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몸살 기운을 느끼기는 생전 처음이다. 그동안 감동적인 내용으로 마음이 흔들린 경우는 많았으나 이토록 몸이 혹사당한 것은 처음 겪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겨울왕국'을 빼면 볼만한 영화가 없다는 세평 속에 만화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내켜 하지는 않았으나 배우만 믿고 이 영화를 점지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영화관을 찾았다. 자동차와 스피드는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닌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군대와 축구만큼이나 자동차 소재도 별 관심이 없는 종목이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꼼짝없이 자동차 안에 갇혀버렸다. 그것도 맹렬한 스피드로 달리는 자동차 경주인 프랑스 파리의 르망 레이스 코스 위다. 영화관의 모든 스피커가 호랑이가 포효하듯 울부짖는다. 멀미를 느끼며 의자 난간을 움켜쥐었다.
맷 데이먼이 얼굴을 비치지 않았으면 영화관을 나올 뻔했다. 톰 행크스의 뒤를 잇는 지적인 이미지의 맷 데이먼은 나도 믿고 보는 배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캐럴 셸비는 미국인 최초로 르망 레이스에서 우승한 미국인들의 영웅이었다. 첫 장면의 강렬한 레이스가 바로 그의 우승 당시를 재현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강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이후 심장에 이상을 느껴 카레이서에서 은퇴한 이후 작은 자동차 튜닝 및 판매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두 번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도전은 레이서가 아닌 총감독이라는 직책이다. 매출 하락으로 곤경에 처한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 포드의 요청이다. 당시 르망 레이스를 주도하던 작은 회사 페라리에 모욕을 당한 직후다.
이제 두 번째 영웅이 등장할 차례다. 당시 국내 카레이서 중 최고로 평가받던 캔 마일스와 그를 연기한 또 하나의 믿고 보는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다. 그가 또 누구인가. 메소드 연기의 장인인 그가 몸무게 11kg을 빼고 완벽한 캔 마일스로 돌아왔다. 남들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독특한 개성으로 실력만큼 인정받지 못한 그는 작은 카 정비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제 이 둘이 힘을 합쳐 포드의 레이싱 콘셉트 카인 GT40의 성능을 개선하고 캔 마일스가 선임 카레이서로 르망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감동을 연출한다. 물론 그 과정에 다양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를 좋아하지 않는 고위 임원의 방해 공작, 자신의 성질을 못 이겨 갈등을 겪는 아슬아슬함, 사랑으로 믿어주는 가족들, 레이스에서 압인 실력으로 1위를 내달리는 짜릿함 등 다양한 볼거리로 드라마의 균형을 잡는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볼거리는 캐롤 셸비가 회장의 귀를 잡고 있는 부사장을 떼어내기 위해 레이싱 카에 회장을 태우고 연습장을 질주하는 장면이다. 최고의 자동차 회사를 키운 유능한 경영자이긴 하나 경주용 차를 타본 적이 없는 포드 2세 회장이 어마어마한 속도에 질려 절규하며 어린애같이 우는 모습이 재미를 줄 뿐 아니라 경험의 귀한 가치를 일깨우는 상징을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는 평범한 영웅 스토리로 볼 수도 있지만, 두 명배우가 빚어내는 진정성이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실감 나는 레이싱 장면들이 영화를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GT40의 동물적인 울부짖음이 온몸을 휩싸고 돈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나무를 좋아해 나무와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다. 늘 나무를 심었다. 애지중지 가꾸고 돌보고 어루만졌다. 몸뿐인가. 마음까지 나무에게 바쳤다. 그 결과 들판 가운데에 있던 황무지가 장엄한 숲으로 변했다. 거대한 정원이 태어났다. 들어보셨는가. 나주시 금천면에 있는 죽설헌(竹雪軒)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한국화가 박태후(64).
사건? 그렇다, 가히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초대형 개인정원을 만든 게 아닌가. 정원 면적은 자그마치 14만㎡(약 1만2000평). 대략 축구장 6개를 합친 크기의 정원이다. ‘이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나와 팔자 좋게도 평생토록 정원을 즐기나보다.’ 그렇게 지레짐작을 하는 이도 있을 테지. 돈이면 무엇이건 다 해낼 수 있다는 미신이 만연한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박태후는 가난한 농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간신히 밥 먹고 자랐다. 줄곧 손에 거머쥔 것 없이 살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하게도 거대한 정원 조성에 인생을 던졌다.
‘개성적인, 너무도 개성적인!’ 죽설헌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으로 개성적인가? 일단 줏대 넘치는 정원이다. 전국 곳곳엔 개인이 조성한 화려한 정원이나 수목원이 많다. 대체로 서양식 아니면 일본식 정원, 또는 이도저도 아닌 짬뽕이다. 박태후의 정원은 다르다. 한국 정원의 전통과 양식을 추구해왔다는 게 아닌가. 외제와 외풍과 외래종을 얕잡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다. 본때 있는 토종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정신과 고유성을 탐구해 나름대로 구현하는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스스로 과제를 부여한 셈이며,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스스로 배웠고, 배운 대로 밀어붙였다. 줏대 아니면 푹 쓰러질 인물이다.
“한국적인 정원의 특징엔 어떤 게 있죠?”
“자연을 존중하는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 게 한국식 정원입니다. 서양식 정원은 달라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서구의 사고 전통이지요. 정원의 구조에도 정복의 정신이 고스란히 서려 있어요. 성(城)을 건축하듯이 과감한 기하학적 기법으로 정원을 만들어요. 일본 정원은 자연의 최대 축소치를 추구합니다. 자연을 넘어 우주까지를 축소시켜 집 안에 끌어들이고자 해요. 그 축소 노력을 통해 발달한 게 전지(剪枝) 기술이죠. 고도의 인위를 구사하는 겁니다. 반면 전래의 한국 정원은 나무를 가급적 있는 그대로 놔뒀어요. 자연스럽게 자라 어우러지도록 존중, 인위적 변형이나 관리를 자제하는 거죠.”
“지친 마음을 나무 그늘 아래에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정원이지 않을까? 굳이 한국적 정원을 한사코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지 않겠어요? 조경이건 미술이건 뭐건, 세계 속에서 최고를 구가하려면 전통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일테면, 대통령 부부가 외국 순방을 할 때 한복을 입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마찬가지로 고유의 한국적 정원이 아닌 일본풍과 서양풍 일색으로 변한 조경 관습에 개탄을 금할 길이 없어요. 오늘날의 정원 99%가 남의 나라 방식을 따르고 있다니, 이게 정상일까?”
