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긴 고민 끝에 32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 퇴직한 아버지 정준일(59)씨. 포병장교 전역 3개월 전, 갑작스런 아버지의 세계 일주 제안에 진행 중이던 취업 전형까지 중단하게 된 아들 정재인(29)씨. 가장으로서, 취업준비생으로서 장기 여행은 많은 것을 내려놓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무언가를 잃지는 않을까? 후회는 없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떠난 200일의 세계 일주에서 돌아와 부자는 알게 됐다. 그때의 근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 아버지 정준일
32년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문득,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회의감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현재는 기타 연주, 맛집 탐방 등 건강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다.
△ 아들 정재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꼰대’ 아버지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세계 일주를 시작한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언젠가 본인도 미래의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기획 중이다.
◇ 정준일·정재인, 우리 부자의 여행은?
준비 기간 2개월(이후에는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준비)
여행 루트 서유럽-터키-동유럽-북유럽-북/중/남미-오세아니아-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
여행 콘셉트 친해지길 바라!
역할 분담 아버지) 경비 총무와 숙소정리, 아들) 아버지의 보좌관이자 안전책임자
여행 경비 약 6000만원 (아버지 퇴직금 + 아들 장교복무 봉급)
다음 여행 내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함께하는 이집트 여행 계획
Intro>>우리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Q. 세계 일주 여행 파트너로 아내나 친구가 아닌 ‘아들’을 꼽은 이유
아버지: 친구나 아내, 딸과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장기간 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아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하리라 생각했죠. 주변 사람들을 보면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하면서 생긴 마찰로 평생 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아들과 함께라면 혹여나 그런 서운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 여행을 가기 전 아내는 명예 퇴직을 반대했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는 고생했다면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Q.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
아들: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 끝에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친한 후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소주 한잔을 하게 됐죠. 후배는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 아버지께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Q. 여행을 앞두고 기대했던 점과 우려스러웠던 점
아버지: 여행 전, 그동안 영상과 책으로만 접했던 전 세계의 자연환경과 건축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죠. 막상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난다 생각하니 건강이 우려스럽고,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쫄쫄 굶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더라고요.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더위를 먹어 앓아눕고, 페루 쿠스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크게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처음엔 현지 음식만 먹겠다 다짐했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않으니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애용했죠.
아들: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세계 일주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지만, 아버지와 여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초기에는 아버지와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아버지의 잔소리에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터키 파묵칼레의 노천 온천탕에서 아버지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음을 열게 됐습니다.
Travelling>> 어리기만 했던 아들, 어느새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Q. ‘역시 아들이랑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
아버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외국인 포함) 대부분이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는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각종 예약, 교통 티켓, 경로를 알아서 잘 짜는 아들이 참 든든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들이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Q. 중년 여행복의 상징인 아웃도어가 아닌, 아들이 코디해준 옷을 입고 다녔다는데
아버지: 아들 덕분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옷들을 마음껏 입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그런 옷들이 너무나 어색하고 남사스러웠는데, 이왕 여행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보기로 한 이상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아들이 권하는 옷들을 입어봤어요. 사람들이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줬고, 사진으로 봐도 괜찮은 제 모습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그때의 패션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가벼운 여행을 할 때면 헌팅캡을 쓰곤 합니다.
Q.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이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들
아버지: 내게 아들은 늘 어리게만 보여서 이것저것 관심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로 여겼는지 참견하지 말라 해서 좀 서운했습니다. 결국 아들을 자기주도적인 결정 아래 책임을 질 줄 아는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걸 믿고 맡기기로 했죠.
아들: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 속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측면에서 문제들이 많았어요. 원체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가 숙소에 들어올 때마다 어엿한 성인인 제게 잔소리(빨래, 양치질, 정리정돈 등)를 해대셔서 방을 따로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남들과 여행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매일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에게 적합한 여행 일정을 짜드리곤 했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지만, 좋든 싫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여행하려니 힘들지? 고생이 많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큰 힘이 됐죠.
Q.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했던 부분은?
