을 주거나 신체 비하적 발언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트라우마로 작용하는지를 모르고 재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른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참으로 오래간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좋은 말,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줘야 한다.
“수영이요? 이제 무엇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하기 어렵게 됐어요.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만난 서은희(徐銀姬·57)씨의 이야기다. 그녀는 올해로 수영경력 24년의 베테랑이다. 그 24년이라는 기간보다 더 대단한 것은 거의 빠짐없이 1주일에 3일은 수영을 해왔다는 것이다. 수영이 직업이었다면 ‘장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처음 수영을 시작한 것은 이곳이 서대문 YMCA수영장이라는 이름으로 1993년에 개관할 때였어요. 그때 제 나이가 34살이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운동을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수강을 하게 됐죠. 경쟁이 꽤 치열해서 새벽부터 나와 줄 섰던 기억이 나요.”
타고난 운동신경도 있는 데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작한 터라 수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몸에 익어갔다. 강사들의 칭찬도 그녀가 힘차게 팔을 저을 수 있는 원천이 됐다.
물 위를 오가는 그녀의 실력은 수치로도 증명됐다. 바로 메달이다.
“과거에는 같은 구의 몇 개 수영교실 회원들끼리 모여 겨루는 구청 개최 경기가 많았어요. 저는 자유형과 배영이 주 종목이었는데, 우승 메달이 넘쳐 나중에는 주번 지인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넘치기도 했죠. 우리 클럽의 수준이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단체전에서도 메달을 놓치는 법이 없었어요.”
오랜 기간 수영을 해 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남들 다 걸리는 감기도 늘 그녀에게만큼은 남의 일이었고, 아직도 25m 정도는 잠수로 단숨에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거뜬하다.
“심폐능력과 지구력은 운동하지 않는 분들과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또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서은희씨는 초보자들이 수영을 시작하면서 가져야 할 덕목은 ‘인내심’이라고 조언했다.
“수영교실을 다니다 보면 처음 시작하는 분들을 많이 봐요.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는 얼마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이런 새내기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데, 그때마다 전 대부분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주니 꾸준히 하시라고 이야기해요. 수영은 시간이 필요한 운동이거든요. 그냥 묵묵히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에요. 처음부터 조급할 필요가 없어요.”
수영이 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그녀는 ‘함께 하는 사람들’을 꼽았다. 가족보다 더 함께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제는 서로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가 됐다. 이런 소중한 인연을 더 뜻깊게 하기 위해 ‘울타리 봉사회’를 만들었고,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서은희씨가 모임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상태다.
그녀가 이 문화체육회관을 통해 접한 또 하나의 인연은 ‘압화(押花)’. 수강생으로 시작해 지금은 매주 금요일 직접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화원 프레스플라워 중앙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주변에서 만나자거나 밥을 산다고 해도 수영 수업과 시간이 겹치면 거절해요. 수영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영 수업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소중하기도 하니까요. 1주일에 세 번 짧은 수업이지만, 이 시간이 제게 주는 영향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소중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