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참으로 경륜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어떤 일에 연륜이나 경험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필자는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 오케스트라, 오페라 공연을 좋아해서 기회 되는대로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그중엔 대작 무대도 있고 대학로 한 귀퉁이의 작은 소극장도 있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연극이라 해도 무대장치가 있고 장면이 바뀌면 내용에 맞는 무대를 보여준다.그런데 무대에 어떤 장치도 없이 오로지 조명 하나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펼쳐진 연극이 이렇게 감동을 주고 마음을 뿌듯하게 하는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오늘 필자는 장충동 국립 해오름극장에서 연극 한 편을 보았다. 연극 제목은 널리 알려진 ‘햄릿‘이다. 너무나 유명하고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연극이어서 별 기대가 없었는데 출연진이 대단했다. 근래 보았던 뮤지컬이나 연극에 아이돌 가수의 출연이 많아서 신선함으로 그것도 재미있게 봤지만, 오늘 연극엔 중견 배우들의 대거 출연이다. 필자의 그리운 젊은 시절 전성기에 이들도 전성기로 널리 이름을 떨친 배우들이어서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아직도 연극계에선 전설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한국 연극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해랑씨가 있다. 이미 타계하신 지 2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후학 양성 사업을 통해 한국 연극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이다. 이해랑 씨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해랑 연극 상을 받은 대한민국 연극계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햄릿을 맡은 유인촌을 비롯해 오필리아 윤석화, 박정자, 손숙, 정동환, 전무송, 김성녀, 권성덕, 손봉숙 씨 등 중후한 배우들이 모여 이해랑 씨를 추모하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햄릿’을 선택했다. 연극 햄릿은 1951년 이해랑 씨 연출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해랑 씨 생전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작품도 햄릿이었다고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이고 이해랑 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햄릿’은 최적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되어 연극이 시작되어도 무대가 썰렁했다. 아무것도 장치가 없었다. 그저 유인촌 햄릿이 나와 독백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무대 위에 아무런 꾸밈이 없어도 시간이 갈수록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을 받았다. 권성덕 씨는 같이 연습했지만, 사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분이 대신 한 외에 9명의 배우만으로 감동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멋진 무대를 보여주었다. 햄릿 유인촌 씨만 한 역을 맡았고 다른 분들은 여러 배역을 맡아 연기한 점도 재미있었다. 참 이상하다. 화려한 장치나 소품 하나 없이도 이렇게 완벽한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들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무대 위라서인지 아마 나이도 꽤 들었을 듯한 배우들이 모두 멋지고 아름답다. 유인촌은 예전 드라마 전원일기의 농촌 회장님 댁 순박한 둘째 아들 모습 그대로 젊어 보인다. 한 분 한 분 개성 있고 완벽한 연기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참으로 배우들의 경륜이 돋보이는 연극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쓸쓸한 독백이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덕수궁 돌담길! 필자가 자주 가는 곳이다. 시내를 나가 시청역 쪽으로 나가면 으레 한 번쯤은 들르는 나만의 공간이다. 가끔 휴식이 필요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필자는 즐겨 이곳을 찾는다.
언젠가 보았던 뮤지컬 ‘광화문 연가’가 생각나는 돌담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담길만을 걷기 위해 찾는 것은 아니다. 이 역사가 서린 돌담길을 걸어 올라가면 특별한 보물창고(?)가 있어서다. 그곳이 바로 서울시립미술관이다. 돌담이 끝나가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시민을 위해 특별히 개방하는 공간이 있다. 천경자 화가의 전시관이다. 생전에 그린 본인의 그림을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전시관에는 그의 소중한 그림과 화가의 체취가 묻어 있는 화실이 생생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크레파스에 물감을 섞어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감으로 이국 소녀의 모습을 그릴 듯하다. 화가는 때로는 고단하고 힘든 생애의 단면을 꽃과 뱀과 우수에 섞인 깊은 눈망울 속에 담았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한다.
