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핸드볼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최초로 동양인 선수가 등장했다. 13년 뒤 그는 독일인들이 핸드볼의 신이라 칭송하는 영웅이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과 동고동락한 윤경신(46) 감독을 만났다.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의 오전 훈련이 한창인 의정부종합운동장, 그곳에서 윤경신 감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m가 넘는 키 덕분에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옆에 서니 마치 개미가 된 기분이랄까. 앉으면 괜찮을까 싶어 서둘러 카페를 찾았다. 웬걸… 앉아서도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아버지 181cm, 어머니 170cm, 누나 174cm, 남동생이 194cm이니까 가족이 다 크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저희 가족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해요.”
그는 203cm로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크다. 중학교 때부터 키가 빠르게 크기 시작했는데 2학년 땐 3주 만에 11cm가 자라 거인병을 의심했을 정도라고.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90cm만 되면 좋겠다고 말한다.
“큰 키의 장점이요? 별로 없어요. 공기가 맑나?(웃음) 오히려 단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불편하고 맞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기도 하죠. 그래서 어릴 땐 큰 키가 콤플렉스였어요.”
하지만 핸드볼 선수인 그에게 큰 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2m 3cm 장신이 꽂아 내리는 시속 120km의 속사포를 막아낼 사람은 없었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득점왕,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며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핸드볼 정상에 오르다
우리나라 3대 스포츠가 축구, 야구, 농구라면 유럽에선 핸드볼이 그중 하나다. 특히 독일의 핸드볼 분데스리가는 전 세계 핸드볼 리그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부 리그 18구단, 2부 리그 20구단 등 남녀 1, 2부를 통틀어 60여 개가 넘는 팀과 시합할 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우는 수천, 수만 명의 팬들이 그 인기를 증명해준다. 1995년, 핸드볼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윤경신이 진출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성적이 좋다, 전통 있는 팀이다 해서 들어갔죠. 근데 가서 보니까 성적이 밑바닥이더라고요. 그 당시 16구단 중에서 13~14위를 다투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들어간 굼머스바흐 핸드볼팀은 1부 리그에 겨우 발을 걸치고 있던 최하위 팀 중 하나였다. 2부 리그로 강등당할 뻔했던 굼머스바흐를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윤경신. 그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파워풀한 공격을 앞세워 굼머스바흐를 3위의 막강 팀으로 만들었다. 유럽 선수들 가운데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에서 핸드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어요. 탄탄한 기본기와 경기 기술을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죠. 유럽 선수들보다 뒤처지는 웨이트 부분은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보완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몸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떨어지곤 했거든요. 동료들이 오죽했으면 절 북한 괴뢰군이라고 불렀겠어요.(웃음)”
그는 첫 시즌이던 1996-1997시즌부터 2001-2002시즌까지 연속 여섯 시즌 득점왕, 다시 2003-2004시즌과 2006-2007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역대 분데스리가 최다 골을 기록했다. 그중 2000-2001시즌엔 324골로 분데스리가 역대 유일한 300골 이상의 기록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2002-2003시즌 득점왕을 놓친 이유가 유럽 선수들이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해서 한 선수에게 7m 드로우를 몰아줘 득점왕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독일에 갔을 땐 텃세성 파울이 많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유일한 동양인이다 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는다, 마늘 냄새가 난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 고정관념을 깨주기 위해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마늘이 들어간 불고기랑 잡채를 해주셨거든요. 애들이 밥을 다 먹으면 제 역할은 술 게임을 알려주는 거였어요. 독일엔 술 게임 문화가 없다 보니 ‘369’나 ‘007빵’ 같은 걸 가르쳐주면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술 게임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독일과의 작별
2006년 윤경신은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는 굼머스바흐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굼머스바흐의 구단주가 바뀌면서 그의 연봉을 삭감하는 등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는 것.
