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찍는다”는 말의 의미는 붕어빵 구워내듯 한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같은 크기의 벽돌을 만들어낼 때도 찍어낸다 한다. 현실의 물체, 즉 피사체를 그대로 담아낸다고 하여 사진을 찍는다고 말하는지 모른다. 복사하듯 한다 하여 서양에서 출발한 사진이 한자어를 사용하는 동양에 들어오면서 사물을 그대로 베낀다고 여겨 寫眞이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았을까? 사진은 찍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과연 사진은 찍는 것일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화가가 붓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듯이 사진 역시 붓 대신에 카메라를 손에 들고 물감 대신에 빛을 활용하여 그리는 그림이 아닐까? 우리가 사진이라고 번역한 영어는 “Photograph”로 빛의 의미인 “Photo’와 그린다는 의미의 “Graph”의 합성어다. 빛그림이 사진인 셈이다. 판박이처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의 한 분야다. “Picture”라 하여 사진을 그림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광의의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을 카메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2016년 7월 25일 서울시청 다목적 홀에서 열린 “The Senior 2016”(사단법인 은퇴연금협회, 머니투데이 방송 주최)에 초대받아 전시한 나의 사진전시회 주제를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으로 정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사진에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고 보기에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 부르고 나를 포토스토리텔러라고 자칭한다. 대체로 우리는 카메라와 빛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다. 카메라 사용자의 편의를 위하여 제조사에서 손쉬운 촬영법을 장착하고 있다. 셔터만 누르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침팬지도 사진을 찍는다. 특히 스마트폰에 카메라 기능이 장착되고 그 기능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진을 찍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진의 대중화를 열었다. 필름을 사용할 때에는 필름 값이 만만치 않아 쉽사리 셔터를 누르지 못하였다. 디지털화한 오늘날에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찍었다 삭제하면 되기에 예전보다 사진이 양산되고 있다.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누른다.
지금은 전쟁터에서 자동기관총을 쏘아대듯이 카메라나 스마트폰의 카메라 장치의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댄다. 오래전에 “존 시스템”이라는 노출 농도 10단계를 창안한 미국 근대 사진작가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가 이렇게 경고했는지 모른다.
“멋진 사진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 아래 수많은 네거티브를 만들어내며 자동기관총을 쏘아대듯이 사진을 찍어댄다면 심각한 결과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작품을 위해서는 찍는다(Take)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항상 만든다(Make)는 생각을 해라.”
사진작가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에 이런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한 장 건졌어!” “대충 여러 장을 찍다 보니 운 좋게 작품 한 장이 찍혔지 뭐야!”라 풀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듯 신중하지 못하게 촬영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찍은 셈이다. 안셀 아담스의 이야기는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라 할 수 있다. 寫眞을 “빛그림”으로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듯 접근한다면 사진은 달라질 것이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구도, 배경, 주제와 부제의 배치, 조리개의 선택, 없애야 할 부분 등을 생각한다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지 싶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요즘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동네친구를 만나거나 온라인 커뮤니티 모임 분들과 몇 달에 한번이라도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는 일이 더 많다. 경제적으로 뭔가 도움이 되어서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회비내면서 참석하게 된다. 나이 들어가면서 온라인 활동과 오프라인 모임을 연결하여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온라인단체에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먼저 알게 된 내용이 있으면 사진과 동영상으로 올리고 글을 쓰면 반응이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댓글도 오고가면서 소통한 사이여서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게 되어도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하다.
글을 써서 비용까지 되는 일도 있지만 그냥 소통이 좋아 더 아름답게 사진 찍고, 동영상도 올리면서 돈되는일도 아닌데 더 나은 글을 쓰려고 노력해서 글을 완성한다. 필자가 쓴 글에 환호하고 좋아요를 누른 사람, 댓글까지 달아준 사람,심지어 공유까지 해서 퍼가지고 간 사람을 보면서 좀 더 좋은 컨텐츠를 생산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이글이 잡지에도 기재될지 모르지만 인터넷검색으로 브라보마이라이프페이지에서 이 글을 읽는 분이라면 이미 다양한 커뮤니티활동을 이미 다양하게 하고 계실 것이다.
필자가 속한 온갖 온라인 카페나 아지트, 클럽이라고 이름지어진 커뮤니티가 있지만 그중에 10년간 활동한 영화동호회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여 온라인에서 만나다 오프모임에서 한두 달에 한번 꾸준히 국내외고전영화를 본적이 있다. 상품이 없어도 영화퀴즈를 하는 시간이 정해지면 5분에서 10분 사이에 댓글이 회원들 각자 있는 곳에서 댓글을 달아서 금방 100개도 넘는다. 매니저를 비롯한 회원들이 희귀영화를 고르고 선택하여 회원 중에 번역할 능력이 되는 분은 번역도 하여 자막도 넣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함께 볼 장소를 골라 예약을 하여 공지하고 함께 희귀필름을 보고 함께 공감한 내용과 뜻을 달리하는 내용을 뒤풀이에서 식사하며 이야기 나눈지 벌써 10년이다.
가끔은 발이 넓은 매니저가 국내영화감독중에 유명영화감독님이나 영화배우를 초대한다. 아지트 같은 카페라 아무에게도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하고 힐링하고 오는 모임이다. 카페 매니저가 영화전문가이면서 직접 회원들을 이끌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윤정희라는 대배우의 40주년행사도 우리 모임에서 해드릴 정도로 국내외 올드시네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나이대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하다. 영화라는 주제로 함께 모이고 이야기가 통하는 모임 갔다온 날은 힐링센터를 돈 내고 다녀온 것 보다 더 개운하고 맘이 기분 좋은 기운으로 풍성하다.
