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
“자연은 이미 완성되어 있건만 예술가는 또 다른 완성을 꿈꾼다.” 어떤 책에서 읽은 글귀가 이 산 저 산 깊 섶에, 골짜기에, 벼랑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야생화들을 만날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너도바람꽃과 변산바람꽃, 복수초 등으로부터 시작해 쑥부쟁이와 구절초, 좀바위솔 등등 늦가을까지 피는 산꽃 들꽃을 쫓아다니며,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지만 과연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자연의 미를 제대로 전달하고는 있는지 회의가 들곤 합니다.
예로부터 매화와 국화, 대나무와 함께 4군자의 하나로 꼽혀온 난초,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야생난인 보춘화(報春化)를 대할 때면 그런 생각은 더 깊어집니다.
흔히 춘란(春蘭)이라고 불려온 보춘화는 이름 그대로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야생의 모습보다는 예쁜 모양의 도자기 화분에 담긴 모습에 익숙하다 보니, 으레 가정이나 사무실 등에서 관상용으로 키우는 원예종 식물인 줄 알고 있지만,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 있는 3~4월 야산에서 피는 야생종 난초입니다.
고급 도자기에 담긴 원예종 난초가 제아무리 우아미를 뽐낸다 한들 겨울의 끄트머리 수북한 낙엽더미 속에서 날렵하게 삐져나온 청초한 초록색 이파리 사이에 연황색 꽃대를 곧추 들고 선 야성적 아름다움에 비할까 싶습니다.
투명한 하늘과 짙푸른 바다가 배경이 되고, 눈부신 햇살이 무성한 잎과 꽃송이에 쏟아지며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자연의 미를 제아무리 고가의 난초인들 감히 흉낸들 낼 수 있으랴…. 오랜 세월 숱한 묵객들이 그려온 난 그림들이 자연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제멋대로 핀 보춘화의 고졸한 풍치에 버금이나 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주로 서·남해안 숲에서 자생하는 보춘화는 지역의 특성, 생육 환경 등에 따라 잎이나 꽃 등에서 많은 변이가 발견되는 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이가 보춘화의 남획과 훼손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변이종의 가치를 높게 사던 일본에 수출할 목적으로 많은 판매상들이 마구잡이로 채취하기 시작했고, 국내 난 동호인들이 변이종 채집에 덩달아 나서면서 서·남해 해안지역에 흔하게 자라던 자생난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글머리에서 밝혔듯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자연의 미’를 그저 바라보고 즐기면 되는 것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집으로 가져다 고가의 자기에 담아 더 멋지게 만들어 보겠다고, 저 혼자만 독점하겠다고 헛된 객기를 부리다 ‘야생난 멸종위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걸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내용의 ‘세한도’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한겨울에도 늘 푸른 기상을 간직하고 있는 게 어찌 소나무와 잣나무뿐일까요? 하얀 눈으로 덮인 산기슭을 무심히 오고가는 투박한 등산화에 속절없이 짓밟히면서도 송백(松柏) 못지않게 푸르른 잎을 유지하는 풀들이 여럿 있습니다.
보춘화는 물론, 전국의 산에서 비교적 흔하게 보는 감자란도 비록 혹독한 추위에 질린 듯 검푸르지만, 여름철과 진배없이 푸르고 무성한 잎을 유지합니다. 특히 날렵하고 기품 있게 뻗은 잎이 일품인 보춘화는 땅속 알뿌리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고고성을 잉태한 채 한겨울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Where is it?
남부 및 중·서부 해안가, 도서 지역은 곳곳이 보춘화의 자생지이다. 보춘화의 북방 한계선이라고 일컫는 충남 안면도까지만 내려가면 안면도자연휴양림 앞산·뒷산 산책로 주변에서도 야생의 춘란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진 곳은 갈수록 개체수가 줄고 있어 풍성한 자생지를 만나려면 더 먼 남쪽이나 섬으로 가야 한다. 전남 고흥 봉래산이나, 가의도 등 남해 및 서해 도서지역에 가면 아직도 손때 묻지 않은 무더기를 볼 수 있다.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자연과 생명, 그리고 젊음을 말하는 청춘까지. 그렇게 초록은 싱그럽고 생기발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건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각종 성인병과 암을 유발하는 현대인의 육식 과다 섭취가 문제로 부각되면서 채식 위주 식습관이 주목받고 있다. 채소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초록’이 연상되듯, ‘초록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몸을 더 건강하게 가꿔주는 웰빙시대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겠다.
