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묻혀 있던 기억들이 클로즈업된다. 빙렬을 따라온 과거의 시간들은 오늘의 사연과 물들며 포개진다. 누군가의 서사를 복원해내듯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은 우리 삶의 무늬를 빼어 닮았다. 최영욱(崔永旭·55) 작가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달항아리도 그랬다. 부정형의 자태는 과묵하고 겸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지쳐 있던 그에게 한마디 건네는 것 같았다. 위로받듯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집에 돌아와서도 당당한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달항아리를 그린다. 빙렬(氷裂, 도자기를 가마 속에서 굽는 과정에 생기는 균열)을 미세한 선으로 표현할 때는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한다. 무아지경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백색 돌가루와 젯소(gesso,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섞어서 올린 후 사포로 살짝 문지르기를 100여 번 반복하며 정성을 들이는 과정은 도공의 예술혼 못지않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무렵.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입시미술 학원을 접고 다시 붓을 잡았을 때다. 홍익대학교 미대 합격생의 20~30%가 그의 학원 출신일 만큼 명성이 높았지만 다시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자 결심하고 과감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오자 뭘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작가들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저만의 표현 기법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전업 작가를 선언했는데도 입시상담 문의가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년 정도 지낼 계획을 세우고 캔버스를 150개 챙겨 갔습니다. 뭐를 그리든 다 채우고 돌아올 작정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렀다가 한국관에서 우연히 달항아리를 보게 된 거예요. 품에 안기듯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신기했던 것은 한없이 수수해 보이고 심지어 제 신세처럼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 백자가 어느 순간 당당하게 보이는 거예요.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종이에 달항아리를 그려봤어요. 백자의 빙렬은 청자보다 많지 않지만 상상으로 표현해봤죠.”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대호(白磁大壺)의 또 다른 이름. 그 시대의 물레로는 한 번에 만들지 못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여야 했기에 부정형(不定形)의 형태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비대칭의 곡선이 오히려 감식가와 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최 작가도 뉴욕 한복판에서 만난 달항아리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특히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이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철학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품은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구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Scope Art Fair Miami’에서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세 점이나 사갔다. 최 작가가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였다.
“행사 때 제 그림은 아트페어 구석에 걸려 있었죠. 어느 날 ‘빌앤멀린다 게이츠’ 재단 홍보 담당 수석이 오더니 구매하고 싶다고 했어요. 순간 ‘빌 게이츠가 평소 백자에 관심이 있었나?’ 궁금했습니다. 다음 해에 재단에서 시애틀에 지은 건물 완공 기념식에 건축가와 작가들을 초대해 저희 가족도 한복을 입고 참여했죠. 아내가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싼 백자랑 놋수저를 빌 게이츠에게 선물했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의 아버지가 40여 년 전 한국으로 여행 왔다가 경복궁 근처에서 달항아리를 사갔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백자를 곁에 두고 지낸 거지요. 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집에서 봤던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후 그에게는 ‘빌 게이츠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더불어 달항아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적 표현 기법을 부여한 작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달항아리를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세계적인 소재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달항아리냐, 참신하지 않다, 메시지도 좀 더 찾아봐라” 하며 염려하는 지인들이 있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냥 좋은 작품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회적 역할을 고심하며 메시지를 담는 작가는 이미 많습니다. 제 그림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벽지를 바라보듯 편안한, 문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무늬 같은 작품이길 바랐어요. 길가의 나무처럼 점점 정이 드는 풍경이 있잖아요. 어느 날은 시들어버린 것들에 시선이 갈 때도 있고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면 좋겠습니다.”
‘빙렬’에 담긴 의미
그는 “달항아리의 꾸밈없이 단순한 모습과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비밀한 내면에 자주 머무르며, 삶의 들숨과 날숨에 귀 기울인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는 그의 몸속 깊이 내재된 성향으로 보인다.
“저는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어요. 속세의 잡다한 것들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둥글둥글 이해하며 포용하는 삶.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달항아리를 소재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어요. 그림도 훌륭한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술에 대한 정신적 지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그는 ‘카르마’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어 달항아리 연작을 발표해왔다. 그에게 카르마란 어떤 의미일까.
