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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 2016-08-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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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이주! 찬성 VS 반대] 이제는 삶의 쉼표를 찍을 때
-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다. 문 열면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이고 집앞 텃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나가도 바닷물에 발 담글 수 있고 좋아하는 낚시도 원 없이 할 수 있는 섬, 제주. 그런데 남자는 제주살이를 끝까지 찬성하고 여자는 반대하고 있다. 남자는 자기가 평생 꿈꾸던 일이라 하고 여자는 답답해서 섬에서 못 살겠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구본홍(63·남·정년퇴직·광명시)씨는 작년부터 제주살이 하고 있다. 그는 모 중소기업의 이사 직함을 끝으로 꽃중년이라 불리는 61세에 정년퇴직했다. 퇴직하자마자 오라는 회사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행을 선택했다. 그곳에 가기까지 아내와의 견해차가 많아 쉽지 않았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는 놀멍쉬멍 느린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 김옥녀(60·여·주부) 씨는 아직도 낯선 곳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 이주를 찬성하는 남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여력이 된다면 남은 생을 갈무리하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구본홍 씨의 퇴직 후 남은 재산은 중형 아파트 1채와 퇴직금. 그리고 다달이 나오는 연금이 있다.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결과다. 욕심을 버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들어보니 앞으로 20년 후까지의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놓았다. 제주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보증금 2천만 원에 1년 치 집세를 선납으로 200만 원을 주고 얻었다. 살아보니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다고 한다. 가능하면 제주에서 오래 살고 싶단다. 전입신고도 마쳤다. 제주도민이 되면 비행기요금 할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온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형님 아우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외지인이지만, 현재 그 마을에서 제일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이 막내라고 챙겨주고 있다. 섬이란, 원래 타지사람을 ‘육지 것’이라 배척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품 좋은 60대 젊은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나이 든 이웃을 잘 도와준다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남자가 제주이주를 찬성하는 이유는 드디어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잘난 체 있는체하지 않고 다가가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 내가 먼저 도울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한테 잘하다 보니 이 집은 채소와 과일 생선 등을 이웃 사람들이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넘치고 있으니 생활비도 서울살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고 한다. 다만 남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석 달에 한 번 여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답답함을 풀기 위해 1달에 한두 번 서울에 다녀온다고 한다. 앞으로는 두어 해는 유유자적 지내다 원하면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일손이 부족해 부지런하면 남녀노소 수입을 낼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부인의 말로는 남편이 요즘은 갯바위 낚시에 재미 들려 시도 때도 없이 고기를 잡아 오기 때문에 가끔은 손질하기 귀찮을 때도 있다고 행복한 푸념을 한다. 제주 이주를 반대하는 여자 현재 사는 집의 위치는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올레길 20코스 중간쯤이다. 15K 이내에 성산리 일출봉과 함덕 해수욕장이 있다. 공기 좋고 조용한 건 좋지만, 제주살이를 불편해한다. 이유는, 물론 제주에도 문화공간이 있긴 하지만 도심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고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을 가질 수 없어서이다. 그 가운데 제일 불편했던 경우는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있어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결항이나 출발시각이 지연될 경우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비행시간만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출발부터 도착지까지는 총 4시간 정도 소요되니 힘들다. 그 외에 금융기관과 대형마트, 편의시설이 적고 멀리 있어서 도심 같으면 5분 거리인 것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여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남편이 끝까지 우긴다면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니 양보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튼, 둘만의 시간이 많다 보니 부부간의 정은 더 깊어지는 거 같다고 한다. 남자는 제주도가 좋다고 무작정 내려와서 대문 굳게 닫고 자기만의 성안에서만 살면 이웃의 곱지 않은 시선과 외로움 때문에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인 4·3사태를 보면 그들이 왜 외지사람들한테 ‘육지 것’이라 하는지 이해된다. 제주에서 태어났어도 본적이 육지이거나 아버지 대에 제주에 이주했다면 수십 년을 살아도 제주도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타지에 살면서 부딪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자연풍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다.