“이적할 땐 배신감을 느껴서 번호도 7번에서 77번으로 바꿨어요. 그 당시엔 21번 아래 번호 선수가 주축을 이뤘는데 제가 높은 숫자로 바꾼 이후엔 다들 저를 따라 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유행한 게 맞나…?(웃음)”
2008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서 가진 마지막 경기에서 공교롭게도 함부르크와 굼머스바흐 두 팀이 맞붙었다. 걱정과는 달리 굼머스마흐 팬들도 그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함부르크가 두 골 차로 이겼어요. 굼머스바흐를 상대로 제가 여덟 골인가 넣었죠. 유럽 사람들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이 사태를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굼머스바흐 팬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우를 많이 해준 것 같아요. 끝날 때 박수도 쳐주고 북도 쳐주고. 특히 대형 유니폼을 만들어서 작별인사해주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독일에서 윤경신의 인기는 ‘한국은 몰라도 윤경신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인터넷에서 그를 검색하면 아직도 ‘핸드볼의 신’, ‘득점기계’, ‘구기종목의 전설’이라는 연관검색어들이 뜬다. 문득 그도 인터넷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해보는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는 거 좋아해요.(웃음) 사실 안 좋은 기사가 있으면 어떡하나 더 걱정하는 편이죠.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기수로 섰는데 하필 태극기가 바람에 뒤집힌 순간에 찍힌 사진이 뉴스로 나갔더라고요. 아휴… 욕 엄청나게 먹었죠. 그래도 종종 제 이름 검색해보고 새로운 기사 나오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핸드볼 선수에서 감독으로
두산베어스 핸드볼팀은 지금까지 2014년을 제외하면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강팀이다. 윤경신 감독은 지난 2013년, 두산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해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줬다.
“처음엔 두산이 날 감독으로? 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승승장구하는 팀인데 과연 내가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도 컸죠. 한편으론 ‘스타플레이어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듬해인 2014년 지금은 해체한 웰컴론 코로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 없는 두산에게 준우승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첫해에 우승하니까 나태해진 거죠. ‘아 이제 됐어, 이렇게 하면 2년 차에도 우승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만했던 게 결국 패배로 이어졌어요. 그래도 한 번 넘어져봤기 때문에 3년 차, 4년 차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경신 감독은 우승의 비결로 선수들과의 소통을 꼽았다. 비시즌에는 선수들과 거리낌 없이 술도 마시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핸드볼과 함께한 지 어언 30여 년.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직도 핸드볼이 좋을까.
“중간중간 농구해라, 배구해라 유혹이 많았었는데 핸드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 제 자신을 칭찬해요. 핸드볼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명성과 명예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핸드볼을 했지만, 정말이지 매 순간 행복했어요.”
다가오는 11월에 국내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리는 핸드볼코리아리그가 열린다. 경기장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 윤경신, 그의 다섯 번째 우승 도전을 응원한다.
우아하다는 건 무엇일까. 직장이 우아할까? 가정이 우아할까? 부대끼는 현실 속에서 ‘우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우아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에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의 저자 박홍순(朴弘淳·55)은 “무언가를 창작하거나, 창작된 것을 접할 때”라고 답한다. 즉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삶이 우아해진다는 것.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는 시기는 내면의 가치가 풍부해지는 노년이라 말한다. 나이 들수록 체력은 고갈되지만, 시간에 비례해 쌓이는 지혜가 바로 우아한 노후의 밑거름이다.
‘미술관 옆 인문학’, ‘생각의 미술관’ 등으로 미술을 통한 성찰과 인문을 이야기해온 박홍순 작가. 그는 새 책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에서도 그림과 문학, 예술 작품 등을 매개로 노년의 삶을 그렸다. 아직 노인이라고 하기엔 이른(?) 50대 중반인 그가 황혼의 인문학에 성큼 다가선 까닭은 무엇일까?
“노년이 꼭 생물학적 나이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삶의 방식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동년배를 보면 공무원이나 자영업자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퇴직했어요. 그들의 일상은 노년의 삶과 다름없더라고요. 집에서 TV 보며 시간을 때우고 할 일 없이 공원에 가거나 산에 올라요. 그때 느끼는 상실감, 박탈감, 당황스러움 등이 노인들이 갖는 정신적 공황과 비슷하더군요. 나이는 멀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노년은 제게 바짝 다가와 있는 셈이죠.”
