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패션을 결합한 신개념 패션쇼에 시니어 모델들이 나섰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시 중구 신당동 르돔에서 진행된 ‘FASHION for ECO with EMA’가 성료했다.
이번 행사는 ‘친환경, 지구를 살리자’라는 주제로 (주)엘리트모델에이전시(EMA)와 K-패션의 리더 와이쏘씨리얼즈(Whysocerealz), 트리플루트(TRIPLEROOT)가 함께 기획했다. 패션쇼뿐만 아니라 MUD의 댄스 퍼포먼스, 나무 심기, 바자회 등 환경을 생각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시선을 끌었다.
패션쇼의 또 다른 특이점은 무대에 오른 모델들이 모두 시니어모델이라는 점이다. 엘리트모델에이전시는 시니어모델 전문 에이전시이자 아카데미다. 시니어모델들은 패션쇼의 의미가 좋아 적극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패션쇼의 의상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책임졌다. 즉, 환경보호를 주제로 신구가 조화를 이루며 의미를 더했다.
와이쏘씨리얼즈 이성빈 디자이너는 ‘FASHION for ECO with EMA’를 연 배경에 대해 “트리플루트와 EMA와 함께 행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콘셉트에 대한 논의 중 ‘ECO’, ‘친환경’, ‘지구를 살리자’의 콘셉트로 하면 어떨까라고 의견을 제시했고, 모두 동의해 진행됐다”라고 밝혔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쇼를 두개의 파트 ‘일상생활 속 환경오염 vs 일상생활 속 지구 지키기’로 나눴고, 반전되는 무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는 쇼를 준비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서 “그동안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모르고 살았다. 제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들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도 몰랐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더라”고 소감을 밝혔다.
쇼에서는 ‘일상생활 속 환경오염’에 대해 일회용 컵으로 커피 마시기, 텀블러·물티슈·치약 과다 사용, 유튜브 과다 시청 등을 언급했다. 반대로 ‘일상생활 속 지구 지키기’에 대해서는 전기 절약, 계단 사용, 헌 옷 기부, 손수건 사용 등 일상에서 쉽게 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성빈 디자이너는 “이번에 쇼를 준비하면서 배운 게 많다. 당장 평소에 사용하는 일회용 컵부터 친환경 소재로 바꾸게 됐다. 포크·나이프, 포장재, 완충재, 봉투 등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친환경 소재로 바꿀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트리플루트 이지선 디자이너는 “환경과 패션의 만남을 통해 일상에서부터 작은 행동들을 실천해 변화를 희망했다. 모든 실천은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신 100분께 감사드린다.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해 우리의 취지와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단순히 즐기는 패션쇼가 아닌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의미 있는 패션쇼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패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지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될 때 더 많은 의미와 멋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행사를 통해 환경보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도 시니어모델들과 함께 친환경적,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패션쇼를 기획하려고 한다”면서 많은 응원을 당부했다.
#장면 1 자동차 안 : 그러니까 남편이지
모처럼 교외 드라이브에 나선 어느 부부.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 OOO 교수가 쓴 글 봤어요? 그동안 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 글은 좀 실망이네요. 균형감을 잃었고,너무 부분적으로 알고 섣불리 판단한 것 같아요. 팔로어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 나도 그 글 잠깐 봤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던데. 그리고 한 번 정도 갖고 실망하고 성급해 보이네, 당신. 그분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이렇게 시작된 논쟁에 점점 불이 붙습니다. 말을 할수록 아니꼬워진 아내는 그 사람 안 좋은 점만 들추어내려 애씁니다. 상대가 여자 교수라 더 기분이 나빠진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입니다.
“아니, 당신은 그 여자 책 한 권도 안 읽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평생 같이 산 나보다 그 여자 편을 들어요? 그렇게 잘 알아요?”
급기야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외출을 망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는 아내. 왜 내 편을 안 드느냐고 실컷 따지고 싶은데 치사해서 참으려니 속이 말이 아닙니다. 흥! 그러니까 남의 편, 남편이라 그러는 거지!
#장면 2 형광등을 가는 참 딱한 내 편
화장실 등이 나가자 평소와 달리 자기가 갈아주겠다고 큰소리 치는 남편. 요즘 전등은 가는 방식이 까다로워 해보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해봐도 저렇게 해봐도 뚜껑조차 열리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 팔짱을 끼고 옆에서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이리 주고 그만 의자에서 내려와요!” 명령을 합니다.
희한하게도 쌔가 빠지게 돈 벌어다주는 남편은 밉고, 허구한 날 돈 갖다 쓰는 자식새끼는 예쁜 법입니다. 퇴직한 남편이 은행 일, 살림살이 물을라 치면 ‘그것도 못 하냐, 그것도 모르냐’며 통박에 구박을 얹어 핀잔하기 일쑤입니다. 반면 자식이 세상 물정, 시시콜콜 온갖 문제 물어보면 세상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답하는 우리 아내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장면 3 부부 동반 모임
“닥쳐.” 앞자리에 마주 앉은 부부 중 아내가 남편한테 큰소리를 냅니다. 순간 좌중이 고요해지고, 나머지 부부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남편이 한 얘기가 가당치 않다고 그랬다는데, 남들 앞에서 그 정도로 남편을 모욕하는 아내가 집에서는 얼마나 남편을 잡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심지어 70대 부부로 이뤄진 친목 모임에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깜짝 놀라셨나요? 아니 우리 부부 얘기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이 세 장면은 주변에서 직접 겪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열두 번째 마음 미장공은 부부 싸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댁의 남편은, 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
님 놈 남 : 님이 남이 되는 순간
1992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 가사부터 살펴볼까요?