초록 식물의 ‘푸른 혈액’ 엽록소
초록 식물에게 생명과 색을 선사하는 엽록소를 일컬어 ‘푸른 혈액’이라 부르곤 한다. 엽록소는 소염작용과 해독작용으로 각종 염증을 막아주고 손상된 세포를 재생해 암이나 각종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또한, 항알레르기, 항콜레스테롤 작용을 하며 혈압 안정, 피로 해소, 노화 예방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
이러한 엽록소를 가장 많이 함유한 것은 역시나 식물이다. 녹차, 매실, 브로콜리, 시금치, 매생이, 알로에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린푸드에는 엽록소 외에도 비타민을 비롯한 우리 몸에 이로운 각종 영양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오히려 주변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어 섭취에 소홀할 수 있는 그린푸드. 그중에서도 특별히 꼭 챙겨 먹어야 하는 그린푸드가 있다면 무엇일까?
홍영재 박사가 추천하는 그린푸드 4선
1) 암 증식을 억제하는 ‘브로콜리’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생육을 막는 ‘설포라판’, 당뇨에 유익한 ‘크롬’, 대장암 발병률을 줄이는 ‘식이섬유’ 등이 풍부하다.
2) 독을 없애는 푸른 보약 ‘매실’
해독작용과 살균작용이 뛰어나 각종 독성물질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 준다. ‘음식의 독’, ‘피 속의 독’, ‘물의 독’ 이렇게 3독을 없애는 효능이 있어 ‘푸른 보약’이라 일컫는다.
3) 태양의 영양소 ‘매생이’
식물성 식품이면서도 단백질 함유량이 높고 지방, 탄수화물, 무기질, 비타민 등 5대 영양소를 모두 지니고 있어 우주 식량으로 지정될 정도로 ‘완벽 식품’으로 손꼽힌다.
4) 초록색 인삼 ‘시금치’
베타카로틴, 철분, 칼륨, 칼슘, 엽산 등이 풍부해 빈혈, 치매, 골다공증 등에 좋고, 눈의 노화로 발생하는 백내장의 발생 위험을 낮춰준다.
영양만점 브로콜리 맛있게 즐기자
브로콜리는 마음만 먹으면 활용도가 높은 식재료다. 과일이나 채소 등과 함께 주스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조림이나 볶음 요리에 넣어도 색감이나 영양이 풍부해 진다. 라면을 먹을 때도 브로콜리를 넣어 끓여먹으면 나트륨 배출을 도와 더 건강하게 섭취할 수 있다.
# 브로콜리 스무디
일주일에 한 번, 신선한 브로콜리 스무디 한 잔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활력 넘치는 일상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스무디 재료: 요거트 80ml, 바나나 70g, 사과 40g, 브로콜리 70g, 키위 50g, 우유 200ml, 아몬드 5알
# 브로콜리 샐러드
어떤 식재료와도 부담 없이 어울리는 잘 브로콜리를 살짝 데쳐 샐러드에 응용해보자.
샐러드 재료: 브로콜리, 청경채, 양상추, 치커리, 비타민, 토마토, 아몬드, 골뱅이(인원에 따라 적당량 준비한다.)
샐러드 소스 재료: 키위 2개(180g), 사과 1/2개(90g), 양파1/4(50g), 레몬즙 약간, 올리브유 약간
암 증식을 억제하는 브로콜리
베타카로틴, 셀레늄, 각종 비타민, 루테인, 식이섬유 등 항암작용을 하는 성분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어 암에 강한 채소라고 불릴 만하다. 특히 설포라판, 인돌, 리그난 성분들은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 호르몬과 관련된 각종 암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 중 설포라판은 단순히 암을 예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암세포의 추방과 증식 억제에도 탁월하다. 인돌은 발암 물질을 해독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어 에스트로겐과 연관이 깊은 유방암 세포의 성장 및 전이를 억제하는 데 효과적이다.