아들: 저는 성격이 급하고 계획적이라 무언가 일정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곤 해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속인 배낭여행에서 제가 초조해하거나 힘들어할 때 아버지께서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며 정신적으로 안정시켜주셨죠. 청결하신 아버지께서 늘 위생에 신경 쓰신 덕분에 깨끗한 숙소에서 묵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Outro>> 아들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세계여행 강추!
Q.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버지: 여행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고정관념과 고집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히 ~해야지’, ‘무조건 ~다’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럽게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죠.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는 우울감을 느꼈을 거예요. 여행을 다녀온 후 태어나 처음으로 책도 써보고, 인터뷰도 해보고, 방송도 출연하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들과 연계해 제3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여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일들입니다.
아들: 우선 아버지가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예전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해서 어떤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편해지니 예전엔 ‘꼰대’라고 생각했던 아저씨들의 행동과 말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 빙하기인 요즘, 아버지와의 세계 일주를 좋게 봐주신 인사 담당자 덕분에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부자간의 관계도 예전처럼 서먹했을 테고, 취업도 어찌 됐을지 모릅니다.
Q. 처음은 늘 아쉬운 법!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아버지: 너무 체면을 차리느라 외국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지 못했고, 액티비티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다시 여행을 간다면 나이와 체면 생각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투어 활동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들: 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서 여행 중 여유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휴식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요가체험, 템플스테이 등)을 갖고 싶습니다.
Q. ‘아들도 아들의 아들과 여행하길 바란다’고 말한 아버지, 그때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아버지: 아들이 나중에 손자를 낳아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들에게 부족한 아버지였지만, 아들은 손자를 더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멋진 아버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나는 가정을 위해서 나부터 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대가 변했기에 아들은 아이와 더 많이 소통하는 아버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이고 아들은 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내 기준으로만 자식을 바라보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버지가 되길 바랍니다.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3년 전에 대기업에서 퇴직하고 서울에 거주 중인 손병수(58세)씨가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손병수씨가 재무상담을 통해 도움 받고자 하는 내용은 매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 확보 방안이다.
1. 현재 상황
손병수씨의 가족으로는 전업주부인 배우자(56세)와 출가한 딸(33세)과 작년에 취업을 하고 회사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29세)이 있다. 퇴직 후 2년 동안 손병수씨는 재직 당시 거래처였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며 매월 200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1년 전 두 번째 퇴직을 한 이후 지금까지는 별다른 수입이 없다. 첫 번째 퇴직으로 인해 발생했던 퇴직금은 일시금으로 수령해 딸 결혼자금과 아들 대학등록금으로 대부분 썼기 때문에 퇴직연금은 없는 상태다. 매월 200만원 전후로 소요되는 생활비는 1년 전부터는 실업급여와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충당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아들 결혼자금으로 1억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있다.
2. 재무진단
3. 제안
손병수씨가 의뢰한 매월 200만원 전후의 생활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5층 연금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5층 연금체계는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1958년생인 손병수씨의 완전노령연금 수급가능연령은 4년 뒤인 62세부터다. 연금액은 현재 가치로 매월 110만원 정도 예상된다. 손병수씨는 조기노령연금수급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여유자금이 있기 때문에 완전노령연금에 비해 12%까지 연금수령액이 삭감되는 조기노령연금을 미리 받은 받을 필요는 없다.
퇴직연금 손병수씨는 퇴직연금이 없다.
개인연금 현재 가입 중인 개인연금도 없다. 정기예금 중 1억원을 배우자 명의로 하여 일시납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손병수씨의 부인은 본인 명의의 국민연금이 없다. 남편인 손병수씨가 사망한 후에는 유족연금 명목으로 손병수씨 명의로 받던 노령연금액의 60%를 수령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의료비가 생활비가 될 정도로 의료비 지출이 많아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약 12년 정도인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손범수씨가 부인을 피보험자로 한 연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일시납연금보험을 가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가입 즉시 연금을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지급 시기를 충분히 여유 있게 설정해두고 그 이전에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현재 56세 여성이 1억원의 연금보험에 가입해 10년 뒤인 66세부터 연금을 개시한다면 매월 60만원 정도의 연금수령을 기대할 수 있다. 단 연금이 개시된 후 피보험자가 사망하게 되면 최초 가입금액에서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 연금총액을 차감한 금액만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조건이다.