“처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진 않았어요. 달항아리의 빙렬을 표현하려면 며칠 꼬박 앉아 그려야 합니다. 이상하게 저는 그 시간이 좋더라고요. 실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 시절도 떠오르고, 다퉜던 친구들도 그립고, 어느 날은 내가 왜 여기 앉아 도자기를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마치 제 인생길을 되돌아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백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가 자그마한 게 예뻐서 하나 샀어요. 그러고는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어느 날 달항아리를 그리다가 문득 그날이 떠오르면서 ‘그때 왜 백자를 샀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인사동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시절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지금 저는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잖아요.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우연성, 그것들이 모여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요. 그때부터 카르마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도 어쩔 수 없이 균열투성이다. 최영욱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빙렬을 그려낸다. 그리고 카르마로 이어지는 무수한 균열들은 해독할 수 없었던 존재의 운명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이 된다.
삶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최영욱 작가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본 지인들은 그의 달항아리 그림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초기 작품인 풍경화, 추상화를 그릴 때도 즐겨 쓴 색채는 흰색 회색이 주조를 이뤘다는 것. 보일 듯 보이지 않게 그리는 화풍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학교 때 흰색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흰색이 너무 좋아 노트에다가 ‘나는 하얀 테이블보가 좋다, 국화 중에서는 흰 국화가 좋다’고 끄적이기도 했지요. 아쉽게도 백자가 좋다는 말은 없었네요.(웃음) 지금 생각하니 달항아리 그림을 위해 하나하나의 우연들이 저도 모르게 연결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교와 허식이 없는 백자만의 소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무채색으로 경계를 허물어버린 듯한 표현 기법 때문일까. 그의 달항아리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제 그림은 큰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어서 어떤 분들이 관심을 가질까 궁금했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화가 된다고 하네요. 제 작품 전시장에 오신 한 할머니는 달항아리 앞에서 눈물을 훔치시더래요. 왜 우시냐고 물어보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왜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면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달항아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화해의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거잖아요. 어떤 분은 제 그림을 걸어놓고 차 마시고 명상하는 방을 꾸몄다더군요. 저도 작업실을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그런 공간을 하나 만들어볼 생각입니다.(웃음)”
나이 들면서 그는 알게 됐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편한 결론이지만 그래서 자꾸 내려놓게 된다. 작업에 대한 강박도 버렸으니 이제 그의 달항아리가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면서 나를 케어해준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소탈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아마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업에 대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확신을 가진 자유인이 아닐까 싶다.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김목경(60)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롯이 홀로 서서 자신의 일가를 이뤄냈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남자, 김목경의 이야기는 고독하지만 당당한 인생찬가였다. 그를 통해 신중년 시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해봤다.
촬영 협조 청파동 블루스소사이어티
우리나라에서 블루스는 ‘부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빠른 리듬의 노래들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느린 템포로 나오는 사교댄스에 가까운 음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통파 블루스란 현대 록 음악의 기원이며 다양한 장르에 강렬한 영감을 준, 사실상 팝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장르다. 한국에서 정통파 블루스 뮤지션을 말할 때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김목경이다. 올해 나이 예순.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대에서 말 그대로 ‘살고 있는’ 현역 음악인이다.
“한국의 에릭 클랩튼이란 말은 듣기 싫네요. 그냥 김목경으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젊었을 때는 에릭 클랩튼을 많이 연구했으니까 기타 플레이가 비슷했을 텐데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이니 지금은 에릭 클랩튼과 비슷하지도 않아요.”
블루스의 성지에 서다
김목경은 천생 음악인이다. 그는 음악을 하며 산 인생에 대해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들이니까. 돈이 되든 안 되든 매순간을 즐기며 사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또래 친구들 중에 돈 많이 번 사람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있는데 다들 저를 제일 부러워해요.”
그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도 음악이었다. 그는 2003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블루스의 성지인 미국 멤피스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다. 그때 조 카커, 쉐릴 크로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만 초청된 자리였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대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 확고하게 굳혔다.
“제 인생 최고 보람이었죠. 그 무대에 서고 난 뒤 일본, 인도네시아 등에서 초청이 계속 이어져서 공연을 다녔어요.”
블루스는 감정이자 반추상화
사실 우리나라에서 정통 블루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블루스의 최고 대가가 생각하는 블루스론이 궁금했다.
“블루스는 감정으로 해야지 테크닉이나 손재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재즈는 테크닉과 음‘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재즈는 그림으로 말하면 추상화예요. 반면 블루스는 반추상화. 약간 정형화되어 있으면서 추상의 느낌이 있는거죠.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 있어 재즈는 무한대에 가까워요. 음을 벗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재즈죠. 그러나 블루스는 그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요.”
