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스무 해가 훌쩍 넘어서 다시 온 파리에 낯섦이 기다려주어 다행이다. 그러나 파리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백 년 된 건물에 거뭇하게 묻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센강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퐁네프 다리도 더 깨끗하거나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았다. 센강 양쪽으로 오래된 옛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산천은 의구하되 나만 바뀌어 왔다.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있다는 것, 내가 늙어간다는 것,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 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김화영 선생님이 사석에서 말했다며 덧붙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십 년 세월을 훌쩍 넘겨 찾아와 늙어가는 내가 느릿느릿 걸으며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보는 건가. 어쨌든 다시 찾은 여행지의 맛을 느껴본다. 다만 그 옛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제외했다. 에펠탑은 강 건너 빌딩 사이로 멀리서 탑 끄트머리만 힐끗 쳐다보았다. 샹젤리제 거리나 루브르 박물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센 강 변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걸었다. BC 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파리시의 기원이 된 센 강의 시테(Cite) 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 그 옛날 찬송 미사가 울려 퍼지던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만 본다. 이전엔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처럼 기도하고 오르간 연주와 장엄한 노래를 들으며 예배에 함께 참여했었다. 높은 천정까지 울리는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의 기도소가 온몸을 휩싸던 감동의 시간, 순박한 콰지모도가 치는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종탑, 에스메랄다의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듯 성당의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았던 그 옛날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린다. 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걷는 속도는 여전하다. 도무지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의 자연 속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과 비도 함께 하듯.
노트르담 역에서 오르세 역까지는 10여 분이다. 역에서 나와 미술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같은 방향으로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길가 강변의 가게에서 머플러를 하나 사서 둘렀다. 한결 온기를 준다.
오르세 미술관이 먼저 나타난다. 역시 예상한 대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빗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행렬에 서서 보낼 시간이 없다. 애초에 두 개의 미술관 중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필생 역작인 '수련 연작'을 다시 볼 생각이다.
이날은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만 시간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오르세 역사(驛舍)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엄청나서 한나절을 다 보내야 한다. 그 옛날 그렇게 다리 아프도록 실컷 보았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고 사랑의 자물쇠가 빽빽이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근처에 다다르면서 익숙함의 안도가 생긴다. 그래, 여기쯤에서 잠깐 앉아있었지. 오래전 엄청 추웠었던 공원은 그대로군...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처럼 나만 변해서 다시 하는 여행을 맛본다. 기분이 촉촉하다.
시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스물 몇 해 전 꽁꽁 손이 얼던 겨울 속의 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촉촉했던 파리를 또 기억하게 되었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향하는 길의 튈르리 정원은 오래된 정원의 멋이 물씬하다. 튈르리 궁전 정원 별채의 자연광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천정의 빛과 자연광이 날씨에 따라 또는 일출과 일몰에 따라 환상적이다가 몽환적이다가 하며 최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흐린 날에 찾아간 모네의 대작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수련의 멋을 보여준다. 오직 자연의 원초적인 빛을 찾아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수련 연작이 갤러리 내부에 가득 차 있다. 모네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가슴 벅차게 그의 예술혼을 흐뭇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다. 모네의 방에서는 그 날의 자연광에 따라서 수련 연작은 언제든 다른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행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요청한 조건이 있었다.
1.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할 것
2.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
지하로 내려가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액자도 눈길을 끈다. 모네, 마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마티스, 위트릴로, 시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의 맛을 실컷 느껴볼 수 있었다.
더 꼼꼼히 그림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이용해서 작품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들러볼 일이다. 그래야만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작품과 연결해서 완전한 감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나와 눈을 들어보면 저편으로 콩코드 광장도 보인다. 파리의 동선은 생각보다 길거나 힘들지 않다. 얼마든지 파리를 느끼며 걷기 좋다. 이날처럼 비 오는 날의 여행은 감성지수를 자극한다.
미술관을 벗어나니 센강엔 파리지엔느들이 하나둘 나와 걷고 있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가끔 센 강 변을 거닐며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파리 사람들, 센 강을 배경으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은 축복이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은 풍경이다. 나는 어떤 여행 중인가.
여행이 끝났어요.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정원에서 중에서~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속타고 안타까운 일이 있어야 시원하고 달콤한 맛도 느낄 수 있다. 고진감래라 인내의 열매는 달 것이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다소의 난관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매진하라. 운기가 곧 길해질 것이다.
•84년생 : 당당히 밀고 나가면 막힌 건은 다 풀리나 사람의 마음은 못 얻는다.
