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이 넘어도 무더위는 꺾이지 않고, ‘폭염특보’만 휴대폰을 두드린다.
여름에 시원하여 에어컨 가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관악의 전원주택’ 필자의 아파트도 올해는 요금폭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손주와 함께 더위를 쫓으면서 끈끈한 정을 키운 이야기를 펼친다.
◇올 여름 피서하기
올 폭염에 힘들어 보이는 쌍둥이 손녀·손자를 데리고 피서 겸 견학차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족나들이를 갔다. 아이들은 신안해저유물전시관에서는 어마어마한 유물을 보고 입을 닫지 못하고, 어린이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퇴장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필자가 귀가하면서 “할아버지 집에서 더 재미있게 놀고, 저녁에 할아버지와 같이 자자!“고 제안하였다. 손녀는 머리를 흔들고, 손자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스쳤다. 바로 옆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자주 만나지만 여태껏 부모와 떨어져서 할아버지 집에서 자 본 경험이 없는, 몇 번 시도했지만 성공한 일이 없는 큰 숙제였다. 여느 때처럼 ”엄마가 허락하면 그렇게 할게요!“라고 대답하였고, 며느리는 예전같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손주와 하룻밤 지내기
공 던지기, 끝말잇기, 가위바위보 게임 등으로 신나게 놀았다. 저녁 식사 후 반전이 일어났다. 아들가족과 손녀는 귀가준비를 하는데 “동생도 할아버지와 자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한 번도 자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고 손자가 일성을 발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더니 엄청 컸구나!” 모두가 어리둥절하였다.
가까이 사는 5개월 늦은 외손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외손자는 당시 신종 플루 등 감염위험 때문에 필자의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훨씬 전부터 외할아버지 품에서 잘 잤다.
어려서 부모님의 품을 떠나서 하룻밤을 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는 같은 시골동네 이모님 댁에서도 자기커녕 밥 한 끼 먹지 못하였다. 사촌들과 놀다가도 식사준비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름으로 기억한다. 이모님과 함께 하루를 걸어야 하는 외가댁으로 처음 갔다. 집을 떠나 본 일이 없는 터에 밥 먹기도 힘들고 잠자기는 더욱 어려웠다. 무서운 꿈만 꾸다가 날을 밝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남지 않거나 황당한 꿈을 거의 매일 꾸고 있다.
선풍기·에어컨을 교대로 켜면서 손자의 할아버지와의 첫잠을 잘 자도록 밤을 지켰다. 조금은 서늘해진 아침이 터 오르고 있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이의 표정에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부모 품을 떠나서 할아버지와의 첫잠을 손자는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즐겁게 만나라, 칭찬하라
손자와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다음에는 할머니를 좋아하는 손녀와 같이 지내기를 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할아버지, 할머니의 진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처럼 격식에 맞춘 보살핌은 아무 소용없다. 가슴에 안고 즐겁게 만나자. 손자는 할아버지의 가슴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훤히 알고 있다. 책망하지 말고 하루에 3번 이상 칭찬하자.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장마는 사라지고 연일 태양이 작열한다. 열대야로 잠을 재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뒤척일 수 있어 그런대로 길고 더운 여름밤을 버텨낼 수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거실 구석에 하나 서 있고 안방 벽에 하나 걸려있지만 몇 년 째 가동한 적이 없다. 전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여름엔 땀을 흘려야 된다는 논리로 가동을 못하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워낙 필자의 고집이 강경하므로 다들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 모두 어이없어 한다.
어제 부모님 댁에 들어서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층 연립주택에 사시는데 앞뒤 동 간격이 좁고 저층이라 집안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긴 했지만 엄청 더웠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두 분이 더위로 고생하시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더니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드시고 나서 근처 중랑천 변 그늘로 가신다고 했다. 그곳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오전시간을 보내신 후 오후에는 복지관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저녁까지 지내시다가 들어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피서를 하고 계셨다. 그것은 ‘무료 전철피서’ 아주 긴 노선을 택해서 하루 종일 시원한 전철 여행을 하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 혼자 하는 여행은 다음과 같다.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랑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수원에 도착하면 인천 행으로 갈아타고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소래포구 시장 구경을 하고 인근 다리 밑 그늘에서 쉬고 도시락을 드신다. 다리 밑에는 의자를 많이 설치 해 두어서 편하고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가실 때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온양까지 가신다고 했다. 온양 온천에는 전국에서 모여 든 노인들이 점령했다고 한다. 온천 후 점심 드시고 시장 구경도 하시고 느긋하게 전철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하루 여행으로는 제격이고 가고 오는 동안 시원한 전철에서 피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가끔 복지관 친구 두 분과 전철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일산에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일단 종로3가에서 모인다. 오전 열시쯤 만나서 서울 역으로 이동한다. 서울 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인천 계양까지 가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원인재 역에서 오이도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다가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시장에서 우럭 두 마리를 구입해서 식당에 가져가면 매운탕을 끓여준다. 막걸리 한 병 놓고 식사하신 후 시장 구경하고 노선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1인당 회비는 이만 원인데 몇 천원이 남는다고 한다.