도로남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린 인생사
정을 주던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해서
멍을 주고 가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정곡을 찌르는 노랫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도로남’이 되려면 그 사이에 ‘놈’이 되는 과정을 거칠 때가 많습니다. 최근 일반인 부부들이 겪는 실제 갈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출연한 사람들 연령대에 관계없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말입니다. 서로를 부르는 말, 특히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랍니다. ‘야’, ‘너’는 다반사고 말끝마다 ‘X새끼’, ‘XX새끼’ 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자녀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말이 짧아지면 마음도 짧아지고, 그러다 몸도 상처로 골병들게 마련입니다.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우리는 말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나눕니다. 말이 없는 부부도 문자메시지는 주고받습니다. 말, 글, 언어를 떠나서 소통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이 가진 힘은 큽니다.
‘체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 말에 대한 속담이 참 많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증언 한마디가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를 내 마음 밭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그냥 흘려보냈으면 큰 사달이 나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내 마음 밭에 툭 떨어뜨려 씨를 뿌리는 순간 그 말에 뿌리가 생기고 줄기가 뻗어나가고 잎이 생기고 결국 열매를 맺어 그 말대로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누가 나쁜 말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 밭에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말이 자란 가시덩굴에 긁히고 찔리지 않도록 아예 마음 밭에 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의 편을 진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 서로 지키고 살리는 지름길은 없을까요?
말 한마디, 언덕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비법은 바로 말에 덕(德)을 붙이는 것입니다.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이 바로 ‘언덕’(言德)입니다. 덕을 베풀려면 보통 물질이나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돈 한 푼 안 드는 게 이 언덕입니다. 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말에 덕을 붙이면 그 사람도 잘되고, 그 말을 하는 나도 덩달아 잘됩니다. 덕과 득이 되는 말이 있고 독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덕(德)이라는 글자는 누군가를 도와 혜택을 받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득(得)도 마찬가지로 화폐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 즉 재물을 획득한 모습을 뜻합니다. 덕과 득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말에 덕을 붙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잘되게 하는 것,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언덕(言德)은 덕담(德談)과 일맥상통합니다. 남 잘되기를 비는 것이 덕담이니까요. 생판 남을 만나서 님이 될지, 놈이 될지, 또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 말이 덕과 득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니까요.
내 삶의 기준은 하희라 씨입니다!
남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번이 소환되는 연기자 최수종 씨. 우주 최강 ‘아내바라기’ 일등 남편으로 등극한 뒤 한 번도 왕좌를 내주지 않는 그 남자. 아내 하희라 씨가 14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정말 잘해낼 겁니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항상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할 거라고 사랑을 다짐하며 약속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표현이 방송용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삐딱한 시선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진심이 사무치도록 감동을 줍니다.
무조건 내 편, 있습니까?
친정에 갈 때면 아버지는 식사 뒤 커피 한잔 해야지 하시며 믹스커피 봉지를 따십니다. 그걸로 부족한지 달디단 커피에 꿀을 듬뿍 넣어주십니다. 꿀 같은 아버지 사랑에 온몸과 맘이 따뜻해집니다. 무조건 언제나 든든한 내 편 1호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 편 몇 호일까요?
내가 혹 잘못된 판단을 해도, 내가 한쪽 얘기만 듣고 흥분해 길길이 뛸 때도, 내가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피워도,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잘했어! 누가 감히 우리 여보를 화나게 했어? 다 죽었어!’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없다면 당신이 먼저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마음 미장공 열두 번째 이야기이자 2022년 마지막 인사로, 남편을 떠올리며 썼던 제 글 한 편을 대신 올립니다. 한 해 동안 제 편에서 마음 다해 응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무조건 당신 편입니다.
내 편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
헤맬 때도 기다려주는 사람
때로 속여도 넘어가는 사람
미워도 예쁘다 해주는 사람
야속해도 허허 넘기는 사람
실수조차도 묻지 않는 사람
허물 모른 척 덮어주는 사람
종종 가슴 아픈 말 하는 사람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사람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
귀신같이 우울함 아는 사람
딱 그때 술 한잔 권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약과 피낭시에, 쑥 브라우니, 인절미 마카롱 등 서양 디저트에 한국인의 기호를 버무린 화려한 메뉴가 각광받는 요즘이다. 반면 한국의 1세대 쇼콜라티에 고영주가 운영하는 카카오봄(Cacaoboom)은 기본을 지키는 초콜릿 전문점이다. 일에만 몰두하다 오른손 엄지가 고장 났지만, 여전히 초콜릿 기술자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초콜릿은 먹고 다니냐’ 인사 건네는 세상을 꿈꾸며.