“말하자면 죽설헌이 한국적 정원의 본보기라는?”
“아, 그렇진 않아요.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식 정원이지만, 온전히 규범적인 한국식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지향한다, 한국적 자연 정원을 지향한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만약 죽설헌을 전형적인 한국 정원이라고 내세운다면 학계로부터 쏟아지는 신랄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조경 학자들의 이론(異論)이 난무할걸요. 아마도 게거품을 물고 덤비지 않을까.(웃음)”
정원 조경의 실제 경험에 관한 한 박태후를 능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재야 조경가다. 고독한 고수다. 일쑤 삐딱한 눈총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때가 오면 ‘대한민국을 통째 디자인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박태후가 제도권 전문가들을 바라보는 태세에도 날카로운 게 들어 있다.
“이론들끼리 기탄없이 다투어야 답이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원탁회의라도 열어 토론을 해봅시다! 제가 자주 그런 얘길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이 없다는 거. 오늘 저는 또다시 토론을 제안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요점이 뭐냐면, 대다수의 학자나 이론가들은 비원 같은 궁중정원이나 사대부들의 별서정원(자연에 귀의, 유유자적하기 위해 지은 별장에 딸린 정원)을 한국 정원의 원류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저는 서민들이 누린 토속적 정원에서 원형을 봐요. 장독대와 텃밭까지를 포괄한 자연 정원에 더 흥미와 애정을 느껴요. 정원을 일부 상층부의 전유물쯤으로 국한하는 견해에 동감할 수 없는 겁니다.”
모네의 정원 답사하고 감명받아
남도에 태풍이 스쳐지나가는 날이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죽설헌 숲이 출렁인다. 둥근 야산 하나가 통째로 몸을 떠는 것 같다. 개인 정원이 어이 이토록 동산처럼 방대한가? 한국적인 걸 지향하는 데에 규모화가 기본일 리는 없을 것이다. 방대할 뿐 아니라 어느 한구석 허술한 게 없으니 놀랍다. 나무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은 걸 원칙으로 삼았다지만, 정원다운 운치와 구성과 미학이 생동하니 손길과 숨결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번듯한 정원을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게 좋아 그냥 심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심으면 자라고, 가꾸면 꽃피어나는 식물들의 질서정연한 생리와 생태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본격적으로 한국적 자연 정원이라는 것에 착안하고 올인하기 시작한 건 중년에 접어들어서였지요.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정원을 답사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서였어요. 같은 화가로서 강렬한 매혹을 느꼈어요. 비록 일본식 정원이었지만.”
“처음 나무를 심기 시작한 건 언제였죠?”
“제가 가정형편상 원예고등학교에 진학해 과수, 채소, 화훼 재배기술을 배웠어요. 재학 중에 이미 나무를 심는 재미를 알았지요. 저희 집 소유의 황무지에 틈만 나면 달려가 나무를 심었으니까. 그게 죽설헌의 시발입니다. 졸업 뒤엔 관공서 정원사를 거쳐 농촌지도소에서 근무했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나무를 가꿨고요. 40대 초반엔 사표를 던졌습니다. 이후론 정원 가꾸기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죠. 낮에는 정원 일을, 밤에는 그림을. 이건 지금까지 사오십 년째 반복되어온 일상이에요.”
박태후는 제대 뒤 의재 허백련의 조카 허의득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우면서 한국화에 입문했다. 늦깎이로 미술 관련 석사학위도 받았다. 끔찍한 노력파다. 조경과 그림, 그 둘에 쏟은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자기 자신에게 입증해 보인 열혈한이다.
정원을 산책해볼까. 폭염이 살갗을 굽는 여름 한낮이지만 정원의 공기는 서늘하다. 저녁 으스름처럼 어둑한 건 나무들이 허공을 가려서다. 박태후의 몸은 대나무처럼 늘씬해 나무숲에 어울린다. 잔인한 세월이 내려앉은 머리칼은 허옇지만, 자신의 평생 동행인 나무들을 바라보는 표정엔 온정이 가득하다.
백련이 벙그러지는 연못가. 못을 빙 에두른 노랑꽃창포 군락이 싱그럽다. 또 다른 연못가엔 왕버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수면에 어린 제 그림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둘 다 박태후가 각별히 아끼는 초목이다.
“5월이면 한 달 내내 노랑꽃창포들이 꽃피어 연못물마저 노랗게 물들입니다. 장관이죠. 저는 이 꽃을 ‘습지의 여왕’이라 불러요. 왕버들과 마찬가지로 물가에서 잘 자라고 병충해에도 아주 강합니다. 뿌리의 수질정화 능력도 탁월해요. 생태조경에 적격이죠. 이 좋은 노랑꽃창포가 예전엔 너무도 흔해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어요. 그 바람에 요즘은 흔히 보기조차 힘들어졌어요.”
“정원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수종을 권한다면?”
“최상의 정원수는 유실수예요. 감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살구 등등 꽃도 즐기고 과실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열매를 쪼아 먹으려고 새들이 날아듭니다. 새들의 노래마저 즐길 수 있으니 일석삼조라 해야겠네.”
‘시행착오’가 가장 유능한 교사
죽설헌의 풍치엔 허전한 게 없다. 있을 게 다 있으니까. 200여 가지의 수종들, 수백 종류의 야생초들, 여섯 개의 인공 연못, 고와(古瓦)로 야트막이 쌓은 울, 숲의 사방으로 뻗어나간 산책로…. 가지를 잘라내거나 솎아주기를 극도로 삼갔으니 나무들은 자유롭게 자랐다. 저마다 길길이 가지를 뻗어 허공을 움켜쥔다. 나무 아래에선 꽃들이 병아리처럼 종종대며 형형색색의 물감을 짜낸다. 백련과 홍련이 맑고 고운 얼굴을 수줍게 드러내는 연못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련된 인공 정원이다. 그러나 인위가 세월에 발효되어 자연과 동화해서일까. 일부러 애써 꾸민 티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야생의 숲이라 해두자. 간섭받지 않고 성장한 나무들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 자잘한 꽃들과 키 작은 음지식물들이 도란거리는 속삭임까지 귓가에 고이는 기분이다. 이토록 천연스런 숲 정원을 만든 건 여기가 피안이라는 뜻인가.
