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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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한국인들의 첫 서양 나들이는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늦었다. 개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년 이상 늦어진 까닭이다.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 후인 1842년(남경조약),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의 개항조약을 1876년(강화도조약), 미국·영국과는 1882년에 맺었다. 또 일본이나 중국은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국을 ‘견학’하지만 우리에겐 이 같은 의욕이 부족했다.
조선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부 차원에서 허용된 몇 개 항구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교류와 통상을 금지하여 문을 잠갔다. 바로 ‘쇄국정책’이다.
조선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약하다고 스스로 평가하여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한 것이다. 교류가 빈번하면 강대국의 영향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이 결과 정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 정권의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금지한 근본적인 배경이다. 단지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1년에 네 번 조공 사절을 보냈다.
중국의 명(明)왕조 역시 외래족인 몽골제국 원(元)을 몰아내고 건국되었기 때문에 외부와의 거래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부터 대외접촉을 억제했다. 주변국들의 조공도 3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평화가 정착된 후 교류 확대를 허용했다.
조선 정부는 일면 중국과의 접촉을 정부 차원으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게는 국경을 철저히 감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조선인의 압록강·두만강 월경은 극형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던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조선이 혼자 꿈속같이 편안히 살려고 하나 주변국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제정치가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학자들은 1860년대 이후 조선이 중국과 일본 외에는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 개항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핑계이며 ‘조선의 쇄국은 그 뿌리가 서울에 있다’고 평한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되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에 대한 풍문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에서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중국은 조선이 미국·영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도록 주선한다. 서양 국가들을 이용하여 러·일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 전략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서양 국가들은 조선이 자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교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국이며 중국의 속방(屬邦)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조선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했다. 미국이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공사와 동등한 직급이다. 영국은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되어야 러시아가 열강의 동의 없이 조선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 문제는 텐진(天津)에서 자기와 먼저 논의하자는 요청을 무시하고 조선 정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택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그동안 정치권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자 중국은 경악한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복귀하면 조선을 개방시켜 러·일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밑바닥부터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 대원군을 지지한 세력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중·조 종속관계는 ‘정교금령(政敎禁令)’, 즉 ‘내정과 외교’의 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조공, 책봉 등 형식적, 의례적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조선이 내정이나 대외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독립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모호한 ‘종속관계’를 내세워 마치 원(元)나라 시대 고려에 주재한 다루가치와 같이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나선 것이다. 이제 조선은 기막힌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중심인물이 원세개(袁世凱)이다. 이홍장(李鴻章)이 파견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1859년 생으로 대원군을 데리고 인천에 들어온 것이 1885년 10월 3일(양력)이니 이때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이전까지 오늘날 을지로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서 ‘유안 다이런(袁大人)’으로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우리나라가 1946년 10월 서울의 지명에서 일본식 이름을 정리할 때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원세개 등 중국인들의 본거지를 수(隋)양제를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정신으로 제압하려 한 것이었다.
원세개는 서울 주재 외교단의 수장(doyen) 직을 맡으라는 서양 외교관들의 권고를 거부한다. 자기는 중국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라 조선 문제를 전담한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라고 파견한 ‘주찰조선 총리교섭 통상사의(駐紮朝鮮 總理交涉 通商事宜)’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과 중국은 한가족이라면서 외교사절들을 초청할 때도 자신이 주빈 자리에 앉고 조선의 늙은 외무대신을 말석에 앉혀 손님들을 접대하고 시중들게 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가거나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고 인사문제에도 개입했다.
서양 열강은 이에 중국의 조선 통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정책을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1884년 말 “조선에서 미국의 이해는 경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서울 주재 미국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minister resident)로 한 단계 격하시킨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영국도 중국과의 협조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판단하면서 조선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 버린다.
조선은 중국의 압력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과거와는 판이해졌다. 열강들과의 수교와 만국공법의 도입으로 평등성에 기초한 유럽적 국제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과거에는 중국만이 강대국이었으나 이제는 중국을 굴복시킨 강대국들이 포진하고 있다. 1885~1887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중국을 통한 교섭이 실패한 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해결됐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독립당-개화파가 대두했다.