벨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 길리안, 노이하우스의 본고장이다. 고영주 대표는 2000년 6월, 벨기에의 PIVA 호텔학교에 입학해 정통 초콜릿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귀국 후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초콜릿 전문가로 활동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초콜릿의 가치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안고 카카오봄을 오픈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수제 초콜릿은 고사하고 커피 시장이 막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쇼콜라티에’라는 생소한 직업과 고급스러운 수제 초콜릿은 금세 입소문이 났다. 2017년 벨기에 아스트리드 공주가 내한했을 때 초콜릿 디저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초콜릿은 카카오빈에서 얻은 카카오버터, 카카오매스 그리고 설탕이 기본이에요. 카카오봄의 초콜릿은 식물성 유지나 합성착향료 따위가 잔뜩 끼어 있는 공장 초콜릿과는 달라요. 벨기에 전통 수제 초콜릿 기술로 매장 작업장에서 모두 손수 만듭니다. 메뉴는 벨기에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온 레시피를 바탕으로 해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기후에 맞춰 조금 변형하기도 하지만, 본질은 지키려고 하죠.”
몰두의 상흔을 읽고, 기록하다
쇼콜라티에는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몸을 숙이거나 구부리고 있다. 오십견, 디스크, 손목터널증후군, 손가락방아쇠증후군 등 여태껏 받은 진단명도 골고루다. 기술적인 문제 외의 고민을 나눌 동종 업계 선배나 동료, 후배가 드물다는 것도 언제나 아쉬웠다. 기술의 의미는 무엇이며, 틀이 존재하는 과자에서 허용되는 복제는 어디까지인지, 소셜 미디어에 얼마나 굴복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외로운 20년을 달려오던 차,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굽어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인생의 위기감을 손 때문에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요. 참 내 몸을 돌보지 않았구나 싶더라고요. 일을 할 때는 부족함을 느끼고 배우며 부지런히 즐겼어요. 쉬는 것도 그렇게 해야 했는데 간과했죠. 일을 할수록 피로가 쌓여갔던 거예요. 처음엔 ‘초콜릿을 둘러싼 수많은 일들은 어떻게 하지?’, ‘내 직업은 이렇게 끝인가?’ 마구 우울한 상상을 하며 뒹굴었어요.”
서툴지만 단단한 손의 습관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는 대신 책을 읽었다. 자고, 먹고, 읽었다. 다양한 갈래의 책을 집 안 곳곳에 두고 집히는 대로 말이다. 책상에선 수필을, 거실에선 소설을 봤다. 내면의 분위기를 전환하고, 책 속으로 여행했다. 더불어 왼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오른손도 자꾸 써서 익숙해졌을 테니, 왼손 훈련을 통해 양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매일 일기를 쓰며 손끝에서 시작된 선이 어디로 나아가는지만 집중했다. 타자기를 두드리면 틀린 문장을 한 번에 싹 지울 수 있을 터라며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상적이고 불필요한 걱정 대신 근원적인 만족감을 얻었다. 일에 빠져 사느라 균형이 깨진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내면이 정돈되니 서툰 글씨도 점점 정갈해졌다. 갈고 닦았던 기술에 대해서도 되새김질했다. 어떤 기술자로 살고 싶은지 방향을 점검했다. 그의 왼손 이야기는 한 권으로 엮여 출간됐다. 수익금은 모두 기부했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다.
“예전엔 항상 시험대에 놓인 기분이었어요. 1세대 직업인에 대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니까요. 이제는 수제 초콜릿 업계에서도 시니어가 됐으니, 시선에서 한층 자유로워요. 후배들이 빛날 수 있도록 기술을 전할 방법을 고민해봐야겠죠. 인생의 남은 날이 더 적기 때문에 에너지를 가치 있게 쓰려고요.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요. 할머니가 됐을 때 ‘나 의도치 않게 여기까지 왔어’라고 말하기보다, ‘순간순간 용기 내 선택하면서 살았어’라고 뿌듯하게 말하고 싶어요.”
버스가 오지 않는 가짜 정류장이 치매 환자의 배회를 막아주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영국 등 유럽 국가에 이어 일본에서도 가짜 정류장을 활용하고 있다.
독일 “버스가 늦네요, 커피 한잔하세요”
가짜 정류장은 독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독일의 뒤셀도르프 벤라트 지구에 있는 ‘벤라트 시니어 센터’ 요양원은 시설 내에 버스가 오지 않는 가짜 버스정류장 간판을 세워두었다. 환자가 정류장 근처를 서성이면 잠시 후 직원이 다가와 정류장으로 안내한다.
버스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커피 한잔하며 기다리라고 말이다. 치매 노인은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안심하고 앉아 있다가 왜 버스를 타려고 했는지 잊게 된다. 이때 직원은 버스가 늦는 것 같으니 요양원 안으로 들어가자고 달래고, 환자는 요양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두이스부르크 시의 발터 코르테스 요양원도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을 만들었다. 집에 간다며 요양원을 뛰쳐나간 치매 노인이 실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나가 행방불명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라트 요양원의 가짜 정류장 효과가 알려지면서 유럽에서는 병원, 요양원 등 여러 시설에서도 이런 정류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 알츠하이머 학회는 가짜 정류장에 앉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환자들이 안정을 찾는 과정에 주목하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영국, 과거 떠올리게 하는 ‘회상 요법’
영국의 사우스엔드 대학병원 응급실 안쪽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대기 장소이지만 치매 환자를 위해 버스 표지판과 운행 시간표를 두어 정류장처럼 꾸며두었다. 많은 치매 환자들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버스정류장을 잘 기억해내며, 그곳을 찾으며 배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영국 알츠하이머학회는 2025년 영국의 치매 환자가 100만 명이 넘을 것이라며 치매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국에서는 치매를 늦추기 위해 ‘회상 요법’에 관심이 있다.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를 통해 환자가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치매에 직접적인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을 통해 기억을 잃는 속도를 늦출 수 있으리라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에 영국의 런던 로열프리병원도 버스정류장을 설치하고 벽면은 수십 년 전의 신문으로 장식해두었다. 버밍엄 로버트 하비 요양원은 195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우체국, 정육점 등을 두어 거리를 꾸몄고, 브래드퍼드의 앵커밀 요양원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틀거나 로마의 휴일과 같은 오래된 영화를 틀어준다.