전철피서의 하이라이트는 춘천 행 열차를 타는 것. 춘천 역에 내리면 인근에 닭갈비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에는 닭갈비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고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유명한 박사동네, 소양강 처녀동상, 소양호를 두루 구경한다. 구경 후에는 춘천 역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서비스가 공짜란다. 단, 일행이 여섯 명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그래서 춘천에 가실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간다고 하셨다.
65세 이상에게 제공되는 전철 무료서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교통비 부담 없이 시원한 피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인들의 정신과 육체건강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수출을 해야 먹고 산다고 알고 있다. 일단 수출은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니 세계적인 품질이고 수출을 못하고 있는 상품은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내수 기반이 부족하니 수출을 해야 하는 면도 크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이 튼튼하면 굳이 수출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국 시장에서 생산하고 자국민들이 소비해줘도 충분하다면 굳이 출혈수출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 규모는 인구가 1억 명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는 5000만 명 수준이라 그 절반밖에 안 된다. 통일이 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니 그 때문에라도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인구가 1억 5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이 부럽다. 실제로 일본은 우리처럼 수출에 그토록 전념하지 않는다. 내수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국산품의 수준은 이제는 세계 수준급이다. 산업초기에는 품질에 문제가 많아 KS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산보다 외국산은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산품을 그렇게 만들었다가는 경쟁제품이 있어 팔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으면 바로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산품을 사줘야 한다. 폴크스바겐이 연비 조작으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만 오히려 판매가 늘었다는 것이다. 재고가 늘자 할인을 더 해줬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설설 기던 폴크스바겐이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 하여 정부에서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는 기사가 있었다. 연비 조작은 했지만, 내가 우선 타는 데는 별 지장 없고 할인해줄 때 사자는 실리적인 생각이 우선했다.
크게 품질에 문제가 없는 봉제 상품 등도 그렇다. 90년 대에 우리나라 인건비도 많이 오르고 3D 현상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가방 공장을 인건비가 싼 동남아시아에 차렸었다. 가방을 팔기 위해서 미국의 가방 박람회에 갔었는데 미국제 가방이 많아 당황했던 일이 있다. 미국은 인건비가 비싼 나라인데 싸게 만들어줄 테니 내게 주문을 달라고 했으나 미국산에 자부심을 갖는다며 거부하는 업체가 많았다. 가방 잘 보이는 곳에 ‘Proud of USA'라는 라벨을 당당히 달고 있었다.
수출과 내수는 제조업의 상품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 기사에 보니 해외 대신 국내 휴가로 돌리면 일자리가 5만개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매년 인천 국제공항 출국자가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 여행객의 10%만 국내로 돌려도 지역경제를 살리고 4조원의 내수 창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내 관광수입 중 거의 90%가 자국민이 쓴 돈이고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도 70%를 상회하는데 우리는 50%대라고 한다. 볼거리가 많은 외국 관광지도 가보고 싶을 것이다. 대충 보고 나면 역시 우리나라 관광이 말 잘 통하고 음식 맞고 우리 취향에 맞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다. 피서지 바가지요금 등 개선해야 할 점도 많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폭염주의보까지 내렸으니 함부로 외출하는 것도 겁난다. 그러나 찜통더위에 에어컨 밑에만 있자니 전기료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다. 덥다고 집에만 가만있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다. 어디 더위를 피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을까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은 곳은 관악산 계곡길이다. 관악산 하면 보통 가파르고 험한 산을 생각하지만 등산로와 달리 계곡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길이 잘 닦여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좋다. 실제로 관악산에 가보면 등산복을 잘 차려입은 등산객들도 많지만 반바지에 샌들, 혹은 유모차를 밀고 산책 나온 주민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관악산 입구에 들어서면 한창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에도 울창한 숲 속이라 시원하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사람, 계곡에 발을 담그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물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걷다 보면 이보다 더 좋은 피서법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관악산엔 100m나 되는 천연 계곡에 물놀이장이 운영되고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서울 도심에서 더위를 피해 쉴 곳을 찾는다면 청계천 옛 한국관광공사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K-스타일 허브 한식문화관을 추천한다. 한식을 직접 즐기고,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이곳은 관광객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한식체험관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면 한식을 맛볼 수 있는 널찍한 식당 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강된장비빔밥이나 콩비지, 쌈밥, 묵 등 정갈한 한식 외에도 예쁘게 만든 전통 과자와 떡, 약과 등의 디저트, 전통차를 맛볼 수도 있다. 영화배우 송중기가 만들었던 개성약과도 예쁘게 개별포장해 판매 중이다. 시원한 오미자차 한잔, 혹은 전통주를 곁들인 주전부리 하나 시켜놓고 다음 스케줄을 짜보는 것도 좋겠다.