올해 배우 윤정희님 50주년행사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들어가는길에 건전한 에너지를 주는 어떤 내용하나로 함께 뭉치는 모임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올드시네여 영원하라!
몽골은 봄이 아주 늦게 시작된다. 이토록 어렵게 온 봄인데도 그 기간이 아주 짧다. 그래서 이때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안부보다 꽃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 “진달래가 어느 길목에 모여 피었다던데 보셨나요?” “보라색 할미꽃은 자이산 기슭에 있어요.” “거기엔 에델바이스가 한창 올라오던데 비가 한 번 더 내려주었으면 좋겠어요.”
거의 8개월의 거친 바람과 추위 속에서 피어난 꽃인지라 같은 진달래인데도 꽃잎은 더 작고 빛깔은 곱고, 그리고 향기는 더 진하다. 집 앞마당에도 오종종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저 잡초라 해도, 힘들게 심은 잔디를 밀어내고 쭈삣 삐져나온 민들레라고 해도 그것을 뽑아 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노란 꽃이 지고 만들어낸 화관의 민들레다.
사진을 시작할 땐 내가 본 것을 필름에 담아 내려 하였는데 이젠 내 맨눈으로 볼 수 없었던 세상의 많은 것을 뷰 파인더를 통해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비법을 터득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렌즈의 기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나누려 꺼낸 말이다. 우리의 눈과 동물들의 눈을 서로 연결해 비교해 보면 이해가 한결 쉬워진다.
사진은 1839년 니엡스와 다게레오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나 그 전에도 사진기는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위시한 많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데 이미 사진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사진기에는 렌즈가 없었다. 사진기에 렌즈를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1569년경 다니엘 바르바로가 바늘구멍을 렌즈로 대치해 보다 선명한 상을 얻었다는 기록을 보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은 렌즈 없이 단순한 구멍을 이용해 빛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기 몸에 이 렌즈를 두 개씩이나 갖고 태어나 날마다, 시간마다 사용하며 살아왔다. 바로 우리의 눈이 놀라운 렌즈라는 것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더구나 이 눈이라는 렌즈는 사람만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동물들도 이 렌즈를 우리처럼 갖고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눈들의 성능이 동물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살아가는 초식동물은 두 눈의 간격이 넓은데 어떤 동물은 눈이 머리의 양쪽 면에 각각 따로 달려 있다. 이런 눈으로는 사물을 심도 있게 보기 어렵지만, 넓은 범위를 볼 수 있으므로 포식자를 찾아내는 데 유리하다. 초식동물은 먹이가 초원이나 숲에 널려 있는 풀과 열매이기 때문에 심도 있는 지각이 별 필요가 없다. 이런 눈으로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다면, 광각렌즈로 사진을 찍어 보면 알 수 있다. 광각렌즈는 초식동물의 눈처럼 초점거리는 짧지만 넓은 범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렌즈이기 때문이다.
반면 육식동물의 눈은 얼굴 전면을 향해 있으며 두 눈이 가까이 붙어 있다. 덕분에 시야는 좁지만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육식동물의 경우 먹이사슬의 위쪽에 위치해 있어, 잡혀먹힐 일을 걱정하기보다 먹을 것을 구할 일을 더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은 이 눈으로 자신의 먹잇감이 도망칠 때 더 빨리, 더 끈질기게 쫓을 수 있다.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보면 멀리 있는 것이 또렷하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인간의 눈은 어떨까? 인간의 눈은 초식동물처럼 넓은 범위를 보거나 육식동물처럼 멀리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세히 볼 수 있다. 또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보는 순간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한다. 이를 심리학에선 ‘인지’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환경 속의 자극정보를 지각함으로써 알아채고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기억되며, 심지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된다. 특별히 아름다움을 잘 보고 생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독특한 각도의 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가령 민들레를 보자. 봄 여름에 단아한 꽃을 피우며 아름다움을 뽐내던 민들레도 계절이 바뀌면 죽음을 맞을 운명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꼭 절망, 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생각하는 사람의 카메라에는 민들레가 남기는 마지막 유산인 씨앗이 담긴다. 민들레의 씨앗은 작은 희망이다. 바람이 불면 가벼운 몸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다음 해 봄의 들판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똑같은 민들레라도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담고 있다. 현실은 메마른 땅이고 전쟁터이며 굶주림이지만, 메마른 땅에도 꽃은 피고 전쟁 속에도 평화가 있으며 굶주림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찾고 나누는 예술작업을 사진으로 하면서 맨눈으로는 보기 어려운,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날 기회가 그만큼 더 많아졌다.
사진 작업을 하며 나는 종종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1823~1915)를 떠올린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찾는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1897년에 시리즈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책의 독자는 과학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많은 독자를 확보한 이 책은 과학서의 범위를 뛰어넘어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파브르는 집요한 관찰을 통해서, 곁에 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지내던 세계를 보여주었다.
나도 누구도 상상 못했을 세계를 찾아다닌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도구는 자그마한 ‘어둠상자’다. 사람들이 카메라라고 부르는 그것에 빛이 모이고 숨어 있던 아름다운 상(像)이 맺히자, 나는 그 모습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마치 파브르가 곤충들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던 것처럼.
