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내 휴가를 못 즐긴 이들이라면 추석 연휴 동안 바캉스를 떠나는 이른바 ‘추캉스’도 고려해볼 만하다. 손주들과 함께라면 더욱 즐거워질 객실 패키지와 더불어 추석을 겨냥해 출시된 다양한 프로모션을 소개한다.
파크 하얏트 서울
시그니처 추석 선물 세트 추석을 맞아 그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시그니처 아이템을 모아 선물세트를 선보인다. 코너스톤 시그니처 육류세트(35만 원)를 비롯해, 월악산 벌집 꿀(14만 원), 다문 디저트 플레이트(23만 원), 소믈리에 주류 셀렉션(30만 원, 45만 원), 컴포트 오일 디퓨저 세트(17만 원) 등으로 구성됐다. 추석 당일인 10월 1일까지 호텔 2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코너스톤’을 통해 예약 및 문의가 가능하다(유선 또는 온라인).
제주신화월드
3대가 즐기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 독립된 침실 구성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은 물론 아이, 어른 모두 편히 쉴 수 있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를 마련했다. 3대가 함께하는 추석 여행을 계획한다면 제격이다. ‘스카이 온 파이브 다이닝’ 디너 뷔페, ‘탐모라 찜질방’ 이용권을 비롯해 손주를 위한 키즈 액티비티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12월 30일까지, 55만6000원부터).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추캉스&추석 객실 패키지 명절 연휴 동안 여름휴가의 아쉬움을 가족과 달랠 수 있는 ‘오아시스 레이트 서머 패키지’를 선보인다. 더불어 추석을 겨냥해 호텔을 벗어나지 않고 프라이빗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추석 객실 패키지도 운영한다.
워커힐 호텔 앤 리조트
추석선물&가을 패키지 한가위를 맞아 합리적인 가격의 추석패키지 2종과 ‘명월관’의 보양식 HMR 제품을 선물 세트로 내놓았다. 그밖에 ‘가을이 폴폴’, ‘폴 겟어웨이’, ‘어텀 이스케이프’ 등 취향 존중 가을 패키지 5종도 선보인다.
노보텔 앰배서더 동대문
추석 음식 패키지 호텔 셰프가 직접 준비한 추석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연휴를 즐길 수 있는 패키지를 판매한다. 객실에서 무구며 갈비찜, 궁중잡채, 모둠전, 연잎밥 등 추석음식으로 구성된 고메박스를 함께 제공한다.
여름내 휴가를 못 즐긴 이들이라면 추석 연휴를 활용해 바캉스를 떠나는 이른바 ‘추캉스’도 고려해볼 만하다. 손주들과 함께라면 더욱 즐거워질 객실 패키지와 더불어 추석을 겨냥해 출시된 다양한 프로모션을 소개한다. 사진 각 사 제공
3대가 즐기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
제주신화월드는 독립된 침실 구성으로 몸이 불편한 어르신은 물론 아이, 어른 모두 편히 쉴 수 있는 ‘패밀리 투게더’ 패키지를 마련했다. 3대가 함께하는 추석 여행을 계획한다면 제격이다. ‘스카이 온 파이브 다이닝’ 디너 뷔페, ‘탐모라 찜질방’ 이용권을 비롯해 손주를 위한 키즈 액티비티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12월 30일까지, 55만6000원부터).
시그니처 추석 선물 세트
파크 하얏트 서울은 추석을 맞아 그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시그니처 아이템을 모아 선물세트를 선보인다. 코너스톤 시그니처 육류세트(35만 원)를 비롯해, 월악산 벌집 꿀(14만 원), 다문 디저트 플레이트(23만 원), 소믈리에 주류 셀렉션(30만 원, 45만 원), 컴포트 오일 디퓨저 세트(17만 원) 등으로 구성됐다. 추석 당일인 10월 1일까지 호텔 2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코너스톤’을 통해 예약 및 문의가 가능하다(유선 또는 온라인).
풍천장어 해피아워
9월부터는 두 달간 프리미엄 뮤직 바 ‘더 팀버 하우스’에서 ‘풍천장어 해피아워’ 프로모션을 진행한다(1인 6만9000원). 가을을 맞아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일품 풍천장어를 활용한 장어구이, 덮밥 등을 세트로 맛볼 수 있다. 여름내 지쳐 있던 원기도 보충할 겸 가족과 함께 영양만점 다이닝을 즐겨보면 어떨까.
오아시스 카바나 패키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은 여름휴가의 아쉬움을 가족과 함께 달랠 수 있는 ‘오아시스 카바나 패키지’를 10월 11일까지 선보인다. 흰 천으로 둘러싸인 카바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온수 시설이 설비된 개인 풀과 푹신한 침대형 소파와 다이닝 테이블이 마련돼 있다. 4인(73만 원부터) 또는 6인(80만 원부터) 가족에게 안성맞춤이다.