- 2016-06-2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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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속지 말자 금융사기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50대 후반의 기혼자,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최근에 건강 또는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FINRA)에서 내린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의 정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때 만약 ‘50대 후반의 기혼자’를 ‘50대 후반 이상의 은퇴자’로 바꾸면 대부분의 은퇴자가 금융사기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자들이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고정적 수입은 크게 줄어들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사업준비자금 등 자금 동원력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회사 생활을 20~30년 이상 해오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판단과 금융지식이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일만 하느라 경제 및 금융시장 변화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반면 은퇴와 함께 수입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은 조급하고 귀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황이다. 이런 틈새를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기꾼 자녀가 퇴직금이나 목돈이 생긴 순간 ‘내 돈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설마 내가 사기를 당하랴 하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실제로 사기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금융사기를 당한 사람의 비율이 40~50대의 3.5%에서 60대로 가면 5.7%로 높아지고 있다. 5.7%면 조사대상자 20명 중 1명 이상이 사기를 당한 것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또한 금융사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비율도 40~50대는 20% 안팎이지만 60대는 27.3%로 높아진다. 60대는 10명 중 3명이 금융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다는 것이니까 누구나 사기를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융사기로 입은 피해 금액도 만만치 않다. 30대는 1900만원, 40대는 2328만원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피 같은 내 돈이라고 생각해보라. 특히 50대로 가면 9038만원으로 피해 금액이 급증하고, 60대도 5464만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50대의 피해규모가 가장 큰 것은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이 정의한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 중 첫 번째로 언급한 ‘50대 후반의 기혼자’와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53~54세이므로 50대들이 퇴직금을 포함한 목돈을 들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50대에게 9038만원이 얼마나 큰돈인가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201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순자산(총자산-부채)은 3억4363만원이다. 이 중 9038만원을 사기 당했다면 순자산의 26.3%에 해당하는 돈이다. 내 노후에 1억원이 더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생각해 보면 1억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잘 가늠할 수 있다. 한두 번 사기를 당하고 나면 세상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액수가 노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정도라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돈과 사람에게 속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기회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로또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예금금리가 1%대인데 누가 6~7%대의 투자 수익률, 그것도 확정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사기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6%의 확정 수익률이 가능하다면 은행에서 3%로 대출을 받아 투자하면 3%의 수익이 그냥 떨어지는 장사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쉽고 안전하면서도 많은 수익이 남는 장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순서가 오겠는가? 그렇다고 금리 1%대의 은행예금에만 돈을 넣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투자를 하더라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결정을 늦춰야 한다. 사기꾼들은 통상 희소가치를 들먹이는 동시에 특별히 당신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재촉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꾼들은 엇비슷한 수법을 모방해서 우려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비슷한 수법에 사기당한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로 당신의 과거와 이력을 부추길 때 발을 빼야 한다. 전문 사기꾼일수록 왜 하필 나일까에 대한 대답을 미리 다 준비해 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도 이미 투자하고 있다고 할 때 의심의 눈초리를 더 세워야 한다. 유명 인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팔리고 있기가 십상이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투자액은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기 당하지 않는 다른 대비는 경제와 금융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주식이나 펀드에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 정도 투자해 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너무 많은 돈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여유분 중 일부를 넣어두고 말 그대로 여유만만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한 회사는 물론 그 회사가 속한 업종에 더해 경제동향과 전망, 뉴욕증시 등도 살펴봐야 할 과녁 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를 위해 평소 신문이나 인터넷의 경제면을 꼼꼼히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만 세워도 절반 이상은 성공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써먹은 명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안다.” 금융사기는 일단 당하고 나면 돈도 친구도 잃고 남는 것은 실망과 후회, 노후빈곤뿐이다. 금융사기든 창업사기든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자 최상의 방책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6-2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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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리인하가 오히려 노인의 주머니를 닫게 한다.
-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1.25%로 인하했다. 부진한 경제성장률과 취약업종 구조조정에 따른 경기 둔화를 우려해 선제로 금리 인하 카드를 빼 들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금리를 인하하면 뭉칫돈이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몰리면서 경기가 되살아나고, 돈들이 공장을 돌리고 데 사용되며, 가계는 소비를 늘려 돈이 제대로 돌아 ‘돈맥 경화’가 해소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덧붙였다. 필자도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하지만 금리 인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1220조에 달하는 가계부채 확대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고도 한다. 금리가 낮아지면 또다시 집주인들은 월세로 전환하거나 전세금을 올린다. 집 없는 서민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거나 외곽지역으로 내몰려야 한다, 금리는 낮아졌으나 전세금을 올리면 대출을 그만큼 더 받아야 하므로 나가는 이자는 같아진다. 은퇴하고 은행 이자로 생활해오던 나이 많은 시니어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진다. 필자의 경우 퇴직금을 고스란히 은행에 정기예금을 해 뒀다. 수익형 부동산을 사서 운영해보라거나 펀드나 주식에 투자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나이 들어 재산을 불리기보다 지키는 것이 최고라는 어느 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마음 편히 적게 벌고 적게 쓰겠다는 생각에 은행만 고집했다. 그러나 은행 금리가 계속 곤두박질하더니 이제는 처음 받던 이자에 비하면 반 토막이 되었다. 1억 원을 넣어도 월 20만 원이 못 된다. 그나마 이제 이 금액도 ‘아! 옛날이여’가 되었고 더 줄어들게 생겼다. 지금은 저축의 시대가 아니고 투자의 시대라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날고 긴다는 투자 전문가들도 뾰족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베테랑이 운영하는 증권회사 펀드도 수익을 못 내는 종목이 수두룩하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이익금을 현금보유로 쌓아놓고만 있지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 기업이 쌓아놓은 돈을 쓰도록 세금을 물리겠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투자가 두렵고 겁나는 시대다. 이런 판에 경험 없는 노인들이 투자할 곳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사람의 심리가 수명이 길어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면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늘리고 저축을 줄이기 어렵다. 금리 인하정책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의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줄어드는 이자 수입만큼 소비를 줄이려고 한다. 가진 목돈을 헐어서 쓰기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감수한다. 이익을 못 내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 전망이 어둡고 망해야 할 기업을 우물쭈물 이자를 낮춰 계속 살려서 끌고 가면 지금 호미로 막을 일을 나중 가래로 막아야 한다. 오래되어 열매를 제대로 못 맺는 과일나무는 베어내고 새로운 묘목을 심어야 한다. 과거 전성기 때의 과일 수확만 생각하면 바보다. 노인들이 돈을 움켜만 있지 말고 쓸 수 있도록 노후복지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 월 30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급 요양원보다 더욱 저렴한 공공 요양원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금리 인하로 불안해하는 노인들이 돈을 쓰도록 믿음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줘야 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의 주된 원인이 가난이다. 독거노인의 45%가 극 빈곤층이다. 노인이 한번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자력으로 올라가기 어렵다. 극빈층으로 떨어지기 전에 막아 줘야 하는데 안전판이 너무 미약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야 도와주는 지금의 사회안전망은 비효율적이다. 금리 인하가 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검토라도 해보길 희망한다.