주택연금 주택연금은 주택 소유자나 그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일 때 신청할 수 있다. 현재 손병수씨는 만 58세이기 때문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7억원의 주택을 종신연금 수령조건으로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60세 기준으로 매월 146만원 정도의 금액이 지급된다.
손병수씨 부부는 주택연금 가입이 가능한 2년 후까지 현재 거주 주택을 보증금 1억원에 매월 120만원의 월세를 받는 조건으로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 1억원과 현금 1억원을 합해 집의 규모를 줄여 서울 외곽 지역에 2년간 전세를 임차해서 살기로 했다.
직업 중장년층이 퇴직 후에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수 있는 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명함이 나를 설명하던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손병수씨는 우선 자신의 경력을 살려 고용노동부에서 추진하는 사회공헌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서 매월 30만원 정도의 소득을 기대한다. 동시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요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4. 실행
퇴직한 지 3년이 지난 손병수씨는 최근에 와서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손병수씨는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는 정부지원사업 중심의 일자리와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매월 100만원의 근로소득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나오는 시기에서 부인 명의의 개인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근로시간을 줄여 매월 50만원 정도의 수입을 목표로 일을 하기로 계획을 짰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미국의 예금 금리가 올랐고 우리나라도 예금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최저 금리다. 금리를 낮추어 경기 부양을 시도했지만 경제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망해야 할 기업은 망해야 한다. 낮은 생산성과 적자 기업을 낮은 금리로 겨우 기업 목숨을 부지하다가 결국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더 크게 망했다. 낮은 금리로 빚을 내어 부동산을 사고 빚을 내어 창업에 뛰어들다보니 가계부채는 1.000조를 훌쩍 넘어섰다. 앞으로 금리가 인상되면 줄도산이 우려되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간다.
금리 인하의 역습으로 근로 소득 없이 알량한 퇴직금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만으로 생활하는 노인의 삶은 더욱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1억 원의 즉시연금 이자가 반 토막이 되어 30만 원 대에서 17만 원 대로 주저앉았다. 은행 이자를 받아도 세금 15.4%를 제하면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친다. 일본에서는 마이너스 금리라고 겁을 주고 우리나라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라고 한다. 이제는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라고 한다. 투자의 위험은 스스로 감수해야 하고 그 위험을 직시하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 경제 공부를 하라고 하지만 노인들에게 이제 와서 경제 공부를 하라는 것은 소수의 노인에게만 해당될 뿐 대부분 노인으로서는 감당 못할 소리다. 부동산이나 증권투자도 위험부담이 높아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노인은 금리가 낮아지면 소비를 증가하기 보다는 낮은 이자만큼 허리띠를 더 졸라 맬 뿐이다. 낮은 금리가 소비를 진작시킬 것이라는 이론은 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금리가 낮다보니 불빛을 찾는 불나방 모양 한 푼이라도 이자를 더 준다는 곳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보니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사업을 해서 더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빌려가서는 뒤는 내 몰라라하는 똥배짱에 속절없이 당한다. 어찌 동방예의지국에 영수증 없이 돈을 빌려준 자식과 송사를 벌린단 말인가. 부동산 임대 수입이 최고라며 상가 구입을 꼬드겨 막상구입하면 임차인을 못 찾아 빈 상가에 관리비만 물어주고 있다. 기획부동산은 노인의 돈을 요리하기 쉬운 먹잇감으로 보고 밤낮으로 하이에나처럼 덤빈다. 새로운 유망산업이라고 투자만 하면 놀고 이익금을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피 같은 돈을 날리고 눈물짓는 노인들의 사연을 들을 때 마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가난한 노인들이 가난하게 된 원인 중에 자기 돈을 허망하게 날린 사람이 많다. 은행금리가 낮아지면 노인의 돈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다 허망하게 날린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노인 빈곤 국가이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 율은 45.1%로 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3.5%보다 3배 이상 높고 회원국 중 부동의 1위라고 한다. 자식들을 위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열심히 살아온 노인세대가 왜 가난에 시달리는지 근원을 파악해야 함에도 그 근원은 외면하고 현 실태만 파악해서 극빈자로 취급해주고 일정액을 지원해 주는 것으로 정부는 할일 다 했다고 손을 놓는다.노인들이 갖고 있는 돈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이들은 금방 극빈자 대열에 합류한다. 극빈자가 된 후 쌀을 주네 지원금을 주네 하지 말고 극빈자로 떨어지는 원인을 파악하고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이 갖고 있는 돈을 보호해 주기위해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비과세 예금 한도를 대폭 높여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노인을 전수 조사하여 왜 가난의 나락에 떨어졌는가를 파악하고 이를 교훈삼아 후배세대들이 똑 같은 수순을 밟지 않도록 계도해야 한다.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고 노인이 가난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탁상 대책이 아닌 실질적 구체적 대책이 마련된다. 젊어서 열심히 일한 노인이 왜 지하실 단칸방에서 가난과 질병과 고독과 싸워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빈곤층의 노인을 지원하는 제도는 있지만 빈곤층으로 떨어지기 전의 예방책이 없음을 개탄한다.