전시관에는 화가가 1941년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에서 작업했던 작품부터 1951년 작 그 유명한 '생태', 1977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89년 '막은 내리고' 등 주옥같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1991년 < 미인도>의 위작 사건으로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 그의 생사를 몰라 안타까움을 주었다. 결국, 2015년 8월 6일 그의 장녀가 화가의 유골함을 들고 들어와 천재 화가 천경자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마침내 1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2016,6,14~8.7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작가의 저서 에서 제목을 따온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라는 제목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미술관에 가면 또 다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백남준 10주기 추모전이 7월 31일까지 천경자 전시관 위층에서 열리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예술 거장의 작품을 한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내려와, 앞뜰 벤치에 앉아 가까운 매점에서 까페모카 한 잔을 사서 마시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서울 한 복판에 이러한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시내를 나가면 나는 웬만하면 잠시 짬을 내어 이곳을 찾는다. 옛 정취가 풍기는 돌담길을 돌아 올라가면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향기 그윽한 카페 모카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6월을 여는 아침, 또 한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소식이 전해졌다. 그 청년의 허름한 가방 속에 남겨진 끼니를 때우기 위한 컵라면 한 통이 온 세상 사람 가슴을 울린다. 그 어린 나이에 삶이 고달파서, 아니 너무 열심히 살아서 일찍 데려간 걸까? 남겨진 가족은 어쩌란 말인가. 또 추모가 일상이 되어 버린 현실이 슬프기 만하다.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어느 목사님이 가난한 홈 리스(노숙자)들에게 그날도 컵라면을 주었더니 “목사님! 또 라면이에요? 그~래, 우리 삶은 라면이다.”라고 해서 목사님은 주먹으로 홈리스 머리를 쥐어 박았단다.
“왜요? 삶은, 이거 물에 푹 삶은 라면이잖아요.” 목사님은 어이가 없어 한참을 바라보다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었다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그 라면이 오늘 또 마음을 울린다.
세상의 독한 위험성들은 비정한 것일까? 그것들은 하필이면 가장 빈약한 사람들에게만 먼저 찾아 오는 것 같다. 가장 부려 먹기 좋은 존재, “십대 밑바닥 노동”이라는 기막힌 말 앞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가난한 생계를 위해 작은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험난한 곳에서 일 해야만 하는 근로 빈곤의 시대가 그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노동의 시대라는 단어가 청소년을 덮치고 기업들은 불법 편법적으로 상식을 넘어 과도한 압박으로 힘없고 생활고로 허기진 어린 자들을 쓸모의 대상으로만 삼아 인격적 모독과 함께 춥고 소외된 현장으로 내 몰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정규직이 아닌 비 정규직으로 더럽고 힘든 일은 도맡아야만 하는 사회적 불 안정속에 현실은 비정규 사회가 된지 오래인 듯 하다. 터져버린 사고 때마다 즉흥적 재발 방지 조치가 이루어 지기는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고 그 관리 소홀에 반복되는 판박이 사건들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어디의 책임이라는 걸까?
안전 불감증의 동일한 사고 반복 속에 오늘도 물레방아는 여전히 돌고 있다. 그 책임자들은 큰 문제라고 입술로만 되 뇌일뿐 뒤늦게 현장을 찾아 분주한 권력의 모자로 머리를 포장하고 또 허세를 부린다.
이나라에 태어나 19나이에 먹고 살겠다고 생계를 책임지며 동생 용돈까지 챙긴 고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더구나 생일을 앞두고 앞만 보고 일하며 살아온 젊은이에게 어떤 삶의 미숙함이 있었단 말 인가.
책임을 돌리는 힘있는 자들이 뒤늦게 애써서 보내는 형식적 애도의 표시가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아질 것인지 담담하기만 할 뿐이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인으로, 부모로써 쓰린 마음에 성찰과 안타까움만이 울부짖을 뿐이다.