어둠상자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우리 짐작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어두운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반대편 벽에 밖의 사물을 비춘다.”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50년
“작은 구멍으로 통한 빛은 거꾸로 벽에 비친다.” -동양의 책자, 기원전 1500년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ume 4, 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Part 1, Physics. Taipei: Caves Books Ltd. Page 82. - Needham, Joseph.
사람들이 일부러 연구하고 공부해서 어둠상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마주치게 된다. 그 운명이 나에게는 1960년 봄에 찾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가는 길에 문방구 앞 구멍가게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가게의 양철 덧문에 난 못 구멍을 뚫고, 한 줄기 빛이 꽂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내 등 뒤의 회벽에 위아래가 바뀐 상을 만들어냈다. 사운드까지 또박또박 들리는 동영상 컬러였다. 다만 소리는 오른편으로 지나갔는데 영상은 그 반대였다. 방향이 엇갈렸다. 뾰족구두를 신고 또박또박 걷는 빨간 원피스는 내 기억 깊숙이 저장되었다. 단순한 저장이 아니었다. 각인이었다. 결국 삼십 년이 지나서, 그 빛이 내 삶에 새 길을 열어주었다. 마흔을 넘은 나를 카메라에게 인도해준 것이다.
서양에서 어둠상자를 ‘카메라 옵스쿠라’라고 명명했다. 어두운 방의 지붕이나 벽 등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반대쪽의 하얀 벽이나 막에 옥외의 실상을 거꾸로 담아내는 장치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그 속이 칠흑같이 어두운 방이라 해서 ‘칠실파려안(漆室坡黎眼)’이라 불렀다. 카메라를 만나기 전의 내 인생이 바로 그랬던 것 같다.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깜깜했으니까.
사진은 사실 허상이다. 현실 세계의 그림자, 또는 바늘구멍이 만들어내는 일루전(illusion), 환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로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힘이 있다. 아름다운 사진에 즐거워하고,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사진 한 장에 눈물 흘리며, 마음을 열기도 한다.
이처럼 허상을 가지고 실체인 세상과 사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사진은 예술로서의 덕목을 지녔다. 이것이 사진의 가치이자, 내가 사진을 하는 이유다. 보통 카메라는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을 필름에 찍어내지만, 나의 작업은 그 이미지 뒤에 있는 다차원의 현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빛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길이 사진에 있다. 나는 그런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즉 인문학의 한 길이 사진에도 있는 것이다.
파브르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곤충의 세계를 탐험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카메라 렌즈를 통해 찾아 나서게 하고 싶다. 굳이 산이나 위험한 곳, 신비로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우리 주위의 익숙함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카메라가 필수품이 된 시대에, 기계적으로 사진을 찍기보다 자기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도구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카메라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이 열리고 또 다른 눈을 뜨기 바라는 꿈이 내게 있다.
함께 사진을 공부하는 이들과 빼놓지 않고 촬영해온 풍광 중 하나가 밤하늘이다. 밤하늘을 촬영하러 나가기 전에 나누는 얘기가 있다.
“밤하늘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나요?”
“깜깜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밤에 사진 촬영을 나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죠. 보이는 게 없는데 뭘 담을 수 있겠어요?”
맨눈으로 보면 밤하늘은 확실히 깜깜하다. 그런데 정말 깜깜하기만 할까?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며 보는 것의 정확함을 역설했지만, 사진을 하다 보니 이런 경우 내 눈이 본다는 것이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사진작업을 해보면 밤하늘이 결코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깜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진기에 있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장치의 도움으로 우리의 맨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색까지 드러내주어 우리의 선입견을 바꾸고 생각을 넓혀주는 것이 사진으로 세상에 할 또 다른 하나의 얘기이다.
카메라와 우리의 눈은 어떤 색이라도 빛이 넘치면 흰색에 가깝게 색이 바래지고, 반대로 빛이 모자라면 어떤 색이라도 희박해지고 어두워져 검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원리를 통해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를 조작함으로써 필름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빛을 모으는 일이 노출 작업이다. 우리 눈에 어둡고 깜깜해 보이는 밤하늘도 조리개를 열고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하면서 빛을 모으면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필름에 드러난다. 카메라를 통해 보기 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던 세상이다. 우리 눈이 세상의 기준이 아닐 뿐 아니라,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무비보다 스틸이 더 빛에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눈에 깜깜하기만 한 밤하늘이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사진에 나타난 밤하늘은 온통 신비한 빛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과 연결된 빛이 아니라, 조금의 이음새도 없이 섬세한 색의 퍼짐으로 만들어진 여러 색이 모인 또 다른 무지갯빛이다. 칠흑 같은 밤이 대체로 절망과 무서움을 상징한다면, 빛은 희망과 약속의 상징이다.
살다 보면 누구라도 밤하늘처럼 깜깜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절망이나 불확실성과 마주하면 우리는 그 순간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방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애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내 눈에 보이는 현실,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확실한 절망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스틸사진으로도 얘기하고 싶다.
사람의 눈에는 어두워 분명히 캄캄하게 보이는 저 하늘의 빛을 내 머리 속에 모아서 찬찬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에 분명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 내겐 꽤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어둠 뒤에 숨겨진 무지갯빛을 우리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열어 주었다.