설날 음식을 위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명절 며칠 전부터 만나서 준비하는 것은 이젠 그만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며느리를 맞이하고 첫 설날, 시어머니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음식을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냥 편하게 보내자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즈음 외부에서 할 일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명절 음식은 대부분 백화점에서 사고 몇 가지의 요리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태전, 버섯전, 동그랑땡 등을 구색 맞춰 구입한다. 나물도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등 삶은 것으로 구입한다. 필자가 직접 만든 것은 갈비찜을 비롯해 몇 가지뿐이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명절날 오라고 하니 매우 좋아하는 눈치다. 드디어 명절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자는 음식을 모두 데우고 볶고 플레이팅한다. 이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새삼스럽게 친정어머니와 올케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친정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용할 깨끗한 그릇과 이불과 요를 준비하고 집 안의 청결함까지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릇을 다 꺼내어 닦고, 이불과 요 커버도 시침질하고 대청소까지 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며느리를 맞이하고 보니 알겠다. 필자도 신경이 쓰인다. 며느리만 신경 쓰이는 명절이 아니다. 시어머니도 예민해지는 명절이다.
냄비를 닦다가 힘들어서 같은 브랜드로 아예 새로 구입했다. 명절날 온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며느리가 “어머니 맛있어요~” 한다. 양만 많으면 포장해서 보내고 싶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솔직히 고백한다. “엄마가 한 요리는 세 가지뿐이야. 그 외에는 모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구입한 것이니 오늘 맛있게 먹고 가면 대만족이야. 포장을 해달라거나 어떻게 만든 거냐고 자세히 묻지 마.” 유머 있게 한마디 했더니 웃으며 이미 눈치 챘다고 한다.
며느리도 누구네 집 딸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시댁에만 충실할 필요 없다. 시누이나 친척이 오면 꼼짝 못하고 수발 들다 친정도 못 가 뒤늦게 형제자매들이 다 가버린 썰렁한 친정집에 잠깐 들러 친정어머니 얼굴만 겨우 보고 온다는 불평을 이미 동네 분들에게 들었기에 필자는 명절 음식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수고를 덜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필자도 아들 내외 보내고 친정에 계신 오빠들 내외와 함께 놀기 위해 달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맞춤 커피는 한 잔 마셔야지~~.”
아들의 말에 행복해져서 바리스타 엄마의 커피 제대로 만들어서 과일과 함께 내어준다.
친구들과 맘껏 즐길 시간이 없었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 필자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집 과외 선생을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출판사 사업을 하다가 몇 차례 실패하면서 퇴직금은 물론 집까지 없어져 단칸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집주인의 아이들은 네 명이었는데 숙제만 봐줘도 감사하게도 성적이 올라가니 아예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의 성적관리, 생활관리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공부는 물론 잘 때는 입던 옷을 개어 머리맡에 놓고 자는 바른생활 습관도 함께 가르쳤다. 둘째였던 큰아들이 필자가 잘 가르쳐줘서 공부에 재미가 생겼고 그 덕에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고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한 주인댁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시더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용돈도 받아가면서, 가정 형편이 좋은 댁에서 과일도 먹고 나이가 어려도 선생님 대접을 해준 게 필자는 고맙다.