이에 정부는 1884년(고종 21) 조선·러시아 수교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두 차례 추진하며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조치를 취한다. 해외 나들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현재는 맏딸인 한복려(韓福麗·69) 궁중음식연구원장과 둘째 딸인 한복선(韓福善·67) 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들에게 궁중음식이란 어머니의 삶이자, 한국 식문화의 큰 줄기, 그리고 곧 자신들의 삶과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복려 원장과 한복선 원장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다. 자매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인 황혜성 선생에게 전수 받았는데, 셋째 딸인 한복진(64) 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과 교수도 같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현재 한복진 교수는 일본에서 연구 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식문화라는 큰 줄기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곁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한복선)각자의 성품이나 재능을 살려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언니는 맏딸로서 엄마의 연구원을 맡아 기능 전수와 교육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저는 해외 생활과 TV 프로그램 경험 등을 살려 실생활 궁중음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죠. 셋째는 대학 교수니까 전문적인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며 인재 발굴에 힘쓰고요. 어머니가 활동하실 적에는 ‘요리 연구가’라는 말도 잘 안 쓰이던 시절인데, 요즘은 요리 분야도 아주 다양해졌잖아요. 어머니가 일궈놓으신 것들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게 우리 식문화를 알려야죠.”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 아닌 정신
가업을 이어가는 형제들 사이에는 다툼이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자매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처럼 정답고 사랑이 넘친다.
“(한복려)우리는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당신의 정신과 배움을 우리 자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요. 저도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만큼은 이어주기 위해 집안일에 어느 정도는 참여시키고 있어요.”
그렇다고 황혜성 선생이 유형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전수나 손재주에 그칠 수 있는 궁중요리라는 분야를 글과 책을 통해 역사적 산물로 탄생시킨 것은 가보인 동시에 우리 식문화의 보물과도 같다.
“(한복려) 내 어머니의 것이라 해서 지키고 물려주는 것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책만이 아니라, 물건들도 있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황혜성 자료관 등의 이름으로 내려고 해요. 어머니는 한국 궁중음식 역사의 큰 표적과도 같으신데 우리가 무언가를 정립해서 다독거려 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요. 어머니 제자들도 많기야 하지만, 자식이자 제자인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얼마가 걸리더라도 해내려고 해요.”
자매가 뜻을 모아 하는 일에 한복선 원장의 딸인 정라나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도 합세했다. 강 교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현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복선)할머니가 손주 진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죠. 딸이 미대를 다닐 때 담당 교수가 미술 쪽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뉴욕에 있는 요리 학교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조리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죠. 그때 손주의 입학식에도 같이 가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역시 피는 못 속여~
가장 좋은 스승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덕일까? 자매가 일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습에는 황혜성 선생의 면모가 배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손길만 닮는 것은 아니었다.
“(한복선)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모아 여행도 다니고 먹을 거며 뭐며 다 대접해주셨어요. 연로하셔서 몸도 힘들고 하실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내가 자리를 만들고 베푸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돼요.”
황혜성 선생의 따스함을 닮은 이가 한복선 원장이라면, 어머니의 단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한복려 원장이다. 이는 맏이로서 느낀 책임과 부담감을 숙명으로 여긴 데서 나온 성품이기도 하다.
“(한복려) 동생들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산다고 얘기해요. 대를 이어가는 자식으로서 사람들이 ‘어머니는 훌륭한데 딸들은 그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동생들보다 어깨가 더 무거운 것 같아요. 제가 잘 이끌고 우리가 노력해야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선물이라고 다 같은 선물은 아니란다. 선물은 마음을 담아야 하는 거라지. 그래야 영원히 남을 수 있거든!” - 미국 동화작가 패트리샤 폴라코가 쓴 ‘할머니의 선물’의 한 구절.