- 2016-06-1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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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노인 특화형 일자리가 필요하다
- 법으로 정년을 보장한 60세까지 근무한 뒤 박수받고 정년퇴직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앞으로 10여 년은 너끈히 더 현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그냥 해보는 큰소리가 아니고 건강관리를 원만히 한 사람은 실제도 그렇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다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서 인생이모작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액티브 시니어가 되라고 권장하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집안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는 말을 안 해도 ‘100세 시대’에 60세에 퇴직하고 남은 사십 년을 ‘구둘 장군’으로 지내기는 누구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둑질 말고는 무슨 일이든 찾아보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갖다 부치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 등쌀에 집안에만 있기는 어렵다. 퇴직자가 왜 계속 일을 하려고 하는가? 우선은 먹고 사는 경제력이다. 퇴직금 1억 원을 은행에 넣어봤자 월 20만 원을 손에 쥐기가 힘든 데 세금은 15.4%나 뗀다. 허드렛일로 월 100만 원을 번다면 은행에 6억~7억 원을 예금한 것과 맞먹는다. 퇴직했다고 해서 안 먹고 안 입고 살 수가 없다. 퇴직해서 근로수입은 없어져도 소비지출은 그만둘 수가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거나 극소수의 재테크에 성공한 재력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연히 퇴직하는 순간부터 돈 걱정하는 것이 일반 서민의 자화상이다. 부모님도 살아계시고 자녀들 결혼마저 늦어져 함께 살고 있다면 퇴직했다 해서 보따리 싸 시골로 내려가기도 어렵다. 자연히 이런저런 돈 벌 궁리를 하느라 불면의 밤은 깊어간다. 집안에서도 가장이 놀고 있으면 분위기가 저기압이다. 공원 벤치에서 만난 김철수(가명ㆍ67) 씨는 “갈 곳이 없어도 이렇게 집을 나와야 아내도 숨을 좀 쉰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거실에 턱 버티고 있으면 아내가 얼마나 답답해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빠 내일부터 출근한다.’ 라는 말이 어떤 꽃 노래보다 하고 싶은 말이고 가족들은 듣고 싶은 속삭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 토막의 급여를 주는 일자리도 마다치 않고 노인들이 줄을 선다, 문제는 적은 돈을 버는 일자리에 퇴직자들이 인생이모작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박수 보내고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퇴직했으면 그만 집에서 쉬시지 새로운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돼 반 토막의 급여도 고맙다고 감지덕지 일하는 노인의 모습을 사시의 눈으로 째려보는 젊은이들도 있다. 자식의 일자리를 뺏는 비윤리적 아버지로 매도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고령자 취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자리를 시니어들이 뺏어간다는 시각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누가 차지하는가에 대한 갈등구조다. 두 번째로 동남아, 중국 등 출신 외국근로자 때문에 몇 년간 인건비가 제자리걸음 하는 상황에서 시니어까지 저임금 경쟁에 가세해 인건비 인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도 젊은이들의 눈칫밥 먹는 신세로 전락해 길게 다니지 못한다. 뭔가 100세 시대에 걸맞은 정부 정책이 있어야 한다. 우선 노동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치하지 말고 노년의 경험이 필요한 특화한 일자리를 특화해야 한다. 요일별 근무제나 바쁜 시간대의 파트타임 등 가변성 있는 노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어린이 놀이터의 안전점검, 불량식품 단속요원도 좋다. 공원이나 우범지대의 순찰이나 청소도 노인의 특화된 일자리로 손질해서 만들어야 한다. 9시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고정된 근무 개념을 깨뜨려야 노인의 일자리가 많아진다.
- 2016-05-1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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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동 변호사의 이혼과 법률] 퇴직연금 수급권은 재산분할 대상인가
- A는 1977년 교육공무원으로 임용됐다. B는 1993년 A와 결혼해 약 15년간 혼인생활을 하면서 가사를 전담하였다. A는 2006년에 퇴직하면서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해 지금은 매월 212만8600원을 받고 있다. B는 A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A가 받고 있는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A가 사망하기 전날까지 A가 받는 공무원 연금액 중 일정 비율을 자신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B의 주장은 인정될까? 위 사례의 쟁점은 ①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 ②공무원 퇴직연금이 재산분할의 대상이 된다면 다른 일반재산과 다르게 재산분할의 비율을 정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재판상 이혼을 전제로 한 재산분할에서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과 그 액수는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하여 정한다. 만일 그 당시 직장에 근무하는 부부 일방의 퇴직과 퇴직금이 확정된 바 없으면 장래의 퇴직금을 분할 대상이 되는 재산으로 삼을 수 없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뒤 부부 일방이 퇴직하여 퇴직금을 받았고, 재산분할청구권의 행사기간(이혼한 날부터 2년)이 경과하지 아니하였으면 수령한 퇴직금 중 혼인한 때로부터 사실심 변론종결일까지 제공한 근로의 대가에 해당하는 퇴직금 부분은 분할 대상이 된다. 이와 달리 부부 중 일방이 이혼 당시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경우 퇴직일과 수령할 퇴직금이 확정되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장차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장래의 퇴직금을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장래 퇴직금을 받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정은 재산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하는 데 필요한 기타 사정으로 참작될 뿐이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은 두 가지 쟁점에 대하여 모두 판단하였다. 먼저 이혼소송의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에 부부 중 일방이 공무원 퇴직연금을 실제로 받고 있는 경우 이미 발생한 퇴직연금 수급권이 재산분할에 포함된다고 하고, 연금 수급권자인 배우자가 매월 받는 퇴직연금액 중 일정 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상대방 배우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재산분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두 번째로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에 대하여 정기금 방식으로 재산 분할을 할 경우 공무원 퇴직연금 수급권과 다른 일반재산을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분할 비율을 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체 재직기간 중 실질적 혼인기간이 차지하는 비율, 당사자의 직업 및 업무내용, 가사 내지 육아 부담의 분배 등 상대방 배우자가 실제로 협력 내지 기여한 정도 기타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의 위와 같은 판단에 의하면, B는 A가 받는 퇴직연금에 대하여 재산 분할을 청구할 수 있으며, 정기적으로 특정 금액을 지급 받을 수 있다.