기타가 텐션이 살아 있어 쫄깃쫄깃한 음을 낸다고나 할까. 블루스는 마치 희롱하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맛이 난다. 아마 그가 말하는 ‘넘을 듯 말 듯 한다’는 게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블루스는 Blues, 블루(Blue)에다 에스(S)를 붙인 거예요. 블루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외로움, 차가움, 쓸쓸함이죠. 블루스가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처음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기에 그런 인상이 있어요. 블루스는 17~18세기 미국 식민지로 건너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음악입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어떤 음악적 지식도 없었죠. 그런데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읊조리듯 노래를 했어요. 그게 블루노트고 블루스의 음계죠. 백인들이 어느 날 그걸 들어봤는데 자기들이 쓰지 않는 음계였어요. 신기했겠죠. 그래서 그 음계를 훔쳐와,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음악과 접목을 한 거죠. 록큰롤은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청계천 ‘빽판’이 알려준 진실
그렇다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삶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 사는 김목경은 어떻게 블루스라는 영역에 매혹된 걸까?
“어렸을 때는 통기타를 쳤어요. 그때는 롤링스톤스와 레드 제플린 흉내 좀 내보고 싶어도 어려워서 못하던 시절이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청계천에서 ‘빽판’을 사러 다니는 게 낙이었어요. 학교 가면 애들이 빽판을 가져와서 ‘너 이거 있냐?’는 식으로 겨루곤 했죠.(웃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반 레코드를 불법 복제해 만든 ‘청계천 빽판’ 수집은 음악 검열을 하던 시대에 제대로 된 음악을 듣고 싶었던 이들의 은밀한 취미이기도 했다. 불후의 팝 명곡으로 여겨지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검열로 들을 수 없었던 시절, 청계천 빽판이라는 불법 유통망은 금지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명이 기타를 치고 있는 두 장짜리 앨범이 있더라고요. 그림이 멋있어서 샀지. 집에 와서 틀었는데, 그 앨범에 기타의 모든 비밀이 들어 있었어요.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스톤스나 다 그 음악을 베낀 거더라고요. 그게 바로 블루스 음악이었어요.”
3개월 가기로 한 영국, 6년을 살다
1984년, 김목경의 대학 시절 원래 전공은 일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해야 할 때였는데, 겨울에 제대하는 바람에 가을에 복학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생겼다. 딱 3개월만 영어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께 얘기해서 3개월 지낼 비용만 받고 영국을 갔어요. 그런데 갔더니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한참을 더 머물러 있다가 1990년도에 귀국하게 됐죠. 그런 이유로 난 데뷔가 되게 늦은 편이에요.”
3개월만 있다가 오겠다는 외동아들이 장장 6년 동안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부모님 속은 오죽했을까.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게 미안하지. 죄지. 너무너무 죄송해서 이제야 이번 앨범 신보에 음악을 만들어서 넣었어요. ‘엄마 생각’이라는 연주곡이에요.”
단 3개월 머물 비용만 갖고 가서 6년이나 있었으니 영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당연히 궁금했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4~5가지 일을 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배운 시기였어요. 아침에 여행객이 오면 버스 태워서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호텔에서 아침 먹은 후 일본 식당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죠. 점심은 그 식당에서 먹고, 네 시부터는 페인트칠을 했어요. 이게 벌이가 가장 짭짤했죠. 그리고 저녁 여덟 시부터는 클럽에서 연주를 했고요. 그러면서 돈을 좀 벌 수 있었죠. 쓸 시간이 없었으니.”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원래 건전가요
영국에서도 당연히 블루스 밴드 활동을 했다. 그러다 1988년, 1989년 즈음에 앨범을 녹음했고, 마스터 테이프를 갖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테이프는 서라벌레코드 사에서 발매된 그의 1집 앨범이 됐다. 나이를 생각하면 다소 늦은 데뷔였다.
“그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앨범이 될 듯 말 듯 하는 게 있었어요. 에이, 그러면 한 장만 더 내고 가자 하고 한 장을 더 냈는데, 그다음에는 계속 한국에 있게 된 거죠.”
그렇게 낸 데뷔 앨범에 저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 김광석이 불러서 유명해진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처음 노래 부른 이가 바로 김목경이다.
“1집 맨 밑에 있던 곡이었죠. 넣을까 말까 하다가 넣은 건데, 그때만 해도 건전가요를 하나씩 넣어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래는 건전가요로 쓸려고 넣은 거였죠. 그런데 그거 말고 건전가요를 따로 또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저작권 덕분에 많이 도움이 돼요.(웃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씩 연습
“기타는 나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기타로 하는 거야.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 연주할 때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연주하는 거죠.”