2월은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달이다. 설 명절이 있고, 아이들의 졸업과 입학이 줄줄이다. 초콜릿 선물로 대표되는 밸런타인데이도 있다. 이 얘기는 적어도 한 명 이상과 선물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뜻. 그런데 선물을 도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선물을 사기 위해 돈을 내는데 정작 내가 왜 선물을 사는지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다. ‘매년 하는 설 선물이니까’ 혹은 ‘다른 집 아이들이 그 선물을 받았더니 좋아했대’ 식의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조선시대 국왕은 선물에 대해 ‘마음과 마음을 맺어주는 끈’이라 생각했다. 조선왕조 500여 년 역사 동안 선물은 국왕이 신하에게 보내는 신뢰, 격려, 감사 등에 대한 표현이었다. 이에 대해 신하는 문서나 의식 또는 행동으로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데 큰 사명과 언약이 깃들어 있었다.
미국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선물의 역사-16세기 프랑스의 선물문화’라는 책을 통해 16세기 프랑스에서 선물은 사회 각계의 친구, 이웃, 친족,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정의했다. 선물은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어 억압관계를 완화해주고, 상업 거래에서 신뢰와 신용을 다지고 승진과 정치 관계를 쉽게 만들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따라 선물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정의와 평가가 있겠지만, 시대와 역사를 막론하고 선물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담은 정성의 표현이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표하는 방법의 하나
그렇다면 어떤 선물이 상대방에게 좋은 선물일까? 스튜디오W의 이형주 선물 포장 수석강사(이하 이형주 강사)는 선물을 주고받을 때 큰 유행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선물은 상대방에게 마음을 알리고, 고마움을 담아서 주는 것이다. 평소에 가까웠던 사람이 상대방을 지켜봤다가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 아니면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워했던 것들, 누가 사줬으면 했던 것을 챙기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굳이 최근 유행을 따지자면 자연치유나 감성을 자극하는 향초나 디퓨저(실내 방향제), 그림 등을 선물한다고.
포장도 선물의 일부, 상대에 따라 고려해야
선물을 상대방의 취향 혹은 필요에 맞게 골랐다면 그다음 생각할 것이 정성스럽게 포장하는 것이다. 포장에는 마음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포장과 유통과정에서의 파손 방지를 위한 포장이 있다. 상품의 파손을 방지한 뒤 미적인 감각을 접목해 완성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선물 포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물 포장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포장도 엄연히 선물의 일부분이다. 포장할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연령대와 성별, 어떤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어떤 취향인지, 준비한 상품이 뭔지에 따라 색깔, 방법, 재료 등이 달라진다.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에 계절도 있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색을 포장지로 고르거나 한여름에는 시원한 색 혹은 투명 포장지를 사용하는 등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설날 명절을 위한 특별한 선물 포장 방법은 없을까? 이형주 강사에 의하면 뜻밖에 설날이나 명절 선물 포장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주로 보자기와 노리개 장식을 많이 사용한다. 보자기는 치수에 따라 가격이 많이 달라지는데 보자기 가격만 3만~4만 원 정도 한다. 거기에 노리개 장식이 들어가면 2만~3만 원이 더 추가된다. 보자기 치수와 노리개 가격에 따라 포장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예절이 있다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받는 사람이 들고 가기 편하게 쇼핑백을 같이 준비하는 것이 좋다. 누구든지 다 아는 상식 같아 보이지만 챙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리본 매듭을 풀기 편하게 매는 것도 선물 줄 때 예절이라면 예절이다. 대부분 선물을 받아 손으로 풀어보기 마련이다. 리본이 너무 단단하게 감겨 있어 풀다가 결국 가위를 들어 리본을 자르거나 칼로 포장을 거둬낸 기억, 다들 한 번쯤 있지 않나.