직접 한식을 만들어 보는 한식배움터도 인기다. 이곳에서 불고기, 잡채, 김치 등 우리나라 대표 한식을 만들어 볼 수 있다. 40명이 한꺼번에 요리할 수 있는 주방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유료로 진행된다. 이외에도 한식의 재료와 특징, 철학적 가치를 설명해 주는 한식전시관도 있고, 2층엔 관광안내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니 서울 여행에 필요한 정보나 지도도 구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귀찮을 땐 도서관이 최고다. 잘 살펴보면 집 가까이에 작은 도서관들이 많이 있다. 관악구에 있는 ‘용 꿈꾸는 도서관’은 늘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게 사람들로 붐빈다. 70석의 좌석에 1만7000여 권의 장서를 갖춘 작은 도서관은 이용자들로 가득하다. 관악구청 1층에 자리해 접근성이 좋은 데다가 카페 분위기의 인테리어 덕분에 어린아이에서 70~80대 시니어까지 여기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시원한 실내에서 하는 독서는 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준다. 아이스 커피 한잔 마시며 여행 에세이를 읽는 것도 폭염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니 집 가까운 곳에 작은 도서관이 있나 둘러보자.
폭염이 이어지며 사람들이 더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이럴 땐 집안에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더위를 피할 방법을 찾아보자. 관악산 계곡길을 걷거나 한식문화관을 찾아 한식을 즐기든, 가까운 작은 도서관에서 독서의 즐거움에 빠지든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 여름 무더위를 지혜롭게 이겨보면 어떨까.
]지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기억과 씨름을 해보니 필자가 기억하는 시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필자의 첫 기억을 떠올려봤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언니. 고모. 이모 그들이 모두 함께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의 담임 선생님도 기억할 수 있고 3. 4. 5. 6 학년의 선생님들도 기억 속에 있다. 그러나 2학년 때 선생님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없다. 딱히 기억되는 동무도 없다. 왜 유독 건너뛰는지 인간의 기억이 재미있다. 언젠가 기억이 자기 혼자 스스로 살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지. 이것이 치매 초기증상은 설마 아니겠지?
손이 귀한 집이었으나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은 필자의 남동생 하나밖에 없고 딸이 다섯이나 되었다. 맏딸과 바로 밑 남동생이 있었으니 둘째 딸 필자는 아무도 모르는 나름대로 출생 서열의 서러움이 종종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성격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혼자 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경쟁력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을 믿는 성격이 필자에게 있다면 이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짐작해 보기도 한다.
온종일 엄마는 시집살이에 너무 바쁘고 아버지는 정말 공평해서 저녁이면 남동생 빼놓고 언니와 필자만 양쪽 팔로 베게를 만들어 눕히고 우리와 함께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합창하였던 유년기 기억이 있다.
필자가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가수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 레코드판을 사오셨다. 정작 듣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전축이라는 기계 위에 한번 잠깐 올려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그걸 사오신 것도 필자는 의아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그냥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유행가 음악이나 감성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엄마 아버지 그들은 스스로 삶의 도구가 되어서 희로애락을 떠나서 그냥 사는 것처럼 어린 필자의 눈에 비쳤다.
지금의 필자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정서 한 가닥이 지금 필자의 정서 한가닥이 되어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 아버지 그들은 제3의 성에 속해 있는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된 필자가 아버지를 돌이켜보면 켭켭 시집살이 속에 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200% 따뜻한 남편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필자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버지 사후 10년 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사셨던 행복한 여자였었다.