노년기 내면의 거울 ‘예술’
박 작가는 박수근의 ‘노인’, 김대섭의 ‘삶(生)-회(回)’, 고야의 ‘노파의 시간’ 등 작품 속 노인의 모습을 통해 노년의 삶과 죽음, 성(性)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그림이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사회가 수치화한 노인의 삶보다 더욱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중 노년 주제 도서 대부분 수치, 통계, 정책 등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론적 접근은 개인의 상황 고려 없이 한데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거치죠. 그 결과 값이 유용하긴 하지만 현실을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누군가의 인생이 수치로 표현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한 개인의 삶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노인 문제는 계속 피상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주로 작가가 직접 노년을 겪으며 부딪히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는 저마다 한 인간이 노인이 되기까지 그동안 쌓아온 삶의 내력이 녹아 있다. 박 작가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이러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노년의 삶을 성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권한다.
“그림은 생각의 여지를 가장 많이 준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무협 만화는 재미있는데 같은 내용의 영화는 유치할 때가 있죠. 만화는 칸과 칸 사이 상상의 여지를 주잖아요. ‘얍!’ 하고 다음 장면에 죽어 있는데, 독자가 그 과정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모든 걸 다 보여줘버리니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죠. 그런 점에서 그림은 정지된 화면 속에 수많은 메시지를 압축하기 때문에 상상력이 폭넓게 발휘됩니다. 그만큼 생각도 깊어지고요.”
여가도 훈련이 필요하다
책에서 언급한 우탁의 시조 속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라는 글귀에 공감한다는 박 작가. 그는 막을 수 없는 늙음을 거부하며 젊음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언제부턴가 안티에이징이 트렌드잖아요. 우리 사회는 젊음을 추구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늙어버린 것 같아요. 요즘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공무원이라고 답합니다. 생활의 안정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거죠. 청년, 노년 할 것 없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주하는 경향이에요. 젊음의 상징은 도전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신체적 노화보다 정신적, 심리적 노화가 심각하다고 봐요.”
그는 외면의 노화는 막을 수 없지만, 내면의 젊음은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앞서 언급한 젊음의 상징 ‘도전’을 통해서 말이다.
“공자는 논어에 30대를 ‘입지(立志)’라 했어요. 단순한 한자 풀이로는 ‘뜻을 세운다’이지만, 유가적 덕목으로 봤을 때는 ‘뜻을 세워 세상에 나아가 실현한다’는 의미죠. ‘실현’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지는 곧 도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자 시대는 차치하고 조선시대만 해도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됐을 거예요.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당시 30대와 비교해 현재는 입지가 몇 살일까요? 60대겠죠. 그런데 40대부터 변화를 두려워해요. 한창 입지일 때 이미 불혹(不惑)에 도달해버린 거죠. 내면의 젊음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유지된다고 봅니다.”
박 작가는 다음 10년을 위한 준비가 안 된 노후는 한마디로 ‘꽝’이라 말한다. 특히 ‘여가를 즐길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다.
“여가 없는 노년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다고 여가활동을 잘하는 건 아니에요. 오랜 훈련이 뒷받침돼야죠. 한국 사람이 미식축구를 보면 재미없잖아요.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룰도 모르니까요. 즐기는 방법이 훈련돼 있지 않은 거죠. 그렇듯 다른 여가활동도 마찬가지예요. 하루아침에 재미가 붙지는 않아요. 습관이 되어 쌓이고, 쌓인 것 위에 또 다른 게 더해질 때 점점 즐거워지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미술에 관한 여가를 꿈꾸지만 자칫 어렵게 여기고 실천하지 못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박 작가에게 미술을 여가에 접목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한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실에서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장벽으로 작용하거든요. 앎이 전제되고 행위가 뒤따른다는 거니까요. 예술은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보는 행위가 먼저이고, 봄으로써 감동하잖아요. 수영을 배우려 할 때, 수영 관련 책 10권을 읽는다고 잘하게 될까요? 재미가 있을까요? 수영을 하려면 일단 물에 들어가야죠. 몸으로 먼저 익히고 지식이 결합됐을 때 묘미가 생기는 거지, 처음부터 지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수영도, 예술도 아는 게 아니라, 하는 거거든요.”