- 2016-03-2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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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놀멍놀멍 vs. 여조삭비(如鳥數飛)
- 음악이 바뀌는 데 따라 우리는 어떤 춤을 추고 있는가. ‘저금리와 고령화’ 또는 ‘5저(저성장·저물가·저금리·저고용·저자산가치) 2고(고령화·고소득화)’로 표현되는 경제 및 금융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투자전략과 성향은 바뀌고 있는가. 지금까지 필자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가 가진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면 점차 줄여 나가는 대신 금융자산의 비중을 늘려가야 한다. 둘째, 늘어나는 금융자산의 구성 또한 기존의 은행예금과 같은 안전자산 위주의 틀에서 크게 바뀌어야 한다. 금리가 낮은 예금 비중을 낮추는 대신 노후 생활비 마련을 위한 연금 비중과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주식 및 펀드 비중을 높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때 일부 부동산을 팔아치우거나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하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문제는 부동산을 팔아 모두 연금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연금의 규모는 자신이 생각하는 적절한 노후생활비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이상의 연금을 쌓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정 부분은 보다 높은 수익을 위해 주식과 펀드로 옮아가야 할 것이다. 이때 가장 큰 걸림돌은 주식과 펀드는 손실의 위험을 안고 가야 하는 투자자산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아니다. 만약 노후에 필요한 자산과 연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굳이 위험을 크게 안고 갈 필요가 없다. 그저 여윳돈의 일부를 ‘놀멍놀멍’이라는 제주도 사투리처럼 천천히 노는 듯 재미삼아 굴리는 정도면 충분하다. 한마디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자기 나름 촉각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얼마간의 여윳돈 투자가 배우자와 자녀, 손주 등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과의 대화를 다양하게 만들어 주면서 활기차고 열린 인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정도의 투자는 재미와 함께 치매 예방약으로도 훌륭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반대로 아직 노후준비가 덜 된 상황이라면 보다 신중하면서도 야무진 자세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고수익을 노리고 손실 위험이 있는 주식과 펀드 등에 투자해야 하므로 투자성과에 내 노후를 걸면서 보다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딱 맞아떨어지는 사자성어가 ‘여조삭비(如鳥數飛)’.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처럼 배우기를 쉬지 않는 동시에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기고에서 언급한 것처럼 춤과 투자는 엄청나게 공부하고 연습을 해야 잘 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 아닌가. 물론 이 같은 공부와 연습이 생업이나 직장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가 무작정 날갯짓만 열심히 할까? 날갯짓에는 다 그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쪽으로 얼마만큼 날아갈 것인가 등을 미리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후준비를 위한 위험자산 투자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전략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내가 가진 금융자산 중 어느 정도를 주식과 펀드 등과 같은 위험자산에 투자할 것인가. 적절한 투자수익률은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까. 언제까지 위험자산 투자를 계속할 것인가. 금융자산 중 위험자산의 비중을 어느 정도 가져갈 것인가 하는 법칙으로는 ‘100 ? 나이’가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확정기여형 퇴직연금(401k)의 도입으로 근로자들이 자신의 퇴직금을 직접 운용하면서 나온 경험칙이다. 젊은 나이에는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돌아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이가 30세라면 금융자산의 70%(100-30)를 위험자산에 투자하고, 60세가 되면 그 비중을 40%(100-60)로 줄이는 것이다. 젊어서 투자에 실패할 경우 회복할 시간적·마음적 여유가 있지만 나이 들어서 투자했다가 손실이 클 경우에는 회복이 어렵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식투자 경험이나 경제 및 금융에 대한 지식 등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경우 ‘100-나이’의 법칙에 따를 경우 위험자산투자비중이 지나치게 높다고 할 수 있다. 급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갈 경우 손실이 커질 가능성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투자성향과 경제 및 금융환경 등을 따져보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위험자산 비중을 늘려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목표로 하는 수익률 기대치 또한 매우 중요한 좌표의 하나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high return, high risk’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수익률 목표치가 높을수록 위험도 더 많이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금금리 1% 시대에 투자수익률 5% 안팎이면 매우 훌륭하지 않을까. 발품을 팔면 그래도 2% 남짓 금리를 받을 수 있는데 골치 썩여 가면서 2~3%대 투자수익이라면 아예 편하게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약간 더 높은 4~5%대, 운이 좋아 5~6%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수준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반면 지나치게 높은 기대수익률은 마음은 물론, 몸도 지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과 또한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험자산투자를 어느 정도 나이까지 하는 게 좋을까. 한국거래소의 조사에 따르면 요즘 주식시장에서 60대 이상의 비중이 주주 수에서는 20% 안팎, 시가총액에서는 34~35%를 차지하고 있다. 일면 과도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60대 이상을 대부분 은퇴한 그룹으로 본다면 그만큼 돈을 굴릴 곳이 없는 가운데 투자수익이 절실한 층도 가세하고 있는 결과일 것이다. 일본 피델리티자산운용 투자자교육연구소의 노지리 사토시(野r尻哲史) 소장은 60세에 은퇴하고 나서도 10~15년 정도는 위험자산에 계속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은퇴하고 나면 예금과 같은 안전자산에 넣어놓고 빼 쓰기만 했다면 이제 저금리·고령화시대를 맞아서는 은퇴한 후에도 어느 정도의 위험자산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게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적절한 투자는 나이 70세, 75세가 아니라 80세가 넘어서도 새로운 춤처럼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건강을 지켜주는 매우 좋은 운동이자 보약이 될 것이다.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2015-09-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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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5년生, 어느 시인의 못 다한 공부이야기