히 식스(He 6). 1960~1970년대 미8군 무대와 이태원·명동 일대 음악 살롱을 격렬한 록 음악으로 장악하던 여섯 명의 청년(권용남, 김용중, 김홍탁, 유상윤, 이영덕, 조용남)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거울과 같았던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거울 앞에 섰다. 중·장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낭만을 추억하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파파스(PAPAS)’ 밴드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음악만 있다면 언제나 20대로 돌아간다는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히 식스 원년 멤버였던 조용남(曹龍男·69), 유상윤(兪尙潤·68), 김용중(金用中·68)을 주축으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이건태(李建泰·63), 변성용(卞成鏞·63), 와이키키브라더스의 리더 최훈(崔薰·59)이 합세한 파파스 밴드. (다른 히 식스 멤버들은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에 거주해 함께하지 못했다고) 히 식스 2기로 함께 활동했던 고(故) 최헌(1948~2012)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 밴드 결성의 계기가 됐다.
“(조용남)보컬이었던 최헌씨가 작고한 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고인이 되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 수 없으니 같은 팀이던 우리가 그를 위해 연주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렇게 잠시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김용중씨가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뜻을 모았죠.”
당시 간암을 앓고 있던 김용중씨는 자신을 가장 활력 넘치게 했던 젊은 날의 그 음악이 간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으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김용중)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6일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으니 참 행복하고 재밌어요.”
파파스 음악, 중장년 마음의 ‘사이다’
보컬그룹사운드라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베이스-조용남, 색소폰·건반-유상윤, 리듬기타-김용중, 건반-변성용, 드럼-이건태, 리드기타-최훈)과 더불어 모두 보컬을 겸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올드 팝과 로큰롤이다. 젊은 시절 손끝이 닳도록 기타를 치고, 목청이 나갈 정도로 불렀던 노래들이다. 부른다기보다는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나온 기사들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을 ‘폭발하는 젊음의 절규’, ‘화려한 조명 아래 정글에 가까운 노래’ 등이라 표현했으니 말이다.
파파스 밴드의 맏형인 조용남씨는 히 식스 시절 한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통해 위안을 얻는 거죠. 청량음료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참 마음을 (어른들이) 알아달라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중에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이다(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신조어다. 그 시절에 그들의 음악이 바로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것. 위축되고 권태에 짓눌린 젊은 세대의 마음을 톡톡 쏘는 음악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준 그들이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그때의 곡들을 다시 연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상윤)젊은 사람들이 요즘 중·장년은 트로트나 뽕짝 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시 우리에겐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었죠. 밴드 간 경쟁도 대단했어요. 그 치열하던 시절에 심취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패기와 열정으로 함께한 친구들도 같이 있으니 철없던 시절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뭉클한 옛 기억에 잠기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파스의 음악을 듣는 관객 역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곱씹어 본다.
“(최훈)얼마 전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간 한 관객이 자기 블로그에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다’고 썼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오랜 팬과의 음악적 교감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죠. 우리의 음악을 통해 그런 짙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참 뿌듯하고 흐뭇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파파스 세대에게 음악이란 과거의 리듬을 되살아나게 하는 촉매제와도 같다. 조용남씨는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잖아.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그 시절로 확 돌아가는 거야!”라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에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치는 파파스 멤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을 뜨거운 추억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려’로 다져지는 파파스 음악
그룹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믿음소망사랑’의 핵심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최훈. 사실 그도 웬만한 공연에 나서면 대선배 대우를 받지만 파파스에서는 귀염둥이 막내다.
“(최훈)히 식스의 팬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해요. 형님들의 완벽한 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도 전율이 느껴지곤 하죠. 다른 데서는 저도 긴장을 안 하는데 선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늘 신경 쓰고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만큼 록 밴드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그들이지만, 원로(元老) 대우는 사양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상윤)음악 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이라니까. 나는 젊고 싱싱한 기분으로 연주하는데 극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면 어쩐지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에 올랐을 때의 마음가짐은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걸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음악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 무대는 편안한 놀이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과 설렘으로 여전히 손에 땀이 난다.
“(이건태)연주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나 스킬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무대에 임하는 자세는 거의 변함이 없어요.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준비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늘 떨리고 신중하죠. 경력에 상관없이 청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오히려 명성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신경 쓰이고 가슴이 뛰죠.”