그는 여가로 미술을 즐기려면 자주 보고, 경험해야 하는데 아직 사회적 여건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상에서 미술을 접하는 공간이 부족해요. 개인 소장 예술품이 많다는 것도 문제이고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이 원래부터 국가 소유였을까요? 처음엔 개인 소유였죠. 예술품은 저마다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100년, 200년 지나면 그 작품은 어느덧 나라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죠. 한때는 개인의 재산일 수 있지만, 그쯤 되면 공공의 성격을 띠는 거예요. 그럴 때 소유자들은 작품을 기증하는데, 우리는 개인이 쥐고 있는 작품이 너무나 많습니다.”
박 작가는 공적인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들과 예술의 가치를 나누듯 노년에는 개인보다 사회를 위한 활동을 시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후엔 사적인 이익보다 공적인 가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대표적인 활동이 정치입니다. 개인의 신념과 소신에 의한 정당활동이나 시민활동 등 자기 정신을 객관화하는 일들이 좋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가치 있는 노후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내면의 젊음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의 열기를 체험해보기 위해 강릉 빙상 경기장에 다녀왔다. 송파구에서 문인협회 회원들을 초대하여 간 자리였다. 스위스와 일본의 여자 아이스하키 경기였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경기라서 자리를 채워주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본 아이스하키 경기는 TV로 보던 것과 달리 상당히 빠르고 박진감이 있어 보였다. 헬멧을 쓰고 경기를 하기 때문에 여자 하키 경기라는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남자들 경기로 오해할 뻔 했다. 그만큼 몸싸움이 거친 경기였다.
경기장 한 가운데 천장에 스코어 및 여러 가지 전달 사항이 떴다. 경기 중에는 이동하지 말고 착석하라고 주의가 계속해서 나왔다. 관중석이 혼란스러우면 선수들이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관중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다. 관중석에서 볼 때에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골대가 가려 결정적인 골 장면을 놓치기도 했다.
올림픽은 프로 야구나 프로 축구, 프로 권투처럼 다른 프로 스포츠 경기와 다르다. 4년간 피땀을 흘리며 갈고 닦은 실력으로 기량을 겨루는 자리이다. 4년이라는 세월은 길다. 올림픽에 여러 번 나오는 선수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 번의 올림픽에 출전하는데 그친다. 그만큼 국가를 대표하는 기량을 갖추어야 하고 나이도 영향을 준다.
음악회나 영화관을 생각하면 된다. 음악회나 영화관에서는 시작 전에 모두 착석하고 집중해서 본다. 끝나고 나서야 좌석에서 이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 경기를 경기 중에 마구 돌아다니며 관전하는 것은 선수들의 입장을 너무 생각하지 않는 처사이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연예인이 아니다. 경기를 마치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무대인 양 생각하는 모양이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집중하고 경기에 지장 없게 응원해야 한다. 아이스하키 경기는 3 피리어드로 되어 있다. 각 피리어드 간에 20분간 휴식시간이 있으므로 그 때 움직이면 된다.
사진을 찍는 것은 괜찮지만, 플래시가 터지는 촬영은 금물이다. 선수들이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회나 뮤지컬 같은 공연에서도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스마트 폰으로 찍다 보면 기능을 잘 몰라서 플래시가 터지는 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
평창 올림픽은 온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어서인지 몇 몇 정치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선수와 가족 외에는 못 들어가는 제한 구역에 들어가 얼굴 사진을 찍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정치인도 있다. 선수들이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 시간에 선수촌을 방문한 고위 관료도 비난의 뭇매를 맞았다. 자기네들은 격려나 응원의 차원이었다고 하지만, 의전에 따르다 보면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에 방해가 된다. 경기 참관도 그렇다. 어린 선수들이 더 잘 하려다가 리듬이 깨져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최고의 기량은 연습 때처럼 자연스러울 때 나온다. 너무 무리하다 보면 탈이 나는 것이다.