1960년대 초반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나름 일찍 서울에 터전을 잡은 편이라 사춘기 시절 종로구에 있던 필자의 집은 취직 등의 이유로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 없이 밥상에 앉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모들도 시집을 다 갔지만 육 남매를 비롯한 우리 식구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늘 손님까지 있던 집을 필자는 정상인 줄 알았고 거기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었다.
전학을 와서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친구의 집으로 좀 일찍 갔을 때 필자는 소리 없이 놀랐다. 친구의 집은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가 어머니, 아버지, 동생과 친구 이렇게 네 사람이었고 그들은 식빵과 우유를 아침으로 먹고 있었다, 더구나 집에는 식탁이 있었고(필자는 이게 최고 부러웠다) 식탁 위 전등은 형광등이었다. 필자는 당시 형광등은 정말 부잣집에만 있는 것 인줄 알고 친구네 집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부잣집인 줄 알았다. 속으로 미국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이 집은 미국 같은 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의 집이 한없이 부러웠고 필자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집에 사람들 좀 못 오게 해. 우리도 식탁 사고 형광등도 달아. 그리고 아침을 양식으로 먹어.’ 이런 주문을 마구 하면서 날마다 졸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시고 식구가 많아서 아침을 그런 거로 먹을 수 없다고만 대답했다. 필자는 ‘그렇게 간단한 딸의 부탁을 엄마는 왜 못 들어주나’ 라고 생각하고 사춘기 심통을 마구 부렸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에서 오던 친척들이 점점 수가 줄면서 집을 수리하게 되자 동생과 필자가 함께 쓰는 방에 꼭 형광등도 달아 달라고 주문했는데 아버지는 집 전체 전등을 형광등으로 교체하고 어머니는 식탁도 샀다. 또 가끔은 양식(?)으로 아침도 차려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가족이라는 게 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특별히 인성교육을 강조해서 받은 기억은 없지만 여러 연령층이 함께하는 가족 집단에서 권리와 의무의 한계 같은 게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로 여기며 따뜻한 밥을 해 먹였던 어머니나 대식구를 거느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 삶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다.
집에는 빈약한 크기의 냉장고가 있긴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대식구의 냉장고의 역할을 하기나 했을까 싶다. 더운 여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참외와 토마토르 먹었는데 그들은 항상 그늘진 곳 빨간 고무 대야 수돗물에 동동 떠 있었다. 승용차나 대중교통 노선이 자유로웠던 시절도 아니고 배달이라는 것도 없었을 텐데 필자가 먹었던 그 많은 과일은 누구의 손에 들려서 집에까지 왔는지.
또 있다. 여름 방학이면 식구 단체로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곤 했다. 필자는 해바라기 비슷한 정체 모를 꽃이 마구 달린 비닐 수영 모자까지 갖추고 갔다. 딸이 필자 하나도 아니었을 텐데 식구 전체가 해수욕을 가기 위해 혼자 걸어서 동대문시장을 왔다 갔다 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만리포 숙소로 가기 위해 식구들은 지난한 투쟁을 감수해야 했다. 우선 새벽같이 단체로 시외버스에 올라 인천까지 간 뒤 인천에서 만리포로 가는 여객선을 4시간 이상을 타야 했다. 이뿐 아니다. 여객선이 바다에서 육지가 가까워져 올 때쯤 다시 나룻배를 갈아타고 해변에 내려서 직사광선 아래 모래밭을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그놈의 숙소를 만날 수 있다. 와중에 누군가 심지어 석유풍로라는 것까지 들고 갔던 것 같다. 도착하는 즉시 엄마는 석유풍로에 불을 피워 닭백숙 같은 걸 마구 끓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피서였는지, 피난이었는지 구분 안 되는 행렬이었지만 정말 오랫동안 이 풍경을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 돌아가고 지금의 필자 나이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이 낯설고 친구도 없는 할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는 야사로 된 ‘야담전집’을 사드렸다. 할머니가 요새 살아있었으면 아마 박사가 되시지 않았을까? 이런 전집류는 표지가 거의 딱딱한 하드보드로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들기도 쉽지 않은 이런 책을 밤낮없이 읽었다. 덕분에 필자는 할머니로부터 영창대군과 단종,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 영창과 단종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어린 필자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눈물 쏟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한 단계 더욱 수준을 높여 삼국지까지 읽어서 유비, 장비, 관우, 조자룡과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또한 외울 때까지 들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집안에서 최대로 할머니와 멀리 있을 수 있을까가 필자의 최대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에게 정말 많이 고마워하고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셨다면 그리스 신화도 읽으시지 않았을까? 참고로 필자의 할머니는 1900년 이전에 태어나신 무학의 19세기이었고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셨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옛날 대구 삼덕동 재판소에 근무하셨던 당시의 법조인이라고 하셨다.