“나무를 가꾼 지 반세기가 지났군요. 어떤 일이든 하나에 평생을 바쳐 열정을 쏟아 붓는다는 건 영혼이 움직이고서야 가능하겠죠. 죽설헌을 만든 당신의 가장 큰 비결은 무엇이라 보나요?”
“시행착오. 바로 그거예요. 저는 전문적인 조경 교육을 받은 게 없이 일체를 혼자 해결해왔어요. 당연하게도 갖가지 오류가 빈발했죠. 쉬운 예로, 초기엔 외래종 화초와 토종 화초의 구분조차 하질 못했어요. 그걸 깨닫고 공부하며 초목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수시로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쳤지요. 인생에서 시행착오보다 더 유능한 교사는 없다고 봅니다.”
“이 너른 정원을 조성하기까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됐겠죠? 자금 조달엔 문제가 없었을까?”
“가장 난감했던 게 바로 그 대목이었어요. 수입이라곤 얼마 안 되는 연금뿐, 부부가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왔습니다. 감자나 참깨를 농사지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어요. 그러나 빚을 얻어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무를 계속 심자면 주변 땅을 사들여야만 했으니까.”
어렵사리 터를 매입해 나무들을 심는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나무들의 키가 커지고 둥치가 불어나면 적절히 이식을 해줘야만 했다. 그러자면 다시 땅을 확보해야 했으니 주기적으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것 같다. 간벌(間伐)로 쉽게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박태후는 나무를 베어내거나 파내는 행위를 금기로 삼고 있다. 나무와 혈맹조약을 맺은 것처럼.
“저것들도 엄연한 생명인데, 저것들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베어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옮겨 심을 터 마련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 욕심을 너무 부리는 거 아니야? 라는 투로 바라보지만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나무와 함께 살다 보면 나무에게 많은 이치를 배우게 됩니다. 세상을 진정 잘 사는 길을 숲의 자연 생태에서 깨닫게 되는 거죠. 이게 자연 정원을 가꾸는 최상의 목적이자 낙이에요.”
자연에의 외경을 지닐 경우, 교만과 허영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의 과욕과 과속은 마음속에 자연을 들여놓지 못해 생기는 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살기는 사실 어렵다. 사람이 나무처럼 살 수 있겠나. 가을마다 잎을 모조리 털어내는 나무의 허심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채 혹한을 묵묵히 견뎌내는 겨울나무를 시늉할 수 있겠는가. 박태후는 나무들의 생태에 인간사의 고통과 한계를 대입하고 그 치유책을 찾아 나선 사람이진 않을까.
“피고 지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며 과욕이란 헛된 거라는 걸 자주 느껴요.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저승까지 가져갈 길이 있던가요? 결국엔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명백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게 아닌가요?”
몇 년 사이 부쩍 가까워진 나라가 있다면 곧장 베트남을 떠올리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팀을 아시아 최고 팀으로 환골탈퇴시킨 박항서 감독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박 감독의 베트남 입성 훨씬 이전부터 ‘브랜드 코리아’를 알리며 실질적인 협력과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힘써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정부 파견 봉사단 월드프렌즈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이다. 무역투자 부문 NIPA자문단원으로서 지난 3년간 베트남에서 동분서주했던 정동식 씨를 만났다. 그는 NIPA자문단원 활동을 통해 국위선양의 기회는 물론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의 NIPA자문단원 활동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정동식 씨는 현재 굴삭기 부품을 제조하는 ㈜티엠시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NIPA자문단원으로 베트남에 있을 때 이 회사 대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줬던 것이 인상에 남았는지 제가 귀국한 것을 알고는 베트남 수출 관련 자문위원 자리를 제안하더군요. 올해 2월부터 비상근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베트남에서 저는 정말 일만 하다가 왔습니다.(웃음) 취미도 일하는 것이라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2014년 11월, 상장사였던 우진플라임의 상임감사 겸 중국 법인 대표로 일하던 정동식 씨는 사임을 표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친구를 통해 NIPA자문단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됐다.
“2015년 7월경 마침 코트라에 다니던 친구가 베트남 다낭에 코이카자문단원으로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너도 무역회사에서 오래 일했으니 지원할 분야가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코이카는 당시 모집이 끝났고 NIPA자문단도 있다면서 알려주더군요.”
그는 젊은 시절 삼성중공업과 동부산업을 거쳐 수출 제조업을 하는 중견기업 임원과 대표직을 30여 년 맡아왔다. 무역에 대한 전문지식과 실무경험, 폴란드와 중국 등지의 주재 경력이 있었기에 외국 파견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정년퇴직하고 나서 다른 회사의 고문으로 가는 건 솔직히 싫었습니다. 기업체에서 현역으로 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 같고 현역처럼 더 일할 곳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마침 베트남에 NIPA자문단원을 파견하더군요. 국가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베트남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에서 NIPA자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은퇴 후의 인생을 펼쳐보자는 기대감과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일단 100%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 만전을 기했다. 해외 주재 경험이 있어도 인터뷰는 또 달랐기에 일주일 동안 도서관에서 베트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영어가 입에 익을 때까지 읽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합격해서 들어간 곳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에 있는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였다.