취향 존중 가을 패키지 5종
워커힐 호텔 앤 리조트는 가을 패키지 5종을 구성했다. 식사까지 호텔 내에서 해결하고픈 이들을 위한 ‘가을이 폴폴’(그랜드 워커힐, 24만 원부터), ‘폴 겟어웨이’(비스타 워커힐, 31만 원부터), 일상 탈출과 힐링을 위한 ‘어텀 이스케이프’(28만5000원부터), ‘가을 하늘’(33만 원부터) 등 다채로운 패키지를 11월 30일까지 만날 수 있다.
호텔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 객실 패키지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한가위처럼 풍성한 객실 패키지를 운영한다. 디럭스 객실 숙박 시 마카롱 세트와 JW 시그니처 향 룸 스프레이 세트를 선물한다. 호텔 내 카페와 레스토랑 20% 할인을 비롯해, 당첨 확률 100% 경품 이벤트에도 참여할 수 있다. 추석 연휴의 끝인 10월 4일까지, 200개 객실로 한정 판매한다(22만 원).
제주도 서귀포시 효돈 순환로에 제주감귤박물관이 있다. 감귤을 테마로 개관한 공립박물관. 감귤 전시관과 감귤 체험관, 감귤 역사관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부대 시설로 제주 전통농가 전시실과 아열대 식물전시실이 있다. 1월 1일과 설날, 추석을 제외하고 1년 내내 문을 연다. 입구를 비롯하여 주변에 온통 감귤나무를 식재하였고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감귤류의 원생지는 인도, 미얀마,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 중국, 한국, 일본까지 넓은 지역에 이른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탐라지 과수총설(耽羅誌 果樹總說)에 1526년(중종 21)에 제주목사 이수동이 감귤밭을 지키는 방호소(防護所)를 늘렸다는 기록이 있다.
서귀포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감귤류 생산지로 알려져 왔으나 그동안 많은 시험재배를 통해 최근에는 해발 200m 이하의 제주도 일원과 남부지방의 통영, 고흥, 완도, 거제, 남해, 금산 등지에서도 감귤류가 재배되고 있다.
감귤박물관 내의 세계감귤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감귤나무가 원산지별로 식재되어 있으며 연중 감귤 열매를 볼 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제주도 고유품종 13개, 일본 26개, 아시아 13개, 미국 11개, 유럽 7개 등 87개의 세계 감귤 품종을 볼 수 있다. 감귤의 형태도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 기형인 것 등 다양하다.
감귤 따기를 비롯하여 학습 체험, 족욕 체험, 피자와 쿠키 만들기 체험 등도 할 수 있다. 제주도의 특색을 살린 박물관으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함께 할 수 있는 특색있는 박물관이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인터넷에는 많은 후일담이 쏟아진다. 주로 젊은 자녀나 며느리들의 얘기다. 할 말들이 그렇게 없는지 매번 자신들같은 ‘약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들 뿐이라는 불평이다.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애는 언제 가질 거냐“.
안부를 묻는 것이며 근황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일 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무심한 질문들이 듣는 이에겐 지겹고도 치명적인 돌멩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쓴 재미있는 칼럼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런 세대 갈등을 보다 못해 쓴 글일텐데 미소를 짓게 하는 칼럼이었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을 캐물어 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조언해준다. 삼촌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하고 물어오면 “뭐, 언제 하겠죠.”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삼촌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에 그런 것도 못 물어보니?”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분만 인용하여 재미가 덜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칼럼이었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이 부족하여 상대방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게으른 이들에게 재치 있는 일침을 가하는 글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면서 과거의 사유 구조에 머물러 있다면 어느새 자기도 모른 채 ‘꼰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새롭게 성찰해야 할 ‘꼰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이들 간에 유행하는 ‘꼰대 육하원칙’이란 것이 있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내가 왕년에), HOW(어떻게 나에게), WHY(내게 그걸 왜)이란다. 말하자면 권위주의적 태도로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에는 나서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미루는 어른들쯤 될 것같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회변화가 없던 과거 농경시대라면 어른이 폼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빛의 속도로 변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른들의 기술과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과 정보의 습득은 젊은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항변이 더 설득력 있는 시대가 됐다. 그들과 대화할 기회가 오거든 가르치려 들지 말라. 거꾸로 진지하게 그들에게 묻자. “젊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 닭실마을에 간 적이 있다. 푸른 논 너머로 기와집들이 보였다. 기와지붕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봉긋 솟았다. 마을 앞에는 계곡이 흘렀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부녀회관에 모여 추석 한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한과를 맛봤다. 500년 전통을 이어온 닭실한과였다. 그 뒤로 이맘때면 닭실마을이 생각난다.
걷기 코스
봉화공용터미널에서 택시 탑승▶ 석천계곡 입구 하차▶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솔숲길▶ 징검다리▶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청암정▶ 충재고택▶ 닭실마을 부녀회관▶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봉화공용터미널 하차
전통마을인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마을이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에 충재 종택,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등의 충재 선생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살기 좋고, 풍광이 뛰어난 마을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했다.
