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대 건축물 찾아 떠나는 공주 여행
-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 2017-12-11 11:00
-
-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 술을 좋아하다 못해 직접 술을 빚다
- 국내 최고의 술 전문가가 마침내 세계와 겨룰 명주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오미자였다. 패스포트, 썸씽스페셜, 윈저12, 윈저17, 골든 블루… 27년 동안 동양맥주에서 한국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에 관여해, 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불릴 만큼 주류 역사의 산 증인이 된 이종기(李鍾基·62) 오미나라 대표. 오랜 세월 한국 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그는 지금 독립군이 된 심정으로 명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술 만드는 흥과 열정, 그리고 잃어버린 술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를 만나니 대뜸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오미자였을까?’ “제가 술로 할 수 있는 재료는 거의 다 해봤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양조를 위한 원료가 없다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맥주는 보리가 주원료다. 우리가 먹는 보리는 육조대맥이라 하여 위에서 보면 알맹이가 육각형으로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용 보리는 이조대맥이라는 두 줄짜리 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심지어 쌀도 마찬가지다. “쌀로 술을 만들기 좋은 품종이 일본에는 80개가 있고 그중에 유명한 7대 품종이 있어요. 포도도 수천 종 중에서 양조용 품종인 샤르도네, 리슬링 등이 유명하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부 생식용이지 양조용 원료가 없어요. 양조학에서 생식용은 아예 양조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걸로 만들어도 술이 되긴 되죠. 그런데 명주가 될 가능성은 제로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쌀을 비롯해서 곡물, 과일, 약재 등으로 술을 만들어봤는데 국제적으로 명주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오미자 이외에는 없었던 거죠.”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 아니다 이 대표가 우리나라 명주를 만들기 위해 원료를 탐색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그로부터 5년여 후, 그는 한국산 원료로선 오미자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미자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술은 기본적으로 관능미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취하는 거야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어요. 그냥 에틸알코올만 마셔도 취하긴 하죠. 술의 주성분은 물이에요. 12도 와인이라면 물이 88%입니다. 그런데 알코올과 물 외에 천분의 일 정도 분량에 수백 가지 다른 요소들이 섞여 있는 거죠. 문제는 그 수백 가지 요소들로 인해 술의 색과 향과 맛 등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잖아요?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게 술이죠. 오미자가 그걸 충족해요.” 이 대표에게 있어 술이란 일단 매력이 있어야 한다. 관능미를 충족시키는 매력과 역사 문화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진짜 술이란 것이다. 그에게 술은 사회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저는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이지 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전쟁을 일으켜서 발악할 때 만든 전쟁 보급품이에요. 워낙 우리가 어렵게 살다 보니 제3공화국 때 서민용 술로 보급된 거지. 그런데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 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술과 농업이 전혀 관련 없게끔 괴리가 생겼어요. 술은 농산물의 꽃이고 농업의 가장 오래된 산업이 양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문화 말살을 위해 일제가 만든 적폐 희석식 소주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우리 생활에 관계된 얘기다. 당장 오늘 저녁에만도 그 수많은 식당과 테이블 위에서 몇 병씩 비워질 삶에 밀착된 한 부분 아닌가. “1909년에 순종이 주세법을 공포했어요. 물론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죠.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가호호든 궁궐이든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주세법은 그걸 금지시켰어요. 겉으로는 조세를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술은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문화 그 자체였어요. 아예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직역하면 마을에서 음주하는 예절이라는 의미죠. 정조가 이것을 책으로 수천 부를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술 문화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대표는 향음주례의 절차가 일곱 개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술을 권하고 받을 때 세 번 권하고 두 번 사양하라는 것도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걸 없애니 문화가 말살된 거죠.