그렇다면 선물 받는 사람은 어떤 예절을 지켜야 할까? 혹시 선물을 받았을 때 포장지를 박박 찢어 버리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으신가? 그런데 이제 이 글의 독자라면 절대 그러지 말길 바란다. 선물을 받은 후 내용물에만 관심 있고, 포장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 안 하고 찢어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선물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시간은 단 10초면 된다. 그런데 포장 생각은 안 하고 막 뜯어버리면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다음부터 정성 들여 선물할 생각은커녕 선물 줄 대상에서도 제외할 것이다. 선물 포장은 내용물을 보호하는 의미도 있지만, 상대방을 대우해 주는 의미다. 어차피 뜯어버릴 거 포장은 왜 하나라고 평소에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포장이 안 된 선물을 받으면 “왜 나는 포장 안 해주나?”라며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 선물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적어도 “너무 아깝다, 뜯어도 되니?” 정도의 따뜻한 말은 아낌없이 해도 되지 않을까? 감동해주고, 대우해줬구나 생각하면 서로가 좋다. 결국, 선물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매년, 매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경조사, 기념일 등으로 선물을 고민하고 산다. 특히 2월은 그 고민을 시작하는 연중 첫 번째 달이다. 혹시 의무감에 인터넷 쇼핑 창을 열어봤다거나 귀찮으니 돈을 주겠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선물에 마음이 담겨 있는지 말이다.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글 - 송학선(宋鶴善) 원장
요즘 ‘두 번째 스무 살’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제 2 인생을 설계하고 꾸려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즐거움입니다. 저도 제 치과를 재개원하려 합니다. 제 2의 치과를 설계하고 꾸며보려 하는 게지요. 치료 중심의 치과에서 예방 중심의 치과로 바꾸려구요. 이 닦아 주는 치과로 평생 구강건강 전문 관리 주치의 노릇을 하려는 겁니다.
치과의원을 막 개원했을 때입니다. 하루는 러닝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머리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30대 남자가 턱을 감싸 쥐고 진료실로 들어섰습니다. 치료받으려는 사람 행색치고는 너무했다 싶었지만 무척이나 아픈가 보다 하고는 할 말을 참았습니다. 그런데 입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도대체 이를 닦는 거요 마는 거요?”
그리고는 구강 건강에 무심한 환자를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위 합쳐야 몇 개 남지 않은 이에 그나마 음식물이 잔뜩 끼어 마치 쓰레기장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참을 야단치다가 부끄럽고 미안해하는 표정에 야단을 멈추고 무슨 일 하시는 분인지를 물었습니다.
“양곡 도매시장에 나락 정미해서 올려 보내는 일 하고 있구먼유.”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떠날 수가 읍스유. 밥도 서서 먹구유. 잠도 쌀가마니에 엎어져서 그냥 자누먼유. 그것두 네 시간밖에는 못 자유.”
충격이었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며 목이 콱 메어 왔습니다. 식사시간도 없이 하루 스무 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이 닦으라고 야단쳤으니요. 이분에게는 건강할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삶의 여유가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친구들과 소주도 한잔하고, 가족들과 텔레비전도 보고, 자기 전에 씻고 이 닦을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구강건강이 나쁜 것은 이를 닦지 않아서이고, 입안에 나쁜 균을 없애면 구강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가진 치의사였습니다. 질병에 대한 생의학적 모델만을 교육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료 중심의 진료 체계 속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 임금님도 치통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해군이 치통을 앓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영의정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광해군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여러 부위의 열이 위에 모여들어 치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무릇 위(胃)에서 생겨난 병은 침으로 쉽사리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줄여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잘 조절하여야 상하가 서로 통해 열이 흩어질 것입니다.”
치통 때문에 광해군은 어의(御醫) 허준(許浚)에게 침을 맞고 있었습니다만 치료는커녕 쉽게 통증도 가시지 않았겠지요.
또 오성(鰲城)으로 잘 알려진 좌의정 필운(弼雲) 이항복(李恒福)이 “치통 증세는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광해군은 이렇게 답합니다.
“잇몸의 좌우가 모두 부은 기운이 있는데 왼쪽이 더욱 심하오. 한 군데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곪는 것처럼 아프고 물을 마시면 산초(山椒)맛이 나는구료.”