닭실마을은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닭 酉(유), 골짜기 谷(곡), 마을 里(리)를 쓴다. 닭을 닮은 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어서 옛날부터 길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로 발음해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삼계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석천계곡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코스가 좋다. 닭실마을의 옛 입구인 석천계곡으로 가기 전에 왼쪽 길로 빠져 삼계서원에 잠시 들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이정표 삼아 시골길을 걷는다. 5분쯤 걸으면 은행나무 앞에 있는 삼계서원에 닿는다. 이곳은 충재 선생의 장남인 권동보(1518~1592)가 안동 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충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석천계곡으로 향한다.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 입구까지는 코 닿을 거리다.
석천정사를 품은 석천계곡
석천계곡은 폭이 넓고 골이 깊지 않다. 여름철에는 봉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견지낚시를 하며 피서를 즐긴다. 석천계곡 입구의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조붓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에 들어서자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섰다. 청하동천은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밤마다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선비들 공부에 방해가 되자 충재 선생의 5대손인 명필 권두웅(1656~1732)이 바위에,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오지 말라’는 뜻을 품은 청하동천을 새기고 붉은 칠을 했다. 그 뒤로 도깨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콸콸” 경쾌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계곡 입구에서 400m 정도 걸으면 소나무 사이로 석천정사가 보인다. 석천정사는 권동보가 봉화의 곰솔인 춘양목으로 지은 건물이다.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병풍에서 튀어나온 듯 운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석천정사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모습에 반해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석천정사에 관리인이 있으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석천정사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석천계곡이 앞마당이 된다.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난간에 앉아 있으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요한 밤에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도깨비 떠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문득 선비들이 도깨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건 핑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계가 눈앞에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왔을까.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청암정
석천정사를 지나자 시야가 트인다. 기품 넘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멀리 닭실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로 인도한다. 이 길 왼쪽에는 개울이 흐른다. 간밤에 비가 내려 개울물이 제법 불었다. 꼴깍꼴깍 자맥질하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뒤 왼쪽 찻길로 접어든다. 1차선 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닭실마을 초입에 있는 충재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 옆에 닭실마을의 대표 명소인 청암정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집 안에 지은 정자다. 충재고택의 솟을대문 쪽으로 들어가면 집 안 깊숙한 곳에 안방마님처럼 자리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둘러선 연못 한가운데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가 솟아 있다. 바위 위에 丁자 모습을 한 청암정이 올라앉아 있다. 마치 연못에 사는 커다란 거북이 등에 청암정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북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청암정의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등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연못가에는 ‘충재’라 이름 붙인 서재가 있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다.
연못 안에 있는 청암정에 오르려면 각목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신의 영역이라 여겨 돌다리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떼며 돌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든다. 청암정 난간 앞에 서면 풍요로운 논과 석천정사가 자리한 남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천장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번암 채재공과 같은 대학자들이 쓴 편액이 상장처럼 걸려 있다.
500년 전통의 닭실한과
청암정 쪽문으로 나와 마을 앞 큰길로 나선다. 솟을대문을 갖춘 큰 고택이 충재고택이다.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사유지이므로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돌담 아래 핀 꽃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부녀회관까지 걷는다. 부녀회관에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닭실한과를 만든다. 아낙네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이다. 닭실마을이 안동 권 씨 집성촌이므로 모두 한집안 식구다. 이들이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에 올리는 오색 한과의 5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닭실한과는 화려하다. 흑임자, 자하초 등의 천연재료로 물들이고, 쌀 튀밥으로 꽃 모양 고명을 올린다. 분홍색 유과는 아기 꽃신처럼 예쁘다. 달지 않고 바삭하며 입안에 들러붙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유과를 만들지 않고 약과만 만든다.
제사상에 올리던 닭실한과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팔린다. 작업장 선반에 발송 대기 중인 한과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절을 앞두면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더 바빠진다. 찹쌀 반죽을 온돌에 48시간 말리고, 반죽을 늘려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 옷을 입혀 완성한다. 꼬박 사흘이 걸린다.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하는 한과 세트는 서른 박스 정도다. 명절용 한과는 일찌감치 예약 마감된다. 어느 댁 혼례에 쓰일 한과인지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오색한과를 색깔 맞춰 담고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다. 곁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맛보라며 유과를 건넨다.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유과가 깨물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닭실마을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963.
주변 명소 & 맛집
봉화 송이돌솥밥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송이 산지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뿌리에서 자란다. 봉화의 금강소나무숲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어 최고 품질로 손꼽힌다. 봉화에 송이로 돌솥밥을 짓는 이름난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솔봉이식당, 용두식당, 인하원이 송이버섯돌솥밥과 능이전골로 유명하다. 올해 봉화송이버섯축제는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충재 선생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보물 482점과 고서 및 고문서, 서첩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하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어놓은 분재기, 양자 입양과 관련한 예조입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과거시험 답안지, 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 닭실마을 종부들이 온종일 만들었던 동고떡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0, 개방 10:00~17:00(동절기 10:00~16:00) 매주 월요일 휴무.