브로콜리, 선택이 아닌 필수
브로콜리의 비타민 C 함유량은 레몬의 2배이고 다른 채소나 과일에 함유된 비타민 C에 비해 열에 의한 파괴가 적고 섭취가 용이해 피로 해소 및 피부 미용,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비타민 C는 칼슘의 흡수를 촉진하여 뼈를 건강하게 해주므로 골다공증의 예방 효과가 있어 중년여성에게는 브로콜리 섭취가 매우 중요하다.
이외에도 항산화, 노화 방지, 혈전 예방, 시력 보호, 비만 예방, 면역력 강화, 성인병 예방, 변비 예방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에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할 음식이 있다면 브로콜리는 그중 한 가지가 될 것이다.
홍영재 박사
산타 홍 클리닉 원장, 대한여성비만 노화방지학회 회장
저서 ,
식물이 갖고 있는 색은 크게 잎의 색인 초록색과 줄기의 색인 갈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록색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와 격한 감정을 차분하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갈색은 감정에 대한 억압이나 두려움을 완화시켜준다.
따라서 식물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감정의 힐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원을 조성하기 전 단계에 해야 하는 것을 말했었고,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정원조성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원디자인 - 주의점과 전문가의 도움
정원부지에 대하여 충분히 조사하고 관찰하여 정리하고, 내가 원하는 정원에 대한 상상이 끝났으면 이를 바탕으로 설계를 진행하여야 한다. 물론 설계를 하지 않고 바로 정원조성을 하여도 크게 문제가 없다. 초등학교때 방학이 시작되면 스케치북에 시간표를 작성해서 어머니와 씨름하던 기억이 있다. 항상 그렇듯 시간표는 안 지켜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방학의 기분을 내기에 그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정원설계도 마찬가지이다. 설계를 안하고 조성을 하여도 무방하다. 다만 자신의 구상을 실제의 설계도로 그리면, 정원이 더 정돈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작업도 용이하고 사후관리도 편하기 때문이다.
정원설계가 막연하다고 생각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정원설계전문가는 의뢰인이 생각하는 정원이미지를 도면에 실체화할 수 있으며, 더 낳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시공비용을 계산하고, 시공할 때 의뢰인을 대신하여 설계대로 시공이 되는지 체크하고, 변경된 의뢰인의 요구사항을 즉시 시공에 반영할 수 있도록 대처할 수 있다. 설계비용은 디자이너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다르지만 이 계획에 대하여 노력한 시간과 일수에 따라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팁을 주자면 큰 조직일수록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정원설계시 유의사항은 무수히 많으나 몇 가지로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① 식물을 심는 정원은 배수가 매우 중요하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지만 뿌리가 있는 곳이 지하수위보다 낮으면 고사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 문제는 후에 땅고르기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② 꽃보다 잎이 더 오래가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무는 잎과 꽃 뿐만 아니라 줄기도 미적인 요소일 수 있으며, 이쁜 수형을 갖고 있는 나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③ 햇볕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설(텃밭, 잔디밭, 연못, 비닐하우스 등)은 반드시 해가 잘 드는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 (너무 당연하지만 잘 안 지켜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④ 정원을 한번에 못 만드는 경우에는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채워가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곳부터 조성한다.
⑤ 부지가 작으면 단순하고 과감하게 설계하여야 한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거나 오밀조밀한 진열은 산만하게 만든다.
⑥ 어떠한 장식물을 설치하다라도 장식물의 배경은 식물이 되어야 볼거리가 풍성해진다.
위의 사항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점이며,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흔히 실수하는 내용이니 유념해야 한다.
① 10년후를 생각하고 정원을 설계하여야 한다. 식물들이 생장하는 속도나 높이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훗일을 생각하지 않고 식재를 하면 화단의 모양이 어수선해지기 때문에 다 자랐을 때의 키를 짐작해서 키가 작은 것은 앞에 심고 큰 것은 뒤에 심어야 한다. 특히 나무는 성목이 되어 키가 훌쩍 크면 창문이나 거실, 잔디밭에 큰 그늘을 드리우는 경우가 있으므로 위치선정에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② 너무 많은 종류를 심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종류의 꽃을 심으면, 정원 전체의 리듬감과 조화로움이 깨지므로 욕심을 버리고, 포인트가 되는 곳을 선정하여 집중한다.