•72년생 : 드디어 횡재수가 도래하니 던져봄이 가하리라.
•60년생 : 변동수가 오니 오늘의 변동은 한 번 움직여 봄이 재수에 길하다.
•48년생 :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사는 것이니 다른 것은 생각 말고 지킴이 길하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세상과 인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니 너무 집착하지 마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말것이니 다소 서운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하나 애석해 하지 말라. 다시 운기가 길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울 것이다.
•85년생 :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으니 운에 잘 편승하면 빛이 나고 힘도 생긴다.
•73년생 : 과신하는데서 막힘이 생기니 잘 조절하면 좋은 일이 기다린다.
•61년생 : 인간관계에 행운이 따르는 운이니 많은 만남을 가지는 것이 좋다.
•49년생 : 행운과 불행의 희비가 엇갈리는 날이니 마음 조율을 잘 하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물질에 초연해야 마음속의 얽매임을 풀어버릴 수가 있으리라. 조급한 마음은 버릴 것이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천천히 해결하는 것이 길 할 것이다. 성급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86년생 : 이성을 가까이하면 구설수가 많으니 조심해야 면한다.
•74년생 : 시간이 흐르면 어려우니 속히 서두르는 것이 해결하기 쉽다.
•62년생 : 새로운 일이나 확장하는 문제는 불가하니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다.
•50년생 : 신수가 불길하여 기대하는 바가 힘들게 되니 바라지 마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비 개인 하늘에 환한 빛이 나타나듯이 밝은 희망이 보인다. 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을 보는 운기인 어려움은 곧 다 지나가고 새로운 희망이 옅보인다. 망동하지 말고 좋은 운기를 잘 받으라.
•87년생 : 마음에 둔 계획을 실천해야 되니 늦기 전에 서두는 것이 좋다.
•75년생 : 친구나 연인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일이 된다.
•63년생 : 조력자가 나타나니 힘든 일을 상의하면 도와준다.
•51년생 : 안과 밖의 조화가 문제이니 잘 풀어내면 어려운 일이 해결된다.
◈ 용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상)
막연한 후일의 큰 기약은 버리고 목전의 작은 이익에 신경 써야된다. 포부는 원대하더라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목전의 일들을 먼저 처리하라. 작은 이익은 얻게 될 것이다.
•76년생 : 주변의 의견을 잘 수렴하면 큰일에 이득이 되니 고집은 삼가라.
•64년생 : 사심 없고 진취적인 움직임을 가질 때 귀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52년생 : 포부 야망대로 안 되는 운이니 손에 잡히는 만큼 처리하라.
•40년생 :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문책 당하는 일이 생기니 미리 조심하라.
◈ 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 모든 일을 그르치니 본심을 보이지 마라. 입은 무겁게 하고 마음은 넓게 가질 것이니 다소 억울하고 분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인내하는 마음을 가지라. 그리하면 곧 길해 질 것이다.
•77년생 : 말 잘못으로 우정 애정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하니 입을 조심하라.
•65년생 : 한가지 일로 두 가지를 잡는 격이라 소득이 크고 재수도 길하다.
•53년생 :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는 운이니 물리지 않는 것이 앞길을 여는 길이다.
•41년생 :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면 나중에 알아주니 재수를 더한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믿음은 중요한 것이라 괴로움 속에서도 신뢰를 쌓아두면 길하리라. 현실이 곤고하다고 신의를 저버리면 안될 것이니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굳건한 마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자중하여 행하라.
•78년생 : 주위의 눈총을 받기 쉬운 때이니 감정 억제를 잘하면 면하리라.
•66년생 :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일이 잘 진척되니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54년생 : 어렵게 늦게 일이 풀리는 길이 보일 것이니 애태우지 말고 기다리라.
•42년생 :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많은 생각을 해보고 결정하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큰 욕심은 마음이 불편하나 작은 바람은 진취를 만드니 조정을잘하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과욕을 버릴 것이니 작은 소원은 이익을 가져다 줄것이다. 자신의 감정 정리를 잘해야 할 괘이다.
•79년생 :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해야 훗날 다른 일에도 잘 해지는 법이다.
•67년생 : 열 가지를 다 안주는 것이니 한가지라도 만족하면서 잘 지내라.
•55년생 :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정신만 차리면 귀인을 만난다.
•43년생 : 재수란 흐르는 물과 같으니 내 손에서 나가지 않으면 오지도 않는다.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라 내가 뿌린 대로 거두는것이다.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길함이 와도 뜬구름과도 같을 것이니 과욕은 버리길 바란다.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얻게 될 괘다.