바래미전통문화마을
바래미마을은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의성 김 씨 집성촌이며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가구에서 독립운동가가 14명이나 배출됐다. 토향고택, 만회고택, 남호고택, 개암종택, 김건영가옥, 소강고택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한옥도 많다. 만회고택, 남호고택, 소강고택은 여행자를 위한 고택 체험 및 한옥스테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여행 정보 걷기 Tip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나 봉화역에서 21번, 23번 버스를 타고 삼계정류장에 하차하면 된다. 택시로 5분 거리이며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닭실마을에서 나올 때는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53번, 50번, 51번, 25번, 16번 버스를 타고 봉화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약 15분 소요.
•봉화공용버스터미널 앞에 봉화장터가 있다. 2, 7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석천계곡 입구에서 닭실마을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이번 추석, 의미를 부여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순식간에 지나갔다. 올해 추석 연휴가 짧기도 했지만, 이른 추석이라 가을의 풍성한 감성을 누리기엔 너무 더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명절의 전형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있기도 하다. 하긴 추석을 비롯한 전통 명절의 의미가 연휴 이상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명절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모습은 어느새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 되고 말았다. 경제가 무한히 성장할 것 같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사회가 활력이 넘치던 그 시절에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 요긴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성공과 넉넉해진 월급을 가족 친척들에게 자랑할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식구들의 만남이 그리 신나지만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가족은 해체되고 1인 가구는 늘어만 가는 추세다.
많은 가정이 적당한 시간에 식당에서 만나 밥 먹는 것으로 명절 모임을 대신하고 있다. 또 모임의 장소가 요양원으로 대체되는 모습도 보인다. 어쩌면 미래 명절 모임의 장소는 노인들만 침대에 누운 요양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쯤 되고 보니 ‘효(孝)’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에 효라는 사상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하긴 효도를 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긴 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날로 바빠지는 세상에서 치매에 걸리거나 병으로 누워 계신 부모를 간호하며 제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요양원은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효라는 이데올로기가 이미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낡은 사상일 수도 있다. 과거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던 시절에 개인의 생존과 복지를 모두 가족끼리 감당했던 만큼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대가 필요했고 그것을 집약한 사상이 바로 효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효라는 관념도 절대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낳은 산물이었을 것같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개인의 생존이나 복지를 가족들이 담보해줄 수 없는 요즘 시대엔 효라는 고정관념도 어떤 새로운 형태의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같다.
추석이 지나면서 조금 선선해졌다. 곧 겨울이 다가오겠지... 그나마 삶에 에너지를 주던 명절마저 이렇게 퇴색해버리니 사는 즐거움이 반감된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절마다 해외여행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이제사 조금 알 듯도 싶다.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 반갑고 즐거운 마음과 다르게 우리 몸은 때 아닌 피로에 시달린다. 이른바 명절증후군 때문이다. 연휴가 끝난 뒤 일상으로 돌아와도 컨디션 회복은 쉽지 않다. 명절 피로를 예방하고 해소하는 방법들을 자생한방병원 홍순성 원장을 통해 알아봤다.
손주 돌보는 중장년 ‘허리·무릎이 피로해’
중장년의 경우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와 놀아주다가 자칫 병치레를 하곤 한다. 대부분 근골격계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선 채로 오랜 시간 아이를 안고 있으면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간다. 주변 근육이 약한 상태에서 몸의 하중이 허리에 가해지는 동작을 반복하거나 척추를 똑바로 펴지 못한 채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면 허리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아이를 안아 올리거나 내려놓을 때 허리를 삐끗하면서 급성요추염좌가 올 수 있고, 심할 경우 허리디스크로도 이어진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손주와 떨어졌을 때 틈틈이 스트레칭을 해 근육의 피로를 풀어줘야 한다.
한방에서는? 허리디스크와 염좌 등 근골격계 치료를 위해 추나요법, 약침, 침 등 다양한 치료법을 병행하는 한방통합치료를 실시한다. 추나요법으로 통증의 원인이 되는 신체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약침을 통해 근육과 인대를 강화하고 염증을 완화한다. 또 침 치료를 병행해 근육을 자극하고 환부 주변 경락 기혈 소통으로 증상을 호전시킨다.
가사노동 시달리는 주부 ‘손목이 피로해’
명절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요리, 설거지 등 가사일 때문에 손목을 평소보다 과하게 사용한다. 이럴 경우 손목 주변 근육이 뭉치거나 인대가 두꺼워지면서 정중신경을 압박하게 된다. 이때 손바닥과 손가락 등에 감각이상과 통증이 발생하는데, 이를 ‘손목터널증후군’이라 한다. 손이 타는 듯한 통증을 동반하며 밤이 되면 증상이 더 심해진다. 이러한 통증이 느껴진다면 자기 전 온찜질이나 마사지를 해주는 게 좋다. 명절 이후에도 통증이 지속되면 병원을 찾는다.
한방에서는? 손목터널증후군 치료를 위해 정제된 한약재를 약침 형태로 손목신경 부위에 주사해 염증을 제거하고 한약으로 뼈와 근육, 인대를 함께 강화한다.