③ 땅의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꽃이나 나무를 심지 않는다. 식물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이 다르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극양수(極陽樹)이기 때문에 그늘에 심으면 안되며, 메타세콰이어나 버드나무는 호습성(好濕性) 수목으로서 습지나 지하수위가 높은 곳에 심으면 좋다. 또한 주목이나 동백나무는 그늘에서도 잘 자란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브식물인 라벤더는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며, 단오의 상징인 창포나 붓꽃은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이와 같은 내용을 고려해 정원을 설계하며, 설계는 즉시 시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도록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그려야 시공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줄일 수 있다.
비자나무는 겉씨식물인 주목과(朱木科 Tax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주목과에 속한다.
이 나무는 목재로 쓰거나 관상용으로 심고 있는데, 일본 남쪽 섬이 원산지이다. 비자나무속(榧子─屬 Torreya) 식물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키도 10~25m에 이르지만 온대지역보다 추운 곳에서는 관목처럼 자란다. 줄기가 편평하게 옆으로 퍼지거나 약간 위를 향해 자라기 때문에 식물의 전체 모양이 짤막한 달걀 모양 또는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꽃은 단성화이며 4월에 핀다. 수꽃은 10개 내외의 포가 있는데 갈색이며 길이 10mm 정도로 10여 개의 꽃이 한 꽃자루에 달린다. 암꽃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달걀 모양으로서 한군데에 2∼3개씩 달리고 5∼6개의 녹색 포로 싸인다. 열매는 다음해 9∼10월에 익고 길이 25∼28mm, 지름 20mm, 두께 3mm 정도로 타원형이다.
수피(樹皮)는 부드럽고 붉은색을 띠지만 오래된 나무에서는 갈색으로 변하고 조각조각 떨어져나간다. 잎은 굽은 창 모양이지만 끝이 단단하고 가시처럼 뾰족하며 앞면은 진한 초록색이고 광택이 난다. 잎을 비비면 톡 쏘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난다. 씨는 크기가 2~2.5㎝이고, 일본에서는 씨의 기름을 요리에 쓰고 있다. 다육질의 종의(種衣)는 밝은 초록색이나 때때로 연한 자줏빛을 띠기도 한다. 노란색의 목재는 부식되지 않아 가구·상자·조각 및 선반의 재료로 쓰인다.
전라남도 장성군 백양산으로 남쪽에서 자라는 늘푸른 바늘잎나무이지만 어릴 때 월동 보호만 잘하면 중부 지방에서도 생장이 가능하다. 제주도에 2300여 그루의 대군락을 이루는 비자림이 있다. 늘푸른 잎과 웅장하고 품위 있는 수형은 장엄미를 느끼게 한다. 큰 비자림에는 풍란, 콩짜개란, 비자란 등 난과식물이 함께 자라기도 한다.
잎에서는 비자나무 특유의 향기가 나며 잎 끝이 손을 찌를 정도로 날카롭고 딱딱한데, 이런 점에서 잎이 부드럽고 잘 휘어져서 살을 찌르지 않는 개비자나무와 구별된다.
대추처럼 생긴 열매는 붉은 자주색으로 익으며 그 안에 아먼드 또는 땅콩처럼 생긴 씨가 들어 있는데 이 씨를 비자라 부른다. 비자는 맛이 떫어서 날것으로 먹기에는 거북하다.
목재는 안쪽과 바깥쪽의 구별이 불명확하고 노란빛을 띠며 나이테가 촘촘히 있어 마치 나이테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것으로 성장이 무척 더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이 더딘 만큼 재질이 치밀하면서도 연하고 탄력성도 좋아 바둑판으로 많이 쓰였다.