•80년생 : 하나를 알면 열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처음 하나가 문제인 것이다.
•68년생 : 일의 기초가 잘 되었는가를 돌아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56년생 : 초심으로 돌아가야 마음도 편하고 재수가 좋음에 일도 잘 풀린다.
•44년생 : 건강이 좋아야 활력을 찾고 일에 임할 것이니 건강에 신경을 써라.
◈ 닭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변화 무쌍한 하루이니 나아갈 때 한번 더 생각함이 좋으리라. 협곡을 지나는 것과 같이 불안하기 이를때 없을 것이니 일을 진행함에 있어 신중을 요해야 할 것이다. 망동은 금물이다.
•81년생 : 주위의 칭송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되니 떨어질 때를 조심하라.
•69년생 : 한치 앞도 분간키 어려운 형국이라 돌다리도 두들기며 가야 할 것이다.
•57년생 :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이 생기나 자제함이 덜 없애는 것이 된다.
•45년생 :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재충전하면 새로운 일이 기다린다.
◈ 개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길을잃고 우왕좌왕 헤매는 일이 없도록 미리 머리를 정리하고 나가자.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먼저 철저한 계획이 필요 할 것이니 두서 없이 진행하지 말라. 후에 화를 당할까 두렵다.
•82년생 : 공부나 일이나 연애나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이다.
•70년생 : 중심이 안 잡히면 번뇌가 큰 법이라 일의 순서를 잘 풀면 열리리라.
•58년생 : 정신이 깜짝거리니 주머니 지갑을 조심하라 손재수가 들어있다.
•46년생 : 손톱 밑에 가시를 두고는 사사건건 걸리는 것이니 주위 단속을 잘하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가슴에 나침반을 제대로 세워두면 어떤 어려운 일도 두렵지 않다. 주관을 가지고 행할 것이니 허둥지둥 어려운 난관 앞에서 속수무책일 가능성이 많다. 먼저 자신의 주관을 관철하라.
•83년생 : 여러 가지 중에 한가지만 힘차게 밀어붙이면 성사된다.
•71년생 : 고요한 가운데 일이 손에 잡히니 손가는 곳마다 성사된다.
•59년생 : 구름이 비를 만드는 것이다 등 붙일 곳이 보이니 잘 찾아 보라.
•47년생 : 과음이 원인 되어 실수할 일이 생기니 삼감이 미리 처방하는 것이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내가 초등학교 때 부른 ‘이승만 대통령 찬가’는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로 끝난다. 그러나 찾아보니 원전은 그게 아니올시다였다. 경향신문 1953년 8월 15일자에 실린 가사를 보면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각하’다. 박사와 각하는 음운상 비슷하지만 엄청 다르다. 내 기억의 착오인가, 아니면 이승만 우상화에 염증을 느낀 우리 계룡초등학교 선생님이 바꾸어 가르쳐주신 걸까? 후자였으면 정말 좋겠다.
그 가사가 실린 건 6·25 정전협정(1953.7.27.)을 체결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인데, 노래에 대한 해설기사는 전혀 없다. 서울방송 어린이노래회가 그해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1~3절을 신문에 실린 그대로 옮긴다.
一. 그어느곳에 슬기었던가 원한의거슬린 피뛰어솟는곳 온땅에믿음이 피어나리고 정의의불가마 밝게안기인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二. 그어느곳에 약속이던가 온하늘사랑이 높이솟으라 그리움에물이여인 내를쌓고 평화의너럭 바위굳이간직한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三. 그어느곳에 결의었던가 삼천리맑은물결 길이이끌어 백두의정수리높이 보살피는데 행복의 넓은바다 인자로그은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정의의 불가마 밝게 안기고, 그리움에 물이 여이고, 행복의 넓은 바다 인자로 그은, 무슨 말인지 참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던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난 불러본 적 없지만 알고 보니 “우리 대통령’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전체 3절 중 1절은 이렇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생이니 여든이면 1955년에 나온 노래인가보다.