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취하려고 술을 털어넣는 문화가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술이 살아야 우리 농업이 산다 술은 그 지역에서 농사지은 걸 빚어서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자 일제가 전선을 중국, 동남아, 하와이까지 넓히면서 보급품이 부족하게 됐다. 그때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국가에 있는 모든 자원을 국가의 필요에 의해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 못지않게 술입니다. 그런데 식량은 전쟁물자로 다 나간 상황이죠. 그러니 일제가 열대에서 나는 가장 싸구려 타피오카와 당밀을 섞어 알코올을 만들고 거기에 사카린, 조미료를 타서 보급한 게 오늘날 희석식 소주예요. 술을 음미하고 즐기는 게 아니라 정성과 품이 안 들어간 막술로 변질된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술은 문화를, 예법을 논하는 일이다. 이 대표는 그런 술의 본연의 성격이 지금은 일종의 도피제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술을 도피제로 전락시킨 것은 정말 저급한 문화죠. 저는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시를 생각해요. 로마네 콩티가 왜 비쌀까요? 한 병에 오백 내지 이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로마네 콩티나 소주나 취하는 건 똑같은데 말입니다. 로마네 콩티에는 그걸 마시고 싶은 스토리,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론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를 마시는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10%만 괜찮은 술로 대체가 된다면 그 자체가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어요. 지역 발전과 관광,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인삼주 혹평에 자존심 상해 명주를 만들기로 작심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우리나라 농산물로 만든 술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물러설 수 없는 지론이었다. “술은 그 나라 문화의 척도라고 얘기됩니다. 자기 고장의 술을 마시고 영감도 얻고 애환도 달래고 해야 하는데 일제의 보급품을 국주처럼 먹는 건 진짜 적폐죠.” 문득 술은 공동체의 삶이 녹아 있는 문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가양주(家釀酒)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어요. 일제가 전쟁 군수용으로 개발한 소주로 한국의 양조 문화와 술 문화가 떨어진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일제 치하에 있는 문화가 술 문화예요. 그런데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 슬픈 일이죠.” 이 대표는 현재 충주에서 세계술문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5월 1일에 설립하여 올해로 벌써 12년째다.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가 너무 저급하고 전통문화와 지독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두 가지를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바로 박물관과 세계 명주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를 다니던 1990년 영국 에든버러의 헤리옷 와트 대학원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했어요.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했죠. 저는 막걸리를 가져갈 수는 없어서 인삼주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가 다른 술들을 마시면서는 칭찬을 하더니 인삼주를 마시고는 혹평을 쏟아내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고 말이죠. 여기서 저는 프랑스에서 온 학생이 가져온 로제(rose) 샴페인을 마시고 그 빛과 맛, 향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오미자로 술을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 2006년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오미자 열매에 꽂혔다. 그가 닥치는 대로 실험을 한 끝에 고르게 된 오미자는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재료다. 그 다양한 맛은 오미자의 명주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들었다. 반면 그런 다채로운 맛의 오미자를 발효시켜 술까지 이르게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7년에 프랑스 연구소를 찾아가서 오미자 발효 여부에 대해 자문을 했습니다. 결론은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발효가 안 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걸려도 발효가 분명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확신은 2008년에 마침내 현실이 됐다. 그래서 바로 오미자 농가가 많은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오미나라,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JL크래프트의 제품은 네 가지다. 오미자로 만든 스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브랜디, 그리고 사과로 만든 브랜디가 그것이다. “세계 명주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제품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재정이 문제죠. 재정이 취약하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품평회도 열고 해외에서 행사도 할 수 없으니. 그런데 내년 정도면 재정이 상당히 좋아질 것 같아요.” 