귀성길 운전대 잡은 남편 ‘허리가 피로해’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귀성길 고속도로.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 남편들에겐 가장 피로한 순간이다. 좁은 운전석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오래 있다 보면 척추에 실리는 부담도 증가한다. 심하면 척추뼈와 디스크(추간판) 등에 압박이 가해져 척추 질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전자세’다. 운전할 때 몸을 뒤로 젖히거나 앞으로 내밀어 등이나 엉덩이가 등받이에서 떨어지면 요통이 생기기 쉽다. 엉덩이를 운전석 깊숙이 들이밀어 앉고, 어깨는 등받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무릎은 60° 정도 굽힌다. 또 최소 2시간 간격으로 휴식하는 게 좋다. 잠시 쉬어가며 어깨와 등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하면 허리 피로로 인한 후유증을 예방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빠진 자녀 ‘목이 피로해’
학업, 취업, 결혼 등 불편한 질문을 피하느라 자녀들은 스마트폰 화면만 응시하기 일쑤다. 아마 귀성길 차 안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때우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명절 내내 스마트폰만 바라보면 목뼈의 형태가 거북처럼 앞으로 굽는 ‘거북목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다. 정상적인 목뼈는 C자형으로 굽어 외부 충격을 분산한다. 그러나 잘못된 자세로 목뼈가 앞으로 굽어 일자가 되면 목뼈를 지탱하는 근육과 인대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통증이 생기고, 전신 피로나 집중력 감퇴 등으로 이어진다. 만성적으로 목이 뻣뻣하게 느껴지거나 어깨 근육이 땅기듯 아프고, 머리 뒤쪽에 두통이 생기기도 한다. 명절이라 병원에 가기 힘든 상황이라면 핫팩 등으로 통증 부위에 온찜질을 해주면 좋다. 또 스마트폰을 볼 때는 화면을 눈높이에 맞춰야 거북목증후군을 예방할 수 있다.
한방에서는? 추나요법으로 변형된 목뼈를 바로잡는다. 정제한 봉독으로 치료하는 소염, 진통 작용을 통해 경추의 관절 가동성을 높여준다.
명절 과음·과식 ‘위장이 피로해’
전이나 튀김, 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게 되는 명절엔 자칫 배탈이 나기 십상이다. 또 과식으로 배가 더부룩하거나 체한 듯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배탈을 낫게 하고 소화를 돕는 데는 매실차가 효과적이다. 매실은 위장과 십이지장의 소화액 분비를 촉진하고, 살균작용, 정장작용도 탁월해 배탈과 설사를 완화한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식은땀이 나거나 어지럼증, 울렁거림, 집중력 저하 등을 겪을 수 있는데, 이때 당 성분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38~39℃ 정도의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도 숙취를 푸는 데 좋다.
명절증후군 앓는 우리 가족 ‘온몸이 피로해’
명절에는 친척들과 밤새 술자리를 하거나, 새벽에 차례를 지내는 등 평소보다 잠이 부족하고 신체 피로도 더 쌓이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집에 오면 대부분 소파에서 늘어져 있거나 침대로 뛰어들곤 한다. 몸을 편히 하는 게 피로 해소에 좋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로가 느껴질수록 간단히 운동하면 오히려 신체 피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30분 이상 운동을 하고, 당분간은 일주일에 3~4회씩 꾸준히 해주는 게 좋다. 가벼운 운동은 피로의 원인인 스트레스와 체력 저하를 한 번에 해결해준다.
명절증후군 이겨내는 지압법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 반갑고 즐거운 마음과 다르게 우리 몸은 때 아닌 피로에 시달린다. 이른바 명절증후군 때문이다. 연휴가 끝난 뒤 일상으로 돌아와도 컨디션 회복은 쉽지 않다. 명절 피로를 예방하고 해소하는 방법들을 자생한방병원 홍순성 원장을 통해 알아봤다.
속이 안 좋을 땐 ‘합곡혈’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합곡혈을 자주 지압해주면 소화불량, 위장질환에 도움이 된다. 이 부위를 꾹꾹 눌러주면 배에 가스가 자주 차는 증상을 완화하고 속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다.
피로감이 심하다면 ‘용천혈’
용천혈은 발을 오므렸을 때 움푹 들어가는 곳이다. 지압 전 따뜻한 물에 15분 정도 발을 담가 긴장을 풀어준다. 다만 강한 자극을 받는 부위이므로 허약한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면 ‘소부혈’
소부혈을 지압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허리를 펴고 반듯이 앉거나 누워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3회 반복한 뒤, 심호흡과 동시에 소부혈을 5초 이상 지그시 눌러준다. 숨을 들이마실 때 지압하고, 지압을 풀 때는 내쉰다. 양손을 번갈아 5회씩 반복하면 좋다.
피로가 쌓였을 땐 ‘태양혈’
관자놀이 부근에 있는 태양혈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 피로가 풀린다.