사실 산초나무나 초피나무의 매운맛을 내는 ‘산시올(sanshol)’ 이란 성분은 마취 작용과 살충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민간요법으로 치통이 있을 때 산초열매 껍질을 씹어 통증을 감소시킵니다. 서양에서도 이 방법이 사용되는지 이 나무의 영어 이름이 ‘toothache tree’ 즉 치통나무입니다. 입안이 심하게 아프면 광해군의 표현같이 마치 산초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맛의 산초 열매를 통증을 없애는 약제로 쓸 수 있다니 참 묘하지요?
왕으로 살든 신하로 살든 웰비잉(well-being)이건 슬로 라이프(slow-life)이건 건강한 삶이든 행복한 삶이든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림에 떡입니다. 어떤 삶이든 구강건강이라는 것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조건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의 대문 격인 입안이 건강하지 못해서야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도 오복(五福)의 하나여~”라고 말합니다. 오복이 무언가요? 새로 집을 지어 상량(上梁)할 때 대들보에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쓰고 그 밑에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 천상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세계의 오복을 갖춘다.’고 씁니다. “오복을 갖추었다”고 말하면 모든 걸 가진 행복한 삶이겠지요.
상서(尙書), 즉 서경(書經)에 오복이란 오래 사는 수(壽), 많은 재물 부(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강녕(康寧), 어진 덕을 닦는 유호덕(攸好德), 하늘이 내린 명대로 살다가 죽는 고종명(考終命)이라 했습니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적호(翟灝)가 편찬한 통속편(通俗編)에 나오는 오복은 상서의 오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壽)· 부(富) · 귀(貴)·강녕(康寧)·자손중다(子孫衆多)로 되어 있어 두 가지가 다른데, 서민층이 바라는 오복은 오히려 이 통속편의 오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과경(因果經)의 종요(宗要)인 ‘현자오복덕경(賢者五福德經)’에서 부처님은 오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진 사람은 법을 설하여 다섯 가지 복덕을 얻으니 첫째는 세상에 나서 오래 사는 것이요, 둘째는 큰 부자가 되어 재물과 보배가 많은 것이요, 셋째는 단정하게 잘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명예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정신이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지는 것이니라.”
사실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옛 사람들의 오복 중에 이[齒]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곳은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강녕에 들어 있는 셈이지요.
반복되는 이야깁니다만 음식을 잘 씹지 못한다는 것은 전신 건강을 유지할 첫 번째 조건이 부실하다는 이야깁니다. 동물에게 이빨의 상실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강건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착각, 치과 기술로 또는 약물로 이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구강 건강과 관련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은, 우리 입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질병은 예방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잇몸병이나 충치는 예방으로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만성 질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동물과 인간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빳빳한 칫솔 하나가 치과의사 열 명보다 낫습니다.”
글 - 송학선(宋鶴善) 원장
서울대 문리대 치의예과와 치과대학 합쳐서 8년 다님.
1984년 송학선치과의원 개원. 청년치과의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환경운동연합, 과천시민모임, 환경재단136포럼,
6월민주포럼, 충치예방연구회 등 활동. 현재 콩세알튼튼치과 준비 중.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의 근세사를 회고하면서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KBS는 7월 말 1894~1895년 청일전쟁에 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툰 전쟁이다. 아산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황해해전으로,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주,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는 산해관(山海關)까지 확대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됐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승리를 예견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50여 년간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흔히들 명치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보수-반동정권이 지배한 중국에 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패배를 설명하는 편린일 뿐이다.
당시 중국은 근대 이전 유럽의 상황과 유사했다.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엄청난 개인 비용으로 (사실은 국민 세금이지만) 양성한 ‘국왕 개인의 군대’가 전쟁으로 약화되면 국내정치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보았다. 전쟁이 장기화돼 병력이 소진되면 승리한다 해도 국내의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단기전으로 끝났다. 상대방과 한번 부딪쳐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뒤 곧 협상으로 들어가 주고받기를 하면서 병력 손실은 최소화하려 했다. 전쟁이 정치·외교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시기 중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조정의 지휘 아래 있으나 워낙 땅덩이가 커서 통합된 단일 명령체계를 갖춘 ‘국군’이란 개념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 제국 군대의 모태인 8기군 외에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분리·통치됐다. 그러나 8기군은 나태해져 과거의 용맹성을 잃었고 태평천국의 난/운동(1851~1964)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같은 집단들이 진압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그는 태평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의 회군((淮軍-안휘성 일대에서 조직한 의용군) 출신이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후계자로 회군을 배경으로 수도 북경이 아닌 천진(天津)에 거주하면서 중국 북부의 해군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북양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중국의 외교, 군사,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조선왕’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길을 국내정치로 돌려보면 북경의 만주조정과 이를 둘러싼 보수-반동 집단들의 끊임없는 견제는 물론, 다른 지역 군부의 질시와 경쟁에 싸여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정통 왕조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경성·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관리의 지위는 항상 불안했다.