습기에도 잘 견디고 배나 관을 만들 때 유용하게 사용했으며 무늬가 고와 '문목(文木)' 또는 '나무의 황제'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다. 열매는 독성이 강하며 예전에는 촌충 구제약으로 유일한 특효약 대우를 받아 인공조림식재도 많이 했다. 열매에서 기름을 짜서 식용유로 사용하거나, 불을 밝히는 등유로도 이용 되었다.
민간에서는 잎과 가지를 태워 그 연기로 모기를 쫓는 데에 사용했으며, 씨는 건조함을 매우 싫어해서 약간만 건조해도 휴면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 등지에서 자라고 있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제39호인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비자나무, 제111호인 전남 진도군 임회면의 비자나무, 제153호인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비자나무, 제239호인 전남 고흥군 포두면의 비자나무숲, 제241호인 전남 해안군 해안읍의 비자나무숲, 제287호인 경남 사천시 곤양면의 비자나무 등이다.
낮에도 밤나무, 죄없이 비자나무 하면서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나무이다. 비자나무는 제주도, 전남북지방에서 주로 자라고 있다. 제주도의 비자나무숲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백양산과 내장산의 비자나무도 유명하다. 일본에도 비자나무는 있는데 주로 난대림과 온대림에 난다. 우리나라도 제주도의 것은 난대림지역으로 볼 수있고 내장산의 것은 온대 남쪽 숲으로 볼 수 있다. 비자 나무종류는 중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다. 비자나무열매가 곧 비자인데 전에는 이것이 뱃속의 기생충, 가령 촌충, 회충, 십이지장충 등을 구제하는 약으로 많이 쓰여져서 이 나무를 본 일은 없어도 비자나무란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비자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그동안 약으로서 고마운 일을 많이 해 왔다.
비자나무에 대해서 개비자나무가 있는데 개비자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해서 우리나라 경기도지방에까지 올라와서 자란다. 비자나무는 잎끝이 바늘처럼 날카롭고 단단해서 만지면
손을 찌르고 통증을 느끼게 하나 개비자나무의 잎은 부드럽고 잎끝이 유연해서 만져도 살을 찌르는 일이 없어 잘 구별이 된다.
비자나무는 큰 나무로 자라지만 우리나라의 개비자나무는 관목으로서 키가 낮고 줄기도 가늘다. 나무 높이가 2~3m를 넘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개비자나무도 10m 높이로 자란다고 하는데 기후 탓인지는 알 수 없다. 개비자나무는 많이 모여 나는 일이 드물고 드문드문 나타나며 그 숫자가 많지 않다. 제주도와 내장산 등의 비자나무는 모여서 나지만 이것이 자연상태로 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심은 것인지 알수 없다. 비자나무 열매는 무거워서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또 이 나무는 어릴 때 그늘을 좋아하므로 어미나무의 그늘에서 살아가기에 적당하고 다른 나무를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이 그곳에 만들어지므로 비자나무는 어미나무아래서 무더기로 나타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우에끼 교수는 기록하기를 [조선에 있어서 비자나무가 진정 야생에의 것인지 알 수 없다. 큰 비자나무는 제주도와 전남에만 나고 그 수가 극히 적고 큰 나무는 줄기 직경 약 2m. 수고 약 11m , 수고 11m,수령 약 400 년으로 추정되는 것이 강진에 있다. 한라산 동북쪽 산록지대에는 면적 약 38 핵터에 약 5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숲을 만들고 있다. 조선조때 열매를 따서 궁중에 바쳤고 제주목사가 이것을 관리했으나 지금은 숲이 많이 황폐해 있다. 그러나 줄기의 평균직경 85cm, 수고 11m 에 이르는 수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라고 했다.
전남 고흥군 금탑사, 장흥군 보림사, 전북 고창군 선운사, 그리고 백양사, 내장사 등에 비자나무 숲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나무는 무언가 사원과 관계가 있었던 양 생각되기도 한다. 전남 진도 임준면의 비자나무는 높이가 약 9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약 5.6m 로서 웅장한 수형을 가지고 있는데 열매는 약용으로 되고 정자나무로서 이용되고 있다.