그 시절 친구들은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그러나 필자는 학교 수업만 끝나면 합창반 연습시간 외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집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주인댁 아저씨가 아이들 데리고 신림동에 새로 생긴 신림극장에서 영화를 보라며 종종 돈을 줘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도 난다. 새로 오픈한 극장이라 들어오는 손님을 무조건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몇 세 이하 입장 불가도 없었다. 그때 국내외 고전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필자는 네이버 고전영화카페에 가입해 10년 이상 활동 중이다. 중요한 모임이 있어도 웬만하면 정기 상영회는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보고 싶은 영화는 개봉일을 기다렸다가 개봉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서 본다. 학창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보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인집에서 이사한 뒤로는 집 근처에서 다른 집 남매에게 또 과외를 했다. 그 집 남편은 이란으로 돈 벌러 갔다 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일단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게 최고의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합격이 걱정일 정도로 공부를 못했던 터라 필자는 맘이 급했고 급기야 스스로 짐을 싸서 그 집으로 입주했다. 아예 지키고 앉아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필자도 공부하며 밤을 새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어디선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겠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기억이 많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 소식이 있던 날, 아이들 어머니는 필자에게 고맙다며 겨울 외투를 사주었다. 그 댁 아이들과 아주머니의 안부가 가끔씩 궁금하다.
그 뒤로 필자는 대학 두 곳을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잘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해온 개인과외, 그룹과외, 입주과외는 필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면서 필자 자신도 많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오빠들은 혼자서 잘 살아가는 필자가 기특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등록금을 마련해줬다. 대학 졸업식 때는 여러 가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날 오빠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필자는 울고 있었다. 다시 학창 시절이 돌아오면 남들 공부 봐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나이에 맞게 친구들과 발랄하게 웃고 떠들면서 시간도 보내고 내 공부를 더 충실히 하고 싶다.
IMF 금융위기의 여파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 20년 직장생활에서 밀려난 것 하나만으로도 충격이 큰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벗는 김에 다 벗어버리자 생각했다. 아내의 이혼 요구에 응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됐다.
아내가 이혼 때 들이민 재산 분할 제안서를 보니 나는 빈손이었다. 단칸 전세 얻을 돈 정도밖에 없었다. 아내의 내역서는 그럴싸했다. 혼자 벌었어도 안살림을 한 사람의 공로가 절반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으니 당연히 아내 몫으로 절반을 줘야 했다. 나머지 재산에서 아들딸 결혼비용을 또 떼어야 했다. 나중에 필자가 더 어려워지면 그 몫도 없어질지 모르고 재혼을 한다든지 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내게는 퇴직금과 약간의 주식이 있었고 내 재산으로 분류돼 있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그렇게 빈털터리 홀아비 인생이 시작됐다. 막막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정신력이 강했다. 체력도 좋은 편이었다. 아직 젊으니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 했다. 가진 돈이 없으니 사업을 할 수도 없었다. 재취업을 하자니 또다시 남 밑에 들어가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여생은 나를 위해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다행히 현직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던 외국 바이어들에게 안부를 전하니 도와주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소량 주문은 받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가격에 관리비까지 얹으면 가격경쟁력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하니 관리비도 절감되고 오히려 소량 주문이 더 취급하기 적당했다. 때마침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특수를 타고 주문이 폭주했고, 꽤 큰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집도 사고 평생 노후 걱정은 할 필요 없을 만큼 금융자산도 모았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필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혹자는 사업을 하다가 망했고 혹자는 사기를 당해 주저앉았다. 그 여파로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선택한 것이 댄스스포츠였다. 그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취미로 해왔는데 혼자가 된 뒤로는 더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필자는 평소 건강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댄스스포츠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줬다.