치매 친화 도시, 日 도요하시 ‘치매 환자도 안전한 거리’
치매 인구가 600만 명을 넘어선 일본에서도 ‘가짜 버스정류장’을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2025년이면 약 700만 명이 되어 일본 고령자의 20%가 치매를 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치매 프렌들리 마을’로 유명한 일본의 도요하시 시에는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이 있다. 도요하시 시에는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모이는 치매 카페 ‘안키카페’(アンキカフェ)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치매 환자는 보통 ‘가족을 만나러 가고 싶다’거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배회하다가 길을 잃게 되거나 행방불명된다. 이 때 주로 찾아가는 곳이 버스정류장이다. 하지만 치매 환자는 5분 정도 지나면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버스를 타고 떠난 뒤 어디를 가려했는지 잊고 배회하지 않도록 버스가 오지 않는 가짜 정류장을 만들었다. 치매 노인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 공감해 도요하시 철도 회사가 이전에 사용하던 진짜 버스정류장을 양도해주었다. 도요하시 철도는 직원들에게 치매 서포터 양성 강좌도 열고 있다.
도요하시 시에는 가짜 정류장뿐 아니라 약 10개의 치매 카페가 있다. 치매 환자나 그를 돌보는 가족들이 모이는 장소다.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치매에 관한 마음 상담도 한다. 또한 도요하시 시는 정기적으로 ‘치매 마을 만들기 보고회’를 하며 치매가 있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거리 만들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치매 인구 1억 시대, 대처는?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추정 치매 환자 수는 약 89만 명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인구는 약 5000만 명이며 2050년에는 1억 5,200만 명으로 3배 넘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치료법이 연구되지 않고 있는 데다, 치매 환자를 돌볼 수 있는 기관도 많지 않아 간호 대부분을 가족들이 맡고 있다. 치매 환자는 집을 나가 배회하다 행방불명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자신이 치매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기도 한다.
가짜 정류장의 가장 큰 역할은 어딘가를 찾아가야 한다는 급박한 치매 노인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준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노인에게 요양원 직원들이 “저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라고 안내하고 그곳에 앉아 안심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
많은 나라에서는 치매를 어떻게 완화할지, 치매 환자를 안전하게 관리할 방법은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 ‘가짜 정류장’이 치매 환자의 배회를 막고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다.
지난 28일 국회의사당에서 ‘액티브 시니어의 불확실한 재취업 환경과 혁신 방안’이라는 주제로 '2022 시니어산업혁신 국회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김영호, 김주영, 노용호, 한무경 국회의원이 주관하고 세종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시니어산업학과와 (사)시니어벤처협회가 주최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국회의원과 국민의힘 한무경국회의원은 축사를 통해 2026년 초고령사회 진입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니어를 복지의 대상이아니라 경제활동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언급하며 세미나를 계기로 시니어 창업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바란다고 전했다.
사단법인 시니어벤처협회 신향숙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40~65세의 액티브시니어를 위한 지원 정책이 절실한 시점에 국회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열린 것에 감사한다며,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중장년들이 삶의 설계와 재취업 교육을 통해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대학교 시니어산업학과 이용기교수는 액티브시니어가 창업이나 재취업의 기회를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상대적 빈곤의 처지에 빠질 수 밖에 없으므로 시니어산업의 학문적, 실무적 시사점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패널로 나선 고수플러스의 박영은 대표는 "많은 시니어들이 창업을 망설이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는데, 그것은 바로 실패와 격무에 대한 두려움"이라며 "실제 많은 시니어들이 퇴직금을 털어 치킨집, 편의점, 커피전문점 등의 창업에 나서지만 예상보다 노동 강도가 세고 경쟁이 심해 사업 실패 경험뿐 아니라 건강까지 잃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고시원 사업자 중 시니어 비중이 50% 이상에 달하고 있으며 대부분 안정적 수익을 창출하면서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며 시니어가 하기 좋은 실 사례를 소개했다.
서울시 내 치킨, 커피 분야 가맹본부 대다수가 ‘필수품목’의 범위를 과도하게 지정해 가맹점주로부터 납품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필수품목이란, 브랜드 상품의 통일성 유지를 위해 가맹점주가 본부 혹은 본부가 지정한 업체에서만 사야 하는 물품이다.