종로구 정든 집에서 15년 정도를 살다가 필자의 집은 강남이 시작될 즘에 아버지가 논현동에 주택을 지으시고 식구를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셨다. 말이 논현동이지 1974년도 필자의 집이 이사할 즈음 대중교통은 남산 순환도로를 돌고 돌아 제3한강교 (현 한남대교)를 건너서 신사동으로 진입하는 좌석버스와 서초동 칠성사이다 앞으로 오는 말죽거리행 시내버스가 전부였다. 사대문 안이 서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양재동은 참으로 머나먼 곳이었다. 버스가 한남대교를 지나 신사동으로 들어서면 아무 건물도,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어서 해가 지면 사방이 어두워서 잘못 내리면 집 찾아가기도 어려웠다. 특히 방심해서 내릴 정류장을 놓쳐 말죽거리까지 가서 남동생이 말죽거리까지 데리러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집에서 얼마 살지 않고 결혼을 해서 그 동네를 탈출하여 미국에 갔었지만 그때 그 동네 풍경은 지금의 강남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그리운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밤하늘 번쩍였던 신사동 후지필름 네온사인 불빛을 보고 ‘여기가 라스베이거스인가’ 라고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꿈에 부풀어 이사하였던 그 당시 한 벌판에 서 있던 양옥집이라는 곳은 때맞춰 시작된 유류파동으로 방 하나에 보일러를 켜고 모든 식구가 모여 있어야 하고 화장실은 샤워는커녕 세수하기에도 추웠다. 유류파동이 아니더라도 하루가 멀다고 고장 나는 당시의 보일러는 집과 마음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이 집은 필자 상상 속에 존재했던 양옥집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은 종로에 있었던 개조한 한옥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꾸어 왔던 따뜻한 평화를 깨트릴 수도 있는 집이었다.
다만 1대뿐인 TV와 전화기 등의 문화기기가 집결되어 있었던 안방은 재미있었다. 식구 모두의 모든 문화생활이 한곳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전화 대화는 자동으로 누군가에게 검열을 받아야 하는 씨스템이였으며 그 검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고 가질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써늘한 이층집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60세가 갓 된 재미있는 여동생의 이야기. 당시 최헌 가수의 ‘당신은 몰라’라는 노래가 있었다. 가라오케 노래방도 없었던 시절에 동생은 모나미 볼펜을 마이크 삼아 이 층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자기 흥에 이 노래를 매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저래?’ 하다가 나중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썰렁했던 집에서 썰렁하기만 했던 필자보다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며 가족의 몫을 해 줬다.
이렇게 함께 살아왔던 필자의 형제들은 지금 다 제각기 바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같은 환경에서 육 남매가 살아왔는데 지금은 각자의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달라서 타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건 바로 밑 남동생은 간경화로 투병 중이어서 일 년에 두세 번씩 입원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중요했던 집에서 그래도 아들만 둘을 두어서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자기 몫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를 동생이 누렸으면 좋겠다. 필자는 필자의 자식들이 더 독립체가 될 때쯤에 기회가 되면 그들과의 생활로 이런 에피소드를 엮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
지금까지 여름에는 아들·딸 가족과 함께 가족여행을 갔었다. 하지만 쌍둥이 손주가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각자의 업무일정과 아이들의 방학을 다 맞출 수 없어, 여러 날 다녔던 장거리 여행은 꿈도 꾸기 어렵게 되었다.
방학 동안 여행커녕 오히려 손주들을 보살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3가족 9식구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일정을 맞추기 매우 어렵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해결책은 주말을 이용하여, 가까운 곳으로 ‘작은 여행’을 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같이 다녔던 ‘큰 여행’을 아들·딸 가족이 각각 재미있게 즐기도록 쪼개기로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해외, 장거리 여행이 아닌 작은 여행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3가족 9식구는 토요일 아침 멀지 않는 산으로 들어갔다. 이맘때가 되면 항상 교통체증으로 불편하지만, 일찍 서두르면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세 손주는 계곡에서 물놀이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수십 년 전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녔던 여름여행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부쩍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또래끼리 놀기 바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피서를 충분하게 느꼈다.