“3년 동안 제가 했던 것 중에 가장 잘한 일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를 호치민에 오는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들이 1순위로 찾는 몇 안 되는 베트남의 정부기관 중 하나로 만든 것이에요. 한국과 베트남 기업체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이었죠. NIPA자문단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공직 신분에 준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업체 매칭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다 이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한걸음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현지에서 ‘꿈의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던 500만 달러 투자 건이었는데 코이카 쪽에서 무상원조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 사업과 함께 대형 서버룸을 호치민에 유치하려고 했어요. 당시 우리 정부는 인프라 구축을 돕는 사업에서 IT로 지원 분야를 옮긴 상태였어요. 서버룸도 IT 분야 중에서도 인프라 구축 차원이다 보니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4개월 만에 접었어요. 말 그대로 꿈의 프로젝트였죠.(웃음) 베트남이 또 농산물을 많이 수출하는 농업 국가잖아요. 1년 차 때 용과 수출을 추진했습니다. 그때는 잘 안됐는데 지금은 한국에 수입되더군요. 베트남산 블랙타이거 쉬림프, 주꾸미 등을 가공 포장해서 한국에 수출했습니다. 추진했던 일도 많고 상황이 안되어서 접었던 일도 많고요, 3년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베트남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NIPA자문단원으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덥고, 습했지만 파견 1년 동안은 에어컨이 없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현지 적응을 했다. 그나마 우기에는 낮시간 때 스콜(열대지방에서 오후 한때 내리는 국지성 호우)이 내려 더위를 식혀줬기 때문에 나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2년 차부터 에어컨 달린 마을버스로 바뀌었어요. 베트남이 성장 길목에 있다는 걸 새삼 느꼈죠. 베트남에 가기 전에 저 자신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눈높이를 낮추자, 무시하지 말자, 일 더 해주자’ 이 세 가지였습니다. 3년 동안 나름대로 약속을 잘 지키고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찾아서 알리고 하나라도 더 사업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내 도시란 도시는 다 다녔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 자문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또다시 해외파견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자문단 최대 파견기간 3년을 채워 재지원이 불가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다녔고 현지인들과 만나 교류도 했습니다. 전문지식이 쌓이다 보니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게 됐고요. 현재 자문위원으로 있는 회사가 베트남 쪽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해서 지난 3월 MOU 체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지금은 솔직히 가깝다고 느끼지만 공산주의 국가로 긴 세월을 보냈기에 폐쇄적인 면이 있어요. 중간 역할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끝으로 자문단원으로서 최고의 덕목과 지원하고자 하는 미래 NIPA자문단원에게 조언할 내용이 있는지 질문했다.
“개발도상국은 말 그대로 개발하고 도약해서 잘살려고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NIPA자문단원에게 듣고, 얻고 싶어 하는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이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결과가 좋든 안 좋든 최선을 다해 알아봐주고 함께 노력해줘야 합니다. 자상한 선생님이어야 하고 업무 추진체여야 하고 최대한 마무리가 있는 일처리 능력 또한 전수해줘야죠.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만의 노하우를 정리해보고 난 뒤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에 지원하세요. 한국에서는 은퇴 후의 인생이지만, 개발도상국에서 NIPA자문단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정동식 자문단원
활동 국가 베트남
활동 기관 활동기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
자문 분야 무역투자 부문
자문 내용 한국과 베트남 간 교역 및 공적 원조 자문
파견 기간 2015년 12월 8일~ 2018년 12월 7일(3년)
“정년퇴직이라…. 이건 뭐 생전 장례식이다.” 우치다테 마키코의 소설 ‘끝난 사람’에서 정년퇴직을 하는 주인공 다시로의 말입니다. 자기 사업체가 아닌 이상 퇴직은 누구나 거쳐야 합니다. 정년이 연장되더라도 본질은 변화 없습니다. 그래서 주된 직장에서 퇴직할 때 무엇을 준비해둬야 할지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재무적 준비뿐 아니라 비재무적 준비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 몇 가지를 알아볼까 합니다.
퇴직 사춘기 대비
소설 ‘끝난 사람’의 주인공 다시로가 구직센터를 찾아가니 마침 조건이 괜찮은 곳이 있어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사무실에 8명 남짓이 앉아 있는 회사였지만 자신을 최대한 낮춰 채용해주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합니다. 사장은 도쿄대학교 법학부 출신이 자기 회사에 오면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기술도 없는 일류대 출신은 쓸모가 없습니다. 다시로는 모교를 방문해 벤치에 앉아 펑펑 울고 맙니다.
주인공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일거리가 생기면서 대학원 진학은 무한 연기됩니다. 그러다 문화센터 등록처에서 여자를 만납니다. 63세의 주인공이 39세의 미혼 여성을 만났으니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끝난 인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 역시, 결론은 헛물입니다. 다시로는 그냥 밥 잘 사주는 아저씨였던 셈입니다.
다시로는 피트니스에서 젊은 벤처 사업가를 만납니다. 사업가는 그를 고문으로 초빙합니다. 그런데 사업가가 급사를 하면서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 자리를 덜컥 맡습니다. 결과는 대참사입니다. 회사가 미수금을 받지 못해 파산을 하게 되고 대표이사인 관계로 자신의 돈으로 은행 대출금 10억 원을 상환합니다. 아내의 은퇴자금까지 날려버리게 되죠. 이 일로 이혼 직전까지 갑니다.
아내는 가출하고, 회사는 파산하고, 은퇴자금 10억 원도 날리고, 맘 설레게 하던 39세 아가씨는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생각하며 아버지가 느꼈을 고독을 이해합니다. 퇴직 후 사춘기처럼 방황하던 주인공은 방향을 잡습니다. 20~30대에 할 일과 60~70대에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도 주인공 다시로처럼 퇴직 후 사춘기를 앓습니다. 10대 사춘기처럼 퇴직 후에 좌충우돌하고 고독을 느끼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를 ‘물 빼기 3년’이라고도 합니다. 이 변화 과정을 무탈하게 넘겨야 합니다. 자신이 평생 쓰고 있던 가면(페르소나)에 집착하지 말고 다른 가면으로 잘 바꾸는 게 필요합니다. 노후의 변신은 절대 무죄입니다.
노후의 행복 조건
노후에는 이제 행복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 실천을 해야 합니다.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걸 같이 먹을 때’ 혹은 ‘여행을 할 때’ 등과 같이 구체적 방법들을 이야기합니다. 경제학자들도 행복의 이유를 분석합니다. 브루노 프라이(Bruno Frey)가 쓴 ‘행복, 경제학의 혁명’에는 경제학자들이 찾은 행복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행복을 노골적으로 추구할수록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멋있는 파티를 계획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파티 후에 실망이 컸다고 합니다. 행복하려면 지속적인 만족감을 얻어야 하는데 더 강한 만족감이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단기적인 희열 추구 혹은 희열의 연이은 추구가 아니라 장기적인 ‘좋은 삶’의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둘째, 돈은 일정 수준까지만 행복에 중요하고 그 이상에서는 중요한 변수가 아닙니다.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하는데,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스털린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2000년 초에 실시한 세계가치조사를 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될 때까지 삶의 만족도는 올라갑니다. 그러나 1만 달러를 넘어서면 1인당 국민소득과 삶의 만족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거의 사라져버립니다.