‘10월 유신’의 해인 1972년엔 그에 못지않은 박정희 대통령 찬가(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도 발표된 바 있다. 지금은 누구나 북한의 김 씨 일가 우상화를 비웃고 놀리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단체 자유기업원(구 자유경제원)이 2016년에 ‘이승만 시 공모전’을 주최한 일이 있다. 건국 대통령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바로잡으려고 기획한 일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인데도 내용을 잘 모르고 최우수작(영시)과 입선작으로 뽑은 탓이다. 입선작 ‘우남찬가’의 경우 각 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이어서 읽으면 ‘한반도분열 친일인사고용 민족반역자 한강다리폭파 국민버린도망자 망명정부건국 보도연맹학살’이 된다. https://blog.naver.com/fish96/220806135895
이런 걸 아크로스틱(acrostic, 삼행시처럼 각각의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또는 끝의 말을 서로 연결해 어구나 문장이 되게 만드는 방식) 기법이라고 하나보다. 영시는 물론 한시에도 그런 게 있다. 잡체시(雜體詩)의 일종으로 분류되는데, 엄연히 문학적 족보가 있는 창작 기법이다. 자유기업원은 입상을 취소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응모자를 고소했지만 결국 그 사람만 유명해지고 말았다.
아크로스틱 문자희롱의 사례를 찾아보자. 집을 나가는 아내(완전 가출은 당연히 아니고)와 남편이 주고받은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아내가 집 나가면서 냉장고에 써 붙인 글을 세로로 읽으면 ‘까불지 마라’, 남편이 이에 대해 휴대폰으로 응수한 글은 ‘웃기지 마라’다.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내가 ‘원전’(?)을 좀 더 멋지게 고치고 다듬었다.
까스 조심하고
불내지 말고
지퍼 막 내리지 말고
마누라 찾지 말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
VS
웃음이 절로 나고
기분 정말 째진다
지퍼야 내 맘대로지
마누라는 오든 말든
라면? 호텔 뷔페다!
근데, 가스를 조심하라거나 불내지 말라는 말은 사실 그게 그거니까 ‘불’을 어떻게든 바꾸면 좋겠다. 시에서 동어 반복은 어디까지나 기피해야 할 일 아닌가? ‘불평불만 입 닥치고’ 이래볼까? ‘불타는 금요일은 개뿔’ 또는 ‘불안에 떨지 말고’?, 아니, ‘불두덩이나 만지고’ 이러면 어떨까? 이게 그 아래 ‘지퍼 막 내리지 말고’와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 그것도 말이 친숙하지 않고 야해서 좀 거시기하다. ‘불량(또는 불순)한 짓 하지 말고’나 ‘불 켜놓고 자지 말고’, ‘불쌍한 척하지 말고’ 이런 건 어떨까? ‘불콰해져 해롱거리지 말고’도 괜찮을 거 같기는 하다. 에이 모르겠다. 다 맘에 들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말이 불현듯 생각날 때가 있겠지.
나이 먹어서 즐거운 일은 호수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 일이다. 일하다가 지겨워서 작업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면 공원에 봄볕이 가득하다. 나는 햇볕이 아까워서 하던 일을 밀쳐놓고 공원에 나가 양지쪽에 앉는다. 노인들이 많이 나와 있다.
햇볕을 쪼일 때 해와 나 사이에는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햇볕은 옷을 뚫고 들어와 내 몸속에 스민다.
자연을 받아들이는 행위들 중에서 봄볕을 쪼이는 일은 가장 관능적이다.
나는 젊었을 때 혼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옷을 모조리 홀랑(!) 벗고 개울물 속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장마가 끝나고 며칠 지나면 물의 흐름이 순해지고 향기도 진해진다. 이때 개울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구석구석에 와 닿는 물의 감각은 놀라웠다.
물이 숲의 향기를 싣고 내려와서 새로운 시간을 내 숨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육신을 가진 생물로 변해서 내 몸을 안았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려 와서 내 몸을 핥고 지나갔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져서 낡은 시간의 똥가루가 빠져나가고 창세기의 새벽처럼 순결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수묵 산수화를 그리던 조선의 선비들은 물을 멀리서 보고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나처럼 홀랑 벗고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을 나는 답답하게 여긴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산속에서 수행을 계속했고 겨울에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개울 아래쪽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수행하러 갔더니 ‘나체 목욕 금지’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이 짓을 더 이상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데 이 즐거움은 젊은 날의 개울물 수행과 거의 맞먹는다. 나는 봄볕 쪼이기가 개울물 수행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당도하기까지는 초속 30만 km로 달려서 8분 걸린다고 하니 이 무지막지한 공간과 속도는 물리학자들이 알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지만 봄볕을 즐거워한다. 이 밝음과 따스함은 저 무한공간을 건너서 나에게 직접 다가온다. 나는 이 직접성의 사태에 경악한다. 나는 태양의 애무를 받는다.
봄볕을 쪼이면 잘한 것도 없이 상을 받는 것 같다. 봄볕을 쪼이면 어려서 어머니 속 썩인 일과 자라서 아버지 속 썩인 일과 함부로 지껄인 말들이 용서받고 있는 것 같다.