그런 그들이 오랜 밴드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삶의 지혜는 ‘배려’와 ‘양보’다. 밴드 음악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파스는 리더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 각 분야의 리더인 만큼 솔선수범하되,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다.
“(이건태)혼자 너무 튀려고 하거나 자기만 잘하려고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죠. 연습하다가 치고받고, 그러다 팀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 파파스 멤버들은 그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요. 밴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게 옳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세련되고 성숙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동안 변성용씨는 유독 말이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멤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그들이 말하는 팀워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팀 내 건반을 맡아 부드러운 멜로디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들의 무대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Boxer’, ‘Hotel California’ 등 팝을 비롯해 ‘초원의 빛’, ‘물새의 노래’ 등 히 식스 시절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한다. 대부분 30~40년 전 노래이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진 ‘사랑은 무슨 사랑’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했다. 이 곡은 1997년 조용남씨가 속해 있던 ‘2040 밴드’의 멤버인 김기표가 작곡했다. 20년 가까이 된 노래이지만, 당시 이미 중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음악 속에 묻혀 산 나날/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날의 꿈은 어디에/ 내 열정은 어디에/ 뒤돌아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 가거라 아주 가거라/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나이 몇이더냐/ 이제부터인 것을…’
전반부는 담담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인다는 노랫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조금은 씁쓸하게도 느껴지는 가사이지만, 그들은 “그거야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동고동락한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가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파스 멤버들이다.
나이가 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앞에서는 늘 새로 태어나기 때문. 타이틀곡의 마지막 구절을 힘 모아 불러보는 그들이다.
“이제부터인 것을!”
집 밖으로 나서면 초록빛 싱그러움을 흠뻑 느낄 수 있는 6월. 그래서 이 계절에 숲길을 걷는 건 언제, 어디서나 즐겁다.
어딜 걷는다 해도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6월에 걸으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길이 있다. 나라를 위해 충의를 다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깊은 산 속 정취까지 느낄 수 있는 곳, 국립현충원과 서달산을 잇는 동작충효길 1코스, 2코스가 바로 그 길이다. 국립현충원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정문을 들어서면 묘역을 넓게 감싸고 있는 산 위 풍경이 아름답다. 50년 동안이나 산림을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던 덕에 수풀이 우거지고 공기가 신선하다.
국립현충원은 한국전쟁 전사자는 물론 국가원수,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등 국가를 위한 공로가 현저한 자들이 안장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니 이곳은 충의를 갖고 나라를 위했던 사람들의 유훈을 들어볼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전직 대통령 묘역에서부터 장군 묘역, 일반병사 묘역을 둘러본 뒤 현충원 안의 연못, 공작지에서 호국 영령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이 숲 속 벤치에 앉아 있으나 새 소리만 무성할 누구의 목소리도 방해하지 않아 사색하기에도 참 좋다.
국립현충원을 돌아보고 상도출입문으로 나오면 서달산 숲길과 바로 연결된다. 편안하게 만들어진 숲 속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양손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서달산은 해발 179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숲이 무성하다.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만나는 풍경이 다채로워 걷는 재미가 있다. 이 길의 자랑은 곧게 뻗은 잣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잣나무 숲길이다. 먼 곳에 있는 자연휴양림에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잣나무가 우거져 있다. 거기서 잠시 쉬며 잣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무장애길도 조성돼 있다. 총 463m 목재산책길로 만들어진 이 길은 경사로 8% 미만에 소나무, 잣나무, 산벚나무 등이 심어져 삼림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 중턱에 만들어진 녹색쉼터는 걷기 불편한 사람뿐 아니라 잠시 쉬며 산속 공기를 마시려는 사람들에게도 인기만점이다.