이런 밤하늘의 사진 역시 빛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는 사진작업을 할 때마다 사진은 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필름이 캔버스(화폭)이고 셔터와 조리개가 붓인데 보통 우리가 아는 붓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란 붓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조절함으로써 필름에는 아주 다양한 그림이 나타난다. 빛의 양을 자신의 의도대로 잘 조절하는 것이 그림을 잘 그리는 첫 번째 방법이다. 그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사람의 눈과 같은 것을 사진기도 보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진기는 우리의 눈을 확장해주는 도구가 된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는 사진기를 조작하고 마지막에 셔터를 누르는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사진기는 온전히 사람의 의도를 담아내는 장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의도한 것 너머의 것이 사진에 담길 때가 있었다. 그때에도 사진은 빛에 숨겨진 다른 능력을 발휘해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해준다. 까맣게만 보이는 밤하늘에 숨겨져 있던 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거기에는 내가 의도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비록 그 과정을 사람이 조작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펼쳐내는 세상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계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진가로서의 나의 시각은 그러한 맨눈으로 보아왔던 세계를 보기 전과 후로 구별된다. 내 안의 선입견이 쨍하고 깨지는 순간이다.
사진도 역시 내 생각을 깨뜨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나를 바꾸어 주는 과정이다.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글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전쟁이 났다. 양친이 이혼한 뒤였고 엄마는 나를 이끌고 피난행 열차를 탔다. 엄마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여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전쟁 기간에 통역관을 지냈다던 것도 믿지 않았는데 성장한 뒤에 만난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준 아버지의 사진, 미군과 찍은 것들을 보고 그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피난 열차가 오산에서 쉴 때 엄마가 나를 개울로 데려가 몸을 씻겨주었다. 그때 기차가 폭발했다. 오지리 폭격기가 위치 오착으로 폭격했다는 것은 엄마의 얘기와 기록에서 확인했다. 엄마와 나는 몇 날 며칠 걸어서 경주, 외가로 갔는데 걸으면서 잤던 기억, 자느라 엄마를 놓쳐 울고불고했던 일, 원두막에서 참외를 훔쳐 먹던 일들이 지금도 흐린 필름처럼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그날로 떠났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나는 밤새껏 울었고 외삼촌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업고 달래주었다. 큰외삼촌은 나보다 14세, 막내 삼촌은 10세가 많았다. 그들은 나의 어버이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공부를 잘하고 시를 쓰던 막내 삼촌은 공일이면 새를 보면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그가 모은 책들을 나에게 전수했으나 이사가 잦았던 나는 수년 전 그 책들을 정리하고 말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전쟁이 난 다음 해,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 나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두 번 낙제를 했다. 입학 당시 내 동기로 14세 소녀도 있었다. 최초로 본 활동사진은 아홉 살 때 동사(洞社) 마당에서 본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낫을 쳐들던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던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57년, 부산 동래온천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춘 박사가 돌아가셨을 때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운구를 하고 온천장을 한 바퀴 돌았고 그때 행렬을 따라다녔던 것은 그분이 훌륭한 육종학자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관을 멘 오빠들이 잘 생기고 멋있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사회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댁은 동래였고 나는 종점인 온천장이라 가끔 같은 전차를 타기도 했다. 어느 날, 반 아이들과 어울려 선생님 집엘 갔는데 딸이 넷이었다. 나는 대뜸 “기생을 맞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학생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살던 온천장엔 권번이 있었고 세 살던 집 다른 방에도 기생들이 살아 첩이나 씨받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아들을 낳아 대접받는 기생들이 생각나서 그렇게 지껄인 것인데 선생님은 내 저능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면 못쓴다”고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는 확실히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시험기간 동안 생물시험지 뒷장에는 또 만화 라이파이 여주인공 제비를 그려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생물 선생님은 나의 정신 감정을 주장했고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못생긴 데다 공부도 못하는 나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두둔하고 또 챙기셨을까?
중3 때, 5·16 군사 정변이 터졌다. 중2 때 담임,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교직원노동조합)원으로 잡혀가셨다. 잡혀가신 선생님들이 부산에서만도 수백 명이라 했고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은 서면에 있는 태화극장 뒤였다.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여서 점심시간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철조망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았다고 학교로 돌아온 뒤 다른 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2000년도에 그분 아드님을 만났다. 교노조 사건 뒤에 태어났다던 잘생긴 아들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내 얘기를 하셔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찌 아들에게까지 내 얘길 하셨고 또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중학교 때 내가 했던 실언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학에 와서는 김동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곁엔 우수하고 잘난 제자들이 많았다. 학생 스타들이 여럿이었고 한 해에 시와 소설이 동시에 당선된 천재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열등생이었고 그럼에도 나는 재학생 작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다. 장편을 써서 김동리 선생님에게 가져가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선생님 제자로선 수준 미달이란 것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책은 내고 싶고 출판사에서는 선생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는데요.”
며칠 후 추천사 원고를 주시면서 “앞으론 단편을 많이 쓰면서 문장을 치밀하게 직조하는 공부를 해라”고 하셨다. 이때부터는 문예지로의 진입이 내 열렬한 소망이 되었고 한분순 선배가 문을 열어주어 간신히 꿈을 이룰 수 있었다.(한 선배, 정말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내 독서량은 대부분 교정을 보면서 채운 것들이다. 세계명작들, 종교와 사상에 대한 책들도 그때 읽었고 전에 본 것들을 수차례나 다시 본 것들도 많았다.
1971년 범우사에서 일할 때였다. 범우사는 ‘다리’라는 시사잡지사에 속한 출판사였고 간행은 주로 번역물로 하이데거, 융, 러셀, 칸트, 토인비, 문예물 등이었으며 더러는 시대진단 비평지도 출간했다. 이때 ‘상황’이라는 시사지 교정을 보았는데 내 무지로 몇 개의 오자를 내고 말았다. 그때 그 책을 주관하던 임헌영씨가 “오자가 하나도 없으면 읽을 때 지루하잖아요. 괜찮아요”하고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임헌영 선생은 지금도 내겐 자상한 선배님이다.