셋째, 행복해지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일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실업은 삶을 극도로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혼이나 별거 등 다른 어떤 사건보다 안정감을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돈이 있어도 일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사망률도 높아지고 자살할 가능성도 커진다고 합니다. 실업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많은 ‘비금전적 비용’을 지불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내재적 속성을 가진 활동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자원을 배분해야 합니다. 내재적 속성은 타인과의 연결, 자신의 유능감, 자율성, 참여 등과 관련되어 있고 외재적 속성은 재화의 소비, 지위, 소득, 명예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재적 속성은 반복해도 지겹지 않고 좋았던 경험의 기억도 오래 지속됩니다. 반면에 외재적 속성은 빨리 지루해지고 경험의 기억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명품 백을 사고 조금 지나면 행복감은 희미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까먹고 장기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삶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나갑니다. 돈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므로, 돈을 버는 데 집중되었던 자원을 적절히 재배치합니다. 일은 해야 합니다. 금전적 가치 외에 비금전적 가치도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재적 속성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노후자산 지키는 삼총사
행복이라는 비재무적인 문제를 봤다면 이제 재무 솔루션을 보겠습니다. 노후 재무설계의 포인트는 수명에 맞게 자산 수명도 길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전가의 보도 같은 상품은 없으며 연금자산, 투자자산, 보험자산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선, 종신연금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하므로 나의 수명과 자산 수명을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한편, 공적연금은 매년 연금 지급액을 물가에 연동해서 올려주기 때문에 구매력이 유지됩니다. 공적연금은 장수리스크와 구매력리스크를 없애주기 때문에 노후에 가장 적합한 자산입니다. 공적연금을 가급적 충분히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족할 때는 주택연금이나 민간의 종신연금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투자자산은 수익률이 높으므로 자산 수명이 깁니다. 지금 가진 돈의 4%를 매년 인출하고 2% 물가가 오르는 만큼 인출을 증가시킨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경우 자산운용수익률이 2%이면 25년 만에, 3%일 때는 28년 만에 자산이 모두 소진됩니다. 하지만 4%일 때는 34년, 5%이면 43년으로 자산 수명이 길어집니다. 노후자산은 안정적이어야 함을 감안할 때, 목표하는 투자수익률은 4%를 중심으로 해서 3~5%가 적절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마지막으로, 보험자산은 노후자산을 블랙스완(black swan)에서 보호해줍니다. 블랙스완은 아주 가끔씩 발생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노후 자산은 중대 질병이라는 블랙스완의 출현으로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준비해둔 노후설계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보험은 생애설계에서 블랙스완의 출현을 막아줍니다. 노후의 보험자산은 생명보험보다는 질병이나 요양보험들이 해당되겠죠.
세 자산 중, 투자자산은 골을 넣는 공격수로 자산 수명을 길게 해주는 주포(主砲) 역할을 해줍니다. 축구에서 공격에 치중하다 보면 골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인생 후반의 실점은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연금자산으로 1차 수비라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연금자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소득을 만들어둬야 하는 거죠. 하지만 이 수비만으론 부족합니다. 노후자산의 급격한 변동을 막기 위해서는 2차 수비라인으로 보험자산을 가져야 합니다. 연금, 보험, 투자 이 셋은 노후자산을 지키는 삼총사입니다.
내 연금 내가 만들기
연금처럼 자신이 보유한 금융자산에서도 매월 일정한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나 금융기관이 아닌 자신이 만드는 셀프연금인 셈이죠. 종신연금은 유동성이 없는 데 반해 셀프연금은 언제든 중도에 필요한 돈을 찾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셀프연금 체계는 퇴직 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배당일이 다른 6개의 리츠(REITs)를 사놓으면 매월 배당금이 들어옵니다. 보유 리츠의 평균배당금액을 감안해 매월 일정한 금액을 인출하면 됩니다. 금융상품을 달리하여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계좌에 주식펀드를 넣어두고 여기에서 매월 확정된 금액을 인출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 수익률이 높으면 수익금만으로 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수익률이 낮을 때는 원금을 빼 써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변동성이 큰 자산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셀프연금을 만들기에 적합한 금융상품은 수익률이 너무 낮지 않은 현금흐름이 꾸준히 나오는 인컴형 투자자산입니다. 투자자산이지만, 자산가격 상승보다는 배당이나 이자획득이 주목적인 자산이죠. 리츠, 상장 부동산펀드, 회사채, 배당주 등이 해당됩니다.
이런 자산을 담고 나면, 계좌의 수익금과 원금의 일부를 연금처럼 인출할 수 있는 인출 방식을 적용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액식(定額式)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 자산의 4%(5억 원이면 연 2000만 원)를 계속 인출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금액이 확정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우나 계좌의 잔고가 언제 바닥날지 예상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계좌 운용수익률이 높으면 오래 유지되고 낮으면 일찍 바닥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대표적인 방식은 인출기간을 정해놓는(예를 들어 30년) 정기식(定期式)으로 매년 계좌잔고를 잔존 연금기간으로 나눈 금액을 인출합니다. 초기 자산이 5억 원이고 운용수익률이 4%라면, 첫해에는 1666만 원(=5억 원/30년) 인출하고, 둘째 해에는 1733만 원(=5억 266만 원/29년) 인출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해에는 5197만 원을 인출하고 계좌잔고는 없어집니다. 즉 연금액은 매년 변동하지만 30년 후에 계좌잔고는 정확히 ‘0’이 됩니다. 이는 매월 연금액은 확정적이지만 계좌잔고의 소진기간을 모르는 정액식과 대비되는 방식입니다.
국민연금은 우리가 손댈 수 없고, 민간 종신연금은 유동성이 없어 무작정 많이 하기 어렵습니다. 금융자산으로 내가 스스로 만드는 셀프연금이 노후에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셀프연금과 함께 공적연금, 종신연금을 잘 활용해서 노후 소득을 만들면 좋습니다.
도심을 벗어나 어느덧 국도를 달린다. 햇살 쏟아지는 시골 마을을 지나 녹음이 짙어가는 산길로 들어서자 소음조차 숨죽인다. 숲길에서는 뒤엉킨 마음을 맡겨버린다. 구불거리는 좁다란 산길 위에서 너울거리는 계절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땅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충북 진천이다.