이 길이 좋은 점은 간편한 복장으로 생수 한 병 손에 들고 손쉽게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동작충효길 1코스 고구동산길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시작할 수 있고, 2코스 현충원길부터 걷고 싶으면 지하철 4,9호선 동작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 뒤에는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음을 기억하기에, 6월엔 충의 기개로 가득 찬 현충원에서 서달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걸으며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었으며 현대 시각에 맞춰 다시 쓴 이중환의 고전 ‘택리지’를 포함한 78권의 책을 쓴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의 사색을 전파하는 길 위의 인문학자 ‘자연대학 총장’, 신 이사장이 말하는 걷기의 힘, 걷기의 철학.
“강변의 모래가 아름답다고 쓴 걸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들, 걸으면서 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본 것들이 곧 내 살이 되고 정신의 활력소가 된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말은 나이 들어서 천천히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요. 마사이족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걷는데 그건 아프리카에나 맞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아요.”
우리나라 곳곳은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마사이족 얘기처럼, 요즘 걷기는 소위 건강을 추구하는 걷기가 유행이다. 이 시대에 신 이사장이 생각하는 걷기란 무엇일까?
“겨울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만저우리(滿洲里)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야만 가고 어떤 때는 자작나무숲만 가고 했죠. 그 길을 가면서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골짜기도 많고 산도 많고, 땅은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곳곳은 어디나 도서관이고 박물관입니다. 허투루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게 걷기 문화예요. 그래서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몰라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요.”
신 이사장은 많이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정상까지 안 가도 된다. 중간쯤 가면서도 많은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서는 멀리 바라본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너도 나도 같이 쏠려서 일행이 함께 가는 것은 자기의 자아를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에 휩쓸려 가는 것이지 않나요.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러지만, 많은 시간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칸트, 니체, 루소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도 걸으면서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해파랑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걷고 싶다
한강 길만 네 번을 걸었고, 낙동강은 세 번, 관동대로를 두 번, 서해안, 임진강, 영산강 등등…. 신 이사장이 지금까지 걸은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 것이다. 그러한 길들 중 어느 길은 모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해파랑길이 있다.
“2008년만 해도 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제가 제안한 길이 거의 길이 됐어요. 변산마실길, 소백산자락길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답사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게 해파랑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파랑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없어요. 저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거쳐 러시아,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혼자선 못 걷겠는데요’라고. 그럼 3대가 걸으면 되죠(웃음).”
2014년 완공한 해파랑길은 선비들이 걸어가던 관동팔경길, 낙동강변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 현대인들이 걸을 수 있게 재정비 했다.
신 이사장에게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지고 시설이 좋은 게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인 게 좋아요.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재지에서 명호면까지 이어지는 낙동강길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기는 한나절을 걸어도 길 물을 사람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에요.”
여기저기를 보고 느끼며 빠져드는 즐거움
신 이사장은 ‘해찰’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찰은 순우리말로 ‘쓸데없는 다른 짓’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신 이사장에게 해찰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걸으면서 유독 여기저기를 보고 확인하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길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마치 도반(道伴)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길동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많다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인생 자체가 길과 같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첫눈에 반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대를 다니던 운동권이어서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신약성경 하나를 갖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42일간 훈련을 함께 했었죠. 이후에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그 친구가 ‘신정일, 너 공부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인정해주니 참 좋았어요. 이후로도 그 친구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간 게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자유를 구속당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신 이사장과 김지하 시인, 신영복 교수,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도 길을 타고 만나게 된 기연이다. 신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 애독자 중 하나였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신 이사장에게 동학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됐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학농민운동가인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1993년 5월에 세우게 됐는데,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싶었어요. 그때 만나던 김남주 시인이 신영복 선생을 소개해 주셔서, 신영복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됐습니다. 4월에 연락이 왔죠. 글을 써놨으니 자택인 목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그때 가서 비문을 받고자 하는데 김지하 시인 얘기가 나와요. 그날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려고 파리공원을 갔는데 한 200m쯤 떨어진 자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지남철에 끌려가는 것처럼 갔더니 사진에서 보던 김지하 선생이었어요.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며 동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인연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님, 곧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의 팬이라고, 오늘 자신이 전화할 것이니 전주에 가서 박경리 작가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박경리 작가도 만나 두 시간여 담소를 나눴다. 에서 나오는 김개주가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그날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후배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도 안 쓰더라는 작은 불평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연이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상하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꾸밀 것이 없어요 인생 자체가. 인생은 자기 소신껏 사는 것이죠.” 도인의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로 적용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신 이사장 또한 사람이다. 욕심도 생기고, 뭔가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가고 부모 재력도 있었지만 저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책을 쓰기 전에는 변방에서 시인들 뒷바라지나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글을 쓰고 걷기만 한 거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삶의 지표였었죠.”