주어진 인생 뚜벅뚜벅 걷다
1972년 10월 17일, 경향신문사에 있던 임헌영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광화문으로 탱크가 들어오고 있다”, “쿠데타인 것 같으니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마침 주변에 김상현 의원 차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차로 몰려가서 유신선포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 윤형두 사장은 도피를 하면서 내게 중요 원고들을 옮길 것을 지시했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출간을 앞둔 원고와 서류 등을 챙긴 뒤 뒷길로 해서 귀가했다. 그 이후로는 살벌한 시기였다. 출판물은 전부 사전 검열을 했고 검열 장소는 시청이었다. 내가 가져간 교정본들은 거의 반 이상이 빨간 줄이 그어졌고 그게 귀찮아 나는 동서문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학동창 오정희가 이상문학상을 받던 날이었다. 그녀의 축하연은 다음 날 식당에서 열었는데 그때 모인 동창들은 그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이 들어섰다.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5, 6년 가까이 해오던 리라이팅(극본을 소설로 쓰는 일)도, 외주로 나오던 교정일도 다 끊겨 버렸다. 5월 말경이었다. 광주에서 여성회를 하던 홍희담(깃발을 쓴 소설가)씨가 올라와 광주항쟁 수배자 두 사람을 숨겨주면 매달 생활비를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돈도 받고 좋은 일도 하고, 그건 횡재였다. 더 행운이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실학과 사회, 역사는 물론 리얼리즘 공부도 했다. 1982년, 남영동 정보원으로부터 은닉에 대한 조사를 받긴 했지만 그건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2초쯤 지나간 소나기에 불과했다.
1982년 정신대 이름으로 징집된 위안부 이야기를 썼다. 남태평양 현지 상황까지 사실적으로 쓴 소설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고 이 또한 수배자들이 일러준 책 ‘정신대 실록’을 읽은 덕이다.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까닭은 피해국 중에서도 위안부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나는 여러 나라에 초청되기도 했고, 1992년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있었던 ‘일제 만행사에 대한 규탄대회 겸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이때 내가 발표한 내용은 미얀마 위안소와 직접 취재를 했던 필리핀 상황에 대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종국 선생님을 소개했다. 그분은 정신대로 징집된 위안부 기록을 찾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서 관보 2만 장을 복사했고 신문 기사들을 필사했다. 정신대로 간 여성 20만 명 중에서 반 이상이 성노예로 배치된 실태는 그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그분인데 안타깝게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추모박수를 보냈다. 4박 5일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모나시 대학에 초청을 받았고 일본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씨와는 시드니 대학에서 합동 강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빌고 있다. 할머님들의 상처가 봉합이라도 될 수 있도록 어서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1997년,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때 나도 따라갔다. 성장한 아이와 함께 지낸 타국생활, 그 3년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 행복의 결과는 가산이 모두 탕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그 또한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인 것을.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다. 첫째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정신연령조차 낮았던 내가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멋진 선후배를 얻었으며 대중소설가로 출발해서 본격작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외삼촌이 다른 책도 아닌 ‘사상계’를 읽었다는 것, 날 사랑하고 보호해주었던 정선우 선생님이 교노조로 잡혀갔다는 것, 범우사에서 일하면서 유신을 맞았던 일, 광주항쟁 수배자들을 숨겨주었던 것 등이다. 이데올로기나 사회비평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랬다는 것, 그 덕에 여러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내 삶의 색채가 어떠했든 분명한 것은 내 인생 전체를 통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전시장에 정작 사진보다 말만 가득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진들은 여느 전시장처럼 벽면에 걸려 있는데 관람객들이 그 사진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전시회 넷째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안내를 받으며 전시실로 들어왔다. 그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과 그들을 안내한 도우미들의 두런거림과 기존 관람객들의 주춤거림이 있었다. 돌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며 나는 그들과 마주했다.
한 시각장애인이 내 옆에서 전시된 사진 프레임을 한 손으로 더듬자 안내인이 그의 손을 저지했다. 나는 저지당한 장애인의 손을 이끌어 사진프레임과 그 사이의 사진을 만져보게 했다. 다시 옆에 전시된 다른 프레임을 만져 서로 간의 거리를 짐작하도록 도와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안내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곳은 ‘밤하늘도 파랗다’는 제목의 연작 세 점 앞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한 도우미가 엉뚱한 곳을 향해 서 있는 장애인을 돌려세워 전시 작품들과 마주보게 해주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시장은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느껴질 만큼 조용했고 작품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가 더욱 밝게 느껴졌다. 그 사이 큰숨을 몇 번 내쉬며 나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다, 처음 카메라로 밤하늘을 담기 위해 노출을 맞춰볼 때가 생각났다. 나는 당시, 그들처럼 주위가 가름되지 않는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점자를 하나씩 손끝으로 헤아려 글로 읽어내듯 별이 하나씩 드러난다. 별들을 그렇게 점자의 점끼리 연결시키듯 한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어 나름 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전시장 가득 별들을 채워나갔다. 그러면서 별과 별 사이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 차츰 차오르는 어렴풋한 빛의 아우라를 서로의 심상(心像)에 그릴 수 있었다.