보탑사 삼층 목탑과 꽃 정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했다. 사는 곳은 진천이 좋다 하더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울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진천에 닿는다. 친절한 사람들이 비켜주는 좁다란 숲길을 따라 산밑을 지나면 길 옆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려준다. 산 아래에는 정갈한 사찰 보탑사(寶塔寺)가 조용히 앉아 있다.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 이곳에 대목수 신영훈 장인을 비롯해 문화재급 전문가들과 지광·묘순·능현 비구니 스님이 1996년 창건한 절이다.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고 2003년 불사를 마쳤다.
역사가 길진 않지만 보탑사가 많은 이에게 관심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이 절 삼층 목탑은 상륜부를 제외한 높이가 42.7m.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끼워 맞추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삼층까지 오르는 계단도 있다. 108척 높이의 대웅전(1층), 법보전(2층), 미륵전(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모습이 웅장하다. 지나치지 말고 들여다봐야 한다.
또 사방에는 꽃들이 가득하다. 봄, 여름, 가을까지 쉬지 않고 꽃이 피어난다. 목탑 주변에는 경계석도, 담도 없다. 야생화가 가득 피어난 화분들이 풋풋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아담한 처소 앞에 피어 있는 올망졸망한 꽃들의 모습은 수채화 같다. 군데군데 예사롭지 않은 석탑과 반가사유상, 불족석, 영산전, 전각, 그리고 격조전 입구의 석불과 와불의 평온한 표정은 꽃과 자연 속에서 제 몫을 보여주니 바라보는 느낌이 달라진다.
사찰 계단을 오르면 탐스런 작약이 화들짝 얼굴을 들이민다. 작약을 시작으로 경내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꽃밭이다. 계단참에도, 돌무더기 위에도, 담장 허리춤에도 색색의 꽃들이 가득이다. 산속 정원이 바로 여기다. 보탑사는 여느 사찰들처럼 규모가 웅장하지도 않고 근엄한 분위기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평온하고 아늑할 뿐이다. 불자가 아니어도 머물다 가려는 여행자들이 조용히 오간다. 꽃과 나무들로 어우러진 경내를 걷다 보면 사찰이 아니라 어느 조용한 고택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자연생태공원에서 함께하는 휴식
보탑사 주차장에서 나와 5분 남짓 달리면 ‘만뢰산 자연생태공원’이 나온다. 11만8500여 ㎡의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잔디광장, 생태교육장 등의 열린 마당과 생태습지, 수목원, 야생초화·허브원, 가족 피크닉장, 습생초지원, 열매나무원 등 체험 숲을 갖추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가볼 만하고, 특히 아이들 자연학습장으로 좋다. 연인들이 손잡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물소리길, 별따라가는길, 산내음길 등을 걸으며 생태공원의 신선한 공기를 맛볼 수 있다. 넓은 잔디밭에서는 축구를 하는 아이들, 텐트를 치고 휴식 중인 가족들 모습이 평화롭다. 인근에 위치한 연곡저수지와 백곡저수지는 살아 있는 시골 풍경이다. 종(鐘) 박물관과 참숯 테마공원도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
만뢰산 자연 생태관에서 다시 1~2분 정도 달려가면 ‘사적 제414호 진천 김유신(鎭川 金庾信) 태실(胎室)과 만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유적이다. 태실 유적은 아기가 태어날 때 함께 나오는 태반과 탯줄을 묻어놓는 곳을 말한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이곳 진천(옛 지명은 만뢰)에서 태어났고 그의 태실은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 정상에 있다. 태실 유적 입구엔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역사를 지닌 장소라 그런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천년의 다리
진천 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농다리(농교)’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정겨운 징검다리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진천의 농다리도 그중 하나다. 900여 년 전 임 장군이라는 사람이 만든 다리라 전해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로 알려져 있다. 두툼하고 널찍한 돌을 포개어 쌓은 것뿐인데, 거의 천년의 세월을 지탱해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수한 풍상을 겪고 홍수에도 끄떡없었다니 첨단기술로 만든 다리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농다리는 이제 역사의 다리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중하순경 ‘천년의 발자취! 농다리에 반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한바탕 축제의 장을 연다. 최근에는 수변산책로도 조성되어 조용한 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진천에서 만난 수수한 음식점 두 집을 소개하고 싶다. 민물새우찌개, 수제비, 정갈한 더덕구이 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풍경소리’와 묵밥을 맛볼 수 있는 ‘하늘소’이다. 두 곳 다 제법 알려진 오래된 맛집으로, 당연히 파전과 동동주도 있다. 산속에 자리한 ‘하늘소’에 앉아 창밖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세속의 갈등과 번뇌가 어느새 사라진다. 매달 5일, 10일에 열리는 진천 장날에 맞춰 가면 더 좋다.
때론 조용한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땐 고민하지 말고 훌쩍 서울을 떠나보자. 고속도로를 두 시간여 달리면, 일탈과 휴식과 피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진천에 도착한다. 시골길을 달리고 산속에 파묻혀볼 수 있는 하루 코스는 역시 생거진천(生居鎭川)의 마을이 제격이다.
전남 고흥 반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연홍도(連洪島)는 아주 작은 섬이다. 100명 남짓한 주민이 조용히 지키고 있는 이 섬은 섬 전체가 미술관이다.
고흥의 거금도 신양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타고 3분쯤 지나면 연홍도 마을 전경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선착장 입구부터 미술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기다린다. 그리고 어디든 가고 싶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친절한 방향 표시가 안내한다.
축구선수 박지성과 왕년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벽화가 초입에 보인다. 이 지역 출신의 유명인 외에도 주민들의 옛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들이 200여 개의 타일 벽화로 벽면 가득 채워져 있다.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소통하듯 함께 모여 있는 마을사진관이 따뜻하다.
벽화는 섬마을 곳곳에서 계속 이어진다. 추억의 놀이나 전래동화 그림이 걸음걸음마다 즐겁게 해준다. 모두 떠나고 없는 아이들이 마을 담장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입체적인 야외 조형물들이 바닷가 마을에 잘 어우러져 있고 연홍공방이 있으며 또 어촌마을의 버려지는 재료들이 도처에 작품으로 돼 있다.