김목경은 지금도 매일 배우며 산다고 말한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은 컴퓨터 틀어놓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 시간 동안 하는 연습이다. 매일 지키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
“연습을 안 하면 금방 티가 나요. 무대에서 바로 드러나죠. 내가 원하는 플레이가 나와야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는 말 그대로 무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일주일에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한다 가정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공연할 수 있을지를 계산해봤다.
“내 남은 생애에 오백 번을 못 넘긴다고 나오더라고요. 숫자 오백 번이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지더라고요. 에릭 클랩튼이나 비비 킹이 돈은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그렇게 계속 공연을 간절히 원했는지 이해가 됐어요. 그 순간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어디든지 가요. 어디든지. 그렇게 해서 좋은 점은, 공연 횟수도 채울 수 있고(웃음) 내가 항상 준비될 수 있다는 거예요. 항상 무대 사운드에, 무드에 젖어 살 수 있는 거죠.”
그 대답만 들어도 그가 왜 행복한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철저한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김목경은 최근 신보 녹음을 끝마쳤다. 그의 정규 앨범으로는 일곱 번째 앨범이다.
“총 아홉 곡 중 일곱 곡은 내가 만든 거고 두 곡은 남의 곡이에요. 한대수 씨 거 하나와 옛날 록 그룹 무당의 노래 리메이크 하나. 타이틀곡은 고민 중인데 ‘산을 돌아’로 할까 ‘더 블루스 밴드’로 할까 고르고 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곡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그 전에 그러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곡을 만들어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기타리스트 김목경, 무대에서 늙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거 없는데? 건강관리? 담배 피고 술 먹고.”
소위 말하는 웰빙 라이프와는 거리가 한참 먼, 뭔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음악인다운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목경은 최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한 깊이는 젊었을 때와 큰 차이 없는데, 밴드하고 연습할 때 뭐가 잘못되면 예전에는 날카롭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잘못됐을 때 내가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둥글둥글 넘어가주죠. 이게 나이 먹으면서 좋은 점이기도 해요.”
브라보 공식 질문인,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우직하게 “기타리스트 김목경”이라고 대답했다. 초지일관 그다운 대답이었다.
“앞에 ‘좋은’이 붙으면 더 좋고.(웃음)”
그는 이미 삶의 상당 부분을 확신하고 확정지었으며 이제 그곳에서 즐거움을 퍼 올릴 일만 남은 사람이다. 자신만의 답도 찾아냈고 그걸 실현시킬 능력도 갖춘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저는 지금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래서 무대에 서지 못할 때까지 하고 싶은 거죠.”
올해 60의 나이가 된 그가 부르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노래 맛은 어떨지 오늘 밤에 소위 그의 ‘나와바리’인 논현동으로 노닐러 가볼까나. 헤이, 브라보 블루지 라이프!!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공자(BC551~BC479)는 ‘논어’ 양화편(陽貨篇) 26장에서 “마흔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볼 것이 없다(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고 설파한다. 스스로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으니 마흔 살을 인격이 형성되는 때로 본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도 “태어날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다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서 공자는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뒤에야 군자다운 것이다(文質彬彬 然後君子)”라고 쓰고 있다. 사람의 얼굴과 인성을 언급한 예는 얼마든지 더 많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화상’이나 ‘자소상(自塑像)’ 작업이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 거울을 보고 스케치하자면, 극사실의 사진처럼 묘사할 수는 있겠으나, 얼굴 내면의 깊은 속내를 표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성인이 되고 한 20여 년 지나오면서 가정적으로 일가를 이루고, 사회생활의 역경을 체험하며 얼굴도 그 과정을 따라 변할 수밖에 없을 터다.
박근자(朴槿子, 1932~) 화가는 영화감독 유현목(兪賢穆, 1925~2009)의 아내로 잘 알려진 여성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입문하며 유 감독과 결혼. 그러나 자녀가 없어 마음의 빈 공간을 그림 그리기로 채워나갔다.
“현미경 사진을 보면 확대된 자연 속에 이미 추상화가 존재함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인간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고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있어요. 자연은 확대해 볼수록 정교하고 조화가 있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거칠어지고 부조화가 나타나요.” 추상화의 변이다. 1973년 이래 1979년까지는 “내 자신에 내재 된 ‘속 얼굴’을 캔버스에 형상화하기 위해 고심하였다”고 ‘얼굴’ 전에 쓰고 있다. 얼굴만을 주제로 서너 차례 개인전도 열어 호평을 받았다.