한복을 입고 표지 촬영을 진행하는 연기자 정혜선을 보면서 새삼 한복이 무척 어울리는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을 구박하는 독한 어머니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국민 어머니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녀는 곧 팔순을 바라보는 1942년생이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자태를 보니 어쩌면 긴 세월 빚어낸 어머니 상이 우리에게 영원처럼 고정된 게 아닐까 싶었다.
정혜선은 1961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연예계에 처음 입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예회에서도 뽑히고 무용도 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수도여고에서는 방송반 활동과 웅변을 하며 상도 꽤 받았고요.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심지어 탤런트가 뭔지도 모르던 때에 아버지가 지원 원서를 가져다줬어요.”
대부분의 가정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 ‘뭔가를 알았던’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로 살아갈 운명이었나보다. 당시만 해도 연예인을 딴따라로 부를 만큼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인데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열린 생각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시작이 평탄했다.
가족의 지원으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967년 KBS ‘실화극장’에서 간첩 두목 등 캐릭터가 강한 역할에 캐스팅되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녀는 성격파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그때부터 많이 했어요. 그 시절은 배우가 별로 없었으니까. 얼굴에 주름 그려가며 어머니, 할머니 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죠.”
연기자, 그리고 어머니 역을 주로 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30대부터 할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불과 31세에 MBC 드라마 ‘새엄마’에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1977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할머니 역할을 잘하는 연예인 2위로 뽑히더니, 1978년에는 아예 1위가 되었다. 연기자로서의 첫 절정기는 1983년이었다. 마흔 즈음에는 MBC 드라마 ‘간난이’에서 손주들을 데리고 거친 세상을 사는 80세 꼽추 할머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의 연기자
그녀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보다는 ‘쎈’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인기가 많아지자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때 가수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난이’ 에서 80세 할머니로 출연해서 불쌍한 손주들을 지극히 보살피는 역할로 각종 연기대상을 휩쓸었던 그해 1983년 대한민국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롯데호텔에서 디너쇼를 열어줬어요. 그때는 철딱서니가 없었죠. 그 재주로 디너쇼를 했다니.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별거 다 했어요.”
같은 해에 매니저 제안에 앨범도 하나 녹음했다. 잠깐 가수활동을 하며 남긴 유일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망각’. 발라드풍의 처연한 노래인데, 직접 가사도 썼다.
잊어야만 했기에 잊었노라고
지워야만 했기에 지웠노라고
너와 나의 아름다운 그 옛날 추억이 못 잊어 생각나면
아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워보리
여자로서의 삶은 불행했다
노래 가사에 배인 슬픔과 애잔함을 증폭시키는 애절한 창법을 들으니 자연스레 그녀가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서른두 살에 다시 싱글이 됐죠.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지. 그 부분에서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해요. 여자로 태어나 남편 잘 만나 아이 행복하게 키우면서 가정 잘 이끌어가고 그랬어야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는 건 비극이에요. 물론 그동안 날 좋아하는 이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오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야.”
TV에서 보는 정혜선은 거칠고 과격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독해진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실제의 정혜선은 조용하고 나긋나긋하며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천생 여자의 모습이다. 담담하게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이가 있을까. 그 모습에서 자기 삶을 희생하며 사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40대에 할머니역을 맡던 그녀는 60대가 넘으면서 카리스마와 온화함이 있는 ‘사모님’과 ‘여사님’ 연기를 주로 했다. 또 기품 있는 한복 차림으로 각인시켜주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엔 그녀만 한 배우가 없다.
그렇지만 “나도 살았는데…”
남편과의 결별은 이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의 빚까지 갚아나가야 했다. 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기대어 신세를 질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도 채권자 분들이 순순히 기다리기로 해서 제 출연료를 3분의 2씩 가져갔죠. 그런 걸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맙죠.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단돈 100원도 안 준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급격히 높아진 자살률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나 같은 사람도 죽지 않고 잘 사는데 왜 자살을 하지…. 나는 자살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안 죽었어요. 빚을 갚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은 생각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는 방법도 있었네.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웃음)”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퍽퍽한 웃음소리에 좀 아팠다.
나누고 베풀며 겸손하게
개인으로서, 여자로서 정혜선은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모두의 배우로서는 불행하지 않았다. 그녀의 방송활동에는 슬럼프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기하며 힘들었던 순간이 없다 할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했으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음 프로그램이 예약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방송국에서 시청률 높으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제대로 못 갔죠. 늘 바빠서 쉴 틈이 없었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일의 연속이었어요. 물론 내가 워커홀릭 성향도 있지만, 연출자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더 불러줬던 것 같아요.”