말의 행간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것처럼, 신 이사장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일 두드려 맞고 책을 뺏기다가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교를 관뒀다. 그 후에 그는 14살에 가출을 했고 15살에는 출가를 했다. 출가한 지 두 달만에 스님이 ‘넌 여기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 살아라’라고 말해서 절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그지만, 역경은 그의 삶에 꾸준히 자리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겨냈다.
“돌이켜보면 저는 인생 중에 한 달 남짓 행복했어요. 그런데 한번 헤아려 보세요. 행복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가. 헤아려보면 많지 않아요. 연암 박지원이 누나 제문을 쓴 걸 보면 ‘어찌 이리 짧더란 말이냐. 왜 슬프고 가난하고 곤궁했던 일들만 많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죠. 다 그래요. 인생 자체가 그래요.”
그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들뢰즈가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좋아해요.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문자조립공’의 나이 들지 않는 길
신 이사장은 태어나 최초로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다. 690원. 그는 그 돈으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 세 권을 사고 나머지 90원으로는 라면 몇 개를 사서 한 달 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제대할 때가 되자 2만원을 갖고 나오게 됐는데, 그 돈을 종로서적에 가서 책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때 그는 종로서적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과연 내가 쓴 책이 저 자리에 꽂힐 날이 있을까’ 되물었다고 한다. 물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 이사장은 교보문고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정선으로 열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 출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표였던 시절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을 데리고 섬진강을 걸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꿈을 꾸자. 꿈은 공짜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을 ‘문자조립공’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어느덧 일흔여덟 권에 이른다.
“글 쓰는 사람은 모두 ‘문자조립공’이에요. 한문은 몇 만 자를 다뤄야하는데 우린 스물네 자만 다루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요즘 부쩍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신 이사장은 카프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연암 박지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는 내 곁에 놓고 가끔씩 펼쳐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에서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요. 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명예도 사라지는 것인 만큼 부럽지 않아요.”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신 이사장의 마지막 말은 길과 인생에 대한 소회이자 해법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니,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기적인데 깨닫지 못하면 기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기적에 가까이 닿아 있는데, 마땅히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꽃은 환희의 절정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의 축복이다. 인간 세상에 꽃이 없다면 단 며칠도 생명을 유지할 식량을 구할 수조차 없다. 꽃은 지극히 소중하고 귀하면서도, 너무 흔하게 널려 있다. 아기가 연필을 잡으면서 제일 먼저 그리는 것도 꽃이며, 출생의 축하 꽃다발에서 생일, 입학, 졸업, 결혼,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도 꽃송이로 추모한다.
모든 화가들이 꽃을 그리는 데는 어떤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일까? 갓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에서 마른 꽃묶음까지 다양한 형태의 꽃그림을 보며 우리는 화가들의 속내를 엿보려 한다.
여러 해 전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국내 은행 합병에 따른 소장 미술품을 경매에 올린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화가들의 전시회를 통해 그림을 구입하거나, 유수한 화랑에서 구입하므로 출처, 진위 등은 염려할 필요가 없고 다만 작가와 가격에 유의하면 된다.
평소 전시회를 관람하며 눈에 담아 두었던 김경희(1948~ )화가의 꽃그림 ‘또 하나의 열정’을 그 경매에서 만나 운 좋게 낙찰 받았다. 80호 크기의 대형 그림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작가는 건축학을 전공하였지만, 일찍이 박고석(1917~2002) 화백과 전상수(1929~ ) 화백을 사사하여 화업을 닦고 미국 유학 중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다.