관전 문화도 선진국다워야 한다. 올림픽 시설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비해 관전 문화는 한참 뒤떨어지는 것 같다. 관중 매너도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풍수학이다. 그런 면에서 풍수는 집을 살 때뿐만이 아니라 집을 단장할 때도 유용하다. 물론 누군가는 풍수를 ‘미신’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대적 삶과 맞지 않는 비합리적 이론’이라 할 수도 있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분명 귀 기울일 내용이 없지 않다.
원래 풍수라는 말의 어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로 농사짓기 좋은 최적의 터를 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란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풍수가 적용된 사례가 많다. 이미 알려진 사례를 보더라도, 홍콩의 47층 건물인 홍콩상하이빌딩을 짓는 데 풍수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풍수를 고려해 백악관 집무실을 개조했다. 또 축구선수였던 데이비드 베컴 부부도 딸 하퍼의 방을 풍수지리학자에게 보여준 뒤 자문을 해서 꾸몄다. 우리나라도 대기업 총수의 집과 사옥은 처음부터 풍수를 고려해 입지를 선정하고, 그 대지에 맞는 건물을 풍수를 따져 디자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기업가처럼 큰돈을 만지거나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풍수에 관심이 많다.
풍수의 적용
풍수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쌓아온 경험의 통계자료다. 집의 건축 요소, 가구, 가전제품 등을 자연의 원리와 닮게 배치해 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들어줌으로써 편안하고 건강한 생활은 물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큰 줄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바로잡아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대지 계획부터 평면 계획까지 풍수를 고려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오피스텔에 사는 게 일반적이고,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가구나 소품을 바꾸고 그 위치를 바꾸는 식의 풍수가 더 현실적이다. 가령, 예전의 집들은 현관을 열면 바로 욕실이 보이는 구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럴 때 현관에 중문을 설치해주거나 가벽을 설치해 돌아가는 방식으로 구성을 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집 안 특정 공간의 컬러를 바꾸거나 벽지 등을 바꾸는 식으로 크게 돈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풍수를 적용할 수 있다.
시작은 ‘비우기’부터
집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우선 공간에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일단 빈 공간이 있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만인 사람이 근육이 탐스러운 몸을 만들 때 우선 살을 빼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풍수나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우기’다. 풍수 인테리어의 기본은 쓰지 않는 물건은 버리고, 남아 있는 물건의 정리정돈을 잘하면서 정갈한 상태를 유지하고 채광, 통풍, 환기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집이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불필요한 물건이나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방이든 거실이든 너른 시선으로 한 번 둘러보자. 그런 다음 구입했을 때의 가격을 떠나 왠지 싫거나 불편한 물건이 있는지 체크하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띄지 않게 버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기준
돈의 개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심리적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든다는 데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버리는 게 익숙해지면 삶은 놀랄 만큼 단순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집 안의 운수를 끌어올리는 풍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고 남은 물건들은 사용 빈도, 계절에 맞게 잘 수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납할 때도 빈틈없이 채우기보다는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들어 수납해야 좋은 기운이 통한다.
진정한 ‘집’의 의미
집이라는 공간은 딱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보편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 풍토, 토질, 문화와 역사 등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자신이 가장 편하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개성을 입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집이 만들어진다.
또 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이야말로 ‘집’이고 자신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집은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서 다른 사람이 사는 집과 비슷하게 몇 주 만에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통찰력과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갈 때 그곳은 어느새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인 ‘하우스(house)’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자신과 가족의 공간인 ‘홈(home)’을 만들어야 할 때다.
>글 : 박성준 건축가·역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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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가. 사람과 땅의 기운을 함께 보는 풍수 컨설턴트이면서, 또 한 사람의 생년월일시 기운과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어내는 젊은 역술가이기도 하다. 풍수와 인테리어를 접목시킨 풍수 인테리어를 제안하고 있으며, 풍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기업의 사옥과 주거공간의 콘셉트 디자인 및 설계를 하는 등 풍수에 맞는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
모든 스포츠는 ‘힘 빼는 데 3년’이라는 말이 있다. 잘 하려면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되는 이유가 있다.