그녀는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잠시 억울해했다. 요즘은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가는 유럽 여행 아닌가. 수십 년을 대한민국 국민의 어머니로 살았던 사람이 일하느라 이탈리아도 못 가봤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어머니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만 하는 정혜선이었죠. 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으니까.(웃음) 그런데 요즘 쉬면서 생각해보니 일이 다가 아니구나 싶어요. 너무 늦게 알았지. 지금은 쉬면서 봉사도 하러 다녀요. 내가 나서기만 해도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해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쓰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이번 표지 한복 협찬을 해주신 박술녀 한복 디자이너는 “20여 년 곁에서 지켜봐온 정혜선 선생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으로 늘 수수하게 살아서 때로는 연예인인지 자연인인지 분간이 안 간다”며 뚝배기처럼 소탈하시다 거들었다.
그녀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어려운 사람 있으면 가능한 한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그러니 무언가에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연기자에겐 숙명적 성향 같아요. 그저 일만 하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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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예술을 향한 꿈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연기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수, 드라마와 연극은 기본이고 심지어 뮤지컬 배우도 했다. 그녀의 기억 속 뮤지컬은, 정말 원 없이 노래를 불렀던 ‘사운드 오브 뮤직’. 연극은 ‘햄릿’. 무대에 세 번이나 섰다. 물론 영화도 찍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50여 작품에 출연했죠. 그것도 액션 영화에. 내가 한때 액션 스타였어.(웃음) 그때는 정말 그걸로 잘나갔어요. 지금 들으면 젊은이들은 깜짝 놀랄 테지만.”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이 베테랑 배우에게 욕심나는 작품이 있냐는 질문이 싱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욕심이 없다”고 단칼에 자르듯 말했다. 다만 그녀에게 다시 삶을 살 수 있다면 하고픈 일에 대해 묻자 오래전 묻어버린 꿈을 아련히 기억해내며 그 시간들에 휩싸이는 듯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이 많아요. 그런데 ‘부자가 됐으면’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사업은 내 길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꿈은 있었죠. 특히 무용. 무용 선생님이 ‘영자야(정혜선의 본명), 넌 무용해야 해’라고 해주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실 집이 가난했죠. 그런데 무용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 생각을 해서 안 했어요.”
아니다 싶으면 결코 하지 않는다
정혜선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것과 운동을 따로 안 하는 대신 걷는 것을 꼽았다.
“사실 이제 내일모레면 팔십이니까 걷는 것도 귀찮죠. 집에 앉아서 선풍기 바람 쐬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스케줄 없을 때는 여기저기서 식사하자고 하니 사람을 만나게 되네요. 내가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루에 꼭 두세 가지 일은 있더라고.”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예상 가능하듯 그녀는 남다른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얼마 전 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파격적인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내가 거기 나가서 남을 즐겁게 해줄 용기가 없어요. 과거에는 디너쇼까지 하면서 끼를 보여줬는데 지금은 다 늙어서.(웃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오랜 세월 정혜선이란 정체성을 만들어낸 신념 그 자체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한다
겸손하고 배려심 많은 성품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온 그녀는 진정성 있는 삶으로 탄탄한 신뢰를 쌓아왔다. 초심을 지키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직함이 그녀의 힘이다. 그녀는 이번 추석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쁠 예정이란다.
“지인과의 인연으로 NBS한국농업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어요. ‘그땐 그랬었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제가 내레이터를 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두 번 방송을 하는데 작업을 해야 하니까,(웃음) 어디로 움직이는 건 당분간 불가능해요.”
작든 크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충전하는 좋은 시간으로 즐긴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평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처럼.
“나는 애써 관리해온 게 아니라 책임감 있게 살았던 것뿐”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다. 그녀 삶의 원동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서 우리가 봐왔던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고향처럼,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서.
연연하지 않는 삶, 이렇게 살아서 또 한 번의 아침을 맞듯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 한 모퉁이에 윷놀이 연구소가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긴 윷판이 부착돼 있고 박스와 작은 선반마다 윷놀이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랑 가까워서 이곳에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월세도 싸고요.”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많이 하는 조광휘 소장은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시원한 물과 커피를 내놓았다. 그저 명절이 되면 누군가 어디선가 꺼내 달력 뒤를 펴서 도, 개, 걸, 윷, 모 윷판을 매직펜으로 그려놓고는 동전 혹은 바둑알 색으로 편을 나누어 윳놀이를 한다. 언제부터 윷판 그리는 것을 기억해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잘도 그린다. 윷판 위에 말을 올리고 놓는 것도 수준급. 다들 알고 있는 이 윷놀이에 무슨 매력이 어떤 새로운 점이 있어 윷놀이 연구소까지 열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3년생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KB국민은행에서 27년 6개월 동안 일하다가 2017년 희망퇴직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윷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그가 회자될 때 불리는 직함은 바로 우리나라 1호 윷놀이전문강사(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 전문강사 양성과정 인증). 30년 가까이 고객 응대하던 친절한 행원이 한판 흥겨운 윷놀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뭘 좀 준비하고 회사 밖을 나왔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입행할 때 130명이 들어갔는데 현재 29명이 남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많으면 빨리 퇴직하더군요. 그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들도 회사생활을 마감하고요. 지점장이 안 된 사람들은 오래 근무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아오던 임금의 반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하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퇴직을 하는 거죠. 팀원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 사연 때문에 근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지점장은 아니고 팀원으로 퇴직했습니다. 굳이 진급 못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상급자에게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웃음)”
은행의 지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영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아련하기만 했다. 어제까지 선배 대우 잘해주던 후배도 임금피크제로 보직이 변경된 선배에게 색안경 끼고 행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곳에서 일해야 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희망퇴직도 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거든요. 특별 퇴직금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니까 60세에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과도 같은 직장을 박차고 나왔으니 솔직한 마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다니면서 땄던 자격증은 금융기관이 아니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새 삶을 살려면 옛것을 버려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시험도 보러 다녔습니다. 백세시대이다 보니 제가 노노(老老)케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일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자격증의 필요함을 느꼈다면 현직에 있을 때 땄겠지만 그때는 조직에 충성하기도 바빴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되어 시간이 많아졌다지만 자기계발하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 많은 직종이기도 하죠. 돈을 다루고 고객을 대하는 일이요. 지금은 비대면이 많지만 저는 온전하게 대면하는 은행원의 삶이었죠. 아무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생각한 것이 후회스럽긴 합니다.”