이어지는 몽골과 유대 광야에서 촬영한 ‘빈자리의 아름다움’ 17점은 그들이 올 줄 미리 알고 준비한 작품들 같았다. 작품의 선별이나 순서 모두 그들을 위한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사진이 관람객의 생각을 이끌되 제한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진가로서의 막연한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경험은 다시 만나기 힘든 축복이었고 누구라도 부러워할 행운이었다.
뒤늦게 전시장에 들어온 스태프들은 갑자기 벌어진 특별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어쩔 수 없는 긴장감으로 조용히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들의 보지 못하는 눈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 전시를 기획한 스태프들도 예기치 않았던 이들의 방문에 감동하였다. 우리들은 이론과 말로만 바라던 ‘관람객들과 작가가 함께 작품의 질을 높이는 현장’을 체험하고 있었다. 마지막 작품을 셀프 도슨트로서 안내하며 ‘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볼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두운 곳에 있을 때 하늘빛을 향한 창을 찾거나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이번에 방문한 시각장애인들은 어느 곳이든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모든 곳으로 통하는 열린 창이었다. 그들은 보고 생각하는 면에서, 볼 수 있는 자보다 자유로웠다.
한 시간 가까이 작품을 설명하느라 땀이 흘렀다. 작품 설명과 안내가 끝나자 시각장애인들이 돌아가며 내 손을 잡고 감사를 표했다. 팔을 크게 벌려 안아준 이도 있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관람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될지 몰라 긴장감이 가득했던 시각장애인들을 안내한 분들이 보내는 따듯한 눈인사에 답할 수도 있었다.
전시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작가가 있겠느냐마는, 전시를 마치면 마음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아쉽고 후회되는 마음은 남는다. 사진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면 적어도 두 장의 사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 장은 필름 위에, 또 한 장은 심상 위에. 그 두 사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사진가이다. 전시회에서는 그 갈등의 간극이 극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시각장애인들의 방문을 통해 바로 그 간극을 한껏 줄일 수 있었다. 사진 없는 사진전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장에 걸어놓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작가의 심상에 찍힌 사진으로만 전시회를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슬이라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햇빛이나 달빛이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 구슬처럼 보여 ‘빛구슬’이라고 하는데, ‘물비늘’이라는 비슷한 어감의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 영롱한 윤슬을 사진기에 담아내기 위해 호수가로 나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뷰 파인더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피사체와 정작 필름에 담기는 내용과는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사진가는 그 두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오락가락하며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좌절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기대 이상의 결과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시키며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진작업에 빠지게 되면 피사체에 집중하는 만큼 주위 환경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감각과 이성이 둔해집니다. 사진기를 매체로 해서 대상에 몰입되고 서서히 피사체와 나만 남게 됩니다. 이번에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따라 햇볕에 반사되는 빛들입니다. 주제인 윤슬과 배경의 노출 차이기 크기 때문에 그 둘을 필름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강하게 잡히던 윤슬이 흐릿해졌습니다. 카메라 뷰 파인더에서 벗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저기서 모여든 구름이 해를 가리고 빗방울이 호수 위에 톡톡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호수 위를 채우며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가 호수를 둘러싼 산들로부터 흙탕물을 이루며 흘러듭니다. 그 사이 변하는 물빛과 하늘을 카메라 뷰 파인더를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호수 면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 그냥 듣던 빗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빛의 변화는 물론 아름다웠습니다. 빛의 아름다움과 함께 호수와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소리가 증폭되어 들렸습니다. 귀가 쫑긋! 온몸이 긴장했습니다. 그 영롱한 소리를 주위 다른 소리들과 구별해 듣기 위해 호수가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가, 아주 몸을 낮추어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빗방울 몇 개만 볼 수 있을 만큼 카메라 렌즈로 줌 인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시야에 들어온 그 빗방울 하나하나의 이미지처럼 소리들도 시차를 두고 한 방울씩 따로 따로 들렸습니다. 수많은 빗소리와 갈라져 나누어 들리는 한 음 한 음이 신비로웠습니다. 마치 슬로 모션을 볼 때처럼 망원렌즈로 호수 면과 부딪치며 떨어지는 비 한 방울의 터짐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한 방울의 빗방울이 호수 면과 만나는 울림을 선명히 선택해 구분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그 음이 모두 제각기 다른 톤과 크기였으며 시간 차이 또한 다르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로폰 위에 떨어지는 맑은 구슬의 투명한 수정 같은 금속성도 있었고, 마린바와 같은 포근하고 청명한 나무 음도 있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본 것이 귀로 들리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진을 하면서 해석되지 않던 이미지가 풀어지면서 주위에 흔하게 펼쳐져 있는 풀과 바람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렌즈의 뷰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피사체와 연관되어 들리는 소리가 바뀌는 재미있는 일을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는지 서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조금 확장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장르가 함께 어울려 승화될 수 있다면, 그만큼 세상은 더 살 맛이 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피리어드(period) 대로 역사를 생각한다. 70의 인생을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겐 한국영화의 지난 70년은 인식과 학습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는 현재 대부분이 망자(亡者)의 것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유현목 감독과 그의 영화 ‘오발탄’같은 것이 그렇다. 거목 유현목은 갔지만 아직 이 영화에 대한 명성과 그에 대한 기억은 계속된다. 은 언제 봐도 늘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명화(名畵)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것.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영화 ‘오발탄’은 지난 70년 한국 영화의 역사에 있어 우리 시대의 크나 큰 정치사회적 문제가 해결의 수순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유현목의 영화적 예감은, 마치 뛰어난 마법사의 그것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직도 오발탄의 분단, 오발탄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 오발탄 때문에 생겨 버린 경제적 불평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후반 임권택을 위시한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등이 일궈 낸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코리안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에 있어 진짜 르네상스는 신상옥 감독과 그의 키드(kid)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1960년대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빅뱅(big bang)이었다.