-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
- 2015-09-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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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⑥]日 꿈의 라이프 위협하는 6가지 강적 퇴치법
- ‘인생 90년’의 시대를 맞이한 장수사회 일본, 10월 13일 간행된 경제시사지 [프레지던트(President)](통권 884호)는 특집 ‘부자 노후 빈곤 노후, 당신은 어느 쪽?’을 기획해 정년 후 꿈의 라이프를 위협하는 6가지 강적을 정리하면서 그 퇴치법을 소개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후의 불안감을 없애는 전문가의 조언을 포함해 그 해소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연금 감액 수입 대비 연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일본의 소득대체율은 일본 정부가 설정한 표준세대의 경우 평균 수입 월 34만8000엔 가운데 62.7%를 차지한다. 연급 지급은 21만8000엔이다. 이것이 전문가가 추정한 재정 검증의 결과, 최악의 경우 2015년에는 50% 수준인 약 17만 엔으로, 나아가 2072년 35% 수준인 약 12만 엔으로 축소될 것으로 예상됐다. 닛세기초연구소의 주임연구원 나카시마 쿠니오(中嶋邦夫)씨는 “연금 감액에 대응하는 법은 ①절약하기 ②계속 일하기 ③돈 모으기의 세 가지 선택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절약은 어렵고 저축이 없으면 일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일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30년 후에는 인구의 약 40%가 65세 이상이 된다. 국민의 40%가 일하지 않으면 나라가 꾸려지지 않기에 고령자라도 일하는 게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고 밝혔다. 잡지는 최악의 경우로 연금 삭감률을 후생연급 22%, 기초연급(국민연금) 60%로 내다보면서 기초연금만 수령하는 자영업자와 후생연금 및 기업연금을 수령하는 회사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겨나 ‘세대간 격차’만이 아닌 ‘세대대 격차’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연금감액을 전제로 한 충분한 저축액은 얼마일까? 파이낸셜플래너 고야 요이치(小屋洋一)씨는 “3000만 엔 정도는 준비해 뒀으면 한다”고 조언하면서 “연금생활자는 평균 매년 70만 엔 정도 지출 초과로 퇴직 후 25년을 지낸다고 가정한다면 합계 1750만 엔이 필요하며, 연금지급액이 20% 줄어들 것을 가정한다면 1000만 엔이 더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경단련(경제인단체연합) 소속의 대기업은 평균 2000만 엔의 퇴직금이 나오지만, 중소기업은 평균 1000만 엔 정도로 그중에는 지급하지 않는 기업도 있기에 집이 없고 개호를 받는 경우 더 추가 비용이 발생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민간의 연금상품과 저축으로 미리 노후에 대한 만전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둘째, 팔리지 않는 집 일본 총무성의 2013년 주택 및 토지통계조사에 따르면 국내 총주택수 6063만호 가운데 13.5%가 빈집이라고 한다. 부동산 컨설턴트 나가시마 오사무(長嶋修)씨는 “고령자가 돌아가시면 빈집으로 방치되고, 젊은 사람들은 신축 맨션에 살려는 구도이다. 게다가 현재 일본의 주택소유율은 약 60%이지만, 집 구입 의향이 저하돼 앞으로 더욱 떨어질 거로 예상된다”고 밝히면서 “확실하게 가격 상승이 예측되는 부동산과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경우는 제외하고 팔린다면 지금 당장 파는 게 좋다. 향후 20년 일본의 주택가격은 매년 2%씩 하락된다는 계산도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올해 8월부터 실행된 ‘개정 도시재생 특별조치법’의 이른바 ‘콤팩트시티정책’에 따른 우대조치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의 물건을 노려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콤팩트시티란 시가지의 공동화 현상을 해소해 범위를 작게 유지하면서 걸어다닐 수 있는 범위의 생활권에 커뮤니티를 재생해 살기 편안한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또한 현재 지은 지 20~25년이 넘으면 가치가 제로로 평가받고 있지만, 내년부터 바뀌는 중고주택에 대한 건물평가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건축 햇수는 같아도 건물의 질과 노화 정도 등에 따라 자산 가치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산 가치가 평가받는 시대가 온다고 밝혔다. 셋째, 의료비 부담 증가 올 4월부터 70~74세 고령자의 의료비 자기 부담률이 10%에서 20%로 올랐는데, 현재 국민이 병 치료를 위해 의료기관에 지불한 의료비(국민의료비)는 연간 약 40조 엔으로 그 가운데 반 이상이 65세 이상의 고령자 의료비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자료에 따르면 20세에서 59세까지는 자기부담과 보험료 합계가 의료비보다 적어 흑자이지만, 60세부터는 의료비가 늘어나 적자이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증가는 국내총생산(GDP)이 성장률을 앞질러 공적비용 부담은 2025년에 현재보다 10조 엔 이상 늘어나 25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현역 세대의 세금이 고령자 의료비를 대신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건강보험제도의 상황도 심각해 국민건강보험은 2012년도 3000억 엔 남짓 적자를 냈다. 건강보험조합 연합회에 따르면 일반 기업의 회사원이 가입한 건강보험조합도 1419개 중 67%가 지난해 적자를 기록했다. 파이낸셜 플래너 나이토 마유미(內藤眞弓)씨는 “민간의료보험은 의료비 부담이 아무리 무거워져도 입원 등의 계약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의 공적 의료보험 보장이 잘돼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의료비만으로 사용될 돈이 150만 엔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 보험에 납입할 돈을 저축으로 돌려 노후를 준비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조언했다. 일본에서는 국민개보험제도 가운데 ‘고액요양비제도’가 있어 보험 내라면 아무리 고도의 의료를 이용해도 의료비 10만 엔 정도를 지불하면 되기에 의료비가 수백 만엔에 달하는 경우는 없다. 넷째, 간병 비용 증가 일본의 간병보험제도는 2015년에 개정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베이비붐세대가 후기 고령자가 되는 2025년을 목표연도로 한다. 현재의 정책 방향성인 ‘의료에서 간병으로(자립지원)’와 ‘시설에서 주택으로’가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간병 초점은 ‘어떠한 간병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거기에 얼마나 비용이 들까’로 옮겨지고 있느냐다. 공적시설의 특별 양호노인홈에 입주할 경우 매달 9만6000 엔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시설도 부족하고 희망자도 많아 대기해야 한다. 민간시설의 경우는 도쿄를 예로 월 14만8000 엔에 식사비 등 비용을 포함하면 매달 부담액은 20만 엔 정도. 재택 간병의 경우에도 6만 5000 엔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는데, 금전적 비용만이 아니라 간병 때문에 가족이 구속되는 비용도 상당하다. 간병시설 이용자가 보통 입주 후 평균 7년 정도 산다고 보는데, 따라서 재택 간병의 경우도 같은 정도의 기간을 상정하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가는 자신의 힘으로 배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휠체어에서 혼자 일어나 변기에 이동하는 정도의 근력은 재활 운동을 하면 되돌아온다며 고령자가 퇴원하면 가족들이 밥상 옆에서 식사를 돌보려고 하는데 과보호로 인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돼 갈수록 쇠약해진다고 덧붙였다. 