서울시가 치킨, 커피 분야 가맹본부 30곳을 조사한 결과 29개 본부가 일회용품, 일반 공산품 등 시중에서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을 필수품목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치킨 프랜차이즈는 맛과 품질의 일관성 유지와 관련 없는 물티슈와 냅킨, 젓가락, 고무장갑 등을 필수품목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한 커피 프랜차이즈는 89개에 달하는 필수품목을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이들 29개 가맹본부를 대상으로 가맹점 유통·품질 관리에 필수적인 물품이 아닌 일반 공산품을 필수품목에서 제외하도록 조정했고, 이들 중 21개 업체가 이를 받아들여 총 89개 품목을 필수품목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필수품목에서 제외된 물품들은 가맹점주들이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게 된다. 가맹점주가 시중에서 제외 물품을 구매했다는 이유로 가맹계약을 해지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서울시는 이와 별개로 5개 분야 외식업종 가맹점 500곳을 대상으로 필수물품 관련 불공정 관행 등 현장 상황 점검에 나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이 과정에서 불공정행위가 밝혀진 가맹본부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하는 등 엄정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류대창 서울시 공정경제담당관은 “과도한 필수품목 지정 등 불공정 관행을 지속적으로 점검하여 소상공인이 대부분인 가맹점주들의 권익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부부의 경제활동으로 벌어진 육아 공백을 채우기 위한 우선책이 조부모가 된다면, 자칫 그 책임감과 부담이 노후를 무겁게 짓누를 수 있다. ‘내 아이는 내 손으로, 혹은 가까운 가족이 돌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지역사회가 공동 육아를 실천하고, 주민들의 사회적 고립까지 방지하려 노력하는 독일의 마더센터를 찾아 그 해법을 들어봤다.
현지 취재 독일 뮌헨
한국의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게 된 원인은 하나만 꼽기 힘들다. 일·가정 양립의 불균형, 여성에게 기울어진 육아 책임, 부담스러운 양육비, 그리고 범위 밖의 사람들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 삶의 여러 문제와 연관돼 있으므로 지엽적인 사고로는 매듭을 쉬이 풀 수 없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마더센터 건립을 저출산 고령화의 해답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국가가 나서서 유관기관을 만들고 인프라를 구축하면 맞벌이 부부의 육아 고민이 해결될 테고, 조부모에게 돌봄 부담이 넘어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한국형 마더센터’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선거 이후 흐지부지됐다.
마더센터는 지역공동체가 함께 꾸려가는 공동 육아 공간이자 세대 결합 공간이다. 독일에서 1980년대 초반 지역 운동을 펼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둘 설립되기 시작해 독일 전역에 400여 개가 있다. 대부분의 마더센터는 시와 자선단체의 후원으로 운영비와 인건비를 충당하고 있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엄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의 보호자는 한부모, 미혼모, 나이 지긋한 노인 등 다양하다. 엄마와 아이가 혼자 온 할머니와 공용 공간에서 말동무가 되고,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등 돌봄을 제공할 수도 있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이를 맡기기 위해 들르고, 서로의 육아 비결을 나누기도 한다. 유아와 아동, 노인에게 공간을 마련해주고 지역민끼리 유대가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패밀리센터’라 부르기도 한다.
공동 공간 넘어 세대 결합 주택 꿈꾼다
“마더센터는 독일이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에 대해 고민한 결과입니다. 공동 공간에서 이웃과 함께 교류하고 상생하며,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과 아이에게 안전한 돌봄을 제공합니다. 특별한 교육을 하지 않지만 주변 이웃들과 어울리며 아이들은 자연스레 사회성이 발달하고, 노인의 사회적 고립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만난 수잔 베이트 독일 바이에른주 어머니및가족센터연합 전무이사와 수잔 바이엘 바이에른주 뮌헨중앙마더센터장은 마더센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은 자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책 마련과 마더센터 구축을 위해 40년 이상 힘썼다. 현재는 바이에른주 내의 모든 마더센터 관리를 맡고 있다. 더불어 기관과 기관뿐 아니라 전 세계 유관기관과의 국제적 교류를 통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들은 마더센터를 통해 돌봄 공백의 해소와 지역사회 형성이 실현되고 여러 세대가 섞이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더 큰 미래를 꿈꾸고 있다. 수잔 베이트 전무이사는 그 모델로 ‘세대 결합 주택’을 제시했다.
세대 결합 주택은 패밀리센터를 기본으로 공용 거실과 식당, 게스트룸, 체육시설, 개인 주거 공간이 마련된 복합 공간을 말한다.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공유하는 형태다. 수잔 베이트 전무이사는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부모와 아이, 혹은 노인의 고립”이라며 “세대 결합 주택의 구축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실현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이뤄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수잔 바이엘 센터장은 “독일 또한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확실히 있다”며 “돌봄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치부하면 저출산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결국 조부모에게 아이를 부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와 국민이 다 함께 선진적인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대를 위한 지붕, 트루더링 패밀리센터
‘트루더링 패밀리센터’는 바이에른주 뮌헨에 위치하고 있다. 마더센터와 기능은 같지만 ‘한 지붕 아래 모든 세대의 화합’을 운영 방침으로 하고 있어 패밀리센터라 이름 붙였다. 전반적인 시설 관리 및 운영, 각종 프로그램 진행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이뤄지고 있다. 센터 내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 보호자가 머물 수 있는 공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바깥 정원과 놀이터 등이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키가 작은 아이들을 위한 건물 설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실제로 센터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이 공간을 공유하며 가족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공동 거실을 뛰어다니고, 엄마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들은 체육시설에서 탁구를 하고, 노인을 모시는 가족이 찾아와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해당 센터에는 디지털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교육, 아이와 노인이 함께하는 요리 시간, 모든 세대를 위한 회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캐롤라인 비크만 트루더링 패밀리센터장은 “마을을 하나의 집이라고 볼 때 우리 센터는 공동 거실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과 관련 정책에 관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며 “노인과 젊은이가 만나 서로의 아이디어를 배울 때 행복해진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황혼육아가 독일과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캐롤라인 센터장에 따르면, 독일 노년층은 개인의 사회활동과 삶의 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손주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로 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일주일에 두 번 손주와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한 달에 한 번 나들이를 가는 식이다. 육아의 농도가 짙지 않아 자연히 조부모를 향한 금전적 보상도 없다. 자녀 부부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부모가 아이를 돌보고, 일정 수당을 받는 한국과 상반되는 양상이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해법은 ‘서로의 육아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 핵심이다. 캐롤라인 센터장은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돕고, 동기부여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저출산 고령화는 전 세계 최대의 숙제이기 때문에 다각적으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탁기(51) 씨는 커피 로스팅 일을 하는 1인 자영업자다. 코로나19로 인해 하던 일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거주지인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도시재생대학에서 건축도장기능사 자격증 과정 수업이 진행됐다.