필자도 아직 당구를 세게 치는 편이다. 세게 치다 보면 공이 이리 저리 굴러다니다가 공에 맞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덕을 보는 경우도 있다. 시니어들은 파워가 약하다 보니 3 쿠션 이상을 거치는 대회전 길이 보여도 파워가 못 받쳐줄까 봐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는 파워는 넘치다 보니 대회전을 선호한다.
그러나 세게 치다 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첫째,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겨냥점이 흔들린다. 두 번째로는 반사각이 커진다. 공이 제1목적구에 맞고 나서 튕겨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계산한 대로 각도 형성이 안 된다. 세 번째 쿠션은 반발력이 있어서 공이 세게 들어오면 바로 뱉어 내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회전이 덜 먹는다. 네 번째로 공을 살살 치면 제 1목적구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다. 3 쿠션에서는 코너로 몰리게 하면 포지션 플레이가 되어 다음 3 쿠션 길이 쉬워진다. 그런데 세게 치다 보면 제1 목적구가 크게 충격을 받으면서 어디서 설지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제 1목적구의 움직임을 조정한다는 것은 수비에도 도움이 된다.
4구 경기에서도 당연히 살살 쳐야 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겨냥점이 달라지거나 반사각이 커지는 문제는 같다. 가까이 있으면 치기 좋은데 세게 치면 공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세게 치는 경우는 제 1목적구가 반대편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정도의 파워면 된다.
그래서 당구도 여성들이 즐기기에 좋은 스포츠인 것이다. 남성들이 파워를 앞세우며 치는 당구를 보면 못 따라갈 것 같지만,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구는 파워로 치는 것이 아니다. 공이 맞을 정도의 파워와 정교함이 더 중요하다.
복싱, 태권도 등 타격을 가하는 스포츠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막상 임팩트가 약해진다. 골프나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적당한 임팩트가 목적인데 그전에 에너지를 다 소모하는 것이다.
탱고를 출 때 스타카토가 잘 되려면 힘을 빼야 한다. 힘을 뺐다가 힘을 순간적으로 주면 효과가 크다. 타월 한 쪽으로 잡고 다른 한 쪽을 내 보냈다가 낚아채는 식이다. 그러나 힘을 잔뜩 주고 있으면 둔해 보인다. 모든 스텝의 이음새도 힘을 빼야 부드럽게 연결된다.
몸에 힘을 빼고 있으면 순발력이 좋아진다. 대응 능력이 빨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주고 있으면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 느리고 둔한 것이다. 선수들이 ‘몸을 푼다’는 의미도 같은 뜻이다.
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피로가 금방 온다. 추운 날씨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니다 보면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아프다. 근육에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한 후 정리운동을 꼭 해야 하는 이유도 몸에 힘을 빼기 위함이다.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경쾌한 컨디션은 몸에 힘을 뺐을 때이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빛나는 시작, 눈부신 기억 ‘라이프 사진전’
일정 1월 1일~4월 8일 장소 부산문화회관
미국의 사진 저널, ‘라이프’ 지에 실렸던 사진들 중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억될 가치가 있는 사진작품 130여 점을 전시한다. 무하마드 알리, 마더 테레사, 존 레논, 찰리 채플린 등 시대를 상징하는 이들의 삶을 오리지널 필름으로 엿볼 수 있다. 한국과 관련된 사진도 눈에 띈다. 1960년대 미국에 진출했던 국내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날의 풍경 등도 관람 포인트다.
카라마조프
일정 1월 3~14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출연 이정수, 조태일, 김히어라 등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러시아어로 ‘검은 얼룩’이라는 뜻을 지닌 이 작품은 친부 살인사건을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들에 관한 법정 추리극이다. JTBC 예능프로그램 ‘팬텀싱어2’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은 이정수와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의 주인공 김히어라가 출연한다.
안나 카레니나
일정 1월 10일~2월 2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출연 옥주현, 정선아, 이지훈 등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풍속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당시의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 등 인류 보편의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클래식, 록, 팝, 크로스오버 등 40여 곡의 음악과 무대 전체를 아우르는 LED 스크린 영상으로 19세기의 러시아를 구현했다. 한국에서 초연을 선보이는 이번 뮤지컬은 러시아의 유명 뮤지컬 프로덕션인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세 번째 작품이다.