동화 속을 거닐듯 마을 골목을 따라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섬 미술관인 연홍미술관이 나온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화가 선호남 관장이 2005년 폐교를 만나 마을 주민들과 손을 잡고 섬 속의 섬 미술관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전시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미술관 앞으로 푸른 바다가 탁 트여 쉼터로도 좋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갤러리 카페가 있고 미술관 별채엔 숙소가 있어서 이곳에 머물 수도 있다.
세상과 단절된 듯 오디오가 꺼진 듯 조용히 지내고 싶을 때 이렇게 마치 숨어있는 듯한 작은 외딴 섬 여행은 어떨까 싶다.
▷전남 고흥군 금산면 연홍길 49-9
▷고흥 녹동신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금당행 배편 1일 2회 연홍도 경유(20분 소요)
▷신양 선착장에서는 1일 7회 운항(2~3분 소요)
충전을 위해 떠난다고들 한다. 그러나 특별한 풍경을 찾아서 또는 충전을 위해서 굳이 멀리만 갈 일은 아니다. 주변에 좋은 공원이 많이 생겨났다.
이젠 지자체들이 공원 가꾸기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 전에는 그저 공원이 있어서 쉬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가기도 했었다. 이젠 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공원이 아니다. 꼼꼼히 계획해서 만들어지고 지속적인 관리체계를 갖춘 중요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서울엔 동부와 서부, 중부로 나뉜 관할구역별 공원녹지사업소가 있다. 공원의 효율적인 운영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는 기관들이다. 지금 서울의 공원 수는 2000개가 넘는다. 우리가 사는 서울에 공원이 그렇게 많냐고 다들 놀란다.
요즘 공원에 가면 걷거나 뛰는 모습을 흔히 본다. 숲 건너편으로 소풍 나온 아가들이 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니는 것도 보인다. 체력단련장에서는 기구를 이용해서 운동도 한다.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이쁘고 어르신들의 포켓볼 놀이가 평화롭다. 그 숲길 옆 축구장에서는 공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절이 바뀌려는 공원 숲엔 신록이 반짝이고 있다. 군데군데 조형물들이 자연식물들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무심히 걸어도 휴식이 된다. 연못의 잔잔함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
철 따라 피는 꽃을 찍으러 애써 먼 남쪽으로 떠날 필요도 없고, 힘들여 높은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내 가까운 곳의 공원에 그 모든 것이 있다. 피고 지는 꽃은 사계절 이어진다. 도심의 공원은 이젠 더 이상 갈 데 없는 고령자들의 쉼터가 아니다.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3월 초,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동아대학교 캠퍼스는 꽃다운 청춘들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학생들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하형주(河亨柱·58) 동아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학장이다. 35년 전 국민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LA올림픽 유도 금메달의 주인공. 그를 만나 당시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고생 끝났심더.”
하형주가 1984년 LA올림픽 유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뒤 가족과 통화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선입견을 깨트리기라도 하듯 방글방글 웃는 표정과 구수한 사투리가 방송을 탔다.
“그때 제 통화가 전국으로 중계되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말도 함부로 했죠. 어머니한테 ‘어무이~’ 이러고 형님한텐 ‘행아~’라 하고. 경상도에선 말을 좀 편하게 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모습이 몇몇 사람한텐 안 좋게 보였나봐요. 버릇없다고, 호래자식이라고 욕 좀 먹었죠.(웃음)”
LA올림픽은 유난히 국민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엔 1988년에 개최되는 다음 회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다는 점이 한몫했다.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와중에 호쾌한 메치기로 우승을 거둔 그는 대한민국의 스포츠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는 인기의 원인(?) 중 하나로 ‘잘생겼음’을 꼽기도 했다.
“우승 후 한국에 돌아오니까 갤로퍼 지프차, 박카스, 화끈함과 시원함을 강조한 약품 등 각종 CF 섭외가 물밀듯 들어왔어요. 근데 돈이 많아지면 내 마음대로 살까봐,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차라리 없이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 안 했죠. 그때로 돌아간다면… 찍어야지요.(웃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은 지났지만, 그의 호쾌함은 여전했다.
모두의 예상을 깬 일본전에서의 승리
1984년 LA올림픽 8강전 (vs 미하라 마사토)
대진표를 본 언론은 하형주의 대진운이 좋지 않다고 보도했다. 8강에서 유도 종주국 일본의 미하라 마사토와 맞붙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말했다.
“속으로 ‘아, 얘는 내 밥인데’ 하며 쓱 웃었죠.(웃음) 사실 8강전 전까진 한 번도 겨뤄본 적 없는 선수였는데 언젠가는 만날 것 같아서 분석을 많이 해뒀어요. 아니나 다를까 시합 때 자기 주특기인 허벅다리걸기 기술을 쓰더라고요. 이미 제 머릿속엔 어떻게 받아칠지 다 구상을 해둔 상태였어요. 그 기술에 넘어가주는 척하다가 방심하는 틈을 타 들배지기 기술을 응용해 바닥에 꽂아버렸죠.”
한 선수가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해 등 전체가 바닥에 닿도록 메쳤을 때 주심은 한판을 선언할 수 있다. 하형주가 성공한 공격은 한판처럼 보였지만, 심판은 절반으로 판정했다.
“당시 심판위원장,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일본인이었거든요. 심지어 마사토가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총장으로 있는 도카이(東海)대학교 졸업생이었어요. 그러니 심판들이 일본의 눈치도 봐야 하지, 또 처음 보는 기술이지, 그래서 절반을 준 것 같아요.”
이어진 경기에서 하형주는 보란 듯이 똑같은 기술을 이용해 다시 한번 그를 매트에 내리꽂았다.