박 화가는 1969~1970년에는 한 일간지의 임시 해외 특파원으로 글·그림 취재차 세계여행을 하며 유려한 문체와 수준 높은 드로잉으로 신문 지면의 격을 높였다. 1977년에는 에세이집 ‘얼굴’을 출간하기도 했다.
“50년대 초반 미술대학 시절부터 ‘얼굴’이란 소품은 하나의 습작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얼굴’이라는 소품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뜻을 지니고 계속 구현되고 있는 변치 않는 유일한 화제(畵題)이다.” 에세이집에 있는 박 화가의 글이다.
[그림1]은 1979년의 전시회 출품작 ‘푸른 눈의 소녀’ 이다. 박근자 화가의 그림은 너무 귀해서 실물을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0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 규모가 작고 작품들도 적어서 화랑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품 수집가이면서도 학술적 연구의 궤적이 큰 분에게서 두 점의 드로잉을 입수했다. 마치 큰 보물을 얻은 듯 가슴에 꼭 안고 돌아오는 길이 행복했다.
종이에 수채와 크레용으로 단숨에 그린 ‘얼굴’의 반쪽은 파란 유리 빛에 물들어 있다. 두 눈은 연녹색으로 크기와 각도가 어긋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어 깊은 사색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슬며시 맑고 투명한 속내가 엿보인다.
신양섭(申養燮, 1942~)은 언필칭 발군의 화가다. 서라벌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8~1981년 연 4회 국전 특선을 하고 1981년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국전 대통령상은 화가 지망생에게 최고의 영예이며 해외 견학의 기회까지 주어져 견문과 식견을 넓히는 디딤돌이 된다.
신 화가는 50여 년 미술활동을 하면서도 350여 점의 작품만 남겨 과작(寡作)의 작가로 유명하다. 또 다른 별호는 ‘흰색의 화가’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흰색 바탕에 흰색의 질료로 고향의 산천, 오두막, 소, 새와 들 등을 묘사하며 두터운 마티에르로 평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1989년 ‘하얀 추억’이라는 타이틀의 전시에서 그가 출생해 유년을 보낸 충청도 시골의 소소하고 칙칙한 풍경들을 마음으로 정화해 흰색을 주조로 한 환원의 작품세계를 나타냈다면, 2010년 인사동 노화랑에서 8년 만에 연 초대전에서는 ‘내 안의 풍경’이라는 주제를 통해 흰색을 주조로 하되 캔버스에 면섬유나 종이부조 등을 붙이고 채색도 좀 더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작품세계를 성찰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선 시간과 수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잖아요.” 과작의 변이다.
“신양섭의 작품은 마치 흙벽의 푸근한 질감을 연상케 한 바 있으며 시골의 담 벽이나 부엌의 연기에 그을린 아궁이처럼 정감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마음의 풍경‘은 자기 속에 걸러진 것, 물고기와 사람, 나무와 새, 여인과 교회 등 아무런 맥락도 갖지 않는 사물들이 서로 비집고 자리함으로써 또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범신(汎神)적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라 평론가는 정의했다.
[그림2]는 1989년 ‘하얀 추억’ 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유년의 부친 얼굴이거나, 사십 중반의 작가 자화상일 것이다. 흰 바탕에 두터운 물감을 덧바름으로써 질박한 얼굴을 표현했다. 머리며 이마, 눈, 코, 입 모두 범상치 않다. 입술의 연붉은 채색은 언어로 그 무엇인가를 소통하려는 메시지로 읽힌다. 내면에 관류하는 복잡한 사유가 뒤엉켜 흘러넘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구름을 그릴 수 없듯, 마음속 희로애락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표정을 그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로부터 많은 화가들은 그 마음결의 한 끝이라도 그리고자 애써왔다. 살아오면서 ‘더럽혀지기 이전의 순결한 마음’을 찾을 수 없게 황폐해진 현대인들의 얼굴에서도 한 자락 맑은 빛을 엿보려는 줄기찬 노력이,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정화(淨化)의 경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필자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해당이 안 되는 말인 줄 알았다. 부처님이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성현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얻는 고귀한 생각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친한 친구 삼총사 중 한 명인 이 여사는 독실한 불자다. 그래서인지 폭넓게 우리를 포용해주고 마음 씀씀이가 컸다.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절에 열심히 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템플 스테이도 한다. 그러면서 템플 스테이에 언젠가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절에서 깨달음을 얻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정말 훌륭한 분들이나 얻는 건 줄 알았는데 보통의 불자도 이 행사에서 깨달음을 많이 얻는다는 것이었다. 벽을 보고 앉아 묵언 수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스님과 면담 후 나오면 되지만 무언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깨달음이 올 때까지 계속 벽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와 이 행사에 참여한 한 지인은 온종일 앉아 있어도 깨닫는 게 없어 중도 포기했다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닐 텐데 우리의 이 여사는 묵언 수행을 한 지 얼마 안 돼 무언가 깨닫고 스님께 이야기했더니 합격점을 주셨다고 한다. 그게 무어냐고 물어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며 자기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불심이 깊은 그녀에게는 가능한 일인가보다 했다.