볕은 빛과 함께 우주공간을 건너서 내게로 온다. 빛은 스스로 아무런 색도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수억만 개의 색들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지지만, 그 모든 색들을 다 합쳐서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광선이 된다. 모든 색을 다 아우러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봄볕은 그 빛 위에 실려 있다.
봄볕 속에서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분홍색 하늘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붉고 푸른 반점들이 별처럼 떠 있다. 반점들은 어디론지 흘러가고 또 다가온다. 그 반점들은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내 생명의 신호들이다. 신호들은 가물거린다.
봄볕은 생명을 깨어나게 하고 삶의 쓰라림을 위로한다. 겨울에 흰 눈에 덮인 공동묘지에 가면 삶과 죽음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하얀 공동묘지에서 죽음은 범접할 수 없고 말 붙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봄이 와서 흙이 부풀고 무덤들이 파래지는 한식날 성묘 가면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서 평화롭다. 오래된 무덤에서는 슬픔의 날카로움이 풍화되어서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봄에는 호수의 거북이들이 바위 위에 올라와서 한나절씩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언 호수 밑에서 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바위 위에서 거북이들은 꼼짝도 않는다. 거북이들은 매우 집중되고 경건한 태도로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눈을 감고 있는데, 거북이들의 눈꺼풀 속에도 반점들이 흘러 다니고 있을 터이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거북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의 즐거움을 안다.
작은 동물원의 미어캣들도 발딱 일어서서 봄볕을 쪼인다. 이것들의 자세는 교양 없어 보인다. 이것들은 몸을 활짝 열어서 봄볕을 맞는다. 아이들이 미어캣을 들여다보면서 미어캣 흉내를 낸다. 아이들의 뒤통수 가마에 봄볕이 가득하다.
닭들은 봄볕에 부푼 땅을 파고 들어앉아 흙을 파헤치며 뒹군다. 닭은 봄볕과 땅기운을 함께 뒤집어쓴다. 닭은 하늘과 땅, 양쪽을 다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나와 거북이와 미어캣과 닭이 다 같은 중생임을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개울물 수행하던 젊은 날이 늙은이의 봄날 속에 살아 있음을 안다. 봄볕은 공짜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유서 깊은 옛길과 불교 유산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명품 코스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를 탐승 기점으로 삼는다.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상에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재 너머 반대쪽 길이 끊겼기에.
옛날 이름은 계립령, 요즘은 하늘재로 부른다. 옛길 중에서도 옛길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옛길이다. 고증할 수 있는 역사로 볼 적에 그렇다. ‘삼국사기’는 적시하고 있다. 신라 초, 156년에 이 길을 열었다고. 근 2000여 년 전에 생긴 길이니 아득하다.
두 발 달린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심장한 산길이 열렸겠지. 하늘재보다 더 오랜 길이 왜 없으랴. 역사가 채록하지 않은 고갯길들이 그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인간은 시간 저편을 보는 눈이 없어 역사를 빌려 사라진 과거 한 줌을 움켜쥔다. 없는 게 시간을 보는 눈뿐이랴. 삶을 보는 눈이 없어 편견에 기대어 내가 아는 것만 우기며 산다. 사랑을 보는 눈이 없어 편린으로 남은 추억을 쥐어짜 아픔을 아로새긴다.
하늘재 옛길로 접어든다.
겨울 숲의 알싸한 냉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완만한 흙길이라서 걷기에 좋다.
물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계류에 서린 물빛이 투명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나? 들여다보니 송사리 떼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무슨 열정으로, 무슨 정념으로 온몸을 휘저어 흐름을 거스르는가. 그러나 거스름이란, 거역이란, 살아 있는 증빙이기에 순연(純然)이다.
삶의 고역스러움은 거역해야 할 때 거역하지 못한 응징으로도 주어지는 게 아닐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성에 젖어 생활에 순종해왔던가. 얼마나 자주 본연을 잃은 굴종으로 ‘쌩쇼’를 일삼았던가.
송사리들의 용을 쓰는 역행엔 남세스러운 게 하나 없다.
잠깐의 걸음만으로도 숲의 안통에 닿는다. 숲이 깊어 나무들과 가까워진다.
헐벗은 저 나무들. 헐거운 저 표정들. 초록 이파리를 무성히 달아야만 생동하랴. 얻어 걸친 것 없이 태연한 겨울나무들도 알고 보면 씨억씨억 거센 숨을 토한다. 숲 그늘 새로 비집어 든 햇빛 한 조각이면 거뜬하다.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도 평생을 말짱히 사는 나무들의 청빈한 삶이라니….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경제적인가. 나무가 남이 아니라지만, 남이 아니기 이전에 어쩌면 고등한 선생님이다.