각종 간병시설에서도 재활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며 같은 비용이 든다면 1일 서비스라도 재활운동을 중시하는 시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다섯째, 무직 자식 일본에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고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는 히키코모리, 전혀 일하려는 의사가 없는 니트족(NEET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자식을 둔 가족이 늘고 있다. 니트의 고령화에 따른 가계의 경제적 부담도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2014년도 학교 기본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부등교’를 이유로 30일 이상 장기 결석한 초등·중학생은 약 12만 명으로 전년도보다 약7000 명이나 증가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 학생들이 그대로 은둔형 외톨이로 이어지고,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프리타(아르바이트로 평생 생계를 이어가려는 사람을 일컬음)와 파견노동자, 그리고 가사돕기도 잠재적 무직이라고 하겠다. 전문가는 부모가 자신의 사망 후 구체적인 자식의 생존 계획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 자식 나이 40세가 포인트라고 지적한다. 자식이 젊을수록 계획이 장기에 걸쳐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 금액도 커지고 현실감도 점점 옅어지는데, 향 후 자식이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연금만큼은 체납하지 않고 꼬박꼬박 내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다만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사망할 경우 연금수입이 줄어들기에 1명분의 생활비가 높아지고 적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울러 부모 사망 후 자식이 혼자 생활하기쉬운 주택 확보를 강조했는데, 넓은 집은 광열비와 유지비, 세금 등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24시간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작은 중고 맨션을 고르되 단독주택이라면 건평수를 줄이고 남은 토지를 팔거나 주차장으로 빌려준다든지 월세용 주택으로 재건축해 수입원을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 여섯째, 정년연장 및 재고용 일본에서는 2013년 4월 ‘개정고령자고용안정법’이 실시돼 기업에 대해 희망하는 사원 전원을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시켰다. 이 법률은 노령연금의 지급 개시 연령에 맞춰 고용 연령의 상한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인정한 조치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약14만 개 회사 가운데 65세 이상 일할 수 있는 기업은 66.5%로 종업원 301명 이상의 대기업은 48.9%에 머물렀다. 나아가 정년 폐지를 선택한 기업은 2.6%, 70세 이상 일할 수 있는 기업도 전체의 18.2%에 지나지 않았다. 법률 내 ‘계속고용제도의 도입’의 실상을 보더라도 주3일 근무, 두 사람이 한 명분의 업무를 담당 등의 근무형태를 합리적인 재량 범위로 적법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어 정년 후 일의 내용이 크게 변화될 우려가 있다. 실제로 후생노동성의 조사에서도 정년 후 22.3%는 계속고용을 희망하지 않았고, 1.2%는 희망했지만 조건이 안 맞아 계속 고용되지 않았다. 경영인사 컨설턴트 에노모토 마사카즈(榎本雅一) 씨는 재고용은 보너스도 없고 연수입도 40%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라며, 정년의 연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재고용으로 연수입이 큰 대기업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삭감액이 커서 60% 정도 줄어드는 회사도 드물지 않다고 밝혔다. 급료의 변화뿐만 아니라 많은 부하를 거느렸던 관리직이 위탁 형태로 재고용돼 계약직으로 신입사원과 같은 마찬가지로 대우받으며 상사가 된 아랫사람의 꼼꼼한 지시를 받아야 한다며 꾹 참고 버틸 것인지 때려치우고 그만 둘 것인지의 문제도 있다. 또 인간관계와 든든한 파벌로 출세해 온 ‘회사 인간’보다는 업무를 통해 전문성을 익혀온 ‘일하는 인간’이 회사 내외에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기에 기술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환영받는다며 명확하게 정년 후 플랜이 있는 사람을 빼고 가능하면 회사에 꽉 달라붙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이밖에도 정년 연장, 재고용 이외에도 독립해 현역시대의 전문성을 확대시킨 인사, 회계, 영업, 판로 개척, 경영 조언 등을 대행하거나 하청받는 ‘확대고용’의 형태도 제안했다. 끝으로 “경험이 없는 곳에 도전해도 성공은 어렵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 정년을 경험 리셋이 아닌 일하는 방법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확대고용’을 생각해 봐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 2014-12-0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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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세 시대, 인생2막 재취업으로 대비④]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요구해야
- 중장년층과 베이비부머세대, 퇴직자들, 즉 시니어들이 공통적으로 최대의 관심 정보는 뭘까? 바로 일자리다. 재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고 연금은 부족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55∼64세 고령자 고용률은 2012년 63.1%로 1995년 63.6%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고용지표상으로만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인 50대 중심으로 취업자가 늘어가고 있고, 여성과 중장년층의 고용율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보면 시간제근로자, 기간제근로자 등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숫자만 채우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50대 이후 시니어들 재취업은 정부와 기업의 전직지원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재취업에 절망 비자발적, 자발적이든 정든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퇴직자들은 인생2막을 열기 위해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재취업이 필수다. 그러나 시니어 계층의 재취업과 창업에 대한 절박한 사회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화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장년층 구직자들을 위한 전직 서비스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고, 기업들이 퇴직자를 바라보는 편견도 넘어야 할 벽이다. 명예퇴직 신청을 한 1년 전부터 50대 초반 A씨는 6개월 동안 ‘전직지원전문가’에게 심리상담, 진단과 피드백,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전직교육, 취업알선 등 전문 컨설팅을 받았고, 퇴직 후 곧바로 자신의 경력과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했다. 퇴직이 배우자의 사망에 이은 가장 큰 심리적인 충격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퇴직은 개인에게 또한 매우 큰 시련이다. 