어느 날 우리 삼총사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마크 로스코’ 그림 전시회에 갔다.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아니었는데 안내장에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라는 소개가 있었다. 잭슨 폴락과 함께 현대 추상화의 양대 거장으로 불리며, 현대화가 중 세계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싸다는 ‘마크 로스코’의 대형 유화 작품 50점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회였다. 실제로 그림 한 점 가격이 1000억원에서 2000억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전시회의 보험평가액도 국내 전시회 중 사상 최대 규모인 2조 5000억원이었다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작가였다.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관람객들이 근원적 감정과 만나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특별한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저 어느 집 벽에 장식품으로 걸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보면서 위로받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크 로스코’ 전시장에는 그림 앞에 방석을 놓아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림을 보며 명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필자 친구 이여사도 그 방석에 잠시 앉아 보았는데 그림에서 무언가 느낌이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아무리 보아도 빨간색이나 검은색이 칠해진 캔버스로만 보였는데 깨달음을 아는 친구는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필자도 삶에서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기는 하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며칠간 냉전을 벌일 때 그처럼 답답하고 불편한 시간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씩만 양보하고 조심하면 그럴 일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필자의 아들이 어렸을 때 학교 성적 좀 좋다고 천재인 줄 알고 회초리까지 들어가며 억지로 공부를 시켰던 적이 있다. 공부는 정말 하고 싶은 아이가 해야 하고 억지로 시키는 공부는 소용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것도 하나의 깨달음일 것이다.
젊었던 시절 오만과 착각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자꾸 백미러를 통해 필자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필자는 속으로 ‘내가 예뻐서 그러나?’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결혼 후 장롱면허를 꺼내 들고 운전을 시작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운전을 하다 보면 당연히 백미러를 봐야 했던 것이다. 그때 택시 운전기사가 필자를 보려고 흘끔거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는 몹시 부끄러웠지만 그것도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성현이나 훌륭한 분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라도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사소한 일이라 해도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깨달으며 사는 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긴 마대로 캔버스를 만들고 물감을 뒷면에서 앞으로 밀어내어, 마대 올 사이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뒤, 앞면에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사용하는 물감도 회색이나 검정, 청회색 등 단색으로 단조로우나, 보는 이들에게 고요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화가 하종현(河鍾賢, 1935~)은 1960년대 우리나라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 추상화에서 출발해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연작을 그렸고 2010년부터는 연작을 그리며 독창적인 창작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모교 회화과 교수로 40여 년간 재직했으며 2001~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는 미술 행정가로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9년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자’는 모토 아래 전위미술가 단체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74년 해체)를 결성한 이후 지속적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35년간 꾸준히 작업해온 연작은 ‘전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놓았을 때,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고 칠하는 것이 회화라는 관념을 깨고 대항이라도 하듯,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반란(?)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회화의 틀과 양상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게 문화의 보편적 추세다. 그러나 회화에 입문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정형의 추상화를 견지하는 것은 작가의 깊은 철학이 없고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 현대 서양화의 선도자인 작가가 ‘비인기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화가’라는 세간의 입방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절제된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녹여낸 당당함이야말로 미술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소이라고 생각한다.
4~5년 전부터 세계미술 시장에 모노크롬(mono chrome, 단색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상자, 즉 소비자의 욕구가 반영되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하종현 작가의 연작은 캔버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을 나이프나 손을 이용해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마치 담벼락에 진흙을 바르던 소박함이 연상되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 그림 은 10여 년 전에 인사동 화랑에서 4개월 할부로 구입한 작품이다. 큰 작품은 부담이 되어 이 소품을 수집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30~40호의 대작을 구입했다면 4~5배의 수익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투자는 어렵다. 그의 작품을 서재에 놓고 수시로 눈 맞추며 명상에 잠기곤 한다. 청회색 물감의 흘러내림도 유연하고, 붓으로 가다듬은 질박한 모양이 상형문자와도 같아서, 단조로움 속 정중동(靜中動)의 리듬이 활력을 주곤 한다.