이 대표는 세계 명주의 기준을 두 가지로 보고 있었다. “첫째는 이 술이 세계의 다른 어떤 술과 비교해도 열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적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그가 자랑하는 술은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이다. 이미 상당한 마니아가 만들어졌다는 자평이다. 물론 신제품도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절반 가격으로 대형 유통과 손잡고 내년 하반기부터 스파클링 와인을 출시할 계획이에요.” 좋은 술은 스토리가 많아 더 맛있다 술을 만드는 명인답게 그는 대단한 술꾼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 일 년에 500회는 마셨을 거예요. 거의 매일 마셨던 셈인데, 그것도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마신 거였죠.” 그는 술을 맛있게 마시는 방법으로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을 잘 맞추라고 말했다. 음식과 술의 궁합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술이 가진 스토리와 좋은 사람과의 교감은 정신적 측면에서 술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선물용으로 술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 있죠. 우리 저장고에 보면 다양한 술들이 있는데 이 술들은 자기가 오크통을 사고 직접 술을 담가서 숙성을 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직접 만드는 정성이 담긴 술들입니다. 이런 술이 정말 선물할 가치가 있는 술이 아닐까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술 세 가지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 “우선 뮌헨 옥토버 페스트에서 나오는 라거 맥주는 정말 맥주가 이렇게 맛있나 놀라게 만듭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면 도루 강이란 곳이 있는데, 강 양쪽에 오랜 역사를 가진 와이너리들이 있어요. 그곳의 음식과 와인은 정말 대단한 맛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런칭한 술이 윈저부터 패스포트까지 이르고, 간접적으로는 조니워커, 발렌타인 시리즈 등을 탄생시켰죠. 그러니 제가 빚은 ‘고운달’을 마셔보면 다른 술하고 비교가 안 돼요(웃음).”
- 2017-10-08 11:54
-
- 성웅의 별, 노량에 지다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
- 2017-08-24 15:37
-
- [Bravo Life] 이번 주말, 점프 어때?
- 점프를 한다고? 그것도 자전거로? 얼핏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자전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서울 외곽으로 나간 후, 역에서 내려 라이딩을 하며 자연을 즐기거나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문화를 동호인들 사이에선 ‘점프’라고 부른다. 이 점프를 즐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동호인들 사이에서 점프 문화가 확산된 것은 관련 인프라의 발달이 계기가 됐다. 첫 번째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이다. 서울만 놓고 보면 경인 아라뱃길을 따라 조성된 아라 자전거길에서, 여주를 지나 충주까지 연결된 남한강 자전거길까지 동서남북으로 자전거를 탈 만한 곳이 늘었다. 두 번째는 자전거에 인색했던 기존 대중교통의 변화다. 최근에는 자전거와 연계해 이동하는 승객들을 위해 정확한 규칙이 정해지고, 자전거를 위한 공간까지 마련되면서 승객과 불필요한 마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1~8호선은 평일에는 자전거 반입은 금지하지만, 주말에는 가능하다. 대신 외곽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은 평일에도 자전거와 함께 탑승할 수 있다. 단, 출퇴근시간대인 오전 7시~10시, 오후 5시~8시는 출입이 제한되어 이 시간은 피해야 하고, 맨 앞 혹은 맨 뒤 칸에 승차해야 한다. 용산에서 춘천을 잇는 ITX-청춘열차는 자전거 전용 탑승 칸이 마련되어 있어 늘 탈 수 있지만, 주말에는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 신분당선과 9호선은 자전거 탑승이 아직 금지되어 있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 규칙을 피해 탑승하는 방법은 접이식 자전거, 즉 미니벨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미니벨로는 접어서 휴대한다면 평일에도 지하철 이용이 가능하다. 자전거 없으면 대여도 쉬워 만약 자전거가 없다면? 대여소를 통한 점프도 방법이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은 남한강 길의 중심 팔당역이다. 역 주변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많으므로 양평 방향으로 나 있는 남한강 자전거길을 손쉽게 달릴 수 있다. 동호인들에게 최근 점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자전거로는 접근이 어려운 먼 곳까지 가서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한강이나 자전거 도로 주변에 자리 잡은 ‘맛집’이나 관광지 탐방과 같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예 자전거 동호인들을 위한 ‘바이크 카페’가 곳곳에 생겨 자전거의 주차를 돕거나 할인 등 특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전거 선택은 다양한 요소 고려해야 나만의 자전거를 장만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신의 체력과 경제력, 이용목적, 주변 지인이나 활동하려는 동호회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조언한다. 자전거 매장 ‘싸이클러스’의 신동환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자전거를 선택할 때 현명한 길은 다양한 자전거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내게 맞는 자전거를 찾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동호회나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누구와 즐길 것인가가 중요한데, 함께 타는 분들과 비슷한 유형의 자전거를 선택해야 뒤처지지 않는 등 곤란을 겪지 않습니다.” 