스타박’스 다방
개봉 1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상우 출연 백성현, 이상아, 서신애 등
‘제17회 전주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바리스타의 꿈을 품고 강원도 삼척으로 내려가 카페를 차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만이 내 세상
개봉 1월 17일 장르 코미디 감독 최성현 출연 이병헌, 윤여정, 박정민 등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와 엄마만 믿고 살아온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난생처음 만나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동안 센 캐릭터를 연기해왔던 이병헌이 조하 역을 맡아 진중한 이미지를 벗고 코믹함을 연기해 기대를 모은다.
인제빙어축제
기간 1월 27일~2월 4일 장소 강원도 인제군 남면 빙어호 일원
1997년 제1회를 시작으로 올해 22주년을 맞았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빙어를 잡으며 겨울철 소양강 최상류로 찾아드는 빙어 떼의 귀환을 볼 수 있다. 빙어열쇠고리 만들기, 텀블러 만들기 등의 체험활동과 전국얼음축구대회, 빙어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공식 당구 시합이 벌어지는 장소는 각양각색이다. 쇼핑몰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체육관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쇼핑몰은 쇼핑객들에게 구경거리를 선사하고 쇼핑몰 광고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각종 잡음이 있어 별로 좋지 않다. 체육관에서 하는 경우는 객석이 너무 멀리 있어 관심 있는 선수의 경기를 보기 어렵다. 당구대가 여러 개 있어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 집중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국제 경기는 독립된 건물에서 하기도 한다. 큰 건물이 있는 휴양지에서도 국제 경기를 한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경기는 기존 당구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당구장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당구 치는 사람들의 잡담 소리만 들린다. 조용히 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을 칠 때마다 한마디씩 하게 되므로 다른 당구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 소위 방해 작전으로 하는 말도 있다. 당구 치는 사람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리려는 의도로 일부러 말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좋은 매너는 아니다.
어느 당구장은 TV 스포츠 경기를 하루 종일 틀어놓는다. 프로야구 경기를 틀어놓기도 하고 UFC 경기를 틀어놓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시끄럽다. 당구장을 투기 오락장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야구 경기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안타라도 치면 괴성을 지르니 문제다. 아무 소리가 없으면 불안한 모양이다.
어느 당구장은 들어가자마자 개 두 마리가 짖으며 달려 나와 놀란 적이 있다. 계속 짖어대는 바람에 그만 치고 나갈 생각까지 했다. 주인은 개를 사랑한다지만 개를 싫어하는 손님들도 있다. 영업장에 개를 풀어놓을 일은 아니다.
경기도 한 당구장은 대회 때 감미로운 바이올린,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배경 음악을 깔아 호평을 받았다. 선수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대한체육회장 배 당구대회에서는 수시로 공지 멘트를 마이크로 하는 통에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선수별 당구대 배정 멘트인데 댄스대회처럼 한쪽 벽에 붙여놓으면 될 일을 왜 소음에 버금가는 소리로 전달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일의 국제 당구대회장에서는 축구장에서나 사용할 법한 나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해설자 얘기로는 독일만 그렇다는데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이 한 사람 있는 모양이다. 당구는 귀족 오락이다. 궁정에서 하던 스포츠였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요즘은 고급 라운지처럼 차려놓은 당구장도 종종 보인다. 물론 게임비가 일반 당구장보다 비싸다.
당구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멘탈 게임이다. 심리적 요소가 경기에 많이 작용한다. 고급 당구장들은 클래식 음악을 낮게 틀어놓는다. 좋은 일이다. 당구를 치면서도 스스로 격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최근 유병률이 높아지는 족저근막염
한때 신고 걷기만 해도 살을 빼준다는 슈즈가 유행했다. 이후에는 척추를 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는 슈즈가 또 유행했다. 산에 갈 때는 등산화를, 축구를 할 때는 축구화를 신는 것처럼 신발은 목적과 상황에 맞게 신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신발들이 병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발바닥부터 뒤꿈치까지 이어진 족저근막에 염증이 생긴 것을 족저근막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플랫슈즈나 킬 힐처럼 발뒤꿈치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신발을 즐겨 신는 젊은 여성들에게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통증이 시작되면 부랴부랴 신발을 바꿔 신고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데, 이는 잘못된 선택이다. 발에 통증을 주지 않는 편하고 부드러운 신발이 족저근막염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치료’가 필요한데 신발만으로는 병을 치료할 수 없다.