댄스스포츠 덕분에 보람 있고 즐거웠던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금을 들여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이다. 덕분에 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생겼고 댄스계에서 유명해졌다. 입문에서 선수생활까지 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후회 없을 만큼 만끽했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을 만났다. 필자에게 접근한 여성도 몇 있었다.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사랑이 필요한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필자에게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또 너무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며 한가하게 테이트나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거절당할 것도 같아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승산 없는 연애질에 정신적, 시간적 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는 방법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이 으뜸이다. 집은 있으니 해결되었고, 사고 싶은 옷을 보면 내 마음대로 산다. 두 가지는 해결되었으니 당연히 먹는 것을 중요시한다. 필자는 ‘내 몸은 보배이고 음식은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풍요로움을 위해 독서도 자주 하고 영화도 많이 본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예 피한다. 사회적 건강을 위해 여러 사람과 어울린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피부과에 가서 얼굴의 점도 빼고 맑은 피부 톤을 위해 레이저 시술도 받았다. 나를 돌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산다.
글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어느 택시기사에게서 엿본 50대의 자화상
온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로 들끓던 어느 날 택시를 탔다. 갑자기 불편해진 다리와 피곤한 몸에 잠깐이나마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푹신한 의자에 등과 목을 기대고 편히 쉬고 있는데 기사분이 말을 걸어왔다.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데다 슬슬 짜증지수가 올라왔지만 어느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연은 이렇다.
“제가 퇴직을 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택시를 몰고 있는데, 하루 12시간 일해도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3년 무사고면 개인택시를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걸 기다리며 참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만만찮아요.”
동병상련인가. 기사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초보 택시기사라 해도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힘들다니…. 일주일에 12시간 강의하고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버는 나는 그에 비하면 호사스런 퇴직자가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 운전하세요?”
“대략 23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교통지옥 같은 서울 시내에서 하루 230킬로미터씩 운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든 노동이다. 3년 무사고가 만만찮다는 것을 처음엔 수긍하지 못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든데 누구는 한 방에 10억, 20억, 100억을 해먹었다니 박탈감이 너무 커요.”
최순실 일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3년 뒤 개인택시 신청할 날을 기다리며 힘든 나날을 참고 견뎌나가는 초보 택시기사에게 최순실 일당은 정말 못할 짓을 했구나. 저 마음의 상처는 누가 보듬어줘야 하나.
택시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도 초보 택시기사가 한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무거운 발걸음 위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는 50대들의 자화상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지금 50대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창 공부할 자녀도 있는데,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들의 노후 준비도 불확실하고, 고령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급한 마음에 자영업에 뛰어들어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100세 시대에 50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령대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노후는 크게 달라진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낸 사람은 국민연금을 기본으로 하고 부족분을 사적연금이나 다른 자산으로 보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동안 쌓아온 노후 자산에 손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길에 내몰린 50대!
연금해지의 경제학
요즘 연금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순실 일당에겐 연금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겠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연금은 금과옥조 그 자체다. 기나긴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느냐, 불안에 떨며 보내느냐는 연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과옥조 같은 연금을 깨트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50대들이 많다. 필자의 이야기부터 해본다.
어느덧 1년 전의 이야기다. 갑작스레 닥친 퇴직은 나름 평온했던 필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이로 인해 지상의 평화로운 날들은 순식간에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필자의 일상도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정신은 혼미해졌고, 가슴은 불구덩이로 활활 타올랐고, 두 발은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금이었다. 연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해지해야 하나. 한 달 보름 정도의 고민 끝에 아내를 대동하고 해지의 길에 올랐다.