[동구여지승람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를 보면 옛날에는 비자나무가 더 넓게 분포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비자의 산지로서 전남의 나주, 장성, 무안, 장흥, 진도, 강진, 해남,보성, 영암, 고흥, 함평, 영광, 경상도의 남해, 고령, 단성(丹城) 그리고 제주도가 기재되고 있다. 경북 고령이라 하면 상당히 북쪽이고 내륙지방이다. 대체로 비자나무의 산지는 제주도와 본토의 서남쪽 해안에 따른 각처였다.
특히 제주도의 비자는 일찍부터 유명하였고[고려사]를 보면 문종 7년에 탐라국 왕자 수운나(殊雲那)는 비자, 해조, 구갑, 우황 등을 바쳤고 왕은 왕자에게 중호장군의 벼슬을 주었다는 대목이 있고[경국대전]에는 [제주 삼읍]에는 감귤나무 종류를 해마다 접붙여 심고 비자나무, 산유자나무 등은 부근 주민을 지정해서 이것을 관리시키고 해마다 그 수를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한다]는 대목이 있어서 제주도 비자나무 제배에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영조실록 39년조에[제주에 명을 내려 비자나무 널빤지 10장을 세공으로 바쳐라]했는데 비자나무의 아름다운 목재도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지난날 제주도민은 공물에 관련되어 비자나무나 감귤나무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대체로 이러한 것은 보상이 없는 무리한 징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다산 선생이 쓰신 [목민심서]공전 산림의 대목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조 때부터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비자나무의 열매와 그 목재는 별공 즉 특산물로서 바쳐졌고 그밖에 오배자, 모과, 후박, 두충, 녹나무, 조록나무 등의 약재가 과세물로 지정되고 있다. 서기 1763년 영조 39년에는 호남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기민의 수가 48만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해부터 5년간 제주의 비자나무 널빤지 상납이 중단되기도 했다. 비판(榧板) 열 장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해마다 상납된 것으로 생각되고, 그만큼 그 목재는 귀중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주도의 비자림은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36km 떨어진 구좌면 평대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1980년 현재 크고 작은 비자나무가 약 2500그루 정도 자라고 있는데 평균 수고는 11m, 가슴 높이 줄기의 평균 직경은 73cm 이다. 비자나무림 주변에은 곰의말채, 아왜나무, 비목, 팽나무, 무환자나무, 자귀나무, 해송, 천선과나무, 예덕나무, 때죽나무, 덧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 비자나무숲의 성립에 관하여서는 무속, 즉 무제 때 비자나무 열매를 제상에 차려놓고 의식이 끝난 뒤 이것이 크게 먹을 것이 못 되므로 버려져서 숲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비자나무는 한자로 등 榧子木, 枇子木 등으로 쓰고 피자로도 말하며 또 옥비, 적과, 옥산과로도 나타낸다. 비자나무비는 榧또는 棐로도 쓰는데, 非는 비자나무에 잎이 붙어 있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고 이에 나무목(木)자를 붙여서 비자나무를 형용하는 글자가 생겨났다고 본다. 사실 비자나무의 잎은 가지의 양쪽에 나란히 두줄로 붙어서 머리빗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 배열이 정연하다.
비자 나무는 자웅이주(雌雄異朱)로 암나무와 숫나무가 따로 있는데 책에 보면[숫나무는 가지가 위로 서서 꽃이 피고 암나무는 가지가 처지며 대추와 비슷한 열매가 달린다. 비자나무는 삼나무와 닯았으며 그 목재가 매우 아름다워서 문목이라고도 말하며 이 나무는 깊은 산중에 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야삼이라 말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삼으로 나타낸 나무와는 물론 다른 것이다.
비자나무 열매는 비화라고도 하고 하루에 7알씩 7일간 복용하면 뱃속 기생충이 물로 되어서 배출된다는 기록이 있고 또 비자 3개, 호도 2개 그리고 측백나무잎 1냥을 함께 찧어서 눈녹은 물에 담가서 이 물로 머리를 빗으면 탈모가 방지되고 머리에 윤기가난다고 했다.