이탁기 씨는 해당 수업을 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 “30대 때 잠깐이지만 방수 쪽 일을 해봤다. 그래서 젊었을 때 경험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8월 수업을 다 듣고, 9월에 건축도장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실기시험을 보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이탁기 씨 역시 알려진 바와 같이 “6시간 동안 시험을 보기 때문에 집중력이 상당히 요구되더라”고 말했다. 이어 “긴 시간 동안 연마하고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순서가 틀리면 떨어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무 합판이 있으면 거기에 선을 긋고 공정하는 것을 반복하는데 그게 순서가 있어요. 선을 먼저 그어버리거나 선을 긋지 않으면 바로 떨어져요. 그러니까 순서가 되게 중요한데, 그걸 숙지하고 있어야 해요. 유튜브에 관련 영상이 많으니 찾아보면서 시험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탁기 씨는 자격증 취득 후 실질적인 일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집수리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계양구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도배, 방충망 설치를 도와드리기도 하고, 노후된 벽체에 페인트칠을 하기도 한다”면서 “자격증 취득 후 실습을 거기서 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뿌듯함과 행복감도 많이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도장에 대해 공부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됐다. 애초에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고 싶었던 그는 도시재생에 관심이 생겼고, 관련 일을 하고 싶단다. 도시재생이란 쇠락한 지역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활동적인 지역으로 재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말한다.
“도시재생이란 새롭게 신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보완하는 거예요. 거기에 방수가 필요할 수도 있고, 페인트칠이 필요할 수도 있죠.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까 생각하면서 도시재생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건설 관련 자격증을 더 취득할 수도 있고, 업체를 만들 수도 있죠. 다양한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탁기 씨는 동년배들에게 건축도장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추천했다. 현실적으로 60대 나이에 취업하기는 쉽지 않지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페인트칠을 하다 보면 옷도 더러워지고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둔다고. 그러나 중장년층은 젊은 세대와 다른 끈기가 있다.
이탁기 씨는 “건축도장기능사는 어쨌거나 기술 전문 자격증이다. 기술을 하나라도 갖고 있으면 새로운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고,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다. 삶의 질도 높아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50대 이상 분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도 있을 텐데, 새로운 일에 막내로 들어가겠다는 용기를 갖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현장 일은 몸이 재산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우리 일상 곳곳에 녹아 있다. K-커피로 불리며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믹스커피가 그 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믹스커피를 흘리지 않고 뜯으려면 가위가 필요했다. 이제는 이지컷(Easy Cut) 선을 따라 뜯기만 하면 된다. 손가락 힘이 없어도, 가위가 없어도 누구든 쉽게 뜯을 수 있다. 그저 뜯기만해도 하루가 달달하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성별, 연령, 국적, 신체 조건, 장애 유무 등의 차이가 상관없도록 설계한 디자인이다. 다른 사람의 배려나 도움 없이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인의 체력, 이동 능력, 인지 능력 등을 고려해 반영한다. 다양성을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의미다.
접근성 높이는 유니버설 디자인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구조의 변화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다문화가정으로 육아 주체가 다양해진 점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공공기관에는 육아편의공간에 대한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 남자화장실 내에 기저귀 교환대가 없어 불편하다거나 수유실에 남자가 들어갈 수 없어 아빠가 주 양육자인 경우 이용이 어렵고, 엄마도 필요할 때 아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불편하다는 등의 민원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는 인구에서 가장 많은 구성원 혹은 건장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디자인한 것들이 많다. 경제성장 시대에 빠르게 많이 공급하기 위한 표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대수명 연장으로 고령 인구가 늘었고, 다문화가정도 많아졌다. 사회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사람’을 중심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최령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장은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표는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서 “소외되는 사람 없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가치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 우리는 ‘약자’라는 개념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 때문에 ‘약자‘도’ 편리하게’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양성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최 센터장은 “우리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면서 “결국 사회적 비용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하는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고령화를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도입은 필연적이다. 공공기관은 모든 국민의 접근성을 높일 의무가 있다. 공공시설이나 서비스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앞장서서 적용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공공기관의 모든 웹사이트에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을 담고 있는 웹접근성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 일본은 2018년 ‘유니버설 사회 실현을 위한 시책의 종합적 일체적인 추진법’을 제정했다. 모든 국민이 장애 유무나 나이에 관계없이 기본적 인권을 향유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법에 담았다. 우리나라는 2022년 1월 유니버설 디자인 기본 법안이 처음 발의되었고,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행정안전부에서는 공공청사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도록, 로널드 메이스 교수가 처음 만든 개념을 기반으로 한 ‘유니버설 디자인 7가지 원칙’을 안내하고 있다.