여느 화가들이 원색 쓰기를 저어하는 데 반하여, 과감한 원색을 자유자재로 풀어낸다. 거칠 것 없는 대담한 붓질로 빚어낸 색채의 흩어짐과 모임이 스케일 큰 구도 속에 ‘정물화’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킨다. 그믐밤 즈음의 화원에는 붉은 맨드라미가 꽃대를 뽑아 올리며 꽃무리를 이끌고 있다. 무당벌레가 은밀히 속삭이고, 고추잠자리 한 쌍도 꽃 위에 앉으려는 찰나가 설화처럼 고즈넉하다.
붉은색과 초록의 대비도 좋고, 왼쪽 위로 열린 하늘에 이우는 달빛과 흩뿌려진 별들의 점묘도 화려하다. 꽃의 환희이며, 도도한 생명의 예찬이다. 이 작가의 수채화들 또한 속기를 벗어난 명징하고 고아한 정신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작품 입수가 어렵긴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어떤 그림을 수집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잡지 ‘월간미술’ 1996년 3월호는 서병기(1919~1993) 화가의 ‘작가발굴’ 기사로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서병기는 1930년대 서양화의 메카라는 대구 지방을 중심으로 이인성(1912~1950), 서진달(1908~1947), 주 경(1906~1985) 등과 함께 미술활동을 했다. 그는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였으나, 가정사정으로 중도에 귀국하였다가 다시 출국, 소미야 이치넨(曾宮一念· 1893~1994) 화백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광풍회’와 ‘춘양회’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첫 국내전을 열었고, 1963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 것이 국내전의 전부다.
그 해 일본에서 2인전을 열어 일본 화단의 큰 호평을 받았고, 1979년에 세 번째 개인전도 일본에서만 열렸다. 저간 십여 년의 열정이 녹아든 이 전시에 35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고 전한다. 대구의 대저택에서 1964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1973년에는 부인과 사별했다. 유난히 금실이 도타웠던 그는 거의 매일, 경기도 송추 인근의 부인의 묘원을 찾곤 했다고 유족들이 전한다. 그곳의 풍광을 눈에 가득 담아 와서 찬찬히 화폭에 옮겼다. 아내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화필에 녹아 한 송이 두 송이 눈물어린 꽃이 되었다.
몇 해 전 인사동 어느 화랑에 서병기 화가의 작품이 입수되었다기에 즉시 달려가 아홉 점의 그림을 일괄 구입하였다. 모두가 두터운 종이에 유채로 그린 10호 안팎의 보관상태 만점인 그림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돌아와 그림 한 겹 한 겹 고급한지를 풀어 놓은 탁자 앞에 우선 침향(沈香)을 사르고, 죽로차 한 잔을 올리며 경외의 배관(拜觀)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꽃그림이 여섯 점이고, 풍경화가 석 점이었다. 장미, 모란, 산나리, 아네모네들의 향내가 은은히 어리는 듯하였다. 짙붉은 모란 앞에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당에 서너 포기 모란이 필 때면 묵객과 더불어 김영랑 시인의 절창 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염송해 왔기에 그 감회가 더하였다. 꽃병에 세 송이 만개한 모란이 잎 사이로 붉은 해 같은 광채를 발하고, 소용돌이처럼 오른 방향의 붓질과 달리 잎새들은 왼쪽으로 원을 그려 율동감을 주고 있다. 꽃병에도 꽃과 잎의 그림자가 어려 운치를 자아낸다. 저 세상 아내에 대한 피맺힌 사모의 헌화이리라.
이태 전 이른 봄 남도 여행 중, 담양의 소쇄원(瀟灑園) 제월당(霽月堂) 오백 년 된 마루에 반백년 친구와 나란히 앉아, 바람에 흩어지는 매화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 아련히 이어지는 먼 꽃길 사이로 가물가물 아련한 솔바람 길에서부터 한참의 세월을 담연한 눈빛만으로 되짚어 보았다. 설핏 대 그림자 사이로 꽃잎은 날아가는데 얼룩진 눈을 닦으며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글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joonlee@empas.com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