물놀이 덕분에 입이 짧은 아이들도 음식을 즐겨 먹었다. 보는 것으로 배가 불렀다. 오후 숙소에서는 한 가방씩 가득 채워 온 장난감 놀이에 정신이 없다. 세 녀석들! 방 하나를 차지하고 깔깔대면서 즐겁게 놀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던 것이 좋았다.
저녁 노래방은 아이들 차지였다. 마이크는 어른들 손에 돌아오지 않았다. 노래자랑을 시켰더니 ‘곰 세 마리’부터 교가까지 목청을 높였다. 즐거워하는 모습에 입이 귀에 붙는다. 손주들의 또래문화를 위하여도 ‘여행분가’는 잘 선택한 일이다.
경험자들은 “이 대목에서 시니어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전혀 문제가 없다. 자녀를 출가시키고 분가하였던 것처럼 ‘성장과정’인 것이다. 그들과 잘 어울리도록 노력하면 해결된다.
“아들 가족아 딸 가족아! 너희 일정이 바쁘고, 아이들의 학교생활도 충분히 이해한다. 예년처럼 큰 여행 함께 못한 것을 서운하게 생각마라. 오늘 큰 가족 작은 여행 매우 즐거웠다!”
바닷가로 떠나는 피서도 좋지만 모래알처럼 수많은 휴가객이 몰려 있을 백사장 광경을 떠올리면 어질어질해진다. 평온한 파라다이스를 원한다면 좀 더 여유롭고 편리한 호텔 수영장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시원한 물놀이와 함께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호텔 수영장을 소개한다.
◇ 서울신라호텔 ‘어번 아일랜드’
서울신라호텔 ‘어번 아일랜드(Urban Island)’에서는 수영과 태닝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숲과 남산으로 둘러싸인 어번 아일랜드는 해외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럭셔리 카바나(cabana: 수영장 내에 있는 호텔 객실)를 운영한다. 이번 여름에 선보이는 ‘얼리 서머 에피소드 II’ 패키지를 이용하면 비즈니스 디럭스 객실 1박, 어번 아일랜드 2인 입장권, 고급 생맥주 2잔, 실내 피트니스 및 실내 수영장 이용 2인 등을 즐길 수 있다.
요금 33만원, 7월 15일까지, 문의 02-2230-3310,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202
◇ 롯데호텔제주 ‘스파&가든 해온(海溫)’
따뜻한 바다[海溫]라는 뜻을 지닌 롯데호텔제주의 ‘스파&가든 해온’은 제주의 온화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자쿠지(Jacuzzi:기포가 나오는 욕조 브랜드)에서 따뜻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어린이용 수영장 근처에 식사 공간이 있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맛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요금 1회 15만원(5~10월), 문의 064-731-4296,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로 72번길 35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오아시스’
반얀트리 클럽 회원과 호텔 객실 투숙객에게만 개방하는 야외수영장 ‘오아시스’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이번 여름에 출시한 ‘서머 인 오아시스 패키지’를 이용하면 오아시스 무료입장, 호텔 내 업장 할인 쿠폰북 제공과 더불어 다이닝 라운지 조식 뷔페, 실내 수영장 및 피트니스, 오아시스 아쿠아 바 칵테일 또는 청량음료를 즐길 수 있다(각 2인 제공).
반얀룸 1박 기준 54만원부터, 9월 9일까지, 문의 02-2250-8074,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60
◇ 롯데호텔서울 실내 수영장
바다와 요트를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남산 일대 경치를 볼 수 있는데, 특히 해가 지고 난 뒤의 야경이 아름답다.
회원 및 호텔 투숙객 이용 가능, 문의 02-317-7313, 서울시 중구 을지로 30
◇ 파크하얏트서울 실내 수영장
수영장이 호텔 24층에 있어 시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영장은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인피니티 풀 형식으로 제작돼 물이 도심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듯하다.
파크클럽 연간 회원, 호텔 투숙객, 스파 고객 이용 가능, 문의 02-2016-1176,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606
우리 말에 부모 팔아 친구 산다고도 한다. 친구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학력은 친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자라는 아이들이 사람보다 기계를 더 가까이 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이 사람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올까봐 신생아 때부터 빠르면 임신 중에도 태아의 친구를 만들어 주는 태교를 하거나 플랜을 만드는 것을 불 수 있다. 주말에 또래의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모여 아이를 위한 노래를 함께 듣는다. 아이가 이해 할런지 아닌지 모르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는다.