“전혀 무관한 일상의 사물들을 모아본다.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켰다. 낯설다.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인 정서가 교차하면서 현실도 이상도 아닌 낯선 세계에서 현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화가 한만영(韓萬榮, 1946~)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백의 일단이다. 1970년대 말에는 정밀묘사 기법의 연작이 대표작이고, 1980년대 초에는 포스터나 인쇄물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부터는 옛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해 일상의 오브제(objet, 물체·객체)와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후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정년퇴임 후 현재까지 어떤 무리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오브제는 불상, 막대자, 도로표지판, 깃털, 핀, 새, 석고상, 병마도용, 토우, 악기 등 무척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오브제에 앵그르(Dominique Ingres, 1780~1867),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 정선(鄭歚, 1676~1759) 등 “동서양의 거장 화가들의 낯익은 작품의 이미지를 차용해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것이 한만영의 작품이다”라고 평론가는 말한다.
는 2009년 봄 인사동 ‘노화랑’에서 전시회 오픈 날에 2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화랑의 문턱을 낮추되 역량 있는 작가들의 밀도 높은 작품을 소개한 야심찬 기획전시는 1999년과 2000년에열렸다가 몇 해 쉬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왔으나, 작품가의 상승 등 여러 요인으로 올해로 그친다는 서운한 소식이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돈을 마련해 작품을 고르고, 아내와 밤늦도록 감상하던 작품이 어언 10여 점에 이르니, 5월의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그해 한만영 작가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핵심 오브제로 삼은 작품 10점을 내놓았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 첼로 오브제의 작품을 선택했다. 첼로를 완벽한 비례로 축소한 오브제에는 중세 서양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 속 첼로를 꺼내어 연주하면 그림의 주인공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을 거실에 놓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714~1788)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에서도 내가 제일 즐기는 제5번 G장조의 선율을 이탈리아 첼리스트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0~1976)’의 느린 연주로 듣는다. 중세 프랑스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느릿한 춤곡이 바흐를 통해 되살아나고,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마이나르디 연주가 음반을 통해 부활한다. 그리고 이렇듯 흘러간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이면, 역사의 뒤안길을 순례하는 기꺼운 상상에 잠기게 된다.
이재준(李載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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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뇌 사용량이 많으면 천재가 된다는 말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인간은 뇌 전 영역을 골고루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용량과 천재의 상관관계는 없다는 것이 21세기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천재라 불리는 이들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참고 뇌과학여행자(김종성 저),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김병환 저), 천재들의 뇌(로베르 클라르크 저)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다. 아인슈타인쯤 되는 사람이 뇌의 10% 정도를 사용했고, 보통 사람은 10% 미만의 뇌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천재는 뇌를 쓰는 영역이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것은 속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뇌를 구성하는 신경 세포는 늘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나 그렇다고 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 부위가 특별히 활성화되는데 그 신경 세포의 비율이 5% 정도다. 다음 순간에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부위가 활성화되며 이는 순간마다 바뀌므로 뇌는 전체적으로 늘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유튜브에 에이셉사이언스(ASAPScience)를 연재 중인 미첼 모피트(Mitchell Moffit) 역시 “대부분의 영화와 SF소설은 인간이 뇌 기능의 단 10% 정도만 사용한다고 우리를 믿게 만들죠. 완전히 거짓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뇌 10% 사용설은 근거가 부족했던 과거의 이야기 정도로만 파악하면 될 듯싶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뇌를 잘 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시 아인슈타인으로 돌아가 보자.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은 발육이 더디고 말도 늦었다. 그의 부모는 지진아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아인슈타인증후군’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지능이 일찍 발달한 아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것.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그가 말하는 것이 늦었던 것은 뇌의 비정상적인 발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해부 결과 밝혀냈다. 분석적 사고 기능이 집중된 아인슈타인의 뇌 부위가 정상적인 영역을 크게 벗어나 있었는데, 이 같은 침범을 받은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일반적으로 언어기능을 통제하는 부위였다. 하지만 주목할 부분은 아인슈타인의 뇌 속에서 평범한 사람의 머리 안에는 없는 특별한 조직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천재나 보통 사람 모두 문제를 해결할 때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다.