△누구든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접근과 사용이 가능한 크기와 공간을 확보한다 △적은 신체 활동으로도 사용 가능하도록 한다 △오작동에 대한 대응을 통해 안전한 사용을 유도한다 △사용자의 환경에 맞는 유연성을 확보한다 △쉽고 이해 가능한 간결한 사용법을 마련한다 △사용자의 상황에 관계없이 알기 쉬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원칙은 유니버설 디자인이 필요한 사회 곳곳에 적용할 수 있다.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필요한 디자인
이 디자인을 통해 불편함을 가장 많이 해소할 수 있는 이들은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우리나라는 2025년 인구의 20%가 65세가 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고령자의 낙상 사고를 예방하고, 이동성을 높인다. 이동이 편리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활동하게 되니 건강해지고,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서적 문제에도 도움이 된다. 살던 동네에서 친구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살아온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이들의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안전과도 직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계단 난간에 설치된 안전바가 스테인리스일 경우 한여름에는 뜨거워 손을 델 수도 있다. 한겨울 영하 1℃ 이하 날씨에 얼어붙은 안전바를 급하게 잡으면 위험을 유발할 수도 있다.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바 겉부분을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마감하도록 권장한다.
노화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는 고령자들은 샤워실과 세면실이 투명 유리로 분리된 화장실에서 유리벽을 구분하지 못한다. 화장실에서 잦은 부딪힘으로 멍이 생기고 낙상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경우 거울과 유리벽 테두리를 액자처럼 표현하거나, 바닥과 벽면의 색을 다르게 구분하거나, 세면대와 변기 같은 위생기기 색상을 다르게 하는 등 컬러 유니버설 디자인(CUD)을 적용하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인도와 도로 사이의 턱 높이도 안전과 직결된다. 휠체어 이용자, 유아차 이용자, 보행보조기 이용자 등 바퀴 달린 이동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 원인이 되곤 한다. 자동차의 출입을 편리하게 하려고 인도와 도로의 높낮이 차이를 줄인 기울어진 인도 역시 보행자가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구조다. 도로의 횡단보도를 높인 고원식 횡단보도는 이런 안전 문제를 고려해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한 사례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및 이동수단이 장애물 없이 지나갈 수 있고, 도로에서는 방지턱 역할을 해 횡단보도 앞에서 차량이 속도를 줄이는 효과도 낼 수 있다.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에서도 공간과 공간 사이 바닥의 턱을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향후 무인 로봇이 돌아다닐 미래를 생각할 때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서울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20년 정도 유니버설 디자인 도입이 늦다”며 “어떤 식으로 디자인해야 할지 방법도 필요성도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고령 사회에서 가장 많은 유니버설 디자인 수혜자는 고령자분들이기 때문에,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다”면서 “앞으로 직접 느낀 불편함을 창의적인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니어 전문가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팔복예술공장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 복합문화공간이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폐공장을 도시재생사업으로 일으켜 세운 이색 예술 공간이다. 폐공장 시절은 길었다. 25년간이나 방치되었으니까. 그러니 형상이 오죽했겠는가? 무너지거나 으스러지거나 널브러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용케 남은 건물들도 금이 가거나 비가 샜다. 뒤숭숭하기가 흉가와 맞먹었다. 이렇게 공장의 한 생애가 종을 쳤다. 갈 길을 잃은 유령들의 비밀 집회소쯤으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에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앰뷸런스를 타고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달려와 수혈을 하고 수술을 해 꺼진 숨을 되살렸다. 전주시 팔복동 제1일반산업단지 안에 있다.
팔복예술공장은 2년에 걸친 사전 작업과 공사,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한 시범운영을 거친 뒤 2018년에 개관했다. 이제 겨우 네 살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아주거나 알아보는 눈이 많다. 개관 첫해에만 6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젠 재생 문화 공간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헌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대신, 헌것을 싹 갈아엎고 새뜻한 새것을 건설하는 대신, 헌것에 잔존하는 쓸모를 재료로 삼은 재생사업의 성과가 이렇게 대단하다. 폐허를 폐허로만 볼 일 아니다. 폐허 속에 역사와 인간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헌것을 헌것으로만 볼 일 아니다. 헌것 안에 새것 뺨치는 예술과 미감이 박혀 있다.