환자 90%이상은 비수술적 치료 가능해
우신향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박재철과장은 “족저근막염 치료를 받는 환자 90% 이상은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치료가 끝나지는 않는다. 물리치료나 주사치료, 체외충격파 치료 같은 비수술적 치료를 수주이상 꾸준히 받아야 한다. 치료를 하다 통증이 사라졌다고 바로 치료를 멈추면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꾸준히 치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치료기간에 계속되는 통증과 발의 불편함으로 빨리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이해하지만 응급처치만으로는 완치가 되지 않고, 재발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치료와 병행했을 때 신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걸을 때 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흡수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발을 신는 것이 좋다. 꾸준히 물리치료를 하면서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신향병원 박재철과장은 “최소 한 달 이상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해도 통증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족저근막을 절개하는 수술적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 다행히도 수술적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전체 족저근막염 환자 가운데 10%미만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미리부터 수술을 걱정하기 보다는 하루빨리 족저근막염의 원인을 살펴 제거하고, 통증을 완화하는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우리가 흔히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터키였지만 솔직히 필자에겐 그런 감흥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십몇 년 전에 터키를 가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언젠가 인터넷 서점을 뒤적이다가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와 바로 주문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책 내용이 단순히 터키 여행이 꿈이었다거나 너무도 멋진 풍광의 나라였기 때문인 제목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제목에서 지칭되었던 터키가 한동안 필자의 뇌리에 박혀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책의 소개 글에서 말하기를,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빌어먹을, 벌써 쉰이네!' 하는 생각이 들 때 집어 들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했다. 또 저자는 폐경기를 이기고 삶의 열정을 새롭게 지피기 위해서 늘어진 유방과 얼굴의 주름과 잡티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단순히 중년의 미국 아줌마들의 인생 수다판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쑥쑥 읽기엔 던져주는 화두와 해법이 명쾌해서 빳빳해지는 긴장감과 함께 활기를 주기도 했었다.
40대, 50대... 90대 여자들의 소중한 삶의 경험만이 아닌 기다리고 있는 삶에게 외치는 모습이 유쾌했다. 그녀들은 외친다.
"연령차별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빈둥대며 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충고하는 90대의 할머니(아니, 여성!!)
"난 이제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아요." 주름 수술할 돈으로 터키와 그리스로 여행 다녀왔어요"
"나이를 빨간 스카프처럼 목에 감고 꼿꼿이 대로를 활보하자”
6.25 참전국이었거나 월드컵 축구 때문이기보다는 별 의미도 아닌 이런 즉흥적이고 단순한 의미에서 터키 여행은 어이없겠지만 그 정도가 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그조차 이미 생각나지 않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터키 공항은 생각보다 작았고 저녁시간이어서인지 북적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국심사 행렬에서 뒤죽박죽 엉킨 채 터키인 인듯한(모습이나 말소리로 보아서) 일행들끼리 길을 막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편인 필자는 긴 비행시간으로 이미 고단한데 점점 더 지친다. 더구나 지하철을 타려고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충전하는 과정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다. 마침 옆에 서있던 한국 학생이 “여기 원래 자주 그래요” 한다. 이래저래 피곤해 진다.
지하철과 트램을 연결 이용해서 시내인 술탄 역(Sultanahmet)까지 나오니 저녁 바람이 쌀쌀하다. 이스탄불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데 유명한 사원이나 궁전,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구도시인 이곳 슐탄 역 부근에 많이 있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도 이곳이어서 시내 구경도 할 겸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밤거리를 걸어갔다. 짙은 눈썹과 검고 큰 눈망울의 터키인들이 활보를 한다. 머리에 히잡(Hijab)을 두른 여성들도 흔하게 보인다. 이스탄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