중국 해군은 겉보기에는 당당했다. 서양식으로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등 4개 함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중 북중국(황해) 일대를 담당한 북양함대는 ‘극동’ 최강의 함대, 세계 8위의 함대이며 함선 78척, 총 배수량 8만3900톤으로 일본해군 전체를 능가하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북양함대 기함(旗艦) 정원(定遠)과 동급인 진원(?遠)은 독일에서 건조돼 배수량이 7670톤으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 4217톤 영국에서 건조)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과 싸우기 싫었다. 20년 넘게 키운 북양함대와 육군이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으며 전쟁에서 타격을 입으면 북경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로 넘칠 것이고 간신히 버텨오던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 다른 함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전쟁에 전력투구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눈은 국내정치에 둔 채 떠오르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피해를 줄여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무기와 병력의 수로 결정되던가? 총지휘관은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망설이고, 병사들은 훈련과 정신무장이 안 되어 있고, 부대 간 유기적인 상호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북양함대 예산은 위에서는 서태후가 공공연히 빼돌려 별장 이화원(?和園)에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쌓는데, 전선들은 전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개조를 못하고 정비 불량으로 규정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탄약의 비축도 불충분해 해전 중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포에 장전한 포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구경이 다르며 오랫동안 내부 부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실화소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홍장은 정원과 진원을 점검하자 사용 가능한 주포 포탄이 세 발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합쳐 단지 여섯 발뿐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원에 한 발, 진원에 두 발, 모두 합쳐서 세 발입니다.’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가 각각 4문씩 있었다. 또 포의 구경 15인치에 쓸 수 없는, 예를 들어 10인치짜리 포탄이 준비됐다면 어떻게 포를 발사할 수 있겠는가. 육전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투(1894) 직후 일어난 황해해전에서 중국은 10척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고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다. 다음 해 일본군이 위해위(威海?)를 공격하자 중국 해군은 정원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진원은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후 진원은 러일전쟁 때 고물 취급을 받지만 발트함대를 섬멸한 대한해협 전투에서 러시아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적국’을 위해 봉사했다. 중국을 대표하며 위용을 과시하던 전함의 기이한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청일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통영함 비리사건이 떠오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1569~1618)은 수많은 조선조 인물 가운데 여러 모로 특이한 사람입니다. 고리타분한 유교질서에 염증을 냈던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천지간의 괴물’이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그가 광해군 3년(1611)에 귀양지인 전북 함열에서 엮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도문대작(屠門大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8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한 음식 안내서입니다.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지난날에 먹었던 음식 생각에 견딜 수 없어 종류별로 기록해 놓고 때때로 보아가며 한번 맛보는 것처럼 한다는 게 집필 동기였습니다.
허균이 참 가엾습니다. 처형 직전에 “잠깐 할 말이 있다”고 소리쳤지만 무시당한 채 처참하게 죽은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음식을 먹고 갔을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처형장에서 지은 절명시(絶命詩)에는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잘까?”[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이 왜 먹는 생각을 할까? 음식이란 몸을 살찌우거나 생존을 이어주는 영양소만이 아니며 정신의 허기를 달래고 불안을 덜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생존의지에 관한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음식은 마시고[飮] 먹는[食]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저작(詛嚼)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심신을 기르고, 세상과 함께 하면서 사람들과 정을 다지고, 그 시대와 사회를 섭취합니다.