해지의 길에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당신은 연금 전문가라면서 이렇게 해지를 해도 돼요?” 아내의 말에 뜨끔했다. “나만 믿어.” 그 당시 뭘 믿고 아내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쳤을까? 당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배수의 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배수의 진’을 친 장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다면 행동이 굼떠 적의 포로가 되거나 몇 발짝 나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빠지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내 형편은 엄청난 무게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안게 된 수억의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빚을 안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몸을 꽉 쪼이며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 족쇄를 떼어내지 못하면 사즉생(死則生)의 ‘배수의 진’도 별무소용일 터! 그래서 선택한 길이 ‘연금을 죽임으로써 연금을 얻는 방법’이었다. 연금을 해지해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든 후 난관을 돌파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수확물로 즉시연금을 구입한 셈이다. 나는 해지가 불가능한 국민연금을 제외한 모든 연금을 해지해버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올 상반기에만 보험 해약 환급금이 사상 최대인 14.7조원을 넘어섰고, 작년 한 해의 연금저축 해지 금액은 2.5조원에 달한다. 대부분 손해를 감수하며 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필자처럼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적연금을 해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부만 해지하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합쳐 사적연금이라고 부른다. 개인연금에는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연금저축이 있고, 이런 혜택은 없지만 10년 이상 유지할 경우 발생한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연금보험이 있다. 연금저축의 경우 5년 이상 유지하고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3.3~5.5%의 연금소득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중도에 해지하면 16.5%의 기타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따라서 연금저축을 중도에 해지하면 납입 원금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연금보험은 다소 복잡하다. 연금보험을 중도에 해지하면 세제상 불이익을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해지 환급금이 납입 원금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납입 원금 대비 해지 환급금의 비율을 의미하는 해지 환급률은 어느 보험사 상품이냐, 적용 이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의 해지 환급률이 납입 원금의 100%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이 대략 7년, 최저이율보증형 연금보험이 10년 정도다.
퇴직연금은 근무기간과 최종 3개월간의 평균 임금에 의해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급여형,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기여형, 이직할 때 적립금을 계속 쌓아가는 계정인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뉜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나이에 따라 3~5%의 연금소득세를 적용받지만,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퇴직소득세를, 근로자 자신의 불입금이나 운용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은 기타소득세(16.5%)를 적용받는다. 연분연승법이 적용되는 퇴직소득세는 계산이 복잡하지만 가입해 있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문의하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연금은 세제가 다르고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다르다. 따라서 개인 사정으로 연금 해지를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하자. 일분일초가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해지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연금은 한 번 해지하면 해지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둘째, 해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납입액이 부담스러워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해지보다는 납입 중단을, 자금이 필요해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이나 담보대출 등의 방법을 먼저 생각해보자.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은 연금보험 가입자가 자금 필요시 해약 환급금 범위 내에서 중도인출하고 나중에 추가납입으로 인출액을 보충할 수 있는 제도를, 담보대출은 퇴직연금 적립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셋째, 해지를 해야 할 경우에는 손해율을 따져보고 손해율이 적은 것부터 해지하자. 개인이 손해율을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입해 있는 금융회사에 문의하면 된다.
가교연금 만들기
지금까지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50대의 연금술에 대해 살펴봤다. 이른바 연금해지의 경제학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50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50대 10년의 강’을 무사히 잘 건너는 사람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50대에 연금을 무턱대고 해지해버리면 노후에 가택연금당하기 십상이다. 50대 연금술의 핵심은 죽을 때까지 연금에서 소득이 창출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빚 규모가 미미하거나 없는 50대 중에 퇴직으로 인해 생활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자녀교육과 내 집 마련, 부모님 봉양 등으로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는 50대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득이 적더라도 제2의 일자리를 찾고 가교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교연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먼저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를 확인하고, 지금부터 그 나이까지 안정적인 소득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가입해 있는 개인연금이 있다면 수령 방법으로 수급기간이 정해져 있는 확정연금형을 선택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면 퇴직할 때 받은 퇴직 급여를 활용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할 수 있도록 확정연금형 즉시연금이나 인출형 예금상품, 월지급식 펀드 등에 가입한다.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즉시연금과 인출형 예금상품과 달리 월지급식 펀드는 수입이 일정하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일찍 수입이 중단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위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가교연금을 구축하고도 남은 퇴직 급여가 있다면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도달했을 때 종신지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해 부족한 국민연금 급여 수준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에는 개인형 퇴직연금에 넣어두고 계속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낮은 수준의 이율에 만족하지 말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 급여를 가교연금 만들기에 다 써버린 50대라고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집이 있다면 60세 이후에 주택연금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신연금 만들기
50대 중에는 생활비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50대 후반의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 지금은 가교직업(bridge job) 형태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A씨의 고민은 자녀의 결혼이다. 최근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A씨의 재산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눈치를 살피기에, 결국 A씨는 두 자녀에게 결혼자금으로 거액을 떼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A씨 부부의 노후생활 자금이 빠듯해질 것 같더란다. 더 이상의 재산을 자식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결심한 A씨는 비상자금을 제외한 금융자산은 모두 즉시연금으로, 집은 주택연금으로 활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주식을 사고팔고 있습니다. 주식투자가 위험한지를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은행이자가 형편없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얼마간의 퇴직금을 은행에 예금하고 그 이자로 생활비를 충당하던 노인들의 한숨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노년의 삶에서 건강과 경제가 행복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 주위의 노인 분들도 자기 돈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자기 돈의 효용가치를 높이기위해서 경제신문을 읽고 방송의 경제 편을 열심히 듣습니다. 여기저기 경제교육에 귀를 쫑긋하고 찾아다닙니다.