결핍과 질환으로 파생된 천재들
탁월한 창작활동 덕택에 후세에도 여전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들에게는 유독 정신 질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련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천재와 정신병 환자의 뇌는 비슷하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천재는 수많은 정보를 자유롭게 엮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혼돈 속에 산다는 점이다. 서울아산병원 김종성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결핍과 질환으로 탄생된 천재의 이야기.
글쓰기에 미친 측두엽 간질환자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와 셰익스피어는 글쓰기에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는 측두엽 간질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작품을 통해 본인의 간질과 비슷한 증상을 써내려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 ‘악령’ 속에서 간질을 앓고 있는 인물을 묘사했고, 셰익스피어는 ‘오셀로’, ‘맥베드’ 등의 작품 속에서 간질을 표현하고 있다.
측두엽 간질을 앓는 사람들은 몇 가지 성격적인 특징이 있다.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심이 높고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갖지만 간혹 안절부절못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며, 지나치게 글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많이 쓰는 현상을 ‘하이퍼그라피아’라고 하는데 측두엽 간질환자가 왜 글쓰기에 집착하는지는 명확한 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기억력이 저하돼 이를 보충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본다.
전두엽이 덜 떨어진 낙제생 ‘피카소’
피카소는 아주 어릴 적부터 타고난 그림의 천재였다. 말도 배우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렸다. 이미 숙달된 어른 솜씨로 말이다. 그가 맨 처음 한 말은 ‘피’였는데 연필을 뜻하는 ‘라피즈(lapiz)’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미술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이 낙제 수준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닌 그는 미술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학생으로 기록된다. 왜 그랬을까? 전두엽의 기능이 다소 떨어져 공부는 못했지만, 오히려 후두엽의 시각중추가 발달돼 탁월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피카소는 사실화로부터 추상화로 그림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시각 중추는 물론 뇌의 광범위한 영역을 사용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열등감과 청력손실 그러나 들끓는 열정 ‘베토벤’
베토벤의 청력손실 문제도 의학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다. 두개골의 두께가 평균 0.5인치로 기록됐다는 부검 소견에 따라 파젯병의 가능성, 대뇌매독 등의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밖에도 결핵과 장티푸스, 피부병, 간경화, 위장병 등 수많은 질환을 가지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 베토벤은 가난했다. 게다가 외모조차 별로였다. 심한 곱슬머리에 얼굴은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경제적 후원으로 살아가야 했기에 그들의 취향을 포기한 채 궁정음악을 작곡해야만 했다. 그의 들끓는 열정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내기를 원했다. 베토벤은 수많은 병과 열등감을 토대로 천재 음악가로 성장하게 됐다.
후천적 천재, 노력의 산물을 쏟아낸다
프랑스 과학저술가 로베르 클라르크(Robert Clarke)의 ‘천재들의 뇌’에 따르면 차이코프스키는 25세에 첫 작품을 내놨고, 고흐는 27세에 처음 그림을 배웠다. 고갱은 39세에 화가로 입문했으며, 프로이트는 40세가 돼서야 심리학을 접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이들은 굉장히 늦은 나이에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말년에 본인의 대표작을 완성한 인물들도 주목해볼만하다. 하이든은 66세에 ‘천지창조’를 작곡했고, 소포클레스는 75세에 ‘오이디푸스 왕’을 집필했다. 괴테는 81세에 ‘파우스트’를 탈고했으며, 앵그르는 82세가 돼서야 ‘터키탕’을 그렸다.
미국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Anders Ericksen)이 펴낸 ‘케임브리지 편람’을 보면,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재가 만들어지는 비법은 ‘70%의 땀과 29%의 좋은 환경과 가르침, 그리고 나머지 1%는 영감’이라고 말한다.
과학이나 예술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인물들의 지능지수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높은 115~130 정도라고 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지만 실제 천재들은 이 수치에 비해 훨씬 적다. 대략 열 명중에 한두 명은 지능지수로 봤을 때 천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실상은 못 미친다는 것이다.
천재들의 특성은 지능지수와 무관하게 누구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다. 천재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갖고 태어나야 하는 게 아니라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없다.
이 말에 의문이 생긴다면 마지막으로 음악신동으로 불리는 모차르트를 생각해보자. 모차르트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영재였을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지독히 매달렸던 노력파였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600여 편이라는 걸작을 썼다. 천재라서 단숨에 성공적으로 작곡을 했을 거라는 소문과는 달리 그 역시 초작에는 고친 흔적이 많이 있다. 수많은 연습과 노력의 시간을 쏟아 부어 천재로 재탄생한 인물이었던 것. “일은 나의 주된 즐거움이다”라는 그의 고백에는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