음식남녀 인지대욕존언(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 예기(禮記)가 갈파한 대로 음식과 남녀의 정, 쉽게 말해 먹는 것과 섹스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원초적 본능을 다스려 사회질서와 양속(良俗)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제도와 절차를 만들고 규제와 금지 장치를 마련해왔습니다.
음식은 예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숟가락 젓가락 포크는 어떻게 쥐고 어른 앞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운 뒤 식사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됩니다. 밥상머리교육은 인간의 품성을 결정하는 원초적 교육기제입니다.
쌀을 뜻하는 글자 ‘米’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됩니다. 옛 어른들은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88번이나 농부의 손길이 가야 하는 걸 알라며 이 글자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예절은 먹는 방법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음식 자체에 대해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먹을 게 귀하고 쌀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밥풀을 남기면 꾸중을 들었고, 맛있는 것만 먹거나 같은 반찬을 두 번 떠가는 것도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 번역된 댄 주래프스키 교수(미 스탠퍼드대·언어학)의 ‘음식의 언어’(The language of food)에 의하면 고급한 식사일수록 에티켓을 따집니다. 요리의 이름이 길수록, 식재료의 출처를 거론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음식 값이 비싸집니다.
음식은 정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밥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요? “음식 끝에 의 상한다”는 말, “콩 한 쪽도 나눠먹는다”는 말에서는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인심과, 누구에게나 똑같은 고통인 가난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술꾼 3형제는 명절에 모이면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 놓고 마시면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웁니다. 어차피 가실 분인데, 병상에 누워 “한 잔만, 한 잔만” 하는데도 끝내 술을 드리지 않았던 불효를 그들은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또는 주부는, 또는 아내는 가족을 위해서 정으로 다듬고 무치고 사랑 양념을 넣어 음식을 만듭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제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려서 어머니가 해주었던 반찬이나 요리가 맛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을 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음식은 소통입니다. 왕조시대에 기근이 들고 흉년이 심하면 왕은 부덕의 소치라고 자성하며 하늘에 빌면서 반찬 가짓수를 줄였습니다. 이른바 감선(減膳)의 소통정치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서로 자기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손님 접대랍시고 내놓은 두루미와 여우의 우화는 달리 해석하면 서로 다른 음식을 통한 소통의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은 배려입니다. 우리는 요리를 잔뜩 빚어 내놓고도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예전에 중국인들은 “이미 익힌 걸 날것으로 되돌릴 수 없지요”[熟不還生]라고 말하며 식사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장 지글러 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의 절반은 먹거나 더 먹거나 또 먹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기아의 진실, 과식과 체증의 진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 북송시대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980~1052)은 ‘강상어자(江上漁者)’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강 위를 오가는 사람들/농어 맛을 즐길 줄만 아는데/그대들 보시게나 작은 배 하나/풍파 속에 출렁거리는 것을.”[江上往來人 但愛?魚美 君看一葉舟 出沒風波裏] 농어만 즐기지 말고 농어를 잡는 이들의 고생도 알라는 뜻입니다.
굶주리는 이들도 많고, ‘혼밥’이나 불기 없는 1회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걸 좋아한다고 내세울 만한 음식이 없는 사람, 함께 먹자고 남에게 권할 만한 메뉴나 음식점에 무지하거나 무신경한 사람,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남을 위해 만들어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없는 사람의 삶은 끝내 불행합니다. 구차하고 용렬합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어느 책에서 “여성이 매일같이 요리를 하는 것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일상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나를 위해, 남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TV화면을 점령하다시피 한 먹방, 쿡방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입니다.
요리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먹을 것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생명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음식은 삶입니다. 그리고 살림입니다. 이 경우의 살림은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나 세간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 목숨을 이어가게 해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움직이는 것, 푸른 것, 부드러운 것, 따뜻한 것, 촉촉한 것, 선한 것, 맛있는 것입니다. 일용(日用)하고 장복(長服)하는 음식을 통해 삶과 살림의 길을 찾아가는 일이 늘 즐거움과 행복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