길은 굽이굽이 연신 휘어진다.
경사도가 낮아 숨찰 게 없다.
새소리마저 그쳐 그지없이 고요한 오후다.
쥐죽은 듯 조용한 숲길이다.
음미할 만한 적막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고요에 마음을 담근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귀가 열린다. 두 귀를 마냥 열어두는 건 산 아래 저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이 순간엔 들을 수 없는 것들마저 듣는 기분이다.
일테면 메마른 낙엽들의 밀어를. 나무가 나무를 어루만져 내는 첼로의 저음을. 또는 하늘재 길 공사를 하는 신라인들의 두런거림을. 귀에 고이는 상상의 독주(獨奏),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청각의 뻥에 나는 기꺼이 속는다. 만상의 비밀을 품은 고요가 주는 선물이라 믿기에.
하늘에 닿을 지경으로 높고 가파른 잿마루라 하늘재? 그렇지 않다.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경탄할 만한 산경을 펼쳐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하늘 아래 처음 열린 길이라는 뜻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리라.
신라의 드높은 이상을 유비(類比)한 지명으로도 손색이 없겠지. 신라가 이 길을 개설한 게 민생의 편익만을 위해서였겠는가. 영토 확장의 욕망과 군사적 요충 확보라는 계산까지 실린 길이지 않겠는가.
하늘재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맞먹을 핵심 도로 인프라였으며, 불교문화의 유통 교차로였고, 툭하면 창검이 각축하는 전장(戰場)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멀지 않은 문경 새재에 열린 새로운 고갯길이 각광받으면서 하늘재의 이용 빈도가 낮아졌다. 종단엔 잊히기에 이르렀다.
하늘재 마루에 올라서자 전망이 탁 트인다. 백두대간 첩첩준령들이 출렁거린다.
마의태자도 저 헌걸찬 산 물결을 바라봤을까. 신라 패망의 한에 겨워 명멸하는 세사의 덧없음을 한탄했을까.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전설일 뿐이지만, 마의는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늘재 들머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리석불입상도 마의가 세웠다 하고.
하늘재에서 펼쳐진 인간사의 영욕과 부침의 드라마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그 무엇인들 지속할 수 있으랴.
자연은 인간사와 달라 고요처럼 의연하다. 그저 유유자적으로 영속한다. 따져놓고 보면 놀랄 만한 대비이지 않은가.
10월 하늘은 맑고 높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짙푸릅니다. 하늘과 강 어느 편이 더 파란지 내기라도 하듯 날로 그 푸름이 짙어가는 가을날, 강변에는 연보랏빛 꽃들이 가득 피어나 단연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일순 저 멀리서 모터보트 한 대가 정적을 깨고 달려와 하늘과 강, 연보랏빛 꽃 무더기 사이를 무심히 지나쳐갑니다. 작은 배에는 고기잡이 나서는 것으로 보이는, 사내와 아낙이 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강촌 마을의 전형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림 같은 풍경의 정점을 찍은 것은 다름 아닌 단양쑥부쟁이.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자생지가 파괴돼 자칫 ‘야생 절멸’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시끌벅적한 ‘뉴스의 꽃’이 되었던 단양쑥부쟁이. 그 단양쑥부쟁이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한가롭고 목가적인 강마을 풍경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중장비 소리 사라진 강변에 이파리가 솔잎처럼 가느다란 단양쑥부쟁이가 가득 피어난 것을 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라는 말이 새삼 실감납니다. 물론 예전의 자생지는 당시의 지적과 우려대로 상당수 파괴되고 사라져, 지금 우리가 보고 만나는 단양쑥부쟁이는 대체지에 옮겨 심거나, 증식한 씨를 인위적으로 뿌려서 키워낸 것들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전, 복원된 단양쑥부쟁이가 몇 년간의 ‘이사 몸살’을 이겨내고 다시 야생의 활력을 되찾고 있는 것이니 반가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특산 식물로서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단양쑥부쟁이. 충북 단양에서 처음 발견돼 ‘단양쑥부쟁이’란 이름을 얻었으나, 1980년대 충주댐이 건설될 때 단양과 충주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그곳의 자생지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2005년 남한강 여주 일대에서 자생지 몇 곳이 발견돼 큰 환영을 받았는데, 4대강 사업으로 최대 자생지가 또다시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됐다고 야단법석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래와 자갈이 적당히 섞인 강변에서 자라는 두해살이풀로 첫해는 줄기가 15cm까지 크고, 이듬해 꽃대가 계속 자라 높이 30~50cm까지 이릅니다. 키나 꽃은 다른 쑥부쟁이에 비해 큰 차이가 없지만, 잎은 한탄강 바위틈에서 자라는 포천구절초나 높은 산 바위 절벽에서 자라는 가는잎향유 등과 마찬가지로 솔잎처럼 가늘어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9월에서 10월까지 지름 4cm 크기의 머리 모양 꽃이 꽃대마다 여러 개씩 달립니다.