게다가 고령화사회 정년퇴직 연령이 낮아지는 노동시장의 형태 속에서 퇴직은 고급 인력들의 사회 참여 폭이 작아지는 사회 해체의 문제와도 연관돼기 때문에 퇴직자들에 대한 기업과 사회의 고민은 매우 커져갔다. 따라서 그 동안 회사를 위해 기여한 근로자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그 대안으로서 아웃플레이스먼트(전직지원프로그램)가 도입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퇴직 후 일정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제공하고 또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훈련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정년연장과는 별개로 기업들은 고령화의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전직지원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의 최선의 복지는 일자리 제공이며, 일자리가 행복의 조건인 상황에서 이직하는 근로자가 가급적 실업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직지원서비스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자에게 일시적 희망 퇴직금이나 복리후생보다는 근로능력이 있는 중·장년 근로자를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장년의 재취업과 창업이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재취업에 대한 비틀린 시선이다. 시니어들에게 정부가 주도하는 재취업 지원이 시니어들의 전문성이나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상관없는 일감들을 맡기기 일쑤라는 불평을 듣는 건 어렵지 않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실행이 잘 안되는 이유 소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도입한 기업일지라도 퇴직을 앞둔 1주일 전에 단발성으로 워크샵을 가거나 온라인 상담정도에 그친다. 이력서 쓰는 방법 알려주거나 면접 보는 스킬정도. 직전 퇴사 처리된 회사에 대해 악의를 품지 않도록 잘 달래주는 일이 겨우 아웃플레이스먼트라고 시늉하는 행태에 머물러 있다. 기업들의 평판에만 신경쓰는 저비용 고효과를 기대하는 변형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흉내내고 있다는 의미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에도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개념도 모르고 있는 곳이 많다. 퇴직자들이 아웃플레이스먼트제도를 요구하지 않아서 도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HR부서에서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정보를 아예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기업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가 IMF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 전직지원장려금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도입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한 기업들과 퇴직자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기업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에 대해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만큼 서비스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퇴직자들은 아웃플레이스먼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퇴직 시에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 보다는 현금 보상을 더 선호하는 상황이다. 위로금을 선호하는 퇴직자들, 전직지원 서비스 요구해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도입 초기에 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계 기업 및 국내 기업은 많이 늘었지만,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커진 시장 규모는 역설적으로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이같은 퇴직(전직)자에 대한 재취업, 창업 알선 등 지원서비스가 의무화 되면 전직지원서비스를 하려는 기업은 늘어 날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자 가운데 장년을 대상으로는 전직지원 장려금을 지급하고, 사업주에게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것이다. KT는 지난 4월 무려 8300여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1조3000억원 가량을 명예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1억4457만원에 이르렀다. 또 한국시티은행은 최근 실시한 명예퇴직에서 5년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했다. 1인당 평균 4억원에 달했다. 이밖에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 혜택도 보장했다. 현대차그룹 계열회사도 최대 2억원을 넘게 퇴직위로금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감원인데, 막대한 인건비를 지출하게 된다. 경력관리체계가 자리 잡힌 일본, 공공과 민간 양쪽에서 재취업 지원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치룬 해외 선진국에서는 재취업-창업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들이 우리나라보다 고도화되어 있다. 일본은 정부의 ‘헬로워크’와 민간의 ‘시니어살롱’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헬로워크는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고용안정 기회 확보를 위해 만든 공공직업안정소의 애칭으로 전국에 약 500개가 만들어져 있다. 취직 상담, 직업 교육, 직업 소개, 고용보험 관련 업무 등 취업과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에서도 헬로워크는 상대적으로 낮은 직무 능력을 가진 중·고령자들을 위해 단순한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시니어살롱’은 전문 경력을 가진 시니어를 대상으로 구인구직 및 직업 교육, 상담을 진행하는 민간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의 국가 공인 경력관리체계가 안착됨에 따라, 경력관리모델에 의해 노년에도 전문성을 충분히 살리는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베이비붐이란 단어의 탄생지인 미국은 비영리단체(NPO)가 잘 정비돼 있어 경험과 지식이 많은 계층의 재취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NPO는 200만 개 정도 있는데 그중 절반은 의료,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30% 정도는 각종 교육 활동, 나머지 20%는 기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미국에서는 NPO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취업 인구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미국 전체 취업 인구의 10% 가까이가 NPO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나온다. 