폐공장의 재생 설계를 주도한 총괄기획자는 건축가 황순우. 인천시의 근대건축물을 본때 있게 재생한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실력을 과시한 인물이다. 그는 팔복예술공장 설계에 나서기 전 한동안 뜸을 들였다. 폐공장이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숙고했던 셈이다. 그는 이런 요지의 얘기를 했다. “재생은 기억에서부터 온다고 봤다. 따라서 1년 동안 설계를 하지 않고 기억을 재생시키기 위한 작업부터 했다. 지역주민, 지역 예술가들과 수시로 만나 폐공장을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부터 했다. 물리적인 작업은 맨 마지막에 했다.” 그는 단순한 형식적 구조 변경을 구사해 후루룩 단숨에 예술 공간을 설계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폐허에 남은 옛이야기를, 스러져가는 건물들이 간직한 기억을, 퇴락한 풍경의 이면에 감추어진 은유를 옹골차게 발굴해 공간 구축의 질료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팔복예술공장은 크게 보자면 본관에 해당하는 A동, 아동과 청소년의 예술 놀이터인 B동, 그리고 야외 공간으로 구성됐다. A동은 외벽에 붉은 칠을 해 도드라진다. 벽면 일부엔 통유리창을 냈고, 옥상 난간의 프레임도 산뜻하다. 낡을 대로 낡은 원래 건물의 취약한 구조를 부분적으로 보강해 기능성을 살린 공간이다. 로비엔 폐공장을 남기고 사라진 카세트테이프 생산업체 ‘썬전자’의 히스토리를 알려주는 아카이브 섹션이 있다. ‘썬전자’는 이곳에서 1979년에 공장 가동을 시작했으나 CD(Compact Disk)라는 신종 기록 매체에 밀려 1991년에 문을 닫았다. 공장의 이런 굴곡진 역사와 애환의 기억들을 예술로 재생함으로써 존재 증명을 하는 게 팔복예술공장이다.
공간 곳곳에 음미할 만한 서사 있어
A동 로비부터 시작되는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재래식 변기가 하나씩 놓인 화장실 4칸이 나온다. 많게는 500여 명에 이르렀던 ‘썬전자’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변기가 달랑 4개뿐이었다니. 과거 노동 환경이 얼마나 거칠었나를 변기들이 구슬픈 톤으로 비가를 읊어 웅변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게 예술이고 예술인이다. 화장실 구역이 통째 전시 작품인 건 배설 욕구조차 참아가며 일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비애와,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표현한 작가들의 글과 벽화가 이곳에 난무하기 때문이다.
미술관들은 저마다 특유의 전시회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전을 펼침으로써 미술관의 독자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팔복예술공장도 마찬가지다.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전시를 추구해왔다. 탄소중립 등 환경문제를 환기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대중의 관심을 산 전시회로는 ‘구스타프 클림트 레플리카전’을 꼽는다. 현재 2층 전시장에서는 ‘공존 : 호모 심비우스의 지혜’전이 진행되고 있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란 생물학자 최재천이 제기한 용어로 ‘공생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불편을 조금만 감수하면 얼마든지 생태적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게 최재천의 생각이다. 이번 기획전은 결국 환경문제를 화두로 던지는 셈이다. 24개국 8팀 77명의 환경예술 작가들이 참여해 다양한 시각언어를 선보이고 있다.
몇몇 작품을 볼까? 손정은의 ‘강요’는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인간의 탐욕을 힐난하는 설치 작품이다. 유리병에 닭의 실제 사체를 욱여넣은 작품도 있다. 엽기적이지만 통렬하다. 김순임은 대형마트에서 사온 식자재에서 채집한 씨앗이나 뿌리를 포장 용기에 심어 발아시킨 식물들의 정원을 보여주는 설치 작품 ‘홈플러스 농장 2002’를 전시했다. 김유정의 ‘소리 없는 산’도 식물 설치 작품. 뿌리가 없는 채로 공기 중의 수분과 양분만으로 생존하는 식물 수염틸란드시아에 뒤덮인 폐가전제품들을 산의 형상으로 조형했다. 문명 이전 혹은 이후의 공존과 상생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강현덕의 ‘아름다운 소멸’ 역시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이야기한다. 작가마다 선명한 환경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자연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소비사회의 광기에 사려 깊은 거부권을 행사한다. 자연의 생존권을 침탈하는 일상의 풍속에 예리하거나 유려한 반론을 제기한다.
A동에서 컨테이너를 엮어 공중에 설치한 통로를 따르자 B동 2층에 닿는다. 이곳엔 아동들을 위한 ‘이팝나무 그림책도서관’과 청소년들이 예술을 주제로 맘껏 이벤트를 펼칠 수 있는 ‘꿈터 마루방’이 있다. 1층의 내부와 외부 역시 예술 놀이터다. 흥미로운 건 B동 구역에서 비로소 손질과 땜질을 거의 하지 않은 폐공장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낡고 삭아 추레한 폐건물을 그대로 놔둔 채 디자인 요소로 살려냈다. 따라서 이곳에선 과거로 잠시 회귀한 듯 감정적 동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반짝이는 사물들로 채워진 세상의 이방과 이면이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폐허란, 그 미련 없는 분위기란 차라리 하나의 유적이다. 새것과 날것으로는 좇아갈 수 없는 우수와 정취가 깊어 감정이입이 쉽다. 세월의 풍상에 누추하게 구겨진 저 오래된 사물이 뿜는 아련한 빛에 문득 직관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나여! 인간이여! 너의 몸을 스친 풍상은 한 조각 빛이라도 남겼더냐?
공간 전체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커피 생각이 난다. 마침 A동에 카페가 있다. 여공(女工) 이미지를 조형한 대형 인형 ‘써니’를 심벌로 조성한 찻집이다. 조명구도 탁자 일부도 공장 시절의 용구를 활용해 만들었다. 이곳은 ‘썬전자’ 노동자들이 407일 동안 전개한 노조사수투쟁의 센터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복예술공장 곳곳에 반추할 만한 기억이, 음미할 만한 서사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