비자는 길이가 약 2cm,폭이 약 1cm가량 되는 타원형의 종자인데 맛이 좋으며 50%가량의 지방유를 함유한다. 회충 구제를 위한 처방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즉 한 번에 7~10알을 하루 3번 식전에 먹고 7~10일간 계속 복용하는데 지방성이므로 생으로 먹는 것이 좋다. 또 어린애들이 밤오줌을 눌 때에는 5,6알을 구워서 하루의 복용량으로 한다. 종자에서 얻어지는 기름은 식용유로서 좋고 또 예전에는 등불기금으로 썼고 머릿기름으로도 사용했다.
일본사람들은 비자나무를 가야(kaya)로 말하는데 가야를 한문자로는 문견으로 표현하고[모기를 쫓아버리는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비자나무의 가지나 생잎을 태워 연기를 내면 모기가 접근하지를 못한다. 일본이름은 이 나무의 쓰임새에서 근거를 찾았고 비자나무의 비는 가지에 붙는 잎의 모습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비자나무의 목재는 목리가 곧고 담황색을 띠고 있으며 심재와 변재의 구별이 거의 없고 광택이 나는데 바둑판으로서 크게 숭상된다.
개비자나무를 한자로는 조비로 나타내는데 그 용도가 비자나무와 유사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는 3종의 비자나무가 있다 하는데 그종[본초강목]에 기재된 비수는 우리나라의 비자나무와 매우 닯아 있고 향비, 야삼, 옥비 등으로 말하기도 하며 영명은 Chinese Torreya이다. 종자를 덮고 있는 가종피와 잎에서 향유를 짜내며 이것은 상품화되고 있다 한다.
미국에는 캘리포니아지방에 비자나무가 나는데 미국 인디언들은 이 나무로 활을 만들기도 했으며[캘리포니아 너트멕]으로 부른다. 또 플로리다 지방에도 일종의 비자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비자나무나 미국 비자나무의 생잎은 부비면 나쁜 냄새가 나지만 중국산의 비자나무잎에서는 냄새가 거의 없다고 한다. 미국 비자나무는 나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스팅킹 시이더 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가을에 종자를 뿌리면 이듬해 늦봄에는 거의 싹이 트고 자람도 빠르다. 오염된 공기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병충해도 적다.목재가 단단하고 탄력성이 있어서 소의 코뚜레 재료로도 이용되었다.
2014.03.27 / 글 : 전영철
요즘은 손녀와 대화를 하면 거의 대부분 통하는 수준이 되었다.
어제 저녁 손녀와 놀다가 질문을 하면서 나는 대화다.
"서현아, 바나나는 무슨 색깔이지?"
"노란색요"
그러면 영어로는 어떻게 말을 해?"
"옐로우예요"
"그러면 토마토 색깔은 영어로 뭐야?"
"레드"
마지막으로 농담을 건넸다.
"서현아, 방귀는 무슨 색깔이야? 영어로 뭐라고 해?"
"할아버지 방귀는 투명색이에요."
"투명색이 초록색하고 같은 거야?"
"아니에요, 할아버지 방귀는 색깔이 없으니까 투명색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방귀는 냄새가 나잖아"
"할아버지, 방귀는 냄새는 나지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투명색이라고 해요"
우리는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냈다.
‘생방송 투데이’가 3900원 부부 닭칼국수 맛집을 찾아나섰다.
1일 저녁 6시 5분 방송되는 SBS 시사ㆍ교양 프로그램 ‘생방송 투데이’에서는 ‘살맛 나는 맛집’ 편을 통해 3900원 부부 닭칼국수 맛집 경기 오산시 갈곶동의 ‘천서리 홍진 막국수’를 소개했다.
주요 메뉴로는 닭칼국수(3900원), 멸치칼국수(6000원), 매생이칼국수(7000원), 동치미막국수, 비빔막국수, 메밀온면(이상 6000원) 등으로 무엇보다 3900원에 제공되는 닭칼국수가 집중조명됐다.
그러나 이곳 ‘천서리 홍진 막국수’의 별미는 따로 있다. 메밀만두와 매생이칼국수다.
간장과 함께 나오는 메밀만두는 적당한 크기에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밀가루 만두보다 쫄깃하고 소화가 잘돼 식도락가들에게 인기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간장 소스에 찍어 먹으면 새콤하면서 달콤한 맛이 함께 어우러져 이상적인 맛의 하모니를 연출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인기다.