Where is it?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한국(경기도 여주시, 충청북도 단양군과 제천시)에 분포한다고 돼 있다. 즉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데, 여주는 물론 단양과 제천에서도 자란다는 뜻이다. 일본인 우치야마가 1902년 수안보에서 처음 발견해 채집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안보, 단양, 제천에서 단양쑥부쟁이의 자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남한강이 흐르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일대가 단양쑥부쟁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생육지다. 강천섬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연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을 가진 단양쑥부쟁이가 가을 인사를 한다.
사려니 숲길은 알겠는데, ‘고살리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제주 숲길이다. 왕복 2시간, 아주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2.1km 숲길이다.
서귀포 선덕사 맞은편 다리 옆으로 30m만 들어가면 숲길 입구다. 고살리 숲길의 고살리에 리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마을 이름으로 짐작, 검색했으나 나오지를 않는다. 고살리는 사시사철 샘물이 솟는 하천가 벼랑을 부르는 말이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단다. 이 지역에 고사리가 많이 자라서 고살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숲길은 짧지만 사철 푸른 나무가 울창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무섭게 흐르는 효돈천을 끼고 있다. 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 재재거리는 새소리가 들린다. 다공질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땅은 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 때문에 비가 올 때만 하천에 물이 흐르고 맑은 날에는 바닥이 바싹 말라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을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계곡으로 들어갈 마음을 먹는다.
입구 쪽은 아래가 낭떠러지고 하천은 빽빽한 나무 그늘에 갇혀있어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내려갈 수 있는 적당한 곳이 나올 때까지 숲길을 걷는다.
두 사람이 옆으로 걷기에 적당한 정도의 좁은 폭의 길이다. 생김새가 다른 이파리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무늬를 그린다. 숲 그늘 아래 나뭇잎 사이로 비쳐든 빛을 받은 제주무엽란이 피어있다. 무엽란이니 당연히 잎이 없다. 뿌리 박테리아 등으로 유기물을 분해하기 때문에 잎이 필요 없다. 지난해의 흔적인 씨방이 올해 핀 꽃보다 미학적이다. 빛이 비쳐드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큰 나무 둥치에 자리 잡은 호자덩굴 꽃도 보인다. 나무가 울창하니 비쳐든 햇살이 귀하다.
천천히 걷다보면 드디어 계곡으로 들어갈 만한 곳이 나온다. 쉽게 갈 수 있겠다 싶은데 다가가 보면 툭 떨어지는 벼랑이다. 물길과 불길 흔적을 좆아 하천 위쪽을 한참을 바라본다. 세월의 유구함이 여장을 풀고 쉬고 있다.
숲은 습기를 품고 있어 공기 입자가 치밀하게 느껴진다. 수피를 덮은 콩짜개덩굴과 사철 푸르른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등 늘푸른나무의 이파리에 녹음이 들고 있다. 숲길은 좁아졌다 넓어졌다 리듬을 타고 하늘은 파란색이 어쩌다가 보일 정도다. 숲길을 걷기가 지루하다 싶으면 만만하다 싶은 계곡에 내려가 널찍한 바위 암반에 앉아 쉴 수 있다. 조용한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용천수가 솟고 있나보다.
쉬엄 쉬엄 숲길을 걸었다. 여름 숲 바닥에서 자라는 꽃과 눈 맞춤 하고 찬란한 여름을 뿜어내는 초록 이파리로 눈을 정화했다. 되돌아 나오는 길이 짧게 느껴진다.
뜨거운 여름날 걷기 좋은 이 숲길, 떠나기 싫다.