신상옥의 1961년작 는 죽은 남편의 친구가 인근 학교의 선생이 되어 사랑방의 객으로 머무는 동안 안주인과 미묘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두 남녀의 은근한 ‘밀당’이 미망인의 딸 옥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욕정은 늘 이성의 벽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 담장 어귀에 서서 항상 머뭇대기 십상이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두근대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만큼 에로틱한 것은 없다. 단 한 번의 입맞춤 혹은 부둥키고 얽히는 섹스 없이 이처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렇게 얘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거장 신상옥 감독이 생전에 만든 등 주옥같은 80여 편의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영화적으로 원대한 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위용을 떨쳤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 필름’과 관련해서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1980년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뤄 낸 신화를 한국적으로 치환시키면 이해가 빨라진다. 현대화된 한국 장르영화의 시작은 신상옥이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말은 정확한 기술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상옥의 후예들이 나왔는데 예컨대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 역시 신상옥 감독처럼 연출과 제작, 투자, 배급을 동시에 진행하며 화제작, 흥행작을 양산해 냈다. 모두 ‘아버지’’ 신상옥에게서 배우고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1 르네상스기에서 이만희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는 김태용의 작품으로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원래 이 영화는 이만희의 소실된 명화 중 하나이다. 1967년에 만들었지만 지금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김수용 감독이 1981년에 리메이크한 것은 어쩌면 이만희에 대한 오마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복역하다 잠시 휴가를 나온 여인 문정숙은 기차 안에서 위조 지폐범으로 쫓기고 있는 남자 신성일을 만나 하루살이 나방 같은 연정을 불태운다. 그 사랑 참 쓸쓸하고 허무하며 가슴이 아프다. 1960년대라면 여전히 독재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동원된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의 상상력은 첨단기술로 포장된 지금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건 짜릿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이만희의 수많은, 그리고 화려한 작품들, 곧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7인의 여포로’ ‘삼포 가는 길’ 등은 신상옥과 달리 그가 리얼리즘 계보의 작가였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상옥이 시류라는 서핑을 잘 탄 인물이었다면 이만희는 올곧은 지식인의 표정을 지닌 채 살아가려 했던 감독이었다 이만희는 한마디로 위험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이력은 이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천재는 불우한 법이다. 이만희는 1975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국 영화의 리얼리즘 역사는 이만희의 죽음과 함께 한동안 사구(砂丘)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이창동의 등장은 어쩌면 이만희의 부활과 같은 것으로 해석됐다.
너무나 많은 기억들, 작품들
70년사의 갈 길은 멀다. 중간중간 떠오르고 명멸하는 감독들, 제작자들, 배우들의 면면이 길고도 길다. 그중에서 이장호-배창호-이명세로 이어지는 혈맥 아닌 혈맥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계보에 속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바로 이들의 시대였다.
이장호 감독이 이루어 낸 70년 영화 역사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바보선언’ 등 일련의 영화들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감독이 시대의 어둠과 어떻게 조우하고 또 스러져 가는가를 보여준다. 그중 ‘바보선언’은 탈(脫)정치적인 척, 사실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적 지식인의 깊은 정치적 좌절과 그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소매치기와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가는 저지대형(低地帶型) 인간 동철이 가짜 여대생 혜영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사실은 콜걸이자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좌충우돌 끝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보가 아니면 살 수가 없었던 시절, 당시 우리 사회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의 시선을 통해 삶의 가닥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바보선언’은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을 견뎌 내려는 영악한 이야기 꾼이 의도적으로 꾸며냈던 자기 모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흉포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배창호는 어두운 멜로드라마로 시대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인물이다. 배창호는 이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꼬방동네 사람들’ 처럼 사회파적 시선을 자신의 작품에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러나 곧 ‘도의 꽃’과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으로 1980년대의 젊은이들이 ‘앵그리 영 맨’ 혹은 ‘비트 제너레이션’의 세대임을 갈파한다. 배창호는 한국영화계에 ‘스타일’을 들여 놓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예술이라는 점을 그는 명명백백하게 낙인찍어 놓았다. ‘적도의 꽃’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배창호가 이루려고 했던 영화적 스타일은 그의 조감독 출신인 이명세에서 빛을 발한다. 이명세는 영화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쪽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회화적이면서 키치(kitch)적이다.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 컷의 사진들을 이어 붙인 동영상의 예술에 가깝다. ‘첫사랑’과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계보는 한국영화가 스타일에 있어 한 움큼의 큰 성과를 거둬 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명세가 로 새로운 좌표를 찍을 무렵 한국영화계의 한쪽에서는 목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뉴 코리안 시네마’의 바람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와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은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에 대거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이뤄냈다. 당시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은 경쟁부문에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 2편이, 또 다른 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Uncertain Regard)’에는 김의석 감독의 이 올랐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신작 역시 경쟁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한국영화의 당시 칸 진출이 유독 눈길과 화제를 모았던 것은 해외 영화계, 특히 예술영화에 대한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 영화 권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작가적 경향에 한 관심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 3~4년 전부터 한국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유럽 평단들의 시선은 여전히 한국영화 하면 신상옥, 김수용,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 등 구세대급 감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당시 칸 영화제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유럽 영화계 내에서 공식적인 발판을 마련한다는 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새로운 감독들’로서는 흔히들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김지운 등 당시 40대 감독들이 거론돼 왔으며 그 뒤를 이어 봉준호, 장준환, 류승완 등 30대 감독들까지 포함해 이들을 일컬어 충무로에서는 일명 ‘뉴 코리안 시네마 운동’의 기수들로 분류했다.