매생이칼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3900원 닭칼국수와 함께 인기인 매생이 칼국수는 매생이가 충분히 들어가 초록색 국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깔끔한 맛이 장점이다. 당근, 계란지단, 파 등이 고명으로 나오며, 역시 겉절이김치와의 조화가 이상적이다.
갑자기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바람도 매섭게 불어 더욱 추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불어오는 찬바람을 피해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출근길을 재촉했다.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쳐다보며 걸어가는 동안 길가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투박한 플라타너스의 갈색 낙엽, 붉은 단풍나무 잎, 노란 은행나무 잎이 길가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고 길가 가로수로 눈을 돌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퍼런 이파리를 무성히 달고 풍성한 수관을 자랑하던 큰 나무들이 어느새 앙상하게 줄기와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초록의 잎이 어느새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진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게 되면 더욱 이같은 계절의 변화가 민감해진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게 되면 괜스레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푸른 나뭇잎이 생기와 젊음을 상징한다면 가을철의 단풍은 노화를, 초겨울 낙엽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는 온대지역에 자생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같은 형태적 변화를 거친다. 온대기후대에 살고 있는 생물에게 겨울철은 가장 견디기 힘든 가혹한 기간이다. 사람도 가을이 되면 식욕이 증가해 적극적으로 체내에 지방을 축적하여 겨울에 대비한다. 또 옷을 두껍게 입고 난방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데워 겨울을 난다.
우리 눈에는 무심하게만 보이는 식물도 어쩌면 사람 이상으로 적극적인 겨울준비를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를 포함한 식물들은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여름 내내 식물체에 필요한 동화양분을 만들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던 잎에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 단풍이 찾아온다. 식물의 푸른 잎에는 광합성이 일어나는 세포기관인 엽록체(葉綠體)가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할 일을 다 끝낸 엽록체의 초록색 색소인 엽록소(葉綠素)가 분해되어 붉은색을 띄는 안토시안 색소, 혹은 노란색의 카로티노이드와 같은 또 다른 색소로 바뀌는 것이 단풍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엽록소가 파괴되는 기작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재활용을 통한 월동 준비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엽록체 안의 루비스코와 같은 효소단백질은 단백질 분해효소에 의해 아미노산→질소의 형태로 생분해돼 식물체의 줄기나 가지의 피층 조직으로 이동돼 저장된다. 루비스코는 녹색식물에 있어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효소로서 식물 단백질의 10~30%를 차지할 정도의 중요한 단백질 덩어리다. 이렇게 귀중한 단백질 자원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분해해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있는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재활용품을 모두 회수하고 쓸모가 없어진 잎은 잎자루에 이탈층(離脫層)이 생겨 낙엽으로 떨어진다. 잎에서 이동한 질소 저장양분만으로는 월동이 불가능하므로 그동안 열심히 만들어 놓은 광합성 산물인 전분을 세포에 다량으로 축적하고 세포 속의 수분을 탈수시켜 추위에 세포가 쉽게 얼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광합성이 불가능한 추운 겨울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락을 준비하는 셈이다. 이렇게 만반의 겨울준비를 제대로 한 식물은 봄이 되면 또 다시 싹이 트고 꽃도 핀다. 그러나 겨울 준비를 게을리 한 식물은 동해(凍害)에 의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
우리는 낙엽이 져버린 앙상한 겨울나무를 바라보고 절대 우울해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자신에게 처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야무지게 준비하는 식물의 지혜에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준비를 토대로 어둡고 긴 겨울을 견디며 화려한 봄을 기다리는 식물의 인내심을 배우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작금 우리의 주변 환경은 세계적으로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각국의 개인 부채도 심각하다는 등 차가운 겨울 만큼이나 어둡고 고통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묵묵히 추위를 이겨내며 화려한 부활의 꿈에 잠겨있는 식물에 대해 생각한다면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질 것 같다.
◆약력 = △일본 홋카이도대학 농학박사 △중앙대학교 산업과학대학 학장 △환경생태학회 회장 △2011년 녹조근정 훈장 △중앙대학교 식물시스템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