즉 취업 알선 분야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 분야 자체가 일자리까지 제공할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각 지역사회 내에서의 재취업 지원 활성화 시작 우리나라도 문제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들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공공기관과 기업들은 매 시기마다 열리는 다양한 일자리 박람회와 함께 다양한 재취업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있다. ‘중장년 재취업 프로그램’이 경제단체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40대 후반 항공회사 출신 조기 퇴직자는 “간혹 일자리를 연결해 줘도 그곳에서 추천해주는 일자리들이 너무 열악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앞으로 10년 뒤에도 폐지가 노인 일자리를 감당하는 비극적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300인 이상 기업은 퇴직을 앞둔 근로자에게 의무적으로 전직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고용정보원 한 연구원은 전직지원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퇴직자에 대한 전직지원은 결국 기업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라는 인식이 선진 외국처럼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나 통계치 목표에 기준을 두지 말고 ‘양질의 일자리’를 모색한다면 퇴직자들이 전직 및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퇴직 후 재취업은 이제 근로자 개인의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중장년 퇴직자의 전직과 노후설계 지원은 기업이 정부, 전문가와 손잡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에서 전직지원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기업에 따라 기본교육만 실시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전체 프로세스를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기본교육은 퇴직을 앞둔 대상자의 변화, 심리, 가족, 건강, 여가, 경력, 법률, 재무, 인생설계 등 퇴직후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말한다.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기업에 따라 집합교육 및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 아직 도입단계인지라 전직지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으며 전직지원 상담의 경우에는 개인적 상황에 따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하고 있다. 상담 및 컨설팅의 경우는 개인의 재무상태나, 경력 활용방안, 법률적 문제나 여가활용 방안 등 개인의 문제를 1:1로 전문가에 의해 심층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며 창업이나, 재취업의 경우 컨설팅을 통해 재취업 실행까지 지원 하도록 해야 한다. P&G, 수출입은행, 한전, KT에서는 이러한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이미 시행 중에 있으며, 퇴직 예정자 뿐만 아니라 이미 퇴직한 사람들도 유용하게 접할 수 있어 향후 기업들이 전직지원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삼성 그룹, 계열사별로 18개 경력컨설팅센터 운영 중 한편 대기업들도 자사의 직원들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를 차차 갖춰나가고 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탄생한 개념으로 우리 말로는 ‘전직 지원 프로그램’ 또는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들 중 80% 이상이 이를 실행하고 있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이다. 아웃플레이스먼트는 IMF 이후 기업에서는 효율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정부에서는 실업률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활용돼 공공과 민간부문에서 지속 적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삼성 그룹을 들 수 있다. 삼성은 회사를 떠난 임직원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퇴직 관리를 해주는 경력컨설팅센터를 2001년부터 시작하여 현재 각 계열사별로 1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0~50대 중장년 퇴직(예정)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경력컨설팅센터는 퇴직임원, 정년퇴직자(또는 예정자), 퇴직자(또는 예정자)를 대상으로 자문역 전직, 정년준비, 전직 상담을 해주며 재취업 알선뿐만 아니라 재교육, 창업지원을 하면서 퇴직 후 삶을 계획할 수 있게끔 종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총 3천 600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것이 센터측의 얘기다. 센터 관계자는 “전직지원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 회사는 내부 고객으로서의 근로자와의 계속적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퇴직과 관련한 근로자 개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심리안정 후 여기서는 6단계의 교육을 실시합니다. 일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자산을 체크, 가족, 건강, 여가, 관계 등을 탐색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한다”고 말했다. 재취업자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실패를 줄이기 위해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경력컨설팅센터가 국내 전직지원서비스의 롤모델로 부각되면서 LG, SK 등도 벤치마킹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전직지원장려금제도 부활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장, 재취업보다는 더 늦기 전에 생애설계부터 하지” 전문가들은 재취업 준비를 자신의 장점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로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척박한 재취업 환경을 갖고 있는 현재에 그를 위해선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당연히 시니어 본인은 재교육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고 실행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재점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니어 취업자들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도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는 아직 현실적으로 시니어들의 취업 지망과 기업이 인재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의 격차가 큼을 우회해서 알려준다. 물론 시니어들의 눈높이 낮추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기업에서 시니어들을 고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 풍토 또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를 위해선 시니어 재취업에 있어 정부에서 기업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 세금 감면, 인센티브 등이 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중장년 대다수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정년은 57세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고 기업의 장년 채용 기피 관행이 있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 재취업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보완책을 내놓아 중장년 고용률의 획기적인 변화를 유도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2014-09-12 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