확실히 시대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육아다.
부모의 영향을 떠나 스스로가 만드는 세상인 첫 친구는 언제 만들어질까?
인격이 부모로부터 분열되어 하나의 개체로 성장하려는 사춘기가 아닌가 한다. 중2 정도에서부터 고 1동안에 친구와 순애보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현상이 나타나고 친구만들기에 부모라도 파는 성의가 있다.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학교생활에서도 기회만 되면 소곤소곤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님에도 누가 들을 까봐 조심하는 모양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과 후 귀가 할 때면 서로 먼저 바래다 준다며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을 오가다가 해가 지고 거뭇거뭇 땅거미가 피어날 때라야 두 집 의 가운데 지점에서 헤여지곤했다.
필자가 고 3이었을 때다 반의 다른 아이, 친구와 이웃에 사는 아이로부터 친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필자에게는 우리 둘만의 세계 외에 그 친구가 다른 세상을 가졌다는 것으로도 정신 못 차릴 만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필자에게 비밀로 했다? 이건 필자를 지옥구덩이에 빠트리는 배신이다.
하루 밤을 그 사건을 씹고 또 씹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밤새워 생각하여도 생각은 그냥 체바퀴를 돌 뿐 어떤 결말이 나거나 필자 행동이 결정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씩 더 그 친구에 대한 분노의 이름들만 쌓여갔다. 그 새벽에는 그 애가 내가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정서부족으로 판단한 것도 분했다. 이성친구를 갖는 행동에 대하여 몰이해 할 만큼 용기없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도 용서할 수 없다 기나 긴 대화로 서로의 속사람을 뒤집어 보이면서 나의 풍부한 이해심, 독서로 얻은 더 넓은 인간의 이해와 이성간의 낭만, 멋진 인생을 추구하려는 용기도 있다. 누구보다 특별한 관계를 응원할 사람이니 필자에게만 남자친구관계를 이야기 하고 의논도 하고 낭만의 순간들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만 같았다.
마침 겨울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함께 포항행 열차를 탔다. 포항의 해변에는 겨울의 썰렁함과 사람이 없어 파도가 외롬을 호소하는 듯 우렁찼다. 모래밭에는 아직도 여름 피서객들이 버려둔 쓰레기가 뒹굴었다. 쓰레기는 파도와 바람이 실어다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푸르름, 바다냄새 넓은 가슴, 파도소리들이 이미 두 사람의 영혼에 들어왔다 친구의 남자친구는 너무도 쉽게 필자의 열열한 환영과 응원을 받았
상고대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대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로 변한 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것을 말한다. 밤새 내린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피었다는 의미에서 ′수상′ 또는 ′나무서리′라고도 한다. 우연한 기회에 잠시 만났던 상고대의 장관을 감상하면서 올 여름 무더위를 이겨보자.
경기 남양주군에 있는 군립공원 천마산(812m)에는 상고대가 엄청 크게 자랐다. 전날 녹아내리다가 밤에는 고드름으로 변하여 솜사탕처럼 매달려 있다.
수많은 등산객의 발길로 반질거리던 북한산 백운대(836m)가 두툼한 솜이불을 덮었다. 백운산장까지 눈이 녹아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상고대다. 평소 줄을 서서 오르내리던 등산로는 사람의 발길이 멈추었다. 겨우 등산객 한분 만나서 사진 한 장 남기고 하산을 서둘렀다. 내려오다가 뒤돌아보니 정상을 감쌌던 서리 이불은 온데간데없었다.
건너편 인수봉(811m)은 지나가는 짙은 안개 위에 솟았다가 가라앉는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멋있는 유람선을 타고 대양을 가로지르는 환상에 젖어보았다. “기다리자. 복스럽게 내린 눈이 내년의 풍년을 부른다는데!”
봄, 여름, 가을 암벽 등반가들이 북적거렸던 인수봉!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광경에 경외감이 들었다.
경기 연천군에 있는 고대산(832m)은 북 쪽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를 관망하고 있다. 경원선 신탄리역까지 기차여행이 재미있는 곳이다. 뜨끈한 커피 한잔으로 추위를 달랬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오르자 온산에 있던 상고대가 이불이 걷히듯 잠깐 사이에 사라져가는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눈이 많이 내렸던 몇 년 전 겨울에 이 친구들을 만났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상고대! 올 여름 더위를 이겨낼 마음의 선물이다.