유럽 칸 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영화작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은 마치 1990년대에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이 이를 통해 대거 해외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위상을 급격하게 올려 놓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당시 유럽영화계는 첸 카이거와 장 이모우 등 북경대학 출신의 일명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집중 소개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뉴 코리안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은 모두가 ‘전후 세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돼 있지 않으며 분단문제, 민족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 체제를 경험한 후 영화예술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도화된 산업화 시대의 영향과 혜택으로 인해 MTV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영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때론 유머러스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공상과학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 ‘달콤한 인생’,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게 심사위원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새로운 70년사를 위하여
새로움은 늘 오래된 것으로 대체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10년을 돌진하듯 활동해 왔던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도 그렇다. 이들 모두 이제 ‘올드 보이’가 됐다. 50대를 훌쩍 넘긴 감독이 됐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피를, 새로운 ‘피의 혁명’을 요구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에 호응하는 듯 2010년대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 ‘가시꽃’의 이돈구 감독, ‘명왕성’의 신수원 감독 등등.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아직 지난 70년의 기나긴 역사의 시간에 눌려 완전히 개화한 상태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모두가 감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생이 그렇듯, 영화도 다 그런 것이다. 바뀌고, 잊히고, 새로 기억되며, 그래서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 남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길을 7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때론 영광스럽고, 때론 팍팍하며, 때론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참이나 참담한 심정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70년을 영화 혼자서 버텨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지금의 감독과 배우가 있기까지 그 전의 감독과 배우가 있었고, 또 다시 그전의 감독과 배우, 제작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건 일직선의 끈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찬욱과 김기덕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70년 전사(全史)의 영화를 보라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 봤자 일별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단,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점지해 나갈 것이다. 분명한 일 하나는 과거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세상을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운명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간다면 세상은 언젠가 꼭, 영화처럼 될 것이다.
△ 오동진(吳東振) 영화평론가
문화일보,연합뉴스,YTN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지 FILM2.0 편집위원과 동의대학교 초빙교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EBS 시네마 천국 MC, YTN 시네24 MC를 역임했다.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과 마리끌레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위에 있을 법한 사물도, 스치는 바람도 멈춘, 고요 가운데 내가 서 있습니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습니다. 이번 촬영의 주제는 빛이 만난 바람과 물입니다. 이렇게 빛이 약할 때에는 조리개와 필름감도의 한계를 시간이 감당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하여야 시간이 확보됩니다.
먼저 사진기와 볼 헤드, 그리고 삼각대가 한몸이 되도록 모든 연결고리를 되풀이 점검하고 노출계로 셔터와 조리개 값을 계산해봅니다. 필름 스피드를 감안하더라도 210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코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상상하며 따져 보아도 빛이 양으로 덧입혀 만들어 낼 질감과 색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계산해 나온 시간은 3분 30초입니다. 평상시 사용하던 250 분의 1초에 비해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양입니다. 이렇게 큰 볼륨은 기계에 맡겨야 합니다. 일상적인 스틸 사진의 시간에 비해 4만 5000배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백, 천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감각을 넘어선다는 것을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만 배라는 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근육운동을 위해 날마다 턱걸이를 10번 하던 사람에게 1000번은 감당할 수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100배일 뿐입니다. 하물며 천 배? 만 배?
그렇게 빛의 양을 계산하는 사이 사진기가 4만 5000 번 필름에 덧칠한 빛이 드러납니다. 신선한 코발트색입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럴 수 없이 섬세합니다. 멀리 그리고 더 멀리서 받쳐주는 산의 능선 덕이기도 했지만, 바람마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이며 색입니다. 우리는 나온 결과를 색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감각은 놀랍습니다. 단순한 겉껍질의 색에 복잡한 인간의 오랜 기억이 덧입혀지는 순간입니다.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날은 또 다른 하루를 품어내듯, 내 생각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바람을 잉태하고 있는 몽골평원 새벽이 사진기에 담겼습니다. 어떤 바람도 풀어내기 전, 고요가 필름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게 푸른 바람의 연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작품입니다.
연작의 매체는 나무입니다. 바람을 끊어뜨리지 않고 드러내는 선(線)은 땅에게는 나무이며, 나무에게서는 가지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신경 줄 시냅스(synapse)가 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언뜻 봐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 사람의 감각을 넘어서는 4만 5000배의 시간을 덧바르니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맨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섬세한 빛을 기계를 통해 이렇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를 사용해야 하는 시각예술의 한계가 오히려 인간의 눈을 확장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입니다. 내가 못 본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선 한국 실버의 몽골 정착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여행은 인기 있는 오락이며, 취미, 유익한 공부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여행을 사진가로 평생 해온 우리 부부는 이름난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갈 집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는 여행이 아니라, 살면서 점검해 온 높은 가치에 나를 던지는 임상적이며 실험적인 삶을 위해 낯선 몽골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손 청 몽골국제대학교 예술감독)에게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고국의 살림살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재미를 위한 여행에서 더 짙은 삶을 위해 나이 먹은 부부가 소꿉장난처럼 삶을 던지는, 적어도 우리에겐 진한 여행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도 고향이 없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제이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을 만날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스스로도 모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바람처럼 만나는 몽골 생활의 기쁨과 설렘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