과거 동호인들 사이에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산악용 MTB가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확충으로 흙 밟을 일이 없어지자, 사이클로 불리는 로드바이크의 보급이 늘고 있다. 여기에 보관이나 대중교통 탑승이 간편한 접이식 미니벨로들도 다양한 옵션을 갖추면서 장거리 여행도 가능해져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자전거 가격은 무게가 좌지우지 자전거 가격은 프레임에서 결정된다. 자전거 프레임은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는데, 가장 저렴한 철에서부터 알루미늄, 카본이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티타늄이나 나무, 플라스틱 재질의 제품도 나온다. 흔히 ‘신문 자전거’로 불리는 저가형 자전거는 13kg 이상이 대부분이고, 100만원 전후의 알루미늄 제품은 10kg 내외, 150만원 이상의 카본 제품은 8kg 내외다. 1000만원대 티타늄 제품은 5kg대 제품도 있다. 자전거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몸에 맞는’ 제품을 찾는 것이라고 다혼숍 현기호 대표는 설명한다. “타이어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구성하는 프레임에도 체형에 따라 S, M, L 혹은 47, 49, 52 등으로 사이즈가 나뉩니다. 본인 체형에 맞는 자전거를 찾아 핸들의 위치, 안장의 높이와 각도 등을 내 몸에 맞게 정확히 맞추는 피팅 과정을 거쳐야 부상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체력이 부족한 시니어들은 승차가 편하고 운전이 쉬운 미니벨로로 먼저 감을 익히는 것도 좋습니다.”
- 2016-06-09 14:46
-
- [BML 칼럼] 시간 속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라
-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중략)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하략)“ 신경림(80)의 시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충북 충주 태생인 그는 이 시에서 아무리 옮겨 살아도 어릴 적의 이 그림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시는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로 끝납니다. 사람은 살면서 집을 얼마나 옮기는 것일까? 알고 보면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림처럼 자신이 살았던 집의 주소를 이렇게 줄줄이 댈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기호와 지향에 맞춰 집을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요. 더욱이 노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스스로 집을 짓거나 고쳐서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집은 개인과 그 가족에게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집 宇, 집 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뜻은 같다 해도 宇는 상하사방이라는 공간, 宙는 고금왕래라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집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도 집을 짓습니다. 대장부 사해위가(大丈夫 四海爲家), 대장부는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간 속의 집에 관한 말입니다. 맹자가 대장부를 논하는 글의 맨 앞에 나오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居天下之廣居]라는 말도 공간 속의 집을 말합니다. 정정당당하고 구차스러움이 없는 인격을 천하의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학문과 기예 등에서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 속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 본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는 대방가(大方家)나 전문가라는 말에도 시간 속의 집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천지자연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입니다. ‘하이쿠의 성인[俳聖]’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시에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라는 게 있습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아주 흡사합니다. 바쇼에게는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인간은 나그네였습니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며 집이란 그 방랑의 편의와 일정한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었습니다. 바쇼는 방랑 속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불후의 시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쇼처럼 살 수 있는 자유인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한 집을 정처(定處)로 마련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방위와 향을 보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이른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를 고르려고 애를 씁니다. 