한여름 피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물이다. 물속에 온몸을 담그면 더위 따위는 쉽게 잊을 수 있다. 여기에 더위를 피하며 건강까지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는 방법이 바로 수중 운동이다. 수중 운동이라고 해서 수영만 떠올린다면 곤란하다. 태생이 맥주병 체질이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양한 운동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의사들이 꼽는 시니어들에 가장 좋은 음식은 없다. 늘 한결같이, 재미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바로 균형있는 식사와 적절한 운동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은 어떨까? 음식과 달리 정답이 있다. 많은 의사가 시니어에게 좋은 운동으로 수영을 권한다. 특히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수영을 가장 이상적인 운동이라고 추천한다.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 정형외과의 신성일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체중은 특히 무릎과 같은 관절에 악영향을 주고, 그 관절의 이상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지면 체중은 더욱 불어나고, 그 불어난 체중은 관절에 다시 더 나쁜 영향을 줍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니어들은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이를 ‘비체중부하운동’이라고 불러요. 즉 체중에 부담을 주지 않는 운동, 전신운동이 되고,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영이 제일 좋습니다.”
실제로 각 수영 교실에선 네 가지 영법, 즉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을 가르치는 과정 이외에도 시니어들 대상의 재활운동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수영을 교육하고 있는 문여송 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장에 있으면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적잖이 오시는데, 그중에는 어깨나 허리, 무릎에 이상이 있거나, 의사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하시는 분도 꽤 있습니다. 이렇게 오는 분들은 상담을 통해 수준에 맞는 수영 교실에 배치하기도 하고, 아쿠아로빅과 같은 재활에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권하기도 합니다.”
현장에 있다 보니, 수영의 효험을 본 극적인 사례들도 적지 않다. 체중 감량을 통해 예전의 몸매를 되찾거나, 아픈 관절이 낫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분은 허리 수술을 하고 온 분이었어요. 처음에는 발차기하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나중에는 의사들이 주의시키는 접영까지 소화할 수 있게 됐죠. 물론 무턱대고 하는 건 아니고 부상 부위에 맞게 맞춤 지도가 따라야 합니다. 체중 감량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식사 조절이 동반되어야 하고요.”
아쿠아로빅은 전통적인 수영 이외에 시니어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수중 운동이다. 물속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에어로빅으로 보면 되는데, 특성상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시니어에게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수영을 못 해도 할 수 있는 수중운동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예 재활전문의 프로그램을 도입한 수영장들도 있다. KBS 스포츠월드가 대표적인 곳 중 하나. 이곳은 수중 전용 운동기구를 도입해서,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체계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아쿠아테크’ 교실을 운영 중이다.
부력 장비를 이용해 깊은 수심을 활용한 운동을 하거나, 덤벨이나 밸런스 링을 활용해 무리를 주지 않는 근력운동을 하는 것이 이곳의 특징이다.
최근 프랑스 등 유럽이나 일본,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에서는 ‘아쿠아바이크’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말 그대로 물속에 운동용 자전거를 가져다 놓고 페달을 밟으면서 상체를 움직이는 운동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선 일부 클럽을 통해 소개가 시작된 상태다.
아무래도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교육받는 공립 수영장이 부담스럽다면 사설 수영장을 선택하면 된다. 현재 강남 스포월드에서 회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심민 전 아테네올림픽 수영 국가대표 수석코치는 “사설 수영장이 아무래도 편의시설이나 수질관리 같은 면에서 공립 수영장보다 유리한 게 사실이죠. 시에서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수질검사 결과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요. 운동 후 몸을 풀어줄 수 있는 스파시설도 시니어들이 선호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그는 몸 상태에 따라서는 개별 교육이 중요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영법이라도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부담을 줄 수도, 질환이 개선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자유형이라고 해도 어깨 회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관절에 주는 부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속도를 내기 위한 수영과 재활을 위한 수영은 달라야 해요. 그래서 본인의 몸 상태에 맞는 교육기관을 선택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현장의 관계자들은 수영은 절대 어려운 운동이 아니며, 상담을 통해 불필요한 공포나 불안요소를 날려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 올여름 몇 시간의 투자를 통해, 건강 회복과 함께 새로운 취미 하나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