따사로운 봄날, 일본에서 활짝 피는 건 벚꽃만이 아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한창일 무렵, 1년에 단 70일 동안만 열리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이곳은 일본을 수차례 다녀본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꼭꼭 숨겨진 비경 중의 비경이다. 거대한 대자연을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없거나 장시간의 비행이 부담스럽다면 자연과 전통, 휴식과 탐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로 떠나보자. 여행은 어느 시기에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양지차이지만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꽃들이 피어나는 4~5월에 기적의 설벽을 만날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한 여행지다. 한적한 로컬 기차여행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도 있으니 이만큼 다 갖춘 곳도 드물 듯하다.
가까운 일본에서 만나는 동양의 알프스
메이지 시대, 영국인들이 일본에서 산행을 하다 그 풍경이 유럽의 알프스와 닮아 ‘일본의 알프스’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도야마와 나가노를 잇는 90km의 산악관광도로다. 굳이 이 길에 ‘루트(route)’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전체 구간이 트롤리버스, 케이블카, 로프웨이, 도보로 이동하며 즐길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힘들이지 않고도 다테야마(立山) 산의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시니어들을 위한 여행지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장엄한 산세와 협곡은 물론 도롯코 열차여행과 온천까지 즐길 수 있는 이곳은 닿는 순간 유럽의 알프스 못지않은 풍경이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왜 지금껏 몰랐을까 무릎을 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일본의 3대 영산으로 불리는 다테야마
나고야 북쪽에 위치한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도야마 공항과 가까운 다테야마 역 또는 나고야 공항과 가까운 오기사와 역을 선택할 수 있다. 소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야마 여행을 추천한다. 도야마 역에서 지테스 본선이라는 지방열차를 타고 50여 분을 달리면 다테야마 역에 도착한다.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와 구로베 협곡을 보려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하루를 움직여야 한다. 정상에서 보는 다테야마 산도 아름답지만 눈 계곡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과정도 더없이 경이롭다. 우나즈키 온천마을에서 따사로운 봄을 한껏 즐기다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번갈아 타고 산 정상에 오르니 봄이 한창인데도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보이고, 설산을 깎아 길을 낸 최고 22m에 이르는 기적의 눈 계곡이 나타난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해발고도 1500m에 위치한 구로베 댐은 일본 최고 높이에 위치한 댐으로 연간 무려 10억 kW의 발전량을 내는 수력발전소를 갖고 있다. 오른편으로 가로질러 걸어가며 바라보는 호수의 물빛은 캐나다의 레이크루이스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다.
5월에 만나는 무로도 설벽
기차와 케이블카, 고원버스를 번갈아 타고 무려 3시간여 만에 무로도(室堂) 설벽 앞에 섰다. 해발 3000m 고지에 있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의 상징인 무로도 설벽 사이를 걸어서 지나노라니 자연도 위대하지만 자연보다 더 경이로운 존재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모세의 기적은 바다뿐 아니라 산에도 있었다.
일본의 옛 정취 가득한 ‘도야마 근교’
도야마 근교에는 구로베 협곡 외에도 한적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일본 전통가옥을 감상하며 조용한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이와세 마을은 고즈넉한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하게 되는 곳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 바다를 오가던 배들이 머무르던 이 항구 마을은 과거에는 큰 번영을 누렸던 곳으로 여전히 옛 정취가 물씬하다. 강가를 등지고 점포들이 가득 들어서 있던 곳엔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풍경을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도야마 항구 전망대와 운하 사이의 골목골목을 느리게 걷다 보면 진짜 일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해안열차 타고 가는 천연 온천마을 ‘히미’
구로베 협곡도 봤고 근교 마을도 다녀왔으니 마지막 날엔 달팽이처럼 느린 로컬 기차를 타고 바닷가 마을 히미(氷見)에 가보기로 했다. 시내를 벗어나니 나지막한 집들과 드넓은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과 초록 빛깔 논의 조화, 모내기 철의 물이 꽉 찬 논에 비친 다테야마 설산의 풍경에 시력마저 좋아지는 듯하다. 히미에 도착하자마자 바닷가로 달려갔다. 산도 좋지만 내겐 역시 바다였다. 햇살 가득한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때리기에 빠져본다. 꼼꼼한 손길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햇살 아래에서 뛰어노는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하다. 슬슬 시장기가 와서 어시장 히미반야가이로 갔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수산물과 우동, 소고기 등 히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맛본후 천천히 걸어 마을 끝자락에 있다는 천연온천장으로 갔다. 족욕만 하는 곳도 있고 동네 목욕탕 같은 온천도 있다.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던 사람인 양 온천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 엉킨 실타래 같았던 몸과 마음이 풀리면서 나른함이 몰려왔다. 다시 도야마로 돌아가는 길. 히미의 바다 너머로 우뚝 솟은 다테야마 설봉은 한적함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