은행 생활에서 윷놀이를 발견하다
윷놀이에 대한 관심은 은행원 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 있을 때 서무파트 담당을 많이 하다 보니 야유회나 체육 행사 계획을 도맡게 됐다.
“1박 2일 혹은 당일 코스로 계획을 짤 때마다 윷놀이를 포함했습니다. 소통 놀이로요. 은행에 팀이 4개였는데 토너먼트로 윷놀이를 하면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사람들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퇴직 후 보통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실질적인 구직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부에서 인가한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공덕동에 있는 노사발전재단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융전문강사 양성과정이 있었어요. 처음 1주 과정을 마치고 나니 저더러 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스피치를 준비할 때 재무관리, 은퇴설계, 노후관리 등을 대부분 고르더라고요. 저는 금융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윷놀이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마이크 잡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50세 넘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남들 앞에서 뭔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금융전문강사 강습을 받고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신경써보지 않았던 것을 배웠어요. 윷놀이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잘했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 심화과정 있다고 해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1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윷놀이가 주제였다. 반응이 또 좋았다.
“15분 스피치 마치고 나서 며칠 후에 노사발전재단 강원센터에서 2시간 강의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2017년 1월에 퇴직했는데 그해 8월 윷놀이로 첫 강의를 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에 강사로 서게 됐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강사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윷판에 우리 역사와 삶을 담다
처음에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강의할까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말을 놓는 윷판에는 29개의 밭이 있습니다. 꺾어지는 곳은 모퉁이 밭이라고 해요. 윷판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북두칠성이기도 하고, 땅위의 밭이기도 합니다. 윷판을 골똘히 보면서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인터넷 검색으로 동서남북을 잡아 배치해서 윷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와도 접목했는데 그게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였어요. 그분들 일대기의 키워드를 윷판에 담았어요.”
윷판은 세상의 이치와 역사, 지도, 절기를 적절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였다.
“첫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습니다. 스토리를 담은 윷판을 제작해 윷놀이 세트로 17개나 출시했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데 교육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주문받아서 납품해야 해요. 기자님 가시면요.(웃음)”
윷놀이연구소의 든든한 조력자는 바로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금융전문강사 과정을 들었던 동기들이라고 했다. 과정을 모두 이수한 13명 중 10명이 윷놀이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노인대학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 가면 200에서 300명 정도 되니까 혼자 가서는 감당을 못해요. 연구원 분들이 같이 가서 윷놀이 심판도 하고, 진행도 하십니다.”
물론 강사비가 발생하면 함께 나눈다. 앞으로 윷놀이 관련 강사 자격증도 만들 생각이다.
“SNS에 윷놀이 전문 강사라고 띄워놓았는데 딴지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 보니 제가 1호가 맞나봐요.(웃음) 인터넷을 쭉 훑어봤는데 예전에도 윷놀이가 너무 좋은 전통놀이니까 판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분이 좀 있었나봐요.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니 중도에 그만두셨더라고요.”
윷놀이판을 벌여놓았으니 할 일이 많기도 많다. 우리 전통놀이라고는 하지만 윷놀이에 관련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
“구한말이던 1895년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의 놀이를 정리해서 쓴 ‘한국의 놀이(Korean Game)’에 보면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이를 반박하는 논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윷놀이가 인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인도에도 윷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동물 뼈로도 많이 하고요. 윷놀이는 원래 조개로 했는데 고동으로도 할 수 있어요. 제대로만 정리하면 윷으로 대단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을 제대로 만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하는 조광휘 소장.
“몰라요. 윷에 미쳤습니다. 하루가 정말 즐겁게 갑니다. 일단 윷놀이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옛날에도 우리와 함께했고 먼 미래에도 남아 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며칠 전에 윷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천문도에 대해 강연하는 80대 강사를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도 나이 들어서 강의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그때 딱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안 본다. 윷놀이만 보자. 은퇴하고 오십 훌쩍 넘어 발견한 제 인생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윷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