경제 전문가는 말합니다. ‘지금은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입니다. 투자는 위험성이 따릅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꼼꼼히 살펴 안전한 장소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백번 들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인가를 강사는 말하지 않습니다. 강사는 수준 높은 재무 교육을 했다고 몇 십 만원의 강의료를 받아갑니다. 듣고 싶은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교육을 합니다. 한때는 주식의 간접투자인 펀드를 권유하다가 본전 까먹는 펀드가 늘어나자 요즘은 파생상품 권유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경제 잡지를 보니 은행에서 거액 예금자를 상대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주는 금융 포트폴리오 전문가 즉 PB(Private Banking)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강남에서는 금융 자산이 최소 10억 원은 넘어야 PB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급 관리센터라고 하면 보통 50억 원은 넘는 고급 고객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은행에 가서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는 고객이 아닙니다.
일반 서민들은 이런 곳의 PB는 당연히 실력이나 세계의 글로벌 경제를 보는 눈도 대단하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PB들도 ‘더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덜 잃는 게 관건이죠.’ 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PB전문가들도 이럴 진데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적은 액수의 자산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퇴직자들은 혼자 끙끙 앓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은행이나 보험회사에 근무한 것도 아니고 일반 회사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사람들이 스스로 투자처를 찾아서 피 같은 자기 돈을 굴린다는 것은 지뢰밭에서 보물찾기 하는 것처럼 위험합니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월세를 받는 방법도 향후 부동산경기는 물론 지금의 제세공과금과 수익성을 비교해 봐야하고 월세를 제대로 내지 않는 악성 세입자 관리도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이만큼 세상을 살아 왔으니 기업체의 부침(浮沈)도 많이 봐 왔습니다. 공중 분해된 xx그룹이나 몇 만원 하지 않던 삼성전자의 주식이 100만원을 훌쩍 넘는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투자시장의 대표적인 곳이 주식시장입니다. 내가 그런대로 알만해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어느 기업의 주식을 여유 돈으로 사서 몇 년간 묵혀두면 효자 노릇할 주식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콘텍트 렌즈를 찾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런 주식을 찾기로 했습니다. 책으로 공부도 하고 각종 지표를 보는 법도 터득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확신에 찬 종목을 발견하고 주식을 샀습니다. 며칠간은 잘 올라갔습니다. 은행이율은 비교할 수 없도록 높은 수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과 중국경기의 악화와 환율이 요동치면서 주가는 곤두박질 쳤습니다. 유가는 내려가면 좋은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어 하는 동안에 본전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주식 시세를 인터넷으로 조회하면서 일비일희 합니다. 오르는 날은 기분이 좋지만 내리는 날은 밥맛이 싹 달아납니다. 주가의 변동에 따른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분석하고 내가 믿은 기업이니 두 눈 딱 감고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와 모든 통계는 과거를 반영한 것이지 미래를 보증하지 않은 것이므로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주식투자를 하면서 얻은 교훈은 주식의 주가는 변한다는 진실과 일반인이 주가를 예측한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주식 전광판의 색깔을 뒤흔듭니다. 주식을 사고파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입니다. 사람 사이의 인정도 돈이 개입되어야 확실히 느낍니다. 돈을 우습게 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생활 과목에서 경제교육 편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특히 경제지식이 부족한 노인이 관리하는 돈을 호시탐탐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우굴거립니다. 독거노인의 50%가 극빈자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노인의 삶의 매사가 여유롭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