산남수북을 양(陽)이라 하고 그 반대인 산북수남을 음(陰)이라고 구분하면서 길지를 찾곤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물자리부터 보라”거나 “집이 망하면 지관 탓만 한다”거나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맡기는 자다”라는 각국의 속담과 격언은 다 입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찾는 것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고를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지형과 지세를 살펴 땅을 골랐습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은 이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百萬買宅 千萬買隣]는 말이 있습니다. 의 권학편에는 “군자는 사는 곳은 반드시 좋은 환경을 고르고 교유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덕이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居必擇鄕 遊必就士]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이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요즘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지인의 시 ‘집’이 그런 집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네 벽을 잡아주는 땅,/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따로 떨어지지 않고/서로 마주 보고 감싸 안아/한 집이 됩니다./아늑한 집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큰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염치와 청빈을 중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큰 집은 죽음을 부르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 합니다. 큰 집을 뜻하는 옥(屋)은 尸(주검 시)와 至(이를 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집을 뜻하는 사(舍)는 人(사람 인)과 吉(길할 길)로 구성돼 있으니 단순한 말장난이나 문자 풀이 같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 김정국(金正國)이 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루거각이든 용슬소옥이든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일정한 장소,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내 몸을 담아 그 안에서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용슬소옥(容膝小屋)이란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작은 집을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데, 모든 사물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면 시간 속에 오래 남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집이 크거나 작은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글 ‘집’을 인용합니다. “집이란 크다고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집에는 질서가 깃들여야 한다. (중략) 집이란 지나치게 빈틈없이 꾸며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키 어려운 것, 설령 제한된 비좁은 공간일망정 터진 곳이 있어야 하며 또한 막힌 곳이 있어야 한다. 집이란 패각(貝殼)과도 같아 완벽해야 하나 그 속에서는 생명이 울려야 한다. 마치 그 속에 바다의 물소리가 울리듯이.” 이제 다시 꽃 피는 봄입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보며 집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합니다. 꽃이 가득한 집이 그립고, 시간 속에 오래가는 자신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2016-04-12 08:56
-
- [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3 신중년·꽃중년의 제2 인생설계 대학 가자 친구야! ⓵
-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은 인생 2막 설계에 관한 관심이 높다. 그런 요구에 맞춰 각 대학은 발 빠르게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신중년세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전 국민의 고등교육화를 꿈꿨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프라임칼리지를 개설해 신중년들의 미래 인생설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젊은 은퇴로 고민에 빠진 신중년들에게 한국폴리텍대학은 펜 대신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쥐어 주며 실전 학습을 가르치기에 나섰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방송대 대항마로 떠오른 사이버대학교는 이상 실현과 재교육을 토대로 시니어들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이다. 미래 설계가 아직 좀 미흡한 신중년들이 있다면 주목하라. 더욱 나은 제2의 인생으로 인도할지니.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40·50세대를 위한 제2 인생설계·준비과정 원격대학의 원조,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안에는 또 하나의 대학이 있다. 바로 프라임칼리지다. 1997년부터 운영돼 온 방송대의 평생교육원이 2012년 프라임칼리지로 개명한 것.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기존 평생교육원의 틀을 깨고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학습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프라임 칼리지는 평생학습시대, 국민의 생애주기와 학습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다. 특히 40·50대 신중년들을 위한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은 중·장년층의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더 나아가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 2012년 제2 인생설계과정 32개 신규 교과목으로 총 2660명 수강에 이어, 2014년에는 총 1만284명이 프라임칼리지를 이용할 정도 관심이 뜨겁다. 