“넘어간 방향만 반대였지 똑같은 방법이었어요. 동일한 기술에 두 번이나 당하고 마사토는 완전 스타일 다 구겼죠.(웃음) 그때 국제유도연맹 회장이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내팽개쳐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찍혔더라고요.”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나라 국민감정이다. 그가 일본 선수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TV로 경기를 보며 응원하던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1970년대에는 북한 선수한테 지면 그야말로 ‘작살’이 났죠. 그 당시에 지고 나서 입국하면 공항에서부터 짐 검사를 하는데 옷밖에 없는 캐리어를 그 자리에서 탈탈 털었어요. 그러고 나선 가져가라고 하는데, 다시 옷을 개서 넣으려고 하면 문은 왜 또 잘 안 닫히는지….(웃음) 그런 식으로 망신을 줬죠. 북한은 당연히 이겨야 하고 일본에 지면 매국노인 거라. 근데 제가 질 줄 알았던 경기에서 일본 선수를 두 번이나 메쳤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38초 남기고 거둔 역전승
1984년 LA올림픽 준결승 (vs 군터 노이로이터)
야구의 9회 말과 2~3분의 추가 시간이 주어진 축구 중계를 중간에 끄지 못하고 끝까지 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하지 않던가. 1984년 하형주의 ‘결승을 향한 역전승’은 가장 극적인 반전 드라마였다. 1984년 LA올림픽 8강전에서 미하라 마사토를 꺾고 준결승에 오른 하형주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독일의 군터 노이로이터와 맞붙게 됐다. 상대에게 먼저 효과를 내준 그는 경기 종료 38초를 남기고 유효를 얻어내 역전승을 거뒀다.
“시간이 계속 흐르니까 초조하긴 했죠. 근데 계산해보니 두 번 정도는 기술을 걸 수 있겠더라고요. 그중에 한 번만 걸려라 하고 딱 잡았는데, 낚시해보셨어요? 낚시할 때의 손맛처럼 유도도 도복을 잡아챘을 때 느낌이 딱 옵니다. ‘아, 이건 넘겼다’ 하고요.”
그가 노이로이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1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였다. 하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가 어떤 선수인지 알았으면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당시 노이로이터의 지도감독이 우리나라 분이셨어요. 그분을 직접 찾아가서 ‘선생님, 제가 독일 선수랑 붙는데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랬더니 씩 웃으시면서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히 제가 이길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들어갔죠. 만약 그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다고 알려주셨으면 겁나서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노이로이터와 겨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까지도 궁금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유도 선수들이 모여서 일주일간 하는 합동 훈련이 있어요. 근데 이상하게 노이로이터랑 연습게임을 하면 항상 제가 졌어요. 그가 저를 던지면 이리저리 처박히기 바빴는데… 이런 선수를 어떻게 이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더글라스 비에라를 꺾은 그는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승 후보를 거듭 제치고 올라온 긴 여정이었다. 시상대에 오르며 그동안의 부상이며 고생했던 생각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만도 했지만, 그는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금메달을 딴 기쁨보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잘 극복했던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금메달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결과였죠. 그러니 울 이유가 있나요? 행복해서 그냥 활짝 웃었어요.”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던가. 그는 올림픽 이후에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니버시아드 금메달 등을 따며 메달 행진을 이어나갔다.
“선수 시절엔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봐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몰라보죠. 근데 행복해요.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웃음)”
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모임이 있는 날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저녁 술자리가 끝나고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 저녁 자리까지는 의무에 속한다. 식사 겸 술 한잔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의례적 행사가 끝나야 비로소 옵션이 풀리는 셈이다. 집에 일찍 갈 사람은 가고 각자 흩어진다. 뜻이 맞는 몇몇 친구들은 한잔 더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다. 맥줏집을 찾기도 하고 요즘은 실내 스크린 골프장을 찾기도 하는데 주로 가는 곳은 당구장이다. 그런데 나는 당구를 배우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축구와 농구를 좋아해 틈만 나면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면 당구는 한때 불량 학생들이나 동네 건달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담배 연기 뿌옇고 신문지에 덮인 자장면 그릇이 놓여 있는 곳, 그것이 당구장에 대한 내 첫 인상이었다.
그래서 직장 다니면서도 당구가 끌리지 않았다. 당구 치러 가자고 하면 볼일 있다고 아예 빠져버렸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따라가도 신문을 보거나 커피 한잔 하면서 무료하게 기다렸다. 그러면 짝이 안 맞는다고 당구 좀 배우라고 야단들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친구들과 놀기에 좋은 운동이라면서 주변에서 강력히 권했다. 몇 번을 거절하다 ‘그럼 한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는 길에 근처 당구장에 등록했다. 어떤 운동이든 기초를 배울 때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당구는 용어 자체가 대부분 일본어였다. 오시(밀어치기), 하끼(끌어치기), 비껴치기(비켜치기), 삐루(회전), 겐세이(방해) 등 외래어 일색이었다. 어쨌든 시원시원하게 진도를 나가면 좋겠는데 며칠 동안은 공도 안 주고 자세만 가르쳤다.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했고 자세도 불편했다.
얼마 후 겨우 공을 만지게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큐대를 다마(공)에 대고 몇 번 어르듯하다 그대로 밀어쳐야 하는데 몸이 흐트러지며 공이 계속 비켜나갔다. 남들이 치는 것을 보면 별거 아니고 쉬워 보였는데 실제 해보니 전혀 달랐다. 정확한 계산도 있어야 하고 판단력도 필요했다. 그냥 대충해서 되는 운동이 아니었다. 맞은 공이 정확히 각을 이루어 다른 공을 맞힐 때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예술이라 할 정도로 멋있었다. 그러나 초보인 내게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마는 핑핑 돌며 실수를 반복했다. 내 평생 구기운동을 이렇게 재미없게 해본 적이 없었다. 테니스를 할 때도 열심히 했고 재미도 있었다. 축구, 농구, 탁구 등도 그랬는데 당구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당구를 그만뒀다. 좀 더 인내했다면 지금쯤은 친구들과 당구장에서 어울렸을 테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더 배우지 않기로 한 데에는 코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초보인 내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많이 했다. 가뜩이나 억지로 배우러 왔는데 그런 소리가 듣기 싫었다. 못 쳐도 살살 달래가며 칭찬을 해줬더라면 그냥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한두 번 가르쳐주다가 다른 일을 하거나 의자에 앉아 졸다가 이따금 와서는 잔소리만 하고 갔다. 물론 당구는 가르쳐준 대로 혼자 열심히 익혀야 하는 운동이 맞다. 그러나 초보에게는 적절한 칭찬이 있어야 한다.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그 후 바쁜 일이 있어 한두 번 빠지게 됐고 이내 가기가 싫어졌다. 결국 등록한 날짜도 남았는데 큐대를 놓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잘하지 못해도 조금이라도 칭찬을 해줬다면 아마 그 말에 속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때의 기분은 이랬다.
‘내 돈 주고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당구를 배울 때도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그 후 지나가는 길에 올려다본 간판은 바뀌어 있었다. 당구장 간판이 아닌 노래방 간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