프라임칼리지 교육과정은 제2 인생대학, 인문교양·시민문해, 귀농·귀촌, 창업, 사회적 경제, 국제개발협력 사회봉사, 전문자격, 명장교수, 평생교육 등 10가지 대분류 아래 각각에 부합한 과목을 배치했다. 영미영작 단편선, 문해 교육 이론 등은 물론, 집짓기, 창업, 다양한 국가의 어학학습 등 프라임칼리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을 개설해 놓았다. 방송대 학생은 프라임칼리지에서 강의를 들으면 졸업학점으로 최대 12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배울 강좌가 아니라면 꼭 한번쯤 프라임칼리지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외에 20·30세대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학위과정과 재직자 기초과정도 주목받고 있다. 인터뷰Ⅰ 박찬영 블루베리-연금나무, 게으름의 농장 수강 (서울, 방송대 농학과 15학번, 54) 귀농·귀촌을 꿈꾸는 신중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강좌를 기웃거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에 작년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 교수이신 문원 교수님이 블루베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셔서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했더니 프라임칼리지 강좌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귀농·귀촌할 생각만 있었지 어디로 갈지 또 어떤 작물을 키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한 관심이 한창일 때 들었던 프라임칼리지 강좌는 꽤 도움이 되더군요. 적어도 블루베리가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쉽고 수익성 좋은 작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농업에 관련한 일을 알아 가는 데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라임칼리지뿐만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요. 귀농·귀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방송대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프라임칼리지를 먼저 알았더라면 이쪽 강의를 먼저 들었겠죠. 프라임칼리지에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학교 입학하고 난 후에 알았거든요(웃음). 프라임칼리지도 새로운 인생 2막의 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선 농학과 공부에 집중한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라임칼리지를 좀 더 이용할 계획입니다. 인터뷰Ⅱ 양봉선 제2 인생대학 마스터클래스- 마음 외 5과목 수강 (전주, 방송대 국문학과, 58) 프라임칼리지는 마력이다 동화를 쓰고 창작을 하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방송대에 편입학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고장이 단단히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동화 작가. 직장인, 주부, 엄마, 방송대 학생으로 숨 쉴 틈 없이 살아온 탓일까요. 1~2년 전 9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오가다 우연히 프라임칼리지의 제2 인생설계 광고를 보게 됐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는데 평소 관심 있던 과목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삶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과목도 있고요. 두 과목만 수강할까 하다 프라임칼리지에서 수업을 들으면 방송대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기에 욕심을 좀 더 냈죠(웃음). 강좌를 선택하다 보니 6개가 되더라고요. 제2 인생 설계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중년의 삶,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삶 등을 공부했습니다. 내 이름을 단 아동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 ‘작은집-싸게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즐겁게 들었습니다. ‘안전, 웰빙, 스마트 여행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른 나라 예절, 선물로 현지인들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배웠습니다. 듣다 보니 3개월 단위로 끊어지는 강좌를 6개월이나 들었더라고요. 지금도 듣고 싶은 과목은 한없이 많아요. 프라임칼리지 너무 좋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것들, 살면서 배우지 못한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령화시대에 남다른 감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펜 놓고 손에 기름 묻히길 원하는 자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라! 한국폴리텍대학(이하 폴리텍대학)은 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추구한다.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학습한다. 1968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으로 시작해 2006년 24개의 기능대학과 19개의 직업전문학교가 합쳐져 지금의 폴리텍대학이 됐다. 폴리텍대학은 해마다 8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보인다. 땀의 결실을 보게 해주는 알찬 대학으로 세대와 학벌 위주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배우고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평생직업교육대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이 시니어들의 재취업과 제2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학사과정 외 시니어들을 위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은 3개월 단기과정으로 만 45세 이상 만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기업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된다. 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 이 과정은 올해 전국 31개 캠퍼스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2012년 333명의 수료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1868명이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수료했다. 놀라운 사실! 3개월 교육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뤄지며 수료생에게는 별도의 지원금도 지급된다. 인터뷰 송재구 (청주,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 2015년 8월 수료, 59) 노래하는 만학도에게 새 삶을 준 베이비부머 훈련과정 지난해 8월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 이상 의류업과 요식업을 하면서 살았 습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성장했을 무렵 늦바람이 불었는지 48세에 대학수학시험을 봐서 2013년 새내기 대학생이 됐습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2014년 말에 음식점 문을 닫았어요. 예전부터 전기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충주지역 폴리텍대학 광고를 보고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을 알게 돼 훈련과정에 들어왔습니다. 기초부터 전기 에너지, 설비, 이론 등 다 가르쳐주더라고요. 일단 배우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배워서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활력이 됐습니다. 과정 수료하고 바로 아파트의 시설관리기사로 취업했습니다. 아무래도 폴리텍대학에서 훈련과정을 수료한 것이 합격에 도움이 됐습니다. 내 나이에도 그런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이력서를 내니 업체에서도 좋아하더군요. 전기 설비에 관한 한 내 손으로 다 고치고 만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나이에 기술 없으면 딱히 취업할 곳이 없어요.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저는 얻은 거죠. 지금 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전기기능사 시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은 꼭 하나 더 따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목표지만 나보다 힘들고 직업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로 그분들을 도와가면서 사는 게 목표 중 하나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80세, 그 이후까지도 사회에서 일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 2016-03-25 12:57
-
- 태백의 겨울, 눈꽃 여행은 남다르다
- 유난히 겨울이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그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태백시다. 고원의 도시 태백의 겨울은 지루할 만큼 길다. 겨울밤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밤새 사락사락 눈이 내리는 날, 석탄가루에 뒤범벅된 도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설원에 감싸인다. 설원은 고산 밑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는, 지붕 낮은 집들의 때 묻은 몸을 잠시 숨겨준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태백산 당골 눈축제장에서 신나게 놀고 광산 갱도 체험 해발 600m에 위치하고 있는 태백시는 기온이 타 지역보다 낮아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도시다. 해마다 민족의 영산 태백산에서 눈축제(1월 22일~31일)가 열린다. 당골 축제장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축제여서 해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축제장 주변에 만들어진 눈 조각품 등은 눈요기와 볼거리를 주고 다양한 공연은 흥을 돋워준다. 개썰매와 스노모빌 썰매 등 체험거리도 많아 재미가 쏠쏠하다. 거기에 1997년 5월 문을 연, 동양 최대의 석탄박물관은 꼭 찾아봐야 하리. 태백시는 198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던 탄광도시였다. 그러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이 시행되고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석탄박물관에서는 잊혀가는 그 시절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지하 체험갱도관은 생동감이 넘친다. 전시관을 다 보고 지하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실제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대형 디오라마(모형도)로 갱내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태백산도립공원 입장권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태백산 설경 보면서 천제단까지 산행하기 진정한 설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태백산(1567m) 산행을 감행해야 한다. 코스는 당골매표소와 백단사, 유일사, 사길령 등이 있다. 최단 코스는 백단사나 유일사 코스다. 겨울 산행이 결코 쉽지 않지만 주목 군락지의 설화나 일출 등을 보기 위해 찾아든 등산객들의 수없는 발자국이 찍힌다. 태백산 9부 능선인 1500고지에 오르면 망경사가 있다.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나중에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망경사에는 물을 통해 바다 용왕과 교통한다는 용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으로 가는 길목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망경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산정 허허벌판에 있는 천제단을 만나게 된다. 천제단 주변에는 죽어 천년, 살아 천년이라는 주목 군락지가 있다. 주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나 설경 감상은 매년 1월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일이다. 철저한 등산 채비는 필수다. 고생대자연사박물관의 삼엽충과 구문소 풍치 감상하기 2010년에 개관한 태백 고생대자연사박물관(033-581-3003, 태백로 2249, www.paleozoic.go.kr)이 있다. 이곳에 박물관이 생기게 된 것은 주변에 다양한 고생대 퇴적 침식지형과 삼엽충, 완족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관심 없으면 화강암인 듯 생각하기 쉽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질이 매우 독특하다. 고생대의 바다가 융기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며 고생대부터 살아온 삼엽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박물관 가까이에 태백 8경으로 손꼽히는 구문소(천연기념물 제417호)가 있다. 낙동강 상류 황지천의 물이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 바위에 구멍이 나고 소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고생대에 석회암이 용해되어 생성된 석회동굴은 볼 때마다 신령스럽다. 주변의 얼어붙은 마당소, 삼형제폭포 등의 겨울풍치도 나름 볼만하다. 태백시내에선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둘레 100m가량의 ‘황지연못’도 가볼 만하다. 상지, 중지, 하지로 구분돼 있는데 연못에선 하루 5000톤가량의 물이 자연 용출된다. 상장동 벽화마을과 샘터마을 태백시의 또 다른 볼거리가 상장동 벽화마을이다. 이 마을은 1970년대 광부만 4000여 명이 거주했던 국내 대표적인 광산 사택촌이었다. 저탄장으로 사용된 문곡역을 중심으로 탄가루가 날리고 검게 그을린 광부들의 막장 생활을 달래는 대폿집이 줄지어 있던 번화가였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시행으로 폐광이 늘면서 젊은 광부들이 하나둘 떠나 지금은 400여 명의 주민들만 남았다. 지붕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겉으로 보기엔 태백시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다. 마을 골목 벽마다 크고 작은 70여 점의 작품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과 이야기, 사진 등을 통해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검은 황금’으로 불렸던 석탄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지나가던 누렁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전설 속의 개를 형상화한 ‘만복이’가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철암동에 가면 탄광역사촌이 있다. 철암역 앞에 있는 역사촌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살려, 탄광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작나무 숲과 검룡소 겨울 트레킹 태백산 산행을 못했다면 검룡소로 대신해보자. 검룡소(검룡소길) 주차장에서 왕복 2.6㎞ 정도만 걸으면 된다. 곧게 뻗은 낙엽송 군락지 숲은 한겨울에도 빛이 난다. 검룡소에 이르는 길은 나무 데크가 연결한다. 데크에서 소(沼)를 바라보면 된다. 약 20m 둘레의 암반에서 늘 9℃의 수온을 유지하는 물이 하루 2000~3000톤씩 솟아오른다. 하지만 눈으로는 용출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도 이곳의 의미는 크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다. 임계를 지나 정선, 평창, 단양, 충주, 양평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데 36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지나며 12개의 하천과 만나 한강에 이르게 된다.
- 2016-01-21 09:12
-
- [부고] 김진임씨 별세 - 이완선씨 모친상
- ▲김진임씨 별세, 이완선(前 충주고 교감)ㆍ항선(사업)ㆍ춘선(한국생산성본부 상무)ㆍ선미(사업)씨 모친상=14일 오후 충주장례식장, 발인 16일 오전, 043-842-4444
- 2014-07-15 10:23
-
- 충주시, 귀농ㆍ귀촌인 위한 '농촌 일손돕기 봉사단' 운영
- 충북 충주시가 귀농ㆍ귀촌인을 돕기 위해 나섰다. 충주시는 귀농ㆍ귀촌인의 농촌 적응능력을 높이고 지역주민과의 화합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농촌일손돕기 봉사단’을 운영한다고 28일 밝혔다. 봉사단은 충주 귀농ㆍ귀촌협회 회원과 귀농‧귀촌 교육생 200여명으로 구성됐다. 시는 참여자들에게 급식비와 작업도구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일손이 필요한 농가와 연결된 봉사단은 주로 봄철(5~6월)과 가을철(9~11월)에 투입할 계획이다. 일손이 필요한 농가는 충주시 농업기술센터로 신청하면 1회 40명 안팎의 자원봉사단을 지원받을 수 있다. 시의 한 관계자는 "이번 농촌일손돕기가 지역주민의 노동력 절감은 물론, 귀농ㆍ귀촌인에게 농촌 현장 적응능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농촌일손돕기 봉사단 가입 신청 및 일손 돕기 창구 운영과 관련, 자세한 사항은 농업기술센터 기술연수과 인력육성팀(043-850-3214)으로 문의하면 된다.
- 2014-05-28 09:32
-
- [부고] 이영구씨 별세 - 이남희씨 부친상
- ▲이영구씨 별세, 이남희(국방일보 편집부 기자)ㆍ남훈 (사업)ㆍ남형(공군사관학교 31기)ㆍ은주(춘천서상초 교사)씨 부친상=13일 오전 충주영광장례식장, 발인 15일 오전, 043-845-7634
- 2014-05-14 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